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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기록된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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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7월호>
성경은 기록된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다? 뭔가 어색하고 말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을 듣고 동의할 사람이 없을 것같다. 성경은 당연히 기록된 대로 읽고 또 그렇게 믿어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동의되고 있는 말이다. 즉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하면서도, 사실은 성경을 읽을 때 기록된 그대로 읽지 않고 자기의 편견에 따라 교단의 교리에 따라 읽고 믿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첫째, 성경 말씀을 믿을 수 없는 인간의 불신 때문이고, 둘째,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좀 쉽게 예를 들어보자. 마태복음 14:25-32에는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에 당연히 ‘아멘’ 하겠지만, 이단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은 절대로 ‘아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말씀을 읽기는 읽어도, 어떤 영적 의미로만 생각하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창세기 1:1의『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어떠한가?
그러나 이런 예들을 말하면, 극도의 자유주의자들이나 성경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하나님의 창조나 이적들을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노아의 홍수”를 예로 들어 보자. 신학자들에게 노아의 홍수가 지엽적인 홍수인지 전세계적인 홍수인지를 물어보라.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노아의 홍수를 전세계적인 홍수라고 말할 것같은가? 그래도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이 정도는 많이들 믿고 있는 것같다.
그러면 이번에는 출애굽기 14장에 나오는 “홍해의 기적”을 예로 들어보자. 출애굽기 14:21,22은 분명히『... 바다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니, 물이 갈라졌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한가운데를 통과하여 마른 땅 위로 갔는데 물이 그들에게 오른쪽과 왼쪽에서 벽이 되었더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나라 진도 앞바다가 갈라지는 현상도 보았거니와, 홍해가 갈라진 것도 이같은 자연현상이라고 보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홍해 위쪽에 있는 습지, 갈대가 많은 지역을 무릎을 걷어 올리고 걸어갔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출애굽 여정을 다룬 지도들을 확인해 보라. 대부분의 지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위쪽 습지를 통과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학자들은 홍해의 물이 오른쪽과 왼쪽에서 벽이 되었다는 말을 마치 만화나 영화나 전설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같이 성경에 대해 불신하는 것은 단지 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다. 홍해의 경우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자들이라 하는 자들도 믿지 못한다. 말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전능하심에 대해 고백하지만, 실제 문제에 들어가면 그들은 성경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구절들에 있어서 보수주의, 근본주의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부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창세기 1:2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완전하게 창조하신 이후에 사탄의 타락으로 인해 온 우주를 물로 심판했다는 말씀이며, 1:3은 재창조를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고 있겠는가? 창세기 1:6은 창공, 즉 우주 위 아래로 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우주 저 너머에 거대한 물층이 있다고 믿고 있겠는가? 창세기 1:11,14은 셋째 날에 식물을 창조하셨고, 넷째 날에 태양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태양 이전에 식물이 있었다고 누가 믿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양은 첫째 날 이미 있었으나 구름으로 가려 있다가 넷째 날에야 비로서 “드러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심각한 불신은 예언들에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무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천년 동안 사탄이 끝없이 깊은 구렁에 빠지고 그리스도의 의로운 천년 통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천년은 단지 상징적인 것일 뿐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이스라엘 각 지파별로 만 이천 명씩, 십사만 사천 명을 말할 때도 그들은 문자적인 십사만 사천 명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십사만 사천 명만 구원하시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잘 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십사만 사천 명만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십사만 사천 명만 대환란 때에 인쳐주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교회 시대의 구원에 적용하다 보니, 여러 모로 맞지 않으니까, “계시록은 상징적인 책이다.” 하는 정도로만 무마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몇 개의 구절만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그들은 이스라엘에 관련된 예언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된 예언 대부분을 믿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구약과 신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해, 배교한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사 9:7; 11:12; 40:1,2; 49:6; 51:11, 렘 31:31, 호 1:10; 2:3, 롬 11:26 등).
그러나 그들은 말씀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던간에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믿지 못한다. 아니 믿으려는 의지 자체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는 완전히 끝내시고 오직 교회만을 다루신다는 잘못된 생각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30:7에 있는 “야곱의 고난의 때”나 마태복음 24:21의 “대환란”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이 곧 야곱의 고난이며, 성도들은 항상 고난을 받았으니, 교회 시대 전체가 실상은 대환란 기간이라고 말한다. 미래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한 개념도 없다. 요한일서 2:18에서 “많은 적그리스도”라 했으니 그리스도를 반대했던 모든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이며, 개혁 신학자들은 로마 카톨릭이나 교황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2:18에는 “적그리스도들”도 있지만 분명한 “적그리스도” 한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성도들의 부활이나 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많은 구약 성도들이 2천년 전에 부활했다는 사실과(마 27:52,53) 신약 성도들이 주께서 공중으로 오실 때 부활한다는 사실과(살전 4:16,17) 환란 성도들로서 두 증인이 대환란 끝무렵에 부활한다는 사실과(계 11:12) 믿지 않는 자들이 천년왕국 후에 부활한다는 사실을(계 20:5) 말씀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며(고후 5:10),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이후에는 민족들의 심판이 펼쳐지며(마 25:31,32), 천년왕국 이후에는 백보좌 심판이 펼쳐진다는 사실도(계 20:11) 말씀한다. 각 심판은 시기도 다르거니와 그 대상도 다르다. 이처럼 성경은 여러 구절들에서 서로 다른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서로 모순이라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각 대상과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구절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말씀하고(엡 2:8,9), 어떤 구절들은 행위가 있어야 한다거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한다(약 2:24, 마 19:16-21). 어떤 구절들은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고(레 17장), 어떤 구절들은 음식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한다(골 2:16).
물론 이 구절들은 모순이 아니다. 단지 적용되는 시기와 대상이 다른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경의 적용 대상이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로 나뉘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고전 10:32), 또 성경이 여러 가지 시대들로 나뉘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어떤 교리, 예컨대 세대주의라는 한 체계를 머리 속에 고착시키고 거기에 맞춰 성경을 읽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경에 대해 어떤 전제를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신다는 사실과 또 그분의 말씀 안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있는 그대로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갖추어지는 체계가 전천년주의 또는 세대주의 체계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세대주의 체계는 어느 학자들에 의해서 억지로 끼워맞춘 체계가 아니다. 세대주의를 배격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대주의는 인류 역사를 단지 몇 개의 시대로 나누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대주의의 핵심이 아니다. 세대주의의 핵심은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에 있으며,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 것에 있다. 반대로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구절들과 예언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천년주의자들이며, 후천년주의자들이며, 개혁주의자들이며, 칼빈주의자들이고, 또 은사주의자들이다.
한국 교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바른 성경을 배격하는 문제, 칼빈주의와 은사주의의 문제, 경배와 찬양이나 열린 예배 등으로 몸살을 앓는 문제, 카톨릭과의 연합이나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 등 참으로 한국 교회는 총체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성경 해석에 관한 문제다. 이것을 단지 세대주의냐 언약신학이냐, 또는 전천년주의냐 무천년주의냐 하는 단순한 신학간의 문제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보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상대화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고 또 믿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의 의도대로 믿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는 신약 성도들에게 구약의 규례를 짐지움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안겨다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각 시대와 대상을 분명히 구분한다면 그러한 짐들도 지지 않고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것을 풍자하는 재미있는 예화가 하나 있다. 어떤 사람이 아침 일찍 일어나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맨 처음 읽는 구절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겠다고 기도하고 성경을 펼쳤다. 그랬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띈 구절이 마태복음 26:24이었다.『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배반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 있으리라!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그 사람은 ‘이것은 아닐꺼야, 잘못 찾은 걸꺼야’ 하고 생각하며 다시 성경을 펼쳤다. 이번에 그가 찾은 구절은 누가복음 22:3이었다.『그때 사탄이 열둘 가운데 하나인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가니라.』 이번에도 역시, ‘아냐 이것은 아닐꺼야, 주여, 한 번만 더 말씀하옵소서’ 하고 마지막으로 성경을 열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그런데 이 자가 실로 불의의 대가로 밭을 샀는데 그후에 곤두박이로 떨어져서 몸의 중간이 터져 그의 모든 창자가 쏟아져 나왔느니라.』(행 1:18)였다. 그는 그날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다.
그러나 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을 잘 반영한다. 사람들은 성경을 본다 하면서도 올바로 보지 못하고 교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잘못 적용함으로 인해 바른 교리를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경배한다든지 성도들을 섬기는 문제에 있어서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가 받을 유업에 대해서도 소망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성경의 바른 해석과 적용은 바른 성경을 찾는 것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단지 하나의 신학 체계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지상 과제로 삼아야 한다. 한국 교회가 이처럼 계속해서 말씀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고, 말씀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