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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 (6) 성당에서 촛불을 밝혀두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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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11월호>
바빌론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밀랍 양초로마 카톨릭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특성 중 하나는 램프와 양초의 사용이다. 카톨릭 교회는 마돈나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상 앞에 반드시 촛불을 켜 둔다. “대 행렬”(grand procession)이 있을 때에도 반드시 촛불이 있어야만 그 신성한 의식이 전해진다고 생각한다. 이같이 램프와 양초를 사용하는 것 역시 로마 카톨릭의 다른 모든 미신적 요소들과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태앙신숭배에 사용되는 촛불
육화한 아들을 숭배하는 의식에 램프와 촛불을 사용하는 것은 그 아들을 상징하는 “심장”을 불타는 심장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도 태양신이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숭배되었다. 이집트에서도 어느 정해진 날 밤에 각자 집 앞에 등불을 켜 둠으로써 육화한 태양신을 숭배하였다.
바빌론에서 이러한 관행은 특히 성행하였으며, 이것은 외경인 바룩서(The Book of Bar- uch)에서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들(바빌론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켜 두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등불을 그들의 신들에게 켜 두는구나. 그러나 그 신들은 등불 하나도 보지 못하며 신전의 기둥과 같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의 의식에서 환한 대낮에 램프와 양초를 켜는 전통은 완전히 이교에서 유래한 것이었기 때문에 4세기 락탄티우스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관행의 불합리성을 폭로하고, 카톨릭 교도들이 “하나님께서 어둠 속에서 존재하시기라도 하는 듯 그 분께 촛불을 밝혀드리는 것”을 비웃었다. 4세기 초에는 교회 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관행이 점차 유입되기 시작하여, 이제는 자칭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주인”이라고 하는 카톨릭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밀랍으로 만든 양초
로마 카톨릭은 의식 때마다 램프와 밀초를 사용하지만, 그들은 사실상 그 어떤 빛보다 후자의 빛을 더욱 우월하게 여기고 있다. 트렌트 종교회의 때까지 로마 카톨릭에서는 부활절 전야에 부활절 양초의 축복을 바라며 이렇게 기도했었다. “이 거룩한 부활절 전야에 우리는 존귀하신 주께 겸손히 이 불을 제물로 바치나니, 이 불은 육신의 기름으로나 불경건한 기름으로나 속된 불로 더럽혀지지 않았나이다. 우리의 순종과 온전한 헌신의 뜻으로 밀랍과 심지로 이루어진 이 초에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타고 있는 이 불을 드리나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신비(my- stery)와 거룩한 부활절 전야의 신성한 불은 마땅히 숭앙되고 찬양받아야 할지라.”
지리적으로 전혀 근접해 있지 않은 나라들 사이에서도 신성한 의식을 거행할 때 하나같이 밀초가 사용된다는 사실은, 필자가 주장하는 대로, 우상 숭배의 근원이 되었던 제도 안에서 “밀초”를 태우는 데는 어떤 마술적인 “신비”가 있었으며, 바로 여기서 카톨릭이 그 의식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뒷받침해 준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에 사는 퉁구스 족은 그 나라의 신인 부르칸들(Burchans)의 우상 앞에 밀초들을 세워 둔다. 몰루카 군도에서도 섬 주민들의 신인 악마 니토를 숭배하는 의식에 밀초가 사용된다.
허드(Hur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신성한 작은 북을 치면서 니토를 부르면 그들 중 두 세 사람이 밀초를 켜고 악마를 불러내는 것으로 믿어지는 몇 마디 주문을 외운다.” 이처럼 널리 성행된 관행은 고대의 어떤 것에서 유래했음이 틀림없고, 최초에는 어떤 신비적인 이유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밀초는 “위대한 중재자”로서의 태양신을 상징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밀초는 사실상 바빌론 신의 핵심적 성격 중 하나인 “위대한 중재자”를 나타내기 위한 상형문자에 지나지 않는다. 고전 독자들은 고대 원시종교의 신 우라노스(Ouranos), 즉 “계시자”(The Enlighter)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니므롯은 그가 신격화되었을 때 바로 그러한 성격의 인물로서 숭배되었다. 태양신으로서 그는 세상을 밝혀주는 이 뿐만 아니라 인간의 혼에 빛을 주는 자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그가 “선과 진리”를 밝혀 주는 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신약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계시해 주시는 분으로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만 해당되는 이름이다. 그런데 태양신을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위치에 놓기 위해 미트라(Mithra)라는 이름 아래 그는 입에 벌을 한 마리 물고 있는 사자로 묘사되었다(삽화1). 태양신이 물고 있는 벌은 그가 “말씀”(The Word)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갈대아어로 “벌”을 뜻하는 다바르(Dabar)는 동시에 “말씀”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벌을 “입”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전달하려 했던 개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우라노스, 즉 “계시자”라는 호칭을 가진 미트라(플루타크에 의하면 메시테, 즉 “중재자”로 숭앙됐던)가 사도 요한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한 그 영광스러운 분이라고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계시하신 분이며 또 그렇게 알려지셔야 한다. 이는 요한이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뿐이라.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구세주께서 오시기 전에 고대의 유대인들은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을 이야기할 때 통상적으로 그를 다바르, 즉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무엘상 3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절을 보면 『이미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주를 섬기더니, 그 당시에는 주의 말씀이 희귀하여 환상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엘리의 죄로 인해 주께서 오랜 기간 동안 전에 선지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스스로를 그에게 계시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주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환상”(vision)이 회복되었다. 이것은 21절에 『주께서 실로에서 다시 타나나셨으니, 이는 주께서 실로에서 사무엘에게 주의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음이더라』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지만 이것은 단순한 말씀 이상의 것을 암시한다. 『주께서 나타나셨으니』. 즉 사무엘의 눈에 “보였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주께서 자신을 계시하셨을 때, 다시 말하면 사무엘의 눈 앞에 나타나셨을 때, 성경은 『주의 말씀(다바르)으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주의 말씀”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즉 예수 그리스도이다. 고대에 그 분은 분명히 이 이름으로 알려지셨다. 따라서 플라톤이 만들어낸 ‘삼위일체’(Trinity) 중 제 2위를 “로고스”라는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로고스는 “다바르” 즉 “말씀”의 번역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배교자들은 “참 빛”으로부터 돌이켜서 그림자로 그 분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인간에게 빛을 주는 “말씀”인 새턴을 상징하는 “벌”
이것이 명확한 사실임은 새턴(Saturn)에 관한 크랩(Cra- bb)의 다음과 같은 말로 알 수 있다. “새턴”(Saturn)의 제단 위에는 밀초들이 놓여 있는데, 그것은 새턴(Saturn)으로 인해 인간들이 오류의 암흑에서 벗어나서 진리의 빛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그리스에서 이 바빌론의 신은 분명히 빛을 주는 “말씀”으로 여겨졌는데, 그곳에서 “벌”이 위대한 계시자의 상징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설명해 준다.
뮬러(Muler)는 에베소의 다이아나 여신 숭배와 관련된 상징들에 관해 “여신의 주 상징물은 벌이었는데, 이 벌은 상징물 외에 다른 이유로는 그녀와 연관되어 사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대사제 자신도 에센(Essen) 즉 왕벌이라 불렸다.”고 한다. 대사제의 성격은 그가 섬기는 신의 성격을 설명해 준다. 다이아나는 바빌론 여신과 동일한 존재이며, 그와 같은 사제의 호칭은 그녀의 메달에 새겨진 “벌”이 “여인의 씨”인 그녀의 아이를 인간의 혼에 빛을 비춰 준 “말씀” 다바르로 거짓되이 나타내기 위한 또 하나의 상징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의 제단 위에서 타고 있는 밀초의 이면에 숨겨진 “신비”이며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우리는 그들의 전례서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 이는 그들이 밀초의 신비를 언급하는 동시에 밀랍을 생산해 내는 벌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밀초가 처음에 어떻게 사용되기 시작했는가를 대단히 궁금하게 여기는 우리는 벌들의 역사를 격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은 자기들의 발로 꽃들을 모으지만 꽃들은 결코 벌들로 인해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그것들은 ‘입’으로 새끼를 낳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의 ‘입’에서 생겨나신 것과 같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급되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으며, “다바르”가 “벌”과 “말씀”을 동시에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다면 위의 인용에서 벌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발상은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말씀”과 “벌”을 동일시하는 것은 바빌론에서 유래한 것
카톨릭 저서인 “판카르피움 마리아눔”에서 필자는 주 예수께서 분명하게 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보았다. 마리아를 “환희의 낙원”이라 칭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낙원에서 천상의 벌, 즉 성육신하신 지혜가 꿀을 얻었다. 이 벌은 그곳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벌집을 찾아내었고, 이것이 타락한 세상의 모든 쓰디쓴 것들을 감미로운 것으로 바꾸어 준 것이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부여받으셨다는 신성 모독적인 발언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저자가 “성육신한 지혜”를 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배운 바로 그 출처에서 나온 것이다. 주 예수께 붙여진 이름(다바르)의 이중적 의미(말씀과 벌)는 바빌론의 언어에서만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저서의 저자가 그의 신학을 어디서 형성했는지를 말해주며, 또 밀초의 축복에 관한 기도문이 바빌론의 기도 책에서 그대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에 대해 하나씩 살펴볼 때마다 성령님께서 일곱 산 위의 여자에게 붙이신 이름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계17:5).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