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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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교훈 7 - 누룩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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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4월호>

『한편 아하스왕이 앗시리아의 티글랏필레셀왕을 만나러 다마스커스에 갔다가 다마스커스에 있는 제단을 보고, 그 제단의 양식과 모양을 그 모든 솜씨대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니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이 다마스커스에서 보낸 모든 것을 따라 제단을 세웠더라... 왕이 다마스커스에서 돌아와서 그 제단을 보고 그 제단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더라』(왕하 16:10-12).
유다 왕 아하스는 이스라엘의 가장 사악한 왕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사악함은 열왕기하 16장과 역대기하 28장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아하스는 이십 세에 치리하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을 치리했는데, 그의 조상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했다. 『바알들을 위하여 주조한 형상들을 만들었으며 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분향하고』(대하 28:2,3), 『정녕,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의 가증함들을 따라 자기 아들로 불을 통과하게 하였으며 또 그가 산당들과 산들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하고 분향』한 것이다(왕하 16:3,4). 그가 자기 아들로 불을 통과하게 했다는 것은 역대기하 28:3에 따르면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가증함들을 따라 그의 자녀를 불살랐다.”는 뜻이다. 일국의 왕이 자기 자식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이방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는 것은 그의 사악함이 하늘을 찔렀음을 보여 준다.
아하스는 그런 왕이었다. 그는 『너는 네 씨 중의 누구도 몰렉에게 주어 불을 통과하게 하지 말 것이며』(레 18:21)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대적했다. 시편 기자는 자식을 불태워 이방의 우상에게 바치는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녕, 그들이 자기 아들들과 자기 딸들을 마귀들에게 제물로 바쳐 무죄한 피, 즉 자기 아들들과 자기 딸들의 피를 흘려 카나안의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쳤으니 그 땅이 피로 오염되었도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들의 행실들로 더럽혀졌고 자기들의 만든 것들로 음행하였도다. 그러므로 주의 진노가 자기 백성을 향하여 발하였으므로 그가 자신의 유업을 미워하시어 그들을 이방의 손에 주셨으니 그들을 미워한 자들이 그들을 지배하였도다』(시 106:37-41). 아하스왕의 그와 같은 악행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시편 말씀처럼 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왕을 시리아 왕의 손에 넘기셨고, 시리아인들은 그를 치고 유다 중에서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마스커스로 데려갔다. 주님께서는 아하스를 이스라엘 왕의 손에도 넘기셨는데, 이스라엘 왕은 그를 쳐서 크게 살육했다(대하 28:5,6).
이때 아하스왕이 도움을 구한 것은 앗시리아의 티글랏필레셀왕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때까지 범해 온 죄들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일진대, 아하스는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이방 제국의 왕을 의지하는 가중죄를 범하고 말았다. 성경은 아하스의 이러한 됨됨이를 한 구절로 제시하고 있다. 『아하스가 그의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주를 거역하여 더 많이 범죄하니라. 이것이 그 아하스왕이더라』(대하 28:22).
아하스왕에게는 고난 중에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믿음과 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전무했다. 오히려 스스로를 티글랏필레셀왕의 『신하요, 아들』로 자처했고, 『나를 치려고 일어선 시리아 왕의 손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서, 나를 구해 주소서.』 하면서 『주의 전과 왕궁의 보물창고에 있는 은과 금을 취하여 앗시리아 왕에게 예물로』 보낸 것이다(왕하 16:7,8). 앗시리아 왕은 그에게 경청하고, 다마스커스를 치러 올라가서 그것을 취하였으며 그 백성을 킬로 사로잡아 끌고 가고 시리아 왕 르신을 죽이게 된다(왕하 16:9).
그 뒤에 일어난 일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다. 아하스왕은 자신을 위해 싸워 준 티글랏필레셀왕을 만나러 다마스커스에 갔다가 그곳에 세워진 제단에 매혹되고 만다. 그래서 그 우상 제단의 양식과 모양을 그 솜씨대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는데, 우리야는 아하스왕이 다마스커스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 제단을 완성했다. 그 뒤로 전개되는 아하스왕의 죄악은 점진적으로 심화된다.
우선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 놓은 이방 신의 제단 위에 제사를 드렸다. 『왕이 다마스커스에서 돌아와서 그 제단을 보고 그 제단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더라』(왕하 16:12).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아니었다. 『그가 자기를 친 다마스커스의 신들에게 희생제를 바치며 말하기를 “시리아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므로 나도 그 신들에게 희생제를 바쳐 그 신들로 나를 돕게 하리라.” 하더라.』(대하 28:23)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앗시리아 왕에게 패배해 버린 시리아의 능력 없는 신들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주님의 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어처구니없는 우를 범한 것이다.
아하스의 이러한 모습은 이미 망해 버린 세상에 있는 것들이 좋아 보여서 그 모양과 양식을 그대로 본떠서 교회에서 행하는 것에 빗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제물은 “찬양의 제물(히 13:15)과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는 것(히 13:15), 선을 행함과 함께 나누는 것(히 13:16, 빌 4:17,18), 성도 자신의 몸(롬 12:1), 그리고 믿음(빌 2:17)”인데, 이러한 성경적인 제물이 아닌 세상의 제물을 교회로 들여와 주님께 드리겠다고 요란을 피우는 일이 배교한 교회들 안에 넘치고 있다.
즉 그들은 찬양의 제물 대신 세상 음악을 담은 CCM과 트로트 찬양을 부른다. 성도들끼리 선을 행하고 나누는 대신 교인들에게서 우려낸 각종 헌금을 세상과 나누는 데 써버린다.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대신 그 몸으로 세속적인 춤을 추고(CCD, Contemporary Christian Dance),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대신 교회 안에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믿음을 흉내내며 자행하는 비성경적인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아하스왕의 제단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히 8:5)가 아닌 것처럼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이제 “다마스커스식 제단”에 제사를 드린 아하스왕은 주의 전에 있는 받침대의 테두리들을 뜯어내고 물대야를 그것들로부터 옮겼고 바다를 받치고 있는 놋소들에서 내려 돌판 위에 두었으며, 또 사람들이 전 안에 안식일을 위하여 건축했던 덮개와 왕이 밖에서 들어오는 입구를 앗시리아 왕을 위하여 주의 전으로부터 옮기는 일을 자행했다(왕하 16:17,18). 말하자면 성전의 구조물들을 임의로 해체한 것이며, 그 위치를 변경시키는 일을 감행한 것이다. 아하스왕은 결국 『하나님의 전의 기명들을 한 데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명들을 산산조각내었으며 주의 전의 문들을 닫아 버리고 예루살렘의 모든 모퉁이마다 그를 위한 제단들을 만들었으며 또 유다의 각 성읍에 다른 신들에게 분향할 산당들을 만들어 그의 조상의 주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대하 28:24,25).
아하스왕은 처음에는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우상의 제단에 매료되어 그것을 주의 전에 들여오더니, 급기야는 성전의 구조를 임의로 변경시켰고, 주의 전의 기명들을 산산조각내고 전의 문들을 폐쇄하기까지 했으며, 마침내 예루살렘의 모든 모퉁이마다 자신을 위한 제단들을 만들고 자기가 통치하는 유다 각 성읍들에 다른 신들에게 분향할 산당들을 만드는 죄악을 범한 것이다. 마치 잔에 떨어진 검은 염료 한 방울이 물 전체에 퍼져가는 것과 동일한 현상을 보였다. 아하스왕이 주의 전에 세운 제단 하나가 예루살렘 모퉁이마다 세워진 제단들이 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영적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이다. 나비 효과란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인데, 이를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누룩 효과”(Leaven Effect)라 할 수 있다. 『너희는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느니라』(갈 5:9). 이는 교회 내의 어디선가 허용된 작은 죄의 누룩이 교회 전체를 동일한 죄로 부풀리는 현상을 말한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세상 음악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하자 한국 교회 전체가 CCM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가 “CCM이 된다면 CCD는 왜 안 되는가?” 하자 교회 전체가 CCD를 수용한 것이다. 누군가가 “인문학을 공부하면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교회 전체가 인문학 열풍에 빠져든 것이다.
아하스의 제단 하나가 안 그래도 죄로 타락한 전체 예루살렘의 모퉁이마다 제단들을 세웠듯이, 배교한 한국 교회 역시 다양한 “아하스들”이 등장하여 타락을 심화시켜 왔다. 『이것이 그 아하스왕이더라.』(대하 28:22)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것이 그 한국 교회더라.”고 말씀하신다면, 죄에 죄를 더해 온 그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