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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설교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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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10월호>
아끼지 말고 크게 외치며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이라.그들의 허물을 내 백성에게, 그들의 죄를 야곱의 집에 보이라. 이사야 58:1
거리에서 외쳐 설교하는 것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오랜 전통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이 그랬으며, 침례인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바울 사도 등도 모두 거리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광장이든지 회당이든지 거리에서든지 어디에서나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심지어 사람들이 듣지 않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말씀을 선포했던 것이다. 2000년 교회사 기간을 살펴보더라도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역사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떳떳이 설교했던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 교회 내에서 전도 운동이 크게 일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의 양상을 띄고 있다. 첫째는 “개인전도”이고 둘째는 “노방전도”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개인구령”과 “거리설교”라고 부르지만 현재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전도운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구령과 거리설교가 될 수 없다.
우리 나라의 “개인전도”는 지금까지 주로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복음의 내용이 간단히 실린 전도지, 예를 들면 “4영리”(C.C.C.)나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네비게이토) 등의 전도책자를 활용해 누구든지 쉽게 전도할 수 있도록 회원들을 교육시켰고, 이들의 전도방식은 이제 많은 교회에 퍼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지들은 죄에 대한 찔림이 부족하고 지옥에 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 죄인으로 하여금 죄로 인한 형벌인 지옥의 불길 속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강력하게 느끼지 못하게 한다.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는데(요 16:8)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하고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죄에 대한 찔림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고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구원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반면에 우리 나라의 노방전도는 몇몇 “과격단체”들에서 일어났다. 필자가 이들을 “과격단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아무데서나 소리치고 있기 때문이거나,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건전한” 기성교단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선지자적 사명을 띄고 있다고 생각하여 외치며, 또 교회사에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행했던 대로 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이단, 또는 과격분자로 취급받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복음만 올바르게 전한다면 지하철에서 설교하든지 광장에서 설교하든지 버스 정류장에서 설교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나, 그들의 외침 속에는 복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소리는 소음이 될 뿐 청중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성경대로 믿는 거리설교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방해하기만 할 뿐이다.
올바른 거리설교는 죄에 대한 강력한 지적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개인구령에서나 거리설교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있는 이곳은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이기 때문이며, 이 시대는 노아의 날과 같기 때문이다. 도둑질, 사기, 간음, 살인, 질투, 우상숭배, 부모를 거역함, 싸움, 음란한 생각, 폭력, 이기주의 등 어떠한 죄를 지적해도 이 죄의 목록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지옥의 불구덩이 위를 덮고 있는 연약한 뚜껑 위를 걷고 있으며, 그 뚜껑에는 그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게 될 지점들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라고 강력하게 청중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오늘날 인본주의 교육에 찌들어 있는 전도자들은 이런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느냐고 묻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 이전에 죄에 대한 강력한 찔림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거리에서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지금 지옥은 그 벌겋게 달아 오른 입을 크게 벌리고 여러분이 어서 빨리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에 놀라고 두려워하며 애통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죄의 찔림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분명히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분명한 메시지로 설교하는 거리설교자를 찾아보기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최근 소돔과 고모라 같은 죄악된 서울 시내의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성경대로 믿는 거리설교자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그들은 합정동에 소재한 성경침례교회 청년들인데, 이들이야 말로 교회사에서 피를 흘려가며 거리에서 외쳤던 거리설교자들의 후예이다. 이들은 지하철이나 역 광장, 또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목소리를 높여 죄를 책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 사람들의 방해나 시끄러운 음악 소리며,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 따위는 이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에스겔 선지자가 그랬던 것처럼 청중들이 듣든지 안듣든지 그곳에 선지자가 있음을 분명히 알리고 있다(겔 2:4,5).
몇 달 전부터 이들은 토요일 오후만 되면 모든 일을 정리하고 팀을 이루어 영등포 역 광장과 보라매 공원 및 을지로 등으로 설교하러 간다. 형제들은 설교하고 자매들은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가운데, 방해자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지만 이들의 거리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아 구원받는 사람들은 날로 늘어만 간다. 설교가 끝나고 행해지는 개인 구령시간은 직접적인 열매가 맺혀지는 시간이다. 설교자의 선포로 마음 밭이 갈아진 사람들에게 다가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마음 깊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수요일은 저녁 기도회가 끝나면 이들 설교자들의 발걸음은 전철로 향한다.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전철 칸을 택하여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차분하게 복음을 전한다. 이들에게는 교회의 강단만 설교단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느 곳이나 설교단이 되는 것이다.
때때로 이들의 설교는 전국을 누비기도 한다.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한 순회전도여행이 그것이다. 지난 여름에는 포천과 청주와 강릉에 이 “선지자”들이 모였다. 특히 지방에는 장이 서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가 용이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시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처럼, 포천에서의 5일장은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기억나게 했다. 강릉에서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해변에서의 설교였다. 때가 휴가철인지라 바닷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안선을 따라 수영복만 입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그 해변에 “넥타이 부대”가 등장한 것이다. 아무리 작열하는 태양과 바다가 손짓을 해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넥타이까지 매고 이 설교자들은 해안선을 따라가며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여러분은 이 뜨거운 햇볕이 싫어서 바닷물에 몸을 담그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여러분은 이보다 더 뜨거운 지옥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곳에는 시원한 바닷물도 없으며 부숴지는 파도도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을 영원토록 태우는 뜨거운 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우리를 데려가실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시대는 악하고 죄악의 물결은 더욱 거세지며 거짓 복음이 진리의 복음을 가리는 이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그분의 영원한 말씀과 함께 저들의 가슴을 찌를 것이다. 세상은 바야흐로 화합과 연합의 길로 나아간다. 제도 교회들은 교파와 관계없이 서로 연합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잘못은 덮어주고 서로 다른 교리는 지적하지 않는다. 비록 상대방이 오류가 있다 할지라도 내가 비판받기 싫으면 그냥 놔두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미덕”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인본주의 교육은 이해와 타협을 진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죄를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외침은 저들에게 저주로밖에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멸망할 죄인들에게는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기 마련(고전 1:18), 박해가 따르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끊이지 않고 퍼져나갈 것이다. 그 생명력은 베드로에게 있었고 바울에게 있었고 카톨릭의 칼날에 이슬처럼 사라져간 중세 시대의 많은 설교자들에게 있었으며, 루터에게 있었고 웨슬리와 에드워드와 무디에게 있었던 생명력이다. 그들은 모두 그 시대의 죄악들을 고발하는 “선지자”들이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도 목소리를 높여 담대히 외치는 거리의 설교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린다. 이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죄악된 도시에 죄와 심판과 십자가와 의를 선포하는 “선지자”들로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