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석 분류
새롭게 되는 때(사도행전 3:19-26)
컨텐츠 정보
- 14,427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8월호>
3:19-21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러면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 또 하나님께서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라. 하늘은 실로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 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이 구절은 다시 한 번 학자들을 당황케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영적인 약속들(26절)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신 정치적 약속들과 재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19절).
“때”(when, 19절)라는 단어는 99%의 성경에서 변개되었으며, 99%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초림과 혼동하고 있다(행 1:6,7 참조). 그러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라 재림을 말하는 구절이다.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베드로가 한 말은 예레미야(렘 50:20), 이사야(사 44:22), 아모스(암 9:14,15)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인데, 바로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이스라엘의 죄들은 지워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로마서 11:26-28과 히브리서 8:10의 내용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죄들”이 지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19절).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실수하는 것은 갈보리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용서받았다는 사실 밖에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워지는” 것은 죄인 개개인의 죄가 아니라 특정 민족의 죄이다(사 44:21,22).
Bible Believers / 69
여기서 “때”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기로 하자.
1. 빈센트(Vincent)에 따르면 “때”(when)는 틀렸으며 “-하기 위하여”(in order that)로 되어야 한다. “때”(times)도 틀렸으며 “시기”(seasons)로 되어야 한다. “새롭게 되는”은 “서늘한”(cooling)으로 되어야 한다. 빈센트는 왜 세 개의 장애물만을 쓰러뜨리는가? “돌이키라”를 “탈선하다”로, “죄들”은 “적응하는 데 실패”로, “지워지리라”는 “흡수되리라”로, “주”는 “바알”로 되어야 한다고는 왜 말하지 않는가?
2. A.T. 로버트슨(Robertson) 박사에 따르면 “때”(when)는 틀렸다. “-하기 위하여”(that so)로 되어야 한다. 그는 “회개가 새롭게 되는 때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무천년주의, 죽은 정통주의 보수주의자는 20절(또는 21절)의 한 단어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는 “새롭게 되는 때”를 “영적 부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맥상 “만물이 회복될 때”인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A.T. 로버트슨 박사는 신학생들을 가르칠 만큼의 성경적 지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의 전공은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을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아담 클라크(Adam Clark)와 라잇풋(Lightfoot)에 따르면 “때”는 틀렸으며 “that”으로 되어야 한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는 비평가들 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두 사람이다(클라크, Ibid., p.707). 그들은 재림에 대한 구절들이 “은혜의 왕국의 통치”로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4. 로크만 재단과 밥 존스 대학(NASV)에 따르면 “때”는 틀렸으며 “-하기 위하여”(in order that)으로 되어야 한다. 이에 일치하는 번역본은 NEB, RSV, <공동 성서>(1973), 그리고 NCCC가 지원하는 다른 번역본들이다.
5. 래드 박사는 “때”(when)는 틀렸고 “that”으로 되어야 한다, “새롭게 되는 때”는 이미 여기에 있으며 그것을 “현재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상에 계시지 않은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고후 5:1-10)!
6. “때”(when)는 틀렸다. 노울링(Knowling)에 따르면 “올 수 있도록”(that so there may come)으로 되어야 한다(Ibid., p.115). “새롭게 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 보내지신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20절 참고) 그것은 “위로를 구하는 자에게 임하는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말한다.
7. “때”는 틀렸다. 더멜로우, RV(1881- 1884), ASV(1901), PDQ(666).
8. 제미에슨, 퍼셋, 브라운에 따르면 “때”는 틀렸다. 한 마디로, 성경만 틀렸고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맞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다.
어리석은 자의 등에 백 대의 채찍을 때린다 해도 그의 어리석음은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잠 17:10).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진리를 배우려다가 1880-1990년의 주요 주석가들에게 시간만 낭비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들이 지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이다. 이스라엘의 죄들은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까지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구약 어디에도 회개와 개심만으로(본문의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을 주목할 것) 이스라엘의 죄들이 지워진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이스라엘의 죄들은 “새 언약”(히 8:10)이 효력을 발생할 때 없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푸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죄들이 지워지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오리겐에서부터 디엠(Thieme)에 이르는 모든 성경 주석가들은 “죄들이 지워지는 것”을 골로새서 2:14에 있는 개인의 구원으로 잘못 이해했다. 그들 모두는 그것이 “회개”와 “개심”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20세기의 죄인은 골로새서 2:14을 사도행전 4:12에 비추어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와 그의 청중은 그들이 디모데전서 4:1-5에 대해 몰랐던 것처럼 골로새서 2장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킹제임스성경>에 있는 대로 “때”(when)가 올바른 번역이다. 빈센트의 <단어연구, Word Studies>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누가복음 23:42의 “왕국”이란 단어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한다는 사람이 어떤 주석을 할 수 있겠는가?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20절). 베드로는 바로 전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했다. “전에”라는 부사는,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예언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시대의 끝에 전파될 메시지인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히 8:10의 “그 날들 이후에”와 행 15:16의 “이 일 후에”를 주목할 것).
『너희에게...』에서 “너희”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이것은 『하나님께서...너희를 복 주시려고...너희에게 보내어』(26절)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을 누가복음 1:68-69와 비교해 보라. 이것은 또한 로마서 1:16과도 맞아 떨어진다. AV(1611) 본문은 언제나 (지상의 메시야가 통치하는 “정치적” 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천년왕국 회복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를 확증해 준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1장과 천년왕국 사이의 빈 간격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채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말라키에 걸쳐 이스라엘에게 언급된 것 중 바뀐 것은 단 하나도 없다(갈라디아서 3:29 및 주석 참조).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준 땅 즉 팔레스타인, 시리아, 시내 산은 “조건 없이” 주어진 것이다.
『하늘은 실로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 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21절). 21절을 충분히 설명하자면 적어도 3주는 걸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신다(골 3:1-3, 히 12:1,2). “회복될 때”는 구약에서 너무나 많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창 15,22,49, 신 29,32, 유 5절, 삼하 22, 사 2,11,65,66 겔 27,40-48 등) 배교한 정통주의자들이 “때”(when)를 “위하여”(so that)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스라엘에게서 이 약속들을 훔쳐내어 그것들을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뿐이다. 이사야 34:6, 미카 4:3, 예레미야 23:5, 스카랴 14:9, 이사야 35:1-10을 보라. 이 구절들은 죄인이 회개하고 위로받는 것 이상의 것들을 말하고 있다.
“때”(when)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무분별은 21절의 “만물”(all things)이 영적인 것만을 언급한다고 믿는 데 기인한 것이다(골로새서 2-3장을 이 구절에 비춰서 읽음으로써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근본주의자가 일단 사도행전 1:6에서 주춤하게 되면 사도행전 2:30에서는 휘청거리게 되며, 사도행전 2:30에서 휘청거린 다음에는 여지없이 사도행전 3:19에서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리브 산에 맨발로 내려오실 때까지 “새롭게 되는 때”나 “만물이 회복되는” 것은 없다(행 1:11, 슼 14:1-12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올리브 산에 내려오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회복”(21절)과 “새롭게 됨”(19절)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성경 예언에 적용시키는 국제적인 사회주의자이다.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21절)에는 세상과 시대의 시작을 기록했던 모세가 포함되며, 그가 기록한 야곱, 이삭, 아브라함, 노아, 에녹, 아벨 등도 포함된다. 유다서 14절에서 에녹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언은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에녹은 침례인 요한이 태어나기 2000년 전에 재림을 전파하고 있었다.
3:22-26 『모세도 실로 조상들에게 말하기를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에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에게서 모든 말을 들으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 백성 가운데서 멸망되리라.’고 했느니라. 뿐만 아니라 사무엘로부터 그 뒤를 이어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도 한결같이 이 날들을 미리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그 선지자들의 자손이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 고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일으키사 너희를 복 주시려고 먼저 너희에게 보내어 각각 자기의 악한 행실로부터 돌아서게 하셨느니라.”고 하더라.』
『...나와 같은 한 선지자...』(22절). 이 유명한 구절은 신명기 18:15-18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요한복음 1:24-28에서 요단 강에서 왜 그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예레미야(마 16:14)와 엘리야(요 1:21)가 둘 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였다(요 1:21). 모세가 신명기 18:15-18에서 “네게”(thee)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며, 여기에는 그 모세의 말이 다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에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에게서 모든 말을 들으라』 22절).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방인 성도의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무엘로부터 그 뒤를 이어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도 한결같이 이 날들을 미리 말하였느니라』(24절). “그 뒤를 이어” 예언한 사람들은 다윗부터 말라키까지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2:17의 “마지막 날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모든 것이 재림(마태복음 1장과 사도행전 7장 사이에 성취될 약속들)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왕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초림과 재림을 함께 두었다(벧전 1:11). 이것은 누가복음 4:18에서 그리스도께서 이사야 61:1,2를 다루시는 것으로 볼 때 명백해진다. “이스라엘을 위한 연기된 왕국”은 하나의 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학설이었던 적이 결코 없으며, 또 학설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학설이라고 가르쳤던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서 신문의 제 1면에 실릴만큼 확실하고 중요한, 예언된 진리이다. 베드로가 “이 날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선행되는 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들은 여기서 일어나고, 대환란 때(계 22:12) 다시 일어난다. 히브리서 1:2의 “마지막 날들”이 사도행전 1-7장이나 계시록 4-19장에 위치할 수 있는 것처럼, 사도행전 3:23,24의 “이 날들”은 교회시대의 시작이나 그 “끝”에 자리할 수 있다.
23절의 “사람”이 지난 1000년 간 있었던 이방인들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은 모세와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다. “너희는 그 선지자들의 자손이며”(29절)라는 표현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샤프, 로버트슨, 그밖의 배교한 정통주의자들이 얼마나 자주 갈라디아서 3:29을 이 본문에 비추어 이해하는지와 상관 없이,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던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물리적인 자손이다. 갈라디아서 3:26-29은 결코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미혹당한 주석가들은 그 문맥에서 28절을 읽은 후에, 갈라디아서 3:29을 물리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이제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모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말로만 전천년주의를 믿는다고 하는 번역가들을 제쳐 두고, <킹제임스성경>(1611)이 제시하는 진리를 살펴 보기로 하자.
거의 모든 관주성경들은 갈라디아서 3:8의 관주에 창세기 12:3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구절은 창세기 12:3과 연결되지 않는다. 창세기 12:3에는 “족속들”(families)이라고 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3:8의 참조 구절은 “민족들”로 되어 있는 창세기 22:18이다. 갈라디아서 3:8은 영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삭으로서) 발견되는 창세기 22:18과 연결되어야 한다. 창세기 12:1-3은 “땅”과 관계가 있다. 베드로는 여기서 “민족들”이 아니라 “족속들”(kindreds)에 대해 말하고 있다(25절). 그럼으로써 베드로는 그의 메시지를 문자적인 히브리인들에게 주어진 땅(창 12:1-3)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관주성경이 본문에서 제시하는 참조구절은 창세기 22:18이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가장 훌륭한 보수주의자들이 “최상의 필사본은 26절에 ‘예수’가 삭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한 “최상의 필사본”은 당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수회 성경(1582)과 일치한다. “예수”란 단어는 밥 존스, 스프링필드, 미주리 대학에서 그것을 삭제하기 300년 전에 이미 그 라틴어 성경에서 삭제되었다.
25절에서는 인칭대명사의 철자변이에 대해 40개 이상의 필사본을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1966년판 알란드 텍스트(미국 성서공회)에는 “예수”가 삭제된 필사본 증거가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극도로 변개된 인쇄체 대문자 필사본들과 알렙, B, D에 의해 “예수”가 성경에서 빠졌다. 위에 나열한 “근본주의자들”은 그분을 본문 밖으로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의 지위를 “종”으로 변개시켰다(13절 주석 참조). 그들은 성경 본문을 태워 버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것에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 했다.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신 것은(26절, “그의 아들 예수를 일으키사”) 그리스도의 “아들되심”과 연관된다. 그가 종인 것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종”이란 단어는 13절이나 26절에 맞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