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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성경"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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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8월호>
신약성경 27권은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가치와 그 저자이신 성령의 증거로(요15:20)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이라는 것이 입증되며, 그 외의 책들은 절대로 성경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계22:19). 사도행전의 앞부분에 해당되는 시기에 있던 지역교회는 “신약 성경”이라고 불리는 책을 갖지 못했고 다만 창세기부터 말라키까지의 구약성경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신약 성경이 기록된 후에 A.D.96년을 전후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지역교회는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부’들은 그들의 글에서 약 35,000번 이상 신약성경을 인용하고 있으므로(복음에서만 19,368번) 교회사가 시작된지 초기 3세기 동안 그 어느 곳이든지 간에 성경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폴리캅(A.D.69-A.D.155)은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서신 10개를 인용했고, 익명의 카톨릭 제 2 클레멘트라는 위조품조차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인용했으며, 사도행전, 요한계시록 및 6개의 바울 서신에 상당히 익숙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래내우스(A.D.125-192)는 4개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13개의 바울서신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150-217)는 4개의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들, 베드로전서, 요한일서, 히브리서, 유다서, 야고보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인용했습니다. 이러한 인용문을 종합하고 여기에 터툴리안의 “디아테사론”(A.D. 150-200)을 포함시켜 보면, A.D.200년 전에 신약성경 27권이 전부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A.D. 150-180년 사이에 “구 라틴 역본”(Old Latin)과 “구 시리아 역본”(Old Syriac)이 인용되고 있음을 볼 때, 그 당시 신약성경이 지역교회에 존재하고 있었음은 더욱 분명합니다.
아타나시우스(A.D.296-372)가 27권의 책을 자신의 목회서신에 열거한 것과 카르타고 공의회(A.D.397)가 ‘정경’을 결정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설정하신 27권의 영감받은 책들을 추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지할 사실은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체 성경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성경을 기록된 대로 믿기를 거부했던 몇몇 교부들의 견해를 비중 있게 설명합니다. 결국 학자들의 잘못된 책으로 배우는 학생들과 그 책들의 독자들은 불신의 독소를 계속해서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에 포함될 수 없는 불순물
성경에 관해 논의할 때 ‘호모로고메나’(Homologomena)라는 용어를 접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말’, ‘일치’를 뜻하는데,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진 책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역사가들이 신약성경 27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인정된 ‘정경’이라는 뜻으로 만들어 낸 발음하기 어려운 용어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을 믿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현재의 39권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되었으나, 후대의 일부 랍비들이 논박했다는 이유로 학자들은 39권의 구약성경 가운데 아가서, 전도서, 에스더, 에스겔, 잠언 등 다섯 권을 제외한 34권이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졌던 ‘정경’이었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모로고메나’를 ‘정경’으로 알고 있다면 그는 구약의 34권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신약성경 27권이 이미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착되어 있었음에도 성경을 거부한 일부 교부들이 논박했다는 이유로 학자들은 신약 27권 가운데 베드로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의 일곱 권을 제외한 20권만이 ‘모든’ 사람이 이의 없이 수용했던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거처럼 오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호모로고메나”는 그 말이 의미하는 것(‘모든’ 사람이 받아들였다는 것)과는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말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소위 ‘정경’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이 학자들에게 사용될 때는 다른 뜻으로 사용됩니다. 사실상 “모든”이란 성경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자연주의적 관점을 지닌 교부들과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고전2:14)을 이 ‘모든’에 포함시킴으로써, 즉 성경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포함시킴으로써 기준을 잘못 선정했던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주장이 정당화된다면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불신자들 가운데 어떤 학자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경 전체가 ‘모든’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소위 ‘정경’이 아니라고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주장이 가능하겠습니까? 바로 자격이 없는 사람을 기준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믿지 못하는 학자들의 가르침을 많은 비중을 두고 다루고 있는 책들은 독자들에게 “성경에 관한 여러 논의는 어려운 문제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 여러 가지를 수용한 상태에서 서로를 참고해야 한다”는 결론을 맺게 합니다. 결국 독자들과 배우는 학생들은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얻기보다는 초기부터 성경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없었던 것으로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거부한 사람들의 주장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는“반대하여 말한”의 뜻으로, 이 말은 일부 교부들이 논박한 책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반대경’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반대경’은 ‘정경’에 속했으나 후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는 책들입니다. 즉 교회사가들은 이 책들이 누군가에 의해 논쟁이 되었고 “한참 후”에까지 ‘정경’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는 근거 하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교회사가들과 학자들에게 누가 그 일곱 권의 성경을 의문시했으며(창3:1), 누가 그 책들의 권위에 대해 논쟁했는가를 물어 보면 매우 곤혼스러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너댓 명의 교부들이 이들 일곱 권의 책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다수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그 책들의 권위를 의심했을 것이라고 독자들을 오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이 말하는 반대경은 구약의 경우 아가서, 전도서, 에스더, 에스겔, 잠언 등 다섯 권이며, 신약의 경우는 베드로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의 일곱 권입니다. 독자들은 과연 이 책들이 성경이 아니라고 믿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주장을 펴는 교부들과 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견해를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나온 성경이 영어 NIV, NASV 등의 여러 변개된 성경들이며, <개역한글판성경>입니다. 그들의 열매를 통해 그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소위 ‘반대경’(소위 ‘정경’에 포함시키기에는 의심이 간다고 주장하는 일곱 책들)이라고 불리는 일곱 권에 대해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주목할 사실은 이 일곱 권의 책들이 소위 “히브리 크리스챤” 혹은 “일반” 서신들로 알려진 책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들 중 요한계시록은 “짐승의 표”를 다루고 있고,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는 “거짓 선지자”를 다루고 있으며, 또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육신적인 교회 지도자들”을 다루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야고보서와 히브리서는 바울 서신들과(롬 4,5장, 엡 2장 등)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일곱 권은 믿고 이해하기에 매우 어려운 책들이며, 성경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지적하는 책들입니다. 그러므로 ‘반대경’에 관해 말할 때는 이 책들이 배교자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1) 예를 들면 디오니시우스(Dion- ysius, 오리겐 이후 등장함)는 자기와 오리겐이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사도적 권위를 없애려고 노력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이우스(Gaius, A.D.213)도 자신이 후천년주의자라는 이유로 요한계시록을 거부했습니다.
유세비우스(A.D. 260-340)는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누구인가를 논하는 데 있어 몹시 주저했는데, 이는 이 책이 사도가 기록한 분명한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자신은 오리겐과 콘스탄틴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이 책을 거부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핑계로 파피아스(Papias, A.D.60-130)를 언급했는데, 이는 파피아스가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아니라 “요한”이라고 불렸던 다른 장로가 썼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오리겐이 카이사랴에서 파괴적 비평학파의 아성을 구축한 후에(A.D. 216-222) 요한계시록은 개정된 시리아 페쉬타 성경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성경 변개자 오리겐이 요한계시록을 “의심스럽다”고 말할 때, 그는 외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육을 위해서는 영감받은 신약성경보다는 유디스(Ju- dith)와 토빗(Tobit)과 같은 외경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과연 어떤 책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분별하지 못하는 오리겐의 “성경에 대한” 주장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2)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를 ‘반대경’ 속에 포함시킨 사람은 초기 성경 변개자들이었던 유세비우스와 오리겐으로, 그들은 (‘정경’에 관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어거스틴을 제외하고는 가장 형편없는 “원문비평학자”였습니다.
(4) 니콜즈는 말하기를, 히브리서는 오리겐으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의 학교에서 바울의 저작으로 간주되었던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히브리서를 성경의 ‘정경’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다른 교회들이” 알렉산드리아 학교를 비평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른 교회들”이 도대체 어떤 교회들이겠습니까? 그러한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였겠습니까? 학자들은 답하지 못합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즉 말시온이라고 하는 “이단”(A.D.110-A.D.160)이 있었는데 그는 ‘반대경’ 일곱 권 전체를 거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시온이 과연 “다른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성경의 권위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십니까? 또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나온 한 로마 문서인 “무라토리안 단편”(Muratorian Fragnent : A.D. 280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은 “히브리서”를 언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오리겐 이후(A.D. 184-254)에 쓰여졌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며, 말시온은 베드로후서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를 믿는 데 있어서도 주저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증거’가 일곱 권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권위를 지닌다고 판단할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5) 오리겐의 제자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A.D.265)는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를 거부했고, 감독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치까지 높여 버린 시프리안(A.D.195-258)은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유다서의 ‘정경성’에 관해 죽을 때까지 답변을 회피했습니다.
따라서 ‘논박된 책’, 즉 ‘반대경’이란 성경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던 책입니다. 반대경을 주장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오리겐을 위시한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로서 성경변개의 근원지에 있었던 성경 변개자들이며, 또한 그 영향 아래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불신자들은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책들에 대해 너무도 그럴싸하게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결국 오리겐과 유세비우스 같은 성경 변개자들처럼 그 책에 의심을 품도록 만들었습니다.
누구도 “무라토리안 단편”을 누가 썼는지 모르며, 오리겐은 더더군다나 성경적 권위문제에 있어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반대경’의 문제는 진화론만큼
이나 근거없는 논쟁에 불과하며, 무의미합니다.
거짓 전설의 기초 위에...
“수도피그라파”(Pseudepigrapha)는 “거짓 기록들”, “사이비” 등의 뜻으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책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위경”이라고 부르는 책들입니다.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위조된 것이 분명하며, 그 출처가 불분명한 책들로서 B.C.200-A.D.400년 사이에 생겨난 종교적 환상이나 마술을 표현한 것입니다.
위경의 숫자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구약의 경우 일반적으로 18권으로 제시됩니다 : 희년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아담과 이브의 책, 이사야의 순교 등과 같은 전설적인 책들과, 에녹 1서, 열두 족장의 유언, 시빌의 신탁, 모세의 승천, 에녹 2서, 바룩 2서, 바룩 3서 등과 같은 묵시적인 책들과, 마카비 3서, 마카비 4서, 피르케 아봇, 아히카르의 이야기 등과 같은 교훈적인 책들과, 솔로몬의 시편, 시편 151편 등과 같은 시가서들과, 사독의 전쟁단편과 같은 역사적인 책이 있습니다. 신약의 경우 이 위경은 <성경의 잃어버린 책들>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도마복음”, “안드레행전”, “타대우스행전”, “열두 사도의 가르침”, “디다케”, “바울묵시록”, “클레멘트 서신”(?), “허마의 목자”, “마리아 탄생복음”, “니코데모복음”, “폴리캅이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서신” 등이 신약외경에 속하며, 복음서로 이름 붙여진 21권, 사도들의 행전으로 분류된 8권, 서신서들이 4권, 묵시록에 속한 것이 4권으로 총 37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희한한 책들 중 두 권이 티쉔돌프가 <킹제임스성경>의 신약을 약 5,000군데나 수정하기 위해 사용한 시내사본(א)에는 성경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티칸사본(B)은 구약외경을 구약성경의 일부로서 기록하고 있으며 시내사본은 또한 신약외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홀트, 알란드, 메쯔거, 네슬, 사우터 혹은 그 밖의 그 어떤 “편집자”들도 이 두 헬라어 사본을 가지고 <킹제임스성경, 1611>을 수정해 놓고서도 이들 사본 “전체”를 감히 출판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신을 신뢰하는 어리석음
“아포크리파”(Apocrypha)는 “숨겨진”, “비밀” 등의 뜻으로, 이 말은 일부 사람들이 받아들인 책들을 지칭하며, 일반적으로 “외경”이라고 부릅니다. 초기 교부들 가운데 이레네우스(Irenae- us)와 제롬(Jerome)은 “아포크리파 ”라는 말을 위경을 포함한 비정경서들을 일컬을 때 사용했습니다. 종교개혁시기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구약외경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보통 외경이라고 하면 구약의 외경을 생각하지만, 신약의 외경도 있습니다.
외경을 논할 때에 두 가지 대치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경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정경’의 기준을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입니다. 즉 히브리어 성경의 22권, 현재 성경의 39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팔레스타인 정경’과 이것에 열다섯 권을 첨가한 ‘알렉산드리아 정경’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택하는가에 따라서 외경에 대한 논란이 방향을 달리하게 됩니다.
신약에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에 대해서 263번의 직접적인 인용이 있으며, 370번의 간접적인 인용이 있지만,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단 한 번도 외경을 인용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신 구약의 기준에서도 제외되는 것입니다(마23:35). 구약외경은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시락) 등과 같은 교훈서, 토빗, 유디스 등과 같은 종교소설, 에스드라 1서, 마카비 1서, 마카비 2서 등과 같은 역사서, 바룩, 에메미야의 서신, 에스드라 2서와 같은 예언서, 에스더 첨가, 아사랴의 기도(또는 세 청년의 노래), 수산나,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등과 같은 전설 등 15권이 있습니다.
초기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Against Apion, Book I, sec. 8) 그의 당대에 외경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배제한 채 성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외경이 성경으로 첨가된 것은 오리겐의 변개된 성경인 <70인역>에서이며, 이것을 필사한 4세기의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통제와 지휘 하에서 열린 트렌트 공회(1546. 4. 8)는 카톨릭의 “전통”(기록되지 않은 말씀)과 “외경”을 소위 ‘정경’과 같이 권위있는 것으로 공표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의 성경에는 외경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귄위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권위를 성경보다 우위에 둔 것입니다. 또한 이들 사본들이 최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사본들의 전통을 따르는 여러 변개된 성경들과 <개역한글판성경>은 카톨릭 성경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다수 개신교도들은 지금까지도 카톨릭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살아계신 말씀의 능력과 권위에 관한 논쟁이 18,19세기에 일어나게 된 것은 모든 불신의 근원인 의심(창3:1)에서부터 나오게 된 것으로 “교회시대”에서 이 불신의 근원을 제공해 주는 것은 기독교 교육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최초의 기독교 대학입니다. 이 기독교 교육은 오리겐, 유세비우스, 제롬, 콘스탄틴, 클레멘트, 어거스틴 등의 파괴적인 “공격”을 통해 ‘발전’되어 현재의 기독교계를 누룩으로 부풀게 한 것입니다.
현재 성경학에 관한 책이 무려 3만여 권이나 된다는 사실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 많은 종류의 문서와 책들이 어디서부터 왔으며, 그러한 책들이 과연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있어 최종권위로 받아들이게 하는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관한 이러한 많은 책들이 성경은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에 관해 잘못된 시각을 제시하며, 성경 중 그 어떤 책은 “성경”이 아니라고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이 누구였는가에 대해 잘못 설명하고, 성경을 누가 보존하였고 어디서 보존되었는가에 대해 거짓된 사실을 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러한 책의 저자들과 독자들은 성경에 관한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비극적인 사실이지만 오늘날 성경학에 관한 대다수의 책들은 성경에 대한 독자들의 믿음을 오히려 파괴시키고 성경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잘못된 책에 귀를 기울이기 않고 성경을 “성경”으로 믿을 뿐입니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