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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설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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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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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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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은 설교와 설교자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는데, 이번 호에서는 설교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살펴보겠다.<br/><br/>1. 하나님의 주관하심 아래서, 말씀을 전하면 그것을 믿는 사람이 거듭난다. <br/><br/>1)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br/>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생명을 주며,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베드로는 다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벧전 1:23,25).<br/><br/>2)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준다.<br/>하나님께서 두신 순서는 이렇다. 첫째, 말씀이 전파되고, 둘째, 들은 바를 믿고, 셋째, 믿은 사람이 거듭난다. 이를 에베소서 1:12,13에서 분명하게 밝히셨다. 『이는 먼저 그리스도를 믿었던 우리로 그의 영광을 찬양케 하려 하심이니라.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그분을 신뢰하였으니 또 너희가 그분을 믿고서 약속의 그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1:18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드러내셨다. 『그분 자신의 뜻으로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셔서 우리로 그의 피조물들 가운데 첫열매들에 속한 자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점을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br/><br/>복음을 전하는 설교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에 전율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우리 가운데 택하시어 나의 입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느니라.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증거하시어 성령을 주셨으며』(행 15:7,8). 하나님의 주관하심 아래서, 그분의 도구로서 자격을 받은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자 지옥으로 향하던 죄인이 듣고 믿어서 영원히 구원받는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특권이지 않은가! 바로 이 점이 수십 년 전에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들어쓰셨던 D.L. 무디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다음처럼 말했다. “사람인 나의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도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가 자신의 구호로 삼을 만한 말이다.<br/><br/><br/>또한 수년 전에는 그리스도의 어느 신실한 종이 설교자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는데, 복음의 전령들 각각이 마음에 자극을 받기 바란다. “우리는 기적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출발선에서부터 염두에 두면 좋습니다. 우리는 못 보는 눈에게 ‘보라’고, 못 듣는 귀에게 ‘들으라’고, 죽은 마음에게 ‘살라’고, 심지어 무덤에서 썩어 가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하도록 보내졌습니다. 그럴 엄두가 나시나요? 주인께서 우리를 보내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런 일에 완전히 무력하다는 확신을 갖고 시작하는 편이 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보내신 분께서 함께하신다면, 믿는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설교자여,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주고자 일어서려던 참이라면 서둘러 앉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전능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보여 주고자 일어선다면 당신에게 한없는 가능성이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목소리를 통해 일하시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실 수 있는지에 한계가 없습니다!” <br/><br/>3)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성장”시킨다. <br/>믿는 자에게 영적 생명을 준 바로 그 말씀이 또한 그 생명을 성장시킨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2).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주변 성도들에게는 성경을 늘 먹는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오직 은혜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벧후 3:18) 자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br/><br/>2. 설교는 성도가 가장 거룩한 믿음을 쌓아 가는 수단이다. <br/><br/>1) 사도 바울은 “세 가지”를 바랐다.<br/>바울은 골로새서 1:28에서 사역의 목적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훈계하며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제시하려는 것이라.』 혼을 그리스도께로 이겨 와서 거듭나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 주님을 매우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로 반드시 인도해서 가장 거룩한 믿음을 쌓게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이를 이루는 방법이다. 이것이 설교자와 성경 교사 모두의 바람이어야 한다.<br/>성도들이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란 바울의 마음은 그가 에베소 교회의 목자들에게 전한 마지막 설교에서 잘 드러난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의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굳게 세워 줄 것이며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 가운데서 너희에게 유업을 줄 것이라』(행 20:32). 베드로도 동료 목자들을 권면하면서 같은 뜻을 마음에 두었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고 돌보되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br/><br/>2) 하나님의 말씀이 “일곱 가지”로 역사한다(딤후 3:15-17).<br/>이 내용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영적 근간을 튼튼히 해야 했던 한 젊은 설교자에게 바울이 보낸 편지에 나온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의 일곱 가지 목적에 주목해 보자. <br/>(1)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1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필요하다는 점에 관해, 2 그 구원을 받는 조건에 관해, 3 구원의 확신에 관해 죄인을 지혜롭게 한다. <br/>(2) “교리”를 위해서다. 교리란 중요하고 근본적인 가르침이나 우리가 흔들림 없이 믿고 의지하는 기본 진리를 가리킨다. 교리는 믿음 안에서 성도를 굳게 세운다.<br/>(3) “책망”을 위해서다. 성경은 진리를 밝힐 뿐만 아니라 잘못도 다 드러낸다. 성경은 다림줄 같아서 줄에서 벗어나는 모든 비뚤어짐을 보여 준다. <br/>(4) “바로잡음”을 위해서다. 성경은 비뚤어진 생각이나 행동을 드러내서 성도가 그것을 바로잡게 한다. 성경은 성도가 잘못을 돌아보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도록 이끈다. <br/>(5) “의로 훈육”하기 위해서다. 즉 성경은 성도가 도덕적으로 강직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고 진지하고 진정한 삶을 살도록 북돋아서, 그가 대면하는 불신자들이 복음에 영향을 받게 한다. 성경은 성도가 자기가 속한 가정과 사회, 일터, 성도의 모임이라는 각각의 공동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적합하게 할 것이다. <br/><br/>(6)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됨”을 위해서다. 여기서 “온전”이라는 말은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는 것, 곧 성장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런 성숙에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개인적인 경험이 포함된다. 이로 인해 그 성도는 믿음 안에서 더 어린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데 알맞게 된다.<br/>(7)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됨”을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잘 구비되기를 원하신다. 집 안에 가구가 없으면 냉기가 느껴지듯, 구비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이다. <br/>성경이 설교자의 삶을 주도하도록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가 위에 열거한 대로 나타난다. 바울은 바로 그런 수준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다음을 기록했다.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br/><br/>3)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목적”을 두고 일한다. <br/>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들은 모두 부활하신 그 머리에 의해, 그분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세 가지 목적을 위하여 주어진다.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여』(엡 4:12). 이것을 잠시 살펴보겠다. <br/>(1) 성도들을 온전케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다룬 바 있다. 영적으로 어린 시절이 길어지는 일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육신적인 어린 아기들(고전 3:1)일 뿐임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적인 어린 자녀들(갈 4:19)일 뿐임에 한탄해야 했다. 이 경우 잘못은 “배우는 사람”에게 있었다(히 5:12-14). 그래서 성경 교사는 청중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도록 메시지를 연구하고 준비하고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br/>(2) 섬기는 일을 하게 한다. 섬김은 다양하게 적용된다. 때로는 성도에게 경고하는 일을(살전 5:14), 때로는 두려워하지 말고 책망하는 일을(딤전 5:20) 포함한다. 혹은 위로도 해야 한다(살전 4:18). 그 필요가 무엇이든지 설교자는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는다. <br/>(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한다. 즉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 주는 것이 설교의 원대한 목적이다. 이것이 성령님 안에서 이루는 참된 사역의 유익이며(고전 14:6), 청중이 얻는 이 영적 유익은 사역의 시금석이 된다(고전 14:31). 영적인 사역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그 목적을 위해 선택받은 사람이 도구로 쓰임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말에는 옳지 않은 부분이 없다. 누군가도 이렇게 잘 표현했다. “효과적인 설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뛰어나게, 강력하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30: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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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는 왜 필요한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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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글(본지 제402호)부터 우리는 설교와 설교자의 필요성에 대해 성경이 왜 그토록 강조하는지를 살펴보는 중이다. 그에 이어 이번 글에서도 설교의 필요성에 대해 두 가지 면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br/><br/>1. 설교는 복음의 사실을 밝히는 증인이다(행 1:8; 22:15; 26:22, 요 15:27, 요일 5:9).<br/><br/>1) 증인의 정의<br/><br/>증인이란 자기가 본 것이나 들은 것을 그 사건과 연관하여 사실로서 알고 있는 것을 진술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진실을, 진실 전부를, 진실만을 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이 하신 일을 사람들이 알기를 바라시기에 그분의 백성 전체를 이 사실에 대한 증인으로 호출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직접 선언하셨다.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위대한 설교에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나에 관하여 증거하시리라.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리라.』(요 15:26,27)라고 선포하셨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님과 동역하는 증인이다. 참으로 이것은 영예로운 특권이자 책임이 아닌가!<br/><br/>2) 증거의 목적<br/><br/>증거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계시와 성도가 다른 이에게 하는 선포로 구성된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자신의 주인이 그러셨듯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또 본 것을 증거하노라』(요 3:11). 증거는 그 대상에게 유리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으며, 검사와 피고인 양측에서 제시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다음을 엄중하게 말씀하셨고 모두가 숙고해야 한다. 『만일 누가 내 말을 듣고 믿지 아니한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라.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요 12:47,48). 그래서 복음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고,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사망의 향기』가 된다(고후 2:16). 즉 복음이 성도에게는 영원한 복이 확실하다는 점을 증명하겠지만,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불신자에게는 위대하신 심판주 앞에서 불리하게 증언할 것이다. 이에 관해서 마태복음 12:41,42, 요한계시록 20:15, 사도행전 17:31을 읽어 보기 바란다. <br/><br/>그리스도를 등한시하고 거절하고 멸시한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시키시는 날에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다. 큰 백보좌에 앉아 계시며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분, 곧 만물을 자신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하게 드러내시는 심판주를 마주하면, 지금 그의 입에서 술술 나오고 있는 번지르르한 구실이 침묵으로 바뀔 것이다. 그가 직접 들은 복음의 증거가 그 자신이 구원받는 방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복음이 그가 받아야 하는 영원한 저주를 보장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증인이었던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하라. 『그들이 듣든지 그만두든지 간에... 그래도 그들은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있는 것을 알게 되리라』(겔 2:5). 주님께서는 이후 7절에서도 거듭 『그들이 듣든지 그만두든지 간에 너는 내 말을 그들에게 고할지니』라고 하셨다.<br/><br/>3)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에게 나타내는 일이다. <br/><br/>복음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나타나는 일이고(고후 4:2), 설교는 이 진리가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나님께서 권한을 부여하신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그의 말씀을 복음 전파를 통해 나타내셨는데』(딛 1:2,3). 그렇기에 복음은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사실(고전 15:1-4)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에게 이 진리가 알려져야 한다. 설교자의 권위는 그의 메시지의 근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다. 설교자 스스로는 내세울 위엄이 없으니, 이는 그의 위엄이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br/><br/>그뿐 아니라 설교자에게는 그가 전해야 할 메시지가 주어지며, 그 내용을 혼자 알아내도록 방치되지 않는다. 난데없이 그 사람에게서 뭔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경에 기록된 내용 중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아이 편에 이웃에게 전갈을 보내려는 엄마가 있다고 하자. 전할 내용을 묻는 아이에게 “가는 중에 알게 될 거란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선지자 학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주의 사자 학개가 주의 전갈을 백성에게 일러 말하기를』(학 1:13). 오, 더 많은 학개가 나오기를! <br/><br/>4) 이 복음 전파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차고 넘치게 실행했다. <br/><br/>설교자라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설교를 세세하게 공부해야 마땅하다. 사도들이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삶, 주님의 말씀과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먼저 말한 뒤에, 어떤 식으로 청중의 마음에 그 진리를 적용하는지 주의해 보라. 이를 위해 베드로의 설교[행 2:14-36(32절에 주목), 3:12-26(15절에 주목), 4:8-12]와 스테판의 변호(행 7:2-53), 베드로가 코넬료에게 한 강론[행 10:34-43(39절에 주목)], 피시디아 안티옥에서 한 바울의 설교(행 13:16-43), 바울이 마르스 언덕에서 한 설교(행 17:22-31)를 읽기 바란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설교의 개요를 작성해서 단락과 내용을 깊이 연구해 보면 유익한 훈련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믿든지 거절하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기를 원하신다. 믿는다면 구원받겠지만, 그 반대라면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설교자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복음의 사실을 전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br/><br/>2.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듣는 이의 믿음을 깨우는 방법이다. <br/><br/>1) 믿음은 언제나 계시를 전제로 한다. <br/><br/>『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롬 10:17). 이 사실은 다음의 말씀으로 쉽게 입증된다. 『그들이 믿지 아니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의 경우와 비교해 보라(히 11:4,5,7,8,17).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했고, 이것이 믿음이다. 구원받는 믿음은 인격체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과 사역을 혼이 확신하는 것이다. 즉 그 믿음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며,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신 구속 사역을 신뢰하고,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함으로 증명된다. 믿음의 언어는 이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나니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행 27:25).<br/><br/>2) 믿음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br/><br/>믿음 그 자체만으로는 장점이 없으며, 절대 확신을 갖고 의지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부실한 은행을 굳게 믿고 일생 모은 적금을 투자했다가 모조리 잃고 마는 경우가 많다. 투자금의 안전 여부는 투자자의 믿음이 아니라 은행이 좌우하는 것이다. 진리의 성경에 우리가 확신을 갖고 의지할 대상으로 계시된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이시고, 주님께서는 복음의 중심으로서 제시되신다. 죄인은 그 인격체와 그분께서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엡 2:8).<br/><br/>그렇다면 믿음에는 어떤 속성이 있는지 다음의 말씀들에 주목하기 바란다. 『모든 민족 가운데서 믿음으로 순종케 하나니』(롬 1:5). 『전파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 것은, 그것을 들은 자들이 믿음을 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히 4:2).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즉 우리는 믿음 자체가 아닌 “믿음의 대상”과 더불어 전념해야 한다. 달리 말해 믿음은 분석이 아닌 실행이 요구되는 것이다.<br/><br/>믿음이, 굳센 믿음이 그 약속을 보네 <br/>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네 <br/>불가능을 비웃더니 <br/>그것이 이루어지리라 외치네<br/><br/>어느 경건한 자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자매님의 믿음이 그렇게 크다면서요?” 그러자 자매는 말했다. “아니요. 전 크신 하나님을 믿을 뿐이랍니다.” <br/><br/>3) 믿음은 구원받는 데 필수 조건이다. <br/><br/>빌립보 간수가 『선생님들이여,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행 16:30)라고 묻자,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답변했다. 설교자의 소임은 주님께 의지해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의 책무가 끝난다.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실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께서 두신 조건, 즉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일을 믿을 때 말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설교자가 청중의 마음에 있는 믿음을 깨울 만큼 충분히 말씀을 전했음에도 고의로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의 머리에는 심판만이 머물 뿐이다. 『누구든지 나팔 소리를 듣고 경고를 취하지 아니하여 그 칼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제거하였으면 그의 피는 그 자신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겔 33:4). 물론 뜻있는 설교자는 청중을 향해 “싫으면 말고”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경건한 진심과 진지한 간청으로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 5:20)라고 권면하고자 애쓸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3 Oct 2025 16:15: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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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 복음을 전하는 방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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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그 동안 설교자의 자격을 논했고, 설교자의 부르심을 다뤘으니, 이제는 설교와 설교자의 필요에 대해 성경에서 왜 그토록 강조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일곱 가지 면을 살펴볼 것이다. <br/><br/>1. 설교는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다.<br/><br/>1) 하나님의 순서가 개요로 제시되었다. <br/><br/>이 주제에 관해서는 다음이 대표적인 구절이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노라.”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파송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와 같으니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느니라』(롬 10:8,9,13-15). <br/><br/>우리는 여기서 일곱 가지 핵심어, 곧 “시인하다,” “구원받다,” “부르다,” “믿다,” “듣다,” “전파하다,” “파송하다”를 들여다볼 것이다. 이 각각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하나로 이어져서 생각이 논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말들이 시간상 역순으로 일어난다는 점, 즉 결과에서 원인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눈에 띈다. 언급한 단계들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1 상대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시인한다. 왜? 2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3 주의 이름을 불러서이다. 어떻게 부르게 됐는가? 4 전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5 진리의 말씀을 들어서이다. 어떻게 듣게 되었는가? 6 설교자가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는 설교하게 되었는가? 7 하나님께서 설교하라고 보내시자 그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br/><br/>이번에는 이 단락을 반대로 보면서 원인에서 결과로 따라가 보겠다. 1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보내신다. 2 설교자가 말씀을 전한다. 3 누군가가 말씀을 듣는다. 4 그 사람이 들은 내용을 믿는다. 5 그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6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7 구원받은 그가 그리스도를 자기 생의 주님으로 시인한다. 그렇기에 이 방향으로나 저 방향으로나 하나님의 은혜의 순환은 완결이 된다. 설교자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지면,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br/><br/>2) 하나님께서 맡기셨다. <br/><br/>『그후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더라. 아멘』(마 28:18-20). <br/>위의 명령에 나오는 4번의 “모든(항상)”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향해 갖고 계신 계획의 윤곽을 보여 주고자 결합함에 주목하기 바란다. <br/><br/>(1)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도다.』 - 능력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기에 주님의 명령을 완수할 수 있다고 보증한다. <br/>(2)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 들판은 모두가 일해도 될 만큼 충분히 넓다. 웨슬리는 이 구절에서 힘을 얻어 “세계가 내 교구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복음 전파자들에게 아주 넉넉한 일터가 주어진 것이다.<br/>(3)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명령은 복음을 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믿고 구원받은 상대는 침례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도록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알려 줘야 한다. <br/>(4)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말 그대로 모든 날] 함께 있으리라.』 - 이것은 사령관께서 주신 행군 명령이며, 우리가 할 일은 그에 순종하는 것이다. <br/>마가복음 16:15,16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 장담컨대 그리스도께서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자기가 속한 영역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혹시 네가 못 가면 기도해라. 아니면 돈으로 내도 괜찮고, 네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도 상관없다.” 주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책무에 그리스도인 모두가 순종해야 한다. <br/><br/>주님께서는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시고자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곧 성령님께서 오시는 상황을 감안하셔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 여기서 복음 전파의 범위를 제일 넓게 알려 주셨다.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br/><br/>3) 하나님의 계획이 수행되었다. <br/><br/>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얼마나 잘 이해했으며, 그 명령을 완수하고자 어떻게 온 힘을 쏟았는지는 초기 교회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성직자”라 불리는 특정 계급만 설교하고 가르쳤다거나 사도들만 그렇게 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br/>사도행전 8:1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가해졌다고 기록하며, 결국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사도행전 11:19-21에 나온다. 『널리 흩어진 사람들이 멀리 페니케와 쿠프로와 안티옥까지 가서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파하더라. 그 사람들 가운데는 쿠프로와 쿠레네 사람 몇 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안티옥에 와서는 그리스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니 많은 수가 믿고 주께로 돌아서니라.』 그 결과로 안티옥에 성도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br/><br/>그 모든 과정에서 사도들이 참여하거나 그들이 허가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지게끔 산산이 부서졌고,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들의 복음 전파에 크게 복을 주셨다. 당시에 사방으로 퍼져 나간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설교 인증서 또는 안수를 받았다는 내용은 성경에 없다. 사도행전 11:19에서 “말씀을 전파”했다는 표현은 격식을 갖춰 강론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복음을 말했다”는 뜻이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저 “기쁜 소식을 말한” 것이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을 주님께 이겨왔다. 이 시대에는 이런 종류의 설교자와 설교가 더욱 필요하다! 신학 박사들이 아니라, 그와 같은 설교자와 설교가 넘쳐야 하는 것이다. <br/><br/>사도행전을 읽어 가노라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꾸밈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모습으로 특징지어지는 초기 제자들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들의 사역에는 단순함과 신선함, 용기와 힘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했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임재와 능력을 넘치도록 증명했다. 우리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일찍 전해졌음을 본다. 사도행전 10장에서부터는 “땅 끝”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 전파 속도가 방해 없이 지속됐더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전진이 수렁에 빠지고 말았으니, 믿을 만한 교회사 책을 읽으면 그 내막을 알 수 있다.<br/><br/>4) 하나님께서 쓰신 용어를 자세히 보자. <br/><br/>신약성경이 기록된 원어로 “설교”의 용례를 살펴보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제시한다는 의미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게 된다. &lt;킹제임스성경&gt;에서 “설교하다”로 번역된 다음의 네 단어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br/>(1) 케뤼쏘(khru;ssw) : “전령으로서 선포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11:1, 마가복음 1:4; 3:14; 16:20, 로마서 10:15 등 공개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문맥에서 쓰인다. <br/>(2) 유앙겔리조(eu]aggeli;zw) : “기쁜 소식을 말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복음,” “복음 전파자,” “복음을 전하다”가 나왔다(마 11:5, 눅 4:18; 7:22, 고전 1:17, 갈 1:8, 히 4:2 등).<br/>(3) 카탕겔로(katagge;llw) : “충분히 말하다”라는 뜻이다(행 4:2; 13:38, 골 1:28). <br/>(4) 랄레오(lale;w) : “말하다”라는 뜻이다(막 2:2, 행 11:19; 14:25 등).<br/><br/>신약성경에 “설교”가 112회 나오지만, “격식을 갖춘 강론”의 뜻으로는 6회만 쓰였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용례로 보자면 “설교”란 전령으로서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분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 기쁜 소식을 말하는 것, 조금도 감추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행 20:27)을 전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속속들이 말하는 것, 인류에게 선물로 주신 아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에게나 보장하신 구원을 대로에서나 집에서나 만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br/><br/>신약성경을 읽다 보면, 주님을 알았던 성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신 구세주의 사랑과, 부활하신 구세주의 능력과, 다시 오실 구세주의 영광이 담긴 복된 소식을 퍼뜨리고자 그것을 개인적으로 간증하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기를 애썼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다음의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적용하기 적합하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눅 10:37)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Aug 2025 17:52: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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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에게 적합한 “정신”과 “교육”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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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설교자는 교육을 적합하게 받아야 한다. 회심 당시에는 충분하게 교육받지 못했더라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이들처럼 교육 기회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고의로 고집스럽게 그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면 용서받지 못한다. [본 글에서는 지난 호의 “3. 교육의 필요성”에 이어 “4. 지식이 주는 이점”과 “5. 지식의 공급”에 대해 다룬다.]<br/><br/>4.<br/>지식이 주는 이점<br/><br/>설교자가 무엇인가로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딤전 1:11)을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일에 더 잘 갖춰진다면, 그것은 가장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스펄전이 말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양뿔 나팔이 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은 나팔이 될 수 있다면 훨씬 낫다.” 영적인 견지에서 여타의 요소가 동등하다면, 교육받은 설교자가 그렇지 않은 설교자보다 확실히 유리하다. 내용을 전달하는 단어들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발음할 뿐만 아니라 문법 지식과 구사력도 더욱 뛰어나서다. 또 넓은 범위의 일반 지식을 가진 터라 그 축적된 지식 모두가 의도한 요점들을 자료를 써서 보여 주고 이해시키는 데 크게 쓸모가 있다. 대학자라고 다 사탄의 편에 선 것은 아니기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모세는 뛰어난 지성인이었다. 그는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위에』 능했다(행 7:22). 하나님 편에 서겠다는 위대한 결심을 한 뒤 이집트의 보화와 낙을 저버리자,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강력하게 사용하셨고, 그에게 영감을 주셔서 성경의 첫 다섯 권을 쓰게 하셨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부류에 속한다. 그는 당대에 최고로 출중한 스승이었던 가말리엘 아래서 자랐고 월등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서 기쁘게, 남김없이 자신과 자기 소유를 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쓰시도록 드렸다. 그 결과 성령의 영감으로, 그의 펜을 통해 신약성경의 상당 부분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br/><br/>높은 수준의 지식에 높은 수준의 영성이 합쳐져 존경받게 된 인물을 당신의 책장에서 찾을 수 있는지 보라. 그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금은 주님과 있더라도 그들의 글은 지상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여전히 세워 주어 복이 된다. <br/><br/>요즘의 청중은 전 세대보다 평균적으로 더 교육을 받는다. 농장에서 일하며 시골 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도시 학생과 같은 교육 혜택을 받는다. 또한 라디오의 보급이 크게 기여한 덕에 40년 전보다 훨씬 안목을 갖춘 청중이 만들어졌다. 라디오 프로그램 전반에서 좋은 우리말을 명확하게 말하고 똑바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고 웅장한 메시지를 전하는 복음 전파자가 기쁜 소식을 전할 때 훌륭하고 강력한 우리말을 명확하게 말하고 똑바로 발음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과도한 바람은 아니라 여겨진다.<br/><br/>5.<br/>지식의 공급<br/><br/>하나님께서는 설교자가 교육을 받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지금까지 그 필요를 채워 주셨다. 학생 편에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이용하고 부지런히 적용해서 자기 것으로 삼으면 된다. 음식이 제공되는 일과 그 음식을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은 별개다. 풍성한 음식을 두고도 굶어 죽을 수 있는데, 받은 음식을 먹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 이제 설교자에게 공부하라고 넉넉하게 주신 것들을 살펴보자. <br/><br/>1) 성경<br/>설교자는 배움을 향상하는 데 자료가 부족할 일이 없다. 성경이 맨 먼저이고 제일 중요하다. 사실 성경을 공부하는 것 그 자체가 훌륭한 방법이다. 성경 없이는 누구도 교육을 완성하지 못한다. 성경은 문학으로만 봐도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는다. 맥라건이 말했다. “성경에는 건설적이고 좋은 작문 형식이 전부 실려 있다. 역사, 예언, 시, 비유, 상징적인 표현, 현명한 해석, 문자 그대로의 서술, 원칙, 본보기, 잠언, 논설, 서신, 설교, 기도 등, 요약하자면 논리적인 형태의 글이 모두 나온다.” 성경은 그 자체로 도서관이고, 당연히 설교자가 늘 곁에 둬야 하는 동반자이자, 무엇이든 물으면 그 안에 답을 다 가진 존재이다. 세상에는 조금이라도 성경과 견줄 만한 책이 없다. 성경은 세상에 나온 책을 하나같이 아예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설교자는 스스로를 성경에 흠뻑 적셔야 한다. 그러려면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성경이 설교자의 본질로 자리 잡아서 생각, 말,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통제한다. 설교자는 성경의 사람이어야 하고 성경의 내용을 꿰뚫어야 한다. 성경을 자유자재로 인용할 줄 알아서 그 아름다운 표현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 <br/><br/>2) 장서<br/>현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다윗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게 떨어진 경계는 쾌적한 곳이니 정녕, 나는 훌륭한 유업을 가졌나이다』(시 16:6).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걸출한 능력과 방대한 성경 지식을 쏟은 연구가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막대한 빚을 졌는지 아는가? 그들이 지금 우리가 가진 소중한 진리의 유산을 책의 형태로 남겼는데, 우리가 거기서 낱낱이 유익을 취한다면 잘하는 일이다. 다음 구절에서 그들의 희생적인 노고에 대해 참되게 말씀하신다.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에 참여하였느니라』(요 4:38). <br/><br/>책을 경시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경시하는 셈이 된다. 교사가 사역을 말로 하든 글로 하든, 그는 교회가 세움을 입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성경을 건전하게 가르치는 교사들이 쓴 책을 읽지 않는 어리석은 자는 같은 맥락에서 그들의 강연을 들으러 갈 리도 없다! 세움을 입으라는 특별한 목적으로 자기에게 그런 자료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그 같은 모습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4:11-16을 읽어 보라.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 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이제부터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요, 사람들의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그들이 속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온갖 교리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다니지 아니하고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우리가 모든 일에 성장하여 그에게 이르리니 그는 머리시며 곧 그리스도시니라. 그로부터 온몸이 각 부분의 분량 안에서의 효과적인 역사를 따라 각 마디를 통하여 공급을 받아 알맞게 결합되고 체격이 형성되어 몸을 성장시키며 사랑 안에서 몸 자체를 세워 나가느니라.』 <br/><br/>사역에서 말로 전달하는 방식과 글로 전달하는 방식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가 많은 유익을 주는 데 더욱 유리하다는 점이다. 책을 펴내고자 글쓰기에 매진하다 보면 자신이 의미한 바에 조금도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표현에 훨씬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게 집필된 양서는 부지런히 찾는 사람의 발에 보물과 같은 지식을 쏟아 놓을 기회만을 기다린다. 잠언 2:1-12과 3:13-26을 읽어 보라. 독서에서 성경이 늘 우선해야 마땅하고 그 무엇에게도 밀려나서는 안 되지만, 이런 책들도 아주 가치가 높은 부가물이자 영적으로 유익이 크다. <br/><br/>장서란 당연히 설교자의 소유로 서가에 꽂힌 권수를 뜻하지 않고, 직접 읽어서 정말 자기 것으로 만든 책만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서가 빼곡한 책장 상당수가 실상은 주인의 소유물이 되지 못한 채 꽂혀만 있다! 좋은 책은 신경을 많이 써서 구입해야 하며, 책을 선정할 때 경험이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들인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쓸모 있는 공간까지 차지해 버리는 무익한 책 다량보다 양서 몇 권을 갖는 편이 월등히 낫다. 나중에 여러 쪽을 할애해서 설교자의 책꽂이에 적합한 권장 도서 목록을 제시하려고 한다.<br/>설교자는 역사, 시, 고전을 포함해 세속 문학 중 손꼽히는 책도 제법 폭넓게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시야를 넓히고 어휘를 늘리며 훌륭한 우리말에 익숙해지면 자기 생각을 더 잘 표현하게 된다. 독서에 활용하면 좋았을 것을, 24시간 중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따져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어디를 가든 늘 책 한 권을 지녀서 틈틈이 읽는 것이 좋다.<br/><br/>3) 통신 강좌 <br/>통신 강좌가 아주 많이 개설돼 있고, 특정하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 줄 만한 기라성 같은 과목들이 설교자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말, 대중 앞에서 말하기, 신문방송학 등의 과정이 설교자가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을 가르치기에 더욱 적합하도록 도울 것이며, 이것은 설교자에게 작은 문제가 아니다.<br/><br/>4) 글쓰기 <br/>설교자에게 가능한 한 글을 많이 써 보라고 조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쓰기는 생각을 명료하게, 또 표현을 쉽게 만드는 데 상당한 보탬이 된다. 부수적으로는 문법 오류 수정에도 큰 역할을 한다. 글쓰기에 기울이는 바로 그 노력이 생각을 훈련하는 탁월한 방법이 된다. 이는 글쓰기가 필자 자신이 의도한 바를 명확하면서도 간명하게 말하도록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써 본다면 흙탕 같은 생각과 애매한 표현을 피할 텐데, 안타깝게도 피하지 못하고 만다!<br/><br/>5) 비평 <br/>설교자는 주제, 표현, 발음, 문법, 몸짓, 버릇 등 자기가 메시지를 전할 때 효과를 해치는 요인에 관해 비평해 주기를 다른 사람에게 청해야 하고, 그런 평가를 반겨야 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다루겠다. 제프 D. 데이는 이 부분을 두고서 “설교하기에 참으로 노력을 기울인다는 말은 끈질기게, 주의를 기울여, 기도하면서 설교를 준비한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세부 내용, 교리, 설교학적인 순서, 힘찬 우리말, 정확한 문법, 바르고 또렷한 발음, 마음을 끄는 전달, 조절된 발성, 적절한 몸짓이 포함된다.”라고 했다. 이 모두가 힘든 일인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대부분이 그렇지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으니, 그 이유는 그것을 “회계할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골 3:24)<br/><br/>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말하자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약 1:5-7; 3:17)를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지혜를 활용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과 관련된 기회를 전부 사용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한 대사들』(고후 5:20)로서 더 알맞게 구비되고, 아울러 복되신 주인께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마 25:21)라는 칭찬을 듣기를 바라는 것이다.<br/>필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지금까지 설교자의 자격이라는 주제로 상당한 지면을 사용했다. 설교자와 그의 설교를 떼서 생각할 수 없다는 아주 합당한 이유에서이다.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딤전 4:16)하라고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언제나 기억하기 바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10:11:2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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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에게 적합한 “정신”과 “교육”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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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설교자는 적합한 정신,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건전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 유전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기에 맑고 또렷한 정신 상태를 사람마다 다르게 갖지만,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해 정신적인 면에서도 자신의 최고치를 추구해야 한다. <br/><br/>1.<br/>광신의 위험<br/><br/>광신자는 “사소한 것에 특히나 관심을 쏟는 사람”이라고 누군가가 잘 정의했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은 성경의 진리에서 한 면만 가져다가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배제하는 바람에 전체로서의 올바른 균형을 갖지 못한다. 몇몇 설교자가 정신적으로 이렇게 비뚤어진 부분을 보여서 복음을 설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신뢰를 크게 잃었다. 그들은 성경 한 구절이나 진리의 한 측면을, 그 구절 또는 그 진리와 관련된 모든 다른 절이 비추는 조명을 통해서 해석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br/><br/>광신은 균형이 깨진 마음에서 나온다. 진리 하나를 얼토당토않게 뒤틀고자 힘을 쏟으면서 다른 진리 모두는 무시하기 때문이다. 한 관점으로 가르치는 데 전문가이고 입을 열 때마다 그 유별난 주제를 되풀이하는 설교자는 주의하는 편이 좋다. 그는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그 주제만 빼고 성경의 나머지에는 깜깜하다. 이와 관련해서 누군가 다음처럼 말했다.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롬 14:22)라는 말씀을 본떠서 이렇게 표현해 봤다. ‘네게 구부러짐이 있느냐? 그 구부러짐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br/><br/>마귀는 하나님께 “모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라는 임무를 받은 설교자가 “기이한 관점으로 가르치는” 데 빠져서 시간과 힘을 소진하게 된다면 크게 흐뭇해 할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어떤 진리나 교리에 관해서든 성경 전체를 살펴본 뒤에 고려 중인 그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결론지어야 한다.<br/><br/>진리와 연관해서 지닌 특이한 관점 하나가 집착으로 자리 잡으면, 그 설교자는 편향성을 갖는다. 그 특이한 가르침이 제자리에 있을 때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진리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확대되는 순간,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어서 혼란과 분열을 일으키기 쉽다. 그런 이상한 편중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 교회의 양상, 심지어는 주의 만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의 종류, 세대주의의 다양한 시대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br/><br/>하나님의 일을 힘 있게 해 나갈 수 있었던 유망한 설교자가 성경 전체를 가르치라고 하신 범위를 떠나, 부차적인 진리나 이상한 이론, 특이한 성경 해석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씁쓸하다. 그가 그 개념에 치명적으로 매료되면 그의 마음을 통과해 흐르는 개울 하나가 만들어지면서 생각하는 능력이 남김없이 거기로 흘러 들어간다. 그의 사역 전체가 그 강박관념이 내는 색을 띤다. 그가 취한 본문의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없는데, 조만간 그는 단골 주제를 설교로 끌어들인다. 성경의 다른 진리를 잃어 가면서까지 어떤 진리를 붙들고 있다면, 그것이 광신이라는 점을 언제나 명심하기 바란다.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적극적으로 섬기던 설교자 다수가 그만둬야만 했다. <br/><br/>2.<br/>분별 있고 건전한 사고가 필요하다.<br/><br/>디도서에서 바울은 건전을 강조하면서 건전한 교리(딛 1:9; 2:1), 믿음 안에서 건전해짐(딛 1:13; 2:2), 정죄받지 않도록 건전하게 말함(딛 2:8)을 언급한다. 건전한 말은 건전한 생각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분별 있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br/><br/>다른 사람은 몰라도 설교자는 어떤 진술에 관해 또렷하고 충분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읽고 들은 것에 대해 사리에 맞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깨어 있어 주의 깊게 살피는 정신은 필수이다.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진리들, 즉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님, 죄, 구원, 인간의 영원한 복과 저주와 같이 위대한 교리들에 열중해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이런 주제를 다루자면 분별 있고 엄숙하게 생각하는 능력이 얼마나 많이 요구되겠는가? 또한 그는 활발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청중에게 진리를 적용하고자 할 때 연관된 예를 자연과 역사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쇠약한 무릎, 힘없는 손, 나약한 마음, 특히 약한 정신은 결코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br/><br/>자, 다음으로 설교자는 교육을 적합하게 받아야 한다. 회심 당시에는 충분하게 교육받지 못했더라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이들처럼 교육 기회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고의로 고집스럽게 그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면 용서받지 못한다. <br/><br/>3.<br/>교육의 필요성<br/><br/>하나님의 사역은 당연히 그 사람의 능력 안에서 최고를 요구한다. 젊은 그리스도인은 진심으로 이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br/>“젊고 힘 있고 매이지 않은 / 내 모습 이대로 / 진리와 의와 당신을 위해 / 나의 최상을 드리고자 / 생명의 주님께 갑니다!”<br/><br/>하나님께서는 무지에 어떤 가치도 두지 않으신다. 의도적으로 무식하고자 하는 자는 더 깊고 더 어둡고 더 무겁고 더 끔찍한 무지를 벌로 받는다. 심지어 그 피해자는 무지에 푹 빠져 안주하다 못해 자기 지식의 부족을 뽐내기에 이른다. 그런 사람이 하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들은 적이 있다. “오, 주님, 제가 아무것도 모름을 감사합니다!” 또 그런 부류 중 하나가 여러 사람에게 “제가 무지해서 감사하답니다.”라고 말하자 듣던 이가 답했다. “글쎄요. 감사할 일도 참 많으시네요!”<br/><br/>성경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무지하다면 무지하게 내버려 두라』(고전 14:38). “주님의 일에는 뭐든 괜찮다”는 식의 발상은 성경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며 되레 호된 비난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곧 설교 자료를 집중해서 연구하고 공들여 준비하며 진솔하게 전달하는 데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님의 사역을 위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일 좋은 시간과 힘과 능력을 아낌없이 들여야 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내 온 힘을 쏟아 주님께 영광 돌리리!”라고 짧게 표현했다.<br/><br/>주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받는 훈련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에 실망한다.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부르시는 상황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쓰셨다.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내보내어 전파하게 하시며』(막 3:14).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설교하고 가르치기에 앞서 3년간 주님과 동행하며 최고의 선생님께 수업을 받았다. 그들은 『어리석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눅 24:25)이었기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중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님께서 많이 가르치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니 그들 능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셔야 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말할 것들이 많이 있으나 지금은 너희가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느니라』(요 16:12). 오순절에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님께서 오시자 그들에게 이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고, 주님께서 그토록 인내하며 가르치셨던 교훈들을 명확히 깨닫게 해 주셨다. 결국 그런 가르침들은 제자들의 삶에서 위대한 능력이 되어 그들의 사역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했다.<br/><br/>종교적 선입견에 눈먼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행 4:13)로 여겼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는 세계 최고의 교육, 곧 제일가는 학교인 예수님의 학교에서 3년 이상을 배웠다! 성경대로 성경을 가르치는 기관을 비판하는 무지한 자들은 그 학교들도 예수님의 학교와 동일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성경 지식을 전수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알고 설교하는 데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더 알맞게 갖춰지도록 하는 일 말이다. 그런 비평가들은 주님께서 직접 보이신 본에 자기 말을 비춰 진지하게, 냉정하게, 총명하게 숙고하고 조심해야 한다.<br/><br/>몇몇 경솔한 성도가 “배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두뇌를 주셨다! 지능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대부분에게 머리가 없다면 살아가기가 곤란하다. 거듭남은 성도의 지력을 강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처음에 의도된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깨달아 알게 하고 고상하게 하며 힘을 실어 준다. 지능은 주님을 비난하고 경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위해 개발하라고 주신 것이다.<br/><br/>한번은 두 성도가 열띤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학식이 많은 형제가 타당한 논거를 대자, 상대 형제가 그 상황을 끝내 버릴 생각으로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형제님의 지식은 하나님께 필요가 없어요!” 그러자 반대쪽 형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데요 형제님, 하나님께서는 형제님의 무식도 원치 않으신답니다!”<br/><br/>당연히 배움에는 끝이 없다. 어떤 주제에 대해 교육과정이 만들어지는 목적은 그저 학생이 정보의 원천에 접근하고 학습법들을 이용해 스스로 더 잘 배우게 하고자 함이다. 3,4년으로 정해진 교육과정을 통과하는 데 느긋하게 가도 되는 그런 쉬운 길은 없다. 여기에 지식과 지혜의 차이가 놓여 있다. 지식이란 지적으로 사실을 쌓는 것인 반면, 지혜란 그 지식을 옳게 연관 짓고 바르게 보유하며 제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지혜가 함께하지 않는 지식은 교만하게만 하고 개탄의 대상이 될 뿐이다(고전 8:1). <br/><br/>설교는 청중 앞에서 설교자의 지식을 내보이려거나 설교자 자신의 박식함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설교를 들으면 극히 불쾌해진다. 누군가가 이렇게 잘 말했다. “지식은 다른 이들이 했던 생각으로 가득하며 사람의 머리에 산다. 한편 지혜는 스스로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정신에 산다. 지식은 너무 많이 알기에 거만하지만, 지혜는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알기에 겸손하다.” <br/><br/>한 교사가 마땅히 자기 몫이라 여겼던 승진이 더 어린 교사에게 돌아가자 교장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제 교사 경력이 20년이잖습니까.” 그러자 교장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는 1년 했던 경험을 20번 되풀이했을 뿐이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이와 관련하여 C.F. 호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외워 둘 만하다. “지혜는 경험을 통해, 삶의 필요와 상황에 맞게 지식을 적용할 때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지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더 잘 대신하며 더 잘 나타내는, 유용한 목적을 이루는 데 쓰인다.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9 May 2025 09:58: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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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에게도  “몸”이 중요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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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설교자의 몸은 설교하기에 적합해야 한다. 대중 연설은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부담을 주는데, 그런 측면에서 설교하기 1시간이 육체노동 8시간과 맞먹는다. 신체와 영은 생각보다 더 가깝게 연결돼 있으므로 설교하기와 관련해서 고려해 보건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혼을 가지면 이상적이다. 사도 요한이 이 점을 깨닫고 사랑하는 친구 가이오에게 이렇게 썼다. 『무엇보다도 네 혼이 잘됨같이 네가 번성하고 강건하기를 바라노라』(요삼 1:2).<br/><br/>1.<br/>몸의 가치 <br/><br/>한 그리스도인 아버지가 그리스도인 아들에게 간결하지만 유용한 조언을 편지에 써 보냈다. “네 몸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도구다. 성령님께서 네 몸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니까 잘 돌보거라.” 우리는 지상에 있는 동안에만 이 몸에 담겨 산다. 죽으면 성도의 영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자 주님께 가며 그것이 훨씬 좋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죽었다 일으켜지든 살아 있다 끌려 올라가든,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바뀔 것이다(빌 3:21). 지금은 “천한 몸”이라 불리지만 그때는 멸시당하지도, 시간과 돌봄이 많이 필요하지도, 방치되지도, 과하게 보호받지도, 관심 밖에 두지도, 지나치게 근심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이 문제도 하나님의 편과 사람의 편에서 균형을 생각해야 한다. 출생을 통해 몸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위탁받은 그 몸은 우리가 돌봐야 하는 것이다. 성도의 영과 혼이 몸과 분리된 채로는 이 땅에서 최고 효율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몸 안에 있을 때만 제대로 섬길 수 있으니 몸을 잘 보살펴야 한다. <br/><br/>그런 맥락에서 음식이라는 방법으로 몸에 무엇을 넣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험적으로 자기 몸에 해롭거나 주님을 최선으로 섬기는 데 맞지 않는 음식을 안다면 피해야 한다.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적게 먹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위해 신체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데 적합한 종류와 양만 섭취해야 한다. 냉철하게 생각하고 순결하게 사는 데 해를 끼치는 습관은 무엇이든 멀리해야 한다. 술과 담배 같은 것은 전염병처럼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의 효과를 방해하지 않도록 말이다. 성경에서 금욕이 아니라 절제를 가르치시지만 귀감이 되려면 의심스러운 대상 모두를 철저하게 건드리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<br/><br/>로마서 14장을 차근히 읽어 보라. 어딘가 약한 형제에게 영적으로 걸림이 된다면 내게 아주 적법해도 삼가야 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며 무엇으로든지 네 형제를 넘어지게도 아니하고 실족하게도 아니하며 연약하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롬 14:21). <br/><br/>성도는 의상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 상황에 맞게, 사회에서 품위 있는 집단이 요구하는 수준에 맞게 입어야 한다. 양극단, 즉 화려한 맞춤옷이나 추레한 차림은 피해야 한다. 많은 사역자가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지내다가 병에 걸려 일을 그만둬야 했다. “상식”이라 부르는, 다소 희귀해진 지식을 조금만 사용했더라도 추위에서 몸을 적절하게 보호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보통 자신의 백성에게도 자연법칙을 그대로 적용하신다. 병에 걸린 그 설교자들은 고통스럽고 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주인께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몸을 유지하려면 옷 입는 법에 주의해야 함을 배운 것이다.<br/><br/>주님의 종은 자기 몸을 어디로 데려가느냐에도 합당한 신중함을 보여야 한다.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일이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 오락 장소에 출입하면 안 된다. 한 성도가 “내가 가는 곳 어디든 예수님을 모셔갈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와 같은 말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낸 후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 이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라』(요 10:4).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어디로든 모셔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면 어디라도 안전하게 따라갈 수 있다.<br/><br/>인생에서 겪지 않아도 될 위험에 처하지 않으려면 건전한 상식이 필요하다. 어떤 성도가 사자 입에 자기 머리를 넣고는 “오 주님, 이 사자가 제 머리를 물어서 끊어 버리지 않게 지켜 주세요!”라고 열렬하게 기도드린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사자의 입속에 머리를 넣는 일을 놓고 기도드렸더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견지에서 하는 말이지만 아주 유용한 그리스도인 다수가 자신의 무모함과 부주의로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적절하게 조심했더라면 복음을 전하며 수년을 더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무례, 경솔, 과속이 막대한 교통사고 사상자 수에 적잖이 기여한다는 점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 모두에게 쩌렁쩌렁하게 알려 줘야 한다. 언젠가 &lt;선데이 스쿨 타임즈&gt;에 “우리가 자랑하는 죄”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었다. 그리스도인이 속도를 위반해서 자기뿐만 아니라 동승자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하는 죄를 짓는다는 내용이었다.<br/><br/>마지막으로 성도는 자기 몸을 돌봐야 한다. 양극단, 곧 게으름으로 녹슬게 하거나 혹사로 찢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사려 깊게 먹고 운동하고 쉬어서 하나님을 위해 최상의 몸을 유지하고자 애써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주인을 섬기다가 낡아져야 하는 것이다. 시편 103:14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라.』 “진토”임을 명심하라. 설교자 중 많은 수가 자신이 진토가 아니라 무쇠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자기가 견뎌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무리하다가 신경 쇠약으로 주님의 사역에서 더 활약하지 못하고 제외된다. <br/><br/>철도 차량마다 적재 용량이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고, 한계치를 넘어 적재하면 고장 위험이 따른다. 자기 용량을 알고 그 한도를 지키는 설교자는 현명하고 복이 있다. 누군가가 말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이 섬기는 것을 막지 못할 때면 그 성도의 등에 올라타서는 그가 달리다 죽게 만든다.” D.L. 무디와 동료 설교자가 밤 기차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자 무디는 침대칸으로 향했다. 동료가 “주님 돈을 아껴야죠.”라며 객차 쪽으로 가자, 무디가 대꾸했다. “난 주님의 종을 아낄 거요.”<br/><br/>2.<br/>몸, 주님의 것<br/><br/>성경은 『이제 몸은 음행을 위하지 아니하고 주를 위하며 주께서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 6:13)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과 연관된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의 몸도 주님의 소유이며, 다음의 말씀이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 준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br/><br/>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빌려 쓰고 있음을 안다면 몸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겠는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시는 답은 우리에게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들처럼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즉 몸을 하나님께 유용한 도구로 드리라고 성도에게 촉구하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롬 12:1). 이어지는 구절들로 미루어 볼 때, 이렇게 우리 몸을 드려야 유용하게, 기쁘게, 힘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삶에 적합해진다.<br/><br/>주님께 드린 우리의 몸은 이제 주님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전 9:27). 하지만 육신, 즉 몸이 태어나면서 모두가 받은, 하나님과 원수인 그 대상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이 부패한 본성은 육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몸을 사용하고자 온갖 기술과 책략을 동원한다. 그렇기에 성도는 단호하게 육신의 정욕들을 거부하고, 자기 몸을 다스리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육신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몸을 억제하려면 언제나 영이 맨 위에 있어야 한다.<br/><br/>마지막으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 다윗이 시편 92:1,3에서 다음처럼 말했는데, 표현에 주목해 보기를 바란다. 『오 지극히 높으신 분이여, 주께 감사를 드리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 좋사오며... 열 줄 악기와 솔터리와 장중한 소리를 내는 하프로 하는 것이 좋으니이다.』 하늘의 음악가의 손에 전적으로 들려진 열 줄 악기는 몸에 빗댈 수 있으며, 아주 아름다운 가락을 만들어 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이 열 줄은 주님의 말씀을 읽는 두 눈, 주님의 음성을 듣는 두 귀, 주님을 매우 기쁘게 해 드리며 길을 걷는 두 발, 주님의 명령을 기꺼이 행하는 두 손, 주님을 증거하는 입, 주님께서 최고의 자리에서 통치하시는 마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 열 지체를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이셔서 마음을 울리는, 경이로운 선율과 화음을 만드신다. 그래서 프랜시스 리들리 하버갈이 이렇게 쓴 것이다. <br/><br/>내 삶을 취하셔서<br/>주님께 드려지게 하소서 <br/>내 생의 순간과 날을 모두 취하셔서 <br/>찬양으로 끊임없이 흐르게 하소서 <br/><br/>3.<br/>“건강한 몸”의 가치<br/><br/>건강은 잠시 잃거나 안타깝게도 너무 늦어 버린 상태를 맞고 나서야 그 가치를 깨닫곤 한다. 저명한 신경전문의이자 명석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T. 스코필드가 책 몇 권을 썼는데, 그리스도인 사역자 모두가 읽어야 마땅하다. 아마 &lt;신경 장애&gt;와 &lt;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신&gt;이 제일 잘 알려졌을 것이다. 이 둘은 예리한 영적 통찰력과 몸의 기능에 대해 정통한 지식을 담고 있어서 설교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유익한 조언을 준다. <br/><br/>저자는 “health”(건강), “whole”(전부인, 온전한, 한 덩어리로 된), “holy”(거룩한)의 어원이 같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사람을 3층 건물에 빗댔다. 1층은 몸이며, 가능한 건강하게끔 관리해야 한다. 2층은 혼이며, 온전하게 유지해야 한다. 3층은 영이며, 거룩하게 지켜 내야 한다. 이 놀라운 집의 각 층이 알맞게 보살핌을 받고 제 기능을 해야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 활발하고 유용하게 주님의 사역을 수행하던 많은 그리스도인이 지금은 선반에 놓여 있는데, 건강을 관리하는 단순한 원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곧 『내가 속해 있고 또 내가 섬기는』(행 27:23) 그분을 대신해서 효과적으로 섬기도록 힘닿는 데까지 가장 좋은 몸 상태를 유지하는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Mar 2025 11:29:4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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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 영적으로 적합한 사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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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사역으로 부르시면 그 일에 걸맞는 능력을 주신다. “주님의 명령”은 “명령하신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심”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이 날기를 바라시면 그 생물이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영역에 맞도록 날개를 주시듯 말이다. 설교자는 네 가지 면을 적절히 갖춰야 하는데, 이번 호에서는 영적인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이 부분을 첫째로 다루는 이유는 가장 중요해서이다.<br/><br/><br/>1.<br/>대중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치도록 주님께 은사를 받아야 한다. <br/><br/><br/>이 은사는 성도 모두에게 주어지지는 않으며, 세상 교육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에베소서 4:7-16에 그 사실이 아주 선명하게 나온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람들에게는 은사들을 주셨다.”고 하셨느니라...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여』.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은사는 기초에 속하기에 더 이상은 필요치 않다(엡 2:20-22). 다음으로 “복음 전도자”는 주로 죄의 채석장에서 일하는데, 전파된 복음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서 죄인의 혼이 타고난 상태와 지위에서 구원을 받는다(롬 1:16). “목사와 교사”는 이 산 돌들을 경건하게 돌봄으로써 모양을 빚고자 애쓰며, 하나님의 말씀을 능숙하게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세워 주고 가장 거룩한 믿음으로 지어지게 한다. <br/><br/>그리스도인이 모두 “복음 전도자”나 “목사와 교사”의 은사를 받지는 않지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는 모두 임명을 받았다. 그렇기에 성도는 구원하시고 지키시며 만족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하는 특권과 책임을 지닌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셨으며, 요한복음 15:16에서는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선택하여 임명하였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너희 열매가 남아 있어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은 “못 자국 난 손”의 강력한 임명이며 성도 각자의 몫이다.<br/>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은사를 주님께 받았다는 사실이 당사자를 우월한 계급이나 전문가층에 두지도, 동료 성도 위로 승격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칠 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이 특별한 은사를 주님께 하듯 사용할 뿐이다. 그러니 마치 자신이 다른 성도들보다 낫거나 그들과 다르다는 식의 거만한 태도를 취할 이유가 없다. 성도 각자가 은사를 받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영 안에서 은사를 사용할 때 모임 전체가 세워지고 지어진다(고전 12:1-14:19).<br/>오늘날 기독교계가 이른바 “성직자”와 “평신도”로 불경스럽게 구분하는 모습은 신약성경에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 단호히 말하건대 그런 구별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나왔으며, 2세기 초에 시작된 이후로 내내 말로 다 못할 해악을 끼쳐 왔다. <br/>회중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성도는 독특한 은사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승천하신 주님께서 그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은사를 주셨음을 깨달아야 한다. <br/><br/>2.<br/>힘닿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받은 은사를 개발하려고 해야 한다. 이 은사를 가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기필코 발전시켜야 한다.<br/><br/>1) 이 은사는 우선 진심으로 갈망해야 할 대상이다. 주님께서는 『최상의 은사들을 열망하라.』(고전 12:31)라고 권면하시며, 『사랑을 추구하라.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전 14:1)라고도 말씀하신다. <br/><br/>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그치지 않고 “널리 알린다”는 뜻도 포함한다. 즉 듣는 사람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는 주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명령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열망하고』(고전 14:39). 이런 구절들을 통해 설교자는 무엇보다 주님을 대변하고자 하는 강하고 거룩한 바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주님께서 성도에게 심어 주신 이 열망은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경건하게 생활하고, 주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 속에서 방해 없이 커져야 한다. <br/><br/>2) 받은 은사를 일어나게 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br/><br/>『그러므로 내가 너를 일깨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 일어나게 하려 함이라』(딤후 1:6). 차나 커피에 넣는 설탕과 같은 방식으로 이 은사를 대해야 한다. 설탕을 휘젓지 않으면 바닥에 가라앉아서 쓸모없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설탕을 넣지 않았다면 음료를 아무리 저어 봤자 단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설탕과 휘젓기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받지 않은 은사를 일으키려고 애쓰면 우리 말에 경청해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문제가 일어난다. 솔로몬의 기록에 주의하기 바란다. 『거짓 은사를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누구나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잠 25:14). 이런 장황한 설교자는 심하게 긴말만 늘어놓을 뿐 축복을 담은 상쾌한 소나기를 가져오지 못한다! 청중은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거나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은사를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장 잘 판단한다. 성경의 지침은 다음과 같다. 『또 예언하는 사람은...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판단하라』(고전 14:29).<br/>은사는 맡은 과업에 몰두하고, 뜨겁게 기도하며,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하고, 이미 가진 자원을 계속 씀으로써 자극을 받는다. “휘젓기”는 휘젓는 사람 편에서는 노력이 요구되기에 대부분 이 말을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은사라는 문제는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양면을 지닌다. 은사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고, 성실하게 공부하고 신실하게 전념하며 지속해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그 은사를 일어나게 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br/><br/>3) 훈련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은사는 사용해야 향상되며 끊임없이 윤을 내야 더 빛난다. <br/><br/>음악, 미술 등 전문 직업에 숙달하려면 연습을 지속하는 방법밖에 없다. 설교하기와 가르치기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숙련된 피아노 연주자나 재능을 보이는 설교자를 쉽게 부러워하지만, 얼마큼의 노력을 집중해서 그런 결과물을 내는지는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영감의 90퍼센트는 땀이다.”라는 명언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각 사람이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섬기라. 만일 누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처럼 말하고, 또 누가 섬기려거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 이는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분께 찬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br/><br/>곧 살펴보겠지만 이 은사는 청지기직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은사가 맡겨진 유일한 이유는 주인을 대신해 최고로 이익을 내도록 투자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두 가지 측면으로 이 진리를 설명하셨는데, 먼저 므나의 비유에서는 종 각각이 같은 양을 받은 다음 주인에게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라는 명령을 받는다(눅 19:12-27). 여기서는 종 각자에게 동일한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각각 특정한 은사를 받았기에 일생 동안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주님께 직접 책임을 져야 한다. 다음으로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종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른 양이 주어진다(마 25:14-30). 이번에는 책임이 아니라 능력이 강조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모든 종은 능력이 아니라 책임에서 동등하다. 누군가가 책임(responsibility)을 “하나님의 능력(ability)에 인간이 반응(response)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참 옳은 말이다. 정리하자면, 므나는 복음이라 할 수 있고 성도 각자에게 맡겨졌기에 주인을 위해 혼들을 이겨오고자 애써야 한다. 달란트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차등을 둬서 은사를 주심을 보여 준다.<br/><br/>4) 방치하면 잃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고한다. <br/><br/>『네 안에 있는 은사를 소홀이 여기지 말라』(딤전 4:14). 그리고 다음처럼도 썼다. 『“네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주의하여 그것을 수행하라.”고 아킵포에게 말하라』(골 4:17). 애석하게도 은사를 소홀히 여기다 주님께 받은 사역을 완수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의 일을 마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도우소서! 게으른 종이 므나를 쌌던 손수건은 땀을 닦는 수건으로, 가까이 뒀다가 필요할 때 쓰려고 당시 종들이 허리에 두르던 물건이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 종은 실제로 이렇게 주장한다. 『주여, 보소서. 주께서 주신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손수건에 싸서 간직하였나이다. 당신은 엄격한 분이시기에 내가 당신을 두려워하였으니, 당신은 두지 않았던 것에서 취하시고 또 심지 않았던 것에서 거두시는 분이시니이다』(눅 19:20,21).<br/><br/>“퇴화의 법칙”이라 불리는 자연에 존재하는 원칙이 있다. 이 법칙은 몸의 한 부분이 고의로 기능을 중단하면 정상적인 수행 능력을 잃는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리를 쓰지 않으면 걷지 못하게 되는데, 다리를 조절하는 근육이 쇠약해져서이다. 인도에서 소위 “성인”으로 불리는 사람 중에 팔을 너무 오래 들고 지내 온 탓에 더 이상 팔을 내리지 못하는 이도 있다. 어떤 기록에 나오는 한 여자는 실연을 당하자 50년 묵언 서약을 했고, 그 기간이 지난 뒤에 말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긴 시간 사용하지 않자 성대가 위축돼 버린 것이다.<br/><br/>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셔서 설교의 은사를 주셨는데 그것을 소홀히 하거나 갈고 닦지 않으면 능력을 잃어 설교할 수 없게 된다.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는 엄중한 사실을 마음에 새기길 바란다. 다음의 시가 그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br/><br/>“한참 전에는 내 재능이 눈부시게 밝았다. <br/>‘써라.’ 주신 분께서 말씀하셨다. ‘더 빛나게 될 것이다.’<br/>사용했더니 얼마나 반짝이던지! 그러던 어느 날,<br/>그저 순간의 충동으로 그 은사를 치워 버렸다. <br/>수년을 흘려보내면서도 만지지 않았다. <br/>그러다 오늘 그것을 찾아본다. 하지만 가고 없다!”<br/><br/>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계속 발전시키는 데 드는 노력이 싫다고 두루 쓰기를 그만두면 좀과 녹이 연합해서 치명적으로 해를 입힐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소리 없이 활동하지만, 숨겨 두어서 쓰이지 않는 보물에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오는가!(마 6:19,20) 우리 가운데 말 그대로 그리스도인 수천 명이 존경받는 설교자요 성경 교사가 됐을지 모른다. 은사를 등한시하지 않고 마땅한 노력과 헌신을 했더라면 말이다. 그들은 성공한 듯 비칠 수도 있으나, 슬프게도 그들의 인생 위에는 분명 “실패”라고 쓰일 것이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반드시 서야 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의 섬김 전부가 정확하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가 평가되며 그에 따라 주님께 상이나 손해를 받을 것이다(고전 3:10-17). 우리 모두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을 듣기를!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라』(마 25:21).<br/><br/><br/>3.<br/>영적인 분위기에서 이 은사를 육성해야 한다. <br/><br/><br/>영적 은사를 사용하려면 영적 능력이 필요하다. 즉 설교자 자신이 영적이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존경받은 헨리 그로브스가 초기 제자들에 대해 무게를 두고 했던 말을 인용하는 편이 좋겠다. “다름 아닌 영적인 일을 해야 했기에 주님께서 그 일을 할 제자들을 영적으로 만들어 주셨다. 바로 믿음을 심어야 했기에 선교사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만드셨다. 금과 은이라는 우상에게서 나라들을 구해야 했기에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다. 지혜라는 우상에게서 사람들을 구해야 했기에 제자들이 어리석어 보이게 하셨다. 힘과 권력이라는 우상에게서 세상을 구해야 했기에 제자들을 약하게 하셨다. 명성이라는 우상에게서 구하고자 제자들을 멸시받게 하셨다. 다시 말하면 보내서 전파하게 할 교리의 모든 면에서 제자들을 본보기로 만드신 것이다. 교회에는 참으로 이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 서 있고자, 또 실행하고자 하는 누구라도 이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하든 말이다. 가르친 진리대로 살아야 하고, 또한 뿌리내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리들에 대해 귀감이 되어야 한다.”<br/><br/><br/>설교자가 이와 같이 영적으로 강건한 기질을 유지하려면 영적인 위생 법칙에 따라야 한다. 규칙적으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야 한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냄으로써 천상의 공기로 깊이 숨을 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기회에 즉시 순종으로 응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의 빵을 자기 인격의 피와 뼈와 근육과 신경으로 바꾸고자 애써야 한다. 이것이 설교자가 주님의 포도원에서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영적 환경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03 Feb 2025 17:38:5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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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 기도에 능숙한 사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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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설교자는 기도해야 한다. 누군가가 잘 말했듯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위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사람들을 위해 말을 많이 해야 한다.” 기도가 부재한 사역은 능력도, 유익도 없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은 기도의 무릎을 늘 동반해야 한다. 많은 기도는 많은 능력과 같고, 적은 기도는 적은 능력과 같으며, 다시 말하건대 기도가 없으면 능력도 없다. 하나님께서 성도 각자에게 원하는 대로 쓰도록 어떤 힘을 주셨는데, 그 힘은 “세상을 움직이는 손을 움직여서 구원이 내려오게 한다.” 이 굉장한 힘을 지속해서 사용하고 가치를 알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오직 주를 앙망하는 자는 자기의 힘을 새롭게 하리니 독수리처럼 날개로 치솟을 것이요, 그들이 달려도 피곤치 않으며 걸어도 곤비치 아니하리라』(사 40:31).<br/><br/>알렉산더 화이트가 기도를 훌륭하게 뜻매김했으니 기억해 뒀으면 한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유롭게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다. 반대로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도록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응답을 믿음으로 구하게 한다.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그의 안에서 가지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가 우리를 들으시는 것이라.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가 들으시는 줄을 안다면, 우리가 그에게 구한 요청들을 받은 줄도 아느니라』(요일 5:14,15).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요청을 승인하겠노라고 약속하시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드려야 한다. <br/><br/>우리는 여기서 기도와 관련된 본보기와 권면, 이 둘을 다루고자 한다. <br/><br/>1. 기도에 대한 본<br/><br/>한 번 더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완벽한 종으로 사신 생을 통해 기도의 위치와 가치를 배워 보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자로서 성령님의 완전한 통제 아래 아버지의 뜻에 자원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흠 없이 순종하셨음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즉 주님께서 몸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로서 지상에서 사셨듯이, 그리스도인도 같은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 아버지께 의지하고 성령님께 인도와 권한을 받으며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다음이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음을 증거한다. <br/><br/>1) 주님께서는 직접 간증하셨다. <br/>『아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본 것은 할 수 있나니...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라. 또 나의 심판이 의로운 것은 내가 나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때문이라』(요 5:19,30).<br/>2)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삶을 사셨다. <br/>즉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언하시면서, 끈질기게 기도한 여인의 비유를 들어 기도의 가치를 분명히 보여 주셨다(눅 18:1-8). <br/>그리스도를 특히 인자로서 제시하는 누가복음에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이 많이 나온다. 먼저 침례 받으실 때(눅 3:21) 기도하셨다. 주님께서는 기도로 하나님과만 함께하시고자 큰 무리를 떠나셨다(눅 5:16). 또 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온 밤을 새우』신 후에 제자들을 택하셨다(눅 6:12). 베드로가 위대한 고백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계셨으며(눅 9:18), 변형산에서는 『주께서 기도하실 때에, 그의 용모가 변하』였다(눅 9:29). 주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그 본에 마음이 움직인 한 제자가 『주여...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소서.』(눅 11:1)라고 요청했고, 그의 간청에 응하셔서 통상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그러나 실제로는 “제자들의 기도”인 아름다운 기도문을 알려 주셨다(눅 11:1-4).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으며(눅 22:32), 겟세마네에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눅 22:42)라고 기도하셨다. 원수들이 주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눅 23:34). “다 이루었다!”라고 승리를 외치신 다음에는, 『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기도하셨다.<br/><br/>요한복음에도 주님께서 기도하는 분위기 가운데 생을 보내셨음이 나타난다. 지상 사역을 마치실 무렵인 14장에서 16장까지에서 주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더욱 많이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7장에는 곧 떠나 헤어지게 될 제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는 놀라운 기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성도라면 그 내용을 읽고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장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제자들을 지켜주시기를(9-12절), 제자들이 성별하기를(13-19절), 하나가 되기를(20,21절), 영광을 보게 해 주시기를(22-26절) 기도하셨다. 이런 모든 모습으로 보건대,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삶에서 기도에 역점을 두셨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분의 발자취를 따른다고 고백하는(벧전 2:21)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겠는가?<br/><br/>2. 기도에 대한 권면<br/><br/>하나님의 말씀은 기도의 필요와 굉장한 가치를 일관되게 증거하면서 성도들 모두에게 강력하게 권고하고 권면하신다(마 6:5-34). 그러므로 성도는 늘 기도해야 한다. <br/>1) 삶에서 구체적으로<br/>기도드리기에 너무 사소한 대상이란 없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한 줄 아시고(마 6:32),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빌 4:19).<br/>『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기도가 상황을 바꾼다.”라는 옛말이 있는데, 사실은 그 이상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을 바꾼다!”<br/><br/>2) 주님을 섬기는 모든 면에서 <br/>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들이 적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의 주께 기도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라고 하라』(마 9:37,38). 이렇게 섬김 하나하나가 기도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또 자신의 섬김을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기에 다윗처럼 간구드려야 함이 마땅하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 31:3). 지혜를 위해 기도드리면 진지하게 믿음으로 구하는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기꺼이 응답하신다(약 1:5-7). 주님을 섬기고자 할 때 용기, 강인함, 능력을 주시도록 아뢰되 헛되이 구하지 말아야 한다(행 4:23-31, 사 40:28-31). 설교자를 찾는 어느 회중에게 “설교자가 얼마나 컸으면 하세요?”라고 묻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하늘에 이를 만큼 컸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br/>3) 기도에서 두드러졌던 바울 <br/>크리소스톰은 바울을 “3큐빗 키로 하늘에 닿았다.”라고 표현했다. 체구는 작았으나 영적으로는 거인이었으며, 영적으로 그렇게 자라기까지 기도가 굉장한 역할을 한 것이다. 바울 서신에 기록된 몇 가지 기도를 읽어 보기만 해도 그가 기도에 둔 가치를 알게 된다(엡 1:16-23; 3:14-19, 빌 1:4, 골 1:9-12, 살전 1:2).<br/>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은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롬 15:30, 고후 1:11, 빌 1:19, 살전 5:25, 골 4:3). 바울이 『항상 너희를 위하여 열렬히 기도』한다고 말한 에파프라(골 4:12)와 같은 성도가 오늘날에 더없이 필요하다.<br/>기도의 중요성을 숙고하는 시점에서 테니슨의 시가 성도 각자의 마음에 사무치기를 바란다. “이 세상은 꿈꾸기보다 기도해서 더 많은 일이 이뤄진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쉼 없이 솟구치는 분수처럼 밤낮으로 소리를 높여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가! 머리만 가졌을 뿐 깨닫지 못하는, 생명만 살찌우는 양과 염소보다 사람이 무엇이 더 낫단 말인가? 하나님을 알면서도 자신과 또 친구라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의 손을 들어 올리지 않는다면!”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30 Sep 2024 16:56: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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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 성경에 능숙한 사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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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1. 설교자는 성경을 읽어야 한다. <br/><br/>설교자는 자기가 설교하는 성경을 잘 알아 그에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이는 수학을 가르치려면 당연히 수학을 잘 알아야 함과 같다. 당신은 음악을 모르는 음악 교사, 영어를 모르는 영어 교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경을 설교하라고 부름받은 사람은 성경을 공부하라고도 부름받은 사람이다. 한쪽이 없이는 다른 쪽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전자를 위해서 후자가 필요한 것이다. 설교자는 다윗처럼 『오, 내가 얼마나 주의 법을 사랑하는지요!』(시 119:97)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br/><br/>성경 전체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1분에 250자를 읽어 낸다면, 54시간 만에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다. 아침에 구약성경 3장을, 저녁에 신약성경 2장을 읽는다면, 1년에 구약은 1번, 신약은 2번을 읽게 된다. 책 중의 책에서 실제적인 지식을 얻는 데 치르는 값치고는 전혀 과하지 않다. 무엇보다 설교자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시간을 내고 시간을 들여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밭을 일구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자기 밭은 버려두기 쉽고, 다른 이들을 먹이는 일에 열중하다 보니 스스로는 영양 결핍에 이르고 만다. <br/><br/>성경 읽기에는 성경을 살펴보는 사람과 성경이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이와 연관해서 미물인 젖소가 가치 있는 교훈을 준다. 젖소는 누군가에게 우유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푸르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다. 즉 제 식욕을 만족시키고자 풀을 먹는 것이다. 원하는 만큼 먹고 나면 흡족해하며 누워서 먹었던 풀을 게워내어 되새김질한다. 그 결과로 나오는 기름진 우유와 크림이 젖소에게 있어서는 순전히 부산물이다. 자신의 욕구가 넉넉하게 채워지자 자연스레 따라온 결과일 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혼의 원기를 북돋우고 영적 식욕을 채우고자 성경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묵상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순수한 말씀의 젖』(벧전 2:2)을 풍성하게 줄 수 있게 된다. <br/><br/>2. 설교자는 성경을 기억해서 인용할 수 있어야 한다. <br/><br/>성경을 기억하려면 구절과 단락을 외워야 한다. 그러면 성경이 설교자의 최고 권위가 되기에 청중을 마주했을 때 크게 도움을 받게 된다. 히브리서 1:1-3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전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를 통하여 그분께서 세상들을 지으셨느니라.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히 1:1-3). 설교자가 정확하고 인상 깊게 성경을 인용하면 그것이 청중의 마음에 새겨져서 메시지에 실린 하나님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게 한다. 성경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질 좋고 도톰한 종이를 명함 크기로 잘라서 한쪽에는 장절을, 반대쪽에는 해당 구절 전체를 써서 외우기를 반복하는 것인데, 그러면 빈틈없이 외울 수가 있다. 하루에 카드 하나씩을 더해 가고, 가능한 한 자주 복습해야 한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면 카드 365개가 쌓일 테고, 그 기억은 값을 따질 수 없는 보고가 된다. 전차나 기차로 이동할 경우 카드 몇 장을 가지고 타서 장절이든 구절이든 정확하게 외울 때까지 계속 되풀이해 보라. 카드를 사용하면 할수록 유용한 암기 기법에 더욱 능숙해질 것이다.<br/><br/>3. 설교자는 성경 공부에 전력해야 한다. <br/><br/>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쉬운 길이란 없다. 끈질기게 힘들여 공부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누군가가 공부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주제를 완벽하게 익히기까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힘을 쏟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줄곧 앉아 있으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진지한 투지가 필요하다. 공부에 관해서 읽거나 듣거나 말하는 것은 공부를 직접 “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게다가 “지속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지만 공부의 주제를 숙달하는 데는 이 “지속하기”의 방법만 한 것이 없다.<br/>어느 아일랜드인 아버지가 미국행 배에 오르는 아들을 배웅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아들아, 세 가지 뼈를 잘 활용하도록 하거라.” 그때 옆 사람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음 세 가지 뼈를 제대로 사용하느냐에 성공이 달려 있답니다. 첫째는 위시본(wishbone, 가금류에 있는 V자형 뼈. 이것의 양 끝을 두 사람이 잡고 서로 잡아당겨 긴 쪽을 갖게 된 사람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에요. 위시본을 쓰면 성공을 계속 열망하게 되죠. 둘째는 아래턱뼈인데, 이 뼈를 사용하면 현인들에게 성공하는 최상의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등뼈입니다. 이 등뼈를 동원하면 바라던 성공을 얻을 때까지 중단 없이 분투할 수 있답니다.” <br/>누군가가 천재성을 가리켜 “노고를 감내하는 무한한 능력”이라고 적절하게 정의했다. 공부는 지식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고, 설교자라면 그 값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데 결코 유용하게 되지 못한다. 설교자는 성경을 조언자로 삼아야 하고, 성경을 성경으로, 즉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부지런히 비교함으로써 책 중의 책인 성경 전반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고전 2:13).<br/><br/>설교자는 성경을 다음과 같이 공부해야 한다. <br/><br/><br/>1) 부지런히 : 이것은 대담한 조치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거룩한 투지가 요구된다. 아침에 30분 일찍 일어나야 할 수도 있지만, 그런 투자가 좋은 결과를 낸다. <br/>2) 묵상하며 : 성경이 설교자 자신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바를 받아들이고 다른 이를 돌보기 전에 본인의 영적 필요부터 채워야 한다. <br/>3) 분별하며 : 설교자는 차이를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희가 가장 좋은 것들을 분별하며 또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수하고 흠 없게 되기를 바라며』(빌 1:10). 또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면서(딤후 2:15) 공부해야 한다. 어떤 주제에 관해 올바른 결론을 내리려면 관련된 성경 모두를 찾아봐야 한다. 그렇기에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것과 다른 구절에서 단언하는 바를 꼭 비교해야 한다. <br/>4) 교리에 집중하며 : 설교자는 위대한 교리들을 이해해야 한다. 건전한 교리가 더해진 건전한 말씀이 건전한 성도를 만들고, 건전한 설교자의 건전한 설교로 청중이 믿음 안에서 건전해진다. 디모데전서 1:10과 디모데후서 1:13; 4:3, 디도서 1:9,13, 골로새서 2:7을 읽어 보기 바란다.<br/>5) 세대주의에 따라 : 설교자는 하나님의 현재 계획과 관련해서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의도하신 뜻에 자신이 어긋나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다. <br/>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바르게 이해했다고 확신해도 좋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대가를 치러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 맞다. 그러나 그것은 원대한 일이며, 최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한 일이다. 이와 연관해서 다음과 같은 다윗의 고백을 숙고해 보라. 『내가 값을 치르지 않고는 주 나의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 24:24).<br/>어떤 부인이 노스클리프 경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아침 눈을 떠 보니 새커리 자신이 유명해져 있더라.’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그러자 노스클리프 경이 대답했다. “그 아침이 밝던 날, 새커리는 하루 8시간씩 15년간 글을 써 오고 있었답니다. 일어나 보니 자기가 유명인이 되어 있더라고 말한 장본인은, 사실 잠을 자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30 Aug 2024 15:43:5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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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가 사랑해야 할 대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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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1. 설교자는 주 예수를 사랑해야 한다. <br/><br/>1)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섬겨야 한다. <br/><br/>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느니라. 이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판단하기 때문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4,15). 설교하는 일에 책임감이 필요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전하는 설교만이 가치가 있으므로 그리스도께 마음을 다 드려야 한다. <br/><br/>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온다. 에베소서 3:19은 그 사랑의 정도가 계속 커지며 그만큼의 분량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그것은 최고의 연구 주제가 되어야 마땅하다. 고린도후서 5:14,15은 그 사랑이 주님을 섬기는 필수 동기로 묘사된다. 로마서 8:35-39은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어떤 힘으로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인생의 우여곡절 가운데 성도를 지탱하는 힘이 바로 그 사랑인 것이다. <br/><br/>2)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셨다. <br/><br/>하나님의 아들께서 선포하셨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요 14:31). 주님께서는 몸을 입으시기 훨씬 전에 다윗의 입을 통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희생제와 예물을 바라지 않으시고... 그때 내가 말씀드리기를 “보소서, 내가 왔나이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책에 있나이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정녕, 주의 법이 나의 마음속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나이다』(시 40:6-8, cf. 히 10:5-10). <br/><br/>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를 사랑하셨기에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기꺼이 복종하셔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 그 사랑이 겟세마네까지 이끌자 거기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눅 22:42). 또 그 사랑이 갑바다로 인도했을 때는 치는 자들에게 등을, 머리카락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셨다(사 50:6). 이어서 골고다로 끌려가시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주님 자신께 지우시도록 내어드렸다(사 53:6). 그리고 우리 죄에 쏟아지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홀로 십자가에서 전부 받으셨고, 영원한 구속을 확정하시고자 죽으셨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본을 남겨 놓으셨으며, 다른 모든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강권하는 사랑에 있어서도 최고의 귀감이 되신다(벧전 2:21).<br/><br/>3)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br/><br/>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명령하실 때도 강조되었다.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기이하게 잡힌 물고기 더미 곁에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에 주목해 보라. 『주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고백에 따라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라고 대답하셨고, 그 과정이 두 번 더 반복되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사랑함을 섬김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시키시려는 듯이 말이다(요 21:1-19).<br/><br/>당시의 교훈을 마음에 깊이 새긴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너희가 그[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며, 지금도 그를 보지 못하나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이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나니』(벧전 1:8). 요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사도 바울은 그 복된 사실로 인해 기뻐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졌기 때문이라』(롬 5:5).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는 일에는 그분을 사랑함이 더없이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br/><br/>주님 더욱 사랑하기를, 주님 더욱 사랑하기를 <br/>무릎 꿇고 드리는 기도를 들으소서. <br/>마음 다해 간구하오니 <br/>주님 더욱 사랑하기를, 주님 더욱 사랑하기를! <br/><br/>2. 설교자는 혼을 사랑해야 한다. <br/><br/>1) 청중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설교하기만 즐길 수 있다. <br/><br/>변호사는 의뢰인을 사랑하지 않고도 자기 능력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다. 의사는 환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승승장구할 수 있다. 사업가는 고객 사랑 없이도 번영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설교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듣는, 구원받지 못한 혼을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이 될 수 없다. <br/>달변으로 좌중을 흔들어 놓는 일은 흥분되는 경험이겠으나, 거기에 혼을 사랑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쉽게 덫이 된다. 한 설교자가 보나르 박사에게 “저는 설교하기를 정말 좋아합니다.”라고 하자 박사가 되물었다. “설교를 듣는 청중은요?” 설교하는 일이 설교자에게 주는 일종의 명성은 육신에게 매력적이다. 이 때문에 세상의 관심과 이목을 사랑하고 칭찬 듣기와 인기 끌기를 좋아하던 수많은 설교자들이 망가졌다. 교만으로 높아져서 마귀의 정죄함에 빠진 것이다(딤전 3:6). 한 잡지에서 고른 다음의 이야기는 설교자 모두가 취약하고 감지하기 어려운 유혹의 위협을 잘 보여 준다. 제목은 “어느 일꾼이 꾼 꿈”이다.<br/><br/>「나는 몹시 힘든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그간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찾았고 또 그분을 만났다. 나는 일을 하며 기뻤다. 형제들은 한마음이었고 내 설교와 권면으로 청중이 분명히 변하고 있었으며 교회는 붐볐다. 그날도 일로 녹초가 된 채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가 과로로 지쳐서 즉시 반 건망증 비슷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갑자기 한 낯선 이가 노크도 내 허락도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계량 도구, 화학 물질, 기구를 들고 있던 터라 그의 모습은 이상했다.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며 “열정은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내 건강에 관해 물으리라고 예상했는데, 그것을 묻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 열정에는 꽤 흡족했기 때문이다. 결과 값을 알고 나면 그도 미소를 지으리라 의심치 않았다. <br/>곧 물리량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한 나는 가슴에 손을 얹어 열정을 꺼내 그 낯선 이에게 보이며 검사하게 했다. 건네받은 그는 저울에 올려놓고 꼼꼼하게 무게를 쟀다. “100파운드군!”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만족에 겨워서 흘러나오려는 감탄사를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그가 무게를 기록하며 보인 진지한 표정에서 최종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며 조사를 계속하고자 함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는 덩어리를 원자 수준으로 부숴서 도가니에 넣은 다음 도가니를 불에 넣었다. 덩어리가 녹자 꺼내서 식혔더니 여러 층을 이룬 상태로 굳어 있었다. 망치로 층을 분리한 뒤 각각을 검사하고 무게도 재면서 과정 전부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검사가 끝나자 그는 슬픔과 동정이 섞인 표정으로 내게 결과지를 보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해 주시길!”이라는 말만 남기고 방을 떠났다. 결과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br/><br/>영광의 면류관 후보인 주니어스의 열정 분석표 <br/>무게 : 100파운드<br/><br/>분석 결과 아래와 같이 판명됨.<br/>편견 ‧ ‧ ‧ ‧ ‧ ‧ ‧ ‧ ‧ ‧ ‧ ‧ ‧ ‧ ‧ ‧ 10퍼센트<br/>개인적 야망 ‧ ‧ ‧ ‧ ‧ ‧ ‧ ‧ ‧ ‧ ‧ ‧ 23퍼센트 나무 <br/>칭찬을 사랑함 ‧ ‧ ‧ ‧ ‧ ‧ ‧ ‧ ‧ ‧ ‧ 19퍼센트 짚<br/>교단을 자부함 ‧ ‧ ‧ ‧ ‧ ‧ ‧ ‧ ‧ ‧ ‧ 15퍼센트 그루터기 <br/>은사를 자부함 ‧ ‧ ‧ ‧ ‧ ‧ ‧ ‧ ‧ ‧ ‧ 14퍼센트<br/>권위를 사랑함 ‧ ‧ ‧ ‧ ‧ ‧ ‧ ‧ ‧ ‧ ‧ 12퍼센트<br/>하나님을 향한 사랑 ‧ ‧ ‧ ‧ ‧ ‧ ‧ ‧ ‧ 4퍼센트 순수한 <br/>사람을 향한 사랑 ‧ ‧ ‧ ‧ ‧ ‧ ‧ ‧ ‧ ‧ 3퍼센트 열정<br/>-----------------------------------------------------------<br/>100퍼센트 <br/>낯선 이가 보인 특이한 태도에, 또 그가 떠나면서 지은 낯빛과 남긴 말에 마음이 괴로웠다. 무엇보다 결과지의 수치를 보자마자 마음이 납덩이처럼 가라앉고 말았다. 나는 속으로 기록이 정확한지에 의문을 내놓느라 바빴다. 그러다 복도에 잠시 멈춰 있던 그의 한숨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정직한 자세로 바꿨다. 나는 “주님 저를 구해 주세요!”라고 외친 뒤, 손에 든 결과지를 보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 종이가 거울로 변하더니 내 마음이 그곳에 반사되었다. 기록대로였다! 나는 실체를 보았고, 느꼈고, 자백했고, 개탄했다. 눈물을 쏟으며 나 자신에게서 나를 구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러다 비통에 잠긴 큰 울음소리에 꿈에서 깨어났다.<br/><br/>전에는 지옥에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했는데, 이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더 열렬하게, 또 참담한 심정으로 나 스스로에게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드렸다. 판단하고, 자백하고, 수치스러운 일에서 돌이키자 비로소 쉼이 찾아왔고 주님께서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를 누렸다. 순례자의 고된 삶이 끝나면 하늘에 계신 화학자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이 계시를 보여 주심에 찬양을 돌리리라.」<br/>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 열정이 분석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면 판단받지 않으리라』(고전 11:31, cf. 고전 3:10-15, 롬 14:10). 성경의 경고는 이렇다. 『각 사람은 자신의 일을 살피라』(갈 6:4).<br/><br/>2) 그리스도께서 혼을 향해 품으신 열정을 숙고하라.<br/><br/>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인생은 혼을 사랑함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보여 준다. 주님의 사역을 간단하게 기록한 사복음서 전반에서 주님의 동정이 자애로우심으로, 세심하게 배려하심으로, 다정하심으로, 사랑하심으로 명확하게 나타난다. 여러 차례 “가엾게 여기시다”가 나오는데 모두 표시해 두면 유익하다. 주님께서는 직접 찾아서 구원하고자 하셨던 잃어버린 죄인들을 향해서 사랑의 마음을 보이셨다(눅 19:10).<br/><br/>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있던 눈먼 자들(마 20:34)과, 불결함 속에 있던 문둥병자들(막 1:40), 병약함 속에 있던 자들(마 14:14), 형편이 어려웠던 배고픈 자들(마 15:32), 고독함 속에 있던 외로운 자들(막 6:34), 슬픔 속에 있던 유가족들(눅 7:13)을 동정하셨다. 동정은 “다른 사람의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치르는 희생으로 늘 측정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 하라』(엡 5:25). 혼을 정말로 사랑하는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죄인들을 이겨오는 일에 자신을 아낌없이 전폭적으로 드린다. <br/><br/>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의 탁월함을 주제로 한 바울의 시가 나오며 거기서 알게 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즉 사랑은 말하는 것 이상이다(1절). 가진 것 이상이다(2절). 줄 수 있는 것 이상이다(3절). 사랑이 없이는 다른 은사 전부가 쓸모없는 상태보다 더 못하게 된다. 정말이지 영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변질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을 부드럽고 달콤하며 느글느글한 감상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꾸짖고 징계하고 경고한다.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이 서신을 그렇게 쓰도록 이끌었다. 신실하게 그들의 결점을 드러내고 모순된 부분을 엄하게 힐책하다 보니 다음처럼 말할 정도였다. 『내가 너희를 더 많이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지만』(고후 12:15). <br/><br/>3) 혼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br/><br/>우리는 항상 사람을 혼을 가진 몸이 아니라 몸을 가진 혼으로 봐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막 8:36) 그 무엇보다 이 말씀을 막대한 혼의 가치와 함께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존재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에게서 혼을 빼면 조금도 대단하지 않다.” 대속을 이루시고자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려 지불하신 값으로 혼의 가치를 매겨야 한다. 은행 잔고의 규모, 세상에서 얻은 지위, 혈연, 교육 수준, 차림새, 피부색, 인종, 언어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대상으로 사람의 가치를 바라봐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눈멀고 완고하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며 이렇게 외쳤다. 『육신에 따른 내 형제들,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랐겠노라』(롬 9:3). 하나님께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사도 바울을 그토록 강력하게 들어쓰심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악한 자기 민족을 위해 중보하면서 대단한 경지에 올라섰다. 『지금이라도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거든 간구하오니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출 32:32). 이 두 사례면 사역다운 사역을 위해 혼을 사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마음으로 깨닫기에 충분하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Jun 2024 10:59:2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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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천국의 신비들 (마태복음 13:10-1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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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성경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거나 설교하는 위치에 있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성경적 지식이 듣고 보는 사람들을 미혹시키기 때문입니다. “미혹”이란 진리를 비진리라고 가르치고, 반대로 비진리를 진리라고 가르쳐 마치 전염병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병든 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손을 깨끗이 씻고, 목을 소금물로 잘 헹구어 내고, 깨끗한 몸과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가능한 한 삼가야 합니다. 거짓 교회에 가면 틀림없이 감염됩니다. 1918년부터 1년간 스페인 독감으로 1억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전사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콜레라로 매년 42만 명이 사망하고, 말라리아로 2백 70만 명이 사망했으며, 서혜임파선종으로 2억 5천만 명이 사망했고, 인플루엔자로 425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br/><br/>&lt;킹제임스성경&gt; 외에 다른 성경들을 가지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교회들은 거의 교단 또는 교파 혹은 이단 종파 교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 그들 종파들과 교단들의 교리로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숫자를 자랑합니다. 구령하는 숫자가 아니라, 기독교인 숫자들입니다. 구원받은 간증이 없는데도 그들의 교회들이 그들을 신뢰합니다. 로마카톨릭은 마리아란 우상을 섬기면서도 카톨릭 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역대 교황들은 자신들도 구원받지 못한 채 이런 헛소리로 미혹함으로써 A.D. 350년 이래 각종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놀다가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오늘날도 복음 없는 교회들은 카톨릭처럼, 그들 교회들에 속하면 구원이 보장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강령(전적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된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을 신봉하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갖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시고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나니,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하며, 회심하지도 못하게 되어 나로 그들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요 12:40).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했으나 거절당하자 이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행 28:26,27). 여기 마태복음 13:14,15에서도 세 번이나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 이사야 6:9,10에서 다루신 말씀입니다.<br/><br/>천국의 신비들이란 무엇입니까?<br/><br/>I. 이 신비를 깨달은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br/><br/>교회 시대는 구약 선지자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벧전 1:10,11). 구약 선지자들은 구원이라는 말 자체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비를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마 13:11,16,17). 창세기 4:4에서는 아벨의 제사의 교훈이 있고, 스카랴 12:8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볼 수 있고, 히브리서 10:18에서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성경을 알지 못합니다. 신약을 믿지 않기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예 신구약을 치워 버리고 예루살렘 탈무드를 믿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메시아를 처형했을 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1차 계획은 끝났습니다. 그들을 통해 이 땅에 천국을 실현시키려 했던 그 계획은 끝나 버렸습니다. 스테판, 베드로, 바울이 가졌던 연민은 인간적인 발상에서 시도되었던 것일 뿐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br/><br/>현재의 교회 시대는 예수님의 승천에서 시작하여 대환란이 끝날 때까지인데, 이 교회 시대 기간에 천국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 신비를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단 교회들, 은사주의자들, 유병언 같은 자들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이상한 것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습니까? 미혹으로 끝났습니까? 돈을 욹어내어 큰 교회 건물을 짓고 떼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예수님, 성령님과 복음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어떤 자는 감옥에 갔고 재판에 계류되어 있고, 죽었습니다.<br/><br/>어떤 사람이 천국의 신비를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착실히 공부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교회를 다녔어도 위로부터 조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받은 것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lt;영적 삶의 새로운 시작&gt;을 참고하십시오. 게으르고, 육신적이며, 하나님의 책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현재 영적 노숙자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입니다.<br/><br/>천국의 신비들이란 무엇입니까?<br/><br/>II. 잘못된 교회들의 실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br/><br/>먼저 독보리에 대해 살펴봅시다(마 13:36-43). 이 세상은 곡식과 독보리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독보리 때문에 악하지만, 이런 현상은 세상 끝까지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니코데모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코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인간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나야만 합니다. 거듭나지 않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독보리이지 알곡이 아닙니다. 수십 년 교회 다니고, 돈 주고 제직 사고, 한 번도 새벽기도에 안 빠졌고, 돈 많이 냈던 일들은 모두 쓸데없는 짓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운명도 지키지 못하는 얼간이들입니다. 세상 끝이란 환란 끝을 말하는데, 그때 천년왕국이 시작됩니다. 환란 끝에 천사들은 두 가지 추수를 하게 되는데, 알곡은 모아서 창고로 들이고, 독보리는 묶어서 불로 태웁니다. 불에 타는 그들이 누구입니까? 구원받지 않고 아무 교회나 다니는 자들이요, 그들은 거의 무천년, 후천년 종말론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들 교회들의 확장을 왕국의 확장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컨테이너 박스에도 OO교단 OO교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교회를 세워 숫자가 하나 늘어나면 돈을 줍니다.<br/><br/>겨자씨는 어떻습니까?(마 13:31,32) 로마카톨릭은 이 구절을 보고 그들의 교회가 확장되어 전 세계에 미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개신교회들은 개개인의 믿음이 자라서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래야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과연 그들이 복음을 전하며 구령합니까?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갖다 붙이지만, 이 비유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겨자씨가 자라면 먼저 푸성귀가 되어야 정상인데, 이 비유에서는 푸성귀가 아니라 나무로 성장해 버린 것입니다. 비정상적으로 자란 이 나무에는 새들이 깃들었습니다. 이 말의 진의는 기독교계에 순수한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마귀의 세력들도 스며들어와 공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새들은 악령들을 뜻합니다. 마귀의 세력들이 교권을 잡고, 비성경적 교리들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WCC, 교회일치운동, 종교통합운동 등을 벌이면서 정치권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마귀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대신하고 있습니다(롬 16:17,18, 딤전 6:3-5). 그들은 성경 믿기를 싫어합니다. 그들의 비성경적 무지를 지적한 우리 교회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br/><br/>누룩은 어떻습니까?(마 13:33) 후천년 종말론자들은 여자는 교회이고, 누룩은 복음이며, 가루는 세상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온 세상이 회심할 때까지 세상에 복음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로마카톨릭의 교리이고, 카톨릭에 동조한 개신교회의 교리입니다. 그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니라고 발뺌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들입니까? 그것은 카톨릭 교리입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거짓 교리(마 16:6-12)이며 죄(고전 5:6-8)입니다. 교회는 아내요(엡 5:25-32), 신부이며(계 21:9), 한 순결한 처녀(고후 11:2)로 불립니다. 여자는 요한계시록 17:1-6에 나옵니다. 여자는 마리아 교회로서 어머니 교회라 불립니다. 가루는 곡식으로 만들어집니다. 곡식은 왕국의 자녀들의 모습입니다(마 13:38). 또 고린도전서 5:6-8에 나오는 반죽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속에 스며든 세 개의 교회들(로마카톨릭, 그리스정교회, 친카톨릭 개신교회들)은 거짓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성경을 배제하고 교단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누룩을 집어넣는 마귀의 하수인들입니다.<br/><br/>천국의 신비들이란 무엇입니까?<br/><br/>III. 바른 교회상을 보여 줍니다(44-47절).<br/><br/>숨겨진 보물(13:44)<br/><br/>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그분의 피값으로 사셨기에 결국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됩니다(계 11:15).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밭은 세상이요, 보물은 이스라엘입니다(출 19:5, 시 135:4). 그런데 이 보물이 그들의 메시아를 거부한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버려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얼굴을 돌리시자(신 31:17), 그들은 빛바랜 보석, 즉 돌멩이가 됩니다. 그러자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을 가리켜 냄새나는 유대인, 더러운 유대인이라 하며 경원하고 천시하였습니다. 무려 1,900년 동안 그렇게 멸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면 그 누구도 값을 쳐 주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들은 더더욱 유의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세상 도처에 흩어져서 온갖 박해와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면 이스라엘은 구속받게 되며 다시 그 진가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예레미야 31:10-14과 로마서 11:25-29 등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십니다.<br/><br/>진주(13:45,46)<br/><br/>상인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진주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organism, 유기체)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못합니다. 유기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순결한 처녀가 아닙니다. 조직체입니다. 상인이 산 것은 세상인 밭이 아니라, 진주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피값으로 교회를 사셨습니다. 『남편들아, 너희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 하라』(엡 5:25).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실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합니다(골 1:14, 행 4:12).<br/><br/>그물(13:47-50)<br/><br/>세상의 끝(대환란의 끝)에 그물 안에 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고르는 일이 행해집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계 14:15-20). 그리스도의 왕국이 임하실 때 주님은 그분의 진노를 발하십니다(사 63:1-4,6, 렘 25:30, 계 19:13-15). 『이 구원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관하여 예언한 선지자들이 열심히 조사하고 살펴보던 것이며』(벧전 1:10). 구약의 선지자들은 열심히 살펴보고 조사해 보았지만, 그들은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 신비들이 이방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의 믿음이 진리에 뿌리내리게 되며, 그러면 주님께서 신뢰하시는 성도가 됩니다(골 2:6-8).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천국에 관한 신비들을 설명해 주신 후 “너희는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 주여.”라며 대답했습니다. 여러분도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br/><br/>52절에서 “모든 서기관들”은 열두 제자들인데 천국에 관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천국에 관한 교훈을 받은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잘 가르쳐야 합니다. 잘못 가르친 자들은 서기관이 될 수 없습니다. 창고에 든 새 보물과 옛 보물은 신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3:16에서 이 사실을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br/><br/>결론적으로<br/><br/>배울 의향만 있다면 얼마든지 진리를 접할 수 있는 곳이 우리 교회입니다. 인터넷으로 예배 실황을 보는 분들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새 보물과 옛 보물을 관리하는 일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 역할만 하지 않고, 이 나라 교계를 개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이 민족과 교인들은 제대로 복음을 들을 기회들이 없게 됩니다. 이 중요한 일을 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꾼들이 없음으로 인해 그 기회들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하수인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BB<br/><br/>여기에 실린 “이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A HREF="http://www.kjv1611.or.kr" TARGET="_blank"  rel="nofollow">www.kjv1611.or.kr</A>)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4 Jun 2024 15:03:1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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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요한일서 3:1-3)</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2/%EC%9A%B0%EB%A6%AC%EA%B0%80-%ED%95%98%EB%82%98%EB%8B%98%EC%9D%98-%EC%95%84%EB%93%A4%EB%93%A4%EC%9D%B4%EB%9D%BC-%EC%9A%94%ED%95%9C%EC%9D%BC%EC%84%9C-31-3/</link>
<description><![CDATA[이 지상에는 두 부류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예인 유대인들이요,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거듭난 우리들, 즉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것은 종교로 나뉘지 않습니다. 유대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개신교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의 혈통을 따라 태어나 할례 받고, 율법대로 실행하며, 음식을 가려 먹고,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복음 1:12에 의거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이방인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니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더냐? 아니면 믿음을 들음으로써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으로 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보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난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복을 받느니라』(갈 3:2,6-9). 창세기 12:2,3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에 관한 구절입니다. 그 약속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까? 3절 끝에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br/><br/>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확증하시는지 보십시오. 『나는 주이므로 변경하지 아니하노라』(말 3:6).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5:18). 『형제들아, 이제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8). 이 말씀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어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이 복을 주장할 수 있고, 소망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지만, 거듭나지 않고 자기가 골라잡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당시 86세)과 이집트 여인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기에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창 17:18-21). 이스마엘의 후예가 모슬렘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아브라함의 후예들을 증오하는가 보십시오!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는 어떻습니까?(창 27:26-29). 그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예나 에서의 후예들은 모두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br/><br/>성경을 무시하고 유대인들을 함부로 대했던 나라들은 쇠퇴했거나 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민족들도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카톨릭을 믿든지, 개신교를 믿든지, 구원파를 믿든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거짓되이 섬기는 체했던 자들은 이 복에 참여하지 못하고 지옥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br/><br/>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br/><br/>I.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1절).<br/><br/>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지 못했기에 성경을 모릅니다. 성령님은 교인들에게 성경을 알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거짓 교리를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리는 마귀가 만들어 내고, 마귀의 교회들이 거짓 교리를 따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 성경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 정동수 나부랭이들이 짜깁기한 성경이 나온 것입니다. 독일의 합리주의, 영국의 이신론, 미국의 근대주의, 프랑스의 무신론 등은 지역 교회에서 생겨난 이론이 아니라, 성경을 믿지 않은 신학교들에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독일의 튀빙겐(Tubingen), 할레(Halle),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코른탈(Kornthal), 베를린(Berlin) 등의 신학교들이나, 영국의 케임브리지(Cambridge), 옥스퍼드(Oxford), 에딘버러(Edinburgh), 크라이스트 칼리지(Christ&#039;s College) 등의 학교들에서, 미국의 프린스턴(Princeton), 다트머스(Dartmouth), 예일(Yale), 하버드(Harvard), 컬럼비아(Columbia), 시카고주립대학(Univ. of Chicago), 밥존스대학(Bob Jones Univ.) 댈러스신학대학(Dallas Theological Seminary) 등의 학교에서 학위만 받으면 자동적으로 성경을 아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알고 믿어야 하는데, 성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강단에 서서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회중을 향해 사기치는데 주로 돈을 내라고 하며 사기 행각을 벌입니다. 그런 사기 집단을 이 시대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 교회에 다니는 자들은 사기 공범들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br/><br/>거듭나지도 않은 자들이 거듭난 체하는 것부터가 자기를 속이고 동료들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자들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자들은 국가이든, 개인이든 모두 망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역사입니다. B.C. 1500년경까지 세계 최강국이었던 이집트는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린 죄로 세계 최하위권으로 추락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는 다 망했습니다. 축구나 보며 술이나 마시고, 포르노나 즐기는 처지입니다. 유대인 6백만 명을 죽인 히틀러는 자살했고, 독일은 동서로 나뉘어 분단의 고통을 겪었으며, 동독인들은 소련의 하수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카톨릭). 50년 넘게 게르만족은 수치와 모멸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국교를 단절한 아프리카의 니제르, 차드,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몰타, 세네갈, 말리 등은 극심한 기아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인의 평균 수명은 40세도 채 되지 못합니다(모슬렘). 현재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아프리카인이 수십만 명에 이른 것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br/><br/>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br/><br/>II.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2절).<br/><br/>이 약속이 자기의 것이 되게 하려면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약속을 자기의 것이 되게 할 수 있습니까? 성경대로 믿고 거듭나서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에 먼저 재림하시어 생명책에 등재된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시면 우리는 남녀 할 것 없이 33세 반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하여 휴거됩니다(요 1:12, 하나님의 아들들). 하늘나라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혼만 구원받았지만, 그때는 예수님처럼 몸도 구원받게 됩니다. 그러면 단단한 콘크리트 벽도 통과할 수 있고, 빛의 속도보다(초속 30만km)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으며 가고 싶은 곳은 어디에나 갈 수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없고,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몸으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계 21:1-4).<br/><br/>그리스도인은 하늘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난 사실을 믿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성경대로 오시어 십자가를 결행하시어 죽으심으로써 구원받을 길을 제시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게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선택받은 사람만이 구원받는다고 사기쳤습니다. 디모데전서 2:4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귀한 선물에 어떠한 제한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는 제한된 속죄를 가르칩니다. 본문 2절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참된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 이는 우리가 소망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음이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사람이 보는 것을 왜 바라리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란다면 인내로 기다릴지니라』(롬 8:22-25). 이것이 우리가 아는 지식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또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교인입니다. 교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br/><br/>오늘날 교회들이 이처럼 변질된 원인은 마귀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성경을 믿지 않으면서도 성경을 거짓되이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상일을 하듯이 교회를 운영하였기에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에 지녔던 믿음조차도 쓰레기로 만들어 버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별력도 없으면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인들에게서 소망을 없애 버린 죄를 지은 것입니다.<br/><br/>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br/><br/>III. 그분 안에 소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3절).<br/><br/>이 소망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지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을 하고, 재벌이 되고, 노벨상을 타고, 신문 기자, 방송 앵커 그 무엇을 했어도 이 소망을 지닐 수 없습니다. 세계 8대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뿐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이 소망을 디도서 2:13에서는 『복된 소망』이라 말씀하십니다. 왜 복된 소망입니까?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분이 다시 오시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며 기다리는 성도들이 지닌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확고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소망을 지닌 성도들은 그분께서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합니다. 거듭나지도 않았고,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것을 믿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앞으로 이룩될 일들을 말하는 그 자체가 무익한 일이 아닙니까? 세상의 교회들이 그런 짓을 하면서 교회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왜 유사한 설교가 반복됩니까? 이 점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가려내야 합니다.<br/><br/>구약의 선지자들도, 신약 시대의 초기 사도들도 이 점을 잘 몰랐습니다. 『이 구원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관하여 예언한 선지자들이 열심히 조사하고 살펴보던 것이며, 그들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다가올 영광을 미리 증거하실 때, 그 영이 무엇을, 또 어떤 시기를 지시하시는지 탐구하던 것이니라. 그들이 행한 사역들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임이 그들에게 계시되었고 이것이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으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이제 전해졌으며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니라』(벧전 1:10-12).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시어 이 계시를 알게 하셨고, 그에게 신약성경 14권을 기록하게 하시어 세상에 내놓게 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살리라는 소망을 지닌 사람들이 준수해야 할 항목은 정결한 삶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정결한 삶을 살려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교회 다니는 사람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교회에 다니며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고 있기에 문제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콘스탄틴 때의 교회나 다를 바 없습니다. 로마제국은 가짜 교회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원인조차 알지 못합니다. 가짜 교회들과 특히나 가짜 교회의 대표주자인 카톨릭이 참 교회들을 박해했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지만, 종교는 인간이 만든 제도나 전통으로 계승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거짓 교리에 견딜 수 없었던 성도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독특한 성도들입니다. 버간디안(Burgandians), 노바티안(Novatians), 도나티스트(Donatists), 유카이트, 왈덴시안(Waldentians), 파테린, 폴리시안(Paulicians), 메살린, 사벨리안(Sabellians), 네스토리안(Nestorians), 보도파, 형제회, 보고마일(Bogomiles), 헨리시안(Henricians), 불가리안(Bulgarians), 페트로브루시안(Petrobrusians), 럭크만파(Ruckmanites), 한국에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Bible Believers)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lt;킹제임스성경&gt;대로 믿고 거리에서 설교하고 구령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정결한 삶을 살면 이 소망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br/><br/>결론적으로<br/><br/>우리가 받은 새로운 몸은 시간이 정지된 몸입니다(사 57:15,16). 고린도후서 5:1에서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 말씀하셨고, 시편 16:11에서는 그곳에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휴거란 “희열”을 말합니다. 빛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솟구칩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되고(빌 3:21),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같이 변모시키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BB<br/><br/>여기에 실린 “이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 <A HREF="http://www.kjv1611.or.kr" TARGET="_blank"  rel="nofollow">www.kjv1611.or.kr</A> )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14 Jun 2024 11:59:3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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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을 알면 보이는 것은 (고린도후서 51-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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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영이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을 흉내내려고 교회에 다니지만, 그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난다 해도 그 사람에게서는 영적 열매가 열리지도 않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향수는 악취를 제거하려고 뿌리지만, 싸구려 향수는 오히려 악취를 더 역겹게 만듭니다. 영적인 사람을 흉내내는 그들은 역겨운 자들입니다. 『몸의 빛은 눈이라. 그러므로 네 눈이 순전하면, 네 온몸이 빛으로 가득 찰 것이요』(마 6:22).<br/><br/>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는 육체는 없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십자가 이전과 이후는 다릅니다. 잠언 20:27에서는 『사람의 영은 주의 촛불이라. 뱃속에 있는 모든 깊은 부분들을 살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생각, 계획, 심지어 잡다한 어리석음까지도 다 살피십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쓰며 삽니다. 구약 사람들은 거듭남이 있을 수 없었지만, 십자가 이후에는 그 누구라도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유대인들은 이 점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계기와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br/><br/>&#034;나도 이제부터 착하게 살아야지.&#034;라고 생각을 한 사람은 죄로 인한 쓰라림을 맛보고 통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직 양심이 더럽혀져 있고, 스스로 죄에 대해 가책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속이며 살다가 다시 죄를 짓게 됩니다. 회개 없는 죄사함은 없습니다. 그의 통회는 지속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한 영이시기에 인간의 혼에 직접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에게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만 하면 복 받는다는 말은 사기입니다. 성경의 지식을 모르는 목사는 사기꾼입니다. 그는 악령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라고 거짓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는 점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합니다. 그를 신뢰했던 교인들은 인간을 신뢰한 죄로 인해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틀림없이 받게 됩니다. 영적 눈이 감긴 사람이 어떻게 영원 세계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들은 성경이 잘못되었고, 하나님이 거짓말하신다고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성경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br/><br/>영의 눈을 뜨라, 그러면 보인다.<br/><br/>I.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1,2절).<br/><br/>우리가 아는 것은,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상 생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상 삶은 임시로 사는 장막 집과 같습니다. 하늘에 있는 집은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집을 알게 해주셨습니다(요 14:1-3). 인간의 몸은 마치 장막, 즉 텐트와 같은 것입니다. 태풍에도 날아가고, 불에도 타 버리고, 각종 질병에도 견디지 못하며, 70세도 못 되어 몸이 쑤시고 결리며, 잠 못 이루고, 걱정이 쌓입니다. 죽기 전 마지막 5-10년 사이에 엄청 고생하며 모아두었던 돈도 다 쓰고 간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영이 거듭나고, 혼이 구원받고,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서 양육받고 진리의 지식을 깨닫고 살면, 사기당할 일도 없고, 억울한 일도 없으며, 셋째 하늘에 마련해 주신 영원한 집으로 가게 된다는 소망을 혼의 닻 같이 가졌으니, 이보다 확실하고 견고한 소망은 없습니다(히 6:19,20). 『내 백성이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너를 거부하리니, 네가 나에게 제사장이 되지 못하리라.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또한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제를 원치 아니하나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번제보다 낫도다』(호 4:6; 6:6).<br/><br/>이런 지식이 없이 마귀가 세운 종들에게 속게 되면 소망은커녕, 스쿠알렌이나 팔아 유병언에게 바치다가 그 인간같이 개처럼 죽어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울부짖어야 합니다.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바른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고 따르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교회를 선택하고 성경을 선택하며 노닥거렸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단 교회들은 호객 행위를 하며 그것을 전도니 선교니 합니다. 130억 원대 교회 돈을 횡령한 조용기 목사는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는데, 2심 재판부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설교자가 맞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갖가지 죄를 저지른 중죄인입니다. 그런 거짓 설교자들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감옥 정도의 차원을 넘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옥은 성경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거짓되이 설교하며 사기 친 죄인들을 보내는 곳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그의 혼은 영원히 울부짖습니다.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김정일, 폴 포트, 역대 교황들, 테레사, DJ, 조다윗, 김기동, 유병언 같은 성경을 믿지 않는 모든 종교 사기꾼들이 가는 곳입니다.<br/><br/>지옥은 땅의 심장 속에 있는 실제적인 장소입니다(마 12:40). 거짓되이 복음을 전하고, 거짓되이 믿는 체했던 모든 인간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4,46,48).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모든 인간들이 가는 곳입니다. 지옥을 설교하는 자들이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야말로 마귀가 그들을 속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그래서 지옥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br/><br/>영의 눈을 뜨라, 그러면 보인다.<br/><br/>II. 우리가 옷입고 있다면 벗은 채로 발견되지 아니하리라(3-5절).<br/><br/>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진흙으로 지어진 집에서 벗어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새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 일은 즉시 일어납니다. 성경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는 종교 행위입니다. 그런 종교 행위를 한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그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그 일이 다른 종교들에서 행해지는 것이 왜 우리의 관심사입니까? 설령 그런 행위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일지라도 구원받기 위해 했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며, 인간의 일일 뿐입니다. 인간이 행한 어떤 선행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일, 즉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 놓으신 &#034;의&#034;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선심을 쓰고, 자기 교회에다 돈을 많이 바치고, 새벽에 교회 나가고, 철야금식하고, 교회 놔두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등 그런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034;더러운 걸레&#034;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64:6).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시인하고, 그대로 살다가 죽었다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했을 터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로 완성해 놓으신 그 사실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034;너는 의롭다&#034;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br/><br/>3,4절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이 점을 깨닫고 쓴 것입니다. 죽음은 단순히 인생을 끝내는 것이 아니고, 그 외에 무엇인가 더 있습니다. 『이 장막 집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지고 신음하는 것은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 옷입혀지고자 함이니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서 삼켜지는 것이라』(고후 5:4). 그것이 무엇입니까? 닳지 않는 새 옷 한 벌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을 새 몸은 그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거듭났을 때 이전의 죄의 몸은 깨끗해졌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옷은 구원받은 후에 행한 선행들로 짜여진 세마포입니다. 그 옷으로 입혀집니다. 쓸데없는 일에 구제했거나, 쓸데없는 일을 하면서 봉사했다고 하거나, 심지어 지자체나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고서 선교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돌아와서는 &#034;꽃으로도 때리지 말라.&#034;고 했는데, 그렇게 사랑했다면 그곳에서 함께 살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되었느니라. 이 일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어 우리로 그것들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것이라』(엡 2:10). 『이 말씀은 신실하도다. 나는 네가 이런 것들에 관하여 강력하게 확언하기를 원하노니,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선한 일들에 유념하여 진력하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들은 선하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고, 심방하고, 구역 모임 갖고, 단기선교, 자원봉사 등 모두 돈 이야기입니다. 돈을 더 많이 내라는 수작에 불과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도들에게 행한 사랑의 마음이 바로 하늘나라에서 입게 될 옷입니다. 이 점을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034;성령의 보증&#034;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br/><br/>영의 눈을 뜨라, 그러면 보인다.<br/><br/>III. 우리의 임무는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원함입니다(6-9절).<br/><br/>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거듭난 새 영은 하늘나라에서 새로운 영적인 몸이 될 것이며, 주님께서 공중에 오시면 부활할 때 새 물리적 몸으로 변모될 것이지만, 이 몸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식을 얻는 길은 기록된 말씀을 믿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거듭나지 않았거나, 거듭난 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이 점을 알 수도 없고, 또 믿을 수도 없습니다. 성경을 떠나서, 공부를 하지 않고, 세상과 교회 사이를, 즉 육신적 삶과 믿음의 삶을 왔다 갔다 했다면 그에게 어떤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br/><br/>진리의 지식을 아는 것은 세상적인 수단이나 인정, 인간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lt;킹제임스성경&gt;을 공부하고 기록된 대로 믿는 것뿐입니다. 자기가 진리를 찾았다면 의심하지 말고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정받는 믿음입니다. 구원받은 혼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삽니다(낙원,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 반대로 구원받지 못한 혼은 지옥에서 영원을 보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죽으면 어디로 가고,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와도 겁내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더 길게 보이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기도하는 능력이 있고, 죽어서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는지 알았다면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br/><br/>믿음의 생활을 하면서도 불안합니까? 그랬다면 그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건강하고, 먹을 것이 있고, 살 곳이 있는 사람들은 불안하지 않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안합니다. 기도할 수 있는 성도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강건하고 담대하라! 이것이 주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확실한 보증을 받은 성도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귀한 보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혼의 닻 같은 소망을 지니지 못했으면 불안합니다.<br/><br/>결론적으로<br/><br/>세계에서 가장 비싼 바이올린은 1713년에 제작된 &#034;스트라디바리우스&#034;(Stradi-<br/><br/>varius)로 우리 돈으로 약 37억 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거리의 악사로 변신해 청바지를 입고 워싱턴 지하철에서 이 바이올린으로 45분간 연주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수천 명이 그 앞을 지나갔지만 그를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잠시 귀를 기울인 사람은 단 7명뿐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를 알아볼, 그 바이올린을 알아볼 안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br/><br/>프랑스에서는 마법의 악기라고 불린 &#034;스트라디바리우스&#034; 5대와 다른 고전 명품 악기 6대, 그리고 새로 만든 악기 6대로 연주했는데, 사람들은 스트라디바리우스보다 새 바이올린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누가 진귀한 악기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에게는 안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br/><br/>누가 진귀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붙들 수 있겠습니까? 영적 안목과 말씀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후 4:18). 누가 바른 성경을 알아보고, 바른 설교를 알아봅니까? 진귀한 보물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고후 4:16). 왜 우리만 독특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정상이요, 보물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비정상입니다. BB<br/><br/>여기에 실린 &#034;이달의 설교&#034;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 <A HREF="http://www.kjv1611.or.kr" TARGET="_blank"  rel="nofollow">www.kjv1611.or.kr</A> )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14 Jun 2024 11:42:3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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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의 자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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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알프레드 깁스(1890-1967)는 그의 책 &lt;설교자와 그의 설교, The Preacher and His Preaching&gt;로 목사들과 신학생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알프레드 깁스는 1890년 영국 버밍햄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자랐고, 쌍둥이 형인 에드윈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목으로 복무하면서 훈련소에 있는 군인들에게 설교했다. 1919년에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무디성경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곧 구제 선교에도 참여했다. 본 학회지는 이 알프레드 깁스의 &lt;설교자와 그의 설교&gt;를 격월로 연재하고자 한다.<br/><br/>가책을 느끼는 죄인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대신 희생하셨다는 사실로 인해 안식으로 인도받으며, 그분을 구세주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 하나님의 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br/><br/>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그 일은 보통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입을 열어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을 “전파자”(preacher), 곧 “설교자”라 부르고(롬 10:14) 복음을 제시하는 일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고전 1:17, 고후 10:14).<br/>설교자와 그의 설교는 나뉠 수 없다. 아주 실제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이고, 설교자는 그의 설교이며, 설교 이면에 있는 설교자가 설교의 무게를 결정한다. 어디서나 그렇듯 양보다 질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br/><br/>그 점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리라』(딤전 4:16). 필자는 바로 이 구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본서의 제목을 &lt;설교자와 그의 설교&gt;라고 붙였다. 에머슨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자체가 어찌나 크게 말하는지 당신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세상이 듣지 못한다!” 스토니 브룩 학교에는 “경력에 앞서 인격”이라는 훌륭한 좌우명이 있다. 설교를 “인품을 거쳐 나오는 진리”라고 말한 헨리 워드 비처가 설교를 가장 잘 정의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br/><br/>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다음의 말씀을 기록했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고 흠 없이 행동하였는가는 너희가 증인이며 또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시니라』(살전 2:10). 바리새인들이 『네가 누구냐?』라고 주님께 묻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해 온 대로니라』(요 8:25). 다시 말해서 주님은 “내가 말했던 것이 나다.”라고 표명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교리의 산 실증이셨다. 올리브산에서 설교하시기에 앞서 나사렛에서 무명의 30년을 보내시는 동안 그 설교를 삶으로 보여 주셨다. 즉 입술로 자세히 설명하신 바를 삶에서 직접 보이신 것이다.<br/><br/>이런 관점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설교자가 필수로 갖춰야 할 자격이 무엇일까? 이제 우리는 설교하기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어떤 선행조건이 필요한지 고려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br/><br/>1. 거듭나야 한다(요 3:3-7).<br/><br/>1) 자기기만의 가능성<br/><br/>설교자가 거듭나야 한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자명해 보임에도, 실제로는 문자 그대로 수백 명의 설교자가 하나님의 영의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본인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 당시에 가장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신실했던 한 사람에게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께서 다음처럼 엄숙하게 선언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br/><br/>이 거듭나지 않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설교하기란 그저 직업이나 생계 수단일 뿐이다. 그들은 목회를 의료, 법률, 회계, 교직, 사업, 육군, 해군, 공직과 같은 한 직종으로 여긴다. 신학 교육을 받았고 목사로 임명됐으며 사역에 발을 들였고 “목사”라는 직함을 가졌지만, 그들은 그러는 내내 거듭나지 못했다. 결국 허물과 죄들 가운데 죽은, 구원받지 않은 죄인으로서 어둠과 암흑 속에서 영원을 보내는 종착지로 향하는 중인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비극인가! 많은 경우 그들은 지적이고 도덕적이며 종교적 성향이 강하고 교양 있고 말솜씨가 능란하며 성격까지 매력적이다. 그러나 영적 현실에 관해서는 완전히 까막눈인 데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에 대해서 지독스럽게 무지하다.<br/><br/>100년 전에 사역했던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자 토머스 찰머스 박사는 10년을 설교한 뒤에야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영국 콘월의 광부 출신 빌리 브레이와 동시대인인 하슬람이라는 설교자는 설교를 하다가 자기 설교단에서 구원을 받았다! 근자에 어느 젊은 목사가 한 복음 집회장에 붙은 문구를 보고 목사 협회에 항의를 해 왔는데, 분에 찬 젊은이는 그런 이단적인 선전에 이의를 제기한다며 그 문구를 인용했다.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그러면서 “불경스러운 가르침”을 광고하는 자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조치해 달라고 협회에 호소했다. 그때 참된 그리스도인인 나이 지긋한 목사가 일어나더니 그의 주장은 집회 주최 측이 아니라 성경을 상대로 한 불만이라고 알려 줬다. 젊은 목사는 너무나 당황했는데, 문구가 성경 구절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머레이 맥체인의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광경은 죽은 설교자가 죽은 죄인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설교하는 모습이다.”<br/><br/>2) 가까스로 고백만 하는 자들에 관한 묘사<br/><br/>그리스도께서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을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에 빗대셨다(마 15:14). 시편 50:1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말하노라. 네가 내 규례들을 선포하기 위하여 또 내 언약을 네 입에 두기 위하여 네가 무엇을 행해야 하느냐?』 베드로도 당대 거짓 선지자들을 “물 없는 샘”(벧후 2:17)이라고 기록했다. 그런 샘이 나타나서 몹시도 지치고 목이 타는 여행자에게 손짓하지만 정작 갈증을 풀어 줄 어떤 것도 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전 2:14). <br/><br/>3) 설교자 스스로가 가져야 하는 구원의 확신<br/><br/>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 전하기 원한다면 본인부터 새로운 출생을 확실히 경험해야 한다. 진심으로 다음처럼 간증해야 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의뢰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요, 내 노래시며, 그가 또한 나의 구원이 되심이라』(사 12:2).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고후 4:13). 이 말씀에 “우리도 믿었으므로 말한다.”라고 자신 있게 덧붙일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함께 복음을 전한 동료들에 대해 『그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있느니라.』(빌 4:3)라고 썼다(cf. 눅 10:20, 계 20:15). 글에 유익을 더하고자 잘 알려진 찬송가 가사를 아래와 같이 바꿔 보았다.<br/><br/>성경 교사와 설교자여,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 <br/>주이신 예수님께서 엄숙하게 말씀하신 바니 <br/>이 말씀이 헛되지 않게 하라. <br/><br/><br/>“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<br/><br/>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강한 확신을 마음에 가진 설교자라야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받아들여졌고”(엡 1: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기에”(롬 3:24)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 5:20)고 자신 있게 힘주어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br/><br/><br/>사도 바울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치되 모든 담대함으로 하였으니 아무도 그를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1). 설교자가 자기 구원에 관해 가진 확신과 자신감은 청중에게 전달되고 현실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런 연유로 내가 이러한 고난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믿은 분을 알고, 내가 위탁한 것을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이 사실을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말하는 설교자는 그가 구주 안에서 가진 확신과 구원받은 경험으로 청중에게 감명을 주게 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30 Apr 2024 14:32: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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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로 부르심 (2)</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2/%EC%84%A4%EA%B5%90%EC%9E%90%EB%A1%9C-%EB%B6%80%EB%A5%B4%EC%8B%AC-2/</link>
<description><![CDATA[알프레드 깁스(Alfred P. Gibbs) / 장은혜 옮김<br/><br/><br/><br/>알프레드 깁스(1890-1967)는 1890년에 영국 버밍햄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자랐고, 쌍둥이 형인 에드윈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목으로 복무하며 훈련소에 있는 군인들에게 설교했다. 1919년에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무디성경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거기서 곧 구제 선교에도 참여했다. 깁스는 그의 훌륭한 저서 &lt;설교자와 그의 설교, The Preacher and His Preaching&gt;로 목사와 설교자에게 친숙하다. 이번 호에서는 그 책 제5장, 「설교자로 부르심」의 나머지 부분을 지난 호에 이어서 연재한다. <br/><br/><br/><br/><br/><br/>5.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증하기까지 여러 요소를 종합해 봐야 한다. <br/><br/><br/>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다고 판단하는 데에는 아래의 사항들이 관여한다. <br/><br/>1) 성령님께서 강하게 권고하신다. <br/><br/><br/>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면서 그를 『모든 진리로 인도』해 주신다(요 16:13, 롬 8:14). 우리가 이 “거룩한 하늘의 손님”을 슬프게 해 드리지 않는 한, 우리 생에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갖고 계신지에 관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시고 생각을 이끄신다(롬 8:26,27). 성령님의 이런 인도하심은 뚜렷이 밝혀 규정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다. 스코틀랜드에 이런 속담이 있다. “말로 듣기보다 느끼는 편이 낫다.” 즉 묘사를 듣는 쪽보다 경험하는 쪽이 낫다는 뜻이다. 설교자나 성경 교사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런 경험을 직접 해야 하고, 또 틀림없이 할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으며,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고 있다면 말이다. 잠깐 스치는 기분이나 직감, 육신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그래서 곧 사라져 버릴 생각을 성령님께서 촉구하시는 것으로 혼동하면 안 된다. 숱한 이들이 한낱 감정에 지나지 않는 물결에 쓸려 왔다 쓸려 갔으며, 자신을 하나님께서 전임 사역자로 부르셨다고 오해했다.<br/><br/><br/>2) 성경의 어떤 말씀을 통해 강한 확신을 갖는다. <br/><br/><br/>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심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자신이 제정하신 원칙에 반하게 이끌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혼란에서 허우적대도록 두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선한 때에, 선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에 곧바로 순종하면 그 다음 것을 알려 주신다. 『만일 우리가 계속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 우리가 알게 되리라』(호 6:3). 『만일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알게 되리라』(요 7:17). 하박국도 그 가치를 배워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망대에 서서, 그가 내게 말씀하실 것과 책망받을 때에 내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를 지켜보리라』(합 2:1). 사무엘은 엘리에게서 이 진리를 배웠고, 하나님께서 네 번째로 다시 부르시자 이렇게 답했다.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삼상 3:10).<br/><br/>3) 마음에 강렬한 연민을 느낀다. <br/><br/>설교자로 부르신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복음이 절박하게 필요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해 그들의 실체도 직시한다. 유죄이고 속수무책이며 완전히 실패해서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앞둔 존재로서 말이다. 그래서 부름받은 사람에게는 죄인들을 해방시키는 복음을 듣는 일이 죄인들에게 전폭적으로 필요하다는 확신이 깊게 자리한다. 그런 뜻을 담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는 곡식이 추수하도록 이미 하얗게 되었음이라』(요 4:35). 주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로 다시 왔으며, 그때는 그 여인이 예수님을 극찬하는 말을 듣고서 성읍 사람들도 많이 따라왔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죄인에게 필요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한 성도를 설교자로 부르시는 이유의 일부이다. 즉 주님께서는 그 필요를 채우기 원하신다. 하나님 앞에 홀로 앉아 잠언 24:11,12과 에스겔 33:1-6을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에 깊이 새기며 읽기 바란다. 정확히 말해 필요성 자체가 부르심을 확정하지는 않지만, 앞서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적이 있다면 그에 답할 기회로 삼을 수는 있다.<br/><br/>4)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조언도 고려 사항이다. <br/><br/><br/>이 부분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신앙의 경험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설교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어떤 증거를 갖는지 보아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더 노련하고, 하나님의 사역에서 더 오랜 경험을 쌓았으며, 하나님께서 자신과 다른 그리스도인을 다루심에 대해 더 민감하게 깨닫는다. 그런 원숙함에 이른 그들은 부름받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조언을 통해 격려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충고만 듣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지만, 부르심의 여부를 판단하는 조건이 될 만은 하다. 관록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조언을 경시하지 말라. 바울도 이 점을 무시하지 않았다(갈 2:2).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 탁월한 분별력을 지녔기에 그렇게 도울 수 있는 것이다. <br/><br/>5) 은사가 남다르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종의 말과 행동은 그 영향력이 크다. <br/><br/><br/>디모데를 전담 사역자로 부르셨을 때 이 요소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행 16:1-3). 디모데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결정적으로 쓰셨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분별력을 은사로 받은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런 원로 형제들을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가! 젊은이들을 이끌어서 주님의 사역에 작게라도 참여케 한 다음, 주님께 받은 은사를 발전시키도록 북돋으니 말이다. 위대한 복음 설교자의 많은 수가 그렇게 시작했다(딤후 4:11). <br/><br/>6)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상황을 배치하셔서 그 성도에 대한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br/><br/><br/>하나님께서 적합한 시기에 설교의 문을 여시기도 하고 생업의 문을 닫으시기도 한다(계 3:8, 고전 16:9). 어떤 경우에는 설교 요청을 넘치게 받아서 더 이상 생업에 시간을 쓸 수 없는 형편에 이르고, 곧 어느 쪽을 포기할지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처하는 환경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배치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임무를 내팽개치고 도망하던 중에 욥파에서 타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승선했다. 배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행로임을 입증한다고 여기지 않았겠는가! 하나님께서 섭리에 따라 마련하시는 환경은 다른 요소들이 결합되어 그 증거가 축적될 때 하나님의 질서 있는 섭리가 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br/>이미 고인이 된 E.J. 페이스(Pace)는 수년간 선데이 스쿨 타임즈(Sunday School Times)에 만화를 그렸다. 언젠가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멋지고 알맞게 표현해 냈는데, 그 그림을 말로 옮겨 보겠다. 우선 광선 세 줄기가 있다. 첫째 광선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둘째 광선은 “성령님의 설득과 격려,” 셋째 광선은 “하나님께서 섭리대로 배치하시는 환경”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결국 이 세 광선이 모여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한 줄기 눈부신 빛이 된다. 즉 세 요소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다는 의미이다. 본서에서는 거기에 네 가지를 더해서 살펴보는 중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을 섬기는 길에서 그분의 뜻을 깨닫기 바란다.<br/><br/><br/><br/>7) 지체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는지도 중요하다. <br/><br/><br/>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지체들이 기꺼이 승인하고, 그들의 동료애와 칭찬을 확보해 온 사람이 아니고서는 전담 사역자로 발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섬김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나마나 자기 마음대로 평가할 테니 말이다.<br/>영적으로 교만해서 눈이 먼 자들은 이 부분을 왜곡되게 이해하지만 영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또 예언하는 사람은 둘이나 셋이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판단하라... 예언하는 사람들의 영들은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나니』(고전 14:29,32). 이런 원칙을 숙지한 연장자 형제들이 기도하면서 적절하게 고려한 후 누군가를 전담 사역자로 추천하기를 꺼린다면, 당사자는 그들의 결정에 따르고 자신의 부르심에 관한 종전의 판단을 재고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라 화평의 창시자이심이라』(고전 14:33). 성경적인 “품위와 질서”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가 막대한 후회로 이어진 경우가 허다했다. 성경은 아집과 육신적인 힘으로 움직이는 “프리랜서”(자유 계약자)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속한 모임의 책임자들을 반대하는 노선이거나 그들과 상관없는 독자 노선에서 행동 방침을 결정하고 자신의 생각을 실행한다. <br/>성도 각자가 겸손하고 진지하게 인내하면서, 확신 가운데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에 두신 뜻을 찾고, 또 그대로 행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한다. 이에 더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 바울을 부르셨다(행 13:2). <br/><br/><br/>그리스도인 사역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서 영적으로 만족스러운 결실을 거두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또 주님의 전쟁에서 함께 싸우며 주님께 경배드리고 주님의 길에서 실행해야 한다. J.H. 조웨트(Jowett)는 그의 잘 알려진 저서 &lt;설교자, 그의 삶과 사역, The Preacher, His Life and Work&gt;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형제여, 당신의 소명은 아주 거룩한 일이고, 당신이 받은 사역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당신의 구주께서는 전능하시기에 주님을 기뻐함이 당신의 힘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5 Mar 2024 10:43: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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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설교자로 부르심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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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알프레드 깁스(Alfred P. Gibbs) / 장은혜 옮김<br/><br/><br/>프레드 깁스(1890-1967)는 1890년에 영국 버밍햄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자랐고, 쌍둥이 형인 에드윈에게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목으로 복무하면서 훈련소에 있는 군인들에게 설교했다. 1919년에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있는 무디성경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거기에서 곧 구제 선교에도 참여했다. 알프레드 깁스는 그의 훌륭한 저서 &lt;설교자와 그의 설교, The Preacher and His Preaching&gt;로 목사와 설교자에게 친숙하다. 본지에서는 이번 호부터 총 2회에 걸쳐서 그 책의 「제5장, 설교자로 부르심」을 싣는다.<br/><br/><br/><br/>1. 설교자로 부르시는 일은 개인적이다. <br/><br/>설교자로 부르심은 순수하게 그리스도인 각인과 그의 주인이신 주님 사이의 문제이다. 부르심의 권한은 그리스도 그분만의 특권이기에 그분 자신의 뜻에 따라 누구라도 부르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선택하여 임명하였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너희 열매가 남아 있어』(요 15:16).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셨다(막 3:13,14). 주님은 바울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이방인들과 왕들과 또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내가 선택한 그릇임이라』(행 9:15). 따라서 주님께서 설교자로 부르시는 일과 별개라면, 세상 교육과 신학 교육은 말 그대로 모두가 무용하다. <br/><br/>언변이 유창하고 표현하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 자체로 설교자로서 자격을 갖췄다고 보면 안 된다. 선천적으로 기량도 뛰어나고 신체, 정신, 교육 수준이 적합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알렉산더 맥클래너는 한 설교자에 대해 “치명적으로 매끄럽다.”라고 평가했다. 천부적 소질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런 재주를 가졌다고 설교자로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br/><br/>1)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다루신다. <br/><br/><br/>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하나님이시기에 부르심에 있어서 “대량 생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설교자는 한 묶음씩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마음에 부담(burden)을 주시고, 그에게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주지시키며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기를 거룩하게 촉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로 부르신 이사야가 그분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엄중”(burden)하므로 반드시 전해야 한다고 거듭 표현한 점을 눈여겨보라(사 13:1; 14:28; 15:1; 17:1 등). 사도 바울도 그 일이 “부득불” 해야 할 일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정녕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전 9:16) 여호수아 또한 주의 군대 대장 앞에 엎드려서 물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나이까?』 여호수아는 거룩한 땅에 섰기에 신을 벗었고 머리를 숙인 채 주님을 독대했다. 그러면서 부르심과 명령을 받았고 하나님을 위해 그 숭고한 일을 이루고자 나아갔다(수 5:13-15).<br/><br/>2) 영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br/><br/><br/>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그분과의 교제를 만끽하는 중에, 즉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마음껏 즐길 때 부르신다. 육신적이거나 세상에 젖어 사는 그리스도인은, 더구나 그런 환경에서는, 그에게 주시는 미세한 음성을 조금도 감지하지 못한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말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새겨들어야 한다. 『너는 잠시 가만히 서 있으라. 내가 네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리라』(삼상 9:27). 그런 영적 분위기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롬 12:1)라는 말씀에 진지하게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 자신의 삶에 어떤 뜻을 갖고 계신지 알려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열렬히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면 즉시 순종해야 그 상태가 유지된다. 부르심은 그런 영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br/><br/>3) 보통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할 때 부르신다. <br/><br/>수도원에서 외떨어져 지낼 때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게으른 그리스도인은 부르시지 않는다. 바나바와 사울을 부르셨을 당시 그들은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내게 따로 구별해 놓으라』(행 13:2).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라는 명령을 받았던 때도 양떼를 돌보던 중이었다(출 3:1,2). 기드온이 압제자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선택됐던 때 역시나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판 6:11). 엘리야가 엘리사의 어깨에 겉옷을 던져 하나님께서 그를 쓰신다고 알렸을 때도 엘리사는 밭을 가느라 바빴다(왕상 19:19). 그리스도를 섬기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고 마태는 세무를 보느라 분주했다(마 4:18,19, 눅 5:27). 그리스도인이 더 섬기도록 부름받는 시점은 자기 손에 이미 받은 일을 하고 있을 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알게 되리라』(요 7:17). 알고 있는 것에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뜻을 더 보여 주신다. 모든 성도는 다음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계속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 우리가 알게 되리라』(호 6:3).<br/><br/>2. 부르심은 확실하다.<br/><br/>부르시는 방법이 다양하고 환경이 다를 수는 있지만 부르심 자체는 뚜렷하다. 그래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특정한 일을 하기를 바라신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기쁨으로 가득한 자신감과 거룩한 용기를 갖는다. 동시에 자신이, 또 자신이 전하는 설교가 어떤 권위에 기반하는가를 깨닫는다. 『나의 임재가 너와 함께 가며 내가 너에게 쉼을 주리라』(출 33:14). 설교자는 이 약속에서 용기를 얻어, 이후 틀림없이 모습을 드러낼 반대에 담대하게 맞설 수 있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판 6:12) 주님의 종은 힘을 돋우는 이 확언을 붙들고 부름받은 길을 지속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 계심을 이제 깨닫게 된다. <br/><br/>3. 여러 환경에서 부르신다.<br/><br/>하나님께서 자신이 뜻하신 일을 하게 하시려고 그분의 종들을 부르시는 방법을 면밀히 살펴보는 일은 매우 유익하다. 따라서 몇 명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br/><br/>1) 아브라함 :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분명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러시면서 그에게 복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주셨다(행 7:2, 창 12:1-3).<br/><br/>2) 모세 : 모세는 크게 교훈을 주는 사례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주저함을 이겨 내셔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가 번번이 반대 이유를 댔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각각을 일소하기에 충분한 약속을 주셨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일에 조금도 실수하지 않으셨음을 수긍했다(출 3,4장).<br/><br/>3) 여호수아 :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는 먼저 약속과 함께 임무를 주셨다. 그런 다음 자신을 보여 주셨다(수 1:1-9; 5:13-15). <br/><br/>4) 기드온 :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그를 “힘센 용사”라고 일컬으셨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보내시면서는 『너는 너의 이 힘으로 가서... 내가 너를 보내지 아니하였느냐?』(판 6:14)라는 말씀을 그의 귓전에 울리셨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을 두 번 보고 나서야 부르심과 책무를 확신했다(판 6:36-40). <br/><br/>5) 엘리사 : 하나님께서는 유복하고 힘이 넘치는 한 젊은이를 갑작스럽게 부르셨다. 한창 바쁘게 살면서 출세라는 장밋빛 유망을 목전에 둔 상태였는데, 그 대신에 주님의 선지자인 엘리야를 섬기며 보잘것없이 무명으로 살라고 말이다. 그 뒤 수년간 소식이 없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주인을 하늘로 데려가시자 엘리사가 다시 모습을 보였다. 남모르게 신실하게 섬겼더니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보상해” 주셔서 이스라엘인이면 누구라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왕상 19:19-21, 왕하 3:11). <br/><br/>6) 이사야 : 이 위대한 선지자가 환상을 보면서 부르심과 임무를 받는 장면(사 6:1-13)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2,500년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왔다. 결국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사야처럼 답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br/><br/>7) 베드로 : 천성이 충동적이고 원기가 왕성한 베드로는 안드레가 구주께로 인도했다(개인 구령의 가치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경이롭게 고기를 잡는 과정 속에서, 즉 그 기적을 경험하는 중에 부르심과 임무를 받았다(눅 5:1-11). <br/><br/>부르시는 환경이 백인백색으로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일하시는 데 있어서 한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목적과 결과는 같다. 곧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부르신 당사자에게 복을 주시며,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함이다. 각자는 그 점을 고유하게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음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br/><br/><br/><br/>4. 전임 사역자로만 섬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br/><br/>오늘날에는 생업이 있으면서도 시간을 드려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칠 설교자나 교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미 고귀한 군대에 합류한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자리가 많다. 밭이 넓고 곡식은 무르익었으나 일꾼이 거의 없다. 윌리엄 캐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본업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만, 그 경비를 치르려고 신발을 만든다!”<br/><br/>1) 이른바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는 신약에 존재하지 않는다. <br/><br/>그리스도인 모두가 성직자(minister)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의미가 “종”이기 때문이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용어는 신약에서 완전히 생소한 개념이다. “성직자”(clergy)는 “클레로스”(cleros)에서 온 말이며, 베드로전서 5:2,3에서는 “맡겨 주신 자들”로 번역되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람 모두를 가리키지 그리스도인 일부를 지칭하지 않는다. 기독교계에 널리 퍼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전적으로 인간의 발상이며, 마귀의 선동에 의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거짓이 얼마나 막대한 악을 초래해 왔는지 모른다. 그리스도인 자신이 무슨 은사를 받았는지를 가리고, 그 은사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도록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쳐야 마땅한데도, 그 거짓에 속아 잠자코 있는 것이다. 구원받지 않았기에 성경을 설명할 수 없는데도 그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성직자들 밑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현실이 참으로 두렵다.<br/><br/>2) 주님의 일이 전문직이라는 생각은 악하다. <br/><br/>그런 모습은 아무리 힘주어 저주해도 충분치가 않다. 전담 설교자와 비전담 설교자는 그가 설교 준비와 설교에 시간을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또 경제적 형편이 어떤지에만 차이가 날 뿐이다. 주님의 사역이 전문직이라는, 또 주님의 사람들이 두 계층으로 나뉜다는 오해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베드로전서 4:10을 이해하면 그와 같이 성경을 졸렬하게 모방한 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전문직이라는 개념을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각 사람이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섬기라.』<br/><br/><br/>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종의 임무를 이행할 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직자,” 곧 한 주인의 “종”이며, 주님의 일을 이루는 같은 섬김에 종사한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명확히 가르친다. 현대 기독교계에 보이는, 소수 성직자 계층만 지식과 기능을 갖는다는 이론은 그 어디에도 없다(벧전 2:5-9, 계 1:5,6). 한 그리스도인 젊은이와 나이 지긋한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이 대화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구원받은 지는 얼마나 됐는가?” “3년 됐습니다.” “그럼 지난 3년간 누굴 섬기며 지내 온 거지?” 교훈이 너무도 선명하지 않은가!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15 Feb 2024 13:47: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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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구원은 하나님의 선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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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br/>&nbsp; &nbsp; &nbsp; (에베소서 2:8,9)<br/><br/><br/><br/>&nbsp; &nbsp;  오늘날 기독교의 신앙이 이렇게 황폐화된 것은 다른 종교 신봉자들과 무신론자들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의 의자들을 차지하고 제멋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인들은 가장 기본적인 진리마저도 내팽개쳐 버리고 그런 기본 진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자기 친구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종교를 향해, 도덕을 향해 교회라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로 십자가만 빼놓고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는 교회에는 문에도, 옥상에도, 교회 안에도 십자가가 걸려 있지만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십자가는 제쳐놓고 찬양하고 율동하며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외우고 교회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br/>&nbsp;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면 자신을 그런 헛된 곳에 던져놓고 무슨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해 놓으신 것 외에 자신도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br/>&nbsp; 또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사탄을 제압할 수 있고, 사탄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 그까짓 것 끊으면 될 것 아닌가? 나쁜 버릇, 그까짓 것 손떼면 될 것 아닌가? 그렇게 큰소리를 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탄은 단순히 악하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미혹하고, 성경적 교리를 변질시키고, 이상한 교회를 세워 운영하는 그런 존재로만 알고 있기에 그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사탄은 나쁜 일만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탄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사람들은 빛의 천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사탄을 섬기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고후 11:4).<br/>&nbsp;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추하고 사악한 마귀의 자식들인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하시지 않게 된 데에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롬 5:10). <br/>&nbsp; 성경은 죄를 짓는 것이 마귀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했습니다(요일 3:4,8).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지금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항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이 바른 신앙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에 항거하게 되면 그 인간은 마귀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타락한 성품을 지니게 되었는데 타락한 성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성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면 일차적으로 그의 의지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br/>&nbsp;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강제성이나 억압이 없고 자유만 있습니다. 모슬렘, 로마카톨릭 등 모든 종교에는 강제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 안에 거하게 되면 강제성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바치며 구령하고 거리설교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것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다 덧붙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유로워지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br/><br/>&nbsp;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br/>&nbsp; I.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 받는 것입니다(엡 2:8a). <br/>&nbsp; 신실한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18세기 때부터 중국이나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섬들, 인도, 아메리카 인디언, 아마존 강을 따라 사는 원주민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미개인들을 구원받게 하고 있었을 때 소위 문명화된 도시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말도 안 통하는 미개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까? 그러나 도시에서는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신들이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보수를 더 받으면서 성경을 가르치겠다는 사람들도 무더기로 생겨난 것입니다. 대조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세계 곳곳의 오지로 나가서 원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는 데 반해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며 교회만 다녔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거대한 교회건물들과 신학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복음과 선교를 빙자해서 돈벌이하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자들이 복음과 진리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br/>&nbsp; 그러나 믿음의 삶은 그런 곳에서 싹트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복음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확산되었습니다. 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강성해지면 마귀도 다른 곳에서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서 갖가지 계략을 꾸민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십자가 그 자체에서 시작되지만 마귀의 일들은 십자가 없이 시작된다는 점을 안다면,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누가 하나님의 일을 어렵게 하고 방해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br/>&nbsp; 우리는 누가 진리를 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마귀 안에는 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요 8:44). 마귀 안에는 진리가 없는데 어떻게 진리를 말하겠습니까?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마귀는 거짓말과 살인행위로 진리를 짓밟아 뭉개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40에서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46에서는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리를 말하는데 안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37에서 『진리에 속한 자는 누구나 나의 음성을 듣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배격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앞으로는 진리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숫자로, 투표로 결정 날 것 같습니다. 많이 모이면 정통이 됩니다. 이것이 속임수입니다.&nbsp; <br/>&nbsp; 이스라엘에서 사도들이 행했던 사도의 표적들(고후 12:12)이 왜, 언제 끝났는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자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서부터 끝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자신이 왕이시고 메시야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인데 그들이 천국복음을 거절함으로써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가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기적을 행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이 실라나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했던 62년에서 64년경까지는 표적이 행해졌지만 그때 이후로는 사도들의 표적이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단의 은사주의 사기꾼들이 거짓 은사로 기적을 행한다며 사람들을 모아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짜 이적, 곧 십자가 없는 복음으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br/>&nbsp; 우리가 체험한 참다운 기적은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 믿음을 행사할 때 성령님에 의해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이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하는데 물로 태어난 사람들이 종교행위를 한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요 3:8). 뿐만 아니라 복음은 구원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그 결과들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들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믿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20:31).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첫째 조건은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행사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믿음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십시오. 그들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거역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거역하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nbsp; <br/><br/>&nbsp;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br/>&nbsp; II. 은혜로 받습니다(엡 2:8a).<br/>&nbsp; 은혜란 율법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직 은혜를 베풀 수 없는 한 민족에게 일정 기간 동안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규례들과 나의 명령들을 지키라. 어떤 사람이 이것을 행하면 그는 그것들로 살리라. 나는 주니라』(레 18:5).&nbsp;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성경대로 완벽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땅 위에 한 명도 없느니라.』(전 7:20)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만일 인간이 그리스도의 피 없이 다른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헛되이 죽으신 것이고 성경은 무가치한 것입니다(갈 2:21; 3:11).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라』(요 1:17).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느니라』(롬 10:3,4).<br/>&nbsp; 인간의 걸레 같은 자기 의로 하늘 나라에 가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은혜에다 무엇을 덧붙이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9)고 했습니다. 『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행위로 된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롬 11:6).<br/>&nbsp;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어 놓은 은혜를 저버리고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새벽기도, 철야금식기도, 방언, 영세, 세례, 침례, 병 고치고, 귀신 쫓고, 갖가지 헌금 등으로 이교도들의 종교습관을 본받으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는 자들을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마 7:22,23).&nbsp; <br/>&nbsp;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거리설교나 구령을 하지 않습니다. 이 일이 주님의 일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섬김에는 보상이 있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섬김에는 보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성도의 의무를 다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믿음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애쓰는지 보십시오. <br/>&nbsp;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어도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며, 의롭고, 순수하고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시 19:7,8, 롬 7:12).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는 의를 요구하셨으나 은혜 아래에서는 의를 주십니다.&nbsp; 우리가 무슨 선하고 큰 일을 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일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한 번 받으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것입니다(요 5:24).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nbsp; <br/><br/>&nbsp;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br/>&nbsp; III.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엡 2:8b).&nbsp; <br/>&nbsp; 하나님의 선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일하지도, 애쓰지도, 땀흘리지도 않고 거저 받는 것입니다. 이 선물은 손으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으로 믿고 받는 것입니다.<br/>&nbsp;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지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거리에서 설교할 때 “여러분 가운데 죽지 않는 사람은 이 복음이 필요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복음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복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죽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반드시 죽을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몇 년, 몇 개월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겠다는 제안을 하시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그것도 공짜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죄가 인간에게 침투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죽게 된 것인데 그 저주를 거두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구원 계획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법을 스스로 위반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nbsp; <br/>&nbsp; 이제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이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마귀와 손잡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간음이라고 표현하시며 『나 주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0:5).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마귀의 손을 잡은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마귀와 손을 잡는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해서 사망이 온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절망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롬 6:23). 이것은 종교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교회에 다니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 속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죄 없는 생명으로 바꾸시려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인간들은 이 점을 오해하여 거절하며 생을 마감하고, 쓸데없는 짓만 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요 12:48). 하나님께서는 다른 조건을 제시하시지 않습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br/>&nbsp;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것보다 종교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주관, 자기 고집, 자기 의를 내세운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죄에 대한 해결책을 성경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다 자기 행위를 덧붙이는 자들은 복음을 욕되게 하는 자들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인간이 도울 일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겠습니까? 인간은 은혜의 선물을 공짜로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nbsp; BB<br/><br/>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A HREF="http://www.kjv1611.or.kr" TARGET="_blank"  rel="nofollow">www.kjv1611.or.kr</A>)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Mon, 14 Nov 2016 16:16: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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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자세 (에베소서 1:7-10)</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2/%EA%B7%B8%EB%A6%AC%EC%8A%A4%EB%8F%84%EC%9D%B8%EC%9D%98-%EC%84%B8-%EA%B0%80%EC%A7%80-%EC%9E%90%EC%84%B8-%EC%97%90%EB%B2%A0%EC%86%8C%EC%84%9C-17-10/</link>
<description><![CDATA[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125명의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다가 발각되어 1년간 정학 처분을 받게 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합격은 해야 되겠고 실력은 없으니 수능에서부터 토익(TOEIC), 토플(TOEFL), 공무원 시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부정행위가 난무한 세상입니다. <br/>&nbsp; “성공하려면 노력하라,” “건강하려면 운동하라,” “알려면 공부하라,”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등 이러한 슬로건들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 말씀의 원칙에 일치합니다.<br/>&nbsp; 좀더 세밀히 검토하면, 세상의 모든 부정과 부패는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지위에 앉아 일하는 체했기에 야기된 것입니다. 외무부 특채, 낙하산 인사, 각종 선거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공공기관의 기관장 자리를 주고, 또 이사장 자리도 줍니다. 이들은 국민의 표로 정권을 잡는데, 당선에 대한 감사 표시를 국민들이 아닌 선거운동원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보답합니다.<br/>&nbsp; <br/>&nbsp; 그러나 이런 부정이 통하지 않는 곳이 몇 곳 있습니다. 기술자가 양성되는 곳들, 파일럿(항공기 조종사, 선박 기관사)은 부정행위가 이름을 내밀 수 없습니다. 각종 장인들, 연주자들, 문인들, 프로 운동선수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설교자들과 성경 교사들, 즉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부정행위로 양성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부정하게 목사가 된 자들이 진리의 영역을 더럽혔기에 천국 문을 닫아 버려서 그들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마 23:13).<br/>&nbsp; 세상일에 부정부패가 발각되면 지상에 사는 동안만 감옥에서 잠시 고통을 당하게 되지만, 영적인 일을 부정한 방법으로 행하게 되면 지옥의 형벌을 영원히 받아야 합니다. 그런 범법자들은 영원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계명을 수용할 영적 공간이 그들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계명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가식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많은 교인들이 헛된 짓을 하면서 영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사는데,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심합니다.<br/><br/>&nbsp; 도대체 왜 가짜 그리스도인들과 가짜 목사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서 자기들의 의를 내세웠기 때문입니다(롬 10:3). 말하자면 부정행위를 구원받은 것으로 안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성령님에 의해 인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엡 1:13). 하나님의 승인 없이 목사에게서만 인정을 받는 것은 가짜 인증서입니다.<br/>&nbsp; 이 설교는 순수한 마음, 선한 양심, 가식 없는 믿음에서 나온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자세에 관한 설교입니다. 이 세 가지란 앉고, 행하고, 서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 형제가 쓴 &lt;좌행참&gt;(坐行站)이라는 책이 있는데, 저도 1978년 12월에 그 책을 읽고 여러 면에서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그 책대로 설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br/><br/>&nbsp; 성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자세란<br/>&nbsp; I. 앉는 것입니다(엡 2:6).<br/><br/>&nbsp; 죄인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했으면 대략 38가지의 변화가 생기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일은 믿는 성도를 자녀로 입양해 주시어(엡 1:5) 죄들 가운데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또 함께 일으키시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상에 함께 앉히신 일입니다(엡 2:4-6).<br/>&nbsp;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셋째 하늘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우리의 기도에 중보하고 계시는데, 우리 개개인을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을 수 있게 우리의 위상을 높여 주셨습니다. 이런 종교가 또 있나 보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의 영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셋째 하늘에, 또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십니다.<br/>&nbsp;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어떤 죄인이라도 그가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인터넷 매체로부터 쉽게 접할 수 있는 음란 동영상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면서 사람들을 각종 성범죄자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 법이 맥을 추지 못하며, 사정기관들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어두컴컴하고 담배 연기로 자욱한 PC방은 범죄의 온상입니다. 술이 양심을 마비시키며,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절제의 빗장을 풀어 버립니다. PC방과 술집들, 나이트클럽 등이 육신의 죄들의 온상이라면, 각종 기도원들은 마귀가 역사하는 영적 범죄의 온상인 것입니다.<br/><br/>&nbsp; 죄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의 생애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옛날과 동일하고 아무런 변화나 반응 없이 무덤덤하다면 그는 입만 살았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정뱅이가 구원받았다면 술병을 깨트립니다. 노름 중독자라면 화투를 불태우고 돌아섭니다. 마약 중독자는 주사기를 빼 던지고 일어섭니다. 성도착증 환자는 성경을 읽고, 기도합니다. 사기꾼은 입에 자물쇠를 채우며, 사채업자는 통곡을 하게 되고, 죄인들은 참회합니다. 그 외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은 고쳐 나가며, 조폭은 자기 몸의 문신을 지우게 됩니다. <br/>&nbsp;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 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앉으면서 시작되어야 합니다(히 1:3). 주님 곁에 앉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이송오, &lt;영적 삶의 새로운 시작&gt;, 말씀보존학회 간). 그리스도인의 삶은 앉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진리는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거듭났는데 앉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붕 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속 방황하게 됩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으나, 정작 혼자 있게 되면 마귀의 방문이 시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데 빠지지 말고, 함께 일하며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br/>&nbsp; 앉는다는 것은 곧 정착을 말합니다. 나무가 심겨졌으면 땅에 뿌리를 내려야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사람도 정착해야 믿음이 진리에 뿌리내리게 됩니다. 잘못된 교회인 줄 알았다면 일어서서 나와 성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자랑합니까? 알곡은 없고 쭉정이만 많은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쭉정이를 자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일꾼입니까?<br/>&nbsp;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완성해 놓으신 그 일을 믿음으로써 시작됩니다. 십자가 밑에서 쉬는 것이 앉아 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앉아 있는 것이 구속 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데 부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br/><br/>&nbsp; 성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자세란<br/>&nbsp; II. 행하는 것입니다(엡 4:1-3).<br/><br/>&nbsp; 행하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 즉 함께 걷는 것을 말합니다(walk). 『두 사람이 동의하지 않고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암 3:3) 아기는 젖을 먹고 자라지만 다 큰 아이에게 젖은 이미 음식이 아닙니다. 소년에게는 빵과 야채, 지방, 고기가 필요합니다. 말씀의 빵과 적절한 음식을 먹어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게 되면 튼튼한 몸을 형성하여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는 체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육체가 튼튼해지면 정신력도 자라게 되며, 동시에 말씀을 골고루 먹으면 영적으로도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통해 건장한 영적 몸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 영적 장애인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년기에 배워야 하는 것은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엡 4:17,23; 5:8,10).<br/>&nbsp; 그리스도인이 영적 체력을 갖추지 못하면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행동에 옮기지 못합니다. 골고다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그날의 제자들처럼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주님의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삽니다.<br/>&nbsp; 걷는 일은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걸으면 건강해집니다. 우리의 걷는 일은 세상 사람들의 걷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혼자 걷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을 수 있으려면 먼저 혼자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br/>&nbsp; 걸을 수 있는데도 앉아 있으면 퇴화되어 장애인같이 됩니다. 건각(健脚), 즉 다리를 튼튼히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저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주일에 세 번 개화산-치현산을 걷습니다. 족저근막염을 앓다가 2010년 가을 낫게 된 이래 지난 주까지 308회 걸었습니다.<br/>&nbsp;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길이신 주님으로부터 이탈했다면 잘못된 행보입니다. 잘못된 길은 아무리 멀리 갔다 하더라도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목사들은 길이 아닌 길을 너무 멀리 가 버렸습니다. 그들의 복음이 잘못된 길을 제시하였기에 너무나도 멀리 가 버린 것입니다. 돌아와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너무 늦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간 쌓인 쓰레기를 치우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들이니라』(잠 14:12; 16:25). 한국 개신교가 가는 길은 다 망해 버린 길이었습니다.<br/><br/>&nbsp;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주님을 증거하고, 강건하고 담대하게 주님과 동행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사람은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행함이 없는 사람은 위선자에 불과합니다.<br/>&nbsp; 목표가 없는 행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행보, 진리와 무관한 행보는 무익한 일이기에 아무리 열심히 행했다 해도 인생의 낭비요 방황일 뿐입니다. 낭패인 것입니다. 그런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처럼 살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br/>&nbsp; 사도 바울의 행보를 기억하십시오!(고전 9:23-2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좇아갈 뿐이라』(빌 3:14). 성경대로 믿는 길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br/>&nbsp; <br/>&nbsp; 성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자세란<br/>&nbsp; III. 일어서십시오(엡 6:10,11).<br/>&nbsp; 우리 찬송가 &lt;영광을 주께&gt; 375장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의 영어 원제목은 &#034;Stand Up, Stand Up for Jesus,&#034; 곧 주님을 위해 일어서라는 말입니다. 383장 “일어나 일어나라”의 창작 배경이 된 구절은 『깨어 있으라. 믿음 안에 굳게 서라. 남자답게 처신하라. 강건하라.』(고전 16:13)입니다.<br/>&nbsp; 그리스도인이 되면 마귀를 대항하여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됩니다. 그러한 군인이 되려면 훈련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싸움은 놀이가 아닙니다.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나의 부대가 패배하게 되며, 심하면 국가가 위태롭게 됩니다(저는 제대로 군인 정신을 갖춘 장교들을 좋아합니다). <br/>&nbsp; 그리스도의 군사가 훈련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체력을 단련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적과 아군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적과 아군을 식별할 수 없는 한국 교회들은 적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적과 동침해 버렸습니다. 영적 분별 능력이 없는 교인들은 무용합니다.<br/>&nbsp; 그 결과 적이 아군 같고, 아군이 적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그렇습니다. 그 안에서 누가 이단인지를 차마 말할 수 없기에 그들은 이단들을 아군으로 수용했고, 그래서 틀린 것도 없고 안 틀린 것도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방언하는 은사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 했다가 국민일보가 생기자 순복음교회 밑으로 들어가 같이 방언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순복음을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순복음이 복음주의라고 떠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br/>&nbsp;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부패한 교회가 한국 교회입니다. 다른 나라는 소수가 이단들이지만, 이 나라는 다수가 이단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새벽기도회를 하는 교회들은 모두 이단입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새벽기도회를 하는 국가입니다.<br/><br/>&nbsp;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들과 싸우느라 악전고투하고 있는데,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면 그게 어디 교회입니까? 더군다나 마귀의 진영에서 마귀 짓을 하고 있었다면 그게 교회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아군 진영으로 들어와 아군에게 총을 쏘고 있다면 그게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정동수, 김영균, 이재명, 윤여성 등이 그런 자들이며 그들 밑에서 하수인 노릇 하는 자들이 마귀의 군사들입니다.<br/>&nbsp;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엡 6:11). 그리스도인이 일어서는 목적은 적과 싸우기 위해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영적 전투에 투입된 군사가 일어서 있지 않고 앉아 있다면 그는 무익한 군인입니다. 그는 전신갑옷을 입을 필요도 없습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그가 나서면, 성경의 모든 명령이 그에게서 멈춰 버리거나 그가 다른 사람을 오도(誤導)하게 됩니다.<br/>&nbsp; 6.25 전쟁에서 가장 불운한 미군은 미 24사단장이었던 윌리엄 딘(William Dean) 소장이었습니다. 그때 한국 정부는 부산으로 내려간 뒤였으나, 그가 받은 명령은 대전 지구에서 남하하는 인민군을 최대한 저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세가 너무 불리해지자 1950년 7월 20일 그는 대전에서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br/>&nbsp; 부상병을 자기 지프차에 태우고 후퇴하는데 병사가 물을 달라고 애원하자 물을 구하러 산을 내려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실신했습니다. 36일간 산속을 헤매다 전북 진안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이질을 앓으면서 하루에 36회나 설사를 했습니다. 그는 모진 포로 생활을 겪고 1953년 9월 포로 교환 1호로 풀려났습니다. 후에 그의 회고록에 “기나긴 세월을 앉아서만 사는 경우,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를 알게 된다.”고 기록했습니다.<br/>&nbsp; 포로가 된 그에게 인민군은 의자에만 앉아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바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군인에게 “싸울 수 없다”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br/>&nbsp; 결론적으로 <br/>&nbsp; 잘 믿어도 그만, 잘못 믿어도 그만이라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잔뜩 써서 믿으라고 인간에게 성경을 제시했다는 말입니까?<br/>&nbsp;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게 되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미치지 않았기에 870만 명이나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닙니까?<br/><br/>&nbsp; 하나님께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상 생명을 지닌 자들에게 영원을 대비하라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가정도 우연도 아닌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딛 1:2). 주님께서는 믿으려면 제대로 믿으라고 우리에게 이 권면을 주셨습니다.<br/>&nbsp; 성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자세는 십자가 밑에서 쉬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일어서서 마귀를 대적해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면 성도로서 잘하는 것입니다.&nbsp; BB<br/><br/><br/>&nbsp;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A HREF="http://www.kjv1611.or.kr" TARGET="_blank"  rel="nofollow">www.kjv1611.or.kr</A>)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Sun, 26 Jun 2016 23:23:1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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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설의 교훈을 배우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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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고린도후서 4:8-15<br/><br/>&nbsp;역설(Paradox)이란 사람이 수용해야 할 의견에 반대되는 제안을 말합니다. 얼핏 듣기에는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같이 들리지만, 그 안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에는 역설들이 많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사 55:8-11). 가뜩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설 앞에 서게 되면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깜깜할 수밖에 없습니다.<br/>&nbsp;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어쓰신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과, 거듭났어도 아직 믿음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깜깜하고 답답한 책입니다. 마치 말라 버린 사탕수수대를 씹고 있는 것과 같이 아무런 흥미도 없고 무익한 일로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도 않고, 성경을 믿을 수도 없는 자들이 설교자가 되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바로 그런 자들에게서 엉뚱하고 어리석은 짓들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자는 거짓 교리를, 어떤 자는 무당짓을, 어떤 자는 지난 주에 보았던 TV 드라마를, 어떤 자는 만담을 하게 됩니다. 그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8백만 명이 넘고, 그런 목사들이 12만 명이 넘으며, 그런 교회들이 6만 개가 넘습니다. 이것은 2008년 문화관광부 통계입니다.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게 보고하라 했다면 20%는 부풀렸을 것입니다.<br/>&nbsp; 여러 가지 역설들이 담긴 성경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자세와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연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 아는 영적 세계의 실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보이는 것으로만 그 가치를 인정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주장하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의 의견과 같이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는 것들을 아는 체하며 교회를 운영합니다. 하지만 그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세월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깨닫는 것이 없게 됩니다.<br/>&nbsp;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성경을 통해 주님을 믿고 있으며, 성경 말씀이 기록된 대로 성취되고 실현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늘 낙원을 본 적이 없고, 지상의 천년왕국도 보지 않았지만, 그대로 실현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지녔기에 역설의 교훈을 이해할 수 있고, 믿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믿고 잠든 믿음의 선배들이 휴거 직전에 부활할 것도 확신하며, 우리도 잠들면 부활하리라고 확신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영”입니다. 믿음의 영을 지닌 사람들은 성경을 소중히 여기지만, 영이 없으면 성경을 무가치하게 여깁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현 세상을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그들은 그들의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br/><br/>&nbsp; 역설의 교훈을 배우라<br/>&nbsp; I.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8-10절).<br/>&nbsp; 우리는 사면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종이었다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바뀌면, 전에 마귀의 편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위치에서 입장이 바뀝니다. 전에 마귀의 진영에서 한패였던 자들이 모두 대적이 되기에, 그들에게서 날아오는 갖가지 불붙은 화살들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야 하는 고난이 있게 됩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박해라 하는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가정 안에서의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고난은 피할 수도 있지만 가족, 특히 부부간, 부자간, 모녀간, 형제간은 피할 수도 없습니다(마 10:34-39). 가장 친한 사람들 간에 믿음이 다르면 그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만든 갈등이 전쟁입니다. 이런 고난이 없으려면 가족 전체가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 함께 성장해야 하는데, 영적인 일에는 늘 마귀의 공격이 상존하게 되어 사람의 뜻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에 우리도 마귀의 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쉬 이해됩니다. 하지만 오래 걸리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한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요일 4: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때문에 십자가가 나오고, 피가 나오고, 죽음이 나옵니다. 모든 종교가 다 같은 종교라고 생각하십니까?<br/>&nbsp;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공격은 개인이나 가정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왕따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거기다가 모슬렘 국가들과 독재 국가들, 공산주의 국가들, 카톨릭 세계, 힌두교가 교회들을 박해해 오고 있습니다. A.D. 70년 이래 유대인들이 당한 극심한 박해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카톨릭이 그리스도인인 체했기에 모슬렘들이 그들을 대항했고, 오늘날 개신교회들에게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수단, 르완다, 동티모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모두 카톨릭이 그리스도인들로 오해되어 야기된 갈등들입니다. 종교가 전쟁으로, 종교가 국제정치화된 지 오래입니다.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여 개신교회들이 교회 통합 운동을 벌여, 영적인 문제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영적인 문제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런 통합 운동은 인간적 방법으로 마귀의 공격을 피해 보려는 수고일 뿐, 하나님의 계획은 아닙니다. 그런 행위는 오히려 진리를 말살시키려는 마귀의 책략입니다. 8,9절에서는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이 누구에게 해당됩니까? 교회로 돈 버는 자들입니까?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들은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br/>&nbsp; 헨리 조윗(Henry Jowett) 박사는 “대가 없는 사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헨리 마틴(Henry Martin)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재였습니다. 그는 인도, 이란, 서남아시아를 돌면서 힌두어, 페르시아어, 아람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당시 영국 대사도 거절한 일을 페르시아 왕에게 사정하여 성경 보급을 허락받았지만, 31세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은 미국 보스톤 출신으로, 버마(미얀마)에 가자마자 1년 6개월 동안 투옥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버마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오늘날 버마 교회들은 그의 후예들입니다. 인도에서 성경을 번역했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35년간 번역했던 성경 원고가 불타 버렸습니다. 그의 친구가 그에게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니, 다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스코필드(C.I. Scofield)는 두 번이나 그런 재앙을 당했습니다. 한 번은 원고가 불에 타고, 한 번은 30년간 작업했던 원고를 분실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순교자들의 피와 박해, 고통, 고독, 아픔, 슬픔으로 자라는 것이지, 거짓말, 탐욕, 개인의 욕망 실현, 진리를 흉내내는 것으로는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박해는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공격이 없는 사역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br/><br/>&nbsp; 역설의 교훈을 배우라<br/>&nbsp; II.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려고(11-13절)<br/>&nbsp;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면, 자신을 위한 섬김은 없었습니다(고전 9:4-6; 15:30-34, 고후 11:23-28). 사도 바울은 왜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를 우리들로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외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생명이 그의 육신에 나타나게 하는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전 생애는 예수님을 위해 받은 고난을 통해 그의 죽음, 즉 자아에 대한 죽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고전 15:31, 갈 2:20, 고후 5:15). 지난 1,900년 이상 많은 순교자들과 자아를 부정한 선교사들(허드슨 테일러, 윌리엄 캐리, 헨리 마틴, 저드슨, 고포드, 패이튼 등)과 신실한 설교자들의 신실한 믿음과 헌신들, 섬김들은 거의 사도 바울에게서 배운 것이며, 오늘날까지 이어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섬김도 성경대로 믿었던 사역자들로부터 이어진 것입니다. <br/>&nbsp; 그리스도인이 받았던 고난이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죄의 삶이나 호의호식, 죄의 세상으로부터 오는 칭찬은 그가 진리와 무관하게 살았다는 오명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잘 살았다는 것은 세상의 권세자들, 부자들, 유명인사와는 반대의 위치에서 반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은 누구이며, 생명을 내놓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믿음이 자랄 수 있겠으며, 목적을 이끄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면서 예수님을 전하려는 자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엉터리들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일하면서 받았던 고난이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물질의 풍요와 죄의 삶이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겠습니까? 진리와 무관하게 살았는데 고난이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그의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너희가 잠깐 고난을 받은 후에 너희를 온전케 하시고, 견고케 하시며, 힘을 주시고, 확고히 하시느니라. 그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벧전 5:10,11). 로마카톨릭이 무슨 박해를 받았습니까?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무슨 박해 받을 일을 했습니까?<br/>&nbsp; 12절에서는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나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br/>&nbsp; 우리의 새 생명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담이 에덴에서 지었던 죄에 대한 진노를 받지 않고 혼자 사시겠다고 거절하셨더라면, 그분 혼자만 살았을 것이고, 아무도 새 생명을 받아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모두 다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면서 교회나 다니려 한 사람들은 다 멸망하고 맙니다.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졌기에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 한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믿으므로 말하노라』(고후 4:13).<br/><br/>&nbsp; 역설의 교훈을 배우라<br/>&nbsp; III. 겉 사람은 썩어져도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11-16절).<br/>&nbsp;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싫어하면 속 사람은 사라지고 겉 사람만 점점 비대해집니다. 주님은 늙어가고 병들고 죽게 될 겉 사람과 교제하거나 함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라 부르십니다(행 20:28). 주님께서 거듭난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성별하셨을 때 교단 교회로 성별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로 성별하십니다. 주님은 인간들이 세운 교회를 자신의 몸 된 교회라 부르지 않으십니다. 교단 교회들은 성별된 교회를 이단이라고 부르면서 교회협의회에 가입하면 정통이라 부릅니다.<br/>&nbsp;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보이는 것들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 사역입니까? 이 세상을 잘 살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을 잘 살라는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음악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들이지만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영원히 사는 세상을 노래합니다.<br/>&nbsp; 성경의 역설들을 보십시오.<br/>&nbsp; ① 온유한 자가 땅을 유업으로 받습니다(마 5:5). 땅은 정복한 자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땅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땅은 그것을 “지으신 분”의 소유입니다.<br/>&nbsp; ② 원수에게 잘 대해 줌으로써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롬 12:20,21). 선으로 악을 이기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br/>&nbsp; ③ 다스리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막 10:45). 큰 자가 되려면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면 높아집니다(마 23:12).<br/>&nbsp; ④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평범한 진리).<br/>&nbsp; ⑤ 종이 됨으로써 자유롭게 됩니다(롬 6:17-22; 8:2).<br/>&nbsp; ⑥ 어리석게 됨으로써 현명하게 됩니다(고전 1:20,21)<br/>&nbsp; ⑦ 『영광과 오욕으로써 또 악평과 호평으로써 그리하였고 속이는 자들 같으나 진실하며,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으며, 매를 맞았으나 죽지 아니하였고,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느니라』(고후 6:8-10).<br/>&nbsp; ⑧ 약한 가운데 영광을 얻습니다(고후 12:5).<br/>&nbsp; ⑨ 패배함으로써 승리합니다(고후 12:7-9).<br/>&nbsp; ⑩ 약할 때 강합니다(고후 12:10).<br/>&nbsp; 영적인 면이 육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육체는 보물을 담는 질그릇입니다. 그릇은 튼튼하고 보기 좋은데, 담을 보물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겉은 그럴싸한데 사랑의 향기를 내뿜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의 인격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참다운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br/>&nbsp; 모든 질병은 다 죄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사탄은 우리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줄 수 있습니다. 이름 모를 질병, 고난, 시련, 역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몸이 아프다는 것으로 섬김을 중단한다는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상대를 사랑할 수 있고, 부모를 섬길 수 있으면, 하나님도 섬길 수 있습니다. 사지(四肢)가 없는 사람이 교사가 되고(일본), 눈 없는 사람이 8년간의 노력 끝에 학위를 받고, 의족을 한 사람이 육상 400m 선수로 뛰고, 소경이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손이 없어 발로 그림을 그리고, 손발이 없으니 입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양손이 없는 사람이 발로 손목시계를 고칩니다. 수화로 복음을 전합니다.<br/>&nbsp;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곧 후회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생명을 전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는가 보십시오! 다만 방법을 신중하게 모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빈둥거리며 살게 되면 전도지도, 구령도 소홀히 합니다. 기도도, 선교 지원도, 교회 출석도 게을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외톨이로 빈둥거리다가 생을 마칩니다.&nbsp; <br/><br/>&nbsp; 결론적으로<br/>&nbsp; 사도들과 주님의 신실한 일꾼들은 말씀의 능력을 알았기에 그들의 삶을 우리들에게 전수해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친구, 가족, 후대들에게 무엇을 전해 줄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선배들이 카톨릭 성직자들처럼 거드름 피우고 할 일 없이 살았더라면 우리들에게 무슨 교훈을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이 시대의 교단 교회나 은사주의자들처럼 쓸데없는 짓을 하고 살았다면 무슨 교훈을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역설은 깊은 뜻을 지닌 교훈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역설의 교훈을 배워 영적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nbsp; BB<br/><br/>&nbsp;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A HREF="http://www.kjv1611.or.kr" TARGET="_blank"  rel="nofollow">www.kjv1611.or.kr</A>)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Sun, 26 Jun 2016 21:28:2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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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부활의 정석 (고린도전서 15:42-50)</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2/%EB%B6%80%ED%99%9C%EC%9D%98-%EC%A0%95%EC%84%9D-%EA%B3%A0%EB%A6%B0%EB%8F%84%EC%A0%84%EC%84%9C-1542-50/</link>
<description><![CDATA[고린도전서 15:42-50<br/><br/>&nbsp;성경적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종교라면, 그것을 신봉한다고 해서, 또 신봉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입니까? 하지만 무지한 인간들은 부활이 없는 종교를 붙들고 삽니다. 그런 종교들은 현세에서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면 다음 세상에서 보상을 받게 된다고 역설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 누구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게 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고후 5:10, 전 12:13-14). 성경이 없었다면 인간의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모르게 됩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하나같이 성경으로부터 한두 가지를 빼내어 인간의 생각과 결합시켜 내놓은 것들입니다. 그런 종교들은 사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따라가는 것입니다.<br/>&nbsp; 불교나 힌두교의 윤회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이 죽어 곤충, 물고기, 새, 짐승 등으로 태어나는데, 살아 있는 동안에 선을 많이 행하면 그보다 더 고등한 동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돕기로, 기부, 선행으로 이어졌고, 돈을 많이 내면 신문과 방송에서 소개되기도 하고, 정부나 자치단체에서 포상하기에 이에 맛들린 사람들은 일종의 중독처럼 습관적인 기부자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매”라는 이름으로 성금을 거둬 “사랑의 온도계” 온도를 높여 보자고 했던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이를 악용해 도둑질을 했습니다.<br/>&nbsp; 모슬렘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에서 죽으면 즉시 낙원으로 간다고 속입니다.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에 속해야 연옥의 더 좋은 자리로 간다고 속입니다. 이것은 100% 거짓말입니다. 그런 거짓 종교들이 생겨난 5-6세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죽어 계속 지옥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60억 명이 넘는 인간들이 자기가 선정한 종교를 붙들고 있다가 죽어 지옥으로 갑니다. 그들이 지옥에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단 한 가지, 곧 성경의 진리를 알고 믿어 따라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가름납니다. 성경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중 1%도 채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었다가 부활할 것을 성경대로 믿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부활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나니 바로 지금이라. 듣는 자들은 살리라...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무덤들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저주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5,28-29). 본문은 성도가 죽으면 어떻게 살아나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br/><br/>&nbsp; 죽은 성도가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br/>&nbsp; I. 타고난 몸으로 심겨져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집니다(42-44절).<br/>&nbsp; 농사를 지어 본 사람들에게 부활을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나의 복음대로 다윗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셨음을 기억하라』(딤후 2:8).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벧전 1:23-25).<br/>&nbsp; 피조물들을 먹여 살리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농지가 아무리 넓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이 아니라 먼지일 뿐입니다. 습기 없는 땅은 쓸모가 없습니다. 화장터에서 불태운 시체는 몇 줌 먼지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농사에서 산 교훈을 많이 터득할 수 있습니다. 젖은 땅에 씨를 심고 흙으로 덮으면, 그 씨앗은 땅 속에서 죽어 없어지고 그 대신 거기서 새싹이 돋고, 대가 생기고, 이파리가 달리고, 꽃이 피면, 열매가 맺힙니다. 씨를 뿌렸더니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가뭄으로 저수지의 물이 말라 버렸는데, 비가 내려 물이 차면 물고기가 살아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 속에서 짐승들이 동면하듯이 물고기들도 땅 속에 박혀 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br/>&nbsp;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의 죽음을 한 알의 씨에 비유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영생에까지 보존하리라』(요 12:24-25).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열매들이 되셨느니라.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려 함이라』(고전 15:20-22). 씨가 아닌 것을 심었으면 헛수고한 것이 됩니다. 진리와 무관한 종교행위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대로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교단 교리로 묶어 두는 것은 또 하나의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이 땅에도 무수한 엉터리들이 커다란 교회 건물로 기독교란 종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 참다운 복음의 진리가 선포되어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있는가 보십시오!<br/>&nbsp; 39-41절에서 성경은 육체라고 하여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짐승, 물고기, 새 등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윤회”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성경에서 따 온 것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타고난 몸은 죽으면 썩어서 없어져 버리지만, 거기서 나오는 새 열매는 우리가 부활할 때 입게 될 새로운 몸입니다. 40절에서는 몸은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사들, 스랍들, 그룹들, 심지어 마귀들까지도 하늘에 속한 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땅에 속하나, 휴거될 때 입을 몸은 하늘에 속한 몸이 됩니다. 이 몸이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입니다. <br/>&nbsp; 42절에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겨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으켜지며』라고 말씀합니다. 부활한 몸은 썩지 않는 몸입니다(42-44절). 우리가 부활하여 입게 될 몸은 영원토록 부패하여 형체가 망가지는 몸이 아닙니다. 다윗왕은 이 점을 깨달았습니다(시 16:8-11). 성령님께서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25-28에서는 갈릴리 ”어부“가 이것을 성령으로 충만하여 설교했습니다.<br/>&nbsp;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별짓을 다합니다. 미이라를 만들고, 냉동인간을 만들고, 시체에 방부제를 넣고 일 년에 한 번씩 방부제를 바꿔 넣습니다. 과학은 인간 생명을 100세까지 연장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은 “자기 몸으로 심겨져서 새로운 몸을 입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믿지 못합니까? 무신론자로 살려면 그리스도인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1800년대 유럽의 평균 수명은 37세이고, 1900년 초 미국인의 평균 수명은 45세였습니다. 조선왕조 왕들의 평균 수명은 46세,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37.4세였는데, 요즘 자연사하는 평균 수명은 86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만족할 수 있습니까?<br/><br/>&nbsp; 죽은 성도가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br/>&nbsp; II.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신 주님이십니다(45-49절).<br/>&nbsp; 첫 사람 아담, 우리 조상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닌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었습니다(창 2:7). 개역성경은 혼이 아니라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고전 15:45 참조). 개역성경대로 믿는다면 첫 사람 아담은 영, 혼, 몸을 입은 인격체가 아니라, 귀신 같은 영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개역성경을 가지고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친다는 자들이 성경을 알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른 교리는 접어 두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 교회협의회로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바른 성경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체합니다. 제도화된 교회, 제도화된 종교들(카톨릭, 모슬렘, 불교, 유교, 도교)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설교자나 성경교사가 거짓되이 설교하고 가르치면 어떻게 됩니까? 오류를 퍼트리면서 하나님의 일인 양 떠벌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이 땅에서 수십 년간 자행되어 왔습니다. 그런 자들이 사람들을 많이 모으면 정통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이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개역성경을 가진 자들이 지금까지도 거짓되이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교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 밑에서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겠으며, 자기가 죽으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입을 것이라고 믿고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안 사람들이 태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br/>&nbsp; 첫 사람 아담은 흙으로 지음받았습니다. 흙에다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더니 살아 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몸과 혼은 있지만 영이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영이 죽었기에 진리의 말씀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자기 몸으로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성경의 중요성도 모릅니다. 둘째 사람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몸인데, 하늘에서 나신 주님이십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가 흙으로 빚어진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거듭나면 하늘에서 나신 주님의 형상도 입게 됩니다(롬 8:29, 빌 3:21, 요일 3:2). 개역성경으로 이 점을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거짓말을 하면서 교회놀이를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이며 목자입니까? 그런 자들 가운데 인정해 주고 존경할 만한 목사가 있겠습니까? 제가 왜 그들을 호되게 꾸짖는지 여러분들은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무려 3만 6천 군데나 오류가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만도 2천 단어가 삭제되어 있습니다.<br/>&nbsp; 성경대로 설교하게 되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입게 될 영적인 몸은 33세 반의 남성이었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남자는 더 이상 남자의 속성을 갖지 않을 것이며, 여자도 더 이상 여자의 속성을 갖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설교하는 교단 목사가 이 땅에 한 명도 없습니까? 성경을 믿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 지식으로 판단해 보니 감히 말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교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갈 1:10). 대다수 교회들의 흐름을 거역하는 이단이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되어 셋째 하늘에 맞는 몸을 입게 됩니다. “영적인 몸이요, 하늘에서 나신 주시니라.” 땅에 내려오면 어떻게 됩니까? 땅에 적합한 몸으로 살게 됩니다(계 7:16).<br/><br/>&nbsp; 죽은 성도가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br/>&nbsp; III.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50절).<br/>&nbsp; 종교로나 어떤 종교행위로 사후의 생을 보장받으려는 인간의 발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행위나, 인간들이 멋대로 세운 교회들이 거짓되이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체하는 것은 심판주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혈과 육을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로 칭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첫째가 이 혈과 육이고, 둘째는 고린도전서 6:9-10에 언급된 이들, 그리고 육신의 일들(갈 5:19-21)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br/>&nbsp;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갖가지 목적으로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로마카톨릭, 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 세르비아정교회, 알미니안정교회, 영국성공회 등과 종교개혁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국의 개신 교회들,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들,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 북유럽의 교회들, 미국의 무디(D.L. Moody), 피니(Charles Finney), 노리스(J. Frank Norris), 근본주의 교회들, 세계 선교의 주역들과 그 뒤를 이어 배교한 근본주의, 죽은 정통주의, 거짓 은사로 사람들을 미혹했던 은사주의 교회들, 잭 하일스(Jack Hyles) 교회들은 어떻게 되어 버렸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인간적인 발상으로 하나님의 일을 했다면 불로 태워 보고 시험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고전 3:12-13, 마 7:21-23).<br/>&nbsp; 빌립보서 3:21에서는 영적인 몸을 영광스런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달라지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영적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시기도 했고, 금세 사라지기도 하셨습니다(눅 24:31). 문이 잠겨졌는데도 방 안으로 들어오시기도 하셨습니다(요 20:19). 주님은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몸소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행 1:9). 우리의 부활할 몸도 주님과 동일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건물에서 들림받게 되면 콘크리트를 뚫고 올라가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4:39에서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이 이브를 처음 본 순간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니』(창 2:23)라고 했지만 첫째 아담도, 마지막 아담도 피를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피는 썩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피와 살이 결합된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요 3:3-5).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첫 번째 이적이었습니다. <br/>&nbsp; 거듭나지 않은 인간들의 교회놀이는 쓸데없는 종교놀이일 뿐입니다. 무천년주의 장로교, 후천년주의 카톨릭, 남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등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 땅에 천국을 수립할 수 있다고 속이는 집단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적으로 볼 때 이단들입니다. 상속받는다는 것은 구원받는 것처럼 은혜로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거리에서 설교도 하고, 구령하고, 사역에 참여할 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에는 보상이 있습니다(히 11:6).<br/><br/>&nbsp; 결론적으로<br/>&nbsp; 부활은 구원받은 성도가 누릴 최상의 복입니다(고전 1:18). 우리는 인간의 지혜로 사람들을 설득해서 교회로 데려와 돈 내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권면하신 것을 그대로 전달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들로 우리들처럼 구원받고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의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도 이룩될 수 없습니다. 오직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많아도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매 시대마다 동일합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정석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지 않으신다면 알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터넷으로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도 믿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부활의 소망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nbsp; BB<br/><br/><br/>&nbsp;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A HREF="http://www.kjv1611.or.kr" TARGET="_blank"  rel="nofollow">www.kjv1611.or.kr</A>)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Jun 2016 21:31:3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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