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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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란과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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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4월호>

(이사야 24-35장)


이제 이사야서의 중간쯤 들어섰다. 앞부분에서 우리는 범죄한 백성에 대한 심판(경고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회복을 다루었다. 이 심판은 당시 앗시리아의 침공과도 연결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환란에 대한 예언을 보았고, 회복 또한 메시야께서 임하실 때의 승리에 대한 예언임을 보았다. 이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모든 죄인들, 특히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통한 승리라는 것을 잘 살펴보았다.
누누히 강조했지만, 이것은 특정 부분에 대한 주제가 아니라 이사야 전체 예언의 주제이고 핵심이다. 이사야는 그 예언의 내용상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각 부분마다 이 주제가 반복된다. 물론 약간의 강조점과 구체적인 예시와 설명은 서로 다르지만 말이다.

■ 대환란과 왕국 예언의 반복
24장에서 35장에 이르는 이 긴 부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특징적인 것은 심판과 회복, 즉 대환란과 왕국에 대한 예언들이 수시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예언 흐름의 연결 고리가 없이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데, 많은 부분이 이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C.I. 스코필드는 호세아서의 서론을 달면서 이런 부분을 “비약적”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논리적인 비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적용이 단계를 뛰어넘어 급반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언의 성취 순서가 “배교-심판-회개-영적 회복-물리적 회복”이라고 할 때, 선지자는 “배교” 후에 곧바로 “회복” 다시 “심판” 그리고 곧바로 “회복,” 이렇게 급반전하여 예언한다는 것이다. 스코필드는 이러한 예언 방식을 호세아 예언의 특징이라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호세아뿐 아니라 거의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 방식이었다. 특히 호세아와 이사야가 이런 면에서 두드러지는데(호세아와 이사야는 닮은 점이 많다.), 우리가 지금 다루려고 하는 이사야 24-35장의 예언이 바로 그렇다.
이 부분에서는 대환란과 천년왕국이 순서없이 반복하여 나열된다. 이사야서를 처음 읽는 사람들은 문맥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혼동하기도 한다.
24장에서는 유다의 고난을 통해 대환란을 예언한다. 『보라, 주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고 황폐케 하시며...』(24:1), 『그 땅이 완전히 공허하게 되며 완전히 약탈당하리니...』(24:3), 『치욕의 성읍은 헐리고 모든 집은 닫혔으니...』(24:10). 그러나 그 가운데 “남은 자”를 두어 구원을 예비하신다. 『그때 땅의 한가운데서는 백성 중에 그러한 일이 있게 되리니 마치 올리브 나무가 흔들림 같을 것이요, 포도 수확이 끝난 뒤 포도를 줍는 것 같으리로다』(24:13). 그리고 곧바로 다시 심판의 극심함을 말한다. 『땅이 완전히 헐리고 땅이 깨끗이 해체되며 땅이 심하게 움직였도다』(24:19). 이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으로 재림하시는 심판을 보여 주지만, 그 묘사는 흡사 천년왕국 후에 있을 하늘과 땅이 소멸되는 모습같기도 하다.
25장은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세우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가 승리 안으로 사망을 삼키실 것이요...』(25:8). 26장은 유다 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나오는데, 표면적으로는 바빌론 포로 후에 회복된 유다를 말하기도 하지만, 지속적으로 대환란과 왕국을 말하는 본문 가운데 이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은, 왕국이 임할 때의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가 불려지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한 성읍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성벽들과 보루들을 세우시리로다... 너희는 주를 영원히 의뢰하라. 이는 주 여호와 안에 영원한 힘이 있음이라』(26:1,4). 유대인들의 영적 회복은 대환란 때 그들이 고통받는 중에 하나님을 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주여, 그들이 고난 중에 주를 찾아뵈옵나니 그들은 주의 징계가 그들 위에 임할 때에 기도를 부었나이다』(26:16). 이와 같은 내용은 시편에서도 여러 번 예언되어 있다(시 3:7; 44:22-26 등). 특히 17절에서는 여인의 출산의 고통을 대환란의 예로 드는데, 이는 예레미야 30:6과도 같다.

■ 사탄에 대한 심판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탄에 대해서도 심판하는 것이 된다. 창세기 3:15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 중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가 바로 그것인데, 요한계시록 20:2,3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사탄이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예언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에 대한 총체적인 심판이다. 종말에 관한 모든 예언은 사탄, 혹은 적그리스도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이사야 27장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 날에 주께서 그의 격심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쌘 뱀 리비야단을 벌하시리니, 즉 꼬부라진 뱀 리비야단이라. 또 주께서는 바다에 있는 그 용을 살해하시리라』(사 27:1). 여기에 뱀, 리비야단, 혹은 바다에 있는 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모두 사탄에 대한 다른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묘사가 에스겔 29:3,4에 나오는데, 거기에는 파라오에 비유하며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용”이라 말하고 있다. 에스겔도 역시 그 용(사탄)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이 용을 파라오에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사탄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이집트에서도 그랬듯이 사탄(용)의 예표가 되었던 파라오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압제하다가 홍해에 빠져 죽는다(시 136:15). 대환란과 재림도 이와 같은 모습이다. 대환란 때 사탄은 이스라엘을 박해할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사탄은 멸망한다.
그러나 사탄은 폭력으로 이스라엘을 압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폭력을 사용하기 이전에 먼저 평화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에게 다가와 그들과 한 약속을 맺을 것이다. 다니엘 9:17에서는 이 모습을 『그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이 언약은 거짓 언약이며 유대인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언약이다. 바로 이 모습을 이사야는 28:15에서 『우리가 사망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고 우리가 지옥과 더불어 합의하였도다. 넘치는 재앙이 지나갈지라도 우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이는 우리가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숨겼음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의 백성이지만,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우상에게 나아감으로 그 언약을 파기했다. 그리고 마귀와 언약을 맺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언약의 기간은 길지 못하다. 이사야는 이어서 18절에서 『사망과 더불어 맺은 너희의 언약이 무효화되며 지옥과 한 너희의 합의가 서지 못하리니 넘치는 재앙이 지나가면 너희가 그것에 짓밟힘을 당하리라.』고 말한다. 이는 마귀, 곧 적그리스도가 3년 반 후에 그 언약을 파기할 것이기 때문이다(단 9:27). 그때 있을 고난의 괴로움을 19,20절에서 이어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내용은 이사야가 예언하던 당시 에프라임의 교만을 책망하며(28:1) 하나님께 돌이키라는 명령이다. 선지자는 이와 같이 당시의 상황을 언급하는 가운데 미래의 큰 사건들을 예언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29장은 예루살렘(“아리엘,” 29:1)에 대한 책망을 하는 가운데 대환란을 예언한다. 29장의 내용들은 아리엘에 대한 “애가”로 보일 정도다. 특별히 29장에서는 대환란 때의 이스라엘의 황폐함을 보여 주는데, 무엇보다도 영적 황폐함을 보여 준다. 영적 지도자들은 소경처럼 눈이 감겼다(29:10).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된다 해도, 유식한 자들은 봉인되어 읽을 수 없다 하고, 무식한 자들은 무지로 인해 읽을 수 없다. 백성들은 여전히 형식과 행위로는 하나님께 나아오지만, 진리에 따라서 나아오지 않는다(29:10-13). 사실 이것은 그들이 대환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선지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에 영적 황폐함이 오고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고 예언한다(호 4:6). 또한 이것은 현대 기독교계에서 드러나는 영적 황폐함의 모습이기도 하다.

■ 재림의 실제적 유익
물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 모든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한 주가 야곱의 집에 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사 29:22). 그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그분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영적 지식을 얻게 되며, 영적 회복을 하게 될 것이다(사 29:23,24).
그리스도의 재림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가져온다. 영적 회복, 민족의 회복, 언약의 회복, 땅의 회복, 육신적 회복까지 가져온다. 땅의 회복이나 육신적 회복은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회복들 중 하나이다. 앞에서 이사야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는,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고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는 자연계의 회복을 예언한 바 있다(사 11:6-8).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광야와 메마른 곳이 그들을 기뻐하고, 사막이 기뻐하며 장미처럼 피리라. 그것이 무성하게 피어 기쁨과 노래로 즐거워할 것이요, 레바논의 영광, 곧 칼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이 그것에게 주어지리라. 그들이 주의 영광과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 35:1,2)고 그날에 있을 이스라엘 땅의 회복을 노래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하며, 혹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독립(1948년) 후 이스라엘의 관개농법 개선으로 많은 광야들이 꽃밭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적용하곤 한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북쪽에 있는 갈릴리 호수의 물을 수로를 통해서 남쪽 네게브 사막까지 이끌어 온다. 이스라엘의 발달된 집단 농장 키부츠는 사막을 꽃밭으로 바꾸어 네델란드 다음으로 유럽 제일의 꽃 수출국이 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곧 이사야 예언의 성취는 아니다. 이사야 35장은 재림으로 있을 실제적 땅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땅만이 아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치유받을 것이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6)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이것이 재림에 관한 예언이라는 이유는 33장에서도 발견된다. 『그 거민은 “나는 병들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리니 거기에 거하는 백성은 죄악이 사해지리라』(사 33:24). 이 구절은 병자의 치유와 죄악의 용서를 동일선상에서 언급한다. 교회 시대의 교리로 보면 이는 분명히 맞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 용서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거꾸로 질병에서 치유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허덕이고 있다. 속죄와 치유가 한꺼번에 언급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메시야께서 왕국을 회복하실 때이다. 이것은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 병고침의 이적과 더불어 죄용서를 선포하셨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막 2:9-11).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야 왕의 표적으로서 질병을 치유하신 것이다. 물론 당시 그리스도께서는 거절당하셨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일 뿐, 재림 때 그분은 결코 거절당하지 않으실 것이고, 계획대로 그분의 왕국을 수립하실 것이다. 이때 이사야 및 선지자들이 한 예언들은 모두 성취될 것이다.

■ 이방을 신뢰하는 헛됨
이사야가 당시 예언하던 때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는다. 따라서 예표상 앗시리아는 적그리스도를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사야는 오히려 이집트를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예언한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히스키야)는 앗시리아(산헤립)를 대적하기 위해 이집트에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다. 『이집트로 걸어 내려가도 내 입에 묻지 않았고, 파라오의 힘으로 자신들의 힘을 삼으려 하며, 이집트의 그늘로 피난하려 하는도다!』(사 30:2) 31:1에서도,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면서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죄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이집트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설명한다(사 31:2,3). 그러나 사실 이집트는 연약하지 않다. 이집트는 당시 앗시리아를 대항할 만한 유일한 왕국이었다. 그럼에도 이집트를 의뢰하는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은, 사탄이 아무리 힘이 있을지라도 사탄에게 달려가는 것은 도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에스겔이 파라오를 비유하여 말한 그 용, 즉 리비야단을 언급했던 것이다(27:1). 이집트는 사탄과 같다. 항상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탄을 치실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앗시리아를 통해 이집트를 치셨다. 그래서 파라오에게 달려가는 자는 치욕을 당할 것이다. 30:7에서 이집트에 대해 『그들의 힘은 가만히 앉아 있도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이집트의 힘”(히브리어로 “라합”)은 리비야단, 즉 사탄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혹 유다)에게는 하나님 외에 어떤 도움도 의미가 없다. 다른 도움을 구하는 자는 그 거짓 구원자로 인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구할 도우심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께서만이 유다에게 견고한 성읍이 되실 것이다(26:1). 만군의 주만이 그 백성에게 “영광의 면류관과 아름다움의 화관”이 되실 것이다(28:5).
따라서 유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한다. 우상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돌이켜야 한다(31:6,7). 다행히 히스키야는 하나님만을 의뢰했고, 그 결과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으로 앗시리아의 대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무서운 기세로 예루살렘까지 진격해 도성을 포위한 산헤립의 부대는, 주의 천사의 칼날에 하루 밤에 185,000명이 목숨을 잃고 패전하여 돌아가게 된다(왕하 19:35). 이것이 바로 이사야 36장에서 39장까지의 내용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것을 단순한 역사 기록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연관시킨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시리아를 패전시킨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탄을 물리치는 것에 대한 예표적 사건일 뿐이다. 그래서 대환란을 예고하는 예언들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의뢰하라는 말씀이 종종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뢰할 때, 그들의 소망의 끝은 구주와 함께하는 영광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은 대환란의 예언 중에서도 메시야의 통치와 그 영광의 모습이 종종 등장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으로만 말한다면야, 앗시리아를 물리친 것은 결코 완전한 승리가 아니다. 그들은 불과 100여 년 후에 바빌론 포로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그 바빌론 또한 사탄의 예표이다. 그러나 이사야는 바빌론 포로 후에 유다의 백성들이 돌아오는 것까지도 예언한다. 『주의 속량받은 자들이 돌아오리니, 그들의 머리 위에 노래와 영원한 기쁨을 가지고 시온으로 오리라. 그들이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은 달아나리라』(사 35:10). [학자들은 이 구절이 “제2이사야”가 쓴 40장 이후에야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분명히 39장 이전에 있다. 이 두 부분은 같은 이사야가 같은 관점을 가지고 한 같은 예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고난은 그후로도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들은 먼 훗날, 우리에게는 그렇게 멀지 않을 수도 있는 날인 대환란과 재림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빛날 것이다. 그분의 왕국은 화려할 것이다. 그 안에 거하는 백성들은 완벽하게 회복된 땅에서 온전히 거할 것이다. 사탄은 결박당해 있을 것이며,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울려 퍼질 것이다. 그 왕국의 소망을 바라는 자들에게 고난은 한갖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성도에게 닥친 고난은 다가올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이 얼마나 적절한지 다시 한번 묵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는 현재의 고난들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에 감히 비교되지 못한다고 내가 여기기 때문이라』(롬 8:18). - <다음 호에 계속>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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