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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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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피터 S.럭크만 저    /  편집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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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5일 초판2쇄 출간| 153*223*20mm 신국판 반양장 사철제본, 무게 550g | 368 쪽 | ISBN : 978898879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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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적절한 교리와 교훈이 가득찬 이 책들은 신약 성경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별히 베드로는 변형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부인했었으나, 바닷가에서 다시 만난 주님으로부터 다시 부름받음으로써, 그때 받은 목양의 사명이 그의 글에 여실히 묻어 나 있다. 따라서 베드로 전서에서 목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모든 사역자들에게 귀한 지침이 될 뿐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목자들의 귀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모든 교리와 교훈들이, 때로는 환란과 재림을 다룸에 있어서 다소 난해하다고 여겨졌던 교리들이 이 주석서에서 피터 럭크만 박사의 명석한 해석으로 명확하게 풀리고 있다. 또한 본서는 피터 럭크만 박사의 강의 테잎을 직접 옮긴 것이기 때문에 그 말투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강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독자들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이며 초대 교회의 기둥이었던 베드로 사도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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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럭크만 박사(Dr. Peter S. Ruckman)

피터 럭크만 박사는 현재 미국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에 있는 성경침례교회(Bible Baptist Church)의 목사이며, 펜사콜라 성경 신학원(Pensacola Bible Institute)의 설립자이자 원장으로서 40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럭크만 박사는 밥 존스 대학교(Bob Jones University)에서 Ph.D.를 받았지만, 그 학교의 신학 노선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저자는 존 칼빈 이래로 500여명 이상의 유명하다는 성경 주석가들이 주석서에 범해 놓은 주요 오류들을 일일이 지적하여 바로잡았으며, 창세기, 출애굽기, 욥기, 시편, 잠언, 소선지서,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의 주석서를 저술함으로써 올바른 성경 진리를 밝히고 있다.
또한 럭크만 박사는 <킹제임스성경>이 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권위 있게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는 독보적인 학자이다.
특히 그의 저서 <필사본 증거>, <알렉산드리아의 이단들>, <신약 교회사>,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등에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는 주석서와 성경 교리에 관한 150여 권이 넘는 책의 저자이며, 세계 전역에 있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존경받는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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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이 책을 내면서 / 5


베드로전서


들어가는 말 / 9


베드로전서  1장 / 11
베드로전서  2장 / 56
베드로전서  3장 / 106
베드로전서  4장 / 158
베드로전서  5장 / 194


베드로후서


들어가는 말 / 211


베드로후서 1장 / 215
베드로후서 2장 / 266
베드로후서 3장 /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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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서문


베드로전서는 전체 5장 105절로 되어 있고,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경우 전체 2,482개의 단어로 기술되었다. 시몬 베드로에 의해 기록된 이 서신서는 대략 A.D. 60년경으로 그 기록 연대를 잡는 게 보통인데, C. I. 스코필드 역시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이 만약 벌링거 파(派) 사람이거나, 혹은 오헤어나 스탬 같은 사람들의 추종자라면, 당신은 필경 베드로전서가 야고보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에게 보낸 서신서라고 배웠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배웠다면 당신은 아주 잘못 배운 것이고 그들은 당신에게 아주 잘못 가르친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3:21을 읽으면서 “물침례 구원”을 정당화하는 구절로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을 조금만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베드로전서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서신서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금만 올바른 관점을 갖고 성경을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베드로전서 3:21이 “물침례” 구원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오헤어든, 스탬이든, 베이커든, 아무튼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필경 베드로전서 3:21을 물침례 구원설을 정당화시키는 근거 구절로 받아들일 뿐더러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베드로전서가 유대인에게 보낸 편지라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일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 어처구니없이 잘못된 생각 때문에 조만간 아주 골치 아픈 문제에 부딪치게 될 텐데, 당신이 정신나간 사람들을 추종하고 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스스로 자초하게 된 그 골칫거리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1절에서부터 당신을 곤경에 빠뜨린다.


자, 그럼 이제 그 1절부터 읽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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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폰토, 갈라디아, 캅파도키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
      져 있는 타국인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통하여, 순종함과 예수 그리
     스도의 피뿌림으로 택함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충만할지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폰토, 갈라디아, 캅파도키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타국인들』(1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시몬 베드로는 지금 이 편지를 누구에게 써 보낸다고 말하고 있는가? 어디어디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라고 과연 밝히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베드로는 지금 어디어디에 흩어져 있는 “타국인들에게”(to the strangers)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야고보서 1:1은 뭐라고 돼 있는가?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라고 언급하고 있다. “열두 지파”라면 누구를 말하는가? “열두 지파”라면 성경에서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여기 베드로전서 1:1은 “유대인”도 아니고 “열두 지파”도 아닌 『타국인들』에게라고 명백하게 적고 있다.


그렇다면 “타국인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타국인들”(strangers)이라는 단어는 구약 중에서도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부터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인들”을 일컬을 때 성경이 사용하는 단어다. 지금은 “외국인들” 또는 “타국인들”을 영어로 표기할 때 보통 “foreigners”라는 단어를 쓴다. 가끔 “aliens”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지만, 이것은 요즘에 와서 “외계인들”이라는 의미로 자주 쓰이기 때문에 지구상의 외국인들에게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잘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외국인들을 유대인의 입장에서 “타국인들”이라고 말하고, 영어로는“strangers”라고 쓴다. 원래 “낯선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는 『타국인들』 외에도 “나그네들,” 또는 “여행자들”이라는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타국인들』이 교리적으로는 유대인 사회에 들어와 사는 비유대인들, 유대인과 함께 살기는 하되 유대인들이 아닌 사람들, 곧 유대인들과 섞여 사는 이방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유대인들도 남의 나라에 살면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타국인들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러 가지 율법들을 주시면서 유대인들이 자기네들 속에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타국인을 학대하거나 압제하지 말라. 이는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타국인들이었음이라』(출 22:21). 이집트인들의 입장에서는 이집트 땅에 살던 유대인들이 “외국인들,” 곧 『타국인들』이었다. 그 반면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이집트인들이 『타국인들』이요, 이방인들이었다.


그런즉, 유대인인 베드로가 여기 1절에서 『폰토, 갈라디아, 캅파도키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타국인들』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이들 각 지방에 흩어져 사는 그 지방 사람들, 즉 폰토에 사는 타국인들과 갈라디아에 사는 타국인들, 캅파도키아에 사는 타국인들과 아시아에 사는 타국인들, 그리고 비두니아에 사는 타국인들을 일컫는 게 분명하다. 이들은 비유대인들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볼 때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다 타국인일 수밖에 없다. 교리적으로 성경에서 “타국인”이라는 말은 곧 “비유대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경에서 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일컬어 “타국인들”이라고 부르는 예는 없다.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들어가 살고 있던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타국인들”이었다고 표현하는 예는 있지만,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동족을 보고 “타국인들”이라고 부르는 예는 없다는 얘기다. 내가 당신에게 그 예를 한 군데 보여 주겠는데, 이런 예라면 뭐니뭐니해도 사도행전 2장만한 데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에는 때마침 오순절을 맞아 당시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행 2:5). 이들은 분명히 유대인들이기는 유대인들이었지만, 파대, 메데,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캅파도키아, 폰토, 아시아, 프루기아, 팜필리아, 이집트, 쿠레네에서 가까운 리비아의 여러 지방, 그리고 또 크레테와 아라비아 등, 팔레스타인이 아닌 타국 땅에서 출생했거나 거기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다(행 2:8-11). 이들이 명절을 고국에서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잠시 귀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보고 “타국인들”이라 부르고 있지는 않다. 한편, 여기에 또 유대인이 아닌 로마에서 온 『여행자』들, 즉 로마인들이 또 그들 가운데 섞여 있었는데, 이 『여행자』들 역시 “타국인들”(strangers)이라는 말이다(행 2:10). 그래서 사도행전 2:10의 『로마에서 온 여행자』란 곧 “로마에서 온 타국인들”이란 뜻인데, 이들을 두고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라고 같은 절 안에서 정의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 즉 위에서 열거한 대로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과 로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타국인들”이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운집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라 지칭하고, 외국에 살고 있으되 유대인 사회에 합류해 유대교로 개종하여 유대인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타국인들”이라고 따로 구별해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다시 베드로전서 1:1로 돌아오자.


베드로전서는 이처럼 유대인이 아닌 『타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신서인 것이다. 물론 이 책에도 유대인들을 지시하는 구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책은 서신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길 만큼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언급들이 꽤 많이 나오는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좀 약하기는 하지만 1:5이 그것이고, 1:10 역시 좀 약하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을 지시하고 있으며, 1:18에서는 이것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고 있고, 좀 모호하기는 하지만 1:7도 그러하며, 2:12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고, 4:3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양쪽에 다 걸치지만 어쨌든 부분적이나마 유대인도 지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들 구절들은 주로 구원받고 거듭난 유대인들과 관련되는 구절들로 보아 무방한데, 바울이 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데 반하여 베드로는 야고보나 요한처럼 “주로”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오로지 유대인들만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 반면에 베드로전서 중에서 주로 이방인들을 지시하고 있는 구절들을 예로 들자면, 좀 약하기는 하지만 1:9이 있고, 1:23도 좀 약하기는 하지만 최소한 대환란과 무관한 것만은 확실하며, 1:20도 꽤 약하지만 이방인들을 지시하고 있고, 구원받은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에 속한다는 점에서 2:9은 아주 강하게 이방인들을 지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좀 모호하지만 2:11도 그러하고, 4:3은 아주 강하게 그것이 드러난다.


어떤 서신서든 간에 그 대상으로 유대인이 주가 되고 이방인들이 부수적일 경우 그 서신서의 수신자는 유대인이라고 보아 무방하고 그 반대일 경우에는 이방인들이 그 수신자라고 보아야 무리가 없으며, 그 비중이 비슷하면 양쪽이 모두 수신자들이라고 간주할 수 있거니와, 신약 서신서들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구원을 유달리 강력하게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일이 완성되었음을 역설하며,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 거할 것을 강조하는 서신서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비유대인들, 즉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4:16에서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고 있는 베드로의 언급이야말로 아주 강력하게 이것을 나타내고 있는 예에 속한다.


편지는 써 보낸 사람이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기 시작한 베드로전서는 써 보낸 사람이 물론 시몬 베드로이고 그 수신자가 『폰토, 갈라디아, 캅파도키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타국인들』(1절)로 돼 있는 서신서이다. 이들은 『타국인들』, 즉 이방인들이었으되, 유대인 사회에 들어와 유대교로 개종하여 유대인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게 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통하여,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택함받음 자들』(2절), 즉 구원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곧 “교회”로 그 소속을 옮긴 사람들이다. 이들은 원래부터 유대인이 아니었고, 여기서 비록 『타국인들』이라고 지칭되고는 있으되, 이제는 더 이상 이방인들이 아닌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바울의 경우, “타국인들”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베드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서신서의 서두에서 『타국인들』이라고 지칭된 사람들은 “구원받는 이방인들”을 편리상 그렇게 부른 것뿐이었음을 문맥의 흐름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베드로도 뒤에 가서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볼 때 육신적으로는 여전히 『타국인들』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미 『타국인들』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성경에서 『타국인들』이란 기본적으로는 “낯선 사람들”(“strangers”)이라는 뜻이다. 유대인이 볼 때 “낯선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낯선 사람들,” 즉 이방인들인 것이다. 물론 <킹제임스성경>에서는 간혹 순례자처럼 나그네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도 “strangers”라는 단어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 “strangers”는 “타국인들”이라기보다 “나그네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국 땅에 흩어져 있기에 “나그네들”이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순례자적 삶을 살아간다는 뜻에서도 “나그네들”인 것이다. “타국인들”이라는 말은 “유대인들”과 대조되는 말인데 반하여 “나그네들”이란 영원한 안식의 땅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고 있는 순례자적 인생 행로를 부각하는 일종의 서술어이다.


아무튼 베드로전서를 둘러싸고 가장 많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학자들 사이에 가장 크게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것은 이 서신서의 수신자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냐, 아니면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냐 하는 점인데, 양측이 다같이 1:1의 『타국인들』(“strangers”)이라는 용어를 누구로 해석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이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 『타국인들』이 유대인 사회에 들어와 유대인들과 한 공동체를 이룬 가운데 그들과 서로 가깝게 지내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신 길을 따라 유대인들과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베드로전서의 수신자에 대해 주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 책의 군데군데에서 이 『타국인들』이 거듭난 유대인들의 현재 상황을 언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짙게 풍기는 구절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예컨대, 1:5이라든가, 1:10, 2:12, 4:3 같은 구절들에서는 『타국인들』이 어쩌면 나그네들처럼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거듭난 히브리인들을 지칭하는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내가 인정하였듯이 베드로전서나 베드로후서가 실제로 유대인들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을 상당히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책이 “주로” 유대인들에게 쓴 서신서들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런 대로 그 주장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하지만 벌링거 일파와 스템 일파가 주장하듯 이 서신서들이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보낸 편지라고 극단으로 국한시키려 한다면 나는 절대로 승복할 수가 없다. 그들이 이 서신서를 유독 유대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하려고 고집부리는 태도는 베드로전서 3:21을 물침례를 정당화시키는 근거 구절이라는 자신들의 견해를 끝까지 합리화시키려는 고집스러운 태도나 하나도 다름이 없을 뿐더러 또 이것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태도와 의도를 나로서는 절대로 수용할 수가 없다.


벌링거와 스템, 오헤어, 레인저 및 그 추종자들이 갖고 있는 이 이상야릇한 생각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할례자들을 향한 복음”이 베드로에게 위임되었고, “무할례자들을 향한 복음”은 바울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바울 서신서들을 통하여 바울이 무할례자들에게 전파한 복음은 베드로전․후서를 통하여 베드로가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파한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으로까지 사실상 확대되었다. 물론 이런 주장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는 것은 아주 쉽게 판명된다. 시몬 베드로가 이 서신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새로운 출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2:2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산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지어지고』(2:5) 있는 사람들로 서술하고 있는 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다. 베드로의 이러한 서술들은 바울 서신서인 에베소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이 서술하고 있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엡 2:20-22).


베드로는 또 여기 베드로전서 1장에서 이들에게 전해져야 될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있으며, 1:19을 보면 또 그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구속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베드로가 할례 받은 자들(유대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주장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주장이다. 그들이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놓게 된 것은 베드로가 이 서신서를 쓰면서 바울 서신서들 같은 다른 성경책들을 기반으로 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이 명료한 사실조차 부주의하게 묵과해 버린 데 기인한 것으로서, 알고 보면 그 이유가 아주 간단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다. 이를테면, 베드로후서 3:15,16을 보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생각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그렇게 썼고 그의 모든 편지에서도 이런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는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 무식한 자들과 견고하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들처럼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이 구절만 보아도 베드로는 『모든 편지』들을 익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편지』들을 통하여 바울이 전파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들을 이해하고 또 그 복음에 동조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또 사역자들에 의해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도 전해졌음을 재확인하는 언급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1:12에서도 『성령으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이제 전해졌으며』라고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한때 그가 할례 받은 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또 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울 역시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음을 명백하게 천명하고 있는데, 자기가 전하고 있는 이 복음이 바울이 『모든 편지』를 통하여 『너희에게 그렇게 썼고』라고 언급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히브리서는 바울이 거듭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주 대상으로 한 대표적인 서신서이다.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히브리서는 대환란 기간 동안에 구원받게 될 유대인들을 주 대상으로 한 바울의 서신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베드로전․후서가 주로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였다고 설사 못박는다 할지라도 이 서신서들이 유독 구원받은 유대인들만 제한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보는 것이 한결 안전하고 적절한 관점이다. 이 서신서들이 설사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주로 상대하고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베드로는 이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그들만을 제한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strangers”라는 단어의 용례를 제대로 된 성구사전을 통해 면밀히 연구하면서 이 단어가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경우와 비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경우를 대비해 볼 때, 후자의 경우가 결정적으로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당시의 유대인 대제사장 카야파를 보라. 그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지칭하고자 했을 때 “strangers,” 즉 “나그네들”이나 “타국인들”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멀리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the children of God that were scattered abroad”)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요 11:52). 신․구약을 통틀어 성경에서 “strangers”라고 말할 때, 열 번 중 아홉 번은 “이스라엘에게 낯선 자들”을 의미한다. 바울 자신도 이 단어를 정확히 이런 뜻으로 사용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의 처지에 있었을 때 이를 두고 “strangers”라고 말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에 속하지 않는 타국인이요, 약속의 언약들로부터는 생소한 사람이었으며...』(엡 2: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통하여,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택함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충만할지어다』(2절).


이 구절을 읽으면서 눈이 번쩍 뜨일 사람들이 누구인지 나는 뻔히 알고 있다. 그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신이 버쩍 드는 까닭은 『택함받은 자들』이라는 말 때문이다. 그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벌써부터 어찌나 흥분이 되던지 다른 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다만 『택함받은 자들』이라는 말만 잔뜩 붙잡고 늘어진 채 넋을 잃고 있다.


『택함받은 자들』, 이 구절은 이들이 “영원 전부터 택함받은 자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그야 물론 아니다. 그럼 무어라고 말씀하는가? 『택함받은 자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라고 이 구절은 설명하는가?


『택함받은 자들』은 첫째,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이 구절은 밝힌다. 구원받는 순간 성령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한 부분이 되심으로써 당신에게는 『성령의 거룩케 하심』이 일어나게 된다. 이 구절은 지금 이것을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당신은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구원 따로 있고 『성령의 거룩케 하심』이 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이것은 함께 일어나는 일이요, 함께 있는 일이다.


『택함받은 자들』은 둘째,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관련되는 사람들이라고 이 구절은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기 전에는 『택함』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뿌려 놓지 않으셨다면, 당신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한들 그것만으로 당신에게 『택함』이 일어났겠는가?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피를 뿌려 놓으셨다 한들, 당신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당신에게 『택함』이 일어났겠는가? 당신이 『택함받은 자들』의 대열에 끼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뿌려놓으셨고, 둘째는 당신이 복음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당신이 복음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었을 때 비로소 당신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던 것이다.


『택함』 받는 데에는 또 중요한 조건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 이것이 그 조건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택함받음”을 내세우는 칼빈주의 사상은 이단이다. 칼빈주의의 “절대적인 예정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단이다. 왜냐하면 “예정”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foreknowledge)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8:29을 또 보라.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이 『미리 아심』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예정』이란 애초부터 성립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칼빈주의의 “무조건적인 택함받음”이 이단인 까닭도 여기 베드로전서 1:2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택함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라는 조건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살했던 데서 나온 이단적 발상이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함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보라, 『택함받은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이라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음이 명료하게 진술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라는 전제에 근거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아시고 나서 그 사람을 택하신다는 얘기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택함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아시고 나서야 『성령의 거룩하심을 통하여』 당신을 택하신 것이다. 당신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부터 택함을 받아 둔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당신이 『택함받은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성령의 거룩하심을 통하여』 된 것이지 칼빈의 예정설에 의해 된 것이 아니다.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믿음과 신뢰를 순종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려놓으신 피가 당신에게 즉각 유효하게 적용되어 당신은 『택함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은혜와 평강』이 주어졌은즉, 베드로는 그러한 당신에게 그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는 당신을 세상으로부터 떼어내어 『택함받은 자』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피가 당신에게 적용되도록 하신다. 이 모두가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당신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적용될 피를 갈보리에서 미리 흘려놓으셨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순종하고서도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택함받은 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구약 시대에도 숱한 사람들이 순종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지는 못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시대에는 아직 피를 흘려놓으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존 칼빈이 주창했던 칼빈 신학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누구나 다 이렇게 끊일 줄 모르는 오류 속에서 끊임없이 완벽한 혼돈의 덫에 갇혀 허우적거리게 된다(pp.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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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평가점수
1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좋은 성경입니다!! 권은향 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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