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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스라엘의 나팔절과 속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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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11월호>

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일반적으로 세계 각국의 명절은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에 따라 상이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빠지지 않고 기념하는 날이 있다. 바로 “설날,” 즉 새해의 첫날이다. 특이하게도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는 일곱째 달(티쉬리 월), 즉 성경에서는 “에다님 월”이라고도 하며(왕상 8:2)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으로는 9월이나 10월에 해당하는 달의 첫날과 둘째 날을 “설날”로 지킨다.


하필이면 일곱째 달에 “설날”이 있는 까닭은, 원래 이 달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키던 달력(민간력)에서는 새해의 첫째 달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세상은 티쉬리 월에 창조되었다고 하며, 그렇기에 그들은 본래 이 달을 새해의 첫째 달로 삼은 달력 체계를 사용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빕 월(니산 월)”을 첫째 달로 삼는 달력 체계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새로 제정하셨던 체계이다(출 12:2).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출생”을 강조하시고자, 기존에는 일곱째 달이었던 아빕 월을 이제부터는 첫째 달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즉 출애굽 이전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이들은 우리가 흔히 “유대력”이라고 부르는 달력 체계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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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은 “유대력”이 아닌 “민간력”으로 새해 첫날이 되는 티쉬리 월 첫째 날을 “로쉬 하샤나”라고 부르며 “설날”로 크게 기념한다. “로쉬 하샤나”는 히브리어로 “해의 머리”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설날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듯이, 유대인들은 그들의 “설날”인 “로쉬 하샤나”에 “샤나 토바” 혹은 “샤나 토바 우메투카”라고 인사하는 것이 관례이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좋은 해,” “좋고 달콤한 해”라는 뜻이다. 이 날에는 “달콤한 것”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음식인 꿀과 사과가 식탁에 오른다. 식전에 가장은 기도문에 따라 사과 조각을 꿀에 찍으면서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행복하고 즐거운 새해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한다.


“로쉬 하샤나”는 유대인들에게는 “설날”이기도 하나 하나님께서 나팔절로 제정하신 날이기도 하므로(레 23:24), 회당들에서는 “쇼파르”라고 불리는 양뿔 나팔이 울린다. 공동체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전통적으로 여섯째 달(엘룰 월)부터 평일 아침에 “쇼파르”를 불면서 이 기간을 예비한다. “쇼파르”의 소리는 졸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또한 양뿔 나팔은 “불러 모으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민 10:2-4), 양뿔 나팔을 부는 것은 “돌아오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쇼파르”를 통해서도 볼 수 있거니와 “로쉬 하샤나”는 단순히 새해를 축하한다는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속죄일을 대비하면서 반성과 성찰로 한 해를 시작한다는 의미까지도 내포하는 명절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 첫째 날 오후에 “타슐리크”라는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이는 흐르는 물을 찾아가서 거기에 “죄를 던져 버리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주로 조약돌이나 빵을 물에 던진다고 한다.

“로쉬 하샤나”로부터 “욤 키푸르(속죄일)”까지의 10일간의 기간 동안을 유대인들은 “가장 거룩한 날들” 혹은 “경외의 날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달력에서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날인 “욤 키푸르” 끝 무렵의 회당 경배는 “쇼파르” 소리로 끝을 맺는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동안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기도하며 선행을 베푼다. 또 임산부나 노약자, 어린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욤 키푸르”가 시작되는 날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 금식한다. 먹고 마시는 것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향수를 쓴다거나 성행위를 한다거나 샤워를 한다거나 라디오, TV, 컴퓨터,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거나, 말하자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일체의 행위들도 하지 않는다. 이 날은 그들에게 “안식일들 중의 안식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문자 그대로 모든 장소가 문을 닫는다. 심지어 대중교통도 운행하지 않는 데다 사람들이 운전도 하지 않아서 그야말로 도로가 텅텅 빈다. 간간히 “세속적인” 유대인 가정의 아이들이 떼를 지어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누비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로부터 “욤 키푸르(속죄일)”까지의 기간 동안 “생명의 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탈무드로부터 나온 개념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세 종류의 책이 “로쉬 하샤나”에 열린다. 각각 완전히 의로운 사람들의 책, 완전히 악한 사람들의 책, 선행과 악행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책이다. 완전히 의로운 사람들은 당연히 즉시로 생명의 책에 기록되고 인쳐지며, 완전히 악한 사람들은 죽음에 처해지도록 기록되고 인쳐진다. 나머지 사람들은 “로쉬 하샤나”부터 “욤 키푸르” 사이의 기간 동안 그 판결이 결정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은 “욤 키푸르”에 서로에게 “게마르 하티마 토바” 혹은 “하티마 토바”라고 인사하는데, 각각 “당신이 선으로 인쳐졌기를 바랍니다,” “좋은 인침입니다.” 정도의 뜻을 담고 있다. “욤 키푸르”의 종료를 알리는 “쇼파르” 소리가 울리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믿으며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는다. “욤 키푸르”가 끝나면, 금식하던 유대인들은 환희에 차서 금식을 해제하고 성대한 만찬을 즐긴다.

“로쉬 하샤나”로부터 “욤 키푸르”까지 유대인들의 그 “가장 거룩한 날들”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성경에 없는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친다는 것도 그렇지만(마 15:9), 더 큰 문제는 이 기간 동안에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유대교에서는 “원어”인 히브리어를 운운하면서, 사람들의 “죄”들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을 제시한다. 유대교의 “성경 교사”들은 “죄를 짓다”라고 흔히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차타”()가 사실 “목표를 벗어나다”(miss the mark)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재판관기 20:16에서 “차타”가 『빗나가는』으로 번역되기도 했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아하, 하나님께서 정해 두신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라면 특별한 악행이 아니더라도 죄가 되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사악한 죄인이었던가!” 하고 깨닫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아하, 사실상 죄라는 것은 없고,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이 발생할 뿐인 것이구나. 나는 때때로 목표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했지. 일 년 동안 참 수고했구나.”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로쉬 하샤나”로부터 “욤 키푸르” 사이의 기간 동안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언제 “목표를 벗어났는지”를 찾을 뿐, 언제 “죄”를 지었는지를 찾지 않는다. 모셰 브리스키(Moshe Bryski)라는 랍비는 이 기간에 취해야 할 마음의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우리의 삶은 우리 몸 안에 있는 거룩한 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혼을 조금 더럽히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이 점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본성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글쎄요, 사람들은 약간 방향을 잃었을 뿐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십시오.”


여기에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기에(막 2:17), 그들과는 어떤 관계도 맺으실 수 없으신 것이다. 구원을 위한 진정한 회개에 이르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고후 7:10). 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슬픔”이며,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스스로는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우리가 스스로 이룰 수 없던 의를 누군가 대신 이뤄 줘야 했던 것이다.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 이는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롬 8:3,4). 어떤 사람이 잘 이야기했듯이,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 가져야 할 자격 조건은 부러진 날개, 깨어진 본성, 그리고 약함”이다. 세상의 싸구려 동정꾼들이 말하듯이 스스로에게 “괜찮아, 잘했어,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 하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지옥으로 간다. 유대인들도 그러한 속임수에 속은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아, 나는 구제불능의 죄인이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만이, 거듭남의 필요성을 스스로 절감하고 구주를 영접하게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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