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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구약의 구원론이 없다고 가르치는 침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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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11월호>

2008년 10월 10일자 <침례신문>에는 "구약성서의 구원론"이라는 글이 실렸다. 그것은 침신대 신학과 구약학 교수인 우택주 교수의 연재 글 중 48번째 글이다. 이 글이 어떤 내용의 글인지는 그 시작과 끝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우교수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구약성서에 구원론이 있느냐고 묻거나 그것이 어떤 것이냐고 설명을 요구하거나 또 심지어 기독교의 구원론과 구약의 구원론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 경우를 보았다...』 그리고 그 글의 끝은 이렇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구원론 혹은 유대인의 구원론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신앙인이 질문을 갖는 것은 건강한 일이지만 불필요한 질문이나 논쟁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교수의 말대로 구약 시대에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실제로 사람들이 종종 궁금해 하는 주제이며, 역시 우교수의 말대로 신약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이 굳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몰라도 신약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말 우교수의 말대로 "불필요한 질문"이나 "불필요한 논쟁거리"인가 하는 점이다. 그가 전개한 내용을 살펴보노라면 그가 이 주제에 대해 그렇게 취급한 것은 단지 그가 이 주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는 본격적인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구약성서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역사 속에서 경험되어 전해지는 하나님 이야기요 사람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와 같은 내용과 형식을 가진 구약성서인지라 처음부터 신약성서에서 지배적으로 말하는 구원론을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죄 용서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 외의 길은 없다는 사실이 분명히 설명되지만, 구약성경에서는 구원에 대한 설명이 신약성경만큼 간단명료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과 성격이 다르며, "구원"이라는 용어의 지배적인 개념조차도 서로 다르다. 신약성경에서의 "구원"은 대부분 죄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마 1:21, 롬 5:9) "구원"과 "진노," "정죄," "심판," "멸망" 등의 개념이 서로 대조되고(살전 5:9, 요 3:17; 12:47, 고전 1:18, 고후 2:15),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같은 개념으로 나오지만(눅 18:24-26), 구약성경에서의 "구원"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고(창 45:7), 원수의 손에서 구출되고(출 14:13), 전쟁에서 승리하고(삼상 17:47), 인생의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시 107:13)이라는 의미로 지배적으로 쓰인다.
그렇다고 구약성경이 신약에서와 같은 개념의 "구원"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각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 방법에 대해 비교해 보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거리"가 아니라 신약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곤 한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관련 없는 부분을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연관된 줄로 오해하고서 믿음의 기저부터 흔들리는 혼란을 경험하곤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다른 시대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다른 시대에 지금 교회 시대와 다른 구원 조건이 적용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모두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교리적으로 적용하려다가 혼란을 겪는 것이다.

우교수는 구약에서 『굳이 구원론을 꼭 언급해야 한다면 그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은 출애굽 사건과 시내 산 언약에서 발견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의를 폈다.
『1. 먼저 출애굽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시내 산에 모여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과 만나 언약을 체결하였다.
2. 출애굽 사건은 거룩한 하나님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행동하신 은혜의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선행적 은혜를 바탕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거룩한 언약을 체결한 것이니까 시내 산 언약 하나만을 두고 그곳에서 구원론을 전부 해설하기는 어렵다.
3. 구약성서의 구원론이란 오직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구약성서에서 제시하는 삶의 자세를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인류는 누구든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고 있다. 구약적 관점에서만 말한다면,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를 믿고 섬기기로 작정하면 그 때로부터 그는 구원받은 것이요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교수는 신약의 구원론과 구약의 구원론을 비교하면서 어울리지 않게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노예 생활과 원수의 추격에서 "구원"받은 것만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신약과 같은 의미의 개인 구원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설명은 신약과 전혀 다른 의미의 "구원" 곧 개인의 죄나 죄의 형벌과 아무 관련도 없는 구출 사건, 그것도 "민족적" 구출만을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출애굽"을 "구원," "은혜의 사건"이라고만 언급했고, 구약 구원론에 대한 결론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를 믿고 섬기기로 작정하면"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구약의 구원과 신약의 구원이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써놓았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우교수는 구약의 구원과 신약의 구원의 차이를 최대한 희석시키려고 몹시도 애를 써서 설명했다. 그는 구약 구원에 대한 논의 중에 이렇게 덧붙였다. 『율법을 준행하는 일도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언약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조건인 셈이라고 이해된다. 혹자가 할례나 안식일 준수를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그것들은 모두 언약의 징표일 뿐이지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들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의 표시에 불과하다.』
"율법 준행," "할례," "안식일 준수"가 "언약의 징표"이고 "구원받은 백성의 표시"이므로 구약 시대의 개인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인가? "율법 준행"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지 확인해 보라(신 27:14-26). "할례"와 "안식일 준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교수가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표현한 자들과 어떤 관계에 놓이게 되는지 확인해 보라(창 17:14, 출 31:14). "언약의 징표일 뿐이지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은 구약의 구원과 신약의 구원의 차이를 최대한 가리기 위한 표현의 장난에 불과하다.

구약 시대, 특히 율법 시대에 개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신약 시대와는 다른 조건이 필요했다. 신약 시대에는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고(고전 15:2-4), 행위는 조건에서 배제되며(엡 2:8,9, 롬 3:21-28), 그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요 10:28, 롬 8:38,39, 고전 1:8, 벧전 1:5).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구약의 구원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율법의 명령들과 규례들을 지킴으로써 생명이 약속되었다. 『너희는 나의 명령들을 행하고 나의 율례들을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규례들과 나의 명령들을 지키라. 어떤 사람이 이것을 행하면 그는 그것들로 살리라. 나는 주니라』(레 18:4,5). 이것이 구약에서 "구원"의 방법이었다.
2. 그러나 모든 사람이 율법의 명령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었고, 율법의 행위로는 완벽하게 의롭게 될 사람이 없었다(롬 3:20). 하지만 의로운 율법의 명령들을 지키지 못한 죄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짐승 희생제였다. 죄에 대해 사함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피"가 요구되었던 것이다(히 10:22).
3.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거역하여 죄를 지은 자는 누구라도 내가 그를 나의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고 하셨다(출 32:33). 민족 전체가 이집트에서 구원받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했으나, 개인이 저지른 심각한 죄는 개인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었다. "책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 신약적 의미의 "구원"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표현임을 주목하라(계 20:15).
4. "율법"에서 어떤 중요한 계명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위반할 때 아주 단호하게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포되었다(신 27:14-26). 또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중죄에 대해서는 "율법" 어디에도 속죄할 수 있는 희생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간음과 살인죄를 둘 다 범한 다윗이 용서받은 것은 거의 유일한 예외적 현상이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율법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 아주 특별한 현상인지라, 『다윗의 확실한 자비』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사 55:3, 행 13:34).
5. 율법 시대에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의인이 돌아서서 결국에 악인의 가증함대로 행한다면 그의 의는 모두 없었던 일처럼 되고, 그는 죄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겔 18:24). 대신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많은 경우에 "구원의 기회" 또한 열려 있었다. 악인이 죄들에서 돌이켜서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고 옳은 것을 행하면 그는 용서받고 혼이 구원받게 되었다(겔 18:21,27).
6. 용서의 조건으로 죄들에서 "돌이키는" 것이 언급된 것은, 기본적으로 희생제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지만 그 배후에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지도, 그 말씀에 경청하지도 않으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삼상 15:22,23). 회개 없이 드리는 형식적인 희생제는 소용이 없고 헛되며 악한 것이고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사 1:10-15). 상하고 온전치 않은 짐승으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 역시 죄를 용서받기는커녕 가증한 일일 뿐이었다(말 1:8,13,14).
7. 그러나 온전한 짐승으로 드리는 희생제라 할지라도 죄를 덮어 두는 것이지,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히 10:4).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않았다(출 34:7). 짐승 희생제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짐승은 인간을 대신하기에는 무가치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완전한 대속물이 될 수 없었다. 짐승 희생제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일종의 "외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 값은 추후에 반드시 치러져야 했다.

구약의 구원론은 신약의 구원론만큼 단순명료한 선을 그을 수는 없을지라도 대체로 이상에 열거한 것과 같으며, 신약의 구원론과 구별짓기에는 정보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구약과 신약의 구원의 방법은 이처럼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확실히 다르다. 단 구약과 신약의 구원의 근간이 결국에 한 곳으로 도달하게 될 뿐이다. 구약의 구원은 다만 "외상"과 같은 것으로서 아직 구원의 근간이 완성되지 않았다. 값이 지불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그 모든 값이 치러졌다(요 1:29). 그 죽음으로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할 수 있게 되었다(히 9:15). 그리고 "외상"값만 지불된 것이 아니고, 앞으로 치러야 할 값도 모두 영원히 지불되었다(히 10:11,12). 그 죽음은 짐승 희생제가 해결할 수 없는 중죄들, 곧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죄에 대해서도 값을 모두 지불했다. 그 어린양이 죽을 때 "살인자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가 올려졌고(눅 23:34), 그 어린양이 죽은 후 선포된 첫 번째 설교는 "살인자들"의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행 2:36). "살인"에 동참했던 한 죄인의 사례는 어린양의 죽음 이후로 가장 유명한 용서의 사례가 되었고(행 26:9,10), "간음하는 자들" 역시 그 값으로 용서되었다(고전 6:9,11). 그 죽음은 인류 역사에 등장했고 등장해 있으며 또 앞으로 등장할 "모든 사람"의 죄에 대해 값을 치르고도 남았다(딤전 2:6).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값으로 지불되셨기 때문이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구원의 근간은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뿐이다. 그러나 구원의 방법은 다르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은 신약 교회 시대뿐이다. 신약 교회 시대를 제외하고는 행위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신약 교회 시대 이후에 잠시 펼쳐질 대환란 시대에도 마찬가지다(계 12:17; 14:12). 구원의 근간이 한 곳으로 귀착된다는 것을 오해하여 구원의 조건과 방법이 항상 똑같다고 생각하면, 언젠가는 교회 시대의 구원에 다른 시대의 구원의 조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포함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수도 있다. 성경에서 다른 시대의 구원 방법에 대해서도 공부해 봄으로써 현 교회 시대의 구원에 대해 더욱 확실히 정립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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