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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진노에서 사랑과 자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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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7월호>
1:6-7 그녀가 다시 임신하여 딸을 낳으니,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녀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이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집에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을 완전히 제하여 버릴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내가 유다 집에는 자비를 베풀고 주 그들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구원할 것이요, 활이나 칼이나 전쟁이나 말이나 기병으로 그들을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더라.고멜의 두번째 아이는 “로루하마”라는 딸이다. 그녀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것으로 “사랑받지 못한 자” 또는 “자비를 얻지 못한 자”라는 뜻이다(히브리어의 “로”라는 접두사는 언제나 “아니다”라는 뜻이다).
로루하마란 딸은 호세아의 친 딸이 아니고 고멜이 간음해서 낳은 음란의 딸로 여겨진다. 그녀는 로암미(9절)와 함께 『음란의 자녀들』(2:4)로 표현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어미는 창녀짓을 하였다』(2:5)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타국 아이들』(5:7)로, 『아비없는 자』(14:3)로 불려진다. 게다가 『이는 그녀가 내 아내가 아니고 나도 그녀의 남편이 아님이라』(2:2)는 말씀에서도 고멜이 간음한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간음은 이혼의 충분조건이다(신24:1, 마19:7-9).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집에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을 완전히 제하여 버릴 것이기 때문이라』(6절).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여기서 이스라엘 집은 7절의 유다 집과는 다른 북왕국의 에프라임을 일컫는다. 이 북왕국 이스라엘은 다윗의 집에 반역하여(왕상12:19)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던 여로보암 때부터 남왕국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를 가리키며, 이 이스라엘 집은 종종 에프라임으로 표현된다(호5:3,9,14; 6:4,10 등). 왜냐하면 유다 집에서는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집에서는 에프라임 지파가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시편 136편에는 『그의 자비가 영원히 지속됨이라.』는 표현이 전체 26절의 각 절마다 계속 반복해서 26번이나 언급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도 아니하고 거기에다 이스라엘 집을 완전히 제해버릴 것이라니...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고 계신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로마서 9:15,16을 볼 것.) 이 교회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로마서 10:9-13과 에베소서 2:1-8에 나타나 있다.
반면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기준은 신명기 28:1 -4과 레위기 26:1-3에서 알 수 있다. 이 구절들은 가정법으로 표현된다. “~ 지켜 행하면... 높게 세우시리라. ~경청하면...받을 것이니라. 그러나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리라”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였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자비는 새로운 언약을 맺고 그 효력이 발생되는 다음부터는(히8: 8,9) 영원히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거두어지지 않을 것이다(사54:7,8).
자비란 당장 징계받아야 할 자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곧바로 징계하시지 않고 그 징계를 연기하고 계신 상태를 말한다. 6절은 대단히 부정적인 말이다. 호세아는 바로 부정적인 설교자였다. 오늘날 절대 다수의 목사들과 설교가들이 “당신은 죄인입니다(부정적).” “당신이 구원받지 못하면(부정적) 지옥에 갑니다(부정적).”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부정적).”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부정적).”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부정적).” 등과 같은 부정적인 설교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존경받는 인물(선지자)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마태복음 23장의 설교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긍정론자이셨다면 그 분은 절대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다. 또 오셔야 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이 땅은 이미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유다 집에는 자비를 베풀고』(7절). 호세아가 이 말씀을 외치던 시기(B.C.680-670)에는 유다 집의 죄들이 이스라엘 집의 죄들에는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선량한 왕들이 유다 집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히스키야와 집권 후반기의 므낫세, 그리고 요시야 같은 왕들이 있었다. 호세아 11:12은 히스키야가 다스리던 시기에 주어진 말씀이다.
1:8-9 그녀가 로루하마를 젖 뗀 후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더라.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이는 너희가 내 백성이 아니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을 것임이라.
고멜의 세번째 자식은 아들로서 로암미라 이름지어졌다. 암미는 “나의 백성”이라는 뜻이지만 부정 접두사가 합쳐진 “로암미”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19:1-7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32:7에서도 주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 아니고 너의 백성이라고 하심으로써 동일한 입장을 보이시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호세아가 당시의 북왕국 열 지파의 상황을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이제 더이상은 아니다. 그들은 불쌍히 여김을 받아왔지만 이제 더이상은 아니다. 그들은 심겨졌지만 이제 흩어지게 될 것이다.
1:10,11 그러나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정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게 되리라. 전에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했던 그 곳에서 그들이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리라. 그때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자기들에게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오리니, 이는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라.” 하시더라.
9절에서 10절로 넘어오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급회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주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언이 이제는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것이라고 바뀌게 된 것이다. 심판과 진노에서 이제는 사랑과 자비를 보는 것이다.
위의 두 구절은 다니엘의 70째 주의 끝에 성취될 것이다. 11절의 한 우두머리는 다윗이고(겔34:23; 37:24; 44:3) 함께 모인다는 예언은 유다와 에프라임이 한 막대기처럼 하나가 되어(겔37:16)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한 언약을 맺으실 것을(히8:10) 말한다.
그러나 후천년주의 주석가들은 10절과 11절을 이스라엘이 이 시대에 영적으로 회심할 것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왜곡시키지만, 사실 유대인들은 지금 은혜스러운 복음의 시대에 그리스도께 민족적으로 회심하지 않았으며 또한 결코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 세워질 문자적이고 실제적이고 눈에 보이는 왕국이 건설되는(암9:15) “주의 날”에나 그리스도께 회심하게 될 것이다.
더멜로우 같은 주석가도 11절의 “함께 모여”란 말을 신약 교회 안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모인다고 잘못 해석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신약 교회 안에 들어온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롬11:26). 절대 다수의 주석가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바울이 10절을 로마서 9:26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을 그가 그리스도의 몸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환란 때의 유대인들 가운데 남는 자들(Jewish Tribulation Remnant)을 다루고 있는 구절을 바울이 구원받은 이방인들에게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롬8:29) 주석가들은 10,11절, 그리고 2:23이 과거에 이미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앞서 지적했듯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주의 날에 관련된 구절들은 이중적으로 성취된다(초림과 재림에 이중적으로 성취).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