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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높여 침묵을 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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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6월호>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전율을 맛보았던 것은 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이다. 당신이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거리에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만일 거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그것이 옳은 이유를 가르쳐 주겠다. 당신이 어떤 구실을 내세우든 간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당신이 겁장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 없는 변명을 들어 왔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 예수님도 그렇게 소리지르시진 않았다. 그런 식으로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바보처럼 보인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떠들어대는 미친 사람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등등. 그래도 그들은 결국 겁장이에 불과하다. 구원받은 사람이 거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나쁘게 이야기하는 진짜 이유는 그 사람 자신에게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더 읽어내려가기 전에, 쓸 데 없는 변명은 그만 두고 다음 문장을 따라 읽어 주기 바란다. “나는 겁장이이기 때문에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생각해 본다면 그 밖에 수 많은 구실을 대기 위해 나에게 편지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거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이 옳은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막1:14, 4:1) 그의 종들에게도 같은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눅14:23).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오게 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우리는 길에 나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억지로라도 그리스도께 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속임을 당한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진리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이 자기에게 오기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직접 죄인들에게로 갔다(마스 언덕에서 철학자들과 교육가들에게-행17:22, 소아시아의 도시들 및 전 지역으로-행14:6-7).
둘째로, 거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은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 즉 진리를 들으려고 와서 앉아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설교하고 있다면 당신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잊어 버리게 될 것이다.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은 당신이 이 세상과 같은 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마스 언덕에서 알았고(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리스트라에서 알았다(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속한 사람들과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을 발견하게 된다. 설교하고 있는 동안 그는 자신과 세상을 분리하고 있는 영적인 선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할 때면 우리는 요한복음 15:20의 말씀을 상기하게 된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더 위대하지 못하다.’고 너희에에 일렀던 나의 말을 기억하라. 만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다면 너희도 박해하리라...”
세째로, 그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직도 누군가가 순수하게 자기들이 믿는 것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으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하게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와 같이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볼 때 죄인의 양심은 찔리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기꺼이 바보처럼 보이겠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설교가 마음에 들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의 마음 속에는 인상이 남게 된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은 거리에서 설교하는 사람을 아무 반응 없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나는 그들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뛰어 도망하는 것을 보아 왔다.
네째로,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 미지근한 라오디케아 시대에 동화되지 않고 불로 단련된 금을 사게끔 하는(계3:18) 좋은 방법이다.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에 대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대한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죄악성을 증명해 줄 뿐이다. 그들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당신을 “소수”에 포함되게끔 할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마지막 때가 가까운 것은 진실된 사람들이 부족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소수”와 함께 일어서서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외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그것은 이 죽어가는 나라를 썩지 않게 해 줄 소금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당신이 사는 곳의 모든 한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서게 된다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범죄가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와 그들이 심판으로 지고 가는 그들의 죄에 대해 불안하게 느끼게끔 만들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기를 가르고 그 분의 보석들을 데려가시려고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이 나라를 완전부패에서 건질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형제들이여, 죄인들이 모이는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만이 그 해답이라는 것을 깨달으라. 만일 아직까지도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면, 당신이 확신할 수 없는 진짜 이유는 이 글의 처음 문단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전율을 맛보았던 것은 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이다. 당신이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거리에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만일 거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그것이 옳은 이유를 가르쳐 주겠다. 당신이 어떤 구실을 내세우든 간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당신이 겁장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 없는 변명을 들어 왔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 예수님도 그렇게 소리지르시진 않았다. 그런 식으로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바보처럼 보인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떠들어대는 미친 사람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등등. 그래도 그들은 결국 겁장이에 불과하다. 구원받은 사람이 거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나쁘게 이야기하는 진짜 이유는 그 사람 자신에게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더 읽어내려가기 전에, 쓸 데 없는 변명은 그만 두고 다음 문장을 따라 읽어 주기 바란다. “나는 겁장이이기 때문에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생각해 본다면 그 밖에 수 많은 구실을 대기 위해 나에게 편지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거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이 옳은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막1:14, 4:1) 그의 종들에게도 같은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눅14:23).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오게 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우리는 길에 나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억지로라도 그리스도께 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속임을 당한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진리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이 자기에게 오기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직접 죄인들에게로 갔다(마스 언덕에서 철학자들과 교육가들에게-행17:22, 소아시아의 도시들 및 전 지역으로-행14:6-7).
둘째로, 거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은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 즉 진리를 들으려고 와서 앉아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설교하고 있다면 당신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잊어 버리게 될 것이다.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은 당신이 이 세상과 같은 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마스 언덕에서 알았고(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리스트라에서 알았다(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속한 사람들과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을 발견하게 된다. 설교하고 있는 동안 그는 자신과 세상을 분리하고 있는 영적인 선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할 때면 우리는 요한복음 15:20의 말씀을 상기하게 된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더 위대하지 못하다.’고 너희에에 일렀던 나의 말을 기억하라. 만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다면 너희도 박해하리라...”
세째로, 그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직도 누군가가 순수하게 자기들이 믿는 것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으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하게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와 같이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볼 때 죄인의 양심은 찔리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기꺼이 바보처럼 보이겠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설교가 마음에 들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의 마음 속에는 인상이 남게 된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은 거리에서 설교하는 사람을 아무 반응 없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나는 그들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뛰어 도망하는 것을 보아 왔다.
네째로,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 미지근한 라오디케아 시대에 동화되지 않고 불로 단련된 금을 사게끔 하는(계3:18) 좋은 방법이다.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에 대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대한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죄악성을 증명해 줄 뿐이다. 그들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당신을 “소수”에 포함되게끔 할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마지막 때가 가까운 것은 진실된 사람들이 부족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소수”와 함께 일어서서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외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그것은 이 죽어가는 나라를 썩지 않게 해 줄 소금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당신이 사는 곳의 모든 한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서게 된다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범죄가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와 그들이 심판으로 지고 가는 그들의 죄에 대해 불안하게 느끼게끔 만들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기를 가르고 그 분의 보석들을 데려가시려고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이 나라를 완전부패에서 건질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형제들이여, 죄인들이 모이는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만이 그 해답이라는 것을 깨달으라. 만일 아직까지도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면, 당신이 확신할 수 없는 진짜 이유는 이 글의 처음 문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