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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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하지 않은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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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4월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신뢰하여 구원받은 성도는 그 이후로도 중단 없이 성별된 삶, 승리의 삶, 열매 맺는 삶을 통해, 거룩한 생활을 영위한다는 의미에서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가야 하는데(빌 2:12), 이를 위한 첫 단계가 바로 “헌신”이다. 헌신을 통해 참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합당한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다. “거룩한 삶”의 비결 역시 헌신에 달려 있다.

“마귀의 목표”는 양들의 생명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데 있다(요 10:10). 마귀는 어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목표를 수정하여 다른 계략들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그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하지 않고 세상과 일치한 삶을 살게 될 때 마귀의 모든 계략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흔히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헌신에는 반드시 “대가”가 뒤따르기에 헌신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헌신하지 않을 때도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는데, 이를 “삼손”과 “롯”의 경우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우선 참된 가치관을 잃게 되어 올바른 목표를 지향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참된 가치를 지닌 대상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결국 그것을 무시하고 경멸하게 된다. 에서는 “장자상속권”의 가치를 가볍게 여긴 나머지 하나님을 경멸하는 “속된 자”가 되고 말았다. 삼손은 “경건한 부모”(판 13:8,12)의 가치에 대해 무지했기에 부모를 무시했고(판 14:1-3),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인 가치들도 무시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특권을 소중히 여기면서 사용하는 매우 가치 있는 인생 대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이나 즐기는 비극적인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계획하면서 몸을 주님께 드리지 않고 사는 인생에는 참된 가치관이 결여되어있다. 롯은 구원은 받았어도 헌신을 하지 않은 성도, 곧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예표한다. 비옥하고 풍부한 안락한 생활에만 마음을 빼앗긴 롯은 죄악의 도시인 소돔을 선택했다. 그곳에서의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번영은 『의로운 롯』(벧후 2:7)의 삶의 목표와 본질을 흐리게 했다. 결국 참된 인생의 가치를 잃어버림으로써 “왜 자신이 아브라함을 따라 칼데아 우르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마저 망각해 버렸는데, 현 세상의 의식주에만 인생의 목표를 맞추고 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공적인 삶”이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그 뜻을 이루어 나가는 삶인데, 헌신하지 않는 성도는 결단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헌신하지 않는 성도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진리와 무관한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눈멀고 멀리 볼 수도 없기에(벧후 1:9), 이제 곧 “다가올 세상”에 대해서는 지식으로나마 알기는 알아도 그날을 실제로 대비하지는 않는다. “하늘나라”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지만 간절히 사모하지는(골 3:1,2) 않는다. “믿음의 경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실제로 경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너저분하게 앉아 구경만 하는 것이다. “영적 전쟁” 역시 그 심각성에 대해 말은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옷으로 무장하지는 않는다.



2. 다음으로는 자기의 몸을 망가뜨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저주하게 된다. “삼손의 몸”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는 모태로부터 하나님을 위해 성별된 “나실인”으로서(판 13:5)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면 안 되었고, 머리를 깎아서도 안 되었으며, 시체 역시 가까이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작 꿀을 얻기 위해 “죽은 사자의 시체”에 고의적으로 손을 댐으로써 스스로를 더럽혔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별된 몸”을 죄와 더불어 장난치는 일에 방치해 둠으로써 자신을 망쳤다. 간음을 통해 창녀와 더불어 자신의 몸을 더럽혔으며, 심지어 그녀에게 자신의 머리를 깎을 수 있도록 몸을 내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경멸했는데, 그 결과 주님께서는 그 위대한 힘과 능력을 삼손으로부터 거두어 가셨고 필리스티아인들의 포로로 붙잡히게 하셨다. 이에 그들은 삼손의 양 눈을 빼 버렸고, 그를 족쇄로 채워 감옥에 가두고는 맷돌 돌리는 일을 시켰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여 헌신한 성도의 몸을 통제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억제하여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하는데(고전 9:27), 이것은 기꺼이 몸을 드릴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헌신하지 않으면 몸을 절제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결국 몸을 망치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삼손은 “버림받은 성도”를 예표하는데, 아무리 죄들을 자백함으로써 용서를 받고(요일 1:9)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했다 해도 몸에 고스란히 배어 버린 죄의 “열매들”까지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삼손의 경우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지만 그것이 그를 족쇄로부터 풀어 주지는 못했고, 여전히 눈도 멀어 있었으며 감옥에서 맷돌도 돌렸다.

죄는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다. 죄는 육체적인 영역, 감정적인 영역, 정신적인 영역, 영적인 영역 등 전 영역에 “흔적”을 남기는데, 그 흔적이 온전히 치유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회복이 불가능한 흔적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과의 파괴된 관계, 후회, 죄책감, 열등감,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하는 습관적인 불신, 냉랭하게 변한 기질 등이 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요하게 그 사람을 물고 늘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몸을 절제하지 못하여 저지른 죄의 후유증은 무덤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갈 6:7).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의 몸을 더럽히고 인생을 파괴시킨다. 자신의 몸 안에 죄를 미워하시고 거룩하시며 깨끗하시고 순수하신 성령님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면 부주의한 삶을살게 된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을 무서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식할 때인데, 결국 헌신하지 않는 성도는 그런 사실을 의식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아주 귀중한 구원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은이나 금 같은 썩어질 것들로 구속된 것이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벧전 1:18,19) 때문에, 구원받은 이후의 남은 생애를 “거룩하게 보내고 두려움 속에서 지내라.”라는 명령이 주어진다(벧전 1:14-17). 또한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벧전 1:23) 거듭났기 때문에, 바로 그 영원한 말씀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명령도 받는다(벧전 2:2). 잘 자라기 위해서는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하는데(벧전 2:1), 이는 헌신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깨끗한 삶을 살지 않는 성도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진가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다. 여전히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고 있다면, 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옛 사람의 더러운 육신적인 생각과 행실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께 다가서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런 사람을 멸하실 것이다!(고전 3:17)



3.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회”를 잃는 것은 “영향력”을 잃는 것을 뜻하고, “영향력”을 상실하는 것은 “능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롯이 다가올 심판에 관하여 경고했을 때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창 19:14). 롯의 아내는 마음속에 소돔의 사치와 쾌락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 성읍을 빠져나오면서도 여전히 그곳에 연연한나머지 뒤를 돌아보았고, 결국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딸들 역시 구출은 되었어도 이미 몸에 배어 버린 소돔의 생활 방식 때문에 아버지 롯과 동침함으로써 향후 이스라엘의 원수가될 민족들의 조상들을 낳았다. 롯은 그가 속한 지역 사회는 물론, 그의 가족에게조차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헌신하지 않으면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향력을 잃는 수준에서만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욕되게까지 한다. 필리스티아인들의 “다곤 신전”으로 끌려간 삼손은 하나님의 적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는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삼손을 “힘이 센 무적의 이스라엘의 재판관”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헌신하지 않았던 삼손이 저지른 그 죄는 “능력 있고 두려운 전사”를 원수들 앞에서 한낱 우스갯짓이나 하는 “어릿광대”로 전락시켰다. 이로 인해 필리스티아인들은 그들의 신 다곤을 영화롭게 하면서 그 승리의 영광을 다곤에게 돌렸다. 삼손이 헌신하지 않은 대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것은 물론, 그분의 이름이 모독받고 말았던 것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을 당시 선지자 나단은 다음과 같이 책망했다. 『그러나 이 행실로 인하여 왕이 주의 원수들에게 하나님을 모독할 큰 구실을 주었으니』(삼하 12:14). 이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불명예가 돌아가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헌신하지 않음으로써 대적들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역을 모독할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전쟁에서 롯이 포로로 붙잡혀 갔을 때(12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그를 구출해 주심으로써 롯이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롯은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롯은 그때라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이켰어야 했고, 또한 아브라함과 더불어 이 땅에서 순례자의 삶을 살겠다고 다시 헌신했어야 했다. 하지만 육신적인 롯은 여전히 소돔의 생활방식을 동경했고 그곳의 지도자의 위치까지 올라가더니(창 19:1), 결국 사악한(창 13:13) “소돔인”으로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셨다. 분명 극한 모멸감과 비참함 속에서 그는 지난날들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생애 처음으로 가장 진지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이번 한 번만 나에게 힘을 주옵소서』(판 16:28). 이에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용서하셨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마지막 기회”였으니, 이는 그가 여전히 “자신의 두 눈”을 위해서만 복수하려 했기 때문이다(판 16:28).



사실 헌신함으로써 치러야 할 대가는, 말 그대로 “대가”라기보다는 오히려 결코 후회할 것이 없는 영원한 영광에 대한 “투자”이다. 그러나 헌신하지 않음으로써 치러야 할 대가는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가장 후회스러운 대가가 된다(히 12:17). 이는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들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헌신을 미루어 놓고 살았는가? 이제라도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진지하게 간구하라.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로 당신을 받아 주실 것이고,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어 주님의 영광을 위해 다시 한번 당신을 사용해 주실 것이다. BB

특집 목회자 칼럼 46 /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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