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BB칼럼 분류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 엘리야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7월호>

성경은 엘리야를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약 5:17)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엘리야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흔히 엘리야에 대해 “능력의 선지자,” “불의 선지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우리와 다른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은 그런 엘리야에 대해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먼저 “성정”(性情)의 사전적 의미는 “성질 또는 타고난 본성”이다. 영어로는 “passion”이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는 “열정, 감정, 흥분”이라는 뜻이며, “보이는 어떤 현상을 통해 영향 받는 느낌 또는 감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엘리야에게도 이 같은 “타고난 본성”이 있어서 그 역시 우리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감정이 영향을 받는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이런 모습을 열왕기상 18,19장에서 볼 수 있다. 엘리야는 칼멜 산에 모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오십 명과의 대결에서 담대하게 행동했고 큰 승리를 거둠으로 이스라엘에게 누가 참된 하나님이신지 알게 했다. 당시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때 주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도랑에 있는 물을 핥아』 버렸고(왕상 18:38), 그 놀라운 광경을 본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도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도다.』라며 땅에 엎드렸다(왕상 18:39). 이때 엘리야의 마음(감정)이 어땠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승리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로 이스라엘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게 될 것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엘리야의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칼멜 산에서 돌아온 그에게 이세벨은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네 생명을 그들 중 하나의 생명같이 만들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리고 더 내리기를 원하노라.』(왕상 19:2)고 위협했다. 이세벨의 위협에 엘리야는 금세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급기야 그의 생명을 위해 광야로 도망하고 말았다(왕상 19:4). 낙담하고 녹초가 된 그는 향나무 아래 주저앉아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칼멜 산에서처럼 이세벨과 맞서 싸워야 할 그가 지금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해가 뜨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비가 오면 구름이 낮게 드리운 찌푸린 하늘을 쳐다보며 기분도 함께 가라앉곤 한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지만, 좋지 않은 일을 만나면 쉽게 불평하고 원망한다.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엘리야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생활했다. 하나님께서는 극심한 가뭄에서도 까마귀와 사르밧 과부를 통해 그를 먹이셨고, 칼멜 산에서의 승리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돌보심을 경험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라볼 때 두려움과 낙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순간, 하나님께 대한 어떠한 믿음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지쳐 주저앉은 엘리야에게 천사를 통해 먹을 것을 주시어 기력을 회복시켜 주셨고, 그를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한 굴에 이르러 그 속에 숨어 있는 엘리야에게 조용히 다가오시어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하느냐?』고 물으셨다(왕상 19:9). 그의 현재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고, 그가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 엘리야는 “육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평만 늘어놓았는데,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특별한 일을 행하셨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산 위로 가서 주 앞에 서라.” 하시니, 보라, 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들을 가르고 주 앞에서 바위들을 산산조각냈으나 주께서 그 바람 속에 계시지 아니하였으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으나 주께서 그 지진 속에도 계시지 아니하더라.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었으나 주께서 그 불 속에도 계시지 아니하더니, 그 불 후에 미세한 음성이 있는지라』(왕상 19:11,12).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 눈에 보이는 놀라운 현상 속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엘리야는 그것들에 미동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굴속에 숨어 있었는데 그 굉장하고 놀라운 일들 후에 미세한 음성이 들려오자 비록 심히 낙심한 상태였지만 굴에서 나갔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시리아를 다스릴 왕으로 삼고, 예후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삼으며,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엘리야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새로운 사명을 맡기셨다.
이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 엘리야에 대해 성경은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삼 년 육 개월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였더니 하늘이 비를 내려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도”의 도전을 던져 주고 계신다. 기도 응답은 엘리야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와 동일한 성정을 지닌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4장에서도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루스트라에서 모태에서부터 절름발이가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한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하기를 『네 발로 똑바로 일어서라.』고 했다(행 14:10). 그러자 그 절름발이가 벌떡 일어나서 걷게 되었는데, 그 광경을 목격한 『무리가 바울이 행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음성을 높여 루카오니아 말로 말하기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우리에게로 내려오셨다.』라고 하면서 『바나바를 쥬피터라고 부르며 또 바울을 머큐리라』 부르며(행 14:11,12), 『성읍 앞에 있던 쥬피터의 제사장이 소들과 화관들을 문 앞에 가지고 와서 무리와 더불어 제사를 드리려고』 “흥분”하며 움직였다(행 14:13). 이들은 자신들이 본 일에 “감정”적으로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이때 바울은 그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 같은 일을 하느뇨?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으로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은 이러한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라』(행 14:15).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바나바가 그들과 똑같은 “성정”(passion)을 지닌 사람이라고 했다. 즉 바울과 바나바도 그들처럼 보는 것을 통해 영향을 받아 감정에 이끌려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시인한 것이며, 그렇게 보이는 것만 믿고 행동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눈 앞에서 행해진 그 기적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신 창조주 하나님을 찾을 것을 호소한 것이다.
이렇듯 타고난 성정에 이끌려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아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루스트라 사람들처럼 잘못된 신앙으로 이끌릴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교회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판단하고 결정한다면 믿음의 파선은 당연한 수순이 된다. 사람이 많이 가는 교회를 좋은 교회로 판단하거나, 어떤 목사가 ‘귀신’을 쫓는다고 교인의 머리를 잡고 기도하자 그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는 ‘희한한’ 모습을 보고서 ‘참으로 이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구나!’라고 판단한다면 결코 바른 교회를 택할 수 없게 된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육신의 “성정”에 지배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엘리야와 바울, 바나바 그 외에 성경의 모든 믿음의 위인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성도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이루던 그 순간, 그들은 육신의 성정을 따르지 않고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그들을 사용하시어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과 같은 성정에 속한 “우리”도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야 한다. 성령을 따르는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여 성령의 위대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롬 8:5). BB

BB칼럼 309 / 10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