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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신실한 청지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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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1월호>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기게 하라. 청지기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라』(고전 4:1,2).『청지기』란 어떤 사람인가? 사전적 정의를 보면 “청지기”는 “양반집에서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을 뜻한다. “맡아보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시키는 일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어떤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직무를 맡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시중을 든다”는 말은 옆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청지기의 특징은 “가까이에서 책임지고 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청지기”라는 단어가 약간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사전적 정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래 “양반집”에서 일하던 사람을 일컫는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양반(귀족)은 학문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던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활동에서도 주도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특히 농경 사회에서는 토지의 소유주가 토지의 운용(농작물의 경작)과 생산물의 보관, 운송, 판매 등 경제적인 활동의 주요 세력이었다. 말하자면 양반집의 “곳간”은 오늘날의 회사처럼 생산, 보관, 유통, 판매 등과 피고용인(일꾼)들의 인사 관리가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기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 영역에서 책임을 맡아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청지기라 불리는 “임원들”로서 업무를 관리 감독하여 성과를 내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기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직접 일을 하는 “일꾼”임과 동시에 업무를 관리 감독하여 성과를 내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청지기의 특징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가까이에서 책임지고 일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 특징이 “책임감,” 즉 “신실함”인 것이다. 『청지기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라』(고전 4:2).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신실한 청지기”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인물들 중 하나가 바로 아브라함의 청지기였던 “엘리에셀”이다. 그는 신실한 청지기로서 아브라함의 큰 신임을 얻은 사람이었다. 성경은 그에 관하여 『아브람이 말씀드리기를 “나는 자식이 없사오며, 내 집의 청지기가 다마스커스의 엘리에셀이오니, 주 하나님이여,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하고, 아브람이 말씀드리기를 “보소서, 주께서 내게 씨를 주시지 않았으니, 보소서, 내 집에서 태어난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하니』(창 15:2,3)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그가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지목했던 것이다. 엘리에셀이란 이름은 “나의 하나님께서는 도우시는 분이시다.”라는 뜻이다.
엘리에셀이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는가에 관해서는, 그가 아브라함의 명령에 따라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의 성읍”으로 가서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카를 데리고 오는 일을 통해 조명해 볼 수 있다(창 24장).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은 이 “종”의 이름이 창세기 15:2,3에서 언급된 “엘리에셀”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창세기 24장에는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령님께서 창세기 24장을 기록하실 때 그 종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렇듯 엘리에셀은 나홀의 성읍에 있는 동안 자신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은 반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리브카의 오라비 라반과의 대화에서 “나의 주인” 또는 “내 주인”이라는 말은 18번이나 언급했다. 물론 이것은 엘리에셀이 “교회 시대에 자신에 관해 말씀하시지 않으면서(요 16:13) 활동하시다가 신부인 교회를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가시는 성령님의 예표”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오직 자기의 주인만을 드러내는 종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종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 24장에서 엘리에셀이 얼마나 신실했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엘리에셀은 그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가장 먼저 기도했다. 『그가 말하기를 “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주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오늘 내게 좋은 일이 있게 하시어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소서』(12절). 엘리에셀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일을 이루는 능력이 내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일에 임하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이며 일이 제대로 진행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둘째로, 엘리에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 즉시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사람이 그의 머리를 숙여 주께 경배하고 그가 말하기를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주 하나님을 송축하오니, 이는 나의 주인에게 주의 자비와 주의 진리를 없애지 아니하셨음이니이다. 주께서는 길에서 나를 내 주인의 형제 집으로 인도하셨나이다.” 하니라』(26,27절). 또한 그는 자신의 맡은 일이 성사된 것을 확인했을 때도 즉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50-52절). 그의 경배는 “일을 이루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자 감사였다. 그는 마땅히 감사드려야 할 분께 감사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성도가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라 주어진 일을 완수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임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하는 일은 주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이다.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엘리에셀은 아마도 리브카를 무사히 데려온 이후에도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렸을 것이다.
셋째로, 엘리에셀은 오직 자기가 맡은 일에만 집중했다. 『이제 당신들이 나의 주인을 친절하고 진실하게 대하시려면 내게 말해 주시고, 그렇지 않을지라도 내게 말해 주셔서 나로 하여금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게 하소서.” 하였더라』(49절). 다시 말해 그는 일의 성사 여부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주변적인 인사치레는 배제한 채 요청을 거절할 때는 곧바로 돌이키겠다고 말한 것이다. 주변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은 자기에게 일을 맡긴 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실 때, 우리가 그분께서 원하시는 열매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온전히 하나님의 일에만 집중하기를 원하신다(딤후 2:4).
넷째로, 엘리에셀은 그의 주인을 위해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켰다. 엘리에셀이 “나홀의 성읍”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였다(11절). 그런데 그는 일이 성사되자 그다음 날 아침에 곧바로 일어나서 출발하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즉 그와 그의 일행들이 먹고 마시며 온 밤을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말하기를 “나를 나의 주인에게로 보내소서.” 하니』(54절). 엘리에셀은 그의 신실한 성품으로 보건대 쉬지 않고 매우 열심히 낙타를 타고 “나홀의 성읍”까지 왔을 것이다. 그를 따랐던 일행들도(32절) 매우 지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체력을 보강하는 따위의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늙은 주인을 위해 빨리 출발하고자 했다. 그는 라반과 브두엘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나 일행들의 피로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보다는 늙은 주인을 위해 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창세기 24장에는 엘리에셀의 신실함이 잘 드러나 있지만, 교회의 예표인 리브카의 모습을 통해서도 성도의 자세에 관한 또 다른 조명을 받을 수 있다.
첫째로, 리브카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물을 마시게 한 뒤, 말하기를 “당신의 낙타들을 위해서도 내가 물을 길어 물을 다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19절). 즉 그녀는 엘리에셀이 물을 청했을 때, 낙타들도 물을 먹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 짐승들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다 마시게 하리이다.』라는 말은 충분한 양의 물을 마시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은 선행이었다. 이는 엘리에셀이 끌고 온 낙타가 모두 열 마리나 되었기 때문이다(10절). 그는 리브카의 그런 행동을 주시했다(21절). 그녀가 스스로 했던 말을 어떻게 실행하는지 지켜본 것이다. 낙타는 한 번에 약 100L(100kg)의 물을 마시기 때문에, 열 마리에게 충분한 양의 물을 먹이기 위해서는 1,000kg의 물이 필요했고, 20kg의 물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라 해도 50번을 우물에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했다(16절). 사막의 우물은 지하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때 리브카를 돕는 몸종들이 함께 있었다 해도(61절)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로, 리브카는 엘리에셀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을 때, 상식적으로도 과해 보이는 그의 선물(금귀고리와 금팔찌들)을 의심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의 대화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챘을 것이다. 물을 청하는 그의 품위를 보고 낙타들에게 물을 주는 선행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물을 주는 내내 엘리에셀이 자기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리 없다. 따라서 그가 주는 과한 선물이 악한 의도가 아닌 선한 의도임을 곧바로 알았고 기꺼이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죄인인 우리로서는 일종의 “과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았고 리브카처럼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좋은 선물을(약 1:17) 풍성하게 주신다. 우리는 그 선물을 기꺼이 받을 때 더 큰 복을 누릴 수 있다.
셋째로, 리브카는 주인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엘리에셀을 즉시 따라갔다. 리브카가 엘리에셀을 따라가는 것은 죄인이 성령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받는 모습의 예표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가 이 지상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즉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리브카는 엘리에셀을 만난 지 만 하루가 되지 않았다. 저녁때 처음 만났을 뿐인데, 그다음 날 아침에 즉시 따라나서겠다고 말했다(58절). 그녀는 엘리에셀을 신뢰했고, 그녀가 살던 고향과 열흘 이상 지체하기를 원하는(55절) 부모를 완전히 떠나기로 즉시 결정한 것이다. 새로운 삶을 바라는 사람에게 열흘 동안 지체한다는 것은 영원처럼 긴 시간이다. 우리가 마귀의 자녀였다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도 우리의 “고향”(세상)과 “부모”(마귀)로부터 즉시 그리고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매일의 삶 속에서 세상과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고, 리브카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즉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각 사람이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섬기라.』(벧전 4:10)라고 권면하신다. “각 사람,” 즉 모든 “성도”가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도록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청지기인 우리는 모두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신실한 청지기”로 발견되는 기쁨을 누려야 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