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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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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8월호>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나의 아버지는 만유보다 더 위대하시니, 아무도 나의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느니라』(요 10:28,29).사람을 종교의 노예로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나 무지를 이용하는 것이다(히 2:15).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로마카톨릭, 개신교 등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교는 이런 수법을 써먹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등의 율례들을 지켜야 한다거나, 금욕과 고행을 통해 정신을 수양해야 한다거나, 매주 미사에 참여해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또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뎌야 사후에 나쁜 운명을 맞이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사람들을 회당, 모스크, 사원, 사찰, 성당, 교회 등에 잘 묶어 둘 수 있는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통한 자유를 선포하셨다(요 8:32). 진리이신 분, 즉 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으며, 한 번 받은 구원은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영원히 보장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에 갈까 봐 두려워 무엇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인들의 신앙과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가장 극명한 차이이다. 이런 까닭에 “종교”의 배후에서 군림하는 신(살후 2:4)인 사탄은 이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성경적 교리를 매우 싫어하며,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자신의 종들(고후 11:15)을 사주하여 이 교리를 공격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공격을 잘 방어해 낼 수 있도록 왜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지를 성경적으로 명쾌하게 입증할 줄 알아야 한다.
1. 구원은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성도들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구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는 구원받기 위한 “의”의 출처가 스스로의 행위였다. 『만일 우리가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되리라.” 할지니라』(신 6:25). 따라서 제아무리 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구원이 취소될 여지가 있었다. 『내가 의인에게 그가 반드시 살리라고 말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고 죄악을 저지르면 그의 모든 의는 기억되지 아니하고 그가 저지른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가 죽을 것이라』(겔 33: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약 교회 시대의 성도들의 구원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주 예수의 의를 근거로 한다(고전 1:30). 이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우리들의 행위와 전혀 연관이 없다(롬 4:5, 엡 2:8,9). 이 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셨던(히 4:15)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신 “완벽한 의”이기 때문이다(마 3:15, 요 19:30). 이 시대에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 완벽한 의의 전가(im- putation)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는 “의인”으로 여겨진다(롬 4:1-12). 마치 어머니가 바깥에서 놀다 온 아이의 더러워진 옷을 벗겨서 가져가고 깨끗한 옷을 입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죄들을 가져가시고 그분의 정결한 의를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혹자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제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완벽한 의라 해도 인간에 의해 더럽혀질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물론 그런 신성모독적인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지극히 거룩한 것은 제아무리 더러운 것이 닿는다고 해도 더러워지기는커녕, 오히려 거기에 닿은 더러운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 버리기까지 한다(출 30:26-29, 레 6:25-27, 마 8:3). 우리가 받은 “의의 옷”도 그러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결코 때가 타지 않는 초자연적인 옷”을 받은 셈이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요 10:2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아예 그분의 “손”이 되었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신약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는 그 지체들이라』(고전 12:27). 우리가 주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받으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만 우리 또한 주님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요 6:56). 성령님께서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심(고전 6:19)과 동시에 영적 침례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으시기 때문이다(고전 12:13).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발, 손, 귀, 눈 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지옥에 간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셈이 되고 만다. 누군가가 우리를 지옥에 보내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분의 손을 잘라서 가져갈 정도의 힘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그분을 “장애인”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그분께서 우상 숭배자들이나 마귀 들린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자해(?)라도(왕상 18:28, 막 5:5) 하셔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엽기적인 일은 결코 일어날 리가 없다! 설령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룬 당사자 스스로가 떨어져 나가기를 원한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기 몸을 아끼시는 이 몸의 “머리”께서는 그분의 몸을 불구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으시기 때문이다(엡 5:22-33).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했다면 좋든 싫든 영원히 떨어져 나갈 수 없다.
3. “보호”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는 셋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중으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도 우리가 주 예수를 믿었을 때 인을 치셨기 때문에(엡 1:13,14), 우리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보장되는 셈이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간 “보호 조약”이라면 몰라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라면 취소될 리가 없다. 이는 “검은 속내”가 있었다고 해도 그러하다. 당신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두려워 화친을 맺으려고 왔던 기브온 거민들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여호수아와 고관들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속임으로써 그 보호 조약을 획득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약은 유효했다. 카나안 땅의 연합군이 기브온 거민들을 치러 왔을 때, 여호수아의 군대는 그들을 도와야만 했다. 이미 그들을 살릴 것이라고 맹세했기 때문이다(수 9:19,20).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올바르지 못한 마음가짐을 갖고 구원을 받는다. 지옥에 가기 싫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 예수를 구주로 믿겠노라고 고백하면서도, 대개는 그 모든 죄들을 끊어 내고 주님의 명령만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설령 그랬다손 치더라도, 복음을 믿은 것이 분명하다면 그들을 향하신 구원의 약속이 취소될 일은 없다(고전 15:2-4).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또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시랴? 또한 이르신 것을 이루지 않으시랴?』(민 23:19)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 가르쳐주면 어떤 교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그러면 막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따져 묻곤 한다. 지옥이라는 제동 장치가 없으면 사람들이 죄를 짓거나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나온 반문일 것이다. 이런 반응을 접하면 “이 사람의 하나님이란, 지옥을 가지고 인간들을 협박해서 섬김을 강요하는 신이구나.” 하는 생각에 고소(苦笑)를 금할 길이 없다.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그런즉 어떻게 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그리스도인이 죄로부터의 승리를 갈망하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까닭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강권하는 사랑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느니라. 이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판단하기 때문이라』(고후 5:14).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기에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두려움이 없고 언제나 자신에 차 있다(요일 4:17,18, 고후 5:6-8). 그런 사랑을 주신 분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 구원받았으면서도 너희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던 그 육신의 말에 여전히 귀를 내어줄 것이냐고, 그 육신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줄 칭찬과 상이 기대되지 않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골 3:1-5).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산다.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말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