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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묵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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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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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께서 가지신 젊음의 이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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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가 그 표제이다. 이 시편은 “다윗”이 “다윗의 아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지만, 주님께서 “다윗의 아들” 그 이상이신 분임을 계시한다. <br/><br/>본 시편은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나이다.』(1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다윗은 두 하나님, 곧 『주』와 『주』를 언급하며 시를 시작한다. 『주』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에 해당되시고, 『주』는 “아들 하나님”에 해당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명령을 주시며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마 28:19) 하셨을 때, 『아버지』께서 『주』이시고 『아들』께서 바로 그 『주』이시다. <br/><br/>『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로 운을 뗀 1절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한다. 초림 때 주님께서 『너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라고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시자, 그들은 『다윗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마 22:42). 이에 주님께서는 『그러면 어찌하여 다윗이 영 안에서 그를 주라 부르며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였겠느냐? 그러므로 만일 다윗이 그를 주라 부른다면 어떻게 그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느냐?』(마 22:43-45)라고 물으셨다. 이는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다윗이 『주』라고 불렀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다윗의 아들』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기에(롬 1:3) 『다윗의 아들』(마 1:1)이신 것이 맞지만, 주님을 그 정도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에서 나오며, 또 다윗이 살던 고을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요 7:42)라는 말씀처럼, 다윗의 계보를 통해(마 1장) 베들레헴에서 나신 “메시아”(미 5:2)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메시아이신 주님을 영 안에서 『주』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예로 드심으로써, 주님 자신을 다윗의 아들 그 이상이신 『주』, 곧 “하나님”으로서 계시하신 것이다. 『조상들도 그들의 조상이며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롬 9:5).<br/><br/>의심 많은 도마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요 20:28)라고 고백한, 『참 하나님』(요일 5:20)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110:1에서 『주』라고 불리셨고, 마태복음 22:44에서 『주』로서 입증되셨으며,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주』이시고, 독자가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주』이시다. 겨울이 춥다 하여 태양이 식어 버린 것이 아니듯이, 『의의 태양』(말 4:2)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생의 겨울을 하늘의 온기로 감싸 주실 수 있는 위로의 『주』이시다. 바로 이 주님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 참으로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 13:8),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주』이시다! <br/><br/>『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1절)라는 말씀은 신약에서 직간접적으로 여섯 번 인용되었다(마 22:44, 막 12:36, 눅 20:42,43, 행 2:34,35, 히 1:13; 10:12,13).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으실 일은 “재림” 때 있게 된다. 본문 말씀은 “21세기의 바벨탑”인 UN(국제연합)을 극심하게 저주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들이 재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짓밟혀서 먼지를 핥을 뿐만 아니라(시 72:9, 사 49:23, cf. 수 10:24),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계신 그 “군사 독재자”의 발에 입맞추지 않는 자들은 그분의 철장에 얻어맞아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시 2:8-12, 계 2:26,27)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의로 통치하실 천년왕국에 여전히 “주님의 원수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능력의 막대기를 보내시리니 주의 원수들 가운데서 다스리소서』(2절). 주님께서 『위대한 왕의 도성』(마 5:35)인 예루살렘에서 그분의 능력의 막대기인 철장으로 다스리시는 천년왕국 기간에도 여전히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지닌 채 주님의 강력한 군사 독재에 불만을 품는 악인들이 있을 것이며(슼 14:16-19),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서 『주의 원수들』(사 26:11)이라고 말씀한다. 그 악인들은 주님의 공의가 땅에 있고 세상의 거민들이 의를 배우는(사 26:9) 천년왕국 때에 주님의 자비로운 은총 속에서도 의를 배우지 않을 것이며, 주님의 위엄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사 26:10). 그들은 천년왕국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주님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시기할 뿐인데, 그러한 자들은 천년왕국의 끝에 이르러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잠시 풀려나는 사탄이 일으킬 최후의 반역에 가담하다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삼켜지는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사 26:11, 계 20:7-9).<br/><br/>본 시편은 3절에 가서 “주의 젊음의 이슬”을 노래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들이 아침의 태로부터 오는 거룩함의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서 자원하리니 주께서는 주의 젊음의 이슬을 가지셨나이다』(3절). 대환란이 끝나고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영광스러운 “재림의 아침”(『아침의 태』)에(말 4:1-5, 삼하 23:4, 출 19:16, 시 49:14, 호 6:3),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때와 달리 그분의 권능으로 오실 것이다. 자신의 큰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렘 32:17) 분께서, 바로 그 위대한 권능으로 영원히 치리하기 시작하시는 것이다(시 66:7).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로 오시는 권능의 날이 이르면, 유대 백성들은 그 왕을 영접하여 『거룩함의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서』, 즉 거룩한 시온 산에서(사 24:23, 미 4:7), 거룩한 규범들을 가지고(마 5-7장, 사 2장), 거룩함을 요구하시는(슼 14:20,21) 거룩하신 왕께 자원하여 경배할 것이다. 『오 주여, 정녕, 주의 심판의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니 우리 혼의 사모함이 주의 이름에 있고 주를 기억함에 있나이다. 내 혼으로 내가 밤에 주를 사모하였으며, 정녕, 내 안에 있는 내 영으로 내가 일찍 주를 찾으리니, 이는 그때에 주의 공의가 땅에 있으며, 세상의 거민들이 의를 배울 것임이니이다』(사 26:8,9).<br/><br/>주님께서 세상의 거민들에게 의를 가르치며 땅을 공의로 통치하실 때 그분의 “젊음의 이슬”을 갖고 계실 것이다. “이슬”은 “아침”에 내린다. 즉 “재림의 아침”에 지니실 “젊음의 이슬”은 주님께서 원기를 회복하실 것을 뜻하는데, 이 점은 “연한 싹과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처럼 우아함도,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으셨던”(사 53:2) 상태로 고난을 겪으셨던 초림 때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젊음과 힘이 회복된 『경주하는 강한 남자처럼』(시 19:5)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들을 권세와 능력으로 제압하시는 것이다. <br/>“젊음의 이슬”은 교리적으로 중요한 표현이지만, 그 말씀을 읽는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귀한 교훈을 준다. 왜냐하면 주님을 섬기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젊음의 이슬”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br/><br/>“젊음은 인생의 특정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말이 있다. 몸은 젊지만 마음이 늙어 지팡이 짚고서 거동하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발의 노인임에도 마음에 늘 푸른 봄의 생명력이 움트는 사람이 있다. 한 해가 다 지나갔다고 죽음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새해의 “푸른 봄”을 자신의 “청춘”(靑春)으로 삼아 주님을 위해 어떤 잎을 틔우고 어떤 꽃을 피울까를 스스로 기대해 보는 성도, 그가 바로 팔십오 세의 나이에 “젊음의 이슬”을 지녔던 “칼렙”과 같은 사람이다.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래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동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십오 년간을 나로 살게 하셨나이다. 이제 보소서, 오늘에 내가 팔십오 세니이다. 나는 모세가 그 날 나를 보내었을 때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강건하며 나의 힘이 그때처럼 지금도 강건하여 전쟁을 위하여 나가고 들어올 수 있나이다』(수 14:10,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은 “젊음의 이슬”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다시 오실 주님께서 『젊음의 이슬』(3절)을 지니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나이를 불문하고 “영적 젊음”을 유지함으로써 재림을 대비해야 하는데, 겉 사람은 썩어질지라도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짐으로써(고후 4:16) 그 일을 이룰 수 있다.<br/><br/>세월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에는 물리적 쇠퇴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으며, 어떤 외부 힘도 영향을 줄 수 없다. 이러한 생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젊음의 원기로 가득하여 젊은 날의 신선함을 지닐 수 있다. 저물어가는 세상에 일말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곧 떠오르실 『의의 태양』(말 4:2)을 향한 기대로 마음은 무한히 팽창한다. 오직 주님만을 앙망하여 자기의 힘을 새롭게 한다면(사 40:31) 청년 때의 열매를 노년에도 맺을 수 있으며(구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 언제나 영이 강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br/><br/>현 세상은 죄로 죽어 있다. 하지만 재림 때의 세상은 아침 이슬에 젖어 맑게 반짝이는 숲처럼 살아나 영롱하게 빛날 것이다. “젊음의 이슬”을 가지신 분께서 오시는데 왜 사막이 장미처럼 피어나지 않겠는가!(사 35:1)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리니 그들이 나의 죽은 몸과 함께 일어나리이다. 흙에 거하는 너희는 깨어서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수풀의 이슬 같으니 땅이 죽은 자들을 던져 버릴 것임이니이다』(사 26:19). 이와 같이 세상에 생명을 주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불리신다. 『주께서 맹세하셨으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라. “너는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4절). 『이 멜키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브라함도 전체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으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 곧 화평의 왕이라』(히 7:1,2).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멜키세덱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동시한 소유한 인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주님께서도 선지자(초림)와 제사장(교회 시대)과 왕(재림)의 직분을 소유한 분이시며, 이 “왕”께서 재림하시면 『주의 오른편에 계신 주께서 그의 진노의 날에 왕들을 쳐부수시리라.』(5절)라고 예언되어 있다. 본문 6절도 『그가 이방 가운데서 심판하실 것이요, 시체들로 그곳들을 가득 채우시며 여러 나라의 머리들을 상하게 하시리라.』(아마겟돈 전쟁)라고 예언한다.<br/><br/>『그가 길에 있는 시냇물을 마시리니 그러므로 그가 머리를 드시리라.』(7절)라는 말씀은 수수께끼 같지만, 주님께서 재림 때 시냇물을 마시듯 그분의 젊음을 새롭게 하실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시냇물을 마신 후 머리를 드신 주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담대하게 계속해서 수행해 나가실 것이다. 바로 이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 또한 “젊음의 이슬”을 머금고 담대하게, 계속 섬겨 나가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47:4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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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유다 이스카리옷을 저주하신 예수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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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표제가 「악장에게, 다윗의 시」로 되어 있는 시편 109편은 자신에게 박해를 가한 사람을 저주하는 “저주의 시”이다. 다윗의 시이기에 다윗이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본 시편은 다윗의 인격 안에서 말씀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<br/><br/>『오 내 찬양의 하나님이여,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 악인의 입과 속이는 자의 입이 나를 대적하여 열려 있으니 그들이 거짓말하는 혀로 나를 대적하여 말하였나이다. 그들이 또한 증오의 말들로 나를 에워싸며 이유 없이 나를 대적하여 싸웠나이다. 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의 대적들이 되었으나 나는 기도하나이다. 그들은 내게 악으로 선을, 증오로 나의 사랑을 갚았나이다』(1-5절).<br/><br/>시편 109편은 화자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부정적인 내용으로 시작한다. 다윗의 인생에서는 사울왕과 시므이, 압살롬, 도엑과 같은 악인들이 그를 대적해서 싸웠지만, 악으로 선을 갚고 증오로 사랑을 갚는 일은 다윗의 역사적인 경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나(마 23:37,38, 딤전 1:15),원수들은 초림 당시에 선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억압받는 모든 자들을 치유하신 주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악과 증오로 갚았기 때문이다(행 10:38; 2:22,23). 다윗이 그의 대적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처럼(『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의 대적들이 되었으나 나는 기도하나이다.』 - 4절), 예수님께서도 그분의 대적들을 위해 기도하셨다.『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 따라서 본 시편은 다윗의 기도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그 다윗을 뛰어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시로 인식되어야 한다.<br/><br/>『악인으로 하여금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받을 때에 정죄받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가 되게 하소서. 그의 날들이 짧아지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 그의 자녀들로 아비 없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소서. 그의 자녀들로 계속 유리하는 자들이 되어 구걸하게 하시며 그들의 황폐한 곳들을 떠나 양식을 찾게 하소서』(6-10절).<br/><br/>시편 109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 이스카리옷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시는 시로서, 『그의 날들이 짧아지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8절)라는 말씀을 사도행전 1장에서 베드로가 인용함으로써 본 시편이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상으로 한 시임을 밝혀 준다. 『형제 여러분, 예수를 붙잡은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이 성경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하도다. 그가 우리와 함께 계수되었으며 이 사역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느니라. 그런데 이 자가 실로 불의의 대가로 밭을 샀는데 그후에 곤두박이로 떨어져서 몸의 중간이 터져 그의 모든 창자가 쏟아져 나왔느니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어 그 밭을 그들의 고유의 말로 ‘아켈다마’라고 하니 즉 ‘피의 밭’이라는 뜻이라. 이는 시편에 기록되기를 ‘그의 처소를 황폐케 하시고 그곳에 사는 사람이 없게 하시며 그의 감독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음이라』(행 1:16-20).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뒤로 나무에 목매달아 자살한 유다는 8절의 예언대로 “그의 날이 짧아졌다.” 이뿐 아니라 그의 사도직분을 “맛디아”가 대신함으로써(행 1:26)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8절)라는 기도 또한 응답이되었다.<br/><br/>그뿐 아니라 3절의 『그들이 또한 증오의 말들로 나를 에워싸며 이유 없이 나를 대적하여 싸웠나이다.』라는 말씀은 『그러나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율법에 기록된 ‘그들이 나를 까닭없이 미워하였다.’고 한 그 말을 이루려 함이라.』(요15:25)라는 말씀에서 성취되었고, 25절의 『내가 또 그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으니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그들의 머리를 흔들었나이다.』라는 말씀 역시 『그때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주를 모독하여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짓는 자여』(막 15:29)라는 말씀에서 성취되었으며, 또한 26절의 『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오, 주의 자비를 따라 나를 구원하시어』라는 말씀은 『그는 육체로 계시는 날들 동안 자기를 사망에서 구원하실수 있는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려워하심을 인하여 들으셨느니라.』(히 5:7,cf. 마 26:39)라는 말씀과 상황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와 같은 구절들(3,25,26절)이 초림 때 고난을 당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 성취되었으니, 이 정도면 시편 109편이 유다 이스카리옷을 저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라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br/><br/>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는 “초림 때의 유다”와 “대환란 때의 유다”를 향해 있다. 즉 『그의 날들이 짧아지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8절)가 초림 때의 유다를 저주한 것이라면, 『악인으로 하여금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6절)는 대환란 때의 유다를 저주한 것이다. 왜냐하면 초림 때 예수님에 의해 『마귀』(요 6:70)요 『멸망의 아들』(요 17:12)이라고 불린 유다 이스카리옷은 대환란 때 『멸망의 아들』(살후 2:3), 곧 마귀가 육화된 “적그리스도”로 등장할 것이고, 바로 이 “짐승”의 오른편에 사탄이 서서 그를 실제적으로 지지하며 그에게 능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같고,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자리와 큰 권세를 그 짐승에게 주더라』(계 13:2).<br/><br/>“대환란 때의 유다”는 가난하고 궁핍한 환란 성도들을 저주하기를 좋아할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본 시편에서 그를 역으로 저주하신다. 『이는 그가 자비 베풀기를 기억하지 아니하였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박해하여 마음이 상한 자를 죽이려 하였음이니이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것이 그에게 닥치게 하시고 그가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이 그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소서. 그가 옷을 입듯 저주로 자신을 덮었으니 그것이 물같이 그의 창자 속으로, 기름같이 그의 뼈들 속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저주가 그를 덮는 옷같이 그에게 임하게 하시고 그가 항상 두르고 있는 띠와 같게 하소서. 이것이 나의 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 곧 나의 대적들이 주로부터 받는 보응이 되게 하소서』(16-20절).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사복음서에서는 유다가 누군가를 저주했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위의 본문에서 유다가 퍼붓는 저주는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로서 등장할 그가 『큰 일들과 모독하는 말들을 하는 입』(계 13:5)을 받아 퍼붓는 모독에서 성취가 된다. 『그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계 13:6). 대환란 때에 유다는 그의 입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저주할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환란 성도들을 저주하여 지치게 할 것이다. 『그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항하여 큰 말을 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지치게 할 것이고 또 때와 법을 변경시키려고 생각할 것이라』(단 7:25). 이와 같은 유다에 관해서 본문 7절은 “심판”을 이야기하는데(『그가 심판받을 때에 정죄받게 하시며』), 이 심판 역시 초림 때 이뤄지지 않았으며, 미래의 백보좌 심판에서 유다 자신의 오른편에 있는 사탄과 함께 정죄받아 심판받는 일로 성취가 될 것이다(단 7:9-11,계 20:10-14).<br/><br/>본 시편의 마무리(21-31절)에서 “24-27절”은 유다를 향한 저주에서 벗어나 예수님 자신에 관한 기도로 이루어져 있다.『내 무릎은 금식으로 인하여 약하며 내 육체는 기름기가 부족하나이다. 내가 또 그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으니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그들의 머리를 흔들었나이다. 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오, 주의 자비를 따라 나를 구원하시어 이것이 주의 손인 것을 그들로 알게 하소서. 주여, 주께서 그것을 행하셨나이다.』 여기서 『이것이 주의 손인 것을 그들로 알게 하소서. 주여, 주께서 그것을 행하셨나이다.』(27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임을 보여 준다(행 2:23). 이 점에 대해서는 선지자 이사야도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였기에 주께서 그를 고난에 두셨도다.』(사 53:10)라고 예언했다. 시의 결미에서 다윗은 원수들의 저주 가운데서 임하는 주의 복과 박해 가운데서 누리는 즐거움을 구하고 있는데(28절), 대적들에게 닥칠 부끄러움과 수치를 간구하는(29절) 그는, 자신은 무리 가운데서 주님을 크게 찬양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30절). 이유는 『주께서 가난한 자의 오른편에 서시어 그의 혼을 정죄하는 자들로부터 그를 구원하실 것』(31절)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궁핍해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구원 가운데 있다면 그 성도는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은 돈으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구원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9 May 2025 09:57: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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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의 자애하심을 깨달으리로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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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107편은 시편 제5권을 시작하는 시로, 어리석은 혼이 고난 속에서 부르짖을 때 그가 비록 자격이 없다 해도 구원하시는 『주의 자애하심』(43절)을 노래한다.<br/><br/><br/>『오, 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됨이라. 주께 구속받은 자들은 그렇게 말할지니 그가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며 그들을 땅에서, 동과 서와 북과 남에서 모으셨도다』(1-3절). 선하신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되며, 이에 감사하라고 시편 기자는 명령한다. 주님께서는 그분께서 택하신 유대인 성도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셔서 “하늘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시는 분이신데(마 24:30,31), 이와 같은 일은 대환란 때 이방의 손(시 106:41,42,46)에서 유대인 환란성도들을 구해 내셔서 그 『구속받은 자들』, 곧 『주의 속량받은 자들』(사 35:10)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재림 때 일어날 것이다. 재림 전에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광야의 황량한 길에서 방황하고 거할 성읍을 찾지 못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그들의 혼이 그들 안에서 기진』할 때 『그들이 그들의 고난 속에서 주께 부르짖』으면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해 내』시고 『옳은 길로 인도하셔서 거처할 성읍』, 곧 “셀라 페트라”로 가게 하실 것이다(4-7절). 이처럼 주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성도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해 주시는 분인 것이다. 『오, 그의 선하심과 사람의 자손들에게 행하신 그의 경이로운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주를 찬양할지어다』(8절).<br/><br/><br/>그런데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과 관련된 위와 같은 구속은 다음과 같은 신약의 구속과 다르다.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골 1:14). 신약 아래서의 구속은 죄 아래 팔렸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신 것을 뜻한다. 구약의 율법 하에서의 구속은 “돈”(레 25:30)과 “다른 사람의 생명”(민 3:46)과, “은과 금”(민 3:51)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신약의 은혜 아래서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속이 이뤄진다. 『이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너희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이어받은 너희의 허망한 행실에서 은이나 금 같은 썩어질 것들로 구속된 것이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니라』(벧전 1:18,19). 이처럼 아무 공로도 없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오, 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됨이라.』(1절)라고 외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성도들을 장차 지구의 『동과 서와 북과 남에서』(3절) 모으시어, 셋째 하늘의 아버지께로 가는 『옳은 길』(7절)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14:6)를 통해 그들이 영원히 『거처할 성읍』(7절)인 “새 예루살렘” 도성으로 가서 살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오, 그의 선하심과 사람의 자손들에게 행하신 그의 경이로운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주를 찬양할지어다』(8절).<br/><br/><br/>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사모하는 혼을 만족케 하시며 굶주린 혼을 선하심으로 채워 주심』(9절)에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채워지기 전에 『고통과 쇠사슬에 매여 암흑과 사망의 그림자 가운데 앉아 있』을(10절)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조언을 경시하였』기(11절)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보라, 주를 두려워함이 곧 지혜요,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니라.』(욥 28:28)라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조언』을 경시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죄들에 묶여(잠 5:22) 영적인 암흑 속에서(고후 4:4) 완전히 눈멀어 있는(잠 2:13; 4:19, 엡 5:8), 그야말로 『암흑과 사망의 그림자 가운데 앉아 있』는(10절) 죄인들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노역으로 그들의 마음을 낮추』시고 그들이 넘어져도 돕는 자가 없게 하시는데(12절), 이는 주님께서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게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갈 6:8).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의 죄과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며 그들의 혼은 모든 종류의 음식을 싫어하고 그들은 죽음의 문들에 가까이 다가가는도다』(17,18절). 그러나 이러한 그들이 죄에서 돌이켜 『고난 속에서 주께 부르짖』고(『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 롬 10:13)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할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가두고 있는 놋쇠 문들을 부수고 철 빗장들을 꺾으시어(16절)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심으로(13,19절) 그들의 혼을 치유하고 만족케 하신다. 죄인을 고치는 것은 그가 순종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시어 그들을 고치셨으며 그들의 파멸에서 그들을 구하셨도다. 오, 그의 선하심과 사람의 자손들에게 행하신 그의 경이로운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주를 찬양할지어다』(20,21절).<br/>252쪽 / 15,000원<br/><br/>시편 본문에는 영적인 적용을 넘어 특별한 교리적 예언이 있으니, “사망의 그림자”와 관련된 말씀이다. 『사람들이 고통과 쇠사슬에 매여 암흑과 사망의 그림자 가운데 앉아 있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조언을 경시하였음이라』(10,11절). 『그가 암흑과 사망의 그림자로부터 그들을 데리고 나오셔서 그들을 묶은 줄을 끊으셨도다』(14절). 『사망의 그림자』, 곧 “the shadow of death”는 성경의 19구절들에서 20번 등장한다[욥 3:5; 10:21,22; 12:22; 16:16; 24:17 (2번); 28:3; 34:22; 38:17, 시 23:4; 44:19; 107:10,14, 사 9:2, 렘 2:6; 13:16, 암 5:8, 마 4:16, 눅 1:79]. 이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지만, “그것에 뒤덮인” 것을 죽이는 “실제 그림자”이다. 대환란 때의 죄인들은 “머리 위로 지나가는” 무언가로 생기는 “그림자”에 덮여 죽게 되는데, 『죽음의 그림자의 땅에 거하는 자들 위에 빛이 비치』는(사 9:2) 재림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의 태양』(말 4:2)으로 오셔서 대환란의 어둠을 끝내시고 『죽음의 그림자를 아침으로 바꾸』시면(암 5:8) 주님께서는 우렁찬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새 노래로 주께 노래하며 성도들의 회중 가운데서 그를 찬송하라』(시 149:1). 『오, 그의 선하심과 사람의 자손들에게 행하신 그의 경이로운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주를 찬양할지어다』(15절).<br/><br/><br/>『그들로 감사의 희생제를 드리며 기쁨으로 그의 행사들을 선포하게 하라. 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서 대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깊은 곳에서 주의 행사들과 그의 이적들을 보는도다. 이는 주께서 명하시고 폭풍을 일게 하시니 거기서 파도가 높아짐이라』(22-25절). 여기서 제시되는 『주의 행사들과 그의 이적들』은 “바다”이다. 바다에서 볼 수 있는 주님의 『이적들』은 『폭풍』인데, 폭풍으로 파도가 높아지고(25절), 『대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늘까지 올랐다가 깊음들로 다시 내려감으로써 그들의 혼은 고통으로 녹게 된다(26절). 『그들이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술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를(27절) 때 『그들이 그들의 고난 속에서 주께 부르짖으니 주께서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시며 폭풍을 잠잠케 하시니 그 파도가 잔잔해』진다(28,29절). 『파도가 조용해져 그들이 즐거워하』고 『주께서 그들의 원하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시』면(30절) 주님께서는 또다시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오, 그의 선하심과 사람의 자손들에게 행하신 그의 경이로운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주를 찬양할지어다』(31절). <br/><br/><br/>바람과 바다는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께 복종한다(마 8:27). 하나님께는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라는 말씀으로 『폭풍을 잠잠케』(29절) 하실 능력이 있다. 갈릴리 바다에서 큰 폭풍을 꾸짖어 잠잠케 하신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창조주이시다. 바로 그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창조하시어 모든 것이 새롭게 된 인생을 살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의 믿음을 통해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악한 현 세상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일이 녹록치 않다. 갑작스레 닥치는 인생의 거센 폭풍을 선하기만 한 성도가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바로 이러한 때에 인생의 환경을 바꾸셔서 폭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눈부신 햇살 아래의 잔잔한 푸른 바다처럼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고난 속에 있다면 주님을 부르라!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구해 낼 것이요,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파도가 조용해져 그들이 즐거워하니 주께서 그들의 원하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시는도다』(30절).<br/><br/><br/>『백성의 회중에서도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집회에서도 그를 찬양할지어다』(32절). 파도가 조용해지고 당신의 배가 원하는 항구로 인도된다면(30절), 당신은 그 일을 이뤄 주신(31절) 하나님을 회중 가운데서 높이며 찬양해야 한다. 고난에서 구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인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 그는 문둥병이 치유받자 주님께 찾아와서 엎드려 얼굴을 대고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보다 못한 것이다(눅 17:15,16). <br/><br/><br/>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그 민족의 역사의 『강들을 광야로, 샘물들을 마른 땅으로 바꾸시며 비옥한 땅을 불모지로 바꾸』셨다(33,34절). 이러한 교회 시대를 거쳐 장차 대환란을 통과하게 될 그들에게 용이 그의 입에서 물을 홍수같이 쏟아내어 『광야를 연못으로, 마른 땅을 샘물로 바』꿀 때(35절, cf. 계 12:14-16, 호 2:14-17, 단 9:26), 땅이 그 홍수를 삼켜 버릴 것이고(계 12:16) 『굶주린 자들』(36절), 곧 유대인 환란성도들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사람이 사는 성읍』(36절), 곧 『거처할 성읍』(7절)인 에돔의 『견고한 성읍』(시 108:10) “셀라 페트라”로 피신할 것이다. 이때 대환란의 재앙(계 6-16장)으로 전 세계가 황폐하게 되면 땅에 내려와 『통치자들』(40절, cf. 시 82:7) 노릇을 한 “타락한 천사들”은 주님께로부터 부어진 치욕 속에 길도 없는 광야에서 유리하게 될 것이다(40절).<br/><br/><br/>환란을 통과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만들어 풍성한 소산을 낼 것이고(37절), 복을 받은 그들은 크게 번성하며 가축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38절). 그야말로 『가난한 자는 고난으로부터 높이 두시고 그를 가족들로 만드시되 양무리 같게 하시는』(41절) 것이다. 그리하면 『의인이 그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며 모든 죄악이 그 입을 다물』(42절) 것이다. 『허물을 끝내고 죄들을 종결시』킴으로써(단 9:24) 『모든 죄악이 그 입을 다물』면 비로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의 왕국이 세워지고 주님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실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성도들은 죄로 인한 고난에서 구해 내시고 악인들은 멸하여 죄악을 종결시키는 일은 오로지 『주의 자애하심』에서 비롯되는 일이다(시 136:10,15,19,20). 『누구든지 지혜로운 자들과 이 일들을 살펴볼 자들, 그들은 주의 자애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절).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03 Feb 2025 17:36:5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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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세월은 강물처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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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세월(歲月), 곧 해 세(歲), 달 월(月). 이 말을 만든 이는 밤하늘의 달을 쳐다보며 “흘러가는 시간”을 생각했던 것일까? 달빛이 스러지듯이, 달을 스쳐가는 구름처럼 인생도 그렇게 흘러간다고... 그리고 그 먹빛 밤하늘에는 별들이 있었으리라. 『네가 플레아데스 성단의 아름다운 감응력을 묶을 수 있으며 오리온의 띠를 풀 수가 있느냐?』(욥 38:31) 성경을 펼치면 아름다운 말씀들이 맑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빛나고 있다. 플레아데스 성단과 오리온 별자리를 말씀하신 욥기 38:31도 그중 하나이다. 플레아데스 성단은 일곱 개의 밝은 별을 볼 수 있는 별들의 모임인데, 이 별들은 “봄”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오리온은 10월에서 1월까지 간헐적으로 볼 수 있는 별자리로, 그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땅에는 “추위”가 찾아온다. 따라서 “네가 플레아데스 성단의 아름다운 감응력을 묶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은 “네가 플레아데스 성단이 나타나는 봄의 그 감미로운 영향력을 꽁꽁 묶어서 봄이 네 곁을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이 된다. 과연 누가 봄을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하여 여름이 오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네가 오리온의 띠를 풀 수가 있느냐?”라는 질문은 “네가 오리온이 나타나는 겨울을 묶어 둔 띠를 풀어 그 추위를 속히 떠나게 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이다. 과연 누가 겨울이 춥다고 하여 자연에서 그 겨울의 띠를 풀어서 그 한기를 빨리 지나가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여 봄을 앞당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계절의 변화와 순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길고 짧음은 전적으로 날씨와 계절을 주관하시는 분께 달린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푸신 것을 묶을 수 없고, 그분께서 묶어 놓으시면 아무도 그것을 풀 수가 없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흘러가는 강물처럼 보내시는 세월을 밀거나 당길 수 없다.<br/><br/><br/>“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이라고 했던가? 최초의 인류인 아담의 때에 강물은 에덴에서 흘러 나가 그 동산을 적시고 그곳으로부터 갈라져서 네 원천이 되었다(창 2:10). 아담이 흙으로 지음 받은 뒤 그의 얼굴을 처음 봤던 곳은 아마도 에덴의 강가였지 싶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물에 비친 그의 얼굴에 젊음과 생기가 넘쳤을 테지만, 타락한 후에 비친 모습에서는 문득 세월의 흐름이 읽혀졌으리라. <br/><br/><br/>맑은 강줄기가 굽이지는 곳의 토박이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강물과 함께 생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흐르는 물거울에 비친 개구쟁이의 얼굴은 서서히 청년으로 바뀌어 가고, 어느 날 가정을 이룬 장년이 되어 나타나지만, 가는 세월을 잡지 못해 백발이 성성해진 노인 하나가 어느 날 물속에 모습을 드러내면 그의 유년을 추억하고 세월의 흐름을 탄식한다. 유년에서 청년으로, 장년에서 노년으로 바뀌는 사이,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흐르고 또 흘렀지만, 그 흐르는 물 위에 변해 가던 얼굴은 더 이상 그곳을 찾지 못하고 병상에 드러눕게 된다. 세월이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은 영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요 3:7). 그래서 영적 갓난아기로 태어났다면 말씀의 젖과 꿀, 사과와 빵, 고기를 부지런히 먹어 영적 어린아이로, 청년으로, 장년으로, 노년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 성도가 늙어도 세월에 한숨짓지 않는 길은 영적 성장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인이여, 『오직 은혜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 날마다 말씀의 물(엡 5:26)에 자신을 비춰 보아(약 1:23), 흐르는 강물 같은 세월 속에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주의 형상으로 변모되는(고후 3:18) 그리스도인의 생을 살도록 하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03 Jan 2025 08:27:0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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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죄짓는 자녀에게 “그럼에도” 베푸시는 은총</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6/%EC%A3%84%EC%A7%93%EB%8A%94-%EC%9E%90%EB%85%80%EC%97%90%EA%B2%8C-%EA%B7%B8%EB%9F%BC%EC%97%90%EB%8F%84-%EB%B2%A0%ED%91%B8%EC%8B%9C%EB%8A%94-%EC%9D%80%EC%B4%9D/</link>
<description><![CDATA[시편 106편은 시편에 기록된 “할렐루야” 시들, 즉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로 시작하는 시들 가운데 첫 번째 시이다(cf. 시 111,112,113,135,146,147,148,149,150편). 본 시편에서 주를 찬양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죄짓는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가지신 자비와 긍휼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도 넘쳐난다. <br/><br/>『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오, 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됨이라. 주의 능하신 행적들을 누가 말할 수 있으며 그의 모든 찬사를 누가 나타낼 수 있으랴?』(1,2절) 시편의 화자는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선하심과 영원히 지속되는 자비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죄에 자주 무릎 꿇고 주님을 거역했던 세월을 돌이켜볼 때 그 잃어버린 세월의 얼룩진 자리를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러한 작은 인생에 베풀어 주신 은혜와 자비도 다 셀 수 없을진대, 하물며 주님의 모든 능하신 행적들을 누가 말할 수 있으며, 그분의 모든 찬양을 누가 나타낼 수 있겠는가!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면전에서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으며(요 20:30), 그분께서 행하신 다른 많은 일들이 일일이 기록된다면 세상 그 자체에라도 기록된 책들을 둘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요 21:25). 즉 아무도 주님의 능하신 행적들을 다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찬양으로도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의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다! <br/><br/>『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 주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총으로 나를 기억하시고 오, 주의 구원으로 나를 찾아 주소서. 그리하여 나로 주께서 택하신 자가 잘되는 것을 보게 하시며 주의 민족의 기쁨 가운데 즐거워하게 하시고 주의 유업을 자랑하게 하소서』(3-5절). 공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여 주님께 은총과 구원을 얻는 것은 구약적 구원을 보여 준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갚아 주셨다(롬 2:6,7). 그러한 사람을 택하시어 그분의 구원으로 찾아 주셨고, 즐거움과 유업을 소유케 하셨다. 즉 어느 시대에나 그 행위가 올바른 자들에게는 그분의 선함을 베푸신다. 인생의 소원은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잘 되는 것이며, 그분께서 베풀어 주신 것들을 자랑삼아 간증해 보는 것이다. 그러한 소원의 성취를 막는 것이 성도 자신의 죄라는(사 59:1,2) 점은 너무도 쉽게 간과된다. 죄에 젖어 살지는 않아도 작은 죄들에 묻혀 살기에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산길을 더듬듯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생을 보낸다. 그러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죄로 인해 위태해질 때면 은총의 손길을 뻗어 주시곤 한다.<br/><br/>『우리가 우리의 조상들과 함께 죄를 지었나이다. 우리가 죄악을 범하였으며 우리가 악하게 행하였나이다』(6절). 화자는 자신과 동족을 분리시키지 않고 “우리”의 죄를 참회한다. “범죄와 징계와 구원”이 악순환하는 역사를 되짚으며 “우리의 죄악이 받아야 할 것보다 적게 벌 주시는”(스 9:13) 하나님을 찬양한다.<br/><br/>첫째,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행하신 주님의 이적들을 깨닫지 못했고, 주님의 수많은 자비를 기억하지도 못하여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했다(7절).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네가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서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느냐? 우리가 이집트에서 너에게 한 말이 이것이 아니냐? 말하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인을 섬기리라.’ 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인을 섬기는 것이 더 나았겠노라.” 하더라』(출 14:11,12). 『그럼에도 주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이는 자기의 강한 능력을 알리려 하심이라』(8절). 즉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러한 백성 앞에서 홍해를 꾸짖어 홍해를 마르게 하셨으며, 그들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가듯이 바닷속을 지나가게 하셨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그들의 원수인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뒤쫓아 온 이집트인들을 단 한 명도 남은 자가 없이 홍해에 수장시키셨다(9-11절). <br/><br/>둘째, 그 홍해의 사건 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을 찬송했지만(12절, cf. 출 14:31; 15:1-21), 곧 주님의 행사를 잊어버리고 주님의 조언을 기다리지 않고 광야에서 심히 욕심을 부려 고기를 먹고자 했다(13,14절, cf. 민 11장). 『주께서 그들의 요구대로 그들에게 주셨으나 그들의 혼 속으로 메마름을 보내셨도다』(15절). 백성들은 메추라기 고기를 먹고서 배는 불렀으나 그들의 혼은 메말라 있었다. 육신은 기름졌어도 혼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었다(잠 15:17). 『주의하고, 탐심을 조심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자기가 소유한 것의 풍부함에 있지 않음이라.』(눅 12: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br/><br/>셋째, 이스라엘은 진영 가운데서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여 그들의 영적 권위에 도전했다(16절). 그때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켰고 아비람의 무리를 덮었으며 불이 그 무리 가운데 붙어서 화염이 악인들을 살랐다(17,18절, cf. 민 16장). “시기는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하고 결국 죽음이 주어진다.” <br/><br/>넷째, 이스라엘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그 주조한 형상을 경배하여 자기들의 영광을 풀을 먹는 수소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함의 땅 이집트에서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시고 홍해에서 무서운 일들을 행하신 구주 하나님을 잊고서(19-22절) 뱀처럼 생긴 몸 위에 두 뿔 달린 황소의 얼굴을 가진(겔 1:5-11; 10:14) “사탄”을 숭배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멸망시키리라 말씀하셨으나 그의 택하신 모세가 갈라진 틈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진노를 돌이켜 그들을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23절, cf. 신 9:8). 즉 “중보자”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는 대목이다. “중보자 모세”는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신 위대한 중보자, 즉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 18:15)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5). <br/><br/>다섯째, 믿음 없는 정탐꾼들의 보고(민 13:31-33)를 들은 이스라엘은 약속하신 좋은 땅을 멸시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장막에서 불평하며 주님의 음성에 경청하지 않았다(24,25절). 주님께서는 그들을 대적하시어 광야에서 쓰러지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26절), 그 조상들의 전철을 밟은 그들의 씨들 역시 이후 역사 속에서 민족들 가운데 쓰러지고 흩어짐을 맛보아야 했다(27절). 자기 민족의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면 동일한 역사가 반복된다. 의도적인 무지는 반역의 씨앗이다.<br/><br/>여섯째, 이스라엘은 바알프올에게 연합하여 죽은 자들에게 바친 희생제물들을 먹었고(민 23:28; 25:18; 31:16), 그들의 행위로 주님을 격노케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가운데 퍼졌다(28,29절). 『그때 피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자 그 재앙이 그쳤으며 그 일이 모든 세대에 걸쳐 영원무궁토록 그에게 의로 여겨졌도다』(30,31절). 주님께서는 이 사건에 대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피느하스가 그들 가운데서 나를 위해 열심을 내어,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나의 진노를 돌이켰으니, 내가 나의 질투심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하지 않았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보라, 내가 그에게 나의 화평의 언약을 주리라. 그와 그 뒤를 잇는 그의 씨가 그것을 가지리니, 곧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이는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열성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라.』(민 25:11-13)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계기로 레위 지파 제사장직은 천년왕국뿐만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게 된다(사 66:21, 렘 33:18,22, 겔 43:19). 피느하스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열성』을 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복된 일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열성을 내는 성도를 눈여겨보시고 그를 택하시어 들어 쓰신다. 열성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시킬 수 있겠는가? “악하고 게으른 종”(마 25:26)이라는 책망을 듣게 하시려고 부르시겠는가?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인품이 덜 성숙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위해 열심을 내는 성도를 가치 있게 보신다. 성도들이여, 『일에는 게으르지 말고 영 안에서 열심을 내며 주를 섬기라』(롬 12:11).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전 15:58). <br/><br/>일곱째, 이스라엘은 두 번째 반석 사건 때도 주님을 노하시게 했고, 모세는 『패역한 너희는 이제 들으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에게 물을 나오게 해야만 하겠느냐?』(민 20:10)라며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주체를 자신과 아론에게 돌리는 경솔함을 보여 곤란하게 되었다(32,33절, cf. 민 20:2-13). 또한 이스라엘은 재판관기 시대에 그 땅의 민족들을 멸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섞여 살면서 우상을 섬겼고(34-36절), 심지어 자식들을 마귀들에게 제물로 바침으로써 주님의 진노를 샀다. 결국 이방에게 넘겨져 압제를 받아야 했던 그들을 주님께서는 삼손, 바락, 입다, 기드온, 드보라, 톨라, 야일 등의 재판관들을 통해, 또 사울, 다윗, 히스키야, 요시야 등의 왕들을 통해 여러 번 구해 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의 책략으로 주님을 격노케 했고,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해 낮아져야 했다(37-43절).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님의 모든 능하신 행적(2절)에도 끄떡 않는 “구제불능의 육신”을 보여 준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br/><br/>『그럼에도 그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주시하시어 그들을 위해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마음을 돌이키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사로잡아간 모든 자들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44-46절). “그럼에도”에 주목해 보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그들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면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마음을 돌이켜 그들로 사로잡혀 간 땅에서 도움을 받게 하셨다(단 3:29,30; 6:25-27, 에 8-10장).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후로는 그러한 긍휼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곧 대환란으로 들어갈 것이고, 그때 다음처럼 기도할 것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방 가운데서 우리를 모으시어 주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드리게 하시며 주의 찬양을 환호하게 하소서』(47절). 주님께서는 대환란의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또다시 그들을 돌아보사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회복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정통치를 기뻐하며 외칠 것이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받으실지로다. 모든 백성들은 “아멘.” 할지어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48절). <br/><br/>자식이 잘못해서 매를 댔다가도 연한 살에 도드라진 매 자국을 보고서 내심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부모는 없다. 참된 부모는 징계를 즐기지 않는다. 비록 “죄”로 고난당한다 해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분을 두려워하며 죄에서 돌이켜 “많이 아프다”고 말씀드려 보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마음 아파하시며” 구해 주실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주께서도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라』(시 103:13,14).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6 Aug 2024 10:57:4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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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악인”과 “가난한 자들” (시편 10편)</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6/%EC%95%85%EC%9D%B8%EA%B3%BC-%EA%B0%80%EB%82%9C%ED%95%9C-%EC%9E%90%EB%93%A4-%EC%8B%9C%ED%8E%B8-10%ED%8E%B8/</link>
<description><![CDATA[시편 10편은 “가난한 자들”을 박해하는 “악인”에 관한 시로, ① 고난의 때에 구원하시지 않는 주님께 드리는 간구(1절) ② 악인(2-11절) ③ 심판을 위해 일어서 주시라는 간구(12,13절) ④ 주님의 심판을 믿고 신뢰함(14,15절) ⑤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그분의 응답에 대한 확신(16-18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br/><br/>“가난한 자”가 처한 상황은 매우 급박하나 주님의 구원은 아득히 먼 듯하다. 『오 주여, 어찌하여 주께서는 멀리 서 계시며, 어찌하여 고난의 때에 숨으시나이까?』(1절) 여기서 『고난의 때』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인 『대환란』(마 24:21)이다. 1절은 대환란 때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드리는 기도이다. “주께서 멀리 서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며, 고난 중에 나타나시는 도움이시라.』(시 46:1)는 말씀과 대조된다. 자기 백성의 고난을 멀리 서서 보고만 계실 분이 아닌데 당장 손을 쓰지 않으신다면, 거기엔 분명 어떤 목적이 있고,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br/><br/>“어찌하여 주께서는 멀리 서 계시나이까?” 그러나 주님은 초림 때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서 계셨고,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셨다. 『그 명절의 가장 큰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요 7:37,38). 그러나 그들은 이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마 1:23)로서 그들과 함께 서 계실 때 그들은 그분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스테판이 『그 의로우신 분』(행 7:52)에 관하여 증거할 때에도,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는 말에 귀를 막고 그를 죽여 주님을 민족적으로 다시 거부하고 말았다. 그들 가운데 서 계셨던 주님과, 그들에게 다시 오시려고 셋째 하늘에 서신 주님을 거부한 그들이, 대환란 때 “어찌하여 주께서는 멀리 서 계십니까?”라고 애원한다.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 계실 때 찾고 또 찾았어야 했다.<br/><br/>성도의 고난은 자신이 멀리했던 하나님을 가까이 계시게 하고픈 열망을 낳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찾을 만한 때에 주를 구하고 가까이 계실 때 부르지 않는다면(사 55:6), 우리의 죄로 인해 멀리 서 계실 때 “어찌하여 주께서는 멀리 서 계시나이까?”라고 말해야 할 때가 오게 된다. 가까이 계실 때 주님을 찾으라!<br/><br/>『악인이 그의 교만함 가운데 가난한 자를 박해하오니 그들로 자기들이 고안한 꾀에 빠지게 하소서. 이는 악인이 자기 마음의 욕망을 자랑하며 주께서 미워하시는 욕심 많은 자를 축복함이니이다』(2,3절). 2-11절은 “악인”과 “가난한 자들”의 대립이 전개된다. “악인”은 적그리스도이며, “가난한 자들”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아 매매를 할 수 없기에 가난하게 사는 환란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거나 팔 수 없게 하더라』(계 13:16,17). 대환란 때의 “가난한 자들”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기에 박해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계 13:15). 적그리스도는 짐승의 표를 받아 부유하게 된 『욕심 많은 자』는 『축복』할 것이나(시 10:3), 표를 받지 않고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가난한 자들”은 저주하고 죽이려고 『그의 강한 자들』을 보낼 것이다(10절). 『그의 강한 자들』은 『잠복』하고 있다가 “가난한 자들”을 생포한 뒤, 환란성전의 제단에서 칼로 “목베어” 적그리스도에게 제물로 바칠 것이다(8-10절, 계 6:9,10; 20:4 참조). 따라서 대환란 때 부유한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는 저주받은 사람들의 전형이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의인으로 간주되어 영원한 생명과 함께 주님과 천 년을 통치하는 복을 향유하게 된다. 대환란 때의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다루는 야고보서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시어 믿음 안에서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으신 것이 아니냐?』(약 2:5)라며 이 점을 분명히 계시하고 있다.<br/><br/>주님께서는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족할 줄 아는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니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이것들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 6:6-8)고 말씀하신다. 부유하게 되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이 교회 시대나 대환란 때나 분명 저주의 대상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이며, 이것을 욕심내는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찌르게 된다(딤전 6:10). 대환란 때에는 짐승의 표를 받고 지옥으로 간다. 하나님의 사람은 불확실한 재물을 신뢰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잡아야 한다(딤전 6:11,12,17).<br/><br/>시편 10편에는 “악인” 곧 적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 두 번 제시된다. 첫째는 6절이다. 『나는 요동치 않을 것이며 나는 결코 불행에 처하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의 『나는 요동치 않을 것이며』라는 말은 “번영 가운데”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내가 번영 가운데 말하기를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시 30:6). 그렇다면 시편 10:6은 이스라엘을 박해함으로써 “번영”을 누릴 적그리스도의 말이 된다. 또 『나는 결코 불행에 처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와 연합한 로마카톨릭의 호언장담과 직결된다. 『나는 여왕으로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니로다. 그러므로 내가 결코 슬픔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계 18:7). 이로써, “막대한 부”로 “자만”에 빠져 있는 적그리스도의 말은 결국 로마카톨릭과 연합한 한 “번영한 교회”를 보여 준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너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이 “라오디케아 교회”의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은 적그리스도의 『나는 요동치 않을 것이며 나는 결코 불행에 처하지 아니하리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배교한 교회들과 적그리스도의 마음은 한 마음이다. 그들은 교만하고(시 10:2,4), 육신적인 땅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3절), 부자들을 축복하고(3절), 하나님을 찾지 않고 모든 생각에 하나님이 아닌 쾌락이 있으며(4절), 그 입에는 저주와 기만과 사기가 가득하고 혀 아래에는 해악과 허영이 있다(7절).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함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고 분별이 없으며,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1-5). 성경에 따르면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교회들은 “적그리스도의 교회들”이다!<br/><br/>둘째는 11절이다. 『그가 자기 마음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숨기시나니 결코 그것을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적그리스도의 이 말은 본문 1절의 남은 자들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오 주여, 어찌하여 주께서는 멀리 서 계시며, 어찌하여 고난의 때에 숨으시나이까?』 이 본문 1절은 그들의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남은 자들의 기도인 반면, 11절은 이스라엘을 박해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으셨기에 그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적그리스도의 말이다. 13절에서 그는 『주는 그것을 문책하지 않으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적그리스도의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고 관계를 끊으셨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br/><br/>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배교한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고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로서 그들의 자리를 취했다는 신학을 따르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은 그들의 버림받음으로 인해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약의 약속들을 영적으로 교회에 적용시키고,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만을 가르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지 않는다(렘 23:3, 롬 11:2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고 관계를 끊으셨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이 신학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신학”이다. 오늘날 교회들의 강단과 신학교에서, 또 기독교 출판물들에서 유대인을 위한 천국은 없고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만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배교한”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신학”을 배움으로써 이스라엘을 박해할 “그들의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살후 2:3,4).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고 그들의 화평을 위해 기도한다(시 122:6). 주님께서는 『이 나중 집의 영광이 먼저 집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이곳에 내가 화평을 주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 2:9)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화평”에 관한 한 가지 사실에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를 두 번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에 임할 화평은 확정된 사실이다. 참된 교회는 이스라엘을 박해할 적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고 예루살렘에 화평을 가져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br/><br/>『오 주여, 일어나소서. 오 하나님이여, 주의 손을 드소서. 겸손한 자를 잊지 마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나이까? 그가 자기 마음에 말하기를 “주는 그것을 문책하지 않으시리라.” 하였나이다』(12,13절). 이제 남은 자들은 기도한다. 주께서는 악인이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것을 분명히 보셨으며, 그 해악과 악의에 대해 주의 손으로 직접 갚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14절). 그들은 『악인과 사악한 자의 팔을 꺾으소서. 그의 악을 남김없이 찾아내소서.』(15절)라는 분명한 바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은 스카랴 11:17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양떼를 버려 둔 우상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칼이 그의 팔과 그의 오른눈에 임하리니, 그의 팔은 바싹 마르고 그의 오른눈은 완전히 어둡게 되리라.』 적그리스도는 팔 불구자가 될 것이고, 그의 오른눈은 완전히 멀어 버릴 것이다. 『팔』은 군대를 의미하기도 하는데(겔 30:21,24), 주님께서 “영원하신 왕”으로서 “재림”하실 때 적그리스도의 군대 역시 팔이 꺾이듯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재림” 문맥인 본문 15,16절이 분명히 밝혀 준다. 『악인과 사악한 자의 팔을 꺾으소서. 그의 악을 남김없이 찾아내소서. 주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며, 이방이 그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그의 땅』은 『주의 땅』(왕상 8:36)이다. 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방이 멸망하는 것은 대환란 끝에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께서 “재림”하실 때이다. 이방은 아직도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하며 이스라엘을 대적해 싸우고 있다. 주께서 셋째 하늘의 보좌에서 일어나 그 땅에 재림하시면 거기서 이방을 멸하시고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br/><br/>『주여, 주께서 겸손한 자들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예비하시고 주의 귀를 기울이시리이다. 아비 없는 자와 압제당하는 자에게 공의를 행하셔서 땅의 사람이 다시는 압제하지 못하게 하소서』(17,18절). 남은 자들의 기도의 요지는 『땅의 사람』 곧 “적그리스도”가 다시는 그들을 압제하지 못하게 해 주시라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님은 그렇게 해주실 것이다. 『그 악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께서 그를 자기 입에서 나오는 영으로 소멸하시고 그의 찬란한 오심으로 제거하시리라』(살후 2:8).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4 Jun 2024 14:59: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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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악인의 말과 순수한 말씀 (시편 12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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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12편은 “스미닛으로 악장에게,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스미닛은 “여덟 번째”를 의미하며, “여덟 번째 음조를 위한 악기” 또는 “낮은 옥타브”와 관련이 있다. 악인들의 채찍과 같은 말에 초점을 맞추어 시작하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의 보존에 관한 기대와 인내를 암시하며 끝을 맺는 시편 12편은 ① 경건한 자가 사라지는 현실에 대한 비탄(1절) ② 악인들의 말에 대한 묘사(2절) ③ 하나님의 개입을 간구하는 기도(3,4절) ④ 구원에 대한 약속(5절) ⑤ 하나님의 말씀 보존(6,7절) ⑥ 지속되는 악인들의 횡행을 상기함(8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br/><br/>『주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신실한 자도 사람의 자손 중에서 사라지나이다』(1절). 다윗은 사람들이 진리에서 돌아서는 것을 보며 고독과 위기를 느낀다. 경건한 자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악인들이 들어선다. 그들의 말은 경건한 자들의 말과 달리 헛된 것과 아첨과 교만으로 가득하다(2,3절). 경건한 성도가 사라지고 진리를 실행할 자리가 좁아지는 것을 보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다. 다윗은 이 일에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성도는 주님께 기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합당한 교제권을 찾아 교제의 영역을 형성해야 한다.<br/><br/>엘리야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믿음을 잃고 이세벨로부터 달아나 호렙 산에 숨어 있을 때, 주님은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하느냐?』(왕상 19:13)라고 하셨다. 그때 엘리야는 『내가 만군의 주 하나님으로 인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 이는 이스라엘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음이니이다. 나, 오직 나만이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도 앗아가려고 찾고 있나이다.』(왕상 19:14)라고 했다. 이에 주님은 “그래, 너 하나만 남았구나.”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에 아직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꿇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라.』(왕상 19:18)고 하셨다. 시대의 영적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 보여도 주님은 상황을 통제하셨고 남은 자들을 보존하셨다. 세상 죄인들은 물질 부족, 사업거래 감소, 자연재해, 질병, 전쟁의 위협 등을 고통스럽게 여기지만, 성도는 진리 안에서 교제할 사람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고통스럽다. 주님께 구하라. 주님께서 이 시대에 섭리적으로 남겨 놓으신 남은 자들을 찾아 성경적인 교제권을 형성하라.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 또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라』(눅 11:10).<br/><br/>『그들이 각자 자기 이웃에게 헛된 것을 말하며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나이다』(2절). 여기 2절에 경건한 성도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가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그것은 악인들이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이다. 경건한 자들의 자리에 들어선 악인들은 진리가 아닌 헛된 것을 말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아첨하며, 겉과 속이 다른 말들로 이득을 취한다. 이 악한 현 세상은 그런 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찰스 스펄전은 “아첨하고 거짓말하는 사람의 틈에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자들 가운데서 사는 것이 낫다.”라고 했다. 아첨은 그 안에 상대방에 대한 시기와 속임수가 들어있기에 혐오스럽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이다. 입으로는 꿀처럼 달게 말하지만 뱃속에 칼을 품고 있다. 듣는 자를 교만에 빠지게 하여 그 역시 멸망과 몰락의 길을 걷게 한다(잠 16:18). 누군가가 나를 면전에서 쓸데없이 추켜세운다면, 그는 나에게 마음의 한 면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다른 면은 나를 향한 시샘과 경멸이 검은 흙탕물처럼 흐르고 있을 수 있다. 아첨은 두 마음이다. 미소 가면을 쓴 배신이며, 아첨하는 자의 이득만을 목적으로 한다.<br/><br/>『주께서는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교만한 것들을 말하는 혀를 끊으시리라』(3절). 다윗은 혀로 속이며 성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주님께서 끊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첨하는 입술”과 “교만한 것들을 말하는 혀”가 그것의 소유자들과 동일시된다. 말은 말하는 그 사람의 실체이다. 『오 독사들의 세대야, 악한 너희가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마 12:34).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자 실체이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므로 말과 그 사람을 분리시킬 수 없다. 말은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최적의 잣대이다. 성경은 권면한다. 『만일 누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처럼 말... 하라. 이는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분께 찬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있느니라』(벧전 4:11).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처럼 거짓 없이 진실하고 거룩하게 말해야 할 이유는, 그래야만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이 드러나 주님께 영광이 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도 독한 시기와 다툼의 말을 내뱉고, 상대의 신경을 곤두서게 할 날카롭고 표독스런 표현을 쓰고, 세상 죄인들이 즐겨 쓰는 비속어와 TV 유행어를 쓴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로 주님의 영광을 가린 죄를 범한 것이다.<br/><br/>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손이 아닌 “말씀”으로 지으셨다. 주님 자신을 나타내실 때도 말씀으로 나타내셨고(삼상 3:21), 세상에 자신을 보이셨을 때는 『생명의 말씀』(요일 1:1)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이셨다.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다고까지 하셨다(시 138:2).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셨을 때 그에게 언어 능력을 주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처럼 말하는 능력이 주어졌다. 인간의 말은 결코 아무렇게나 사용될 수 없는 가치와 무게를 지닌다. 그래서 주님은 어떠한 빈말도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말하는 어떠한 빈말이라도 심판 날에는 그에 관하여 설명하게 되리라』(마 12:36).<br/><br/>『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혀로 이길 것이요, 우리의 입술은 우리의 것이니 누가 우리를 주관하는 주가 되리요?” 하였으니』(4절). 4절에서는 자신의 혀와 입술로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죄인들이 보인다. 그들은 “내 입 가지고 내가 말하는데 무슨 상관이야!”라고 하는 자들과 같다. 이 얼마나 교만하며 오만한 태도인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나 완고하고 이기적이며, 얼마나 아집에 싸여 있고 배려가 없으며, 또 비수와 같은 자기 혀로 스스로를 찌르고 더럽혀 지옥에서 불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혀는 불이요, 죄악의 세상이라. 그처럼 혀는 우리 지체들 가운데 있으면서 온몸을 더럽히며, 또 일생을 불태우나니, 곧 지옥의 불에서 태우느니라』(약 3:6).<br/><br/>말에는 힘과 위력이 있다. 인류가 거쳐 온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는 늘 말이 있었고, 갈등과 분열의 회오리 속에서 사람들을 움직였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로 유명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평등 세상을 역설한 마틴 루터 킹,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무”임을 천명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은 죄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데려가는 힘이 있었다. 그 말이 성도를 대적하는 무기로 사용될 때 그것은 총칼보다도 위력 있는 무기가 된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에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 내 눈물이 밤낮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시 42:3).<br/><br/>대환란 때 적그리스도는 그의 혀를 비수처럼 놀려 하나님을 모독하고 환란 성도들을 박해할 것이다. 『그 짐승이 큰 일들과 모독하는 말들을 하는 입을 받았으며 또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더라. 그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 그가 성도들과 싸워 그들을 이기는 권세를 받았으며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더라』(계 13:5-7). 환란 성도들은 무엇을 바라며 이 고난을 견뎌낼 것인가?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실 주님을 이제나 저제나 바라며 견뎌 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한 번 드려지셨고, 두 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 없이 나타나시리라』(히 9:28). 그리하면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게 될 것이며 멸망이 닥칠 때에도 그것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라.』(욥 5:21)는 말씀 그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시편 12:5에서 바로 이 점을 약속하신다! 『주가 말하노라. 가난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서리라. 내가 그를 비웃는 자로부터 그를 안전한 곳에 두리라.』 주님께서 셋째 하늘에서 일어서시는 것은 재림이다. 대환란 때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아 가난하게 사는 환란 성도들이며, 그들을 『비웃는 자』는 적그리스도이다. 적그리스도의 혀의 채찍에 고통당하며 주님을 바랄 때, 주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휴거시키실 것이다. 신약 성도인 우리 역시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악한 말들의 홍수로 하늘의 본향을 간절히 사모할 수 있다. 날마다 밀려드는 신성모독적인 말들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안전한 품을 더 간절히 사모할 수 있다.<br/><br/>주님께서 『주가 말하노라. 가난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서리라. 내가 그를 비웃는 자로부터 그를 안전한 곳에 두리라.』(5절)고 구원을 약속하시자, 다윗은 화답한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다윗은 그를 안전한 곳에 두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곧바로 표명한다. 주의 말씀은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된 순수한 은처럼 순수하며, 그 말씀들은 온전히 보존되어 그대로 성취될 것이기에 그 순수한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겠다는 것이다.<br/><br/>주님의 말씀은 진리의 확실성과 거룩함과 신실함에 있어서 잘 정련된 은처럼 순수하다.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고 흔들림 없는 본성이 그 말씀의 순수성 보존의 이면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된 것이 하나도 없고, 인간에게 아첨하거나 교만한 말이 없으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원에 우뚝 솟아 계신 분의 권위를 지닌다. 성경은 두 마음이 아닌, 주님의 한 마음으로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악인들의 말과 달리 거짓과 아첨과 속임수와 왜곡이 없다.<br/><br/>순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것에 끌린다. 『주의 말씀이 매우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하나이다』(시 119:140). 그러나 순수한 말씀에 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도는 순수한 말씀으로 순수하게 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 일은 일곱 번 정화된 은처럼 정련된 순수한 말씀으로만 가능하며, 부패한 성경들은 이 일을 결코 할 수가 없다. 주님은 『정련하는 자의 불』(말 3:2)과 같은 분이시다. 주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과 같다(시 12:6). 정련하는 자의 불과 같은 주님께서 일곱 번 정화된 은과 같은 말씀으로 성도 각인을 정련시키신다. 주님은 그 말씀으로 우리를 경건하고 신실한 성도들로 변모시키신다. 순은처럼 깨끗게 하셔서 하나님의 순수한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<br/><br/>경건한 자가 사라져 가는 이 마지막 때에 경건한 자로 남을 이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정련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뿐이다.<br/><br/>시편 12편은 7절의 말씀 보존에 대한 말씀으로 끝나지 않고 8절에서 끝난다. 확실한 구원의 약속(5절)과, 말씀 보존에 관한 견고한 신뢰(6,7절)와는 달리, 8절은 여전히 암울한 현실이다. 『지극히 비열한 사람들이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도처에서 횡행하는도다』(8절). 주님의 구원의 약속이 주어졌어도 세상은 여전히 악하다. 세상은 금세 뒤집어지지 않는다. 순수한 말씀을 믿는 성도에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과 인내와 기다림이 요구되는 것이다! 대중매체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비열한 죄인들이 악한 것들을 말하며 높임을 받고 있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모든 부도덕과 폭력과 잔인과 음란과 살인과 거짓과 술 취함과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사랑과 속임수로 스스로를 파멸시킬 때, 성도는 단련된 주의 말씀을 방패삼아 스스로를 보호하고(시 18:30), 그 순수한 말씀으로 지속적으로 정화되어 온전한 성화에 이르러야 한다. 보존된 순수한 말씀을 믿고 행하는 성도의 자세는 그러해야 하며, 그 순수한 말씀으로 온전히 성화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날 때, 그보다 기쁘고 복된 일도 없을 것이다. 『화평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 5:2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14 Jun 2024 11:54:1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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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나는 주의 얼굴을 뵈리라</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6/%EB%82%98%EB%8A%94-%EC%A3%BC%EC%9D%98-%EC%96%BC%EA%B5%B4%EC%9D%84-%EB%B5%88%EB%A6%AC%EB%9D%BC/</link>
<description><![CDATA[시편 17편은 &#034;다윗의 기도&#034;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034;다윗의 시&#034;라고 되어 있는 것들과 달리, 본 시편은 그것이 &#034;기도&#034;라는 것을 강조한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034;시&#034;보다는, 마음으로 직접 다가가는 &#034;기도&#034;가 더 절박하고 간절하며, 화자와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느끼게 한다. &#034;다윗의 기도&#034;인 시편 17편은 1) 다윗이 주님께 변호해 주실 것을 간구함(1,2절) 2)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으나 무죄가 증명됨(3-5절) 3) 기도응답과 자애와 보호를 간구함(6-9절) 4) 기름진 사자와 같은 악인(10-12절) 5) 사람들로부터 구해 주실 것을 간구함(13,14절) 6) 영원을 향한 결연한 의지(15절)로 구성되어 있다.<br/><br/>『오 주여, 의로운 자에게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이시고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는 거짓된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이다』(1절). 다윗은 기도의 시작부터 자신을 &#034;의로운 자&#034;로 제시한다. 자신의 기도는 거짓된 입술이 아닌 참된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이므로, 자신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이시어 응답해 주실 것을 주님께 기도한다.<br/><br/>『오 주여, 의로운 자에게 들으소서.』 기도를 시작하는 이 말은 기도에 관한 기본자세를 보여 준다. 주님은 의로운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거룩하신 주님께 기도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자신을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해야 한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그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 59:1,2). 기도하기 전, 자신과 주님 사이를 가로막는 죄가 있는지 살펴보라.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지만(히 4:16), 거기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마음을 닫게 하는 죄를 없애야 한다.<br/><br/>『나의 변호가 주의 임재로부터 나오게 하시고 주의 눈은 공평한 것들을 보소서』(2절). 다윗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변호하기를 원치 않았다. 주님께서 해주시기를 원했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할 수 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이 지닌 죄성의 속성이다(창 3:12,13). 그러나 다윗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판단하시고 주님께서 변호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<br/><br/>다윗은 주님 앞에서 자아를 부인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 인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이미 판단하고 자신하고 있었지만(1절), 그것은 자신을 직접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여 승리하기 위해 구축해 놓은 다윗 자신의 의였다. 그는 악한 현 세상을 살아가는 &#034;영적 처세술&#034;을 터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이 옳다고 판결하시고 그를 위해 변호하실 수 있는 조건을 다윗 스스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주의 눈은 공평한 것들을 보소서.』라고 했을 때, 그것은 모든 판단에 있어서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다윗과 악인 사이에서 분명 『의로운 자』인 다윗의 손을 들어주실 것을 확신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다윗은 이 점에 있어서 무척 자신만만했다.<br/><br/>성도가 의지하고 바라는 하나님은 모든 판단에 치우침이 없는 공평하신 분이시다. 이 악한 현 세상은 불의가 판을 치고 악인이 득세하며 재판에서조차 왜곡된 것을 말하지만, 이 모든 부조리 속에서도 희망을 붙들 수 있는 것은 『의로운 자』를 지켜 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034;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034;고 하였느니라』(롬 12:19). 의를 행하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도록 하라. 『사람의 행위가 주를 기쁘시게 하면 주께서 그 사람의 원수들까지도 그와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br/><br/>『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고 주께서 밤에 나를 찾아 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리니 나는 내 입이 범죄하지 아니할 것을 작정하였나이다』(3절). 다윗은 『전쟁의 사람』(삼하 17:8)으로서 전쟁에서도 담대했지만, 마음이 몹시도 정결하여 죄에 대한 시험과 감찰에 있어서도 담대했다. 다윗은 이보다 더 담대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생각들을 아소서. 내게 무슨 악한 길이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여기서는 아예 하나님께 마음을 살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죄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분께 드리는 매우 &#034;두려운&#034; 기도이다. 죄가 발견되어 &#034;재판관&#034;께 판단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려는가?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판단했을 때 정죄받을 부분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성도가 하나님께 필요를 간구할 수 있는 담대함을 얻는 때는(1절), 이처럼 그의 마음이 그를 정죄하지 않을 때이다. 『이는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더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의 목전에 기쁨이 되는 일들을 행함이라』(요일 3:20-22). 우리가 받은 구원은 공짜이지만, 기도응답은 주님 앞에서 얼마나 바르게 행했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그분의 목전에 기쁨이 되는 일을 행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할 때 주님께 필요를 놓고 담대하게 간구하면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다.<br/><br/>『인간의 언행에 관해서는 내가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멸망시키는 자의 길에서 나를 지켰나이다』(4절). 이 구절은 다윗이 3절과 같은 담대함을 지닐 수 있었던 &#034;비결&#034;을 보여 준다. 그것은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입이 범죄하지 아니할 것을 스스로 작정하였고(3절), 그 작정을 『주의 입술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것으로 실행에 옮겼다.<br/><br/>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말(word)이 있다. 하나는 &#034;인간의 입술의 말&#034;이고, 또 하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이다. 그중 멸망시키는 자의 길에서 지켜 주는 것은 『주의 입술의 말씀』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 앞에 온 자는 다 도둑들이요 강도들이라.』(요 10:8)고 하셨는데, 초림 때의 주님보다 먼저 온 자들은 헬라의 철학자들이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토, 아리스토텔레스, 프로타고라스 등이 이에 속한다. 그들은 &#034;인간의 입술의 말&#034;로 혼들을 도둑질하고 강도질하여 멸망으로 이끌었다. 그들뿐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배격하는 모든 철학자들과 성경 변개자들, 배교한 기독교 학자들, 교육가들, 종교 지도자들이 이에 속한다. 주님은 주님 앞에 온 도둑들과 강도들에 대해 『양들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고 하셨는데, 『선한 목자』(요 10:11)를 따르는 양들은 도둑들의 입술의 말을 듣지 않고 『주의 입술의 말씀』을 듣는다. 『도둑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오지만』(요 10:10), 『주의 입술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는 그 멸망시키는 자들의 길에서 자신을 지켜 낼 수 있게 된다.<br/><br/>『내 발걸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나의 걸음을 주의 길들 안에 세우소서』(5절). 이 말씀은 시편 119:133과 짝을 이룬다. 『나의 걸음들을 주의 말씀에 고정시키시어 어떤 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성도의 발걸음이 멸망시키는 자의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길은, 『주의 입술의 말씀』에 자신의 걸음들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이다.<br/><br/>『오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이는 주께서 내게 들으실 것임이니이다.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시어 내 말을 들으소서. 주를 의뢰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일어선 자들로부터 주의 오른손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오 주여, 주의 놀라운 자애를 나타내소서』(6,7절). 1-5절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한 다윗은 본문 6,7절에서 매우 간절하고 절박한 심경을 토로한다. 그가 구원을 위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주의 오른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034;주의 오른손&#034;과 &#034;주의 팔&#034;로 여러 차례 언급되신다(사 41:10; 51:9; 53:1; 62:8, 시 20:6; 48:10; 60:5). 이 구절들은 환란 때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재림을 다루고 있다. 『주의 오른손』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뜻하며, 이것이 본문 6,7절의 전후 문맥을 설명해 준다. 즉 &#034;재림&#034;인 것이다. 따라서 본문 1-5절은 자신들의 흠 없는 의를 주장하는 유대인 환란성도들을 보여 주고, 6,7절의 『주의 오른손』은 재림을 살짝 비춰 주며, 이후 8절부터는 대환란(8-12절)과 재림(13,14절)과 영원(15절)에 관한 내용들이 전개된다.<br/><br/>8절에서는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라고 기도하는데, 주님은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을 그분의 눈동자처럼 지키셨듯이(신 32:10), 재림 때에도 그들을 그분의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이는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함이라. 그 영광 후에 그가 너희를 약탈한 민족들에게 나를 보내셨나니, 이는 너희를 손대는 자가 그의 눈동자를 손대는 것이기 때문이라』(슼 2:8). 눈은 신체 중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간에게는 눈이 위협을 당할 때 자동반사적으로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다. 주님께서는 &#034;이스라엘&#034;을 눈에서도 가장 중요한 눈동자로 표현하신다. 이는 그들에 대한 주님의 보호가 어떠할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주님은 주님의 &#034;눈동자&#034;가 상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br/><br/>『주의 날개 그늘』(8절) 역시 주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여 준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034;날개&#034;는 신명기 32:10의 &#034;눈동자&#034;에 이어서 또다시 출애굽과 연결된다. 『마치 독수리 한 마리가 제 보금자리를 휘젓고 자기 새끼들 위에 날개를 퍼덕이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자기 날개 위에 새끼들을 업는 것같이 주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으니』(신 32:11,12). 이것은 예언적으로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광야로 피신하는 이스라엘이 받을 『큰 독수리의 두 날개』와 연결된다(계 12:14). 대환란 때의 이스라엘(특히 유대인 환란성도)은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처럼』(호 2:15) 『자기 먹이를 탐하는 사자』와 『은밀한 곳에 숨어 기다리는 젊은 사자』(시 17:12)인 『악인』(13절), 즉 적그리스도로부터 주님의 눈동자처럼, 그분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보호받게 될 것이다.<br/><br/>『오 주여, 주의 손인 사람들과 이생에서 자기들의 몫을 받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나의 혼을 구하소서. 주께서 주의 감추어진 보화로 그들의 배를 채우셨으니 그들은 자녀들로 가득하고 그들의 남은 재산을 자기들의 아기들에게 남겨 주나이다. 나, 나는 의 가운데서 주의 얼굴을 보리니 내가 깨면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리이다』(14,15절). 시편 17편은 이 세상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즉 『이생에서 자기들의 몫을 받은 세상 사람들』(14절)과, 『주의 얼굴』과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15절). 전자는 동물적 본능, 곧 자기 보호, 자기 번식, 자기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고(시 73:12, 약 5:5, 눅 16:23,25), 후자는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날을 고대하며 현 세상에서 의를 추구하며 살다가 결국 주님을 뵙게 된다. 육신적 본능을 벗어 버리고 &#034;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034;(고후 4:18)에 가치를 두며 사는 일은, &#034;교리적으로&#034;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034;새로운 출생&#034;을 통해서 가능하다(요 3:3-8).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그 죄인의 혼과 몸을 분리시키시어 죄의 몸을 벗게 해주시는데(골 2:11, 롬 6:6), 그때부터 육신의 본능을 벗고 영원을 바라보는 영적 생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진리의 지식으로 성장해 가면서 『주의 얼굴』과 『주의 모습』이 그가 뵙기 원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자리잡게 된다.<br/><br/>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에게는 그와 관련된 또 다른 소망이 있다. 즉 성도 자신이 『주의 얼굴』과 『주의 모습』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일은 그가 &#034;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날&#034;(고전 13:12), 곧 &#034;주님 그대로 주님을 뵙는 날&#034;(요일 3:2)에 이뤄진다. 주의 얼굴을 뵙고 주의 모습을 그대로 뵙는 &#034;휴거&#034;의 그날, 그리스도 안의 모든 성도들은 큰 환희 가운데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모될 것이다. 세상은 이런 우리를 알지 못하며(요일 3:1), 이와 같은 소망을 품을 수도 없다. 성경은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요일 3:3)고 말씀한다. 진리를 실행하며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사는 『독특한 백성』, 주님과의 영원한 통치를 바라며 복음을 증거하는 『왕 같은 제사장』, 죄로 에워싼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함을 추구하는 『거룩한 민족』(벧전 2:9)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14 Jun 2024 10:44:1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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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의의 태양의 말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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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19편은 &#034;악장에게, 다윗의 시&#034;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시의 저자인 다윗은 이 시편을 &#034;자연계와 태양에 관한 묵상&#034;에서 &#034;말씀에 관한 묵상&#034;으로 이끌고, 궁극적으로는 시인 자신의 죄에 관한 묵상으로 귀착시킨다. 따라서 시편 19편은 1) 창조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1-6절), 2)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7-11절), 3) 불완전한 화자 자신에 관한 묵상(12-14절)으로 이루어져 있다.<br/><br/>『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절). 성경에서 하늘들은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을 가리키고, 창공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우주 공간을 가리킨다(창 1:6-8).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늘들 역시 그분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들이다(히 1:10).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분의 능력을 선포하는 계시의 매체이기에 인간은 자연을 보고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롬 1:18-20). 그러나 이 가시적인 세계를 넘어 저 우주의 한없는 공간과 그 안에 있는 것들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그분께서 하신 일을 나타낸다. 그 모든 창조물들은 그것들을 지으신 분께서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나타낼 뿐 직접적인 숭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성경은 피조 세계에 대한 숭배를 금하고 있으며(출 20:4,5, 신 4:14-19; 5:8,9), 창조주께서 만드신 창공의 별들로 점을 치는 일 또한 금하고 있다(사 47:13,14, 렘 10:2). 우리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피조 세계를 신성시하여 우상 숭배하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찬양해야 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말로 바꾸어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음이라. 하나님은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분이로다. 아멘』(롬 1:25).<br/><br/>『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여 주니 말도 없고 언어도 없으며 그들의 음성도 들리지 않으나 그들의 선율은 온 땅을 질러 뻗어 나가고 그들의 말은 세상의 끝까지 다다랐으니』(2-4절). 어쩌면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하다. 낮은 낮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밤은 밤에게 어떤 지식을 보여 준다. 낮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없고, 밤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없다. 낮은 그것이 미치는 모든 곳에, 또 밤은 밤이 미치는 모든 곳에 창조주 하나님에 관하여 계시한다. 창조주께서는 하루 스물네 시간 피조 세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에 펼쳐지는 창조의 위대한 경이를 통해 『세상의 창조 때부터 그분에 속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보여졌고 심지어는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까지도 만들어진 것들에 의해 알려졌으므로』 땅의 죄인들은 변명하지 못한다(롬 1:20). 그들은 어두운 밤에조차 창조주를 부인하기 위해 숨을 곳이 없다.<br/><br/>시편 19:4은 로마서 10:18에서 인용되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실로 들었느니라. 그들의 음성이 온 땅에 퍼져 나갔고 그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느니라.』 이 말씀의 문맥적 의미는 앞선 10:15이 보여 준다.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즉 &#034;복음 전파&#034;이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음성』 곧 &#034;낮과 밤의 시각적인 계시&#034;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알 수 있지만, 그래도 그 죄인들에게 &#034;복음&#034;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강력히 역설하셨던 바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br/><br/>『그가 그들 가운데 태양을 위하여 장막을 세우셨도다. 태양은 신랑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경주하는 강한 남자처럼 기뻐하는도다. 그의 떠오름은 하늘 끝에서부터며 그의 회전은 하늘 끝들까지니 그 열기로부터 숨은 것은 아무것도 없도다』(4-6절). 다윗은 창조물들을 통한 계시의 중심에 &#034;태양&#034;을 부각시킨다. 소경조차도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으니 만민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하는 데 태양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br/><br/>『태양을 위하여 장막을 세우셨도다.』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034;장막절&#034;을 읽는다. 장막절은 주님의 &#034;재림&#034;을 예표하는 명절로,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식』(계 19:7)을 마치고 &#034;신랑방에서 나와 경주하는 강한 남자처럼&#034;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재림하시는(계 19:11-16)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읽게 된다. 『태양은 신랑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경주하는 강한 남자처럼 기뻐하는도다』(5절).<br/><br/>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는 &#034;재림&#034;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화덕같이 탈 날의 &#034;태양&#034;으로 묘사하신다. 『보라, 이는 화덕같이 탈 그 날이 오기 때문이니...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 솟아오르리니』(말 4:1,2). 『의의 태양』이신 주님께서는 의인들에게는 치유하시는 태양으로, 악인들에게는 그들을 불태우는 불길로서 계시되신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살후 1:8,9).<br/><br/>죄인들을 불태우시는 태양으로서의 주님을 야고보서 1:11에서 잘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034;솟자마자&#034; 풀을 마르게 하는, 지금과는 다른 태양이 보인다. 『해는 타는 열기로 솟자마자 풀을 마르게 함으로 풀의 꽃이 떨어져서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나니, 부자도 그의 길이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11). 이 말씀은 대환란 때 사람들을 불로 태우는 태양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지만(계 16:8), 그 직접적인 의미는 『의의 태양』께서 &#034;솟아오르시자마자&#034; 대환란 때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을 지체 없이 심판하시는 &#034;재림&#034;을 나타낸다. 『보라, 주가 불과 함께 올 것이며, 회오리바람과 같은 그의 병거들과 더불어 오리니 진노함으로 그의 분노를, 불꽃으로 그의 책망을 나타내리라. 주가 불로, 또 주의 칼로 모든 육체를 징책하리니 주에게 살육당할 자가 많으리라』(사 66:15,16). 『의의 태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떠오름은 하늘 끝에서부터며 그의 회전은 하늘 끝들까지니 그 열기로부터 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시 19:6). 재림하시어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천년왕국을 수립하시면, 주님의 이름은 해 뜨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즉 온 땅에서 날마다 찬양받으실 것이다(시 113:3).<br/><br/>이후로 시편 19편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 그분의 창조 세계에서 그분의 &#034;말씀&#034;으로 전환된다.<br/><br/>『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시키며,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매한 자를 현명하게 만들고 주의 규례는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며, 주의 계명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주를 두려워함은 순결하여 영원히 지속되고 주의 명령들은 모두 참되고 의로우니, 그것들은 금보다, 정녕 많은 정금보다 더 바랄 만하며, 꿀과 벌집보다 더 달도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로 인하여 주의 종이 경고를 받으며, 그것들을 준수함으로 큰 상이 있나이다』(7-11절).<br/><br/>다윗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그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주의 율법』(7절), 『주의 증거』(7절), 『주의 규례』(8절), 『주의 계명』(8절), 『주를 두려워함』(9절), 『주의 명령들』(9절).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들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데, 특히 『주를 두려워함』(9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께서 두려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계시받고 실제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죄를 짓지 않게 되고(출 20:20), 그 사람의 내면이 깨끗하게 되기에 『주를 두려워함은 순결하』다(9절).<br/><br/>시편 기자는 이러한 말씀들에 관하여 두 가지로 정리한다.<br/><br/>첫째, 그 말씀들은 금보다, 정녕 많은 정금보다 더 바랄 만하며, 꿀과 벌집보다 더 달다는 것이며(10절), 둘째, 그것들로 인하여 주의 종이 경고를 받으며, 그것들을 준수함으로 큰 상이 있다는 것이다(11절).<br/><br/>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도는 금은보화나 혀를 즐겁게 하는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마 4:4, 욥 23:12, 렘 15:16). 말씀으로 죄와 미래에 관해 경고를 받고 그 말씀을 지킴으로써 상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의 영적 필요를 채워 주시는 &#034;하나님의 말씀&#034;으로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되(히 12:1), 이기려고 애를 쓰며 상을 얻게 되도록 열심히 달려야 한다(고전 9:24,25).<br/><br/>『누가 자기의 과오들을 깨달을 수 있겠나이까! 주께서 숨은 과오들로부터 나를 깨끗게 하소서』(12절). 우리에게는 깨닫지 못하고 지나간 숨은 과오들이 있을 수 있다. 드러나게 지은 죄는 아니지만, 망각의 강에 던져진 그것을 다시 꺼내어 씻어야만 한다. 자기 연민 속에 보낸 시간들, 마음으로 자신을 높이며 보낸 시간들,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해 남몰래 괴로워했던 시간들, 정신적으로 게으르거나, 마음속으로 무자비하게 비판하며 지나쳐 버린 일들, 내심 타인의 주의를 끌려고 했던 일들로부터 깨끗게 되어야 한다. 다윗은 그런 류의 죄들을 놓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실 수 있는 분(시 90:8), 즉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생각들을』 아시는 분은 &#034;하나님&#034;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시 139:23).<br/><br/>우리가 잊고 사는 &#034;숨은 과오들&#034;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기 때문이다(히 4:12).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되며(롬 3:20),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말씀으로(롬 7:12) 찔림을 받고(행 2:37) 깨끗이 씻겨진다(엡 5:26). 또한 그 말씀은 우리를 &#034;간음&#034;과 &#034;살인&#034;처럼(다윗의 경우) 미리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034;고의로 짓는 죄들&#034;로부터도 지켜 준다(『주를 두려워함』). 그 죄들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올바르게 만들어 주어 우리를 큰 죄과로부터 순결하게 해준다. 『또 주의 종을 고의로 짓는 죄들로부터 지켜 주시어 그 죄들이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올바르게 되리니 내가 큰 죄과로부터 순결하게 되리이다』(시 19:13).<br/><br/>&#034;숨은 과오들&#034;과 &#034;고의로 짓는 죄들&#034;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보여 준다. 그를 온전케 할 수 있는 것은 &#034;하나님의 말씀&#034;뿐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br/><br/>『나의 힘이시며 나의 구속주이신, 오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의 목전에 받아들여지게 하소서』(14절). 결과적으로 다윗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그분의 말씀을 묵상했을 때 깨닫게 된 것은 바로 그 하나님만이 그의 힘이시며 구속주시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세계와 그분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비참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12,13절), 바로 그 주님께서 그의 숨은 과오들까지도 정결케 해주시는 것만이 자신이 살 길임을 고백한다.<br/><br/>시편 19편은 &#034;창조 세계&#034;(1-6절)와 &#034;주의 말씀&#034;(7-13절)에 관한 묵상으로 양분된 듯하지만, 사실 그 둘의 관계는 드러나지 않게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 관계가 두 부분의 절정인 &#034;6절&#034;과 &#034;12절&#034;에서 발견된다.<br/><br/>6절: 『그[태양]의 떠오름은 하늘 끝에서부터며 그의 회전은 하늘 끝들까지니 그 열기로부터 숨은 것은 아무것도 없도다.』 계시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태양, 곧 『의의 태양』이신 주님께로부터 &#034;숨겨질&#034;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br/><br/>12절: 『누가 자기의 과오들을 깨달을 수 있겠나이까! 주께서 숨은 과오들로부터 나를 깨끗게 하소서.』 말씀을 다루는 관련 문맥(7-13절)과, 말씀의 경고 기능을 볼 때(11절), 이 구절은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는(히 4:12) &#034;주의 말씀&#034;이 우리의 &#034;숨은&#034; 과오들을 드러내어 깨끗게 해주실 것임을 보여 준다.<br/><br/>시편 19편은 &#034;그 어떤 것도 그 앞에 숨겨질 수 없는&#034; 『의의 태양』과 &#034;그분의 말씀&#034;에 관한 묵상이다. 그 앞에 비밀로 간직된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도 알려지고 공개되지 않을 것이 없다(눅 8:17). 심판은 재림에 앞서 그리스도인들에게서부터 먼저 시작된다(벧전 4:17). 그때 『주께서 어두움에 감추어진 것들에 빛을 비추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나타내시리라.』(고전 4:5)고 말씀하신다. &#034;숨길 수 없다면&#034; 지금 말씀의 빛으로 드러내어 자백하고 용서받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가 죄들을 자백하면 주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이다(요일 1:9).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14 Jun 2024 10:18:2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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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6/%EC%9A%B0%EB%A6%AC%EC%97%90%EA%B2%8C-%EC%9E%90%EB%B9%84%EB%A5%BC-%EB%B2%A0%ED%91%B8%EC%86%8C%EC%84%9C/</link>
<description><![CDATA[시편 33편<br/><br/>특별히 표제가 달려 있지 않은 시편 33편은 주님께 보호받고 싶어 하는 성도를 위한 시이다. 이 시에서는 주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성도가 그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진리를 위해 사는 일이 힘에 부치는 이에게 시편 33편은 큰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br/><br/>『오 너희 의인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찬양은 정직한 사람에게 합당한 것이니라. 하프로 주를 찬양하고 솔터리와 열 줄 악기로 그분께 노래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분께 노래하며 큰 소리로 정교히 연주할지어다. 주의 말씀은 옳으며 그의 모든 역사는 진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도다』(1-4절).<br/><br/>&#034;의인&#034;의 기쁨은 『주 안에서』 이루어진다. 의인은 다른 데서 기쁨을 찾을 수 없다. 의인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육신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는 것이다. 의인은 자신이 주 안에서 찾은 기쁨을 찬양으로 표현한다. 찬양은 주 안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의인에게 합당하고 즐겁고 좋은 것이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이는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이 좋으며 그것이 즐거움이요, 찬양은 합당한 것임이라』(시 147:1). 화나고 짜증난 얼굴로 찬양하는 의인이 있겠는가? 하나님께 불만을 품은 채 노래하는 의인이 있겠는가? 찬양은 꽃처럼 활짝 피어난 기쁨이요, 주님을 기뻐하는 의인에게 주어진 찬란한 하늘의 특권이다.<br/><br/>『하프로 주를 찬양하고 솔터리와 열 줄 악기로 그분께 노래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분께 노래하며 큰 소리로 정교히 연주할지어다』(2,3절). 의인들의 찬양에는 하프와 솔터리, 열 줄 악기 같은 악기들이 동반된다. 그들은 새 노래로 찬양하며, 그들의 연주는 소리가 크며 장엄하고 정교하다. 하나님께서는 모양새가 아닌 마음의 진실을 원하는 분이시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을 향한 찬양과 연주는 본질적으로 최상의 화음과 최상의 연주로 드려져야 한다. 성경은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정교하게 연주하라고 명령한다. 주님은 큰 소리와 정교한 연주로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셋째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사들의 찬양과 연주가 이 땅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천상의 화음과 정교함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것은 그리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곳에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드리는 이 땅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가장 원천적인 천상의 능력으로 크고 정교한 찬양이 울려 퍼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br/><br/>그럼에도 이 땅의 성도가 자신이 찬양을 잘하든 못하든 주님을 기뻐하며 마음의 진실을 담아 노래하는 것은, 그가 믿고 따르는 주님의 말씀이 옳고 그분의 모든 역사가 진리 가운데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은 옳으며 그의 모든 역사는 진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도다』(4절). 본 시편에서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이유를 시편 92편에서도 동일하게 노래한다. 『오 지극히 높으신 분이여, 주께 감사를 드리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 좋사오며, 아침에는 주의 자애를,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되 열 줄 악기와 솔터리와 장중한 소리를 내는 하프로 하는 것이 좋으니이다. 주여, 주께서는 주의 역사를 통하여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내가 주의 손의 역사들로 인하여 기뻐 외치리이다』(시 92:1-4).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모든 역사가 기쁘지 않다면 다윗처럼 기뻐 외칠 수 없다. 진리의 말씀을 기뻐하는 성도만이 주님께서 행하신 진리의 역사로 인하여 주님을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br/><br/>『그가 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니 땅은 주의 선하심으로 충만하도다』(5절).<br/><br/>땅은 주님께서 지상에 재림하시기 전에는 죄가 충만하므로 아직은 주님의 선하심으로 충만하지 않지만, 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성도에게는 주님의 선하심이 충만히 베풀어진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빌 4:19). 그러나 의와 공의가 없는 세상 죄인들은 살인과 폭력, 술, 마약, 음행, 우상 숭배에 대한 징벌로 갈수록 모든 필요 요소들이 고갈되다가 결국 대환란의 전무후무한 황폐함으로 들어가게 된다.<br/><br/>『주의 말씀에 의하여 하늘들이 지음을 받았으며 그것들의 모든 군상도 그의 입김으로 되었도다. 그는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음을 창고에 두시는도다. 온 땅은 주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은 그를 두려워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것이 이루어졌고 그가 명령하시니 그것이 확고히 섰도다』(6-9절).<br/><br/>시편 기자는 본문 4절에서 『주의 말씀은 옳으며 그의 모든 역사는 진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도다.』(4절)라고 노래했다. 위의 말씀들은 주님의 옳은 말씀으로 이뤄진 그분의 모든 역사의 중심에 창세기 1장의 창조가 있음을 노래한다. 세상의 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거듭나지 못한 마귀의 자식들로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만의 자식들을 다스리는 왕』(욥 41:34)인 마귀를 그들의 아비로 두고 있기에(요 8:44) 그들의 교만한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는 우주의 역사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경의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상상으로 지어 낸 초자연적인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br/><br/>그러나 성경은 &#034;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고 명령하신 것이 확고히 선&#034;(9절) 창조주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두려워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God said... and it was so].』가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창 1:9,14,15,24,29,30). 말씀만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라면 그 말씀의 권위와 능력 앞에 엎드림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말씀하시자 그것이 이루어지고 명령하시자 그것이 확고히 섰다면, 그 말씀의 하나님은 온 우주에 단 한 분밖에 없는 &#034;참 하나님&#034;이심이 분명하다. 『거룩한 분이 말하노라.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또한 내가 누구와 동등하게 되겠느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으며, 그들의 군상들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셨는지 보라. 그가 그들의 이름을 그의 막강한 위력으로 모두 부르시나니 이는 그의 권세가 강하고 하나도 부족함이 없으심이라』(사 40:25,26).<br/><br/>『주께서 이방의 계략을 좌절시키시고 백성들의 계책을 무효로 만드시는도다. 주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마음의 생각들은 모든 세대까지 서리로다. 자기들의 하나님이 주이신 민족은 복이 있으며 주께서 자기 유업으로 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도다』(10-12절).<br/><br/>본문에서는 『이방의 계략』과 『주의 계획』이 대조를 이루고, 『백성들의 계책』과 『그의 마음의 생각들』이 대조를 이룬다. 6-9절에서 묘사한 두려우신 창조주께서는 그분의 계획으로 이방의 계략을 좌절시키시고, 그분의 마음의 생각들로 백성들의 계책을 무효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모시고 그분께서 자신의 유업으로 택하신 백성은 분명 복이 있다.<br/><br/>이 창조주의 백성은 이스라엘이다. 『자기들의 하나님이 주이신 민족』은 이스라엘이다. 이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도전한다. 『오 너희 백성들아, 단결하라. 그래도 너희가 산산이 부서지리라. 너희 먼 나라들의 모든 사람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는 허리를 동이라. 그래도 너희가 산산이 부서지리라. 너희는 허리를 동이라. 그래도 너희가 산산이 부서지리라. 함께 의논하라. 그래도 아무것에도 이르지 못하리라. 말을 하라. 그래도 서지 못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사 8:9,10).<br/><br/>대환란 때 UN의 2억 명의 군대는 『이방의 계략』과 『백성들의 계책』으로 이스라엘을 총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한 『주의 계획』과 『생각들』은 그들을 그렇게 하나로 모아 한 번에 처리해 버리시는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일어나서 먹이로 삼는 날까지 나를 기다리라. 이는 내 결심이 민족들을 모으는 것임이니 내가 왕국들을 모아서 그들 위에 내 분노, 곧 나의 모든 격노를 쏟으리라. 이는 온 땅이 내 질투의 불로 삼켜질 것임이라』(슾 3:8).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심판을 어찌 헤아리며 그분의 지나간 길을 어찌 찾아내리요?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의논자가 되었느냐?』(롬 11:33,34)<br/><br/>『주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들의 아들들을 보고 계시는도다. 주께서 그의 처소에서 땅의 모든 거민들을 바라보시는도다. 그가 그들의 마음을 비슷하게 지으시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살피시는도다』(13-15절).<br/><br/>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그들 모두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의 눈』은 온 땅을 두루 살피시고(대하 16:9), 어느 곳에서나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살피신다(잠 15:3). 하나님께서는 비슷한 마음들을 가진 사람들의 아들들의 행위를 일일이 살피신다. 그들의 비슷한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한 마음이며(렘 17:9), 그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는 동일하다. 왕이든지 거지든지 그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간음과 음행과 살인과 도둑질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눈과 하나님을 모독함과 교만과 어리석음』(막 7:21,22)이다. 이러한 것들로 더럽혀진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지옥밖에 없다.<br/><br/>첫째 아담의 실패로 타락해 버린 마음은 이제 바뀌어 그 행위가 달라질 수 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변화된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히 10:21,22).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이 정결케 되어 죽은 행실을 버리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히 9:14). 마음이 타락한 세상 모든 죄인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성경대로 믿고 섬기는 것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벧후 3:9). 당신은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이 뜻을 알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딤후 4:2).<br/><br/>『많은 군대로 구원받은 왕이 없으며 막강한 힘으로 구제받은 용사도 없느니라. 안전을 위해서는 말도 부질없는 것이요, 그 막강한 힘으로 아무도 구해 내지 못하리라』(16,17절).<br/><br/>『주의 눈』이 머무는 곳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034;전쟁&#034;이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하는 말은, 만일 전쟁이 터지면 다 죽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을 통해 많은 죽음을 직접 목격한 이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전쟁은 죽음의 참혹한 향연이다. 때문에 왕은 자신의 많은 군대로 구원받으려 할 것이고, 용사는 자신의 막강한 힘으로 구제받으려 할 것이며, 말을 탄 군인은 말을 의지해 구해 냄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러한 것들로 구해 냄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의 눈』이 머무는 사람들, 곧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구해 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쟁의 날을 위하여 말이 예비되어도, 구원은 주께 속한 것이니라』(잠 21:31).<br/><br/>말하자면 이것은 &#034;신뢰를 누구에게 두느냐&#034;의 문제이다. 전쟁을 벌이는 왕이 많은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용사가 자신의 막강한 힘을 사용해 적을 격퇴하고, 기병이 말을 타고 출전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그러한 것들을 신뢰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려 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br/><br/>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성도는 구원에 대한 기대를 주님께 두어야 한다. 『내 혼아, 너는 하나님만 기다리라. 나의 기대가 그로부터 오는도다.』(시 62:5)라고 말하며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선택 속에 갈등하는 인생길에서 언제나 주님을 신뢰하는 길만을 택해야 한다. 이 &#034;신뢰를 누구에게 두느냐&#034;의 문제는 성도가 그의 인생의 갈등 속에서 풀어야 할 문제이다. 그것은 쉬우면서도, 알면서도, 결코 답을 쉽게 적어 내지 못하는 문제이다. 많은 성도들이 이 쉬운 문제의 답을 머뭇거리다 적어 내지 못해, 이 &#034;한 문제&#034;로 된 인생의 시험에 영점처리되고 말았다. 당신의 신뢰 점수는 몇 점인가?<br/><br/>『보라, 주의 눈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 위에 있으며 그의 자비를 바라는 자들 위에 있어 그들의 혼을 사망에서 구해 내시며 기근 속에서도 그들을 살게 하시는도다. 우리의 혼이 주를 기다리니 그는 우리의 도움이시며 우리의 방패시라. 우리의 마음이 그를 즐거워하리니 이는 우리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했기 때문이라. 오 주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소서』(18-22절).<br/><br/>성도라고 하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보호받지 못하며 살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의 자비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마음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그가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우물에는 그것을 판 사람이 있다. 때지 않은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 성도여, 주님의 보호를 받고 싶은가? 당신도 마음이 즐겁고 싶은가? 그렇다면 주님의 자비를 바라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하라. 당신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그 답답한 의심과 불신을 벗어 버리고,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맑고 청명한 믿음으로 나아오라!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자. 이는 우리가 자비를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함이라』(히 4:16).<br/><br/>주님을 두려워하는가? 주님의 자비를 바라는가? 인생의 고난 가운데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신뢰했는가? 그렇다면 『주의 눈』은 바로 &#034;당신&#034; 위에 머물고 있다. 당신은 지금 겪고 있는 그 고난에서 반드시 구해 냄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 소망을 두는 한, 주님께서도 당신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4 Jun 2024 15:01:0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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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빵의 향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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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밥의 향기”라는 말은 어색한데, “빵의 향기”라는 말은 왠지 자연스럽다. 밥 짓는 냄새는 식도 아래쪽을 움직여서 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하지만, 빵 굽는 냄새는 식도 위쪽을 자극해서 그 향을 한껏 들이마시게 한다. 당장 먹고 싶다기보다는 우선 반쯤 감은 눈으로 미소를 띠며 어느새 빵의 향기를 즐기게 된다. <br/><br/>밥 냄새가 이성(理性)이라면 빵 냄새는 감성(感性)이다. 물로 짓는 밥에는 육신의 식욕이 반응하지만, 계란, 설탕, 버터, 계피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드는 빵은 식욕은 물론, 재료들의 융화된 모양새와 향으로 인해 감상(感想)을 낳는다. 물로 부풀어서 차지게 익은 밥은 무게감이 있고, 빵은 효모로 팽창되어 공기를 품은 탓에 가벼운 이미지를 갖는다. 못 먹고 살던 시절에 밥에 대한 예찬이 생겼다면, 잘 먹고 사는 지금은 베이커리의 화려한 진열대에서 빵에 대한 예찬이 터져 나온다.<br/><br/>그리스도인에게는 그가 찬양하는 “빵”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분이기 때문이니라』(요 6:3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빵』이라 하셨고, 또 『생명의 빵』(요 6:35,48),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 6:41,50,58),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요 6:51)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또 내가 줄 이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나의 살이라』(요 6:51). 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는 깊고 진한 생명의 향기가 있다. 그 빵이신 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구워지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향을 흠향하셨다.<br/><br/>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흠향하신 하늘의 빵이시다. 그 “예수”라는 이름에는 쏟아 놓은 향유 같은 향기가 있기에 정직한 성도들의 기쁨이 되었고 신실한 성도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신의 좋은 향유 내음으로 인하여 당신의 이름이 쏟아 놓은 향유 같으므로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우리가 당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억하리이다. 정직한 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솔 1:3,4). <br/><br/>“예수,” 그 이름에는 향기가 있다. 이 세상 그 어떤 이름에 향기가 있으리오! 하지만 “예수”에는 그 이름을 말할 때마다, 들을 때마다 향기가 난다. 마리아가 매우 값진 감송 향유 한 리트라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자 그 집이 향유 냄새로 가득 찼을 때(요 12:3), 마리아는 “주님의 장례 날”을 위해 향유를 부어드린 것이었다(요 12:7). 즉 주님께서는 그분의 죽음에도 향기가 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으신 후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 거룩하신 이름은 온 세상에 “쏟아 놓은 향유” 같이 되어 전 세계의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그 향기를 알기 위해 그분께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향기로 온 세상을 뒤흔들어 버린 이름을 알아가는 일은 너무도 고상하여서, 싯다르타, 간디, 히틀러, 마르크스, 니체 같은 이름들을 아는 일은 배설물에 코를 대고 있는 것과 같을 뿐이다. 『실로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요』(빌 3:8). <br/><br/>“예수,” 그 향기로운 이름에는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에 우리를 영원히 묶어 놓은(롬 8:35-39), 하나님의 뜨거운 피(행 20:28)가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빵』의 향기를 맡으라! 그 빵을 먹으라(요 6:51). 갈보리 십자가에서 구워진 『생명의 빵』의 향기는 당신을 구원하는 생명의 향기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30 May 2024 11:59:5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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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늙고 백발이 되어도 주의 능력을 전하리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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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71편은 구원받은 이후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진리를 위해 싸운 그리스도인이 가슴 깊이 묵상하며 읽을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034;모두&#034;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도록 주어진 것이기에(딤후 3:16,17), 비록 이 말씀을 읽는 성도가 젊은 나이일지라도 계속적인 섬김을 다짐하면서 읽을 수 있는 시편이기도 하다.<br/><br/>『오 주여, 내가 주를 신뢰하나이다. 나로 결코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1절). 이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034;화자&#034; 자신이 결코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라는 강렬한 호소이다. 치욕이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돌려지기를 기도하는 것인데, 이것은 본 시편 전체에 흐르는 화자의 바람이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에서, 불의한 자와 잔인한 자의 손에서 구하소서』(4절). 『오 하나님이여, 내게서 멀리 계시지 마소서. 오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혼을 대적하는 자들로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시고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비방과 치욕으로 덮이게 하소서』(12,13절). 『내 혀도 온종일 주의 의를 말하리니 이는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낭패를 당하였으며 그들이 수치를 당하였음이니이다』(24절).<br/><br/>주님을 &#034;신뢰&#034;하면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여러 페이지에서 메아리치는 당연한 진리이다(시 22:5; 31:1 등). 성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여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감춰진 수치스러운 일들을 버리고(고후 4:2) 의를 행함으로써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계 3:18). 또한 주님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 기꺼이 고난을 당할 줄도 알아야 한다(히 13:13).<br/><br/>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그분 앞에서 두 가지 감정 중 하나를 갖게 될 것인데, 즉 &#034;수치&#034; 아니면 &#034;담대함&#034;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분 안에 거하라. 이는 그가 나타나실 때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며, 그가 오실 때 그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034;나는 주님 앞에 섰을 때 담대함을 가질 만한 삶을 현재 살고 있는 것인가?&#034; 진정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면, 이 질문을 날마다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br/><br/>본 시편의 화자는 늙어서 머리가 허옇게 세었을 인물이다. 『늙은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고 내 기력이 쇠할 때에 나를 내버리지 마소서』(9절). 『이제 내가 늙고 백발이 된 후에도 오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18절). 이처럼 인생의 여로 끝에 다다른 화자는 &#034;계속해서&#034;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비록 늙었어도 &#034;계속해서&#034;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034;주님께서는 내가 &#039;계속해서&#039; 의지할 굳건한 처소가 되어 주소서&#034;(3절). &#034;나의 소망이신 주님께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의지이셨고, 또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붙드시고 내 어머니의 배에서 꺼내신 분도 주님이시니 나는 &#039;계속해서&#039; 주님을 찬양할 것이니이다&#034;(5,6절). &#034;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다 해도 나는 &#039;계속해서&#039; 소망을 지니고 더욱더 주님을 찬양할 것이니이다&#034;(13,14절). &#034;주님께서 나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기에 내가 지금까지 주님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으니, 이렇게 늙고 백발이 된 후에도 내가 주님의 능력을 이 세대에 전하고 주님의 권능을 장차 올 모든 사람에게 전할 때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034;(17,18절). 그러면서 화자는 찬양이 가득한 탄성을 올려 드리기를 잊지 않는다.<br/><br/>『오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심히 높으시니 주께서 위대한 역사들을 이루셨나이다. 오 하나님이여,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19절) &#034;모태에서 백발까지&#034; 전 생애를 훑어보니, 주님의 의는 심히 높고 주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들을 이루신 것이다. 이렇듯 아무도 비교될 자가 없으신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부디 나를 버리지 마시고 계속해서 내 굳건한 처소가 되어 주시라는 것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간절한 바람이다. 『내 입이 주의 의와 구원을 종일 전하리니 내가 그것을 헤아릴 수 없음이니이다. 내가 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리니 내가 주의 의, 곧 주의 의만을 선포하리이다』(15,16절).<br/><br/>성도의 인생에서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고 버림당하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다. 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있었다면 이런 아쉬움이야 그저 그치지 않는 야욕에 불과하겠지만, 그동안의 섬김의 목적이 주님을 향한 올바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점이 가장 슬픈 일이 된다. 바울이 자신을 강하게 억제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열망 때문이었다.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전 9:27). 우리는 바울이 결국 버림받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자기 몸을 쳐서 온전히 복종시킴으로써 믿음의 경주를 완주했던 것이다. 섬김에 대한 아쉬움은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여 드리고자 하는 &#034;거룩한 야망&#034;에 불타올랐던 성도들에게만 합당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음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야망만이 필요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고자 하는 야망! 살든지 죽든지 이 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게 하려는 야망! 오직 그것만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야망을 누가 갖고 있는지 주시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당신은 그분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내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그것을 구하시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요 8:50).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주시하신다. 당신에게는 이 거룩한 야망이 있는가? 지금껏 섬김의 자리에서 무엇을 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했는가, 아니면 남몰래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켰는가?<br/><br/>『내 원수들이 나에 대해 말하며 내 혼을 숨어 기다리는 자들이 함께 의논하여 말하기를 &#034;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으니 그를 쫓아가서 잡으라. 그를 구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034; 하오니』(10,11절). 나이가 들어 백발이 되어도 성도의 영적 전쟁은 그치지 않는다. 칼렙은 백발임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보소서... 오늘에 내가 팔십오 세니이다. 나는 모세가 그 날 나를 보내었을 때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강건하며 나의 힘이 그때처럼 지금도 강건하여 전쟁을 위하여 나가고 들어올 수 있나이다』(수 14:10,11). 마귀는 나이를 가리면서 공격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다고 한가로이 뒷짐이나 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섬김에 있어서 무자격자이다. 누구든지 정복을 당한 자는 정복한 자의 종이 되는 것이다(벧후 2:19). 영적 전쟁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경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엡 6:10,11).<br/><br/>불완전한 인간이 늙어서 백발이 되기까지 영적 전쟁을 치르다 보면 고난이 많아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고난은 주로 죄에서 기인하는데, 본 시편의 화자는 그 점에 관해서 위로를 구하고 있다. 『나에게 크고 쓰라린 고난을 보여 주신 주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며 땅의 깊은 곳에서 나를 다시 끌어올리시리이다. 주께서 나로 더욱 창대케 하시며 모든 면에서 나를 위로하시리이다』(20,21절). 화자는 다윗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밧세바와 간음한 죄와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죄로 인해 아들들인 암논의 죽음과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을 겪어야 했고, 인생 말년에는 백성을 계수한 죄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쓰러져 죽는 것을 쓰라리게 지켜봐야 했다. 그런 다윗은 죽은 뒤에 그의 혼이 『땅의 깊은 곳』인 지하 세계의 낙원으로 내려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 함께 끌어올려져 지금은 셋째 하늘의 낙원에서 안식하고 있다(마 27:51-53, 엡 4:8). 『주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며 땅의 깊은 곳에서 나를 다시 끌어올리시리이다.』 이제 다윗의 몸은 천년왕국 이전에 문자적으로 일어나서(겔 37:1-10) 왕국에 들어갈 것이며, 그곳에서 분열되지 않고 한 민족이 된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어(겔 37:22,24)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대한 복을 향유할 것이다. 『주께서 나로 더욱 창대케 하시며 모든 면에서 나를 위로하시리이다』(21절).<br/><br/>성도에게 크고 쓰라린 고난을 보여 주신 주님은 위로가 넘치는 분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라...』(고후 1:3,4). 고난과 위로에 관해서라면 단연 &#034;욥&#034;을 꼽을 수 있다. 욥은 가족과 재산, 심지어 건강까지도 모두 잃는 크고 쓰라린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 끝에 자신을 미워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자 주님은 그를 회복시키셨고 그의 후반을 처음보다 더 복 주셨다. 죽은 자녀들도 부활시키셨으며, 이후로 140년을 더 살면서 약 180세까지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사 대까지 보는 위로를 베푸신 것이다(욥 42:12-17).<br/><br/>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크고 쓰라린 고난을 겪은 비운의 인물이다(룻 1:1-5). 여자의 바람은 남편에게 있고(창 3:16), 남편이 없으면 자식들의 봉양을 받는 법인데(딤전 5:16),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잃는 쓰디쓴 고난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을 벗어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온 성읍이 술렁이면서 &#034;이 여인이 나오미냐?&#034;라고 하자(룻 1:19), 나오미는 슬픈 얼굴로 이렇게 답변한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심히 모질게 대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주께서 나를 빈손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게 하셨도다. 주께서 나를 반대하여 증언하셨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셨는데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20,21절) &#034;나오미&#034;란 이름은 &#034;즐겁다&#034;라는 뜻이니, 고통스럽게 빈손으로 귀향한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034;마라&#034;는 &#034;쓰다&#034;라는 뜻이므로, 크고 쓰라린 고난을 겪은 자신에게 &#034;마라&#034;가 어울린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녀를 위로하셨다. 며느리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손자 오벳을 태어나게 하시어 &#034;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며느리&#034;와 &#034;그녀의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가 될 손자&#034;를 얻게 하신 것이다(룻 4:14-17).<br/><br/>단맛을 보기 전에 쓴맛이 선행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이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034;마라의 쓴 물&#034;을 지나서 &#034;엘림의 열두 샘물&#034;에 이른 것과 마찬가지이다(출 15:23-27). 고난의 물이 쓰다고 이스라엘처럼 불평하지 말라. 주님께서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간파하도록 하라. 성도의 인생에 우연이란 없으므로 당신에게도 &#034;열두 샘물&#034;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크고 쓰라린 고난 뒤에 더욱 창대케 될 것을 기대하며 기쁨의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 믿음이 있는 성도의 자세이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한 솔터리로 주를 찬양하리니, 곧 주의 진리를 찬양하리이다. 오 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여, 내가 하프로 주께 노래하리이다. 내가 주께 노래할 때에 내 입술이 심히 기뻐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혼도 기뻐하리이다. 내 혀도 온종일 주의 의를 말하리니 이는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낭패를 당하였으며 그들이 수치를 당하였음이니이다』(22-24절). 비록 늙고 백발이 되었어도 당신의 믿음만큼은 늙지 않게 하라!(고후 4:16)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30 Apr 2024 17:48:2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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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천년왕국을 염원하는 다윗의 기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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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72편은 『솔로몬을 위한 시.』가 그 표제이다. 본 시편은 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윗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이며, 마태복음 19:28에서 『새 세대』(regeneration)라고 불리는 땅의 “새로운 출생”(regeneration, 거듭남)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천년왕국 통치와 그 번영이 주제인 본 시편은 ① 왕의 아들을 위한 간구(1,2절), ②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 통치(3-14절), ③ 천년왕국을 넘어서 영원히 찬양을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15-20절)로 구성되어 있다.<br/><br/>『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이다』(1,2절). “하나님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라고 말씀드리는 다윗의 간구는 곧장 그 왕의 아들, 곧 다윗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라는 간구로 이어진다. 다윗의 아들은 표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솔로몬”이지만, 본 시편의 전체 내용은 그 솔로몬이 예표하는 『다윗의 아들』(마 1:1), 곧 예수 그리스도께로 모든 초점이 맞춰진다. 솔로몬 당시의 역사적인 태평성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를 예표하고, 그 다윗의 아들의 재림과 천 년 통치를 본 시편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2절에서는 『그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이다.』라고 말씀하는데, 다윗의 아들께서 재림하셔서 내리실 판단, 곧 심판이 의와 공의로 이뤄지는 심판이 될 것임을 보여 준다.<br/><br/>『산들이 의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화평을 가져다 주며 작은 산들도 그러하리이다』(3절).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지면 산들과 작은 산들에서 농작물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풍성하게 자랄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더 이상 식량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없을 것이고 모든 백성이 배불리 먹고 화평을 누릴 것이다. 심지어 그 시대의 풍요로움은 산꼭대기들에까지 미칠 것이다. 『산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며 그 열매도 레바논같이 물결칠 것이요』(16절). 산꼭대기들에서 곡식이 나는 일을 현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천년왕국 때는 어디를 가든지 산꼭대기들마저 곡식이 풍성할 것이다. 인간이 먹고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시대가 펼쳐지는 것인데, 사막이 기뻐하며 장미처럼 피게 될(사 35:1) 천년왕국에서는 한 움큼의 씨만 가져도 곡식이 아주 풍성하게 자라 많은 열매들을 맺을 것이다. 그날에는 밭을 가는 자가 추수꾼을 앞서고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를 앞설 것이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다(암 9:13). 주님께서는 광야를 에덴같이, 사막을 주의 동산같이 만드실 것인데, 그로 인해 광야와 사막에서는 메마름 대신에 풍요와 기쁨이 있고 감사와 노랫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사 51:3). 또한 초장은 양떼로 옷입고 골짜기들도 곡식으로 뒤덮일 것이기에 백성들은 즐거워서 외치며 노래할 것이다(시 65:13).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br/><br/>『그가 백성의 가난한 자들을 판단하고 궁핍한 자의 자손들을 구원하며 압제자들을 쳐부수리니 해와 달이 있는 한 그들이 모든 세대에 걸쳐 주를 두려워하리이다』(4,5절). 이 말씀은 12-14절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구해 주며 도울 이 없는 가난한 자도 구해 주리이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아끼며 궁핍한 자들의 혼을 구원하리이다. 그가 그들의 혼을 속임수와 폭력에서 구속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목전에서 귀하리이다.』 4절의 “압제자”는 대환란 때의 가난한 환란 성도들을 박해할 적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 그분의 원수들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되 그들의 정수리를 부수실 것이다(시 68:21). 주님께서는 적그리스도를 불못에 던져 넣으신(계 19:20) 뒤에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천년왕국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인데, 그들은 천년왕국의 끝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br/><br/>특히 5절은 그들의 두려움이 해와 달이 있는 한 모든 세대에 걸쳐 지속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해와 달이 영원 시대에도 존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와 달의 영원한 존속”은, 달이 있는 한 화평의 풍성함이 지속된다는 말씀과(7절, 재림 이후의 영원한 화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원히 있되 그 이름이 해가 있는 한 계속될 것이라는 말씀에서도(17절) 입증된다. 이 점은 시편 89:35-37에서도 뒷받침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한 것은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라. 그의 씨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요, 그의 보좌는 내 앞에 태양 같으리니 그것이 달과 같이, 하늘에 있는 신실한 증인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서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말하자면 베드로후서 3:10-12에서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린 이후 새 하늘들에서도 “해”와 “달”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영원 시대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그곳의 빛이 되실 것이기에 해와 달이 비칠 필요가 없지만(계 21:23), 새 예루살렘의 바깥에서는 해와 달이 존재하면서 영원 세계의 새 땅을 비추게 된다.<br/><br/>『그가 벤 풀 위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나기같이 내려오리니 그의 날들에는 의인이 번성할 것이며 달이 있는 한 화평의 풍성함이 지속되나이다』(6,7절). 악인들을 벌하고 의인들을 번성케 하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대환란 기간의 “후 3년 반”의 가뭄을 끝내는 큰비로 특징지어진다. 이 점은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모세와 엘리야가 두 증인으로서 이 땅에서 사역할 것인데, 그들이 예언하는 1,260일(계 11:3), 곧 “후 3년 반” 동안 선지자 엘리야의 사역으로 비가 오지 않을 것임을(계 11:6) 보여 준다. 이 3년 반의 가뭄을 끝내는 큰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것이고, 『그의 나오심은 아침처럼 마련되어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비처럼 오시리니, 땅에 내리는 늦은 비와 이른 비처럼』(호 6:3) 오실 것이다. 구름이 몰려와 늦은 비와 이른 비가 첫째 달에 한꺼번에 내릴 것인데(욜 2:23), 재림의 아침에 있을 이런 일에 대해 다윗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그리하면 그가 해 돋을 때의 아침 빛같이 되리니, 곧 구름 없는 아침 같겠고, 비 온 후에 맑게 반짝임으로 땅에서 돋아나는 연한 풀잎 같으리라』(삼하 23:4). 이렇듯 3년 반의 가뭄을 끝내는 소나기가 그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이 걷힌 아침같이 오실 것이다. 비 온 후에 맑게 반짝임으로 땅에서 돋아나는 연한 풀잎 같은 순수함과 거룩함으로 오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무슨 일이 있게 되는가?<br/><br/>『그가 또한 바다의 끝에서 끝까지 다스릴 것이요, 강에서부터 땅의 끝까지 다스리리이다. 광야에 거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 절하고 그의 원수들이 먼지를 핥으리이다. 타시스와 섬의 왕들이 예물을 가져올 것이요, 시바와 스바의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니 정녕, 모든 왕들이 그의 앞에 엎드리며 모든 나라들이 그를 섬기리이다』(8-11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분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실 것이다. 본문에 언급된 “통치 영역”은 창세기 15:18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문자적이고 실질적인 땅이다. 흔히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곳은 솔로몬이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의 예표로서 실제적으로 다스렸던 지역이다. 『솔로몬이 강에서부터 필리스티아인들의 땅과 이집트의 경계에 이르는 모든 왕들을 치리하였더라』(대하 9:26). 솔로몬이 앉았던 보좌는 『주의 보좌』(대상 29:23)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에서 앉으실 바로 그 보좌이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그의 영광 중에 오고, 또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그와 함께 오면 그때에 그가 그의 영광의 보좌에』(마 25:31) 앉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에』 열두 제자가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주님께서 『주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 때 아라비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분께 굴복할 것이고(9절), 그분의 원수들은 문자 그대로 그분의 발 앞에 자기들의 얼굴을 흙에 대고 엎드릴 것이다(시 110:1, 사 49:23). 이방의 왕들은 시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했던 것처럼(왕상 10:10-12) 예루살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예물들을 가져올 것이다(사 60:6-16). 이러한 “구약의 예표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br/><br/>『그가 생존하리니 시바의 금이 그에게 드려질 것이요, 기도도 그를 위하여 계속해서 드려지며 그가 날마다 찬양을 받으리이다』(15절). 천년왕국 때에는 이방의 왕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물론, 기도와 찬양도 날마다 그분께 드려질 것이다. 모든 육체가 주님께 나아가 향의 연기와 같은(시 141:2, 눅 1:9,10)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 가리이다』(시 65:2). 『이는 해 뜨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내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위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에 향을 피우며 순결한 제물이 드려질 것이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가운데서 위대하게 될 것임이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말 1:11). 천년왕국 때 그 왕국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인데, 스스로 주께 연합한 사람은 비록 그가 타국인이라 할지라도, 즉 『스스로 주께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의 종들이 되는 타국인들의 아들들, 곧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고 지키며 나의 언약을 붙잡는 모든 자들』은 천년왕국 성전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며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사 56:6,7).<br/><br/>『그의 이름이 영원히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이 해가 있는 한 계속될 것이며 사람들이 그의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요, 모든 민족들이 그를 복 받은 자라 하리이다』(17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천년왕국뿐만 아니라 그 이후 영원에서도 존속할 것이다. 해가 영원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그분의 이름도 영원할 것인데, 주님께서는 천년왕국에서는 물론 영원에서도 『복 받은 자』라 불리시는 것이다.<br/><br/>『주 하나님, 곧 홀로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18,19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충만할 것이고,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땅이 주의 영광의 지식으로 가득 찰 것이다(합 2:14). 그 『영광의 왕』(시 24:7)께서 오셔서 『그의 영광의 보좌』에(마 25:31) 앉으시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재림 때에야 비로소 눈을 뜨게 되어 그들이 초림 때 거부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알아보게 되고(슼 12:10)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아멘, 아멘.』<br/><br/>『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들이 끝났도다』(20절). “다윗의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천년왕국의 도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그 『화평의 통치자』(사 9:6)께서 오셔서 화평을 이룩하시고, 그 『왕』(계 15:3)께서 오셔서 왕국을 세우실 날을 거듭난 성도는 매일매일 기도로 갈망해야 하는 것이다.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30 Apr 2024 17:17:5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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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유” 있는 찬양, “이유” 있는 경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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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숲에 가면 도심에서 들을 수 없는 많은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바람결에 푸른 하늘 밑에서 비벼대는 키 큰 나무 이파리들의 살내음 같은 소리도 들려오는데, 어찌 들으면 바닷가 백사장에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들의 찬양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요 17:3) 알지 못했다면, 우린 그 자연의 소리들을 이교도들처럼 “어머니 자연”의 숨소리로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거기에 하나님과 관련된 영적 의미 외에 어떤 다른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현상들, 이름 모를 숲속 곤충들의 좌충우돌 생태, 저 멀리 산등성이를 따라 울리는 뻐꾹새의 울음소리, 산책로를 오르다가 우연히 내려다본 야생화의 흔들림, 발밑에서 바스락대는 낙엽의 포근함에서도 우리는 창조주의 지혜를 느낀다. 우리를 감탄케 하는 그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생각해 보라. 피조 세계의 최상위에 위치한(창 1:28) 사람이 자신의 창조주를 기억하며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영적 도리가 아닌가!<br/><br/>시편 98,99,100편에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경배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문맥은 물론 “재림”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찬양이 멈추고 경배가 중단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서보다도, 지역 교회들의 예배 시간보다도 우리는 더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거기에 전체 피조 세계의 찬양이 거대한 해일처럼 덮쳐올 것이다.<br/><br/>시편 98편은 『오, 새 노래로 주께 노래하라.』(1절)라는 명령으로 시작된다. 이 찬양에의 명령은 뒤에서 또다시 반복된다. 『온 땅아, 주께 즐거운 소리를 내어라. 큰 소리를 내며 기뻐하고 찬송하라. 하프로 주께 노래하라. 하프로 또 시를 말하며 노래하라. 나팔들과 뿔나팔 소리로 왕이신 주 앞에 즐거운 소리를 내어라.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은 외치며 세상과 그 안에 거하는 것들도 외칠지어다. 큰 물들은 손뼉을 치며 산들은 함께 즐거워할지니』(4-8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자연계의 구성요소들이 그들의 창조주의 임재에 반응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피조 세계가 현재는 썩어짐에 속박되어 있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그 속박에서 해방되어(롬 8:21)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상태로 만물이 회복될 것이다(사 11:6-9). <br/><br/>시편 98편은 성도들과 피조 세계가 재림 때 한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 번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 때 쟁취하실 승리와 구원”에 있다. 『이는 그가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으며, 그의 오른손과 그의 거룩한 팔이 자신을 위하여 승리를 쟁취하였음이라. 주께서 그의 구원을 알리셨고 그의 의를 이방의 목전에 드러나게 나타내셨도다. 그가 이스라엘 집을 향해 그의 자비와 진리를 기억하셨으니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1-3절). 『그의 오른손』과 『그의 거룩한 팔』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선지자 이사야가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의 팔』은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손』은 그 『팔』에 달려 있으므로 『그의 오른손』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이 된다(시 44:3; 77:15). 주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재림 때에는 이스라엘 집의 구원을 이루실 주의 손이요 주의 팔이시다. 주님께서는 그분께서 쟁취하신 구원과 승리로 인해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br/><br/>성도들과 피조 세계가 한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 때 행하실 심판”에 있다. 『큰 물들은 손뼉을 치며 산들은 함께 즐거워할지니 주 앞에서 할지라. 이는 그가 땅을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라. 그가 세상을 의로, 그 백성을 공평으로 심판하시리로다』(8,9절). 이 말씀에 따르면 심판은 재림 때 있게 된다. 피조 세계가 『주 앞에서』 찬양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실제로 눈앞에 오셔서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심판이 아닌 “구원”에 그 목적이 있었다(요 3:17, 마 11:29,30, 딤전 2:3,4). 그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는 지금은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져 심판받는 것을 기뻐해선 안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 재림 때 심판하려고 깨어나시면(시 3:7; 7:6; 9:19) 성도들과 피조 세계가 그 심판을 기뻐하며 찬양할 것이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그 무엇이든 옳다. 그때에는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 왕께서 의와 공평으로 행하시는 심판이 그분을 찬양할 확실한 이유가 된다. <br/><br/>시편 99편은 『주께서 통치하시나니 백성은 떨 것이요, 그가 그룹들 사이에 앉으셨으니, 땅은 요동할지어다.』(1절)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 역시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재림을 예언한다. 재림하신 주님께서는 천년왕국 성전에서 그룹들 사이에 앉으셔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것인데, 시편의 화자가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들로 주의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 이는 그 이름이 거룩하심이니이다』(3절). 『너희는 주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발판에서 경배하라. 이는 그가 거룩하심이라』(5절). 『주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거룩한 산에서 경배하라. 이는 주 우리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이라』(9절). 시편 99편은 찬양의 이유, 경배의 이유에 관해 오로지 “거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재림하셔서 온 땅을 통치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고 그분 자신께서 또한 거룩하시다. 거룩하신 이름을 소유하신 거룩하신 주님은 만물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것이다. <br/><br/>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거룩하지 못하다. 시편의 화자는 그 대표적 예로 모세, 아론, 사무엘을 거론한다(6절).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의 제사장 가운데서 모세와 아론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가운데서 사무엘이 주를 불렀으며 그는 그들에게 응답하셨도다. 그가 구름 기둥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들이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증거들과 율례를 지켰도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나이다』(6-8절). 사실 모세, 아론, 사무엘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주님께 기도 응답을 받은, 주님의 말씀들을 지켰던 신실한 종들이었다. 그럼에도 8절의 후반부에서는 그 세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했음을 강조한다. 『주께서는 그들의 행실대로 보응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셨던 하나님이시니이다.』 <br/><br/>모세와 아론, 사무엘에 관한 부정적인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롬 3:23) 신약의 위대한 진리를 확인해 준다. 모세는 사람을 죽였다(출 2:12).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석을 두 번 쳤다(민 20:11). 아론은 시내 산 밑에서 배교한 폭도들에게 떠밀려 금송아지 숭배를 주도했다(출 32장). 사무엘은 율법을 다루기에 적합지 않은 자기 아들들을 재판관으로 세움으로써(삼상 8:1-3) 사울이라는 한 불법적인 왕을 세우는 비극을 초래했다. 인류 역사 6천 년 동안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치 않았던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고 그분의 입에 간사함도 없으셨다.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셨다(히 4:15, 벧전 2:22). 하나님은 그 이름이 『거룩』(사 57:15)이시다. 『거룩』이신 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시며 그 이름도 거룩하시다. 오직 그분만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것이다! 모세, 아론, 사무엘은 거룩에 있어서 주님께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디 그 세 사람뿐이랴. 우리 역시나 거룩함에 있어 주님께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소유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 <br/><br/>시편 100편은 『너희 온 땅들아, 주께 즐거운 소리를 내어라.』(1절)라는 명령으로 시작하며, 재림하여 통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송축할 이유에 관해 노래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들로 들어가고 찬양으로 그의 뜰들로 들어가라. 그분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송축하라. 이는 주께서는 선하시고 그의 자비는 영원하며 그의 진리가 모든 세대에 지속되기 때문이라』(4,5절). 시편 100편은 특별히 “찬양의 시.”라는 표제가 달려 있다. 찬양, 찬양, 찬양이 누구에게 합당한가? 선하시고 그의 자비가 영원하며 그의 진리가 모든 세대에 지속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합당하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주를 섬기라. 노래하며 그의 임재 앞으로 나아오라. 너희는 주,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라. 우리를 지으신 분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그분이시라.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초장의 양이로다』(2,3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다(창 1:26,27, 골 1:16).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양이다(요 10:1-26, 행 20:28, 벧전 2:25).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의 개가 아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이 교회 시대에 우리를 그분의 양으로서 먹이며 동행하신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시 23:1-3) 그렇기에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섬김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저 천성으로의 여정을 밟는 모든 순례자들의 믿음이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17 Apr 2024 18:50:0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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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내 날들의 중간에 나를 데려가지 마소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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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102편은 「고난당하는 사람의 기도, 그가 나약해져서 주 앞에 자기 고충을 털어놓을 때」가 그 표제이다. 성도가 고난에 짓눌려 나약해질 때 그가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을 대상은 주님이시다. 다른 사람에게 내 괴로운 심정을 이야기해 봐야 그에게서 얻을 실제적인 도움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를 짓누르며 압도하는 고난 속에서 사람의 도움은 헛될 뿐이다! 『고난에서 우리를 도우소서. 사람의 도움은 헛됨이니이다』(시 108:12). 고난당하는 욥에게 그의 세 친구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욥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너무도 “영적인” 그들은 욥을 정죄하기에 바빴고 상처에 소금을 뿌려 대기에 급급했다. 세상 그 어디에 욥의 친구들처럼 선을 가장한 가혹한 조언자들이 또 있으랴.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는가? 『오 주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이 주께 이르게 하소서』(1절). 주님 말고 세상 그 누구에게 우리의 고충을 토해 내겠는가?<br/><br/><br/>고난에 처한 성도의 바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외면하시지 않고 자신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속히” 응답하시는 것이다. 내일도필요 없고 바로 오늘, 그것도 지금 바로 이 순간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내가 고난에 처한 날에 주의 얼굴을내게서 감추지 마시고 내게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2절). 고난을 좋아해서 반기는사람은 없다. 누구도 고난이라 불리는 유황불이 자기에게 쏟아지기를 원치 않는다. 사람에게 흔히 닥치는 시험조차도, 자기가감당할 수 있는 시험임에도, 비록 피할 길이 주어진다 해도(고전 10:13), 그러한 일이 “나”에게만은 비껴가기를바라는 것이다.<br/><br/><br/>3절에서 시편의 화자는 『내 날들이 연기같이 소멸되고 내 뼈들이 화덕처럼 타나이다.』라고 탄식한다. 욥은 『내 피부는 내위로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탔도다.』(욥 30:30)라고 탄식했다. 시편의 화자는 또한 『내 마음이 상하고 풀같이 마르므로 내가 내 빵을 먹는 것도 잊었나이다. 내 신음 소리로 인하여 내 뼈들이 살에 붙나이다.』(4,5절)라고 비탄했다. 극심한 고난은 식음을 전폐케 하고 육체를 말라붙게 하는데, 욥 역시 『그의 생명이 빵을 싫어하고 그의 혼이 맛좋은 음식을 싫어하는도다. 그의 살은 쇠잔해져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던 뼈들이 튀어나오는도다.』(욥 33:20,21),『내 뼈가 내 가죽과 살에 붙었으며 나에게는 겨우 이의 꺼풀뿐이로다.』(욥 19:20)라고 비탄했다. 욥과 시편 102편은 어딘가 관련이 있다.<br/><br/><br/>시편의 화자는 지붕 위에 “홀로” 있는 참새처럼 외롭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불결한 새들에 비유한다. 『나는 광야의 펠리컨같고 사막의 올빼미 같나이다』(6절). 펠리컨(신 14:17)과 올빼미(신 14:15)는 구약 시대에 불결한 새로 규정되었다. 성경에서 불결한 새는 마귀의 모형이다.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로다』(계 18:2). 『용들』과 『올빼미들』을 자기 동료라고 부른(욥 30:29) 욥은 대환란 때 사탄에게 박해받는 이스라엘의 모형이다. 따라서 시편의 화자가 『내 날들이 연기같이 소멸되고 내 뼈들이 화덕처럼 타나이다. 내 마음이 상하고 풀같이 마르므로 내가 내 빵을 먹는 것도 잊었나이다. 내 신음소리로 인하여 내 뼈들이 살에 붙나이다. 나는 광야의 펠리컨 같고 사막의 올빼미 같나이다.』(3-6절)라고 한 말은 사탄에게 박해받는 유대인 환란 성도의 애통하는 말이 된다.<br/><br/><br/>『내 원수들은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나를 대적하여 미쳐 있는 자들이 나를 대적하기로 맹세하였나이다. 내가 재를 빵처럼 먹었으며 내 음료도 눈물로 섞었으니 이는 주의 분개와 진노 때문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 던지셨나이다. 내 날들은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으니 내가 풀같이 말랐나이다』(8-11절). 대적들로 둘러싸인 채 재가 묻은 빵을 먹으며, 눈물이 떨어져서 짜게 된 음료를 마셔야 했던 화자는 자신의 처지가 주님의 분개와 진노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욥의 탄식과 같다. 『그분이 나를 진창에 던지시니 내가 먼지와 재같이 되었도다』(욥 30:19). 이러한 사람의 날들은 사라져가는 그림자와 같고 시들어말라 버린 풀과 같다. 그의 인생은 실로 『그림자처럼 허비한 헛된 인생』(전 6:12)이 되어 버린다.<br/><br/><br/>인생은 그림자다. 석양에 기울며 어둠에 잠겨 사라져가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슬픔에 잠기는 유한한 인생은 애달프다.사람들은 헛된 그림자같이 걸어 다니다가(시 39:6) 기우는 그림자처럼 사라진다(시 109:23). 지상에서 영원한 인생이란 없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죽음에 함몰되고 만다. 고난의 먹장구름이 떼를 지어 갑자기 몰려들면 그림자가 기척도 없이 사라지듯이, 많은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림자처럼 허비한 헛된 인생...해 아래서 사람의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그에게 말해 줄 수 있으리요?』(전 6:12) 당신의 인생도 그림자다.주님께서 빛을 거두시면 금세 사라져 버릴 그림자다. 그림자 같은 인생인가?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빛이 필요하지 않겠는가?그림자는 빛에 의해 만들어지고, 빛에 의해 존속하기 때문이다. 잊지 말라. “하나님의 빛”만이, “하나님의 빛”만이 당신의 인생을 지속시키실 수 있다!<br/><br/><br/>그림자처럼 기우는 인생과는 반대로,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다. 『그러나 오 주여, 주께서는 영원히 존속하시며 주를 기억함이 모든 세대에 이르리이다』(12절). 사람은 유한해도 주님은 영원하시다. 사람은 세대가 바뀌면 잊혀지지만, 주님은모든 세대에서 기억되신다. 주님을 기억하는 세대 또한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고, 그 세대가 존재했던 우주마저도 불에 녹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벧후 3:10). 시편의 화자는 바로 이 점을『주께서 옛날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하늘들도 주의 손의 작품이니이다. 그것들은 멸망할 터이나 주께서는 영존하시리니 정녕, 그것들 모두는 옷같이 낡아지리이다. 주께서 그것들을 의복처럼 바꾸시리니 그리하면 그것들은 바뀔 것이나 주는 동일하시며 주의 연대는 끝이 없으리이다.』(25-27절)라고 노래한다.<br/><br/><br/>11절까지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던 화자는 주님의 영원하심과 그분의 재림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잊어버린 듯하다.그가 12절 이후로 전개하는 내용들은 영원하신 주님의 재림과 그분의 천년왕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즉 화자는 주님께서 일어나시어 그분의 종들이 그 돌과 먼지도 좋아하고 아끼는 시온에 자비를 베푸실 재림을 노래하는 것이다(13,14절). 화자는 주님께서 재림 때 시온에 자비를 베푸시면 이방이 그분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지상의 모든 왕들도 그분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노래한다(15절). 그렇게 시온을 세우실 때 주님께서는 그분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것인데(16절), 이 점을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언하셨다. 『인자가 그의 영광 중에 오고, 또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그와 함께 오면 그때에 그가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br/><br/><br/>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빈곤한 자, 곧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에게 박해받는 유대인 환란성도들의 기도를 중히 여기시며 그들의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실 것이다(17절). 그때 주님께서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는 이유는 『갇힌 자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기로 정해진 자들을 풀어 주시며 주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의 찬양을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기 위함이니』(20,21절), 이때가 바로 『백성들과 왕국들이 함께 모여서 주를 섬기는 때』(22절), 곧 재림 때이다. 이렇게 재림을 생각하면,우리가 지니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들은 어느새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문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문제를 기억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 기도드렸던 문제들을 주님께 맡겨 드릴 수가 있다. 주님께서는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므로『너희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라.』(벧전 5:7)라고 명령하신다. 『오히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마 6:33,34)라고 말씀하신다. 성도여, 재림을 묵상하라. 재림의소망 속에 살라. 그러면 인생의 문제를 잊고 살 수 있다. 당신의 문제는 주님께 맡겨 드리고,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희어져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재림을 묵상하도록 하라!(마 17:2)<br/><br/><br/><br/>우리는 시편 102편의 화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주님께서 일어나시어 시온에 자비를 베푸실 재림을 노래하던 그는 다시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께 생명을 간구한다. 『그가 내 힘을 길에서 쇠약케 하시며 내 날들을 단축하셨도다. 내가 말하였나니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 날들의 중간에 나를 데려가지 마소서. 주의 연대는 모든 세대를 통해 있나이다』(23,24절). 이 말씀을 읽으면 병에서 회복된 히스키야의 글이 떠오른다. 『나의 연수는 목자의 장막처럼 내게서 떠나 옮겨졌으며, 내가 나의 생명을 베짜는 사람처럼 끊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파리한 질병으로 끊으시리니 주께서 낮부터 밤 사이에 나를 끝내시리이다...학이나 제비처럼 나도 그렇게 지저귀었으며, 비둘기처럼 슬피 울었고, 내 눈이 위를 쳐다보다가 지쳤나이다. 오 주여, 내가억압을 당하오니, 나를 맡아 주소서.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고, 또 스스로 행하셨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이까? 내가 내혼의 괴로움 속에서 내 온 생애를 유연하게 가리이다. 오 주여, 이런 일들로 인하여 사람이 살고, 이 모든 일들 가운데에 내 영의 생명이 있사오니, 주께서 나를 그처럼 회복시켜 주시고 나를 살려 주소서』(사 38:12-16).<br/><br/><br/>죽을병에 걸리면 인간은 눈물부터 흘린다. 『“오 주여, 내가 간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리 안에서와 온전한 마음으로 어떻게 행하였으며, 또 주의 목전에서 어떻게 선한 일을 행하였는지 이제 기억하소서.” 하고 히스키야가 통곡하더라』(사38:3). 유한한 인간이 절망 속에서 기댈 곳은 영원토록 동일하시고(히 13:8) 그분의 연대가 끝이 없으신 주님뿐이다. 『주는 동일하시며 주의 연대[years]는 끝이 없으리이다』(27절). 우리의 연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지만(시 90:10) 주님의 연수는 문자 그대로 “끝없는 연대”(endless years)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인 것이다. 아이들이 곧잘 하는 “하나님은 몇 살이에요?”라는 질문은 바람에 날리는 재와 같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이다. 참되고 영원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죽을병에 걸렸든, 죄로 멸망해 가든,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병이 나을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 구하라!&nbsp;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자기 안에 영생을 소유했다(요일 5:13).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요일 5:20)이시기 때문이다. 『주는 동일하시며 주의 연대는 끝이 없으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들은 계속될 것이며 그들의 씨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27,28절).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17 Apr 2024 12:58: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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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님께 감사하다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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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한승용 / 말씀보존학회 성경연구원<br/><br/>시편 105편은 『오, 주께 감사하고』로 시작하는 “감사의 시”이다. 왜 감사해야 하며, 감사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노래하는, 성도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실제적인 시가 바로 시편 105편이다. <br/><br/><br/>『오, 주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사를 백성 가운데 알려지게 하라. 그에게 노래하고 그에게 시를 읊으라. 너희는 그의 모든 경이로운 일들을 말하라. 너희는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주를 구하는 자들의 마음이 즐거울지어다. 주와 그의 능력을 구하라. 항상 그의 얼굴을 구하라.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그의 이적들과 그의 입의 심판들을 기억하라』(1-5절). 주님께 감사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는 첫 다섯 구절은, 첫 번째 명령인 “주께 감사하라”와 더불어 열 가지 명령을 담고 있다. 이 열 가지 명령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실제적인 명령들이다. <br/><br/><br/>첫째, 『감사하...라』(1절). 이 명령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라는 말씀에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일”에 즉각적으로 감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에 생각을 더하다 보면,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므로 결국 감사하게 된다. 물론 감사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불평과 불안을 안고 사는 성도들도 있지만, 믿고 감사하는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마음의 평안을 갖게 된다. 『꾸준히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기도에 깨어 있으라』(골 4:2).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br/><br/>둘째, 『그 이름을 부르...라』(1절). “名”(이름 명) 자는, “이름”이 “저녁(夕)이 되어 어두워지면 구별하여 입(口)으로 부르기 쉽도록 붙여 놓은 것”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저녁 하늘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초승달 모양을 본뜬 “저녁 석(夕)”에 “입 구(口)”를 합해 놓은 것이 “이름 명(名)”인데, 해가 지기만 하면 칠흑같이 어두워지던 옛날 옛적에 저녁 어두움 속에서 사람을 구별해 내는 데 사용되던 방법이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죄로 어두운” 이 마지막 때에 죄인들이 불러야 할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의 이름”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누구나 구원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br/><br/><br/>셋째, 『그의 행사를... 알려지게 하라』(1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결코 어두움 속에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꺼내어 밝은 빛 가운데 공개해야 하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들을 언제든지 전파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딤후 4:2). <br/>넷째, 『그에게 노래하고 그에게 시를 읊으라』(2절).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시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사유에서 나온다. 노래의 가사가 곧 시임을 알고 있는가? 사모하는 대상을 향한 시는 곧 노래가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해야 할 일 또한 하나님에 관해 시를 읊고 그분에 관해 노래하는 것이다.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들로 너희에게 말하고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곡조를 만들고』(엡 5:19).<br/><br/><br/>다섯째, 『그의... 경이로운 일들을 말하라』(2절). 불치의 병에 걸렸던 성도가 감쪽같이 낫는다면, 그는 그 일이 주님의 경이로운 역사라며 성도들 앞에서 간증할 것이다. 사업이 회생불가하던 성도가 돈줄이 갑자기 풀려서 기사회생한다면, 그는 그것을 주님의 경이로운 역사라고 간증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말해야 할 경이로운 일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것, 그 인자께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 하지만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죄인들을 의롭게 하려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 바로 이 “경이로운 복음”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게 된다. 우리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5,16).<br/><br/><br/>여섯째,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3절). 인간이 좋아하는 “자기 자랑”은 죄이다. 육신은 『교만하며, 자기 자랑만』(롬 1:30) 한다. 교만에서 비롯된 이 죄는 사람이 너무도 쉽게 빠져드는 일상의 수렁이다. 따라서 우리가 평생 동안 명심하고 해야 할 단 하나의 자랑은 “주님께서 그 일을 해 주셨습니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 혼, 영은 물론, 우리가 받은 구원과 그 이후 충족되는 생활의 모든 필요들, 또 지상 생을 살다가 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것들이 다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그분께 드려서 되돌려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그분께로부터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께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히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5,36). 『그러나 너희는 그분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와 같이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라』(고전 1:30,31). <br/><br/><br/>일곱째, 『즐거울지어다』(3절). 말할 수 없는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서 자신의 “혼”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표식이다. 『또 말할 수 없이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나니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벧전 1:8,9). 결코 소멸되지 않는 “혼”의 구원은 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닌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감격을 느껴 보라. 만일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갔다면 어찌 될 뻔했는가? 실로 “항상 기뻐해야”(살전 5:16) 하지 않겠는가?<br/><br/>여덟째, 『그의 능력을 구하라』(4절). 당신의 능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한번 대답해 보라. 그리스도인인 당신의 능력은 과연 “누구”에게서 나오는가?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br/><br/><br/>아홉째, 『그의 얼굴을 구하라』(4절). 우리에겐 얼굴이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얼굴 없는 초상화, 얼굴 없는 증명사진을 생각해 보라. 얼굴은 사람을 사람답게 보이게 하는 중요한 신체 부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이는 나를 보고서 살 자가 아무도 없음이니라.』(출 33:20)라고 하셨지만, 또한 그분의 얼굴을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얼굴을 직접 보기를 갈망하라는 뜻이 아니다. 잠시 잠깐 살다 가는 인생에서 그분을 찾고 만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교회 시대에 구해야 할 하나님의 얼굴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이는 어두움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이라』(고후 4:6). 이 은혜의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한다면 그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이라.』<br/><br/><br/>열째,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5절). 인간은 인간 자신을 가리켜서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인생뿐만 아니라, “출애굽”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내가 너희로 기억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주께서 그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어떻게 구원하셨고 그후에는 믿지 아니한 자들을 어떻게 멸하셨는가 하는 것이라』(유 1:5).<br/><br/><br/><br/>시편 105편은 지금까지 언급한 열 가지 명령들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역사,” 곧 “출애굽”의 과정을 훑어 나간다(6-45절). 『오 너희 주의 종 아브라함의 씨야, 너희 그의 택하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그의 심판들이 온 땅에 있도다. 그가 자기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곧 천 대에 명령하신 그 말씀이라. 이는 그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그의 맹세요 또 같은 것을 야곱에게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확증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카나안 땅, 곧 너희 유업의 몫을 주리라.” 하셨도다』(6-11절). 하나님께서는 『그 수에 있어서 몇 사람뿐』(12절)이었던 『아주 적은 수』(12절)의 아브라함의 씨, 곧 그의 택하신 야곱의 자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셨다.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과 『이삭에게 하신 그의 맹세』(9절)라고 불리는 것을 야곱에게는 율법으로 확증하고, 이스라엘에게는 영원한 언약으로 확증하셨는데(10절), 즉 그것은 『내가 네게 카나안 땅, 곧 너희 유업의 몫을 주리라.』(11절)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관련하여 천 대에 명령하신 그 말씀, 곧 그분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어 아브라함의 씨인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으며, 여호수아의 때에 그들을 그 약속의 땅에 비로소 정착시키셨다. 본 시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지키신 그 위대한 사건을 그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또 그들에게 이방의 땅을 주셔서 그들이 그 백성들의 수고한 것을 유업으로 받았으니』(44절). 하나님께서 이처럼 카나안 땅의 이방인들이 수고한 것을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유업으로 주신 데는 목적이 있으셨는데, 즉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분의 말씀을 지키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로 그의 규례들을 준수하게 하려 함이며 그의 법들을 지키게 하려 함이라.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45절).<br/>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집과 포도원과 가축들을 전혀 노력하지 않고도 그들의 유업으로 받은 것은, 그처럼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여기에는 분명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원칙이 배어 있다(신 8:3).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그들이 그 땅에서 먹고사는 일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신 28:1-14). 이를 영적으로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나 자신의 노력과 수고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서 누리게 된 것들이 있다. 은혜로 받았고 또한 영원히 보장된 구원(엡 2:8,9, 롬 8:38,39)과,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몸(고전 15:51-54), 영원 세계에서 우리가 영원히 거하게 될 새 예루살렘(계 21:2) 등 우리가 전혀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십자가의 언약으로 우리에게 영원히 보장된 것들이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그처럼 “고급스러운 것들”을 값없이 누리게 된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해답은 바로 다음의 말씀에 있다. 『이는 그들로 그의 규례들을 준수하게 하려 함이며 그의 법들을 지키게 하려 함이라.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45절). 아멘! 아멘!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5 Mar 2024 10:47:2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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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라</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6/%EC%98%A4-%EB%82%B4-%ED%98%BC%EC%95%84-%EC%A3%BC%EB%A5%BC-%EC%86%A1%EC%B6%95%ED%95%98%EB%9D%BC/</link>
<description><![CDATA[한승용 / 말씀보존학회 성경연구원<br/><br/><br/>시편 103편은 그 표제가 「다윗의 시」이다.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송축”이 주제이며, 주님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고 혼을 다하여 송축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br/><br/><br/>『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하고 그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그는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며 네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고 너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 자애와 온유한 자비들로 네게 관을 씌우시고 좋은 것들로 네 입을 흡족케 하시니 네 젊음이 독수리의 젊음같이 새로워지는도다』(1-5절). 읽을 때마다 마음이 “독수리의 젊음같이 새로워지는” 이 노래는 죄의 세상에서 살다 지쳐 가는 성도에게 새 힘을 부여한다. 이 말씀을 읽을 때면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막 12:30) 주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고만 싶어진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가! “그의 모든 베푸심”을 잊어버리기 쉽기에 『그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나 생명이 파멸될 뻔했을 때 구해 주셨다. 세상 사람들이 결코 누릴 수 없는 그분의 자애와 온유한 자비들로 우리의 인생을 빛나게 해 주셨다. 곤비하고 피곤할 때는 좋은 음식을 먹여 주심으로써 독수리의 젊음과 같은 기운으로 다시 비상하게 해 주셨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주, 곧 땅 끝들의 창조주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신 분인 것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그의 명철은 한없이 깊으시도다. 그는 곤비한 자에게 힘을 주시며, 무력한 자에게 힘을 더해 주시나니 젊은이들일지라도 곤비하고 피곤하며, 청년들이라도 완전히 넘어지나 오직 주를 앙망하는 자는 자기의 힘을 새롭게 하리니 독수리처럼 날개로 치솟을 것이요, 그들이 달려도 피곤치 않으며 걸어도 곤비치 아니하리라』(사 40:28-31). 자신의 인생에 이와 같은 경험이 없다면 주님과의 관계를 재고해 봄직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면에서 풍성하게 하시려고 오신 구주이시기 때문이다(요 10:10).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삶 어떤 부분을 마귀에게 도둑질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br/><br/>원인은 주의 모든 베푸심을 잊고 죄에 빠져 사는 성도 자신에게 있다. 주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는 말씀은 그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의 기쁘신 뜻을 행하라는 얘기다.<br/><br/><br/>『주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자비가 풍성하시도다. 그는 항상 꾸짖지만은 아니하실 것이며 분노를 영원히 품지도 아니하시리로다. 그는 우리의 죄들을 따라 우리를 처리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그의 자비가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크심이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가 우리의 죄과들을 우리로부터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주께서도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라』(8-14절).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노래를 중간에 끊어서 설명한다는 건 그 말씀들에 대한 무례가 아닐까? 왜냐하면 주님의 그 아름다운 성품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8절에서 14절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성품에 관한 설명은 이어지는 15,16절의 풀포기 같은 사람과 분리해서 묵상함이 마땅하다. 『사람으로 말하면 그의 날들은 풀과 같고 그의 번영은 들의 꽃과 같아서 바람이 그 위를 지나가면 사라지나니 그 자리가 그것을 더 이상 알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과 인생의 덧없음을 대조해 보니 사람이란 존재가 길가의 거친 풀 한 포기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잡초라 부르는 것들도 저마다 꽃을 피우고, 그 꽃을 자세히 보면 햇빛을 반사하는 어여쁜 꽃잎 색과 꽃잎들의 규칙적인 배열을 볼 수 있고, 나는 듯 마는 듯한 향기도 맡을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잡초의 아름다움과 그 생명은 오래가지 못하며, 조만간 그 피었던 자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br/><br/><br/>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비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오래 참으심과 관대하심이 영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원한 속성으로 유한한 사람을 다루시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강한 연민으로 사람에게 다가오신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출 34:6)께서는 우리의 체질이 진흙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그것이 결국 티끌로 돌아갈 것을 아신다(욥 10:9). 그러한 우리의 날들이 풀과 같고 들의 꽃과 같음을 아시는(15절) 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우리의 죄들을 따라 우리를 처리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셨』던 것이다(10절). 즉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살려 주셨다.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며, 육신의 정욕들 가운데서 육신과 마음의 욕망들을 이루어 본래 진노의 자녀였던(엡 2:1-3)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에 속하지 않는 타국인이요, 약속의 언약들로부터 생소한 사람이었고, 또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던(엡 2:12) 우리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큰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며, 그분의 은혜로 구원해 주신 것이다(엡 2:4,5). <br/><br/><br/>우리를 구원하신 뒤로도, 그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자비가 풍성하시며, 항상 꾸짖지만은 아니하시고 분노를 영원히 품지도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들을 따라 우리를 처리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시는”(8-10절) 하나님의 성품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가 죄를 지으면 곧바로 징계하시지 않고 우선은 돌이키기를 기대하신다. 죄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하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죄악의 길을 계속 갈 때는 꾸짖고 징계하시지만, 결국 참회하고 돌이켰을 때는 먹장구름이 사라진 후 얼굴을 내민 찬란한 태양처럼 환한 미소를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두렵고 무섭기만 하신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13절) 분이시며, 언제라도 죄로부터 돌이키면 “가엾게 여기며 달려와 목을 안고 입 맞춰 주시는”(눅 15:20)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실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 『그러나 주의 자비는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 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자손손에까지 미치나니 즉 그의 언약을 지키는 자들과 그의 계명들을 기억하여 그것들을 행하는 자들에게로다』(17,18절). <br/><br/><br/>『주께서는 그의 보좌를 하늘들에 마련하셨으며 그의 왕국은 모든 것을 통치하는도다』(19절). 하늘들에 자신의 보좌를 마련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를 다스리는 권세와 권위를 지니셨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통치는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는 기도에서 알 수 있듯이, 장차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뤄지는 지상 왕국, 곧 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천년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보좌』(왕상 2:12)라 불리는 『주의 보좌』(대상 29:23)에 앉아 온 땅을 다스리실 것이다. 『주께서는 온 땅을 치리할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한 분 주께서 계실 것이며, 그의 이름 하나만 있으리라』(슼 14:9). 『그 때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주의 보좌라 부를 것이며 주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이 그곳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며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악한 마음의 상상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리라』(렘 3:17). 사람들이 악한 마음의 상상을 따라 행하지 않을 천년왕국이 되면 온 세상에 민족들이 그토록 열망하던(학 2:7,9) “화평”이 증가할 것이다(사 9:7). 『그들은 나의 모든 거룩한 산에서 해치거나 파괴시키지 않으리니 이는 마치 물들이 바다를 덮음같이 세상이 주의 지식으로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br/><br/><br/>『능력이 뛰어나고 주의 말씀의 음성에 경청하여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너희 그의 천사들아, 주를 송축하라. 그의 기쁨을 행하는 그의 모든 군대들아, 그의 수종자들아, 너희는 주를 송축하라』(20,21절). 천사들은 능력이 뛰어나다. 열왕기하 19:35에서는 한 천사가 열두 시간도 못되어서 18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였는데, 이처럼 천사들의 능력은 대단하다. 럭크만 박사는 천사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특수부대”요, “친위대”라고 했다. 창세기 6장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떠나지 않았던 『택함받은 천사들』(딤전 5:21)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행하며 그분의 기쁨을 행하는 신실한 천사들이다(20,21절). 그런데 알고 있는가? 재림 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의 천사들”이라고 불리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재림할 것이라는 사실을! 『주 예수께서 그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살후 1:7-9).<br/><br/><br/>재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초자연적인 몸은 천사의 속성을 갖는 『하늘에 속한 몸』(고전 15:40)으로서 교회가 휴거될 때 갖게 된다.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고전 15:52,53). 지금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다. 어차피 “능력의 천사들”로서 올 것이라면, 지금 이 순간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기쁨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엡 2:10)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행하며 재림을 대비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장소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들아, 주를 송축하라. 오 내 혼아, 주를 송축할지어다』(22절).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15 Feb 2024 16:13:3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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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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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94편은 “대환란 기간”에 이스라엘 사람이 말하는 내용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복수”를 다루고 있다. <br/><br/><br/>『오 주 하나님이여, 복수가 주께 속하였나이다. 오 하나님이여, 복수가 주께 속하였으니 자신을 나타내소서. 땅을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시어 교만한 자에게 보응하소서』(1,2절). 본 시편은 첫 두 구절에서 “복수”와 “보응”이라는 단어로 시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 “땅을 판단하시는 주,” 곧 복수하시는 분은 『온 땅의 심판자』(창 18:25)로 불리시는 주 하나님이신데, 그분께서 시편 화자의 기도대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때”는 재림 때이다. 『자기 때가 되면 주께서 나타나시리니 그분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딤전 6:15). 이분이 누구신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라 불리시는 『화평의 통치자』(사 9:6)이시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실 것이다. 『보라,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시리니,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라. 그대로 되리로다. 아멘』(계 1:7).<br/>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복수의 날』(사 61:2)인 재림 때 세상 민족들의 눈앞에 나타나시면, 아마겟돈에 모인 2억 명의 UN 군대를 진노의 큰 포도즙 틀에 넣어 짓밟으심으로써 그분의 의복을 피로 얼룩지게 하실 것이다. 『보스라에서 물들인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 그의 의복이 화려하고 그의 능력의 위엄으로 거니는 이가 누구인가? 의로 말하는 나니, 구원할 능력이 있는 나로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은가? 나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고 백성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도다. 나의 분함으로 그들을 밟고 나의 진노함 속에서 그들을 짓밟으리니 그러면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서 내가 내 의복을 모두 얼룩지게 할 것이라』(사 63:1-3). 시편의 화자는 바로 이날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피로 물든 복수를 간절히 원하는 것일까? 대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br/><br/>『주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환호하리이까? 언제까지 그들이 입을 열어 험한 것들을 말하리이까? 언제까지 모든 행악자들이 자긍하리이까? 오 주여, 그들이 주의 백성들을 산산조각내며 주의 유업을 괴롭히나이다』(3-5절). 시편의 화자가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열망하는 것은, 악인들이 주님의 백성들을 산산조각 내고 괴롭히면서도 그 일에 대해 환호하고 험한 것들을 말하며 자긍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구절의 “교리적 상황”은 “미래의 대환란 때”이다. 짐승이라 불리는 적그리스도는 큰일들과 모독하는 말들을 하는 입을 받아 42개월 동안 권세를 가지고 활동하면서 그의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모독할 것인데,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는 것이다(계 13:5,6).<br/>또한 그에게는 환란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권세가 있기에(계 13:7) 그 성도들을 지치게 할 것이며(단 7:25), 심지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성전 제단에 제물로 바친 후 그 인육을 먹을 것이다(사 6:13, 미 3:3, 슼 13:8). 이 가증한 행악자들이 외치는 “환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세상 나라들을 그분의 왕국으로 삼으실 때까지(계 11:15) 계속될 것이다. 그때까지 환란 성도들은 지치고 또 지칠 것이기에, 목 베임당해 죽은 뒤에도 제발 복수해 달라고 주님께 애원하게 된다! 『어린양이 다섯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보니, 제단 아래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당한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 그들이 큰 음성으로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여,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을 심판하시어 우리의 피를 갚아 주실 날이 얼마나 남았나이까?” 하더라』(계 6:9,10).<br/><br/><br/>한편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유대인들을 죽이면서 그들의 하나님을 철저히 멸시할 것이다. 『그들이 과부와 타국인을 살해하고 아비 없는 자들을 죽이며 말하기를 “주는 보지 못할 것이요, 야곱의 하나님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리라.” 하나이다』(6,7절). 대환란 때 과부들, 타국인들, 아비 없는 자들을 살해하는 자들은 소위 “하나의 종교”를 가진(계 13:4,15) “종교인들”이다. 그날에 죄인들은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살후 2:4) 하는 적그리스도만을 숭배하면서 그러한 만행을 저지를 것인데, 이는 마치 중세 암흑시대에 마리아를 숭배하던 로마카톨릭이 그들의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때 적그리스도는 『자기 뜻대로 행하고 자신을 높일 것이요 모든 신보다 자기를』(단 11:36) 높일 것인데, 세상 사람들도 바로 이자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여 경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그자에게 “인신 제사”를 바치면서도 『주는 보지 못할 것이요, 야곱의 하나님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리라.』(7절)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둔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란 말인가!<br/><br/><br/>『백성 중에 너희 우둔한 자들아, 깨달으라. 너희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가 언제 현명하게 되겠느냐? 귀를 심으신 분이 듣지 아니하시겠느냐? 눈을 만드신 분이 보지 아니하시겠느냐? 이방을 징계하시는 분이 옳게 하지 아니하시겠느냐?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치신 분이 모르시겠느냐? 주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아시나니 그것들은 허무하도다』(8-11절). 하나님께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다. 『내가 너희 마음속에 생기는 일들을 일일이 아노라.』(겔 11:5)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멸망의 아들”에게 속은 그분의 백성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귀를 심으신 분께서 들으시고 눈을 만드신 분께서 보신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땅의 인간들이 대화할 때 그들의 말을 모두 듣고 계시며, 그분의 이름을 마음에 생각하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때에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종종 서로 말하니 주께서 경청하시고 그것을 들으셨으며,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과 그의 이름을 생각하는 자들을 위하여 한 기념의 책이 그의 앞에 기록되어 있느니라』(말 3:16). 이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외 사람들의 모든 생각은 허무할 뿐이다(11절).<br/><br/><br/>주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아신다. 그것이 비록 허무하다 해도 주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신다. 성경에서 거듭 단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현재 79억 명에 육박하는 전 세계인들의 생각을 모두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알고 계신다니, 이 얼마나 두려운 진리란 말인가!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나 주는 마음을 살피고 나는 속을 시험하며 그 사람의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각 사람에게 주노라』(렘 17:9,10). 바로 이분께서 선이든 악이든 모든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시는 것이다(전 12:14). 심판의 권세를 주신 그분의 아들을 통해(요 5:22,27) 사람들의 모든 은밀한 것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롬 2:16)<br/><br/><br/>이후에 나오는 내용(12-16절)은 대환란 때 있을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를 다룬다. 『오 주여, 주께서 징계하시며 주의 법으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12절). 초림 때 자신들의 왕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넘겨준 이스라엘은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대환란을 통과하면서 호된 징계를 받을 것이지만, 그때 다시 효력을 발휘할 율법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환란을 통과할 유대인 환란 성도들은(계 7:4-8; 12:17; 14:12) 복 있는 사람들로 여겨질 것이다. 즉 『악인을 위한 구덩이가 파질 때까지 주께서는 불행의 날들로부터 그에게 안식을』(13절) 주시는 것이다. 『악인을 위한 구덩이가 파질 때까지』는 재림 때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가 파멸될 때까지”를 의미한다(계 19:19-21). 주님께서는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는 환란 성도들을 그때까지 “셀라 페트라”에 숨겨 두심으로써 대환란의 불행의 날들로부터 안식을 주실 것이다(계 12:6,14). 주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던져 버리시지도, 그분의 유업을 단념하시지도 않을 것인즉(14절), 재림 때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심으로써(롬 11:26) 유대인의 남은 자들을 회복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 때 내리실 “의로운 심판”을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그대로 수용하고 따를 것이다(15절).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대환란 때의 유대인들에게 강력히 촉구하신다. 주님을 위해 일어서라고 말이다!<br/><br/><br/>『누가 나를 위하여 행악자들을 대적하여 일어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죄악을 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여 일어날까?』(16절) 모세가 시내산에서 말했던바 『주의 편은 누구냐? 내게로 오라.』(출 32:26)라는 말씀과 “같은 울림”을 주는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도전적인 질문 중 하나이다. 환란 성도들은 단순히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랴?』(사 6:8)와 같은 질문을 받지 않고, 주님을 위해 행악자들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을 요구받게 된다. 물론 144,000명의 유대인 환란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는 모든 가증한 짓들로 인하여 탄식하고 울부짖음으로써(겔 9:4) 적그리스도의 편에 선 행악자들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자신들의 하나님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br/>문제는 행악자들과 죄악을 행하는 자들의 수가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배교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위해 일어서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 소수자들의 인권과 남녀평등, 중동 문제, 세계 평화, 기아 대책, 기본 소득 보장 등을 위해서는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전능하신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도 일어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영적 노숙자들로 채워진 교회들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들은 그렇다고 쳐도 우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만큼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악한 현 세상의 죄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그분을 반대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마 12:30). 당신은 누구의 편인가? 『너는 우리 편이냐, 우리의 대적 편이냐?』(수 5:13) 당신도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을 위해 일어서야 하지 않겠는가!<br/><br/><br/>시편의 화자는 법으로 해악을 조작하는 불의의 보좌가 의인의 혼을 대적하고 무죄한 피를 정죄할 때 그의 발이 미끄러질 뻔하였지만, 주님의 자비에 붙들려서 쓰러지지 않았고, 또한 세상에 넘치는 불의로 인해 생각이 많을 때 주님의 위로들로 자신의 혼이 즐거워졌다고 고백한다(17-21절). 악인들이 잘 살면서 재앙을 당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고서 성도는 실족할 뻔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종말이 지옥임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어리석고 무지함을 슬퍼하며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시 73:2-22). 주님께서는 그 무사태평한 악인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살후 1:8,9). 따라서 그날이 이를 때까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주님을 방패와 피난처로 삼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주는 나의 방패시며 나의 하나님은 내 피난처의 반석이시라. 그가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돌리실 것이요, 그들의 사악함 속에서 그들을 끊으시리니 정녕, 주 우리 하나님께서 그들을 끊으시리로다』(22,23절).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8 Sep 2022 16:07: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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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의인을 위해 뿌려진 빛과 기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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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97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지상 통치를 다루고 있다. 재림 때 있을 현상들은 물론,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심판과 그로 인해 높임을 받으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언한다. 여기에 더하여 노래되는 의인을 위해 뿌려진 빛과 기쁨에 관한 말씀은 본 시편을 읽는 성경 독자의 마음에 빛과 기쁨을 뿌려 준다.<br/><br/>『주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기뻐하며 무수한 섬들은 즐거워할지어다』(1절). 시편의 화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통치하시는 때를 노래하고 있다. 그때 주님께서 계시는 곳은 예루살렘에 있는 보좌로서, 구약성경에서 『주의 보좌』(렘 3:17)와 『주의 영광의 보좌』(렘 14:21)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 보좌는 주님께서 사람들의 자손들을 보시고 그의 눈꺼풀로 그들을 감찰하시는 하늘에 있는 『주의 보좌』(시 11:4)가 아니라,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해서 왕으로 앉아 있던 지상의 보좌이다.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으로서 주의 보좌에 앉으니 번영을 이루었으며 온 이스라엘이 그에게 복종하였더라』(대상 29:23). 성경의 중심 주제는 “왕국”이며, 성경의 주인공은 “만왕의 왕”이시다. 말하자면 『유대인의 왕』(마 2:2)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과거 다윗과 솔로몬이 앉았던 『주의 보좌』에 앉아 천년왕국을 통치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보좌를 주님께서 영광 중에 오셔서 앉으실 『영광의 보좌』(마 19:28; 25:31)라고 하셨는데, 주님께서 그 영광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 때까지 땅은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길가에 쓸모없이 자라난 잡초들을 보라. 굴러다니는 쓰레기들과 땅 어딘가에 버려진 각종 폐기물들과 가축 폐사체로 오염된 땅을 보라. 지난 6천 년간 땅에 흘려진 피와 그곳을 밟고 선 인간들의 죄악을 생각하면, 땅은 기쁨은커녕 신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당신은 땅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거기엔 기쁨이 전혀 없다. 땅은 자신을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으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br/><br/><br/>『구름들과 흑암이 그를 두르고 있으며 의와 공의는 그의 보좌의 처소로다』(2절). 구름들과 흑암이 주님을 두르고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천년왕국의 통치는 빛 가운데서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빛을 비추라. 이는 네 빛이 왔고, 주의 영광이 네 위에 솟아났음이라... 이방인들이 네 빛으로 올 것이요, 또 왕들도 너의 솟아나는 광명으로 오리라... 태양이 더 이상 낮에 네 빛이 되지 아니할 것이요, 달도 광명으로 네게 빛을 내지 아니하리니 오직 주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될 것이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 네 태양은 더 이상 지지 아니하며 네 달도 물러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가 너의 영원한 빛이 될 것이며 또 네 슬픔의 날들이 끝나게 될 것임이라』(사 60:1,3,19,20). 구름들과 흑암이 주님을 두르는 때는 『흑암과 암영의 날, 구름과 짙은 어두움의 날』(욜 2:2)로 불리는 재림 때이다. 『...주의 날은 어두움이지 빛이 아니니라... 주의 날이 어둡게 되지 않겠으며 빛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 너무 어두워 그 안에 밝음이 없지 않겠느냐?』(암 5:18,20)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그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마 24:29).<br/><br/><br/>시편의 화자는 또한 주님의 보좌의 처소가 의와 공의라고 노래한다. 『의와 공의는 그의 보좌의 처소로다』(2절). 즉 주님은 의와 공의를 사랑하는 분이시다(시 33:5). 주님께서는 그분의 보좌가 있게 될 바로 그 처소를 의와 공의라고 부르실 정도로 흠 없고 완벽한 통치를 펼치실 것이다. 의와 공의가 주님의 보좌와 동일시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빛”(요일 1:5)과 “사랑”(요일 4:8,16)이라고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떠오른다. 이러한 수사법은 그 이면에 흐르는 진리가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어두움이 “전혀” 없고, 사랑이시기에 불의가 “전혀” 없으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시기에 “그분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이를 수 있고, 진리이시기에 거짓이 “전혀” 없으시며, 생명이시기에 죽음의 “그림자조차도” 그분께 드리워질 수 없다!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라 불리는 현 세상을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섬기며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정녕, 내가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요,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심이라』(시 23:4). 『주께서는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구해 내시고, 그의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를 보호하시리니,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후 4:18).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라 불리는 세상을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지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당신은 어떠한가?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예수님을 “나의 길,” “나의 진리,” “나의 생명,” 그리고 “나의 동행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br/><br/>『불이 그의 앞에서 나가 둘러싼 그의 원수들을 사르는도다. 그의 번개가 세상을 비추었으니 땅이 보고서 떨었도다. 산들이 주의 면전, 곧 온 땅의 주의 면전에서 밀초같이 녹았도다』(3-5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셋째 하늘의 『주의 보좌』(시 11:4)에서 땅의 『주의 보좌』(대상 29:23)로 이동하시는 재림 때는 실로 무서운 현상이 일어난다. 『구름들과 흑암』이 주님을 두르는 일은 물론, 불이 주님 앞에서 나가 그분을 둘러싼 원수들을 사르는 것이다. 불, 주님의 재림에는 심판의 “불”이 수반된다. 『보라, 이는 화덕같이 탈 그 날이 오기 때문이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정녕 다 그루터기가 되리라. 오는 그 날이 그들을 태우리니, 뿌리나 가지도 그들에게 남기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말 4:1). 『흑암과 암영의 날, 구름과 짙은 어두움의 날이 산들 위에 펼쳐진 아침 같으니, 많고 강한 사람들이라. 이 같은 일은 전에도 없었고, 또 이후, 곧 많은 세대들의 연수에까지도 다시 없으리라. 불이 그들 앞에서 삼키며 그들 뒤에서는 화염이 불타는도다. 그 땅은 그들 앞에서는 에덴의 동산 같으나 그들 뒤에는 황량한 광야 같으니, 정녕, 어떤 것도 그들을 피하지 못하리라』(욜 2:2,3). 주 예수께서 그분의 능력의 천사들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재림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신론자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실 것이다(살후 1:7,8). <br/><br/><br/>또한 그 영광스런 재림의 날에는 그동안 빛을 거부한 자들에게 문자 그대로 “번개”가 내리칠 것이다. 『그의 번개가 세상을 비추었으니 땅이 보고서 떨었도다』(4절). “빛을 거부하면 번개가 주어진다.” 『주께서 하늘로부터 천둥을 발하셨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음성을 내셨도다. 그가 화살들을 쏘아서 그들을 흩으셨으며, 번개로 그들을 패주시키셨도다』(삼하 22:14,15).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천둥을 발하실 때 그 천둥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음성”이다. 천둥은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보라, 이것이 그의 길들의 일부분이라. 그러나 그에게서 들은 것이 얼마나 적은가? 그의 능력의 천둥 소리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욥 26:14) 『그후에 음성이 울려 퍼져 나가니, 그분이 자신의 탁월하심을 드러내는 음성으로 천둥을 치시는 것이라. 그분의 음성이 들리면 그것들을 멈추게 하지 않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음성으로 놀랍게 천둥 소리를 내시며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시는도다』(욥 37:4,5). 『네가 하나님과 같은 팔이 있느냐? 네가 그와 같이 음성을 천둥처럼 낼 수 있느냐?』(욥 40:9) 또한 『천둥의 번개』(욥 28:26; 38:25)라는 말씀이 있듯이 천둥에는 번개가 수반된다. 재림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천둥 같은 음성을 내시면 땅의 죄인들에게는 번개가 떨어지는 것이다! 번개는 주님의 화살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화살을 쏘아서 그분의 대적들을 패주시키실 것이다. 『그가 화살들을 쏘아서 그들을 흩으셨으며, 번개로 그들을 패주시키셨도다』(삼하 22:15). <br/><br/><br/>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은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계 1:10)이요,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많은 물소리』(겔 43:2, 계 1:15)며, 구름 속에서 하늘을 찢어발기는 『천둥 소리』(욥 37:5)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살전 4:16), 곧 『마지막 나팔 소리』(고전 15:52)로 우리를 불러(계 4:1) 휴거시키실 것이고(죄인들에게는 천둥 소리로 들린다. - 요 12:29), 재림 때에는 번개를 동반한 천둥 소리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가 셋째 하늘에서 주님을 직접 뵐 때에는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이 장엄하게 쏟아지는 그 빛나는 용모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엎드려 경배하게 될 것이다(계 1:15-17).<br/><br/><br/>『산들이 주의 면전, 곧 온 땅의 주의 면전에서 밀초같이 녹았도다』(5절). 주님 앞에서 불이 나가고 번개가 내리칠 때 산들은 『밀초가 불 앞에서 녹아 내리듯』(시 68:2) 온 땅이 주의 면전에서 녹아 내릴 것이다. 『산들이 그의 앞에서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아 내리고 땅이 그의 면전에서 타나니, 실로 세상과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것이로다』(나 1:5). 밀초같이 녹아 내림은 두려움과 낙심을 비유한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산들이 재림 때 녹는 것을 의미한다. 재림 때에는 산들(판 5:5)뿐만 아니라 악인들(시 68:2)도 주님 앞에서 녹아 내린다. 주님께서 하늘들을 가르고 내려오시면 산들도 그분의 면전에서 흘러내리기를 용해하는 불길이 타서 그 불이 물을 끓게 하는 것같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때서야 교회 시대 2천 년 동안 멸시받던 주님의 이름이 그분의 대적들에게 알려져서 민족들이 그분의 면전에서 떨게 될 것이다(사 64:1-3). <br/><br/>『하늘들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는도다. 조각한 형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낭패를 당하리니 이는 그들이 우상들을 자랑함이라. 너희 모든 신들아, 그분을 경배하라』(6,7절). 재림 때에는, 의로우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을 하늘들이 선포할 것이고, 모든 눈이 재림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계 1:7; 6:15-17). 따라서 재림 때 가장 낭패를 당할 자들은 우상 숭배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한 결과가 헛됨 그 자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은과 금으로 만든 수공물에 불과한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또한 우상은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을 통하여 말하지도 못한다. 그것들을 만드는 자들은 그것들과 같으며 그것들을 신뢰하는 모든 자들도 그러한 것인데,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상들을 신뢰한 자들은 우상들과 함께 수치와 치욕을 당할 것이다(시 115:3-8, 사 45:16). 그때 이스라엘은 모든 신들 위에 훨씬 뛰어나신 그들의 하나님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8,9절). 주님께서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견뎌 낸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며 자기 백성의 책망을 온 땅으로부터 제해 주시는 그날, 이스라엘은 『보라,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분이 주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가 그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사 25:9)라고 말하며 그들의 하나님을 민족들 앞에서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자랑은 그들만의 몫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를 가나 이방인들 앞에서 우리의 하나님을 자랑해야 한다. 그 일은 “증거”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언제 어디서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증거하는 성도들에게는 천년왕국에서의 통치권이 예비되어 있다(딤후 2:12).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스러워하는가, 아니면 그분에 대한 증거에 있어서 소극적인가?<br/><br/><br/>『주를 사랑하는 너희들아,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들의 혼들을 보호하시며 그가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 내시느니라. 빛은 의인을 위하여 뿌려졌고 기쁨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뿌려졌느니라. 너희 의로운 자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여 감사를 드리라』(10-12절). 주님을 사랑한다면 악을 미워해야 한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며(잠 8:13), 의를 사랑하는 것이다(히 1:9). 미워하는 것 없이 사랑할 수 없다(시 139:21; 101:3).<br/>또한 우리는 진리를 “모방”하는 자들을 미워해야 한다. 특히 빛과 기쁨을 모방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고후 11:14,15),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흉내 낸 가짜 흠정역은 “기쁨”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즉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하는가(한글킹제임스성경), “주를” 기뻐해야 하는가(흠정역)에 관한 논란이 있다. 피터 럭크만 박사는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그가 문자 그대로 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엡 1:1,10).｣라고 설명했다. 이 해석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의 번역에 손을 들어 주었다(삼상 2:1, 시 32:11; 33:1; 40:16, 빌 3:1 등).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규정해 놓았다. 즉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br/><br/><br/>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며(롬 9:1),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고(롬 16:10),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품으며(고전 15:19),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누리고(엡 1:3),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다(고후 2:14). 주님을 벗어난 것들에서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러나 주님 밖에서 세상과 손잡고도 “주님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은 그런 자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마 7:22,23). 성도의 기쁨의 영역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므로 “그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한결같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라는 명령은 “불가능할 듯한” 명령이 아니다.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는 얼굴로 우리의 연약함을 감싸 주시는 주님... 그렇기에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의롭고 정직한 성도들을 위해서 뿌려진 빛과 기쁨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Sep 2022 22:01:0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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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재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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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편 96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를 노래한다. 만물이 회복되어 기뻐하고, 민족들이 주님께 예물을 들고 와서 경배하며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재림의 기쁨이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고양된 어조로 예언된다. 재림은 그것을 바라는 성도들을 흥분케 하고 강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예언의 백미이다.<br/><br/>&nbsp; 『오, 새 노래로 주께 노래하라. 온 땅아, 주께 노래하라. 주께 노래하고 그의 이름을 송축하라. 날마다 그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라』(1,2절). 시편의 화자는 “땅”에게 명령한다. 새 노래로 주께 노래하라고 명령한다. 왜 그런 것일까? 주께서 “땅”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언적으로 지상 재림을 가리키는데,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통치하실 천년왕국을 가리킨다(계 20:4). 땅을 지으신 분께서 땅에 계실 때 온 땅과 그곳의 거민들은 그분께 노래해야 하는 것이다. 산들과 작은 산들, 열매 맺는 나무들과 모든 백향목들, 짐승들과 모든 가축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나는 새들은 물론,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통치자들과 모든 재판관들과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 노인들, 아이들이 모두 주의 이름을 찬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만이 홀로 뛰어나시며(슼 14:9) 그분의 영광이 땅과 하늘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시 148:9-13).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유대인들에게는 노래가 강요되었지만(시 137:1-6), 천년왕국 때에는 노래가 결코 강요되지 않는다. 천년왕국은 진심으로 노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곧 만왕의 왕께서 땅에 계시는데, 우주의 창조주께서 땅에 계시는데 땅과 그 안의 피조물들이 왜 그들의 창조주를 앞다퉈서 찬양하지 않겠는가!<br/><br/>&nbsp; 곡조를 만들어 찬양하라는 명령은 교회 시대에도 주어졌으나(엡 5:19), 천년왕국 때에도 새 노래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향한 찬양을 만드는 일은 끝이 없을 것이다. 음악은 끝없이 창작될 수 있다. 최초의 창조 때 자기 몸 안에 북들과 관악기들을 지닌(겔 28:13) 루시퍼가 천사들의 찬양대를 지휘하고(욥 38:7), 재창조된 세상에서 하프와 오르간을 다루는 모든 자들의 조상인 유발이 노래를 지은(창 4:21) 이후로 얼마나 많은 노래들이 지난 역사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져 왔던가? 찬양은 천년왕국을 넘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찬양의 음악은 영원하다. 음악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 아닌가? 배교한 교회들에서 부르는 CCM을 주님을 위한 새 노래라고 하지 말라. 그것은 모독이다. 마귀에게 넘겨진(눅 4:6) 세상 음악이 교회 안에 들어왔다면 그것은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이리가 짖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br/><br/>&nbsp; 『이방 가운데서 그의 영광을, 모든 백성 가운데서 그의 이적들을 선포하라. 이는 주께서 위대하시므로 극진히 찬양을 받으셔야 하고 모든 신들보다 두려워함을 받으셔야 함이며 민족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지으셨음이로다』(3-5절).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시지 않는다. 『나는 주니 그것이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양을 새긴 형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cf. 사 48:11). 새긴 형상, 곧 민족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이며, 우상에게는 영광이 없다. 나무, 돌, 쇠붙이 같은 것들에 무슨 영광이 있는가? 영광이 없는 것들엔 찬양이 주어져서도 안 된다. 그러한 물질들을 향해서 예물을 바치고 경배하는 로마카톨릭은 헛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고(롬 3:23), 그들의 “마리아” 또한 영광과는 무관하다. 성경의 하나님만이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신들 위에 계신 위대한 왕』이시다(시 95:3). 땅의 인간이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은 마리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뿐이다(행 4:12).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받아들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롬 15:7).<br/><br/>&nbsp; 본 시편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께서 하늘들을 지으셨다는(5절) 사실과, 그분께서 통치하시고 백성을 의롭게 심판하신다는(10절) 사실로 선포된다. 배교한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통치하신다고 가르치는 후(무)천년주의를 따르지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들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통치하시고 백성을 의롭게 심판하시는 때가 천년왕국 시대라고 믿고 재림을 고대한다. 왜 믿고 고대하는가? 그때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통치하는 영광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재림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실제적인 교리이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그들이 그 위에 앉았는데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더라. 또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사람들의 혼들도 보았는데, 그들은 그 짐승에게나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표를 그들의 이마 위에나 손에도 받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므로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통치하더라』(계 20:4). 『하늘에 있는 군대들』(계 19:14)로 묘사되는 『두 군대』(솔 6:13), 곧 신약 성도들과 구약 성도들은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재림하여 보좌들에 앉아 심판할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환란 때 목베임을 당한 환란 성도들 또한 주님과 천 년을 통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br/><br/>&nbsp; 그러나 주님께서 땅에서 통치하시는 천년왕국 시대에도 주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악인들이 있다(시 110:2, 사 26:10). 천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불만을 품던 민족들은 그 천 년 끝에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잠시 풀려나는 그들의 신, 곧 사탄을 따라 최후의 반역에 동참할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불이 그들을 삼켜 버릴 것인데,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의 신과 함께 불못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고통받게 된다(계 20:7-10). 천년왕국 시대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뻐한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영원 시대로 들어갈 것이다(계 21:1).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신[사탄]의 이름으로 행할 것이나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원무궁토록 행할 것이라』(미 4:5).<br/><br/>&nbsp; 『영예와 존귀가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 안에 있도다. 주께 드리라. 오 너희 백성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주께 드리라. 주께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라. 예물을 가져와서 그의 뜰들 안으로 들어오라. 오, 거룩하심의 아름다움 가운데서 주를 경배하라. 온 땅아, 그의 앞에서 두려워하라』(6-9절). 시편의 화자는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와서 경배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다. 성소의 하나님께 예물로 경배드리는 것이 그분의 영광과 권능을 높여드리는 길이요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성소는 능력과 아름다움의 처소요 그분 앞에는 영예와 존귀가 있다. 6절과 9절의 『아름다움』은 거룩함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며, 그 거룩하심으로 인해 아름다운 분이시다. 인간의 외모를 존중하지 않는 분께서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거룩함”인 것이다! 『또 그가 백성들과 의논하여 주께 노래하는 자들을 임명하여 군대 앞에서 나갈 때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여 “주를 찬양하라.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됨이라.”라고 말하게 하였더라』(대하 20:21).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들이 아침의 태로부터 오는 거룩함의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서 자원하리니 주께서는 주의 젊음의 이슬을 가지셨나이다』(시 110:3).<br/><br/>&nbsp; 이 세상에는 부와 명예를 거머쥐려는 자는 많아도 거룩함을 소유하려는 자는 없다. 썩어질 것들에 소망을 두지만, 썩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거룩함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거룩하심을 선물하셨고, 그 거룩하심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을 아름답게 보신다. 우리의 육신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양자 삼아 주신(엡 1:5) 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아름다운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신부인 교회를 가시나무 가운데서 피어난 한 송이의 백합화처럼 사랑해 주신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나의 사랑도 딸들 가운데 그러하도다』(솔 2:2). 하나님께 그리스도인은 이토록 독특하다. 그리스도인은 죄인들 사이에서 피어난 백합화이다. 마르고 윤기 없는 가시나무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처럼 햇빛을 받아 홀로 큰 얼굴로 피어난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마음속까지 파고드는 그 숨 막히게 짙은 향기는 또 어떤가? 우리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에는 그와 같은 향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향기』(고후 2:14)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자, 자신이 공부한 것을 전파하는 자, 주님은 그 사람에게서 백합화의 향기 같은 깊은 향기를 흠향하시는 것이다.<br/><br/>&nbsp; 『이방 가운데에 주께서 통치하신다고 말하라. 세상도 견고히 서고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그 백성을 의롭게 심판하시리라. 하늘들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들도 소리지르라. 밭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은 즐거워할지어다. 그때 삼림의 모든 나무들이 기뻐하리니, 곧 주 앞에서라. 이는 그가 오시기 때문이니 그가 땅을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라. 그가 세상을 의로, 그 백성을 그의 진리로 심판하시리로다』(10-13절). 재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의와 진리로 심판하실 때 그분의 말씀을 사용하실 것이다(요 12:48). 그 말씀은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신 말씀으로(시 138:2), 당신이 읽고 있는 바로 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에 그러한 위력이 있는 것이다. 죄인들은 그 흠 없고 위대한 말씀 앞에서 할 말을 잃을 것이다. 『주, 주만을 거역하여 내가 죄를 지었으며 주의 목전에서 이 악한 행실을 행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리이다』(시 51:4).<br/><br/>&nbsp; 통치하려고 땅에 오실 때, 주님께서는 하늘들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또 한 번 흔들어(학 2:6) 이미 피조된 것들로서 흔들리는 것들을 제거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은 남겨 두실 것이다(히 12:27). 그날이 오면 의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시 55:22), 이스라엘 또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며(시 14:7; 53:6) 시온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시 69:35). 『화평의 통치자』(사 9:6)께서 오셔서 세상에 전쟁이 그치고(사 2:4) 예루살렘에 화평이 깃들면(시 122:6) 비로소 세상도 견고히 서고 흔들리지 않게 된다(10절).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일은 이토록 좋은 일이다. 왜 하늘들이 그 일을 기뻐하지 않고 땅이 즐거워하지 않으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들이, 밭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소리 지르며 좋아하지 않겠는가! 삼림의 모든 나무들이 『주 앞에서』 기뻐하는 것은 자신들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문자 그대로 그들 앞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성도의 믿음은 재림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믿음 없는 자에게 재림은 광신자의 공상에 지나게 않는다. 당신도 재림을 기뻐하는가? 믿음, 오직 믿음으로 재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히 11:3)&nbsp;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9 Jul 2022 15:29: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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