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교리들 분류
카톨릭의 고해실, 여신도들의 고통의 장소!
컨텐츠 정보
- 9,580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1년 08월호>
<편집자 주> 회심한 전직 신부였던 치니키 목사의 증언을 통해 고해실에서 행해지는 감춰진 죄악의 실상을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각도에서 로마 카톨릭에 대한 성경적 평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칙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이며, 지면상 발췌하여 게재한다.자칭 그리스도의 사제라는 자들로부터 늘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또 자비석이라 들먹이는 곳에서 매일 끊임없이 그들의 대리 기도가 올려져야 하는 가련한 두 여인이 있다. 그 중 한 여인은 신부들에게 속아 나무로 만든 형상, 곧 그녀의 신이 내리는 저주를 달래려고 끝내 남편의 시신 위에 자신을 불사른 명문가의 부인이며, 그녀와 매 한가지로 신부들에게 속아 성채 신(wafer-god)의 저주를 달래려고 “고해실”에서 훨씬 더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고통을 당한 로마 카톨릭 신자인 한 부인이 있다.
나는 사실에 더하거나 빼지 않는 진실만을 말할 터인데, 훌륭한 교육에다 고결하고 고매하기 그지없는 숱한 여인들이 남자가 뻔히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야만 하는 일이나, 마음속 깊이 숨겨 놓은 가장 은밀한 것들, 곧 미혼이든 기혼이든 간에 자신만이 갖는 가장 은밀한 사생활을 한 남자에게 공개해야 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가장 타락한 여자마저도 대답하기 꺼리는 질문에도 그에게 대답해야만 하는 일이 실제로 종종 있으며, 이것은 불타는 석탄덩이에 올려져 몸이 타들어 가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고해실에서 실신해 있는 여자들을 나는 여러 번 보아 왔다. 나중에 그들이 들려 준 이야기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에게 통상 여성들이 입 다물고 있는 일들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기혼여성들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소녀들의 입술에서 정말이지 소름끼치는 말들을 들어온 것이 수백, 아니 수천 번이나 된다. “전 이제 영원한 멸망으로 갑니다. 제가 내뱉은 이전의 고백들과 대화들은 온통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들뿐이었고 제 입술은 수치로 닫혀버렸습니다. 오... 저주받은 내 혼아...!”
나는 여인들의 입술에서 간신히 흘러나오는 그와 같은 끔찍한 유언들을 듣고서 그 시신 옆에 서서 돌처럼 굳은 채 꼼짝도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그녀가 면죄말고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 당시 믿고 있던 그 성스러운 면죄를 통해 그녀에게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고자 했지만 이미 무자비한 죽음의 손길이 그녀를 낚아채 가버렸던 것이다.
수천 수백만의 로마 카톨릭 소녀들과 여신도들에게는 신부들의 마귀적인 음모와 궤변보다는 그들의 정숙함과 여성으로서의 위엄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들은 신부들이 물어오는 질문에 결코 “예, 맞아요.”라고 선뜻 대답할 수가 없다.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성역을 어떤 한 남자가 엿보도록 하느니 차라리 명문가 출신의 그 과부들과 함께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져 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때론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면 결코 자기 죄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형식적이고 가차없는 카톨릭의 교회 법보다는 인간적인 체면이 더 강하게 그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렇지만,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등 엄포를 놓는다고 해서 하나님만이 들으실 권한이 있는 죄들에 대해 한낱 똑같은 죄인인 인간에게 용서를 구할 수는 없잖은가? 오직 하나님만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의 아들의 보혈로 그 죄들을 깨끗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고상한 사람들에게는 그게 얼마나 비참한 삶이겠는가? 게다가 로마 카톨릭이 “미신”이라는 올가미로 그들을 묶어 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신부에게 한 털의 죄도 숨기면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고 책에서도 읽고, 강단에서도 늘 그렇게 듣고 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들의 인간적인 자존심과 체면이라는 틀을 발 밑에다 깡그리 뭉개버릴 수 없기에 그들은 영원한 저주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평판이 좋은 여인이라도 친어머니에게조차 말 못 할 그러한 문제를, 하물며 외간 남자에게 털어놓아야 하고, 그래서 품위를 실추시킨다면 차라리 영원한 저주를 택할 것이며, 입술을 여느니 차라리 가장 잔인한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할 정도로 자신의 사적인 일들을 신부 앞에 엎드려 조목조목 말해야 하는 그들의 참담함과 고통은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하나님께 홀로 기도드릴 때 참으로 견디기 힘든 슬픔과 눈물 가운데서 간구하는 고상한 여인네들을 수없이 보아 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간구한 것은 고해 신부들에게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도록 오히려 그들의 자존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해 달라는, 자기들 딴엔 최상의 호의라고 여기는 것을 달라고 간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간청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기를 바라면서 이내 고해실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결국 그 냉혹한 남자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기로 작정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버릴 그 순간이 다가왔건만 그 순간 용기를 잃고 무릎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죽은 사람처럼 입술이 창백해진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니!
여성의 자존심과 정숙함이 결국 그 헛된 종교가 부르짖는 아우성보다 더 크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용서”받지 못한 채, 아니 양심에 또 하나의 신성모독죄라는 짐을 떠 안은 채 고해실을 나와야만 했다.
오! 카톨릭의 무거운 멍에여! 쓰라린 인생이여! 속아서 멸망당하는 그 혼들에게 십자가의 신비가 얼마나 시시껄렁하겠는가? 잠시의 고통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들의 비참함을 끝내고 더 멋진 생의 길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할지는 모르지만, 만일 그렇다면 명문가 출신인 그 여인과 함께 타오르는 장작더미에 뛰어드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더 큰 기쁨이 되겠는가!
나는 여신도들의 상당수가 길게도 어쩌면 다소 짧게도 느낄 그런 시간 동안 정신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인하는 로마 카톨릭 성직자들에게 이로써 공개적인 도전장을 내는 바이다.
사실, 대다수 여성들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처음 다가오는 것은 타락한 이 세상 덫으로부터 그들의 마음과 지성과 혼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도구인, 그들의 신성한 자존심의 벽을 직접 허무는 것이다. 자신의 불결한 이야기를 뭇 남성에게 꺼내는 데는 수긍할 수 없고, 또 그 남자의 음란한 질문들에 대해 마음의 모든 문을 차단해 버리는 데는 다 그러한 자존심에 근거한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도 그러한 자존심의 법이 그들의 마음 판에 너무도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최상의 선물이라고 쉽게 이해해 버리는 바람에, 이미 말한 것처럼, 차라리 그들의 입술을 닫아 버린 채 영원한 멸망을 감히 선택한 것이다.
신부들의 입장에서는 이교도들조차 꺼내기 민망할 정도인 질문들에 다수의 여신도들이 말문을 터놓을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수년에 걸친 가장 “정교한”(나는 주저함 없이 이것을 “마귀적”이라고 부른다.) 노력들이 필요한 것이다. 인생의 상당 기간을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도 있고, 연약한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자신의 불결한 부분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들 분개할 게 뻔한데, 그 용서를 한 남자에게서 받아내느니 차라리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에 자신을 내던져 더 이상 자신의 입술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고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카톨릭의 모든 신부들이 여신도들의 이러한 본질적인 성향을 잘 알고 있다. 단 한 명도, 아니, 경건한 그들의 신학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제7계명을 거스르는 죄 문제와 관련해서 입도 뻥끗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을 굳혀버린 소녀들과 결혼한 여신도들에게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덴스, 리구리, 데브레인, 바일리 등 한마디로 모든 카톨릭 신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도 고해실 내에서 그들 신도들이 이겨내야만 하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문제라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신부 중 단 한 명도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감히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들의 엄청난 사기행각을 만천하에 끝없이 폭로할 구름 같은 증거들을 내가 가지고 있고 그들을 쉽게 압도할 것이라는 것을 자신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먼 훗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간을 허락해 주신다면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과 도덕주의자들이 이 문제에 관해 써 놓은 수많은 것들을 폭로할 작정이다. 그렇게 되면 여태껏 가장 호기심을 많이 불러일으킨 책들 중 하나로 자리 매김 될 것이고, 또한 로마 카톨릭 여신도들이 고해실로 들어갈 때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다는 정직이라는 본능으로 인해 그들 앞에 쳐진 덫에 위축되고 있으며, 여신도들의 타락에 종지부를 찍고 혼들의 파멸을 위해 교황이 보낸 고문기술자에 대해 초인간적인 용기를 가지고 곳곳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이것은 서로 의논할 필요도 없고, 또 놀라울 정도로 딱 들어맞는다.)를 즉각 제시하게 될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면전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는 것처럼, 결코 누군가가 들어서는 안 될 것들이 분명 있다는 게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는 생각들이다.
또한 흔히 어떤 죄는 어떻게 지었으며, 심지어 어떻게 마음에 품었다는 것까지 말로 꺼내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 못지않게 수치와 죄악으로 여기고 있다. “너는 내 면전에서 홀로 지은 죄로 충분치 아니하더냐? 그래서 남이 알면 안 될 죄들을 그 남자로 알게 해서 네 죄악을 네게 더하지 않을 속셈이냐? 네 더러운 죄악들을 그의 마음과 혼에 내던지는 순간 네가 그 남자를 공범자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느냐? 보라. 그도 역시 너처럼 연약한 인간이며 너와 다름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네가 유혹받은 것에 그도 유혹받을 것이고 너를 연약하게 했던 것이 그를 연약하게 할 것이라. 너를 더럽혔던 그것이 그를 더럽히며 너를 진창으로 끌어내린 그것이 그에게 또한 그렇게 할 것이라. 내 눈이 네 죄악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는 것도 부족하더냐? 내 귀가 오늘도 그 남자와 오가는 불순한 대화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겠느냐? 그 남자가 나의 사랑하는 선지자 다윗만큼이나 거룩해서 새로운 밧세바의 음란한 벌거벗음 앞에 실족하지 않겠더냐? 그가 삼손만큼이나 강해서 그를 유혹한 데릴라를 네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겠더냐? 그가 베드로만큼이나 온유해서 여종의 목소리에 배신자가 되지는 않겠더냐?” 이처럼 그녀는 자기 귓속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과, 이에 버금가는 여성의 명예와 자존심이라는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어떤 남자에게도 결코 발설하지 말라.”고 말한 그 일들에 관해 한 남자의 발 아래 엎드려 입술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심하며 파르르 떠는 한 가련한 젊은 여인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보다 더 끔찍하고 절망적이며 고독한 전쟁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그와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남몰래, 그것도 격렬하고 필사적이며 격심한 전투에 얽힌 그 이야기가 내가 알고 있기로는 아직까지 완전히 공개되지는 않았다. 뻔히 드러나 있는 그 엄청나고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책으로 엮어낼 수만 있다면 전 세계의 놀라움과 동정의 눈물을 자아낼 것이다. 다른 여신도들도 여성으로서의 자존심과 위엄을 포기하라며 꼬드기고, 또 고상한 부인이라면 어떤 남자에게도 결코 말 못 할 그런 문제들을 털어놓으라고 궤변을 늘어놓을 때면 그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고상하고 지적인 젊은 소녀들과 평판이 좋은 부인들의 무릎을 보고서 어린아이처럼 눈물 흘린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나 역시 이전에 그런 궤변을 늘어놓았으니 말이다.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북한 그들의 심정과, 오가는 그런 질문과 대답에 소름끼친다고 토로하면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내게 청해 온 적이 있다. 그래요! 카톨릭 사제로 있을 때 나 자신의 타락을 보며 쓰라린 눈물을 얼마나 자주 흘렸던지! 그들의 그런 불결한 문제들 앞에 묵묵히 입 다무는 데는 엄청난 힘과 위엄과 거룩함이 내재된 동기가 있음을 깨달았기에 나는 그들을 존경해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면 마치 천사들의 음성을 듣는 듯했다. 그래서 난 그들의 발 앞에 엎드려, 존경받는 남자라면 자신이 존경하는 여인에게 물어서는 안 될 말들이 있음에도, 그런 질문을 한 것에 대해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나 자신을 이내 책망해야 했고, 그 짧은 순간에 카톨릭의 절대적인 권위의 말에 복종하지 않고 흔들리던 내 믿음을 후회해야 했고, 이렇게 말하는 양심의 소리를 이내 잠재워야 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네가 감히 부인과 이러한 문제들을 놓고 이야기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런 질문을 젊은 소녀에게 하고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도 않느냐? 네 자존심은 어디에 있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런 문제들을 한 남자에게 말하도록 강요해서 너는 지금 그 소녀를 파멸로 몰아내고 있지 않느냐?”
교황들이건 경건한 신학자들이건 카톨릭 공회들이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이러한 경고의 음성을 사탄이 떠드는 소리라며 믿도록 윽박질렀다. 나에게 양심과 지성이 있음에도, 그렇게 더럽고 저주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좋고 순수하며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어야 했다. 내가 속했던, 그 완벽하다는 카톨릭 교회라는 것이 무자비하게도 가련하고, 떨며 눈물 흘리는 처량한 소녀들과 여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아집은 무너지게 할 것이고 죄에 대한 두려움과 겸손은 늘어날 것이며 우리의 면죄로 인해 그들이 정화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대며 소돔과 고모라의 웅덩이에서 나를 비롯한 모든 사제들과 함께 반드시 헤엄치도록 강요하라고 내게 계속 윽박질러댔다.
오늘날 영국 감독교회의 상당수가 “퓨지주의(Puseyism)”나 “의식주의(Ritualism)”라는 미명 하에 번지는 전염병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하고 있으며, 영국이나 호주 그리고 미국의 신교도들에 있던 마귀적이며 불결한 비밀참회를 수많은 지역으로, 그것도 다소 공개적으로 다시금 불러들이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극심한 고통과 혐오감이 일며 놀라움을 금치 못 할 노릇이다. 예수회로 가장하고 들어온 그 전염병을 저지할 즉각적인 처방을 만일 찾지 못한다면 감독교회는 비밀참회, 곧 깜깜하고 냄새나는 천주교의 수렁에 빠져 죽을 운명에 처할 것이다. 예수회는 지금도 감독교회를 믿을 만한 종으로 삼으려는 작업을 현재 도처에서 진행 중이다.
성직자로서의 발걸음을 처음 내딛었을 당시, 나는 아주 세련되고 아리따운 젊은 숙녀를 보고 적잖게 놀랐고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난 그녀를 거의 매주마다 자기 아버지 집에서 만나곤 했는데, 이럴 수가! 내가 드나드는 고해실로 그녀가 들어가고 있지 않는가!
그녀는 내가 아는 다른 젊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줄곧 해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그 도시에서 가장 경건한 소녀들 중 하나로 보였던 것이다. 제 아무리 자기를 몰라보도록 변장을 했을지라도, 난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아닌게아니라 상냥하던 마리아,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