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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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그 위대한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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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5월호>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소망을 지니게 하려 함이니라』(롬 15:4).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경 66권은 모두 다 중요하며 소중한 책이다. 우리는 신약의 기반하에서 구원받고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또한 구약의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해 많은 교훈을 받고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과 12장에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통해 우리 역시 이 험한 세상에서 다시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는 것이다(히 12:1,12).
그러나 구약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는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많은 모형(type)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보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요 3:14). 광야에서 모세가 들어올린 놋뱀은 장차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었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 12:40). 요나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이외에도 은 이십 개에 팔린 요셉 등 많은 모형적인 인물들이 있으며, 도피성읍이나 유월절, 제사 등도 많은 부분에서 모형이 된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많은 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거룩한 날, 새 달, 안식일은 앞으로 다가올 천년왕국에서 지켜질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천년왕국과 천년왕국 성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에스겔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율법에는 다가올 선한 것들의 그림자는 있으나』(히 10:1). 율법은 형상 자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율법에는 장차 주께서 이루실 영원한 대속을 보여 주는 그림자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역시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들은 모형이며, 예언적 요소들이 담겨져 있다.

성막, 그 위대한 모형
우리가 모형론을 접하게 될 때 모형론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성막이다. 성막의 기구들, 모양, 관계되는 색깔, 관계되는 숫자, 재료들, 행해지는 의식들, 절차, 그외 성막에 관한 모든 것들은 직간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하여, 또한 그분의 사역에 관하여, 신약의 구원과 교리에 관한 모형이 된다. 이런 점에서 성막에는 참으로 풍요로운 보화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보자. 촛대는 성령을 예표하며, 빵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표하고, 대제사장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 주는 예표이다. 물론 이외에도 우리가 성막을 공부하다보면 너무나 귀한 영적 진리들이 성막에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25장부터 기록되어 있는 “성막”에 관한 자세한 서술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아갈 때 한낱 따분하고 어려운 본문이 아니라 읽을수록 절로 기쁨이 솟는 영적 보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막을 모형과 연관시켜 생각할 때에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비록 성막의 여러 기구들이나 그 재료들에서, 혹은 절차나 의식에서 보여지는 중요한 영적 예표들, 즉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보여 주는 밑그림적인 여러 측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막 그 자체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형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 관한 모형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히브리서 9:23,24에서 성경이 친히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들에 있는 것들의 모형들은 이런 것들로 깨끗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 그 자체는 이것들보다 더 좋은 희생제물들로 해야 하리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실물의 모형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 자체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지금 나타나 계시기 때문이라.』
사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수많은 이들이 성막과 그리스도의 연관성을 찾아내고, 성막과 관련된 영적인 교훈을 찾아내고 성막과 관련하여 예표를 찾아내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전혀 언급이 없다.
자, 여기서 잠시 히브리서 9:23에서 언급하는 “하늘들”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 “하늘들”에 관한 주제는 어쩌면 ‘고기’에 해당되는 단단한 음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피터 럭크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것 역시 믿기 어려운 것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종종 “하늘들”이라는 단어를 보게 된다. ‘하늘들’이라는 단어에는 복수의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즉 여러 하늘이 있다는 말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경에서는 각 구절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를 설명한다. 우리가 “하늘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열쇠는 바로 고린도후서 12장에 있다. 『내가 십사 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 사람이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느니라』(고후 12:2). 바울은 그가 단순히 “하늘”로 끌려 올라갔다고 말하지 않고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로 보건대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하늘은 땅 위에서 구름까지로 통상 우리가 보는, 새가 날아다니고 비행기가 다니는, 구름이 흘러가는 그 하늘이다.
둘째 하늘은 태양, 달, 별들, 은하수, 성운, 성단 등이 있는 하늘이다.
셋째 하늘은 태양계 넘어, 이름도 모르고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는 성단들 너머에 있는 곳으로 시간이 정지되고(욥 26:9,10) 영원에 속한 북편(시 48:2)에 위치한 곳으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는 거대한 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보좌의 앞을 붙드시고, 그 위에 그의 구름을 펼치시는도다. 그가 그 물들을 경계로 두르시니 낮과 밤이 끝나는 곳까지라』(욥 26:10). 낮과 밤이 끝나는 곳, 즉 둘째 하늘 끝부분에는 경계가 있다. 그 경계가 바로 ‘물들’이다. 『주께서는 옷으로 가리듯이 자신을 빛으로 덮으시고 하늘들을 휘장같이 펼치시며 물들에 자기 누각들의 들보들을 얹으시고...』(시 104:2,3). 『너희 하늘들의 하늘들과 하늘들 위에 있는 너희 물들아, 그를 찬양하라』(시 148:4). 『주께서 그의 음성을 발하시니 하늘들에 많은 물들이 생기고』(렘 10:13)
이 물들은 또한 바다로 표현되기도 한다. 『바다, 곧 큰 깊음의 물들을 마르게 하신 분이 주가 아니시며...』(사 51:10). 이 깊음의 물들은 창세기 1:2에서 하나님의 영이 거니시던 바로 그 “깊음”이다. 그런데 이 깊음의 표면은 얼어 있다. 『물이 돌로 된 것처럼 감추어졌고 깊음의 표면은 얼어 있도다』(욥 38:30). 이 얼어 있는 바다는 그래서 유리로 표현된다.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그 보좌 가운데와 그 보좌 주위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한 네 짐승이 있더라』(계 4:6). 『당신이 그분과 함께 단단하고 부어 만든 유리 같은 하늘을 폈느뇨?』(욥 37:18)
자, 다시 성막으로 돌아와 보자. 이 글의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히브리서에서는 성막이 하늘에 대한 모형이라고 이야기하며, 또한 구약의 대제사장과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비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선한 것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러한 건물이 아닌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을 통하여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피로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느니라』(히 9:11,12). 『그러나 하늘들에 있는 것들의 모형들은 이런 것들로 깨끗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 그 자체는 이것들보다 더 좋은 희생제물들로 해야 하리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실물의 모형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 자체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지금 나타나 계시기 때문이라』(히 9:23,24). 히브리서 9:11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말씀하며, 9:24에서는 땅의 성소와 비교하여 손으로 만든 성소가 아니라 하늘 자체에 들어가셨다고 11절을 부연설명한다. 즉 히브리서 9:11의 성소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 즉 하늘 자체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 즉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동물의 피로 지성소에 나아가 속죄 사역을 행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피로 하늘들과 깊음(유리 바다)을 통과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셨던 것이다. 이는 히브리서 9:23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물의 피는 하늘들에 있는 것들의 모형들을 깨끗게 하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그 자체는 이것들보다 더 좋은 희생제물들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이 성막에 피를 뿌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피뿌리심에 대한 모형이다.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신 사건은 온 우주적인 사건이다. 이때 셋째 하늘 아래에 있는 유리 바다는 붉어졌다. 홍해(붉은 바다)가 된 것이다.
마태복음 27:5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휘장은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었고, 일 년에 단 한 번, 그리고 대제사장만 유일하게 이 휘장을 통과하여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주심으로써 휘장은 찢어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자. 이는 우리가 자비를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함이라』(히 4:14,16).
자, 여기에서도 우리는 성막과 하늘의 관계에 대해 볼 수 있다. 휘장을 통과하여 지성소로 들어가듯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셋째 하늘로 가려면 셋째 하늘과 둘째 하늘 사이의 거대한 물층(종종 깊음의 물들, 바다로 표현된다.)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휘장이 찢어졌듯이 이 “물들”에도 구멍이 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은 그 틈을 통해 셋째 하늘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틈은 성경에서 “길”로, “통로”로 나타난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에 길을 내고, 거센 물들에 작은 길을 내며...』(사 43:16). 『주의 길이 바다에 있고 주의 첩경이 큰 물들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는 알려지지 않았나이다』(시 77:19). 『주의 책망과 그의 내쉬는 콧김에 바다의 통로들이 나타나고, 세상의 기초들이 드러났도다. 그가 위에서 보내시어 나를 취하시고, 많은 물들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삼하 22:16,17). 『주의 책망과 내쉬는 콧김에 물들의 통로들이 보였고』(시 18:15). 『주께서는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가르셨으며』(시 74:13). 『바다, 곧 큰 깊음의 물들을 마르게 하신 분이 주가 아니시며, 속량받은 자들로 바다의 깊은 곳들을 건너도록 길을 내신 이가 주가 아니시니이까?』(사 51:10)
성경은 참으로 무한한 진리의 보고이다. 예수님께서는 ‘길’이시며 ‘문’이 되신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으며, 또한 그분께서는 친히 길을 만드시고 문(통로)을 만들어 주셔서, 장차 우리를 인도하셔서 붉은 바다를 건너게 하실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홍해를 건넌 사건을 통해 예표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하에 물들을 통과해 홍해를 건넜듯이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에 붉은 바다(홍해)인 거대한 물층을 건너게 될 것이다. 홍해를 건넌 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께 이렇게 노래한다.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주께서 주의 자비로 인도하셨으며 주께서 그들을 주의 권능 안에서 주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셨도다』(출 15:13). 『...주께서 사신 그 백성이 통과하기까지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데리고 오셔서 주의 유업의 산에 심으시리니 오 주여, 이는 주께서 거하시려 만드신 곳이요, 오 주여, 주의 손이 세우신 성소니이다. 주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시리이다』(출 15:16-18). 이는 실제적으로 홍해를 건너면서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역시 홍해를 통한 예표요, 예언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을 군대(출 12:41)로 표현하는 것 또한 재림 때 그분께서 군대 된 성도들(계 19:14, 욜 2:11)을 데리고 거대한 물층을 통과하셔서 다시 오실 것을 예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께서는 주의 말들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 무더기를 통과하셨나이다』(합 3:15).
자, 광야에 성막이 서 있다. 이 성막은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신 모양을 따라 지은 것이다(출 25:40). 겉에서 이 성막을 바라보게 된다면, 어찌 보면 너무나 허름해 보이기까지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성막 자체가 우주를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전 우주적인 구속 사역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 참으로 성막은 위대한 모형인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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