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해설 분류
표적과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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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7월호>
표적(Sign)이나 이적(Wonder), 또는 기적(Miracle)은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는 서로 다른 의미의 용어들이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같은 상황에서 등장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하게 다루시는 방법과 연관되어 있다.이적이나 기적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 보통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 등을 가리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 여호수아의 전쟁 때 태양을 멈추신 일,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신 일,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등등,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 성경은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한다. 이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그 분의 신성, 놀라우심,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표적은 좀 다르다. 표적은 이적보다 좀 더 넓은 범위를 갖는데, 표적 안에는 이적도 포함되어 있으나, 전혀 이적이 아닌 표적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6:16 이하에 묘사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든지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든지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시킨다든지 하는 것들은 이적이자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불려지기는 했어도 그것은 전혀 “이적”이나 “기적”이 아니다(겔 20:20).
표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증명하는 도구이다. “표적”이란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징조” 등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시고자 할 때 한 표적을 보이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말씀이나 언약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민족적으로 탄생할 때부터 “표적”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이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시려 할 때 모세는 “그러나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한다(출 4:1). 즉 “주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또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주께서 모세를 보내신다는 “표”로 제시하신 것이다. 이때 이후로 “치유”라는 것은 하나님의 표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표적” 가운데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40년동안 표적으로 인도하셨고, 기드온에게는 미디안 백성들을 물리칠 지도자로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셨고(판 6:17), 히스키야가 15년을 더 살게 된다는 것도 “표적”으로 알려 주셨으며(사 38:7), 메시야가 처녀에게서 태어나신다는 것도(사 7:14),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다는 것도(사 8:18),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것에 있어서도(사 19:20; 55:13) 모두 표적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다(고전 1:22).
이러한 모든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 그 분이 바로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백성에게 오셨을 때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그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으로 봄으로써이다. 구약에는 메시야가 오실 때 치유를 통해서 온다는 예언이 있다(겔 34:16, 사 33:24; 35:6). 『그 거민은 “나는 병들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리니, 거기에 거하는 백성은 죄악이 사해지리라』(사 33:24).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 34:16). 이 모든 예언들은 예수님께서 그 분의 왕국을 회복하실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렇게도 많은 치유를 행하셨으며, 특히 자신이 왕이심을 직접적으로 증거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 이후에 즉시로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신 듯 병고침의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아쉽게도 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자기들의 왕을 거부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표적으로 이끄신다. 이 표적은 사도들에게도 이어지는데 이것이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고후 12:12)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임을 알고 믿으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때에도(대환란 때) 천국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적을 행하는 것이 표적으로 제시된다(막 16:16-18).
그러므로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특별한 방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표적으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주목할 만한 것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라는 구절이다. 표적은 유대인의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이방인들이 “이적”을 구하는 것 같으나 그러한 “이적”들은 결코 “표적”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적들은 가짜이거나 마귀에 의한 이적이다.) 이방인들이 어떠한 이적을 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적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코넬료가 성령받은 증거로 방언을 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22에 따라서 방언은 표적인데, 그렇다면 이방인 가운데서 표적이 행해졌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코넬료가 행한 방언은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한 사실을 깨닫게 했다는데에 의미가 있다. 물론 이 사건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방인 가운데에 표적이 일어났다는 것에 있어서는 베드로와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당시 베드로는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 번씩이나 환상을 통해서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고 하셨음에도 베드로는 율법에 의해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을 때의 모습을 재현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코넬료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만들어 유대인인 베드로로 하여금 그 사실, 즉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한 표적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이다. 결국 이방인이 행한 표적도 믿지 않는 유대인을 위해서 행해진 표적일 뿐이다.
공관복음, 특히 마태복음에서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고, 요한복음에서의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누군가가 표적을 행할 필요가 없다. 이 표적은 기본적으로 왕국복음 아래에서 유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행하시던 초림 당시에 이 표적이 행해져서 유대인으로 하여금 그 분이 왕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했다면, 다시 이 천국복음이 전파되는 대환란 때에 이 표적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유효하게 제시될 것이다. 그 사이에 있는 교회시대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이 있고, 또 우리는 유대인도 아니므로 어떠한 표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