교계   |   선한 사마리아인을 흉내내는 자들
입력시각 : 2016-08-19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선을 행하는 일에 이 비유를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일이다.
사람들은 선악을 분별할 줄 모르면서도 “선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악하다”와 대조되는 이 말은 사실상 호불호(好不好)의 관계를 떠나서,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자기 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쉽게 말해, “선한 사람은 심판에서 면제되어야 한다.”는 식의 종교적 논리를 갖는 언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선함을 종교적으로 보기 좋아하는 자들은 그들의 “자칭” 선함을 생의 고통과 재난의 현장을 통해서 부각시키려는 성향이 있다. 옷으로 치장한 외모와, 정중한 말과 그럴듯한 언변, 모나지 않은 성품 같은 정적(靜的)인 요소로는 자기 의를 객관적으로 충분히 제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반면 수재(水災)나 지진 같은 재난의 때에 금전을 기부하거나 현장에 찾아가서 땀 흘려 봉사하는 동적(動的)인 요소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행위의 의”를 내세우며 자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선한 이웃”이 되었고 그렇게 살았다는 생각에 생의 자랑과 만족을 누리는 것인데, 성경은 이러한 “생의 자랑”을 가리켜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며(요일 2:16), 그러한 “만족”을 가리켜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고 육신적으로 만족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고후 3:5). 그들의 선함은 “세상”과 “육신”에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 결코 선하지 않은 “마귀”적인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선함에 대해 해줄 수 있는 말은 다음과 같은 말씀뿐이다. 『그들 가운데 가장 선한 자도 찔레나무 같고 가장 정직한 자도 가시울타리보다 더 날카롭도다』(미 7:4). 이유인즉, 『율법을 듣는 데서 귀를 돌이키는 자는 그의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고(잠 28:9) 『악인의 쟁기질은 죄』가 되는 법이니(잠 21:4), 그러한 말씀만이 그들의 자칭 선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더러운 걸레와 같은 자기 의”를(사 64:6) 자랑하는 죄인들은 소위 “교회”라는 곳들에서도 넘치고 있는데, 그들은 유독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자신들의 행위 모토로 삼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는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인데, “성경”(Holy Bible)이라는 책은 그 이름만으로도 권위가 느껴지므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에 더없이 좋은 근거가 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내가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리이까?』(눅 10:25)라고 여쭌 것이 발단이 된 비유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26절)라고 물으셨는데, 율법사는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27절)라고 답변했다. 그런데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았다. 율법을 안다 하는 사람답게 바른 구절로 주님께 답변한 것인데, 주님께서도 『네가 옳게 대답하였도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28절)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율법사는 율법의 말씀에서 골라낸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 위선자였다. 이에 뜨끔해진 그는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고 싶어서』 주님께 『그런데 누가 나의 이웃이니이까?』라고 반문했다(29절). 스스로가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에, 그 말씀의 정죄에서 벗어나려고 둘째 계명의 “이웃”에 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기 정당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 나의 하나님이니이까?”라고 묻기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서 위신이 서질 않고, 그래서 보다 아랫단계인 “이웃”에 초점을 맞춰 주님을 역공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허점”을 찾아내어 논쟁을 벌임으로써 진리를 희석시키고 인간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판에 박힌 수작이었다. 율법에서 흠을 찾아내어 율법보다 더 의로워지려는 것이 당시 율법사들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바로 이때 주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배교한 기독교계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사회봉사와 국내외 선교 등에 온 힘과 열정을 쏟아왔다,” “온갖 악재 속에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대의와 사명을 지키고 있다”는 식으로 즐겨 인용하는 비유이다. 주님께서는 배교한 교회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자처하며 진리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비유 속에서 행해진 “선행”이 그 죄인들의 종교적 욕구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비유의 본질과 핵심을 알고서 21세기의 “선한 사마리아인들”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복음과 무관한 종교적 선행을 하라고 그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성경이 기록된 첫째 목적인 『교리』(딤후 3:16)를 담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주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히고 반쯤 죽은 채로 버려 두고 갔느니라』(눅 10:30). 예루살렘에서 여리코로 내려간 어떤 사람은 유대인인데, 이것은 비유이므로 “예루살렘”과 “여리코”에 빗대어 설명하시고자 한 바가 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읍이고(느 11:1) 여리코는 “저주받은” 성읍이다(수 6:26). 이 유대인은 “거룩함에서 저주의 상태로 떨어진” 타락한 인간을 나타내는데, 그가 여리코로 “내려간” 것은 인간이 죄와 멸망으로 “내려간”(타락한) 것을 뜻한다.



그가 내려가다가 만난 『강도들』(thieves)은 요한복음 10:10, 즉 『도둑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오지만...』의 “도둑(thief)”과 연결되며, 곧 “마귀”를 그리고 있다. 마귀는 죄인을 지옥에 가게 하려고 죄인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가고(막 4:15), 죄인에게는 그 어떤 선함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롬 3:10-18). 오직 자기 의의 더러운 누더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사 64:6).



강도들을 만나 『반쯤 죽은 채로 버려』진(30절) 유대인은 영이 죽고(엡 2:1) 혼이 살아 있는(창 2:7) 죄인, 즉 문자 그대로 『반쯤 죽은』 죄인의 상태를 보여 준다. 영이 죽어 있는 죄인은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반쯤 죽은 채로 길바닥에 버려진 유대인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잃어버린 죄인”을 보여 준다.



그런 그에게 세 인물이 나타나는데, 첫째 인물은 『제사장』(priest)이다(31절). 그는 우연히 그 길을 가다가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보았으나 다른 편으로 지나가 버린다. 이 제사장은 카톨릭 사제(priest)를 보여 주는데, 제사장이 길에 쓰러진 유대인을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갔듯이, 카톨릭의 사제들 또한 이 세상에서 죄인들의 구원에 가장 관심이 없는 무리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혼들』을 『상품』으로 취급하여 돈을 벌어들일 뿐이다(계 18:12,13).



그 뒤에 등장한 『레위인』은 “종교지도자”를 대표한다(32절). 상처 입은 사내에게 다가가 관심을 보이지만 역시나 다른 편으로 지나가 버린다. 카톨릭 사제들보다는 적극적이나, 역시나 죄인을 가까이 가서 보고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는 헛된 종교주의자를 보여 준다.



그러나 『여행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와서 그를 보고 가엾게 여겨, 그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매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그를 돌보아 준다(33,34절). 이 사마리아인은 요한복음 8:48에서 『사마리아인』이라고 모독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주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죄인들이 가여워(마 9:36) 그들에게 친히 찾아오신(빌 2:5-8) 구주이시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의 상처를 싸매 주기 위해 부은 『기름과 포도주』는 십자가 이후에 강림하신 성령님을 예표한다(눅 4:18, 히 1:9, 행 2:13, 엡 5:18).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 유대인을 “죄인”을 상징하는 짐승(나귀, 욥 11:12)에 태워 데려간 『여관』은 “교회”를 예표한다. 따라서 나귀는 교회에 들어온 회심한 죄인을 상징하며, 이 새로운 회심자는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교회에 가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건전한 교리의 설교를 듣고 또 성경을 배워야 하며, 그를 옛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줄 바른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다음 날... 떠나면서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얼마가 더 든다 해도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으리라.』(35절)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며(고후 9:8-10), 교회가 휴거될 때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고전 3:11-14, 고후 5:10).



주님은 이 비유를 마치고서 물으셨다. 『너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들을 만난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그러자 율법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니이다.』라고 답변했다. 이에 주님은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37절).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내리신 결론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이라며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원수 같은 유대인에게 자비를 보여 유대인의 이웃이 될 수 있다면, 소위 율법을 안다 하는 유대인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심지어 “박해하고 미워하는 원수들”을 위해서까지 사랑하고 기도하라 하셨다. 『그러나 나는 듣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천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이 명령은 사도 바울에 의해 신약에서도 반복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세상 죄인들을 물질로 돕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박해하는 자”에게 악으로 갚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지옥불”로 갚아 주신다는 신약적 원칙을 천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만일 그가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 이렇게 함으로써 네가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을 것이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초림 당시 율법 하의 유대인 율법사에게 그가 행하면 살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지만(눅 10:28), 십자가 이후의 교회에게는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 그 안에 담긴 “교리”를 보여 준다. “죄인을 구원하여 교회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일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졌으므로(고후 5:18) 그리스도인의 최우선 목표는 “복음 전파”여야 한다. 복음 없는 물질적 도움으로 성경적인 선을 행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어떻게 역설하셨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국세를 낼 자에게 국세를 내라(롬 13:7). 그러면 정부가 그 돈으로 없는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성경적이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세상을 하나님께 바친 헌금으로 돕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담긴 “죄인의 구원”을 잊지 말라. 구원 없는 교육이 저주이듯, 구원 없는 봉사 역시 저주이다. 성도들에게 성경을 정확히 가르쳐서 바른 믿음과 바른 실행을 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2016년 08월 19일
한승용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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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김창희
16-08-27 01:39  
구원없는 교육은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하며 다만  많은 공부로 인해서 몸만  피곤게 할뿐입니다

구원없는 봉사는 결국 "나는 너가 누군지 모른다"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봉사하면 그것으로 세상이 변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논리를 펴는  사회복음주의 에서는 복음전파를 거의 테러로 취급합니다
▼   창조 질서 회복,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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