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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스라엘의 푸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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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4월호>
수전절 외에도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제정하신 명절이 아님에도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유대인들의 명절이 있는데, 바로 에스더서에 나오는 “푸림절”이다. 푸림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축제 분위기”가 된다. 유대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술에 취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교육을 받는다지만, 이날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탈무드>에는 “푸림절에는 ‘모르드캐는 축복받았다.’라는 말과 ‘하만은 저주받았다.’라는 말을 구분할 수 없을 때까지 술에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가면을 쓰거나 화려한 의상을 입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장을 한 아이들은 푸림절의 분위기를 더한다. 이날 자신을 “숨기는” 풍습이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에스더서의 “무대 뒤”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에스더서에는 “주”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와스티의 폐위, 에스더의 간택, 역모를 저지한 모르드캐의 공, 그 공에 대해 상을 주는 일의 누락, 잠 못 이루던 아하수에로가 모르드캐의 공을 재조명한 일 등,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 속에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에스더”라는 이름 자체도 “숨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사타르”로부터 왔거니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 뒤에 숨어서 섭리적으로 역사하셨던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을 기념하여, 하만이 유대인들을 죽일 날을 정하려고 제비(“풀, Pur”)를 뽑았던 데서(에 9:24,26) 비롯된 “푸림절”(제비의 명절)은 유대력의 마지막 달인 아달 월의 14일과 15일에 온다.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론 2월이나 3월에 해당한다. 에스더서에 따른다면 현재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14일에 푸림절을 지키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에스더서에 보면 (지금은 이란 땅인) 수산에 있던 유대인만 15일을 축제날로 삼았고, 성벽이 없는 나머지 고을들의 유대인들은 14일을 축제날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일 이스라엘의 선생들이 “여호수아의 카나안 정복 때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성읍들에서는 아달 월 15일에 푸림절을 지키는” 규칙을 추가로 정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성읍이 여호수아의 때에 성벽으로 둘러싸였었는지를 규명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랍비인 나프탈리 실버버그(Naftali Sil- berberg)는 “우리가 오늘날 여호수아 시대에 성벽이 있었던 것으로 확신할 수 있는 성읍은 예루살렘밖에 없다.”라고 설명한다(수 15:63과 삼하 5:6,7을 참조하면 예루살렘이 여호수아의 정복전쟁 때에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주장 자체는 매우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는 자신 있게 15일을 푸림절로 지키지만, 티베랴나 욥파와 같은 “확신이 없는” 곳에서는 푸림절을 이틀에 걸쳐서 지킨다고 한다.
유대교는 푸림절에 네 개의 특별한 “미쯔바”(계명)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그중 첫 번째는 “메길라”를 듣는 것이다. “메길라”는 히브리어로 “두루마리”를 뜻하는데, 당연히 이날 들어야 하는 “메길라”는 에스더서를 가리킨다.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메길라를 푸림절이 시작된 날 저녁과 다음 날(유대인 시간 개념으로는 여전히 같은 날) 낮에 한 번씩 읽는다. 그러다가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유대인들, 특히 아이들은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장난감 “라아샨”을 흔들든 발을 구르든 해서 그 사악한 이름을 뿌리 뽑는다. “하만의 이름이 나무에도 돌에도 남지 않게 하라.”라는 조상들의 전언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한다.
푸림절에 행해야 할 두 번째 미쯔바는 “마타놋 라에뵤님”이라고 불리는 자선 행위이다. 이는 가진 것이 없어서 푸림절이 왔음에도 풍성한 식탁을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탈무드>는 “푸림절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마타놋 라에뵤님을 주라.”라고 규정하고 있다. 권위를 인정받는 옛 랍비 하페츠 하임(Chafetz Chaim)은 “한 사람당 적어도 두 끼를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양을 주어야 한다.”라며 거들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한 사람 앞에 10-20달러, 혹은 그 이상씩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한 사람들이나 아이들이라고 해도 “마타놋 라에뵤님”에는 예외가 없다. 비록 양이 적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세 번째 미쯔바는 “미슐로아흐 마노트”인데, 이것은 에스더 9:19의 “분깃들을 보냈다”라는 부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그대로이다. 유대교에서는 푸림절의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에 적어도 두 종류의 먹을 것을 친구(들)에게 포장해서 보내라고 가르치는데, 통상 직접 친구에게 포장된 음식을 주지 않고 아이들이나 그 외의 제삼자를 메신저로 삼아 보낸다. 이는 “보내다”라는 표현으로부터 기인하는데, “주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보내다”라고 되어 있으므로 메신저를 사용하여 보내는 것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바람직하다는 게 랍비들의 설명이다. 이렇게 “미슐로아흐 마노트”를 실행함에 있어서도 예외란 허용되지 않는다. 랍비 엘리제 웽거(Eliezer Wenger)는 “푸림절 동안에 아파서 병원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이 미쯔바를 완수해야 한다. 설령 다른 유대인 환자와 음식을 교환하는 정도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라고 설명한다.
마지막 네 번째 미쯔바는 “수다트 푸림”인데, 가족들이 모여서 고기, 빵, 포도주 등으로 차려진 저녁을 먹는 것이다. 이때에는 한두 명 정도의 손님도 초대할 수 있다. 이 저녁 식사 후에 기도문을 외울 때는 반드시 “알 하니심”(기적에 대하여)이라는 말을 넣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푸림절과 관련하여 베푸셨던 기적을 유대인들이 기억하도록 하려는 장치이다. 또한 식사 자리에서는 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며,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노래로 불러야 한다.
위와 같이 유대인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전통을 지키면서 즐거운 푸림절을 보낸다. 그러나 조상들의 말은 그와 같이 절대적으로 여기면서도, 정작 에스더서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대부분 에스더서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세속 역사의 기록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본명이 “크세르크세스”인 에스더서의 아탁세르세스는 유대인 “에스더”가 아니라 페르시아 장군의 딸인 “아마스트리스”라는 아내를 뒀다는 둥,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은 다른 역사 기록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개연성도 떨어진다는 둥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도 그와 같은 학자들의 견해에 맞서지 않는다. 사무엘 샌드멜(Samuel Sandmel)이라는 랍비는 성경의 에스더서가 “있을 법하지 않은” 세부적 요소를 담고 있는 “허구적 작품”이라고 평했으며, 랍비들이 참여하여 작성된 <유대교 백과사전>의 “에스더”에 대한 설명에는 “모든 증거를 놓고 봤을 때, 에스더서의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권위는 분명하게 부정되어야만 한다.”라고 되어 있다. 대부분의 랍비들은 에스더서로부터 영적 교훈만을 강조할 뿐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얼버무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생, 가말리엘 아래서 수학했던 한 유대인의 말을 들어 보고 가도록 하자.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 그리스의 역사가들이 적국이었던 메데-페르시아 역사에 관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실제 역사에서는 페르시아의 코레스 대왕이 메디아 왕이었던 아스티아게스와 전투를 벌여 그를 포로로 잡고 권력을 찬탈하지만,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에 따르면 아스티아게스는 평화롭게 침상에 누워 잠들고 후일 코레스가 왕이 된다. 사정이 이와 같을진대, “상식적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어떤 세속적 기록과 성경의 기록이 배치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가 명확해지지 않았는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른 말을 하는 그 기록이 틀린 것이다!
<탈무드>와 랍비들을 추종하는 유대인들은 상식적인 믿음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음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다. 『백성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 율법과 증거에게라.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이는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사 8:19,20).
다시 말해,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교리적 문제는 물론 도덕적, 역사적, 과학적 문제에 있어서도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옳소!”라고 주장함이 마땅하다. 이 중요한 진리를 잊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반드시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또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였느니라.”고 하시더라』(마 15:8,9).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