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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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원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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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6월호>

성경에서 율법 시대, 은혜 시대(교회 시대), 환란 시대, 천년왕국 시대를 구별하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구별하지 못한 사람 역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 시대에 교회로 가져와 교리화시키려는 사람도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사람이다. 성경은 유대인,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 세 부류를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교회와 이방인에게 가져와서 적용시키게 되면 엉뚱한 해석이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언약 신학을 고집한 사람들은 좀 빨리든지 혹은 좀 늦게든지 궁지에 몰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못한 채 영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보다 더 훌륭하기에 사복음서를 가지고 신약 교회의 교리를 정립시키려고 마태복음 5,6,7장을 교리화하기도 하며 사복음서를 바울 서신서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나 이는 무지의 소치요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까지 예수님은 율법 시대에 사셨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없이는 복음이 있을 수 없고 그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의 피흘림 없이는 죄를 정결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계시를 사도 바울에게 주신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갖게 된 것이다. 사복음서에서는 원론적인 교회에 대해 3회만을 마태복음에서 언급한 반면(마 16:18; 18:17; 21:13)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에서는 86회나 된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이 가져온 이방의 화폐를 유대의 화폐로 바꿔주는 장사를 했던 환전상들과 레위의 제사법 아래서 지정한 희생제물들을 매매하는 행위를 한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쫓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도다』(마 21:13). 마가복음 11:17에서는 이 부분을 『내 집은 모든 민족들에게서 기도의 집이라고 불리리라.’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너희가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이사야 56:7을 인용한 것이다. 요한복음 2:16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 사건은 마태복음보다 3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씀하신 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내 집”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동등하심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말라키 3:1 참조). 히브리서 3:1-6에서도 모세가 맡은 하나님의 집을 주님은 자신의 집으로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 와서는 이 “집”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몸으로도 쓰신다(고전 3:16,17; 6:19).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인해 신약 교회가 태동되었다. 교회는 성경에서 조직적인 형태로 주어진 지상에서의 유일한 하나님의 기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인을 군인으로 무장시켜 영적 전쟁에서 선한 싸움을 대비할 수 있도록 사기를 붇돋아 주는 집결지인 것이다.
선교 단체와 신학교는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일 뿐 독자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확보하는 기구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없는 신학교와 선교 단체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성경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면 선교 단체나 신학교에서 경배를 드리려고 했을 때 그것은 예배(Worship)라고 부르지 않고 채플(Chapel), 즉 구내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한다. 구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되 지역 교회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위반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적 지역 교회의 머리 되신 분이시지 채플의 머리가 되시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엡 1:22,23, 골 1:18).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받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의 몸을 하나님께서 성전 삼으신 것은 신비이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몸을 중요시하지 건물을 중요시하지 않으심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는 거하지 않으신다고 천명하셨기 때문이다(행 7:48; 17:24). 그렇다고 해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성령의 전인 그리스도인들이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주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약속이 있다는 점이다(마 18:20). 허름한 사무실에 기도하기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 몇 사람이 있는 곳에는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반면 으리으리한 교회 건물 안에 방언하겠다고 모여든 수천 명의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이 CCM 찬양을 부르며 모인 곳에는 주님이 임재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필자가 이제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적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집결지인 신약 지역 교회(New Testament Local Church)를 말한다. 그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여긴다면 기도하기 위하여 또 다른 집인 기도원은 왜 필요한 것인가? 누가 무엇 때문에 기도원을 세워 운영하며 심지어 교회들까지도 교회 건물을 어디다 무슨 목적으로 쓰려고 놔두고 또 기도원을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그 기도원들이라는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기도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전무하다. 성경에도 없는 것을 인간의 발상으로 만들어 운영하여 그런 것들을 마치 성경적 기구인 양 소개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1. 기도 응답을 잘못 배운 자들의 잘못된 지식 때문에

“기도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경배이다.”(H. W. Forst)라는 말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도는 하나의 경배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대화하고 교제한다. 말씀이 성도에게 영적 양식이듯이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다. 숨을 쉬지 않은 사람은 6분 내에 죽듯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그 영이 메말라 버리게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게 된다. 생활에 활기가 없고 메마르며 육신의 일들이 드러나게 된다. 썩은 사과는 나무에 붙어 있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듯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주님과의 교제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며 따라서 성도들과의 교제권에서도 떨어져 나가게 된다. 떨어져 나간 사람은 쭉정이기에 바람에 날려가게 된다. 쭉정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냉랭한 자신을 발견한 사람, 인생 문제가 풀리지 않는 사람, 위로부터 지혜와 영력을 받을 수 없는 조건을 갖춘 사역자들은 그들의 냉랭함을 없애기 위해 기도원을 찾는데 이것이 잘못된 것이다. 주님은 기도하려는 사람들에게 골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고 은밀히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6:6). 골방은 기도원이라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집안이나 사무실이나 교실 안에 있다. 주님은 자녀들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분이시다. ① 헛된 말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며(주기도문, 사도신경, 아멘, 할렐루야, 주여 등등) ②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즉 오래 기도한다고 해서 무슨 효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수원에 있는 한 침례교 목사는 여의도에 있는 어떤 목사의 교회 교인수를 놓고 자기의 기도가 여의도 목사의 기도 시간보다 적기 때문에 교인수도 적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한심스러운 친구는 매우 딱하다. 자기가 여의도 사람보다 더 많은 교인을 얻고 싶으면 더 오래 기도하면 될 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기도의 성경적 원칙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며 그와 유사한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기도만 하면 응답받는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자들의 말을 믿고 기도하려 하기에 기도원들이 곳곳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기도만 열심히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을 때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누구나 기도만 오래하면 응답받는 것인가? 이런 기도하는 자세는 결국 새벽 기도회를 하게 만들었다. 세계에서 새벽에 기도회를 갖는 교회들은 한국뿐이다. 만일 다른 나라에 있다면 그들도 한국에서 배워간 것이다. 주로 여의도에서 배워간 것이다. 왜 사람들이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은 것들을 교리로 실행하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도에 응답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목사를 해도 마귀의 자식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마귀의 자식의 기도는 마귀가 관여하는 것이지 하나님과는 무관하다.
기도에 응답받으려면 자신의 죄들을 자백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들에게 의를 전가시켜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갈 명분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분의 의를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히 4:16). 기도에 응답받으려면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행해야 한다(요일 3:22). 기도원 같은 곳에서 오래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성경적 근거를 찾아서 행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율법을 듣는 데서 귀를 돌이키는 자는 그의 기도마저도 가증하다고 하셨다(잠 28:9).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약 1:6,7).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해야 한다(요일 5:14). 용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막 11:25,26).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서 기도해야 한다(벧전 3:7). 정욕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약 4:3).
어떤 목사는 교회 헌금으로 세상 신문을 만들면서 기도로 만든다고 거짓말했다. 신문은 기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편집해서 인쇄하면 만들어진다. 라면 공장을 차려 원료를 넣고 공정대로 돌리면 라면이 나오게 되어 있다. 기도하지 않아도 만들어진다.

2. 기도원은 로마카톨릭의 수도원을 모방한 것이다.

콘스탄틴이 A.D. 314년에 이교도들에게 교회의 문을 열자, 어떤 사람은 서신을 들고 왔고 어떤 자들은 믿음의 고백으로 어떤 자들은 세례를 받고 교회 안으로 합류했다. 교회 안에 있었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적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들과 어떤 면을 같이할 수가 있었겠는가? 성별과 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자연히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교회의 권위를 대적함으로 이단으로 매도되고 출회를 당하기보다는 한 가지 방편을 마련한 것이 수도원을 만들어 그곳으로 종교적 은둔을 시도한 것이었다. 결국 수도원이라는 피난처는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카톨릭 사제들에게 복종할 만큼 용기가 없는 자들에게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 수도원 제도는 카톨릭 공회에서 결정한 사항들에는 순종하는 것같이 보였으며 개인적으로는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훌륭한 방편이 아닐 수 없었다. 수도원 제도, 즉 “Monasticism”이란 홀로(Mono)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상과 단절된 산이나 절벽 위나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그야말로 세상과 단절되어 생활하면서 기도와 경배를 통하여 혼적 달관을 이루며 금욕을 실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지 결코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는 데는 전혀 기여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은둔 생활은 불교와 힌두교의 핵심인 내적 명상과 금욕을 실행하는 승려와 구루들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힌두교나 불교, 이슬람교와 다른 점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 사람의 영이 살아나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어떤 죄인이 석가모니나 공자, 브라만이나 마호메트를 믿고 영접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란 자기 기분뿐이다. 어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고 그분을 영접해 드리게 되면 하나님의 영이 즉시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면서도 변화가 없는 사람은 올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 17). 그리스도인이 되면 술과 담배를 끊는다. 카톨릭 신부들은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한다. 왜 그런가?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나 브라만이나 마호메트에게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당신을 내 구세주로 믿사오니 내 안에 들어와 내 혼을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보라. 천 일을 그렇게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왜 변화가 없는가? 그들은 죽어 썩어 버렸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어떤 살인 강도라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렇게 고백했다면 그의 영은 다시 태어나게 되고 그의 혼은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복수하려고 칼을 품고 가던 사람이 복음을 듣고 칼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이키며, 술주정뱅이요 싸움질하는 사람이 술병을 던져 버리고 주먹을 감추며, 아내를 때리고 가사를 돌보지 않는 놀음 중독자가 카드를 버리고 일어서서 일자리를 찾아 나서며, 마약 중독자가 주사기를 빼어 던지게 된다. 거짓말, 욕설, 음담패설이 입에서 사라지고 자기를 구원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감사해서 그 입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변화를 받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신비적인 방법으로 셋째 하늘에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불교와 힌두교는 사람이 죽었다가 곤충이나 물고기나 새나 짐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를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생물을 죽이지 않는다. 닭이 그 누구의 할머니일지도 모르고 소가 할아버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소유하면 영생을 얻게 되며 영생을 얻고 죽으면 다시 살아남을 믿는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이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삼 일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5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보이셨고 그후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행 1:8-11, 요 14:1-14, 계 22:7, 12,20).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땅을 천 년 동안 통치하실 것을 믿는다. 이는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가모니, 공자, 브라만, 마호메트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우리와 같은 성정이라 죽어서 썩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고 그들이 밝혀놓은 글에는 인간을 죄의 형벌로부터와 지옥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말이 없다. 그들은 부활의 소망도 없다. 그들은 이 땅에 다시 올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어서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복음을 두루 전하지 않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자신을 위해 산다면 그는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며 그가 왜 수도원 생활을 하는지도 모르게 되어 있어 그의 생은 인생의 상실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3. 누가 이런 제도를 만들었는가?

이 수도원 제도는 제롬(331-420)과 어거스틴(354-430)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이 수도원 제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교부들은 아타나시우스(알렉산드리아), 제롬(로마), 크리소스톰(콘스탄티노플), 어거스틴(카르타고)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런 제도를 가르친 사람은 모두 오리겐(184-254)이었는데 그는 금욕주의가 곧 영적인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라고 믿어 마태복음 5:29,30을 근거로 해서 스스로 거세함으로써 자신의 교리를 입증해 보였다. 그렇다면 오리겐은 이런 것을 어디서 배웠는가 아니면 자신의 독자적인 창안이었는가? 해 아래 새 것은 없듯이 그는 클레멘트(150-215)에게서, 클레멘트는 판테누스(145-200)에게서, 판테누스는 필로(B.C .20-A.D. 50)에게서, 필로는 플라톤(B.C. 427-347)에게서 배운 것이다. 지면상 길게 쓸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이들 수도원에서 할 일 없이 세월을 보낸 자들에 의해 성경 변개가 시작되어 변개된 성서가 생산되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사상은 영지주의(Gnosticism)를 만들어냈고 이 영지주의에서 기독교 고등교육과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교단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이 누구인가? 오리겐, 어거스틴, 칼빈의 후예들인 것이다. 초기의 수도원이 기도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그들의 기도하는 집이 된 것이다. 교회가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원이란 것을 세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이겨오는 이 소중한 일들은 하지 않고 커피나 마시고 각종 회의나 하고 세상일에 관여하고 있다. 까닭에 믿음도 지혜도 영력도 고갈이 된 것 같으면 기도원에 가서 금식도 해 보고 철야도 하며 혼을 달관시키면서 마치 그것이 영의 충전인 것처럼 써먹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수도원은 물론이요 기도원도 언급하거나 인정하신 적이 없다. 다만 성경을 믿지 않고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뒷전으로 하고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영력을 얻겠다고 그런 곳을 찾지만 그런 곳은 악령의 소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은 “기도원으로 들어가서”가 아니라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마 28:19,20).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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