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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왜 이리 무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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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4월호>
한국 교회가 무지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130여 년간의 한국 기독교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바르게 보존된 성경과 진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우선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도, 물리적인 돌들로 쌓아 올린 “성전”도 아니다. 지상 생애 마지막 주간에 성경의 예언대로(슼 9:9)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백성들을 책망하시면서 “성전,” 곧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눅 19:46)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재림 때 세워질 “천년왕국 성전”을 염두에 두시고 이사야 56:7을 인용해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교회”를 건물이나 성전으로 오해한 이 나라 목사들은 이 말씀을 곡해하여 자기들 “교회 건물 벽”에 이 구절이 인쇄된 현수막을 걸어 놓는다. 그뿐만 아니라 『대로와 산간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도록 하라』(눅 14:23)라는 말씀도 오해한 나머지 “새 신자 초청 집회”나 “이웃 초청 간증 집회” 등을 열어서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을 “억지로” 데려와 교회 건물을 가득 채우곤 하는데, 이러한 집회에는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푸짐한 선물이나 음식 혹은 각종 이벤트 및 콘서트(열린 예배)가 양념처럼 가미된다.한편 흔히들 오해하듯이 “로마카톨릭”은 교회가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2천 년의 교회사 어떤 기간에도 그런 종류의 교회는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행 20:28)를 흉내 내는 “가짜 교회”로서 마귀들의 거처이자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일 뿐이다(계 18:2).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순교자들의 피에』(계 17:6) 취한 이 음란한(계 17:2) 집단은 적그리스도(사탄이 육화한 존재), 곧 “짐승”의 신부인 큰 창녀이고(계 17:1-3), 그들의 수장인 “교황”은 기만하는 사탄의 종이자(고후 11:15) “적그리스도의 예표”이다. 필립 샤프를 위시하여 로마카톨릭을 교회라고 착각하는 친카톨릭 교회사가들은 로마카톨릭의 역사를 “참된 교회사”로 간주하지만, 사실 그들의 역사는 “반(反)교회사”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Baptist Church)는 “반(反)카톨릭”을 표방하는데, 특히 여기서 “침례”(Baptist)는 “반카톨릭”(Anti-Catholic)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다.
또한 교회는 단순한 “조직체”가 아니다. 그 조직체에 속한 회원들의 권익을 도모하고 상호 교류를 장려하는 “사회단체”가 아니다.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고 인맥을 넓혀 가기 위한 “사교의 장”도 아니다. <세대적 진리>의 저자 클라렌스 라킨이 말했듯이, 교회는 불신자들의 돈을 모아 가난한 회원들을 돕기 위해 면죄부나 어떤 상품을 파는 “상점”도 아니다.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 주고, 불우 이웃을 도와주며, 독거노인들을 위해 김치를 담가 주고 연탄을 날라 주는 “사회복지단체”나 “자선단체”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시고 그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셔서 교회에게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 모든 것들을 채우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 1:22,23). “유기체”로서 지금도 계속해서 자라 가고 있는바, 눈에 보이지 않는 “살아 있는” 건물이다(엡 2:20-22). 교회가 살아 있는 건물로 비유되는 이유는 그 건물을 구성하는 구성원들 모두가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살아 있는 돌들”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각각의 돌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영적인 집으로 지어지고 있는 것인데(벧전 2:5), 이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건축물”(고전 3:9)이라고 말했다.
물리적인 건물이 아니라 “영적인 집”인 이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전”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네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니라』(딤전 3:15). 이 말씀에 따르면 진리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될 수 없다! 이 나라에는 “진리”가 부재한 자칭 교회들이 5만 6천 개나 된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데(요 17:17), 그들이 사용하는 변개된 성경들, 곧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들』(시 12:6)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 “가짜 교회들”은 진리를 지지할 수 있는 기둥도, 터전도 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감히 수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직 완고함과 무지 속에서 배격하기만 한다.
어느 곳에서나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살피시는(잠 15:3)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열려』(시 34:15) 있으시기에, 의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믿고 실행하는 참된 교회의 기도만 들으실 뿐, 진리에 관심조차 없고 엉뚱한 일에나 신경 쓰는 가짜 교회들의 기도는 가증스럽다며 아예 듣지도 않으신다. 『율법을 듣는 데서 귀를 돌이키는 자는 그의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리라』(잠 28:9).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전혀 무관한 교회들은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기도”를 통해 무언가를 해 보겠다고 또다시 나섰는데, 작금의 코로나19 정국 속에서 “부흥”이니, “개혁”이니, “회복 운동”이니 하면서 케케묵은 표어를 다시 꺼내 든 것이다. 이름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 주최로 열리는 “2021 Prayer Again 기도회복운동”으로서, 지난 3월 7일에 가진 “출범 예배”를 시작으로 6월 27일까지 장장 4개월간 이어질 예정이다. 이 “기도 집회”의 목적은 단 한 가지, 한국 교회의 “부흥”이다. 이 교단의 총회장인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의 말을 들어 보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코로나19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교회 생태계마저 초토화되었다... 많은 교회가 영적인 답보 상태에 놓여 있고 자포자기하는 목회자들의 소식도 들린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심령의 부흥이다...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거룩한 소비와 헌신을 하는 ‘골수(骨髓) 팬덤(fandom)’이 되자.”
여기서 성경에 완전히 무지한 소 목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첫째, 코로나19가 이 나라 전역을 강타하기 전에도 이미 한국 교회는 영적으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사실 영적인 황폐함과 말씀들을 듣지 못하는 극심한 기근으로 초토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코로나19를 보내신 것이다. 이러한 진노의 심판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배격하는 풍조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부흥의 역사는 성경에도 없는 “거룩한 소비”나 “골수 팬덤”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교회 이름으로 지은 “새에덴” 역시 성경에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무지하다면 무지하게 내버려 두라』(고전 14:38).
특히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거부하고 진리의 말씀에서 귀를 돌이킨 자들의 기도로는 절대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교회사를 통관해 볼 때 “부흥의 역사”는 항상 “바른 성경의 역사”와 맥을 같이해 왔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에서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1500-1900, 계 3:7-13)가 부흥의 시대요, 복음과 말씀과 선교의 문이 열린 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인데, 곧 <킹제임스성경>을 위시하여 바른 성경을 신실하게 “보존”했고, 오직 그 성경만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실행”했던 것이다. 『내가 너의 행위들을 아노라.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노라. 이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나의 말을 지켰고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계 3:8).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에 미국이 낳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 “윌버 채프만”(1859-1918)은 이렇게 말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가 가라앉는 이유는 배가 물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사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고,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현실이 위험한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이나 프로그램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 교회 안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친 그 말씀대로 실행하며 사는 것이다.”
부흥이 일어나려면, 우선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져야 한다. 곧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하는 것이다. D.L. 무디의 신실한 동역자 R.A. 토레이(1856-1928)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 안에 있는 각 성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개인 구령자가 된다면 교회가 세워진 지역에 엄청난 부흥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 다녔던 직장의 인사부장이 늘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다. “무슨 일을 할 때는 말이지 ‘뚜껑’이 열려야 해! 뚜껑이 열릴 정도로 그 일에 집중하고 몰입해야 성과도 나고 매출도 올릴 수 있는 거라고!” 흔히들 어떤 밀폐 용기 뚜껑이 잘 안 열릴 때 어떻게 하는가? 그 용기의 내부 온도를 높여 준다. 뚜껑을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잠깐 덮어 주거나 따뜻한 물로 살짝 데워 주면 되는 것이다. 내부 온도가 올라가면 그 안의 “공기”가 팽창되어 뚜껑이 쉽게 열린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Spirit)께서 내주하신다. “영”(spirit)은 바람이고 “공기”다. 우리 안에 내부 온도를 높여서 이 공기를 데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진리의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경험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그분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성경을 열어 보여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하며』(눅 24:32). 그처럼 진리의 말씀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게 되면, 우리 역시 밀폐된 용기의 뚜껑이 열리는 것과 같은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견디는, 그런 마음을 억제하고 참았다가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그런 열정이 우리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그를 언급하지 아니하고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내 뼈들 속에 사무치는 타는 불 같아서 내가 참기에 지쳤고 견딜 수 없었나이다』(렘 20:9).
실제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장 그 시간에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열한 제자들과 그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것을 보자 말하기를 “주께서 참으로 살아나셨고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고』(눅 24:33,34) 증거했던 것이다. 어떤 지역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로만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야말로 “교회 건물 지붕”을 위로 날려 버릴 정도의 경건한 능력과 영적인 힘과 뜨거운 열정이 부흥과 더불어 치솟을 것이다. 이 배교한 시대에 그런 현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오늘날처럼 부흥과 개혁을 그렇게 많이 부르짖으면서도 부흥과 대각성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교회 시대는 2천여 년 교회사에 없었다. 왜냐하면 “엑스플로(EXPLO) 74,”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 “성시화 운동,” “성령 집회,” “회초리 기도 대성회,” “말씀 대성회” 그리고 “2021 Prayer Again 기도회복운동” 등과 같은 “경건의 모양”만 가득 찬 인본주의적인 구호나 프로그램 따위로는 결코 성경적 부흥과 개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려면 “설교 강단”이 살아나야 한다. 피에르 베르톤(Pierre Berton)은 “오늘날의 설교는 영이 부재하고 부적합하며 따분하고 잘못 전달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말씀을 듣는 회중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강한 찔림”과 생각 및 행동의 변화를 낳을 만한 “강한 도전”을 심어 주어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게 하고, 세상과 죄로부터 성별하게 하며,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신실하고 헌신적인 성도로 서게 해야 할 “설교”가 만담이나 도덕적 훈화, 교인들의 지루해하는 눈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줄 코미디나 쇼로 대체되고, 심지어 “비진리”를 퍼트리는 도구가 되어 믿음을 뒤엎어 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 강단의 현실이다. 이 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이래로 이 민족을 복음화시킨 설교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강단이 완전히 죽어 버린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바른 성경과 진리를 거절한 “목사들”에게 있다. 지금이라도 그들은 바른 성경으로 돌아와 그 앞에 부복하든지 아니면 당장 강단에서 내려와야 한다. 자격 없는 설교자들이 계속해서 강단에서 설쳐 대면 부흥과 개혁은 더욱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2021 Prayer Again 기도회복운동”처럼 가련한 교인들의 돈이나 축내는 쓸데없는 집회는 지금 당장 중단해야 한다! “잘못된 일을 참아 주면, 더 많은 잘못된 일을 당할 뿐이다”(머피의 법칙).
또한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진지하고 효과적이며 열렬한 기도”가 필요하다. 지난 6천여 년간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들은 유명한 왕들이 아니었다. 교황들, 정복자들, 정치가들, 철학자들, 과학자들, 의사들, 예술가들, 문장가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기도에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1832-1905)가 자주 확신에 차서 했던 말이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일은 진지한 기도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절대적인 수단”이며, 부흥과 개혁을 위한 “밑거름”으로서 죽어 있는 성도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인 것이다.
능력 있는 사역을 통해 4백만 명의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했던 요한 웨슬리는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닐 때마다 한 나이 많은 신실한 “기도의 동역자”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부흥을 원한다면 진지한 기도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마음이 냉랭한 상태로 죽어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첫사랑도 식고 하늘의 본향에 대한 소망으로 심장이 뛰고 있지 않다면, 지금 당장 모든 일을 멈추고 골방으로 들어가 주 하나님께 은밀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저의 가장 큰 열망이요 변치 않는 기도는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이며 그분의 성도들이 부흥하는 것입니다. 멸망하는 죄인들을 향한 뜨거운 연민을 주소서. 저로 영원을 설교하게 하시며, 영원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영원을 전파하게 하소서”(랄프 왈러).
부흥을 위한 마지막 조건은 “성경적 성별”이다. 지금 당장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엡 5:14). <구령의 열정>을 저술한 오스왈드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삶에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밤이 새도록 기도해도 부흥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이는 악인들의 기도가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가증할 뿐이고, 또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기도를 절대로 듣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별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또한 그 기도를 들으셔서 위대한 능력을 그들의 눈앞에서 행하신다. 교회 안의 성도들이 성별을 위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복하고 회개할 때, 그리고 성별을 위해 분연히 일어날 때 부흥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영원에 거하시는 높고 우뚝 솟은 분, 그의 이름이 거룩이신 분이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여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는도다』(사 57:15).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계 2:7).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