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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뉴욕시장 조란 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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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12월호>
지난 11월 4일, “자본주의의 심장”이자 미국 최대의 금융 중심지인 뉴욕시에서 “사회주의자”가 시장에 당선되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그 주인공은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이었는데,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당내 주류로부터 외면받던 신예요, 34세의 젊은이며, 우간다 태생의 이민자 출신이요, 무슬림인 그가 미국 전체 GDP의 5%에 육박하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뉴욕시는 본래 “민주당의 텃밭”이기에 사실상 뉴욕시장 선거는 민주당 경선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맘다니는 당내에서 존재감이 미미한 후보였다. 지난 2월을 기준으로 지지율이 고작 1%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당시 민주당 주류와 여론은 앤드류 쿠오모 전 뉴욕 주지사에게 기울어 있었다. 쿠오모는 성추문으로 인해 공직에서 물러나 있기는 했어도, 선대로부터 뉴욕 주지사를 역임한 영향력 있는 지역 정치인이었기에 경선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맘다니는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자신의 청렴성과 신선함을 내세우며 기성 정치에 대한 뉴욕 시민들의 뿌리 깊은 염증을 파고들었다. 한때 “래퍼”로 활동한 특이한 전력도 있는바 “연예인”으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감각적 유세를 폈던 것도 주효했다. 그의 유세 영상은 입소문을 타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 나갔고, 특히 젊은 세대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결국 6월에 치러진 경선에서 맘다니는 쿠오모를 제치고 민주당의 뉴욕시장 후보가 되었다. 이후 쿠오모가 경선 결과에 불복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이미 “대세”가 되어버린 맘다니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맘다니와 같은 극단적 인물이 뉴욕시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맘다니가 가진 특성 중에는 “적그리스도”의 그것과 유사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기에, 이번 선거를 보노라면 마치 적그리스도가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는 과정의 예고편을 보는 듯하다.
젊은 아프리카계 지도자
적어도 성경 시대에는 “지도자의 자격”이 “나이 많은 남자”에게 있다는 것이 상식이었다(출 4:29-31, 욥 30:1; 32:7).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질서가 뒤집히고 아이들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일을 심판의 일종으로서 언급하셨다(사 3:4,5,12). 그러나 장차 올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정해 두신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자로서 성경의 법칙을 보란 듯이 깨부술 것이다. 그 죄의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 30세의 젊은 나이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것을 흉내 내어 “청년 정치인”으로서 전 세계의 리더가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지도자의 자격”에 있어 한 가지 법칙을 더 깨부술 텐데, 바로 함족은 “종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창 9:24,25). 성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적그리스도가 흑인이라는 사실은 매우 분명해진다(렘 13:23, 계 13:2). 비록 “함족의 종 됨”이라는 질서가 “바빌론의 함족 왕” 님롯으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흑인 해방 운동”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부정당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법칙을 옹호하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마 15:22-26, 슼 14:21).
맘다니는 인도계로서 직접적으로 “함족”인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아프리카 출신이요 흑인들과 같은 “약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임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정치인이다. 사실 함족의 땅인 “아프리카”는 매우 부정적인 곳임에도, 오늘날의 대중들에게 매력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성경 변개자” 오리겐, “카톨릭주의”의 주창자 시프리안, “최초의 로마카톨릭교도” 어거스틴은 모두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성경에서 세상의 예표가 되는 이집트 또한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다. 주님께서 초림하셨을 때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요 1:46)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해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지도자에 열광하는 것이다.
포퓰리즘과 사회주의
뉴욕시장 당선인 맘다니는 승리 연설에서 유권자들이 자신을 뽑은 이유는, 자신이 생계비 문제를 해결하여 “소외계층”을 돕고 “감당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겠노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이는 전 세계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이유와도 동일하다. 적그리스도는 가난, 기아,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들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할 것이다. 물론 정치인들이 내뱉는 이런 종류의 말들은 모두 허황된 사탕발림일 뿐이다. 적그리스도처럼 비범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계 6:6).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옛 말도 있지 않은가? “나라님 이상 되시는 분,” 곧 “만왕의 왕”께서 오셔야 그 문제는 해결될 수가 있다!(암 9:13) 덧붙이자면 “가난과 기아”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할지라도 “빈익빈 부익부”나 “부의 대물림”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당한 법칙이기에 해소될 필요가 없다(마 13:12; 25:29, 잠 19:14).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이 말에 거품을 물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맘다니는 임대료 강제 동결, 부유층에 대한 증세, 높은 최저임금 등의 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토지, 자본, 노동 등의 생산 요소를 개인이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사회화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그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산 요소의 사회화”는 결코 그네들의 말마따나 “노동자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모든 사람의 종살이”로 귀결된다. 요셉이 이집트의 온 땅을 치리하던 시절,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이집트인들은 곡식을 사기 위해 돈과 가축과 토지를 매각했다. 성경은 그들이 최후의 보루였던 토지를 매각하면서 『우리와 우리의 땅이 파라오에게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씨앗을 주소서.』(창 47:19)라고 말했다고 말씀한다. “생산 요소의 사회화”가 이루어지자 “자유인”은 없어지고 모두가 종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처럼 생산 요소를 국가가 통제하면 “경제적 자유”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해방”은 가까워지기는커녕, 영영 사라지고 만다.
맘다니의 정책도 파격적이라고 할 만하지만, 적그리스도의 그것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장난 수준에 불과하다. 적그리스도는 아예 경제 시스템을 장악하고는 짐승의 표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거래조차 허락하지 않는 극단적 시장 억제 정책을 펼 것이기 때문이다(계 13:17). 이를 통해 적그리스도는 사회주의에서 그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바 “더 높은 단계,” 곧 “공산주의”를 이뤄 낼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곰의 발”을 한 짐승으로 묘사된다는 점(『또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같고,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 계 13:2), 그리고 “곰”이 “러시아”(구 소련)를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그러한 미래의 도래에 대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평화주의와 유대인 포용
맘다니는 선거 기간 내내 “모두를 위한 뉴욕,” “반(反)이슬람주의 및 반(反)유대주의 척결” 등을 외쳤다. 무슬림으로서는 최초로 뉴욕시장 당선인이 된 그는 승리 연설에서 “뉴욕은 더 이상 이슬람 혐오를 팔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도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기성 “기독교인” 정치인들로서는 다소 도발적으로 느낄 만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종교, 인종,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평화주의자”로 내세움으로써 미국에서 가장 많은 “대졸자”를 보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인 뉴욕시의 입맛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즈음의 대학들에서 가르치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겠다). 적그리스도 또한 맘다니와 똑같은 전략으로 세를 확보할 텐데, 이를테면 “나는 아무것도 혐오하지 않지만,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만큼은 혐오한다.”와 같은 슬로건을 내걺으로써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면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한 강도로, 훨씬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더라도 사람들은 환호할 것이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니 말이다(단 8:25).
“평화주의자” 맘다니는 기본적으로 “반시오니즘적” 태도, 곧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은 “대량 학살”이요 전쟁 범죄라는 입장을 취하기에 유대인들의 외면을 받음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반(反)유대주의 척결”이라는 구호를 내세움으로써 일단의 유대인들로부터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는데, <가디언>지의 보도에 따르면 유대인 유권자들 가운데 약 3분의 1가량이 맘다니에게 표를 줬다고 한다. 그들은 대개 젊고 진보적인 비정통파 고학력 유대인들로, “신정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 회의적인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을지언정,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들은 아닌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로부터의 지지를 아마도 맘다니보다 훨씬 상회하여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환란 시대의 전반부에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고, 희생제를 인정하며 성전 건축을 허용하는 등의 유화적 제스처까지 취할 것이기 때문이다(단 9:27, 살후 2:4). 유대인들 가운데는 심지어 3년 반 후에 돌변할 적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짐승의 표를 받고서는, “적그리스도가 그리는 평화적 유토피아”를 부정하며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형제들을 박해하는 데 가담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마 23:34, 요 16:2). 어떻게 유대교를 믿으면서도 적그리스도의 이상에 심취할 수 있느냐고 묻고 싶거든, “카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 외쳤던 초림 당시의 “천국의 탈취자들”(마 11:12)의 모습을 떠올리기 바란다.
어떤 이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운운하면서 정치적 문제는 신앙과는 별개의 영역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누가 통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분이신데(단 4:32), 어떻게 정치를 신앙과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맘다니의 뉴욕시장 당선은 우리가 “시대의 표적”(마 16:3)으로 받아들임직한 일이다. 그는 장차 올 “그” 적그리스도는 아닐지언정, “많은 적그리스도”(요일 2:18) 가운데 하나라고 할 만하니 말이다. 맘다니의 행보를 통해 정말로 적그리스도의 길이 거의 다 예비되었고, 교회의 휴거가 임박했다는 주님의 신호를 읽으면서, 무심결에라도 그가 내놓는 것과 같은 정치적 의제에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이에 대해 깨어 있지 못하다가는 당장 오늘이 될지도 모를 휴거의 날에 “너는 왜 적그리스도의 길에 동참하다가 왔느냐?”라는 심장이 철렁한 책망을 들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