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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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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1월호>

세계 곳곳에서 정치적 협상, 에큐메니칼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바티칸이 장악하고 있는 실제적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있을 뿐인데, 때로 물밑의 상황은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1988년 12월호 〈이코노미스트〉지는 “카톨릭 교회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 정치를 전복시키기 위한 투쟁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고 전했다. (The Economist: 24th December, 1988)
〈이브닝 스탠더드〉지는 1986년 아시시에서 열린 에큐메니칼 집회에 대해 보도하면서 “...적어도 10개국에서 활동중인 게릴라 집단과 민병대는 교황이 제안한 ‘평화의 24시간’을 지키기로 결의했다.”는 내용을 실었다. (The Evening Standard: 27th October, 1986) 이와 같은 교황의 막강한 권력은 파티마에서 나타났던 마리아의 예언의 성취를 예고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 예언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핵심적 비전이 되고 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가 다시 한 번 나타나 교황의 영적 리더십을 입증함과 동시에, 그가 평화의 시대를 열 인물임을 확증하기 위해 놀라운 표적과 기적들을 보여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단지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오푸스 데이

교황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비교적 최근에 창립된 우익 단체인 ‘오푸스 데이’와 관련되어서도 드러나는데, 이 단체는 로베르토 칼비(Roberto Calvi)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탈리아 정치인들이 ‘종교적 마피아 조직’이라고 일컫는 이 비밀 기구는 호전적 경향을 띤 종교 단체로서 일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기구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둔 것으로 보이며, 1982년에는 교황 개인에게 예속된 기구로 만들었다. 이 기구는 교황의 직속 사제인 알카로 델 포르틸로(Alcaro del Portillo)를 통해 바티칸으로 직접 보고한다.” (Daily Telegraph, 8th May, 1986)
‘오푸스 데이’를 교황 개인의 기구로 만든 것은 이 폴란드 출신 교황에게 전례 없는 일이었으며, 이로써 그는 교회의 주교 구조 밖에 있으며 교회의 위계 질서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기구를 개인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증가 일로에 있는 예수회 조직의 막강한 권력을 견지하려는 교황의 시도인지도 모른다.
교황은 1990년 12월에 델 포르틸로를 ‘종신 주교’로 임명했으며, 이로써 그는 75세에 직위에서 물러나도록 되어 있는 교회법에서 면제되었다. 한편 같은 해 같은 달에 이탈리아는 이 기구를 ‘공익 도덕 단체’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 공포의 시기가 델 포르틸로의 임명과 맞아떨어진 사실에 대해 이탈리아 국민들은 모두 ‘우연의 일치’라고 말했는데, 이는 이탈리아 의회가 ‘오푸스 데이’를 조사하기 시작한 후 5년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푸스 데이’는 1928년에 설립된, 예수회 조직 예속 단체로서, 국가 영역을 초월해 전세계를 그 영역으로 하는 하나의 준교구로서 인식되어 왔다. 이 기구는 80개국의 75,000명의 회원과 1,400명의 사제를 자랑한다. (The Universe, 16th December, 1990) 한편 이 기구에 가입한 아들을 둔 부모들의 우려가 가끔씩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는데, 그들은 가족과도 관계를 거의 끊다시피 하는가 하면 성격적으로도 완전히 딴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이 단체에 관한 비밀성은 대단히 심상치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강력한 이 기구에 관한 한 기사의 발췌문을 통해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새로 가입한 회원들은 정절과 복종 등의 맹세를 해야만 할 뿐 아니라...일 주일 동안 아홉 가닥 채찍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며 하루에 두 시간 동안 ‘실리스’, 즉 가죽끈이 감긴 금속 사슬을 몸에 감고 있어야 하는데, 이 사슬은 허벅지 윗부분에 감도록 되어 있어 사슬과 그로 인한 상처가 눈에 띠지 않게 한다. 이 기구에 가입할 수 있는 최연소 연령은 만 14살 반이다. 오푸스 데이의 창시자 에스크리바(Escriva)는 이 모든 것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에스크리바의 사제 훈련 계획은 교황으로부터의 이상하리만큼 열렬한 후원과 함께 진전되었다. 이 스페인인이 1992년 5월에 받은 시복식은 현대에 들어 가장 빨리 받은 것으로서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 상당한 우려와 반발을 가져오기도 했다.

고위 관직에 있는 카톨릭 신도들

고위 관직에 있거나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로마 카톨릭 신도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을 우려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러한 경향을 주목하고 지켜보아야 할 또 다른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상당히 우리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문제로서, 우리의 끊임없는 주의가 요구되는 바이다.
징병 담당 카톨릭 신부의 집계에 따르면 1988년 현재 미군 사관생도의 50% 이상이 카톨릭 신도들이다. 미 하원의원 내의 카톨릭 신도들의 수는 1950년의 82명에서 1986년에는 142명으로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카톨릭 신도들은 행정부, 법원, 국무성, UN 사절단, CIA, FBI, 이민국 등에서 요직을 점령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의 이민 정책은 로마 카톨릭 인구를 교묘하게 늘려가고 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라틴 아메리카계의 투표권의 중요성이 급속도로 부각됨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카톨릭 국가에서 교황이 산아제한을 계속적으로 금지시키고 있는 사실이 설명될 수 있다. 남미의 인구가 지난 한 세대 동안 배나 증가한 사실이 그 단적인 예이다. 바티칸의 세계 정책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바티칸이 낙태와 산아제한,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은 인간 삶의 성화나 성경의 명령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같은 정책의 배후에 있는 진짜 이유는 새로 태어난 생명들이 ‘바티칸의 군대’를 증강시켜 줄 것이며 교회 헌금을 늘려 줄 것이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국가 내에서의 카톨릭 신도들의 산아제한 반대는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드러내는 상징적 의미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캐나다에서 이민국 및 그 밖의 정부 기관에 고용되기 위해서는 영어와 불어 두 언어에 능통해야 되는데, 이러한 요구조건에 의해 상당수에 달하는 정부 고용인들이 퀘벡 등지 출신의 로마 카톨릭 신도들이다. 피에르 엘리옷 트루도(Pierre Eliot Trudeau)에 의해 채택된 정부의 이같은 정책으로 두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요구되는 공무원직 중 대부분은 보통 퀘벡 출신의 로마 카톨릭 신도들이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카톨릭 출신 수상 브라이언 멀로니(Brian Mulroney)는 이 일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퀘벡 시는 캐나다가 새 헌법 제정에 있어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면 독립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이같은 헌법과 관련된 위기 상황에 책임이 있는 인물은 로마 카톨릭 출신이며 전수상이자 외무부 장관인 조 클라크(Joe Clark)였다. 한편 캐나다 국민들은 1992년 10월 국민투표를 통해 퀘벡 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독실한 카톨릭 신도들이 수상직에 있는 나라는 캐나다만이 아니다. 뉴질랜드 수상 제임스 볼거(James Bolger)도 독실한 카톨릭 신앙의 소유자이며 추측컨대 교황에 대한 그의 충성심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상 폴 키팅(Paul Kitting) 또한 로마 카톨릭 신도이다.

첩보 행각과 전쟁 범죄자들의 비호

1982년 출간된 <바티칸 문서, Vatical Papers>라는 책에서 니노 로 벨로(Nino Lo Bello)는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조직된 스파이 조직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의 KGB마저도 능가할 정도”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 스파이 조직을 교황은 ‘소달라티엄 피아넘’, 즉 ‘하나님의 지하조직’이라고 일컫고 있으며, 지구상의 모든 사제와 수녀, 수도승들이 이 조직에 속해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2천5백만이 넘는 요원들을 보유하고 있는 이 신실한 군대 중에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전격적으로 훈련된 스파이들이라고 전한다.

“요원들이 수행하는 일은 다른 조직체에 침투하는 것이며, 카톨릭 스파이들이 침투하는 조직체는 교회,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들이다.”

1990년 11월에 사망한 카톨릭 연구가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tan)도 로 벨로의 진술을 지지했다. “바티칸 시국의 사무국이 모든 헌신적 카톨릭 신도들을 뉴스의 잠재적 소식통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모든 지식인 사제들을 훈련된 정보원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마을이나 교구에서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정보는 무엇이든지 지역 조직을 통해 주교에게로 전달되며 주교는 다시 바티칸으로 그 정보를 보낸다. 여기에 기독교 및 비기독교 국가에서 활동중인 수많은 준종교 단체를 통해 수집된 여러 가지 정보가 더해진다. 이 정보는 사회 및 정치 단체 내로 잠입한 카톨릭 평신도들을 통해 수집되는데, 그들은 종종 사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그들의 지시하에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바티칸 시국의 사무국은 정상적인 외교 소식통을 통해 들어온 정보 외의 다른 정보들을 얻게 되며,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소장하게 되는 것이다.” (The Dollar and the Vatican: A. Manhattan, 1988)
바티칸 연구가들은 또 CIA, KGB, M15를 비롯해서 세계 도처의 수많은 스파이 조직 내에 깊숙이 숨어들어가 있는 ‘두더지들’에 우리의 주의를 요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로마 카톨릭 교회를 위해 비밀리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다. 가장 효과적인 조직으로 널리 정평이 나 있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만이 바티칸의 이러한 침투를 가장 적게 받은 기관이다.
카톨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OSS가 CIA로 대체된 이래 CIA와 강력한 유대 관계를 맺어 왔다. 그 예로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말타의 기사들’(일명 SMOM)은 그들의 가장 명예로운 상을 리차드 겔렌(Richard Gehlen)에게 수여했는데,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반소련 스파이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전쟁 이후 겔렌은 다른 나찌 전범들과 함께 CIA에 의해 고용되었다. 미국 내 ‘말타의 기사들’의 전 우두머리이자 생산업자인 피터 그레이스(J. Peter Grace)는 나찌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일에 연루되었으며 그들의 형량을 줄이는 것을 도와줄 뿐 아니라 그들을 거대한 가족 기관에 고용하기도 했다.
CIA의 고위 요원들 중 두 명, 즉 존 케이시(John Casey)와 윌리엄 케이시(William Casey)가 ‘말타의 기사들’의 회원이었으며, 보안부 차장 조지 로카(George Rocca)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둠의 사회를 계획하는 말타의 기사들〉의 저자 캐더린 헤이스(Katheleen Hayes)는 이렇게 말한다. “극우 단체 SMOM과 바티칸과 CIA가 이란-콘트라 사건과 연계되어 있다는 충분한 정보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의 반공산주의적 노력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의 음모였던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미국 정부 내에 존재하는 ‘암흑의 정부’가 작용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정부가 이루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Knights of Malta Comprise a Shadowy Society. NFI Trumpet, Kathleen R. Hayes, 1987) 이란-콘트라 사건 심의 때 올리버 노스(Oliver North)의 변호사였던 브렌든 설리반(Brendon Sullivan)도 말타의 기사 중 한 명이며, 그가 속한 회사의 유명한 소유주 베넷 윌리암스(Bennet Williams)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티칸과 예수회가 니카라과의 정치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의 뒷부분에서 언급할 것이다.
1987년 〈타임〉지는 폴 투비에르(Paul Touvier)는 프랑스 내 독일 점령 지역에서 주로 전 게쉬타포 우두머리였던 클라우스 바비(Klaus Barbie)와 함께 일했는데, 투비에르는 카톨릭 교회와 리옹의 카톨릭 사제들에 의해 비호를 받았으며, 바티칸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의 집과 자산을 모두 민병대 지원 비용으로 넘겨준 사실을 보도했다(The Times, 18th May, 1987). <데일리 메일>지에 따르면 투비에르는 전쟁 범죄로 인해 두 번이나 사형을 선고받았었다. 첫번째는 1945년이었는데 그는 카톨릭 교회의 비호하에 잠적해 버렸고, 다음은 1947년이었다. 프랑스의 출소기한법에 의해 1967년에 그의 사형 선고 유효 기간은 만기되었으며, 카톨릭의 끈질긴 로비 활동으로 퐁피두 대통령은 그를 사면했다. 〈데일리 메일〉지의 칼럼니스트 지오프리 레비(Geoffrey Levy)는 리옹 주민들은 “아주 단순하게, 투비에르가 지난 수 년 간 비호와 도움을 받은 것은 그가 카톨릭 교회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고 전했다. (Daily Mail, 14th July, 1989)
<바티칸 문서>는 나찌가 이용했던 ‘수도원의 비밀 탈출 통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 크로아티아 사제를 통해, 예수회 신부로 가장했던 마틴 보르만(Martin Bormann)과 바티칸 여권을 가지고 아르헨티나로 도피한 아돌프 아이크만(Adolph Eichmann)을 포함한 다른 많은 나찌당원들은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또한 바티칸과 ODESSA, 즉 나찌당원들의 비밀 기구와의 긴밀한 관계를 면밀히 파헤치고 있다.
1988년 1월 6일자 <인디펜던트>지는 이스라엘 신문 ‘예디엇 아로나드’(Yediot Ahronath)를 인용하여 전 비엔나 대주교인 프란쯔 코닉(Franz Konig) 추기경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나찌 전범자들이 도피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명을 알고 있는데...한 명은 오스트리아인이고 다른 한 명은 독일인이며,...이들은 오늘까지도 바티칸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

코닉 추기경은 또한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교회가 나찌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
다. 예루살렘에 소재한 대학살 박물관 전시관은 오스트리아의 로마 카톨릭 주교들이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히틀러의 군대를 해방가들로서 환영하며 나찌당원을 축복하는 사진과 설명을 맨 처음에 전시하고 있다.

‘수도원의 비밀 탈출 통로’는 ‘쥐 통로’로도 알려져 있다. 1990년 12월 5일자 <예루살렘 포스트>지에 실린 알렉산더 즈비엘리(Alexander Zvielli)의 기사는 미국 비밀 요원 빈센트 라 비스타(Vincent La Vista)가 1947년 봄 바티칸과 국제 적십자회가 나찌당원들을 독일로부터 이탈리아를 경유하여 라틴 아메리카로 불법 입국시킨 주요 세력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고 전했다. 라 비스타는 이같이 보도했다.

“카톨릭 교회의 세력이 지배적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내에서, 바티칸은 압력을 가함으로써 전 나찌당원들이나 파시스트들, 그밖의 정치 집단들이 공산주의에 반대하기만 하면 그들 나라로 입국하는 것을 수락하게끔 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사를 통해 드러나 있다...물론 바티칸은 이러한 불법 입국에 관여된 가장 큰 단일 가구로서, 그들은 여권, 잠복장소, 재정적 지원까지 제공했다. 그러나 바티칸을 포함해서 그러한 기구들을 도와준 다른 단체가 있다. 그들은 여러 차례, 그리고 어떤 조건 하에서, 바로 국제 적십자회의 도움을 이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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