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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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은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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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5월호>

마틴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의 작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종교재판을 앞두고 재판정에 들어가는 그 숨막히는 순간에 이 위대한 찬송을 불러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높여 드렸던 것이다.

찬송이란 목소리 높여 노래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며, 그분이 해주신 일들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의 믿음과 헌신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배교한 기독교계는 어떠한가?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예배의 한 의식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찬양이 없는 예배는 없다. 아니 요즈음의 기독교계는 말씀은 배제한 채 박수치고 손 흔들면서 찬송가를 몇십 곡씩 부르는 소위 “경배와 찬양” 스타일의 집회에 익숙해 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찬양이 참으로 자신들의 신앙의 고백이 되는가 하는 것에는, 미안한 얘기지만 깊은 의구심이 생긴다.

일례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유명한 부활 찬송가(통일찬송가 150장)가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어 이 땅에서 천년 간 통치하실 때에 그 유업을 나눠 받은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통치한다는 의미이다(계 20:6). 하지만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특히 학자와 목회자들) 대부분 후천년주의나 무천년주의를 주장하고 또한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의 “믿음”이 정말 그렇다면 그들은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자신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또다른 찬송가(168장)에는 이런 가사가 들어 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우리 알 수 없으니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어서 기쁨으로 보좌 앞에 우리 나가 서도록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네.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하겠네.” 이 찬양을 대할 때 참으로 “아멘.” 할 수 없다면 그도 역시 입으로만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위선자일 뿐이다.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라고 노래하는 찬양(135장)이나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라는 찬양(205장)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과거에 다녔던 여러 장로교회들에서는 면류관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 누가 받는 것인지 알려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런 찬송가는 그저 가사가 멋있다고 생각했을 뿐 그야말로 입으로만 불렀던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 와서야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수 있는 다섯 가지 면류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으며(딤후 4:8, 약 1:12, 고전 9:25, 벧전 5:4 등), 그런 면류관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시하신 일들을 얼마나 정확하고 신실하게 수행했는가에 따라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정말 재림하실지, 그리스도의 심판석(고후 5:10)에서 정말 성도들의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또 보상하실지 의심하는 자들은 위의 찬송들을 부를 때 “아멘.”으로 화답할 수도 없으며 아무런 감격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찬송가에는 수많은 간증들과 감사와 복음이 가득하다. “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듣고 주만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이 찬양(201장)을 정말 진실되이 부를 수 있다면 그는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리도 없고 세례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할 리도 없다. 죄를 씻는 것은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이 이 찬양의 주제 아닌가!

필자가 거듭난 후로 눈에 띄게 변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찬송가 가사마다 가득한 복음의 진리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고, 찬양을 할 때마다 감격과 가슴벅찬 감사가 넘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을 부르는 자세도 달라졌다. 믿음의 선배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보혈의 공로를 찬양하며, 고난 가운데 위로 받던 그 찬양들이 나에게도 같은 의미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까지 단지 예배 순서에 따라 습관적으로 부르던 찬양이 주님께 대한 내 마음을 노래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오 지극히 높으신 이여, 주께 감사를 드리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 좋사오며』(시 92:1)라고 했던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고, 『기쁨으로 주를 섬기라. 노래하며 그의 임재 앞으로 나아오라.』(시 100:2)는 말씀처럼 기쁨 가운데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배교한 기독교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영적인 찬송가도 믿지 않으면서 그냥 따라서 부를 뿐이다. 이것이 라오디케아 시대의 말씀 없고, 찬양 없는 “경배와 찬양”이다.

에베소서 5:19은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학교 조회 시간에 애국가를 부르며 딴 생각하듯이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찬송가는 불러서 무얼하겠는가. 영과 진리로 드리지 않는 모든 예배를 받지 않으시듯이,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그런 “찬양”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리 만무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올바른 찬양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며 천사들도 화답한다. 찬양은 예배의식의 일부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만의 특권이며 기쁨이다. 그렇기에 모든 찬양은 단지 입술로만이 아니라 영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성도 각인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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