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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인 진화론과 불교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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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1월호>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은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후 4:4). 결국 그런 그들의 죽은 영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에(고전 2:14), 어두움으로 가득 찬 그들의 이성과 생각과 마음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이른다. 그 양상은 종교나 철학, 과학이론 등 다양한 형태들로 나타나 그들 스스로 서로 반목과 소통을 거듭하기도 하지만, 진리를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는 서로 간에 차이가 없다.이는 그 모두가 사탄에 의해 고안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지혜롭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실로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에 불과하며, 거짓되게 일컬어지는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에 불과할 뿐이다(딤전 6:20, 골 2:8).
지난 11월 27일, 이런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 가운데 선두주자라 불릴 만한 “진화론”과 “불교”가 한자리에 마주했다. 다윈 출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이하여, 과학과 종교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반목의 고리를 끊고 이를 위한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학술대회의 특이한 점은, 진화론으로 대변되는 과학이 창조론을 표방하는 기독교와 소통을 모색하기 위해 자리가 마련된 것이 아니라, 불교와의 유사점과 접점을 찾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는 사실이다.
사실 불교는, 진화론과 지난 150여 년 동안 첨예하게 갈등을 벌여왔던 기독교와는 달리, 어느 정도는 원활한 소통을 이루어왔었다. 요는 “우주 만물은 고정된 것이 없다”(제행무상)는 불교의 교리가, “모든 생명체가 환경에 순응하면서 그 형태를 끊임없이 변화해가고 진화해간다”는 다윈의 진화론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티베트의 승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다윈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영국의 심리학자 폴 에크만은 “다윈이 티베트 불교를 직간접적으로 접해 왔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자,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불교에 손을 건넨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그들에 관해 지적하고 있는 바대로,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에 불과한 과학과 종교적 철학이 서로 간의 유사점들을 찾아 내놓는 이론들과 교리들이 얼마나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으며, 얼마나 진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쭉정이가 밀에게 아무것도 아니듯이(렘 23:28), 그들의 유치한 주장들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시고 영원토록 보존하시는 성경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제 본 학술모임에 발제자로 나선 자들의 유치한 주장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지혜로 그들을 바로잡도록 하자.
오랫동안 자연과학과 철학 간의 교류를 시도해왔던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이화여대 석좌교수)는 다윈의 진화론과 불교의 무아연기론1)을 비교하면서, “나(我)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구성 요소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무아론은, 생명체는 소멸해도 DNA는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진화생물학의 원리와 흡사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람은 단순히 우주의 구성 요소들의 집합체나 DNA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더군다나 이런 요소들의 “우연한” 결합이나 “우연한” 분리로 인간이 태어나고 죽으며 “영원한” 윤회의 고리를 형성하여 진화해 나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유치한 주장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성경은, 땅의 흙(몸)으로 지어진 인간은 그 안에 생명의 호흡(영)이 불어넣어진 “살아 있는 혼”(혼)이라고 말씀한다(창 2:7). 이처럼 몸, 혼, 영으로 구성된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육신의 몸 안에 실재하는 “혼”인 것이다. 인간의 혼은 육신의 몸과 똑같이 생겼는데(눅 16:19-31), 몸과 달리 비물질이다. 비물질이기 때문에 죽으면 소멸되지 않고, 영원이란 시간을 실재하는 하늘 나라나 지옥 둘 중 하나에서 보내게 된다.
따라서 “영원히 살아남는다!”라는 말은 진화생물학이나 불교의 무아론에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이는 “영원한 존속”에 관한 한, 우주의 구성 요소나 DNA는 끼어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영원하다고 말하는 모든 구성 요소들은 사실상 종국에는 불타 없어질 유한한 것들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내릴 것이나』(벧후 3:10,12).
그러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혼”은 영원히 존속된다. 문제는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인가이다. 이러한 성경적 사실을 전혀 받아들일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거듭나지 못한 최교수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자연의 일부로 거듭나기를 희망하거나 “공”(空, 허무)에 불과한 불교에 귀의하는 것뿐이다.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생명은 언뜻 섬뜩하고 허무해 보이지만 그를 통해 스스로가 철저하게 겸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자연의 일부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기본 교설이 말하는 ‘무상함’과 무아의 ‘공’(空)의 개념에 도달하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리석은 지혜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벧전 1:23), 그의 혼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 가운데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결단코 피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불교적 함의”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안성두 교수(서울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교 관점에서 보면 DNA는 업을 보존하고 있는 업종자로 볼 수도 있다.” 환언하자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업종자인 DNA는 영원히 살아남아 있어, 후일 어떤 “우연한” 기회로 “우연한” DNA의 조합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될 때, 이 전생의 “업”을 가지고 소나 돼지, 개구리나 뱀 등으로 환생하게 된다는 것인데, 실로 이것은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보고자 내놓은 유치한 발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왜 죽고 또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죽은 뒤에도 자신의 DNA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그 안에 선한 “업”을 지속적으로 쌓음으로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자신의 죄가 없어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불교나 진화론과 같은 유치한 원리들은 인생의 주요한 문제에 대해 결코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롬 5:12). 이는 죄 역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에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하나님의 선고대로 모든 인간은 죽게 되었는데, 인간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전 3:21), 몸은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전 3:20). 그렇다면 혼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선고대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참여하게 될 터인데 성경은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한다(계 21:8). 이것은 영원한 심판이요, 영원한 고통이기에 죄인인 모든 인간은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전생의 “업”을 잘 쌓아나가 양질의 “DNA”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속받음으로써만이 얻을 수 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인 홍성욱 교수는 불교의 윤회설 및 연기설과 모든 종을 “생명의 나무”로 연결된 존재로 보는 진화론과의 형식적 유사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희한한 주장을 내놓았다. “흔히 불교는 과학적 종교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서는 창조주의 권능과 과학 사이에서 빚어지는 마찰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의 반론”(딤전 6:20)을 거스르는 주장이 아니라면 우상 숭배나 미신적인 그 어떤 것이라도 과학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법칙이 아닌 이론, 진리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가설을 말해도, 그것이 “과학의 반론”에 순응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불상에 절하고 윤회를 믿는 것이 과학인가?
사실 진화론자들은 “근거 없는 가설들”을 맹신하는 우상 숭배자들이다. 그들은 에너지가 갑자기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우주 전체의 질서가 무질서로 향하여 가고 있다는 “열역학 법칙”을 말하면서도, “우연과 진화”와 같은 가설들을 믿는 우상 숭배자들이다.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몇 조각의 뼈들을 근거로 인류의 진화를 설명하려는 그들은 실로 “대단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런 부류에 속한 홍교수가 불교를 과학적 종교라고 말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진화론의 철학에 관하여 발제한 이한구 교수(성균관대)는 진화론적 이성주의에 주목하면서, 이성은 진화의 산물로서 이성의 출현에 의해 다른 생명계로까지 윤리의식이 확대되었고, 진화론적 이성주의의 최고봉을 불교의 이타주의와 자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성이 진화의 산물이라면 인간의 이성이나 윤리의식은 출현한 이래로 지속적으로 “진화”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까지 가장 진화된 “현대인”의 이성이나 윤리의식은 과거 “크로마뇽인”이나 “자바인”의 윤리의식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오히려 “현대인”의 이성이나 윤리의식이 더 악화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들로 향해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인데, “진화”된 이성과 윤리의식의 현 주소를 디모데후서 3:1-5을 통해 확인해 보라.
사실 “진화론적 이성주의”는 인본주의의 주된 가치관이고, 적그리스도에 의해 정점에 이를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인간의 “진화된(?) 이성”을 통해서 이 땅에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한 “왕국 건축자들”의 망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진정한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종교인들이고, 과학자들이고,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와 이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철저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말이다.
결론
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유치한 말들에 자신의 귀를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국내 최고의 지식인들이 내놓은 말이라고 해서, 지혜로운 말들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어느 누구라도 영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다면, 그런 자들의 말은 “유치한 수준”을 결코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골 2: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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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기론(緣起論)이란,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원소,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이 어떤 인연으로 결합되어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가, 어떤 환경에 의해 다시 각각의 원소로 분해되어 우주에 환원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주장하는 불교의 교리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