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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기타 글모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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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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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대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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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한 명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나면 마귀의 진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를 예외 없이 화해의 말씀을 전파하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대사』(고후 5:20)로서 부르신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로서 복음을 들고 이 세상에서 활동해야 한다. 세상의 눈에는 그 일이 미련해 보여도,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고전 1:24). 사도 바울은 이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이 『사슬에 묶인 대사』(엡 6:20)가 되었다고 했다.<br/>사전적 의미에서 “대사”란 “국가를 대표하여 권위를 위임받은 최고 직급에 있는 사람”이다. 한 국가의 대사도 영예로운 자리인데, 하물며 하나님께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영의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런 것이겠는가?(고후 3:8) 이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관직보다도 높고 위대하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 하늘의 소명이다. 하지만 많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 마지막 때의 현실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대사 임명장”은 받았는데 그 기억만 있을 뿐, 과연 지금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자신을 비춰 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br/><br/>첫째, 당신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화해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<br/>오래전, 20대 초반의 한 한국 여성이 남미 여행 중 예상치 못한 비극에 휘말렸다. 현지의 지인에게서 작은 가방 하나를 옮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선뜻 수락했으나, 그 안에는 “마약”이 들어 있었다. 여성은 현장에서 마약 사범으로 체포되어 1급 죄수들만 수용하는 남미의 악명 높은 섬 감옥에 수감되었다. 여성의 아버지는 현지 대사관에 간절히 도움을 호소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고작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몇 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결국 국내의 외교부를 찾아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을 시도하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 극단적인 호소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외교부는 즉시 현지로 조사단을 파견했고, 뒤늦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서 여성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br/>사건 이후 현지 대사관 사무실을 조사한 결과, 여성의 아버지가 수년 동안 보낸 수많은 편지가 단 한 통도 뜯기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직무를 유기한 대사들은 모두 국내로 소환되어 즉시 직위 해제되었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가 자국민의 생명을 외면하고 사명을 저버린 결과는 이토록 참혹하고 부끄러운 것이었다.<br/>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스스로 우리와 화해하셨고 화해의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겨 주신 것이라.』(고후 5:18,19)라고 말씀한다. 또한 우리가 이 『화해의 말씀』을 맡은 대사로서 언제 어디서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항상 대비하라고 명령한다(딤후 4:2).<br/><br/>당신은 『화해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평소 복음 전도지를 꺼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시 대사의 직분을 망각했거나 스스로 내려놓지는 않았는가? 당신이 학업이나 세상일에 몰두하는 사이에, 아니면 예상치 못한 사고나 질병 중에 주님께서 갑작스럽게 오실 수도 있다. 성도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탁받은 전권대사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엄중한 징계를 피할 수 없으며, 끝내 그 고결한 명령을 거부할 경우 “본국”으로 “강제 소환”될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br/><br/>둘째, 당신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고난의 표를 새겨 가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보혈을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십자가의 표”를 직접 보여 주셨다. 사도 바울 또한 채찍과 돌, 몽둥이에 맞아 피멍이 들고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을 주 예수를 따르는 증거로 삼았으며, 그는 이를 가리켜서 『주 예수의 표들』(갈 6:17)이라고 했다.<br/><br/>성도는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증명하는 고난의 표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그러나 바쁜 일상 속에서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일은 이제 흔치 않다. 정신없이 하루를 살다 보면 말씀을 읽을 시간조차 부족한데 언제 복음을 전하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업을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기에 주말 구령 활동이 아니고서는 “전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정말로 그러한가? 출퇴근길에 마음만 먹는다면 마주치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고난의 표를 새길 수 있다. 점심시간 중 단 15분이라도, 혹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이웃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고난의 표를 남길 기회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독방에 갇힌 죄수처럼 종일 침묵하며 고난의 기회를 외면하려는가? 이러한 침묵은 영적 태만이며, 우리를 위해 온갖 수치를 당하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채 영적 게으름에 빠지는 순간, 당신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회피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br/><br/>성도 자신에게 복음으로 인한 고난의 표를 새기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넘어지고, 맞고, 멍들고, 깨진 그 영광스런 상처들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아무런 흔적도 없는 깨끗한 몸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br/><br/>셋째, 당신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고 있는가? 세상은 죄를 정죄하고 사망과 지옥을 경고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믿어야 한다는 외침을 견디지 못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복음을 대적하며 조롱과 박해를 일삼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실체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깨닫게 되겠지만, 그때가 되면 너무 늦어 버리고 만다. 한번은 성경침례교회로 어느 감리교 목사가 항의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있었다. 사연인즉 우리 교회 성도가 왜 자신의 교회 앞에서 복음을 전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복음 전파를 혼의 구원이 아닌 교인을 빼앗아가는 행위로 간주했던 것인데, 그런 그의 말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심한 악취”만이 풍겼다.<br/><br/>이처럼 지금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에게조차, 심지어 “목사”라는 이들에게조차 복음이 사망으로 인도하는 향기로 여겨지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죄와 죽음을 두려워하며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대사들은 그들을 찾아서 쉼 없이 걸어야 한다. 우리의 발걸음이 멈추는 순간, 누군가는 복음의 향기를 맡을 마지막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절박함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또 어느 곳에서나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 관한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 이는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나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이기 때문이라. 정녕 이 사람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향기이나 저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라. 누가 이런 일들을 원만히 감당하겠느냐?』(고후 2:14-16)<br/><br/>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충성을 다하지 아니하여 고난의 표를 남기지 못한다면, 그 성도의 인생은 그리스도의 향기 대신 세상의 악취를 내뿜게 된다. 이는 마귀의 참소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수치를 당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세상이 죄로 어두울수록,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발산된다. 과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외에 누가 이 고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겠는가?<br/><br/>찰스 스펄전은 “성도가 머무는 모든 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교지”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사로 임명한 자녀들을 복음을 위한 최상의 적임지로 파견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대사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대표 선수만 하더라도 그 자부심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들은 승리의 영광을 거머쥐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피나는 훈련과 인고의 시간을 감내한다.<br/><br/>이러한 헌신은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내한 사도 바울의 삶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즉 복음의 신비를 위해 스스로 “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었다는 바울의 고백은, 그가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쳤음을 의미한다. 우리 역시 세상이 채우는 사슬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전진하는 참된 대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들로서 사명을 받은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높여 그분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거룩한 소명”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59:1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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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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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해 말씀하시다가 이런 일을 언급하셨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 만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고 하신 말씀이 옳다면, 재림 전에는 “의로운” 사람들의 믿음이 파산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이 돌아오실 때 무슨 믿음을 찾을 수 있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하셨기 때문이다. 즉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라는 말씀처럼,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데다 불법까지 성행하는 고로, 사람의 아들들로부터 믿음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br/><br/>오늘날의 기독교계에서 이러한 현상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는 지표는 “호전적인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이들의 불신에 대해서는 필자가 4,000페이지가 넘는 자료를 통해 기록해 두었으므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소위 “근본주의자들,” 적어도 그들 가운데 학자 출신의 유명 인사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볼 필요도 없다. 사실상 그들은 “실용주의적 인본주의자들”이다. 이 용어는 해럴드 윌밍턴, 로버트 섬너, 알린 호튼, 트루먼 달러, 스피로스 조디에이츠, A.V. 핸더슨, J.R. 포크너 같은 배교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애프만, 위즈덤, 파노시안, 커스터, 닐, 밥 존스 3세, 마틴, 프라이스, 파스태드 및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요 12:43), 전혀 호전적이지 않은 초식동물과 같은 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br/><br/>라오디케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잃어버렸음을 잘 보여 주는 지표는 또 있다. 바로 “교회의 휴거”의 교리에 관한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미국 전역에서(1970년 이후로 강력하게) “교회의 환란 후 휴거”에 관한 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그 자료에 배경으로 깔려 있는 생각이란, “환란 전 휴거” 교리를 창안한 것은 예수회 사제였으며, 그 후 스코틀랜드의 이단들(“어빙파”라 불림)이 그것을 전파했고, 여기에 플리머스 형제단(해리 아이언사이드, C.I. 스코필드, 존 넬슨 다비, 크로닌)이 미혹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오늘날 이 교리가 성경적 교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제에 관해 십여 편의 “소논문들”이 발행됨에 따라, 수천 명의 &lt;킹제임스성경&gt;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환란 전” 휴거가 정말로 있을지, 아니면 없을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복된 소망, 곧 위대한 하나님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니』(딛 2:13)라고 말씀한다. 이렇듯 성경으로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런 자료들을 믿을 만큼 어리석었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하여 『그 복된 소망』을 버려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신(살전 4:16) 다니엘의 “칠십째 주”와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br/><br/>위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배교함으로써 구약의 유대교로 돌아가기 직전이고(cf. 갈 3-6장),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지위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정통주의자들이 입에 발린 소리로 말하듯이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했더라면, 다니엘의 칠십째 주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은 “믿음”과 “행위”가 한 사람의 구원을 결정한다는 점을 알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br/><br/>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복된 소망』을 버리고 휴거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서는 테네시템플, 리버티대학교, 펜사콜라크리스천대학, 그리고 밥존스대학교의 교수진들의 주장을 의지한다. 이들은 모두 율법 아래 있던 구약의 구원이 은혜 아래 있는 신약의 구원과 같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은 앞서 언급한 학교들과 여타 수십 개의 신학교들에서 가르치는 표준적인 알렉산드리아 이단 교리이다. 하지만 진리에 깨어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를 통과할 것이라고 믿는 저 환란 후 휴거론자들이 내놓은 자료를 논박할 수가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그렇다. 주님께서는 지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우실 것이다. <br/><br/>자, 우리는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 주신 믿음』(유 1:3)에서 떨어져 나간 저 그리스도인들이 어째서 그런 주장을 듣고 현혹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분명 모호한 부분도 있지만, 여기에 전혀 모호하지 않은 네 가지 분명한 진리를 제시하려고 한다.<br/><br/>첫째, 대환란을 예언하는 마태복음 24장 1절부터 36절까지 그 어디에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교회(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만일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택함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단축될 것이라... 또 주께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시리니, 그들이 하늘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택하신 사람들을 함께 모을 것이라』(마 24:22,31). 존 칼빈은 “선택”이라는 단어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여기 22절과 31절의 『택함받은 사람들』이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라고 쉽게 단정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라면 칼빈은 마이클 잭슨이나 엘비스 프레슬리만큼이나 성경에 관해 엉망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나의 택한 이스라엘』(사 45:4)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한 장 안에서 두 번이나 『나의 택한 자』(사 65:9,22)라고 불리기도 했다. 칼빈은 “주권적 선택”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성경의 4분의 3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br/><br/>둘째, 교회 시대에 그 어떤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인자”를 찾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바울은 이 『인자[Son of man]』라는 표현을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유대적 칭호로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지상 사역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유대인 메시아이심을 지칭하기 때문이다(마 5-23장, cf. 롬 16:25,26; 15:16-24).<br/><br/>셋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환란을 기다리라고 하시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3-18, cf. 고전 15:51-53, 요일 3:1-3, 빌 3:20,21, 딛 2:13). <br/><br/>넷째, 휴거는 신비이며, 바울이 이 신비에 관해 기록할 때까지는 계시되지 않았다(고전 15:49-52). 구약의 인물들은 누구나 구약 성도들이 환란 후에 들림받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진리가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이다(시 50편, 사 26장, 솔 2장, 욥 37장). 물론 칼빈은 이 목록에 있는 말씀들을 단 한 구절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설령 그가 그 말씀들을 읽었다 하더라도,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br/><br/>[복된 소망을 제거하려는 자들의 주장이 역사적으로도 사실이 아님을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환란 전 휴거에 대한 언급은, 그들이 이 교리를 발명한 사람으로 지목하는 어빙이나 존 넬슨 다비가 나타나기 적어도 1,200년 전인 4-7세기경에 이미 존재했다. 니시비스의 에프라임(Ephraem of Nisibis) 혹은 익명의 에프라임(Pseudo-Ephraem)이 했던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 그리고 세상의 끝”에 관한 설교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설교는 당시 널리 읽혀지고 번역되었는데, 이 문헌을 보면 그 당시에도 대환란 이전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는 진리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우리는 지상의 일들에 대한 모든 염려를 버리고 주 그리스도를 만날 예비를 하여, 그분께서 온 세상을 압도하는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내시도록 하지 않는가?... 이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과 택함받은 자들이 다가올 환란 이전에 모이고, 우리의 죄들로 인해 세상을 압도할 혼란을 보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로 데려감을 받기 때문이다.” - 역자 주]<br/><br/>사람들이 휴거의 교리가 어떤 개인의 해석이라고, 누군가가 그 교리를 창안해 낸 것이라고 주장하든 말든, 어떤 이단이 그것을 가르쳤다고 비난하든 말든,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를 누가 어떻게 전달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든 말든, 그 외에 누가 또 어떤 견해를 피력하든 간에 휴거가 진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br/><br/>그렇다면 이 시대의 배교자들이 버린 그 소망을 “복되다”고 일컫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소망이 하나님의 자녀를 정결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요일 3:3). 이 소망은 또한 그리스도인을 위로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그리고 우리에게 화평을 준다(빌 4:5-7). 이 소망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고, 또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키시는 그 능력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천한 몸을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같이 변모시켜 주실 날을 바라게 한다(빌 3:20,21). 그런데 왜 이 복된 소망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즉 뉴스 매체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텔레비전 그리스도인들”이며, 뉴스 보도에 잠식되어서 살아간다. 그들은 뉴스 매체들이 전하는 소식들, 곧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국세청에 대해,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에 대해, “중동 문제”에 대해, 그리고 학교 내의 인본주의 만연 등에 대해 듣고서 “대환란”이 시작되었거나 곧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테네인들처럼(행 17:21)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TV를 포함한 대중 매체가 내뿜는 오물 속에서 계속 뒹군 결과, 어느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건 다들 겪게 되는 공통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환난”(요 16:33, 빌 1:28-30)과 마태복음 24:21에 나오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인 “대환란”을 혼동하게 된 것이다.<br/><br/>이제 그들은 대환란 전에 은밀한 “즉각적인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증거 구절”을 요구하며 아우성을 친다. 그들의 압력이 너무나 거셌던 터라, 어리석고 불경스러우며 서투른 &lt;뉴킹제임스성경&gt;의 번역자들은 환란 전 휴거에 대한 “증거 구절”인 데살로니가후서 2:7을 가져다가 그곳의 “그”라는 단어를 대문자(He)로 표기하여 성령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물론 &lt;킹제임스성경&gt;을 변개하는 근본주의자들이 틀렸다. 데살로니가후서 2:7의 “그”는 성령님이 아니다. 무소부재하신 성령님께서는 옮겨지실 수가 없다. “그”는 데살로니가후서 2:3에 나오는 “죄의 사람”을 가리킨다. - 역자 주]. 그들은 “율법 아래 있던 구약의 구원이 은혜 아래 있는 신약의 구원과 같다”는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으로 그런 무지막지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보다 더 야비한 사기꾼 무리는 존재했던 적이 없다. 그들은 라오디케아 시대에만 있는 독특한 괴짜들이다.<br/>우리의 입장은 시종일관 분명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누가 이 교리를 창안했다고 하든지, 언제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누가 그것을 믿었고 누가 믿지 않았다고 말하든지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가 유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또 기울이는 질문은 이것이다. 즉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롬 4:3)이다.<br/><br/>성경은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신비인 것처럼(엡 3:1-6) 그리스도의 몸의 휴거 또한 분명한 신비라고 말씀한다. 만약 교회의 휴거가 지상 재림 전에 일어난다면, 그런 휴거는 적그리스도가 오는 것만큼이나 놀랍지도 신비롭지도 않은 일이 되고 말 것인데, 그런 일을 왜 기다리겠는가? 『주께서 너희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인내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바라노라』(살후 3:5).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진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도 입으리라. 그러나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 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49-52).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38:0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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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누가 “신약 정경”을 확정했는가?</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B%88%84%EA%B0%80-%EC%8B%A0%EC%95%BD-%EC%A0%95%EA%B2%BD%EC%9D%84-%ED%99%95%EC%A0%95%ED%96%88%EB%8A%94%EA%B0%80/</link>
<description><![CDATA[필자는 오래전에 미국의 공식 카톨릭 “변증가”와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출신 로마카톨릭교도인 변호사 칼 키팅(Karl Keating)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근본주의자들을 공격했고, 세례받은 모든 로마카톨릭교도 역시 “근본주의자”이자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기 위한 글을 썼다. <br/><br/>키팅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따르면, 헤르만 괴링, 피델 카스트로, 피의 메리, 아돌프 히틀러, 알 카포네, 베니토 무솔리니, 프란시스코 프랑코, 요제프 괴벨스, 샤를마뉴, 하인리히 히믈러는 물론, 다하우, 트레블링카, 아우슈비츠, 소비보르, 벨젠-벨젠 같은 죽음의 수용소 나치 사령관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다!<br/><br/>키팅은 “그레고리 대제” 시절부터 현재까지 카톨릭이 늘 우려먹는 수법으로 토론을 시작했다. 그것은 “만약 카톨릭 교회가 없었다면,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너희들은 신약성경에 어떤 책들이 속하고 어떤 책들이 속하지 않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기만적인 계략이었다. 정말 우습지도 않은 농담이 아닌가?<br/><br/>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바울이 “일곱 산 위에 앉은 종교적 창녀”(계 17장)의 도움 없이는 신약성경에 어떤 책들이 속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 엉터리 주장이 어떻게 참이 될 수 있겠는가?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17장을 썼을 때, 그가 기록하고 있던 그 책을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 시기에 “카톨릭교도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모든 신약성경의 저자들, 곧 사도들은 “유대인들”이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베드로, 야고보, 유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할례받은 후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이 “카톨릭교도들”이 아닌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하셨다(요 4:2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들』이 “카톨릭교도들”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맡겨졌다고 선언했다(롬 3:2). 『하나님의 말씀들』은 “카톨릭교도들”에게 맡겨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말씀들은 문자적이고 물리적 “유대인들,” 곧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그 민족에게 맡겨졌다.<br/><br/>키팅과 그의 동료 협잡꾼들은 성경의 4분의 3이 어떤 “그리스도인”도 태어나기 전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그 부분이 분명 100% 위조인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에서 “보편적”(universal, 우주적)이란 뜻의 철학 용어 “카톨릭”(Catholic)을 사용하기 전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음을 잊어버렸다(필자의 &lt;신약 교회사&gt; 참고). 키팅은 1,400년이나 묵은 카톨릭 조상들(A.D. 500-1900)의 전통에 따라, 이그나티우스의 용어를 가져다가 성경적 단어인 “그리스도인”(행 11:26)을 대체하는 데 사용했다(“우주적”이며 눈에 보이는 교회란 없다.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모두 “지역 교회”이다). 즉 키팅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카톨릭교도,” 그것도 “로마”카톨릭교도로 바꿔치기해 버린 것이다.<br/><br/>이건 정말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고후 11:14) 사탄조차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 등이 어떻게 갑자기 로마카톨릭교도가 된다는 것이냐며 어이없어 할 판이다. 이런 유치한 계략으로, 그 사기꾼들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등장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카톨릭교도”로 만들고 나서, 그중 일부가 모여 어떤 책들이 신약 정경에 속하는지 결정했다면, 그것은 “카톨릭 교회가 올바른 신약 정경을 확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br/><br/>로마카톨릭은 1546년의 트렌트 공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그나티우스가 태어나기 400여 년 전에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히브리어 구약 정경을 거부했다. “카톨릭교도들”은 유대인들의 구약성경에 속하지 않은 책들을 날조해 내고서는, 마담 블라바츠키의 &lt;비밀 교리&gt;나 조셉 스미스의 &lt;니파이전후서&gt;만큼이나 “정경적”이지 않은 7권의 책들을 구약 사이에 끼워 넣은 것이다!<br/><br/>로마카톨릭은 구약성경을 그렇게 다룬 무리인데, 왜 신약 정경 목록을 정하는 일에 그들의 승인이 필요하단 말인가? 물론 자칭 “그리스도인”인 그 이교도들은 신약 27권에 대해서 올바르게 맞추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약 정경이 확정되어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진 지 200년이 지난 후에야 있었던 일이다.<br/><br/>진정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부활 이후로 무엇이 성경이고 무엇이 성경이 아닌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책임이 부여된 선택받은 “엘리트 서기관” 집단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레위인 제사장 직분은 갈보리에서 폐지되었으므로(히 4-10장), 신약 지역 교회에는 구약을 흉내 내는 로마카톨릭처럼 특정 소수가 “제사장”(사제)이 되는 일이 없다. 사도행전 4:36,37에서 “레위인”인 바나바는 제사장 지파임에도 다른 지파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지 않았던가? 지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이다(벧전 2:9). 루터의 종교 개혁은 바로 그 점을 토대로 했다.<br/><br/>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카톨릭교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들도 똑같다. 즉 고등교육을 받은 특별한 “엘리트 전문가” 계층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을 맡기셔서 진리를 가르치게 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경을 해석할 권위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불경건한 주장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을 해석하시는 분은 그 책의 저자이신 성령님이시며(창 41:15,16, 단 5:11-14, 눅 24장, 고전 2:10-13), 어떤 성경이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고(딤후 3:16) 어떤 “성경들”이 모조품인지(고후 2:17, 렘 23:36)를 가려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라고 어떤 학교나 컨퍼런스, 공회, 교단, “친교회,” 혹은 교회 소속의 어떤 단체도 부르신 적이 없다. 자신들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육신적이고 교만한 그 가짜들을 성경은 “니콜라파”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즉 네가 니콜라파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라. 나 역시 그것을 미워하노라』(계 2:6, cf. 2:15).<br/><br/>자, 이제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보도록 하자. 신약성경 27권 각 권의 내용은 A.D. 180년 이전에 기록된 구라틴어 역본(Old Latin)과 구시리아어 역본(Old Syriac)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누군가에 의해 인용된 자료가 없는 책은 “베드로후서”뿐이다. 이레내우스(A.D. 130-202)는 성경의 책들을 언급하면서 베드로후서를 빠뜨렸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연관된 교부들의 저작들에서 베드로후서는 신약의 “논쟁이 되는 책들”(반대경)에 속하게 되었다. A.D. 200년에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구라틴어 성경과 구시리아어 성경을 가지고서 제 맘대로 수정했는데, 그는 히브리어 구약성경도 수정했고(헥사플라), &lt;킹제임스성경&gt;의 “시리아-비잔틴 헬라어 원문”도 수정했다. 이 점은 그가 신약의 책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당시 그 책들이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br/><br/>로마의 클레멘트는 신약 정경을 확립했다고 하는 어떤 “카톨릭 공회”보다도 200년 이상 앞서서 글을 썼는데, 그는 신약 27권 중 “요한이서를 제외한 26권”을 받아들였다(A.D. 95). 예루살렘의 키릴(A.D. 315-386)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책들”을 인용했다. 그러나 키릴 이전에 살았던 파피아스(A.D. 130-140)는 “요한계시록”을 받아들였다. 이레내우스도 마찬가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 150-215)는 어떤 기독교 공회, 혹은 어떤 “카톨릭 공회”가 모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정경으로 인정한 27권을 승인하기 100년도 더 전에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을 인용했다.<br/><br/>정경에 속한 “의문스러운 책들”(반대경)에는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이 있으며, 때로 히브리서도 언급된다. 정경인 이 책들을 왜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의문시”했을까? 그 책들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거짓으로 고백하는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 “해방자”를 자처하는 거짓 성경 교사들을 책망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려 하는 “직업적인 종교인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바티칸 사본에서는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도 “희생제물”을 바친다고 하는 땅 위의 모든 사제들을 정죄한다(히 10:8-12). 그래서 이 책들이 “반대경”이 된 것이다!<br/><br/>“카톨릭교도들”은 그들 자신이 “카르타고 공회”(A.D. 387-397)를 통해 신약에 어떤 책이 속하고 또 속하지 않는지를 알아냈다고 주장한다(397년 당시,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결코 “카톨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가 신약 정경을 알게 된 것은 그들 카톨릭교도들의 권위 있는 칙령과 그 결과물 덕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그들의 리더십이 없이는, 우리가 성경에 대해 정말 쥐뿔도 몰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한 주장은 전형적인 로마카톨릭식 쓰레기이다. 신약 정경 전체가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로마카톨릭의 신약 정경 확정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br/><br/>예루살렘 멸망 당시 로마에 협력했던 유대인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읽어 본다면, 누구나 “일곱 산 위의 늙은 창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요세푸스는 현재 &lt;킹제임스성경&gt;에 있는 39권의 책을 공식적인 구약 정경으로 인정했다. 그는 사도들과 동시대인으로서, 이그나티우스가 “카톨릭”이라는 단어를 만들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사실 이그나티우스가 그 단어를 썼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카톨릭교도들은 고대 문서를 위조하고, 거기에 교부들의 이름을 서명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기 때문이다(&lt;신약 교회사&gt; 참고). 유대인들의 구약 정경은 &lt;킹제임스성경&gt;과 달리 말라키 대신 역대기하로 끝나는 배열 방식을 갖고 있지만, 정경 자체는 &lt;킹제임스성경&gt;의 구약 39권과 동일하다.<br/><br/>사실이 이러할진대 “피비린내 나는 늙은 창녀”(계 17장)는 자신을 성경의 “정경”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공식적이고 최종적인 권위자로 내세웠다. 그들의 “성경”은 구약이 46권이기에 총 7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을 거부하고, 성경을 부패시키며, 성경을 고치는 니콜라파인 주제에 정경을 결정한다니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란 말인가! A.D. 90년에서 390년까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성경 인용과 성경 읽기 속에서 정경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로마카톨릭은 이미 정해져 있는 정경에 300년이 지나서야 “동조”했을 뿐이다. 그들은 성령님께서 이미 권위를 부여하시고 증거하신 바로 그 27권의 책을 300년이 지나서야 인정한 것이다.<br/><br/>당신은 신약성경에서 단 60구절을 제외한 모든 구절들이 A.D. 250년 이전의 사도적 교부들과 니케아 이전 “교부들”의 저작들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A.D. 250년”이라면 훗날의 카톨릭교도들이 “카톨릭교도”라고 부른 이들이 카르타고 공회(A.D. 387-397)에 모이기 1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br/><br/>또한 A.D. 302년 이전에는 어떤 그리스도인 그룹에 의해 열린 공식적인 공회(역사가들이 뭐라고 부르든 간에) 같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로마 황제인 디오클레시안이 모든 성경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자, 생각해 보라. 무엇이 성경인지 정해져 있지도 않았다면, 어떻게 성경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br/><br/>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님께서 신약의 책들을 기록하셨고, 성령님께서 정경을 형성하셨으며, 성령님께서 자신의 정경의 내용들에 대해 증거하셨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교회사에서 단 한 번도, “엘리트 서기관들”로 이루어진 레위인 “제사장 계급”을 부르셔서 이런 문제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게 하신 적이 없다. 『진리의 영』(요 16:13)이신 성령님께서 A.D. 90년 이후로 진리에 충실한 모든 성경 필사본(혹은 번역본)에 대해 증거하셨던 것과 똑같이, 오늘날에는 &lt;킹제임스성경&gt; 본문에 대해 증거하신다. 소위 “인정받는 학자”나 자칭 “가르치는 교회”는 에이즈나 에볼라만큼이나 불필요한 존재이다. 그들은 성경을 두려워하면서도 성경을 거부하고 자신이 성경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br/><br/>타락한 배교자들이 A.D. 397년 카르타고에 모였을 때보다 훨씬 오래전에,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것과 똑같은 27권의 책을 읽고, 사용하고, 인용하고 있었다. A.D. 100-300년에 이 책들을 “의심한 자들”은, 오늘날의 NIV와 NASV와 NKJV 위원회의 성경 변개자들과 똑같이,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보다 우월한 선택받은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당시의 그 “지식인들”은 신약성경 27권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 27권에 허마의 목자, 바나바서신, 클레멘트 1,2서 등을 첨가한 작자들이었던 것이다.<br/><br/>오늘날의 “카톨릭 지식인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신약성경 27권을 지키는 체하지만, 수많은 구절들을 “정경”에서 삭제한다. (NIV, ASV, RSV, NRSV, NASV는 모두 바티칸에 있는 공식적인 예수회 림즈 헬라어 원문인 “바티칸 사본”에서 나왔다.) 가르침에 있어서 로마카톨릭을 “무오한” 교회로 여기는 것은, 자넷 리노, 빌 클린턴, 마돈나, 마이클 잭슨, 그리고 다이애나 비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경”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 그분은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이나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요, 또 너희에게 다가올 일들을 알려 주시리라』(요 16:1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3 Feb 2026 18:00: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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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젊은이들을 위한 나의 조언</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C%A0%8A%EC%9D%80%EC%9D%B4%EB%93%A4%EC%9D%84-%EC%9C%84%ED%95%9C-%EB%82%98%EC%9D%98-%EC%A1%B0%EC%96%B8/</link>
<description><![CDATA[성경은 젊은이들에게 “젊음의 정욕을 피하라”고 훈계한다(딤후 2:22).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경적 통찰(눅 11:13)을 고려할 때, 우리의 육신이 거의 모든 기회를 육체의 정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려 한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갈 5:19). 특히 오늘날의 젊은 그리스도인 남자들은 과거 그 어느 세대도 경험하지 못한 거센 유혹에 직면해 있다. 비록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는 유혹의 근본적인 세 가지 양상(눅 4:3-11, 창 3:6, 요일 2:16)은 변함이 없을지라도 말이다(고전 10:13).<br/><br/>그러나 휴거를 앞둔 이 마지막 날들에는 그 세 가지 유혹이 백 배나 더 강렬해졌다. “보기에도 즐거운”(창 3:6) “육신의 정욕”(벧후 2:14)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통해 천 배나 더 확대되었다. “몸의 빛은 눈”이기에(마 6:22), 오늘날 대다수의 젊은이는 사춘기와 청소년기에 본 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격과 미래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TV는 본질적으로 정욕을 자극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롬 7:7). 그 원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광고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반드시 인위적인 “필요”를 창출해야만 한다(딤전 6:10). 따라서 TV 시청은 육신이 하루 24시간 내내 무언가를 갈구하게 만들며,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자신이 소외되거나 불행하다고 느끼게끔 조종을 한다. 구원받은 청년도 그 점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다. 그 안에 내재된 인간 본성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아담의 옛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롬 6:6).<br/><br/>그리스도인 청년이 직면한 문제는 명확하다. 짧은 치마, 몸에 딱 붙는 바지, 가슴이 깊게 파인 상의가 도처에 널려 있으며, TV를 시청한다면 기독교 학교에 다닐지라도 이러한 노출을 피할 길이 없다. 정부와 언론 매체가 낙태, 음란물, 사생아, 성매매, 마약, 동성애, 그리고 온갖 범죄적 요소들을 방임하거나 장려하는 상황에서, 우리를 보호할 마지막 안전장치란 무엇인가? <br/><br/>음란한 복장과 외설적인 언어 외에도, 그리스도인 청년은 자기 집 거실이나 침실 안에서 벌거벗은 채 춤추는 밸리 댄서들을 접하며, 매일 혹은 매주 혼전 성관계나 합의된 간음 장면을 봐야 한다. 최근 연속극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 TV 속 성행위의 79%가 불륜이나 간음인 것으로 밝혀졌다. 연속극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오직 21%만이 법적 배우자와 잠자리를 가졌다. 기독교 학교에 다닌다 해도 TV가 주입하는 이러한 유형의 “교육”은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집 안에서 TV를 통해 무방비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br/>나는 이런 성질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겪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상담해 주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죄를 짓는 것을 멈춘 것은 아니다. 또한 죄짓기를 원하거나, 죄를 계획하거나, 죄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 계획들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열망을 멈춘 것도 아니다. 오늘날 젊은이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시대에는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어떤 급진적인 조치들이 반드시 취해져야만 할 정도이다.<br/><br/>30년 이상 미국 40개 주에서 4,0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사역하며 이 문제를 지켜보다 깨달은 점이 있다면 이것이다. 곧 이 시대의 젊은이가 다음의 기본 원칙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정결하게 빠져나올”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조언하는 조치를 숙고해 보라!<br/><br/>첫째, 가능한 한 옥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라. 대부분의 죄는 방이나 차 안에서 행해진다. 대부분의 죄악된 생각들은 실내에서 부화하고, 또한 실내에서 배양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숲, 산림, 언덕, 나무, 평원, 산, 그리고 호수는 내면의 더러움을 물리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해변이나 호숫가 휴양지가 때로는 반쯤 벗거나 8분의 1만 걸친 사람들을 위한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붐비는 장소들을 피한다면 죄를 피할 수 있다.<br/><br/>둘째, 성경을 암송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 이외에 죄를 이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받으시는 동안 사탄에게 세 번 대답하셨는데, 세 번 모두 구체적으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맞서 싸우셨다. 만약 당신에게 필요한 말씀의 장과 절을 알지 못한다면 유혹을 이겨 낼 가망 자체가 있겠는가?<br/><br/>셋째, 뉴스 매체와 보내는 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라. 내가 말하는 것은 잡지, 신문, 그리고 TV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계시를 대신하는 인간의 대용품들이다. (역자 주 : 오늘날 컴퓨터, 스마트패드, 휴대폰을 통해 접하는 소셜미디어, 숏츠, 게임, 유튜브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인간의 말이다. 뉴스 매체의 어휘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재미, 카톨릭, 통합, 빈민가, 관용, 교회 일치(에큐메니컬), 대주교, 총력, 역동적인, 의미 있는, 관계 맺다, 가치관, 수녀, 교황, 환상적인, 개입, 나눔, 공유, 추기경” 등이 그렇다. “이 세상의 신”(고후 4:4)인 사탄은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요일 4:5)을 위해 자기 자신만의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다.<br/><br/>넷째, 불같은 유혹이 올 때, 즉시 비상구(피할 길)를 찾으라(고전 10:13). 이러이러한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논쟁하며 빈둥거리지 말라. 할지 말지를 마음속에서 논쟁할 때 죄는 이미 시작된다. “죄를 짓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제시, 조명, 논쟁, 결정, 그리고 실행이다. 죄는 심지어 죄를 짓기로 결정하기도 전인 “논쟁” 단계에서 이미 들어온다.<br/><br/>다섯째, 로마서 6:11을 적용하는 법을 배우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산 자로 여기라.』 이것은 육신을 정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필요들”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그 어떤 것도 “욕망”할 수 없고, 어떤 “필요들”도 채울 수 없다(롬 6: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하신다. 핵심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야말로 “여기는” 것이다.<br/><br/>구원받기 전에는 불신의 괴롭힘으로, 순전히 “믿음으로”(요 5:24)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죄에 대한 승리를 주장하는 문제에 있어서 똑같은 믿음 없음 때문에 힘들어한다(롬 6: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position), 즉 우리가 살아 있는 영을 가짐과 동시에 죽은 몸을 가졌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롬 6:6).<br/><br/>나는 이러한 권면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고자 하며, 정결하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의 눈과 귀와 마음에 이르기를 바란다.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노력이다. 다시 말하건대, 가능한 한 “그림들”을 멀리하라(민 33:52). 몸의 빛은 눈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죄에 대해 생각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행할 수 없고, 생각할 재료가 되는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없다면 그 죄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어딘가에서 그것들을 보지 않았다면 그 이미지들을 마음속에서 그려낼 수 없다.<br/><br/>나는 미국 전역의 수많은 청소년 캠프에서 30년 이상 젊은이들에게 설교했으며, 네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공립학교 시스템에서 키웠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성경 구절을 단 하나만 고른다면, 결론은 잠언 23:17이다. 『네 마음으로 죄인들을 시기하지 말고 온종일 주의 두려움 가운데 있으라.』 이 구절은 특히 어린 나이에 구원받아 이른바 “진짜 죄를 맛보지” 않은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많은 경우, 이러한 젊은 남녀들은 자신들이 자라온 세상과 어울리지 않을 경우 무언가 대단한 것을 “놓쳤다”는 느낌을 떨쳐 내지 못한다. 그리고 이 마음 때문에 “십 대” 시절에 끔찍한 곤경에 처하곤 한다. 말하자면 세상적인 삶과 죄를 경험한 나이 든 사람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드라마틱한 간증을 할 때, 많은 젊은이는 속았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 “난봉꾼”이 결국 살아남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눈에는 일종의 증거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자신들도 똑같이 세상에서 죄를 탐닉하며 살더라도 결국에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br/><br/>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늦은 나이에 구원받은 사람이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에 구원받은 사람보다 나은 유일한 점은, 나이가 들어서 회심하면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았는지를 똑똑히 알기에 대개 구원을 더 감사히 여긴다는 것뿐이다(눅 7:47). 이것이 전부다. <br/><br/>죄는 그 어떤 사람도 처음 상태보다 더 낫게 만들지 않음을 명심하라(갈 6:7,8). 오히려 더 일찍 구원받을수록 다음과 같은 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첫째, 나중에 거두어들일 타락의 수확물이 더 적다. 둘째, 죄에 대한 이중 장치(양심과 성령)가 어릴 때부터 작동하여 타락을 최소화한다. 셋째, 좋은 습관과 인격을 개발할 시간이 더 많다. 넷째,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더 많다. 다섯째, 하늘에 보물을 쌓을 시간이 더 많다.<br/><br/>마귀는 그리스도인 젊은이에게 잠시 누리는 “죄의 낙”(히 11:25)을 놓치면 본질적인 무언가를 잃는다는 착각을 심어 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당신은 시궁창 같은 삶을 경험했던 이들이 고백하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당신은 놓친 것이 없다! 만일 무언가를 놓쳤다면, 그것은 비통함과 눈물, 외로움, 수많은 실책, 당혹감, 낭비된 시간과 돈, 망가진 건강, 정신적·내면적 오염일 뿐이다. 에롤 플린, 존 레논, 엘비스 프레슬리, 행크 윌리엄스와 같은 방탕한 죄인들을 결코 부러워하지 말라. 그들은 가장 불행하고 비참하며 끔찍한 실패자들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브룩 쉴즈 역시 성공한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이 그러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3:36, 엡 2:1-3). 『범죄자들의 길은 험난하니라』(잠 13:15). 그들이 옳은지 하나님이 옳으신지 확인하기 위해 당신의 인생을 실험대에 올릴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<br/><br/>모든 악한 일에서 빠져나올(전 7:18) 젊은 남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빌 2:12). 이들은, 겉으로 행복한 척하려고 애쓰지만 실제로는 비참함 속에 있는 불경건한 자들이 주변에서 무엇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결코 주눅 들지 않는 청년들이다. 『주의 면전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편에는 즐거움이 영원무궁토록 있나이다』(시 16:11). 죄인들의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이 놓치는 것은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들과 어울릴 때 모든 것을 놓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롬 12:1-3)은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 것(롬 12:2)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br/><br/>때를 기다리라. 하나님께서는 결코 서두르시는 법이 없다. “다시 할 시간이 있다면, 처음부터 올바르게 할 시간도 있는 법이다.” 죄인들이 당신을 놀리는 것을 개의치 말라. 그들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대마초 연기를 내뿜으며 술잔을 부딪칠 때, 그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실상을 읽어 내야 한다(잠 23:29-35). 그들은 일시적인 감정을 즐길 뿐이며, 그 감정은 죽음과 함께 썩어 버릴 육신에 매여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거나 우리를 본향으로 부르실 때까지 이 썩어질 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몸 안에서 살아야 한다면, 마땅히 깨끗하게 지키고 관리해야 하지 않겠는가?(고전 3:16,17)<br/><br/>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그들을 부러워하는 순간, 당신은 그들처럼 되기를 원하게 된다. 그들처럼 되기를 원한다면 결국 그들을 흉내 내게 되고,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친구는 멸망하리라』(잠 13:20).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으며, 삶에 대한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그들에게 해답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짓들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 마음으로 죄인들을 시기하지 말고 온종일 주의 두려움 가운데 있으라』(잠 23:17). 주님께서는 이 구절에 순종하기를 주저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바로 “다음 구절”을 말씀하셨다. 『이는 분명히 마지막이 있겠고 또 네 기대가 끊어지지 아니할 것임이라』(잠 23:18).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고 계신다(빌 4:19). 젊은이여, 하나님을 기다리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38:4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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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는 나의 목자시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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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미국인들은 양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당신이 양과 목자에 관해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면, 그것을 알기 위해 기독교 대학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양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라고 말했다.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 그 점이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다. 『그가 억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여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어린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또 털 깎는 자들 앞의 양이 말없듯이, 그가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사 53:7).<br/><br/>당신은 우리에게 익숙한 구약 성도들 대부분이 “목자”임을 알고 있는가? 아벨,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요셉, 그리고 다윗까지도 모두 목자였다. 이 모든 목자들의 원형이 되시는 분이 바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신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이 양의 목자께서는 도둑이나 강도처럼 다른 길로 양우리에 넘어 들어가지 않고 문으로 들어가신다(요 10:2). 그래서 『그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서 이끌어 내느니라. 그가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낸 후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 이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라』(요 10:3,4). <br/><br/>내가 양에 관하여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양이라는 짐승이 자기 덩치에 비해 가장 멍청한 포유류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양들은 멍청하다. 양들은 초장을 스스로 찾을 수 없기에 사람들이 목초지로 인도해 줘야 한다. 그만한 크기의 동물들은 대부분 그렇게 멍청하지 않은데, 일례로 말은 우유 배달 경로를 외울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그런 말들을 보면서 자랐다. 말이 끄는 마차가 우유병을 싣고 거리를 내려오면, 배달부가 주문한 사람의 집 앞에 멈춰서 병을 현관까지 가져다주곤 했다. 그러면 말은 다음 집으로 이동하는데, 만약 세 집을 건너뛰어야 한다면 어떤 집을 지나쳐야 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양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개와 고양이는 집에서 320km 떨어진 곳에 버려져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양은 헛간으로 돌아오는 길조차 찾지 못한다. <br/><br/>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 녀석들은 양 같구나!” 왜 그런가 하면 양은 잘 속기 때문이다. 이리가 무리 속에 들어와 서너 마리를 죽일 때까지도 양들은 울지 않는다. 진짜 멍청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양과 같다.”라고 하셨다. 이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성경 역본들을 쉽게 수용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올바른 믿음을 위해 비평하는 일을 싫어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시거니와, 요즘에는 거짓된 신앙과 거짓 교리가 해변의 모래알보다 많다. 내가 누군가의 거짓된 믿음을 비판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비난한다. <br/><br/><br/>주님께서는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가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낸 후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요 10:4). 양들에게는 소위 “군집 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양 한 마리가 무리에서 이탈하여 길을 잃으면 다치거나 병에 걸린다. 어떤 목자가 내게 말해 준 바에 따르면, 양은 야생동물에게 곧잘 놀라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며, 더 푸르게 보이는 울타리 건너편의 풀을 먹으러 가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얘기가 아닌가! 대개 그리스도인들도 울타리 건너편의 목초지에, 즉 다른 교회에 더 먹을 것이 있겠다 싶어 그쪽으로 가다가 길을 잃고, 다치고, 병드는 것이다. <br/><br/>양들은 또한 정말 잘 따라 하는 짐승이다. 목동들이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양떼가 들판을 가로지르다가 리더 격인 양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발뒤꿈치를 차면, 뒤따르던 모든 양들도 뛰어올라 발뒤꿈치를 찬다고 했다. 이런 양들을 도살장으로 데려가는 방법은, 바로 검은 염소 한 마리를 앞세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염소를 “유다”(Judas)라고 부르는데, 양들은 그 염소를 따라가다가 도살당할 곳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양들은 정말 잘 따라 하는 것이다. 텍사스의 한 목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본 짐승 중에서 유독 양만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장소를 찾느라 두리번거립니다.” <br/><br/>양은 또한 변변찮은 짐승이다. 목자들이 양에 대해 말해 준 또 다른 사실은, 양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없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더러워지면 연못으로 가서 몸을 적시거나, 울타리나 통나무에 몸을 비비고 긁지만, 양은 털 속에 더러움이 배어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목자가 양을 씻겨 주어야 한다. 알겠는가? 목자가 양을 씻겨 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도 내게 말하기를 “대부분의 양들이 더러워지고 털이 엉켜 붙은 상태에서 깨끗해지려면,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내려가서 씻긴 다음 다시 데리고 올라와야 해요!”라고 했다. 이 말은 솔로몬의 노래 6:6의 『씻는 곳에서 올라가는 양떼』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서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고 노래하는데,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짐승들에 관해 기록하실 때 그들의 모든 습성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우리가 저들을 씻겨 주지 않으면, 저들은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그러나 불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카톨릭과 같은 세상 종교들에서는 이런 진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더러운 걸레』(사 64:6)로 자신을 닦으려다 지옥에 갈 뿐이다.<br/><br/>목자는 초장에서 양을 먹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식사를 끝마쳤을 때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시니, 그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라고 하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고 하시니라』(요 21:15). 저 옛날 팔레스타인에서 양을 치던 이들은 양들이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막대기와 가시덤불로 울타리를 쳤다. 그 앞쪽에 작은 구멍을 남겨 두었는데, 그것이 “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 자신을 『양들의 문』(요 10:7)이자 『선한 목자』(요 10:11)라고 하셨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양들은 목자를 넘어가지 않고는 울타리에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목자는 밤에 문에서 잔다. 이리와 곰이 양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입구에 가로눕는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위해 죽을 만큼 양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윗이 곰과 사자를 물리친 것처럼 목자는 양을 보호한다. 우상 목자는 스카랴서에 언급되는데, 문자 그대로 우상을 숭배하는 목자이다. 삯꾼인 그는 선한 목자와 달리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양떼를 버려 둔다. 『삯꾼이 도망치는 것은 그가 삯꾼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느니라』(요 10:13). 『양떼를 버려 둔 우상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슼 11:17) <br/><br/>또한 목자는 양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목자는 양들과 함께 잔다. 양떼와 단둘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외로운 영웅이다. 목자는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것을 뻗어 양을 올바른 길로 끌어오고, 곤경에서 건져 내기도 한다. 목자의 지팡이는 양들이 줄지어 가게 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양들은 때때로 자신이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으스대는데, 그럴 때 목자는 지팡이로 양을 확 잡아당겨서 바로잡아 준다. <br/>어미 양이 무리를 따르지 않을 때는, 목자가 새끼 중 한 마리를 안고 가 버리는데, 그러면 대개 어미가 따라온다. 새끼 양을 데리고 가 버리는 것은 목자에게 나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에 재앙이 닥칠 때,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평생 건강하다가 갑자기 병이 든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화가 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양우리에 붙어 있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때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마귀가 당신을 잡아채 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당신을 목자 곁에 계속 머물게 하기 위해서다. <br/><br/>양들은 고백한다.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심이라』(시 23:4). 막대기는 때리는 데 쓰고, 지팡이는 끌어당겨서 대열을 맞추는 데 쓴다. 이와 같은 막대기와 지팡이가 양에게는 위로가 된다. 같은 시편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잔잔한 물이 깊게 흐른다.”라는 격언이 있다. 급류는 빠르지만 얕다. 『주께서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 앞에 식탁을 마련하시나이다』(시 23:5). 선한 목자는 세상이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곳에서 양들을 먹이신다. 나는 세상이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라고 하셨다. 나는 주님과 함께 먹을 것이다. 나는 내 초장에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나를 살리는 영양분을 얻는다. 세상은 나의 초장으로 뛰어 들어와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혹자는 “왜?”라고 물을 수 있다. 나는 양이고, 양은 그 입의 모양이 풀을 잘 뜯어먹을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양이 먹고 난 곳에서는 다른 가축이 뜯어먹을 풀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 서부 목동들은 양들이 지나간 곳에 소가 뜯어먹을 풀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소를 치는 사람들과 양을 치는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심하다고 말했다.<br/><br/>목자들은 항상 앞에서 양들을 이끈다. 서양인들은 때때로 양들을 뒤따라가지만, 아시아인 목자들은 양들을 이끈다. 그들은 양들을 절대로 뒤에서 몰지 않는다. 이것이 목사의 임무이다. 즉 양떼 앞에서 본을 보이며 앞서가는 것이다. 목자장이신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고 돌보되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준비된 마음으로 하』라고(벧전 5:2) 하셨다.<br/>시편 23:6은 『진실로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씀하는데, 레스터 롤로프는 “선하심”(Goodness)과 “자비하심”(Mercy)을 “주님의 개들”이라고 불렀다. 즉 주님의 개 두 마리가 양인 성도를 평생 동안 따라다닐 것이라고 했다. 목자는 앞에 있지만, 개들은 뒤에서 양들을 줄지어 가게 한다. 당신은 콜리종 개가 양떼를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정말 대단하다! 나는 두세 번 봤는데, 개들이 양떼를 몰아가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목양견은 어떤 양이 다른 양들을 방해하는지 잘 알고 있다. 개는 그 “문제아” 양을 찾기 위해 여덟 마리에서 열 마리의 등 위를 뛰어넘어 기어코 그 양을 잡아낸다. 그리고 한 마리가 도망치면 쫓아가서 무리 안으로 몰아넣는데,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다!<br/>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따른다(요 10:27). 생각해 보라. 오늘이면 좋겠지만, 언젠가 나는 내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없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게 될 것이고, 나는 주님의 목소리를 단박에 알게 될 것이다. <br/><br/>한번은 어떤 관광객이 팔레스타인에서 목자가 일하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목자는 양들을 부르고 싶을 때면 언덕에 올라가 “메나! 메나!”(Menah! Menah!)와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관광객은 목자에게 말했다. “내가 해 봐도 될까요?” 그러자 목자가 말했다. “아니오. 양들은 당신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관광객이 “뭐라고 해야 듣는지 알아요. 당신이 하는 걸 봤습니다.”라고 했고, 목자는 “그럼, 한번 해 보세요!”라고 했다. 양들은 저 멀리서 풀을 뜯고 있었고, 관광객은 언덕에 올라가 “메나!”라고 외쳤다. 양들은 고개를 들어 스윽 쳐다보고는 다시 풀을 뜯었다. 그렇게 세 번을 시도해도 안 되자 관광객이 목자에게 말했다. “어디 당신이 하는 걸 봅시다!” 그러자 양치기는 언덕에서 “메나!”라고 다시 외쳤고, 모든 양들이 일제히 일어나 곧장 그에게로 다가왔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br/>교황이 서서 “평화! 평화! 평화!”라고 아무리 말해 봐도, 주님의 양들은 그냥 한번 봤다가 계속 먹기만 한다. 양들은 진짜 목자의 목소리를 아는 것이다. 양들은 “저건 우상 목자야. 난 저자와 엮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알고 계시며, 언젠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실 것이다.<br/><br/>한 어미 양이 기형인 새끼 양을 낳고 죽었다. 같은 양무리에서 다른 양도 새끼를 낳았는데, 그 어린양이 죽고 말았다. 그때 목자들은 죽은 어린양의 가죽을 벗겨 기형인 어린양에게 입혀서 살아 있는 어미에게 주었다. 어미 양은 죽은 새끼의 가죽을 입은 기형의 어린양을 자기 새끼처럼 키웠고, 둘 사이의 차이점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쫓아내실 때 그들에게 입혀 주신 것은 짐승의 가죽이었다(창 3:21). 성경은 말씀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을 위해 계획하지 말라』(롬 13:14). 당신이 저 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당신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양가죽”이다. <br/><br/>주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또 구원하려는 것이라.』(눅 19:10)라고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내 양을 찾았노라!”라고 말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하리라』(눅 15:6). 한번은 어떤 연회에서 한 배우가 일어나 시편 23편을 낭송했다. 모두가 박수를 쳤고, 그는 자리에 앉았다. 그 뒤 늙은 감리교 설교자가 일어나 똑같이 시편 23편을 낭송했다. 늙은 설교자가 낭송을 마쳤을 때, 그 연회장에는 눈시울이 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그 배우에게 물었다. “저 설교자가 낭송했을 때는 모두 울었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하지 못했나요?” 배우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단지 그 시편을 알지만, 저분은 목자를 알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또 구원하려는 것이라』(눅 19:10). 당신은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주님께서도 당신을 아시는가? 당신은 지금 본향으로 가는 여행길에 있는가? 본향으로 가는 길에 있다면, 당신은 목자이신 주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 교회 시대에는 성도가 주님의 일부가 되고, 주님께서도 그 성도의 일부가 되시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임이라』(엡 5:30).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3 Dec 2025 10:23: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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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암송의 본질을 놓친 성경암송대회</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C%95%94%EC%86%A1%EC%9D%98-%EB%B3%B8%EC%A7%88%EC%9D%84-%EB%86%93%EC%B9%9C-%EC%84%B1%EA%B2%BD%EC%95%94%EC%86%A1%EB%8C%80%ED%9A%8C/</link>
<description><![CDATA[근 모 언론에서 “부산국제 성경암송대회” 소식을 전했다. 전국 111개 교회와 세계 9개국 참가자들이 “말씀으로 하나 된다”는 이 행사는, “온 세대가 함께하는 성경 암송 축제”라는 부제와 함께 소개되었다. 기사는 이 성경암송대회가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고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하는 희망의 장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었다. <br/>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행사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그들이 암송하는 ‘말씀’은 과연 어떠한 ‘말씀’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만약 그들이 손에 들고 외우는 성경이 하나님의 순수하고 오류 없이 보존된 “바른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변개시킨 부패한 성경이라면, 그 모든 행사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br/><br/>언론에서는 부산국제 성경암송대회를 “축제”와 “특별한 경험”이란 말로 묘사했지만, 그것은 성경 암송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경 암송은 그리스도인의 선택적 활동이나 경건을 위한 “훈련”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라고(신 6:6) 하셨으며,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간직하였으니 이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함이니이다.』(시 119:11)라고 고백했다.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 즉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시대의 풍조에 맞서서 성도 자신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의무인 것이다. <br/><br/>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두려워하여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약속하셨다. 『죄인이 일백 번 악을 행하고 그의 날들이 길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곧 그분 앞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잘될 것임을 내가 분명히 아노라』(전 8:12).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멀리하고 “바른 말씀”을 암송하는 의무를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복을 주실 것이다. <br/><br/>첫째, “바른 말씀”을 암송하면 풍성하고 열매 맺는 삶을 누리게 된다. 바른 말씀을 마음에 심은 사람은 그 말씀을 주야로 어느 때나 묵상할 수가 있기에 마치 『강가에 심겨진 나무』(시 1:3)처럼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도 마르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예레미야처럼 『주의 말씀이 내게는 내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나이다.』(렘 15:16)라고 고백하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<br/><br/>둘째, “바른 말씀”을 암송하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좋은 성공”을 이루게 된다. 여호수아 1:8은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의 길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고 네가 좋은 성공을 이루리라.』라고 약속하신다. 여기서 “성공”은 여호수아에게 있어서는 “정복 전쟁에서의 성공”을 뜻하는데, 이는 불타 버릴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성공”이다. 이와 같은 성공은 “바른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br/><br/>셋째, “바른 말씀”을 암송하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다. 죄와 싸우는 이 영적 전쟁은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정결케 하리이까?』라는 질문처럼 죄에서 정결케 된 길을 발판으로 삼을 때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는데, 성경은 그에 대한 답으로 『주의 말씀을 따라 조심할 것이니이다.』(시 119:9)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주의 말씀을 따라 조심하며 자기의 길을 정결케 하는 성도가 마귀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한 성도는 마귀가 죄로 유혹할 때 광야의 시험 때의 예수님처럼 『기록되었으되』(마 4:4)라고 말씀을 선포하며 자신이 암송한 말씀의 칼을 휘둘러 마귀를 물러가게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른 말씀”이라는 “살아 있고 능력이 있는 칼”(히 4:12)이 마음에 있어야만 이루는 승리이다. <br/><br/>말씀을 암송하면 위와 같이 “복 있는 사람”으로 살 수가 있다. 그러한 삶은 변개된 성경을 암송하는 “부산국제 성경암송대회” 같은 행사로는 결코 이루 지 못한다. “바른 말씀”이 부재한 암송대회는, 900명이 아니라 9만 명이 모여 외운다 한들 하나님 보시기에 공허한 울림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세상 연예인”을 “홍보대사”로 내세우며 “화려한 시상”을 약속했지만, 그와 같은 세속적인 요소들로는 “바른 말씀”이 부재한 데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결함을 치유할 수 없다.<br/><br/>그렇게 육신적인 쇼를 벌이는 교회들과 달리, 우리 성경침례교회는 여름수련회 때 “한글킹제임스성경 암송대회”를 개최한다. 목적은 세상의 이목을 끄는 “축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에 복종하고 그분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데 있다. 성경을 암송하려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순수하게 보존해 주신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외우도록 하라. “바른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열매 맺는 풍성한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성공을 이루고, 죄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마귀를 대상으로 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5 Nov 2025 01:19:5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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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절대적 권위를 지닌 &lt;킹제임스성경&gt;</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C%A0%88%EB%8C%80%EC%A0%81-%EA%B6%8C%EC%9C%84%EB%A5%BC-%EC%A7%80%EB%8B%8C/</link>
<description><![CDATA[권위를 인정받은 &lt;킹제임스성경&gt;은, 그것이 1611년판이든 어떤 판이든지 간에, 그 성경을 거부하고 다른 역본이나 번역본, 또는 헬라어나 히브리어 사본을 택한 학자가 사용하는 자료보다 우월하다. 이번 호에서는 그 점을 증명하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성경의 장과 절을 인용하며 성경의 계시에 관한 문서화된 증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이는 1611년판 &lt;킹제임스성경&gt;이 일곱 번이나 정화되고(시 12:6) 보존된 본문이라는 것을 성경을 믿는 성도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다. 말씀의 정화가 마지막으로 이뤄진 세대에서(시 12:7),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권위를 그분의 말씀에 두셨으며(전 8:4), 바로 이 말씀이 재림 때까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다.<br/><br/>1. “천사들”(ANGELS)에 관하여<br/><br/>성경에서 “천사들”은 “남자들”(MEN)로 나타나되(판 13:3,6,8-10,15, 히 13:2, 계 21:17), “젊은 남자”로 나타난다(막 16:5).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장가가지도 않고(마 22:30) 시집가지도 않는다. 이는 그들이 흔히 생각하듯 “무성”(sexless)이거나 동성 연애자여서가 아니라, “남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천사”(the angel of God)도 남성(MALE)이시다(갈 4:14, 행 27:23). 성경에 나오는 모든 천사는 날개가 없지만 “날 수가” 있다(계 14:6). 어떤 천사들은 택하심을 받았고(딤전 5:21), 어떤 천사들은 나중에 타락할 것이다(계 12:3-9). 이전에 타락한 천사들(벧후 2:4, 유 1:6)은 장차 타락할 천사들의 모형이다(눅 17:26, 마 24:38, 창 6:1-4). 주의 천사께서는 서른세 살 반의 남성으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후에 바울에게 하나님의 천사(행 27:23)로서 나타나셨듯이, 부활 때 다시 살아나는 성도들도 서른세 살 반의 천사들과 같을 것이다(마 22:30). <br/><br/>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남자든 여자든 자신 안에 “한 남자”(A MAN)가 있고(골 1:27, 요 1:12), 그 남자의 형상과 일치되도록 예정되어 있으므로(고후 4:4, 롬 8:29, 요일 3:1-4, 빌 3:21),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미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히브리어 및 헬라어 교수들과, “보수적”이라고 하나 성경을 거부하는 대다수의 돌대가리 학자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상관없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영광 중에 서른세 살 반의 죄 없는 남성, 곧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욥 38장, 요 1:12). 이것이 이브가 “성”(姓, last name)이 없었던 이유이며, 또한 오늘날 여자가 “성”이 없는 이유와 이브의 “뼈와 살”이 아담의 뼈와 살이라고 불린 이유를 설명해 준다(창 2:23).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하고 있을 하늘나라에서의 인식 문제는 고린도전서 13:12의 &lt;킹제임스성경&gt; 본문에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처럼 알게 되리라.』<br/><br/>당신은 이 방대한 성경적 진리에 대한 보수주의 학자들의 반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교육받은 멍청이들은 자신이 성경에서 깨달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이상한 교리”라고 말한다! 이 성경적 진리의 폭격을 마주했을 때, 현대의 배교한 근본주의자는 그 가르침이 이단이라고 가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너무 멍청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없었다. 둘째, 그를 가르친 사람들도 너무 멍청해서 그 진리를 찾을 수 없었다. 셋째,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 즉 그리스도의 몸이 자기만큼 멍청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기독교의 “보수적 학문” 이면에 놓여 있는 진실이다.<br/><br/>우리가 고어든 아니든 단 한 단어도 바꾸지 않고, 단 한 단어도 그 해석을 얻기 위해 어떤 헬라어나 히브리어 본문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내놓는 모든 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거대한 진짜 이단 집단인 알렉산드리아 이단의 눈에는 “이단 교리”일 뿐이다. 그러나 &lt;킹제임스성경&gt;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위에 제시된 성경 구절들에 근거하여, 그것도 단 하나의 주제에 관하여 서너 가지 성경적 진리들을 찾아냈다. 그 진리들은 ASV, RSV, NASV, NRSV, NIV, NEB, NWT, 리빙 바이블의 번역위원회에 속했던 그 어떤 위원이나 헬라어 혹은 히브리어 학자도 그가 받은 22년 동안의 정규 교육을 통해서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br/><br/>2. “마귀들”(DEMONS)에 관하여<br/><br/>사람들은 흔히 “데몬즈”(Demons)라고 부르지만, 이 단어는 “데블즈”(DEVILS, 마귀들)로 적절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딤전 4:1-4, 눅 11:15, 막 5:12). 지금까지 그렇게 잘못 부른 것은, 오직 하나의 “마귀”(DEVIL)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보수적인 멍청이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 점은 “한” 마귀(a devil)였던 유다(요 6:70,71)가 사탄인 “마귀”(THE Devil)가 아니었던 데서 알 수가 있다.<br/><br/>성경에는 “하나님”(GOD)께서 계시는가 하면, 복수의 “신들”(gods)이 있다(고후 4:4, 시 82편). 또한 사탄인 “마귀”(Devil)가 있고, 복수의 “마귀들”(devils)이 있다(막 5:12,15). 그뿐 아니라 한 분 “주”(Lord)가 계시고, 복수의 “주들”(lords)이 있으며(고전 8:5), 단수로서의 주의 “천사”(THE Angel)가 계시고, 복수의 주의 “천사들”(ANGELS)이 있다(창 32:1, 갈 4:14). 당신은 이 진리를 알고 있는가? <br/><br/>마귀들은 결합하여 “하나의 더러운 영”(AN UNCLEAN SPIRIT)을 구성한다(막 5:2). 마귀들은 여럿이 모인 영들(spirits)이지만(행 19:12, 막 5:13), 이 마귀들에게 사로잡혔을 때는 단순히 마귀 들렸다고 말한다(possession WITH THE DEVIL). 즉 “성경을 거부하는 대다수의 멍청이 학자들”이 가르치듯이 “데몬 들림”(demon possession)이 아닌 것이다. &lt;킹제임스성경&gt;의 본문이 오히려 “헬라어 원문”에 조명을 주는 현상을 주목하라. 성경에서 마귀들은 모기 크기(막 5:13)에서 까마귀 크기(막 16:9)까지 다양하며, 성경은 반복해서 마귀들을 “날개 달린 생물들”로 묘사한다(마 12:27; 13:32, 계 18:2, 전 10:20, 막 4:4).<br/><br/>헬라어 학자들은 위와 같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귀들은 “물”(막 5:13)과 “불”(마 17:15)을 좋아하며, 이 마귀들은 지옥에서 “새들”(BIRDS)로 나타난다(사 34:14,15). 이 새들은 레위기 11장의 “불결한 새들”로 예표되며, 이 “불결한 새들”은 다름 아닌 “더러운 영들”(SPIRITS)을 나타낸다(막 5:13). 또한 성경은 “성령님” 역시 “새”로 묘사한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시니,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고, 그가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그분 위에 임하심을 보더라』(마 3:16, cf. 창 8:11). <br/><br/>펜사콜라기독대학, 콜롬비아, 하일스-앤더슨, 하버드, 밥존스대학, 리버티침례대학, 예일, 테네시템플, 버클리, 휘튼, 튀빙겐, 무디, 풀러, 그리고 달라스 등의 신학교에서는 아직도 알지 못하는 영적 세계에 대한 성경적 진리들을, 1611년판 &lt;킹제임스성경&gt;이 그 방대한 구절들로 가르치고 있음을 주목하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다. 스스로 똑똑하다 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뤘다고 하는 보수주의 헬라어, 히브리어 학자들이 그처럼 명백한 진리도 찾아내지 못했다. 마귀론에 관한 책이 50종 이상이나 출간되었음에도 그들은 소위 “마귀들”의 정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br/><br/>3. 다니엘 7장의 세 짐승<br/><br/>우리는 다니엘 7장에서 영국의 예표로서 “페르시아”에 대한 향상된 계시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슨 “자필 원본”이나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 혹은 그와 유사한 것에서 찾아낸 것이 아니다.<br/>모든 학자들은 다니엘 7장의 처음 세 짐승을 다니엘 2:37-40의 처음 세 왕국과 동일시했다. 즉 “머리”와 “사자”는 바빌론을 나타내고, “팔과 가슴”은 “곰”과 함께 페르시아를, “배와 넓적다리”는 “표범”과 함께 그리스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ASV를 사용하고 추천했던 모든 보수주의 및 근본주의 학자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 체계를 따랐다. 인정받는 히브리어 학자들 중에서도 다른 입장을 취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원본”은 이 집단에 속한 그 어떤 영적 소경도 눈을 뜨게 해 주지 못했다. 구원받았든 잃어버린 자든, 보수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근본주의자든 신정통주의자든 말이다.<br/><br/>말하자면 권위를 인정받은 &lt;킹제임스성경&gt;의 본문을 최종적이고 무오한 권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모든 학자들은, 다니엘 7장의 짐승들에 대한 환상의 서문격인 “다니엘 7:1,2”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 구절들은 그 뒤로 묘사되는 네 개의 왕국(4-7절)이 “바빌론이 사라진 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 주었는데(단 7:17), 그 이유는 다니엘이 그 환상을 보았을 당시에는 벨사살이 왕이었기 때문이다(단 7:1, cf. 벨사살은 바빌론의 마지막 왕이었다, 단 5:30,31). 500명의 보수주의자들과 1,500명의 자유주의자들, 20명의 카톨릭교도들, 50명의 근본주의자들, 1,000명의 복음주의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유치원 수준의 평이한 진리를 간과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원본”이 무오하다고 믿는다고 공언하면서, 무오한 &lt;킹제임스성경&gt;의 영어 본문을 무시했던 것이다. <br/>이제 1611년판 &lt;킹제임스성경&gt; 본문이 (어떤 출판사에서 언제 출간된 판본이든 상관없이) 어떻게 모든 헬라어 학자들과 모든 히브리어 학자들과 모든 계열의 모든 사본들과 (살았든 죽었든, 그들의 신앙 고백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주석가들을 바로잡는지 주목하라.<br/>1) “사자”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팔”에 해당한다.<br/>2) “곰”은 팔이 아니라, “배와 넓적다리”에 해당한다.<br/>3) “표범”은 배와 넓적다리가 아니라, “철로 된 다리”에 해당한다. <br/><br/>즉 이것은 AV 본문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다(단 7:1과 7:17을 보라). 따라서 “사자”는 (바빌론이 아니라) “페르시아”이고, “곰”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그리스”이며, “표범”은 (그리스가 아니라) “로마”이다.<br/>자, 다니엘이 네 왕국을 나열하고 중단한 다음, 세 왕국을 나열하고 중단하고, 다시 두 왕국을 나열하고 중단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다니엘서 2:37-40을 보면 거기에 네 왕국이 나오고, 적그리스도의 열 개의 연합 왕국(단 2:41) 이전에 중단한다. 다니엘 7:4-6에서는 세 왕국이 나오고, 적그리스도의 열 개의 연합 왕국(단 7:7) 이전에 중단한다. 다니엘 8:20-22에서는 두 왕국이 나오고, 적그리스도의 열 개의 연합 왕국(단 8:23) 이전에 중단한다.<br/><br/>왜 사람들은 다니엘 7:4-6의 세 짐승을 다니엘서 2장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왕국들로 만들려고 하는가? 그 왕국들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니엘 8장에 나오는 왕국들은 이름이 명시되었다(단 8:20,21).<br/>더 나아가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회복시키는 왕국이다(대하 36장, 스 1장).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 이후로 두 번, 오직 두 번만 포로 생활을 한다(사 11:11을 보라). 그들의 첫 번째 회복(B.C. 538년)은 “페르시아 왕”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그들의 두 번째 회복(A.D. 1918년)은 “영국 왕”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다니엘 7:4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상징은 “날개 달린 사자”(FLYING LION)였다(『첫째는 사자 같고 독수리의 날개가 있는데』). 모든 학자들은 이것을 바빌론에 적용하도록 왜곡함으로써 그 구절의 열쇠를 던져 버렸다. 영국에서는 이 날개 달린 사자가 “그리핀”(GRIFFIN)이라고 불린다. “그리핀”은 언제나 영국의 문장(紋章)을 장식했다. 심지어 영국의 뛰어난 왕들 중 한 명은 “사자왕 리처드” (King Richard the Lionheart)라고 불렸다. <br/><br/>또한 &lt;킹제임스성경&gt; 번역자들이 구약성경의 책 순서를 히브리어 성경과 칠십인역의 배열을 무시하고 전천년주의적 순서로 설정했다는 점에 주목하라. 즉 「역대기하(“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라” : 1918년의 유대인 귀환과 대응) - 에스라와 느헤미야(“재건하라” : 1945년의 이스라엘 건국과 대응) - 에스더(“어린양의 혼인식과 이방인 왕비의 버림받음”) - 욥기(“에돔에서의 7년 대환란”)」에서 그 점을 읽을 수 있다.<br/><br/>욥이 땅 위에서 “박해받는 자”로서 “7일 낮과 7일 밤”을 보낸 일과, 42개월이라는 대환란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기간이 “욥기”(총 42장)에 나오는 것을 누가 놓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매튜스와 R.D. 윌슨, 바튼 페인 같은 자격을 갖춘 셈어 학자들은 놓쳤다. 또한 욥기 다음 책인 “시편”에서 재림과 다윗의 아들의 천년 통치(시 2:6-12)를 다루는 것을 볼 때,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한 페르시아 왕(대하 36:23)을 다루는 “역대기하”가 대환란 이전인 20세기에 일어날 사건(1918년의 유대인 귀환)을 묘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럼에도 밥존스대학이나 달라스신학원 교수진을 구성하는 멍청이들은 깨닫지 못했다.<br/><br/>다시 말해 페르시아는 1611년판 &lt;킹제임스성경&gt;에서 영국의 예표로 주어진 것이다. 페르시아가 영국의 예표라면, 세계 강대국으로서 그 뒤를 이은 것은 입에 갈빗대 세 개를 문 “곰”(단 7:5)이었다. 이것은 어떤 나라일까? 곰은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형상에서 “그리스”와 일치한다(단 2:39; 7:5). 세상에는 그 언어가 그리스 알파벳에서 유래했고, 종교가 1,000년 넘게 그리스 정교회인 나라가 있다. (오, 만약 내가 “축자적으로 영감받고, 오류 없고, 절대적인, 자필 원본”을 가지고 있다면 “진짜 진리의 풍요로움과 금덩어리”를 “캐낼” 수 있을 텐데! 이건 농담이다!) 그렇다. “곰”은 바로 “러시아”이다. “곰”이 “러시아”라면, 그를 뒤따르는 “표범”은 무엇인가? 그것은 백인처럼 하얀 배를 가졌고, 아시아인처럼 황갈색이며, 흑인처럼 온몸에 검은 반점들이 있다. “표범”은 쉽게 말해서 “인종의 도가니”이다. 이것은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그것은 느부캇넷살의 형상에서 철같이 강한 왕국인 “로마”와 일치한다(단 2:40). 러시아가 저물고 그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인종의 도가니”인 “미국”이다. 이 “미국”을 앞으로 “로마”가 운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잃어버린 원본”으로 알게 된 진리가 아니다. <br/><br/>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않으신다. 어떤 헬라어, 히브리어 학자도 우리가 이번 호에서 다룬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 1611년판 “권위 역본”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어 역본들과 모든 헬라어, 히브리어 사본들과 모든 헬라어, 히브리어 학자들, 그리고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근본주의, 보수주의 학교들의 모든 교수진과 직원들보다 더 무게 있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 <br/><br/>온 우주의 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책들과 인생의 제반 문제들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되는 책 한 권을 기록하셨다. 이것이 바로 “책들의 제왕”으로 불리는 “성경”이다. 성경은 절대 무오한 책이다. 따라서 어떤 책도 “제왕의 판단과 의견”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는 성경만이 최종권위이기 때문이다!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5 Nov 2025 00:51:2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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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혼을 살리는 캠퍼스 사역의 본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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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한국 사회의 탈종교화 현상이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한국리서치의 최신 조사에서 국민의 과반(51%)이 무종교인으로 밝혀졌으며, 특히 청년층의 70%가 무종교인이라는 통계는 종교가 미래 세대에게 매력을 잃고 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지표이다. <br/><br/>위와 같은 문제를 의식했는지 기독교계에서는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힘쓰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내의 모 기독교 대학에서는 교목과 교수와 학생이 합심하여 직접 전도에 나선 결과 작년에만 2,424명의 “결신자”와 325명의 “세례자”를 얻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들은 새로운 결신자들이 지역 교회에 효과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로드맵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br/><br/>그러나 수많은 “결신자”라는 숫자가 결코 진정한 “복음화”와 동일어가 될 수는 없다. 복음화의 핵심은 바른 말씀 위에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뜨거운 열정과 잘 짜인 프로그램이나 행사가 있다 해도,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내용과 양육의 방식이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다면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오늘날 캠퍼스 사역의 두 가지 흐름을 비교함으로써, 무엇이 진정으로 청년들의 혼을 살리는 캠퍼스 사역의 본질이 되는지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br/><br/>현대의 많은 기독교 단체에서는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전한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복음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그러한 복음은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공의”를 간과한 “반쪽짜리” 메시지가 될 뿐이다. 듣는 이의 거부감을 최소화하고 마음을 여는 데 초점을 맞춘 이러한 접근법은 복음을 심리적 위로나 긍정적 메시지로 축소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한다. <br/><br/>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갈보리”에서 발견된다. 그곳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원한 멸망의 형벌(살후 1:9)을 받게 된다. 죄에 대한 강력한 찔림도 없고, 죄인이 죽어서 가게 될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지도 않으며,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보혈의 효력도 가르치지 않는 복음은 올바른 복음이 될 수 없다.<br/><br/>성경침례교회의 사역 중 하나인 “대학교성경선교단”(University Bible Mission Army, 이하 UBMA)은 바른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먼저 “인간의 죄성”과 그로 인한 “지옥의 형벌”을 담대히 선포한다. 이 말씀이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죄인들의 양심을 찌를 때, 비로소 우리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유일한 소망으로서 다가가게 된다. 이러한 복음 제시는 당장에 많은 “결신자”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빙자한 막연한 권유가 아닌,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유일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 UBMA 복음 전파의 핵심이다. <br/><br/>또한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부분에서도 차이가 난다. 많은 교회들과 선교 단체들이 “결신” 이후 “세례”를 통해 신앙 고백을 공식화하는데, 앞서 언급한 기독교대학에서도 많은 결신자들을 세례식으로 인도했다며 자랑했다. 하지만 그들이 행하는 “세례”(sprinkling)라는 의식은 성경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없는, 곧 로마카톨릭이 대중을 카톨릭화하는 과정에서 편의상 도입한 인간의 전통이다. <br/><br/>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공개적인 간증 방식은 물에 잠기는 “침례”(baptism)다.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자기 믿음을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의식으로, 물에 잠기는 것은 죄에 대해 죽은 옛 사람을 장사 지내는 것을,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음을 상징한다(롬 6:4).<br/><br/>사도행전 8장의 에디오피아 내시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행 8:37)라고 먼저 믿음의 고백을 했고 그 뒤 침례를 받았다. 개역한글판성경은 그 분명한 신앙 고백을 삭제하여, 침례를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을 알 수 없게 했다. 인간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UBMA는 구원받은 이들이 침례에 순종하기를 목매어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복음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하고,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진리의 지식을 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받을 것을 조언한다. 꼭 우리 교회에 오라고 하거나, 와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종교 의식이 아닌 살아 있는 말씀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br/><br/>(거듭난 청년을 지역 교회에 정착시키는 “후속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영적 성장의 핵심은 청년이 “어디에 속하느냐”보다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순수한 젖”을 찾듯이(벧전 2:2),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변개되지 않은 참되고 순수한 말씀을 먹고 성장해야 한다(딤후 3:16). 구원은 영적 생활의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하기에 반드시 바른 말씀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br/><br/>청년을 지역 교회에 정착시키는 “후속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영적 성장의 핵심은 “어디에 속하느냐”보다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순수한 젖”을 찾듯(벧전 2:2),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변개되지 않은 “순수한 말씀”을 먹고 성장해야 한다(딤후 3:16).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역할을 구원에만 한정시키지만 구원은 영적 생활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이제 막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순수하고(잠 30:5), 참되며(시 119:160),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하는(딤후 3:17) 바른 말씀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바르게 보존된 성경으로 양육받을 때 생각이 변화되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면서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롬 12:1,2). 하지만 영적 성장에 중요한 말씀이 변개되었다면 바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마치 영양 불균형이 신체의 발달 부진을 유발하듯이, 변질된 말씀은 영의 발달 부진을 가져올 뿐이다. <br/><br/>그러나 UBMA의 모든 사역은 올바로 보존된 진리의 말씀, 곧 &lt;한글킹제임스성경&gt; 위에 서 있다. 특히 복음 전파를 진행한 후 갖는 “2부 모임”은 그리스도인이 성경대로 성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모임에서 우리는 믿음의 용사들의 삶을 배우고, 구령할 때 자주 듣는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준비하며, 영어 구령과 거리설교 점검 등 실제적인 선교를 준비한다. 그 모든 활동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부족함 없는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손에 들린 순수한 말씀 덕분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를 매 순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이끈다. <br/><br/>『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청년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것은 인간의 열심이나 세련된 프로그램이 아니다. 오직 바른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가 자유를 준다. 왜 이 땅의 청년들이 믿음도 없이 방황하고 있을까?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 주는 기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br/><br/>우리는 캠퍼스 사역을 통해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에 헌신하도록 도와야 한다. 갓 구원받은 혼들에게 바른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시대를 이끌어 갈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세움받게 해야 한다. UBMA는 바로 이 사명을 위해 세워진 대학생 선교 단체이다. 캠퍼스 사역을 하려면 UBMA처럼 하면 된다. 바른 말씀으로 바른 복음을 전파하고, 그 복음을 믿고 거듭난 청년들이 젊음과 열정을 다해 주님을 섬기게 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3 Oct 2025 16:12: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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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킹제임스성경의 절대적 완전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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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필자는 &lt;킹제임스성경&gt;과 관련된 일련의 글들을 씀에 있어서 “성경”(Holy Bible)이라는 용어를 1949년 3월 14일, 곧 내 혼이 구원받은 날 이래로 써 왔던 방식대로 사용하고 있다. 내가 쓴 글들에서 “성경”은 알려지지 않고, 볼 수도 없고, 현재 읽히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못하고, 선포할 수도 없으며, 손에 넣을 수도 없는 “영감받은 원본”이나 다른 어떤 정신 나간 것을 결코 지칭하지 않는다. 또 밥존스대학, 테네시 템플, 린치버그, 산타 로사, 덴버, 달라스, 펜사콜라 기독대학 등의 교수진이 믿는다고 고백하며 퍼뜨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성경”이라는 용어를 실제로 누구나 값싸게 살 수 있고,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실제로 존재하는 책, 곧 &lt;킹제임스성경&gt;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왜냐하면 &lt;킹제임스성경&gt;의 단어들은 평균적으로 다섯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br/><br/>우리는 1611년이나 1613년, 1620년, 1670년, 1680년, 1700년, 1710년, 1730년, 1750년, 1760년, 1770년, 1800년, 1815년, 1840년 등에 출간된 권위역본의 본문이, (국내에서나 해외에서) 출판되거나 누군가에 의해 개정되고 편집된 모든 히브리어 및 헬라어 인쇄본보다 우수하다는 점을 문서화된 증거를 통해, 또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들을 참조하여 보여 주기를 계속했다. 어떤 판의 권위역본(Au- thorized Version)이든지 그것은 다른 역본의 무슨 판이나 누군가에 의해 인쇄된 히브리어 원문이나 헬라어 원문보다 정확하다. (물론 앞서 언급된 학교들의 교수진은 필자의 이와 같은 진술을 글의 문맥은 무시하고 제멋대로 발췌하여, 이미 문서화된 사례들이나 그 뒤로 나올 글들의 증거는 제시하지 않은 채 “럭크만의 괴상한 가르침”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 교수진은 직업적인 거짓말쟁이들로서, 모두 다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글을 쓴다.)<br/><br/>이번 호에서는 &lt;킹제임스성경&gt;의 절대적 완벽함과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다룰 것인데, 그것은 (네슬, 홀트, 알란드, 메츠거, 사우터, 밀, 월튼, 펠, 숄츠, 그리스바흐, 에라스무스, 엘지버, 베자, 티쉔돌프, 스테파누스 등의) 모든 헬라어 원문들이 성령님께서 보존하신, 권위를 인정받은 영어 본문에 대항하여 합의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사례이다. 이 경우, 교수들과 신학생들이 사용하는 원어 사전들과, (힌드슨, 달러, 헨더슨, 돕슨, 헛슨 등의 NKJV를 포함한) 모든 영어 역본의 모든 판들이 학자들, 교수진, 번역가들과 합세하여 권위 있는 &lt;킹제임스성경&gt;의 본문을 바로잡아 준다고 주장된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을 본보기로 따라야 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미신에 빠진 바보들이나 그들을 본보기로 따르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br/><br/>이번에 다룰 사례는 “갈라디아서 2:20”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여기서 그들은 &lt;킹제임스성경&gt;의 본문인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I AM CRUCIFIED WITH CHRIST)가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었다”(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NKJV, NASV, NRSV, 그리고 토마스넬슨앤선즈가 출간한 모든 변개된 역본들에서 그러한 변개를 발견할 수 있는데, &lt;킹제임스성경&gt;의 갈라디아서 본문은 그 권위역본의 모든 판들(어디서 누가 출간했든지 간에)에서 찾을 수 있다.<br/><br/>갈라디아서 본문에서 십자가 처형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쉬네스타우로마이”(sunestau;rwmai)이며,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원문과 카이사랴 원문, 시리아 원문, 서방 원문 모두에 들어 있다. 당연히 이 단어는 “쉬네스타우로오”(sunestauro;w), 즉 “함께”를 뜻하는 “쉰”(su;n)과, “십자가에 못박다”는 뜻의 “스타우로오”(stauro;w)에서 왔으며, 1인칭 단수, 완료, 직설법 수동태이다. 겉보기에는 헬라어 문법에 따라 “나는 십자가에 못박혔었다”(I HAVE BEEN CRUCIFIED)가 올바른 번역이다. 그렇다면 1611년의 그 훌륭한 번역자들은 도대체 왜 그것을 현재 시제로, 즉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I AM CRUCIFIED)로 번역한 것일까?<br/><br/>&lt;킹제임스성경&gt;을 수정하고 비난하는 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1611년판 &lt;킹제임스성경&gt;의 학식 있는 번역자들이 과거, 현재, 미래, 완료, 대과거 시제의 차이를 구분할 정도의 분별력도 없었다고 믿어야 할 판이다. 당신이 그들이 하는 말을 믿을 만큼 어리석다면, 더 나아가 ASV, NASV, RSV, NRSV, NKJV, NIV, NEB의 번역자들, 즉 권위역본을 수정하며 “이것이 틀렸네, 저것이 틀렸네” 하는 자들이 “헬라어 문법에 나오는 대로 헬라어 동사의 시제를 일관성 있게 번역했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거나 타락했다면, 당신 또한 그들과 한패이며, 그 “거짓 선지자들”이 받을 심판을 함께 받아도 쌀 것이다(겔 14:1-10). <br/><br/>이제 성령님께서 모든 헬라어 문법과 그 문법학자들을 바로잡으시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br/><br/>첫째, 성령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신다.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cf. 고전 12:13).<br/><br/>둘째,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던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했다(요일 5:13).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0-12).<br/><br/>셋째, 이 영원한 생명은 창세기 1:1 이전에 있었으며(요 1:1,2, 요일 5:20), 믿는 이가 구원받을 때 이 생명의 흐름 안으로 들어간다(엡 2:1-5, 골 3:1-3). <br/><br/>넷째,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뿐만 아니라(롬 6장)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에도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our old man IS CRUCIFIED with him]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롬 6:6).<br/><br/>성경은 믿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 사건에 동참함을 과거의 일로 보지 않고, “현재”의 일로 보고 있다. 만약 그것이 과거의 일이라면, “옛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지만, 성경은 “옛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적어도 골로새서 3:5-9, 갈라디아서 5:19-21, 그리고 로마서 7:18,23의 말씀을 믿는다면 그렇다.<br/><br/>비평가들과 현대 역본들의 번역가들과 개정자들은 자기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진리들을 놓치고 &lt;킹제임스성경&gt;의 본문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주장하는 과거의 “완료된 경험”이 현재에는 아무런 적용점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상생활에서 죄에 대해 승리하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현재 동참하고 있다고 여김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롬 6:11). 또한 바울은 자기가 과거에 죽었다고 하지 않고, “매일 죽는다”고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지니고 있는 너희의 자랑으로써 단언하노니 나는 매일 죽노라[I DIE DAILY]』(고전 15:31). <br/><br/>대학 교육을 받은 근본주의 멍청이들만이 “헬라어 원문”이 말하는 것을 믿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음의 세 가지 진리에 해당된다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br/><br/>첫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옛 사람은 죽어 묻혔고, 그것으로 그는 끝이 났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원히 끝내 버리셨다(롬 6:6, 엡 5:14). <br/><br/>둘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장)은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져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cf. 엡 2:5).<br/><br/>셋째, 그러나 우리의 물리적인 생명, 즉 “육신 안에서”(고후 10:3) 우리는 매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서서히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전 2:2, 갈 4:14).<br/><br/>독자가 알아야 할 것은, 위의 설명이 A.D. 30년부터 휴거 때까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를 위한 건전한 교리요 근본적인 신약 진리라는 사실이다.<br/><br/>그런데 어찌해서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자필 원본”에 대해 입만 나불대며 시간을 허비하는 소위 “선하고, 경건하고,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학자라는 자들이, 구원 이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위(Position)를 다루는 신약의 세 가지 기본 진리도 파악하지 못했는가? 신경성 긴장 두통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청소년기의 갈등”을 다시 겪고 있기 때문인가? “형제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인가? 정말로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는 것인가?<br/><br/>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주님께 조금이라도 헌신하고, 주님께 유용하게 쓰임받아 그분께 기쁨이 되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삶에서 “현재의 실체”가 되어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것이지, 못박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되는 의견들, 즉 모든 근본주의 학교들의 교수진과 현대 영어 역본들의 개정자들, 번역자들, 편집자들, 출판사들의 의견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성경에서 그렇다고 선포한다면, 불신으로 가득 찬 자들은 그들의 입을 닫아야 한다.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3 Oct 2025 15:44:1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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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들</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D%95%98%EB%82%98%EB%8B%98%EA%BB%98%EC%84%9C-%EC%A3%BC%EC%8B%A0-%EC%86%8C%EC%A4%91%ED%95%9C-%EA%B2%83%EB%93%A4/</link>
<description><![CDATA[『나의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그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이자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산과 같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설교의 일부이다.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들, 주님과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말씀들이었기에 더욱 중요하다. <br/>세상이 세상을 추종하는 자들의 죽음에 대해 그토록 야단법석을 떨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얼마나 무거운 침묵을 지키는지 당신은 알고 있는가? 맥아더 장군이 은퇴했을 때, 그는 영웅처럼 환영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 그럴 자격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쫓겨나듯 은퇴한 것이 사실 그렇게 큰일은 아니었다. 또한 존 F. 케네디가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을 때, 세상은 그 일에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처럼 큰 소동을 벌였다. 그런가 하면 세상은 케네디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같은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하루 동안 학교를 쉬게 하기도 한다.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지 않은가?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산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바로 이 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남기신 것들은 곧 당신을 위해 남기신 것이기 때문이다.<br/><br/>첫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화평”을 남기셨다.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남겨 두나니 나의 화평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당신은 이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화평, 곧 만족을 주는 화평을 주신다. 이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이고, 공허하며, 이기적이다. 말하자면 세상은 평화 회담, 정상 회담 같은 것들에 대해 떠들어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들을 것이라.』(마 24:6)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화평의 왕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세상에는 그 어떤 화평도 없을 것이다. 참된 화평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세상의 평화는 전쟁과 전쟁 사이에 일어나는 불규칙한 경련에 불과하다. 세상의 화평은 선하지 않고 일시적이며 거짓이다. 때로 전투와 전투 사이에 소강상태가 있을 때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폭풍 전의 고요”일 뿐이다. <br/><br/>옛날에 한 나이 많은 성도가 참수형을 당하기 위해 처형대에 올라섰다. 그가 단두대에 눕기 전에 사형 집행인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그는 “내 심장에 손을 얹어 보시오.”라고 말했다. 사형 집행인이 그의 심장에 손을 얹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내 심장이 당신의 심장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뛴다면, 당신은 내 믿음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소.” 사형 집행인이 자기 심장에 손을 대 보니, 그 늙은 성도의 심장은 집행인 자신의 것보다 더 천천히 고요하게 뛰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면의 화평이다. 즉 완전한 화평인 것이다! <br/><br/>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위의 배에 계셨을 때, 바람은 울부짖고 파도는 노호하며 일렁였다. 그 무시무시한 폭풍 속에서 제자들이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를 도우소서! 주여, 우리가 죽게 생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고는 “잠잠하라.”(Peace)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폭풍이 멈추고 파도가 잠자는 아기처럼 고요해졌다. 주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분이 평정[peace]을 주시는데 누가 감히 분란을 일으키겠느뇨?』(욥 34:29) 누가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자, 세상은 주었다가 다시 뺏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평안을 주시면 아무도 소동을 일으킬 수 없다. 언젠가 위의 마가복음 4장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은 나는, 그때부터 내 배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배 안에 주님을 모시지 않는다면, 배가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br/><br/>둘째,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완전한 화평을 주실 수 있음은 물론, “절대무오한 선생님”도 주실 수 있다. 『그러나 위로자이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치시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들을 기억나게 하시리라』(요 14:26). 요즘 사람들은 권위자와 지도자를 찾고 있다. 그러나 대학 졸업생들은 말한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고백이 아닌가! <br/><br/>나에게는 “얘들아, 앞으로 이렇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시면 그렇게 되는 “선생님”이 계시다. 예를 들어 한번은 나의 선생님께서 “전쟁과 전쟁의 소문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6).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내게 “음, 당신은 당신만 옳고 다른 모든 사람은 틀렸다고 생각하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렇다. 내가 옳고 당신들 모두가 틀렸다. 왜냐하면 내게는 “오류 없는 선생님”이 계시고, 내 스승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6:11).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는 빈곤을 끝낼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오, 천만에!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내게 “당신이 의회나 국제연합 앞에 선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할 겁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럴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br/><br/>그런데 왜 당신은 “절대무오한 선생님”을 원하지 않는가? 왜 당신은 그 위에 설 수 있는 반석, 곧 항상 의지할 수 있는 분을 원하지 않는가? 사람은 항상, 매번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의지할 수 있는 분이 계신다는 것은 복이 아닌가? 당신은 “절대무오한 선생님”을 모실 수 있다!<br/><br/>이 세상의 가르침은 주관적이고 일시적이다. 진화론에 관한 책을 읽어 보면 정말로 웃긴다. 그 책을 쓴 자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그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 그 길도 너희가 아노라.』(요 14:2-4)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그곳에 어떻게 가는지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길도 너희가 아노라.』(요 14: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 길을 모르면 갈 수가 없다. 당신에게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있어야 한다.<br/><br/>오래전 미국에 “밥 잉거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잉거솔은 자기 형제가 죽자 그의 묘지에 가서 이렇게 썼다. “인생은 두 영원이라는 춥고 황량한 봉우리 사이의 좁은 골짜기. 우리는 그 너머를 보려고 헛되이 애쓰고 있다. 소리 높여 울부짖어도 유일하게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 자신의 통곡의 메아리뿐.” 나에겐 잉거솔이 갖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 나는 인생을 두 영원이라는 춥고 황량한 봉우리 사이의 좁은 골짜기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본향, 곧 하늘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이다. <br/><br/>나는 인생에서 무엇보다 “절대무오한 선생님”을 갖고 싶었다. 평생 동안 많은 교육을 받았지만, 세상 교육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복 가운데 하나는, 내가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닻을 내린 후 무엇이 옳은지 항상 정확히 알려 주는, 단 하나의 오류도 없는 “성경”을 발견한 것이었다. <br/>『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 그분은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이나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요, 또 너희에게 다가올 일들을 알려 주시리라』(요 16:13). 내게는 “절대무오한 선생님”과 “절대무오한 책”이 있으며, 그 책을 따르기만 하면 틀리지 않는다. 내게는 올바른 성경이 있고, 이 책에 올바른 명령들이 있다. 우리 모두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오신 성령님께서는 위대한 선생님이시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아는가? 그분은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을 보내신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고난처럼 잘 가르쳐 주는 스승이 없기 때문이다.<br/><br/>어떤 설교자들의 설교는 10분만 들어도 잠이 오는데, 왜 그럴까? 그들은 어떤 고난도 겪어 보지 않은 것이다. 고난은 한 사람을 다른 종류의 설교자로 만든다. 또한 고난은 한 사람을 다른 종류의 음악가로 만든다. 음악가라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거나 바이올린을 켬으로써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겠지만, 그것이 듣는 이의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음악가를 데려다가 약간의 마음고생과 비탄, 약간의 질병, 약간의 슬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통과하게 해 보라. 그러면 그것이 음악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 이 점은 화가와 의사 같은 이들에게도 똑같이 작용한다. 이처럼 고난은 훌륭한 스승이지만, 나에게는 모든 스승 중에 가장 위대한 스승이 계신다. 나에게 그분은 바로 “위로자 성령님”이시다.<br/><br/>마지막으로 성령님께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약속해 주셨다. 『또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겠고, 그분께서 또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 진리의 영인 그를 세상은 영접할 수 없으니 이는 세상이 그를 보지도 못하며 또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이는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임이라』(요 14:16,17). 이것은 밑줄을 그어야 할 만큼 중요한 말씀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께서 오시면 당신 안에 거하시되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라고 약속하셨다. 이 세상이 주는 보장은 한시적이고 때론 거짓말이지만, 주님께서 “성령님이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참된 약속을 주셨다(요 10:27-29).<br/><br/>성령님께서는 “위로자”(the Comforter)라고 불리신다. 독자들 중 많은 이가 집에 폭신하고 따뜻한 겨울용 “솜이불”(comforters)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도시와 마을에서 집회를 갖곤 했는데, 그 지방은 겨울에 정말 추웠다. 나를 초청한 교회에서는 집회 기간 동안 밤에 잠을 잘 침실을 내주곤 했는데, 설교가 끝나고 그 방에 들어가면 무척 추웠다. 벽난로 같은 것이 없어서 금세 온몸이 새파랗게 변할 듯했다. “아이고, 어떻게 이런 곳에서 잘 수 있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방 한쪽 구석에 있던 침대는 올라가 누우면 1피트(30cm) 정도 내려앉았다. 그 침대에는 거위나 오리 털로 만든 것 같은 이불이 있었는데, 그 이불을 덮으면 5,6분 만에 따뜻해져서 마치 섭씨 24도의 방에서 자는 것처럼 따습고 포근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도 그와 같으시다. 성경은 성령님께서 오셔서 당신에게 위로가 되시고 세상을 안전하게 통과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은 너무나 불안하지만, 성령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러한 보장을 주실 수 있다.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낮에 해가 너를 치지 못할 것이며 밤에 달도 치지 못하리로다. 주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너를 보호하시리니 그가 너의 혼을 보호하시리라. 주께서 너의 나가고 들어옴을 지금부터 영원무궁토록 지키시리로다』(시 121:6-8). 확신컨대 주님께서는 심지어 지옥이 펼쳐지고, 그 어떤 역경이 닥쳐온다 해도 당신을 본향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가실 것이다.<br/><br/>만일 독자들 중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오늘 당신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세 가지를 제안한다. 세상은 그것들을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고, 줄 수도 없으며, 앞으로도 주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것을 거절한다면 매우 어리석은 결정이 될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화평,” “절대무오한 선생님”이신 성령님, 당신의 모든 죄를 영원히 대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이 세 가지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할 때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실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디서도 얻을 수가 없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4 Sep 2025 11:35:2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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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걱정”하는 그리스도인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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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분께서 너희를 더욱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고 말하며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마 6:30-32). 이 말씀은 산상설교로서, 교리적으로는 왕국 헌법을 다루며, 다가올 천년왕국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법령들이다. 교회 시대 동안에는 왕국을 위한 이러한 규칙들이 연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왕국을 위한 것이므로 구원에 관한 내용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교리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내용들이 있지만, 위의 마태복음 본문은 성경의 다른 모든 구절들처럼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말하자면 산상설교에서도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교훈들이 있는 것이다.<br/><br/>예수님께서는 유대인 민족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언급하고 계신다. 하지만 당신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빌 4:6,19).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34에서 하신 말씀도 누구나 적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여기서의 요점은, 오늘은 오늘만으로도 충분한 문제들이 있으므로 내일의 문제까지 다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 남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결코 걱정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의 요지는, 당신이 그것을 고칠 수 있다면 그냥 고치고 걱정을 멈추라는 것이다. 또한 고칠 수 없다면 걱정을 멈추라는 것이다. 어차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br/>걱정은 흔들의자와 같다. 아무리 많이 움직여도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그저 앞뒤로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걱정,” 곧 “worry”라는 단어는 &lt;킹제임스성경&gt;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재미”(fun)와 “나누다”(share)라는 단어도 없다.<br/><br/>사람들은 결코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수도 없이 걱정한다. 생각해 보라. 때로 끔찍한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적이 있지 않은가? 나도 수십 번 그런 적이 있다. 존 웨슬리는 거룩한 삶을 살았다. 웨슬리는 걱정하는 것을 술 취하는 것만큼이나 악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걱정은 죄이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에 대해 걱정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여러분이 걱정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걱정들을 다루려고 한다. <br/><br/>첫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구원 여부”에 대해 걱정한다.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 자신의 구원을 의심했던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은 사람들이었다. 마귀가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짓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토론토로, 브라운스빌로, 또 다른 곳으로 이리저리 가서 구원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구원받기를 반복한다. 그런 집회에 가서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고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br/><br/>자, 나는 구원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마귀와 논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귀가 내게 “너는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면 나는 말한다. “좋아, 그럼 그냥 내가 잘 지내게 내버려둬!” 당신은 내가 왜 구원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지 아는가? 왜냐하면 나는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했기 때문이며, 그것이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고칠 수 없다면,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나의 구원은 확정되어 있다. 즉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변화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내가 이 일을 되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도록 예정된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즉 나는 결국 주님과 똑같이 될 운명이라는 뜻이다(빌 3:21). 내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지옥에 가지도 않을 텐데 왜 걱정하겠는가? <br/><br/>여러 해 동안 교제한 좋은 목사 친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20년 동안 자신의 구원을 의심했다. 부흥사가 마을에 올 때마다 그녀는 기도의 제단으로 내려가 다시 “구원”을 받곤 했다. 한번은 집회가 끝날 무렵 그 목사가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있었는데, 그녀가 차에 타고는 내게 자신의 구원에 대해 물었다. 약 30분 동안 얘기해 줘도 아무런 진전이 없자 나는 말했다. “죽어서 지옥에 가고 싶지 않으시죠?” “네.” “그럼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무엇을 믿고 계신가요?” “음, 저는 그 답을 알아요.” “답을 말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자매님이 무엇을 신뢰하고 있는지 말해주세요!” “음, 뭐라고 말해야 정답인지 알아요!”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마세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은 거 맞죠?” “네.” “그럼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무엇을 의지하고 있나요? 무언가를 의지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네, 예수 그리스도의 피요!” 이에 내가 “아!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뭔데요?” “자매님은 구원받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늘나라에 가야만 해요!”<br/><br/>내가 한 가지 말해 주겠다. 만약 당신이 구원에 대해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잘 들으라. 당신은 자신의 혼의 운명을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에 걸어야 한다. 자신의 혼을 “성경”에 맡겨야 하고, 그 복음의 말씀들을 믿어야 한다.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신은 믿지 않더라도, “성경”의 말씀들은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또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시랴? 또한 이르신 것을 이루지 않으시랴?』(민 23:19).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대답해 보라. 당신은 주의 이름을 불렀는가? 주님께 당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는가? 그렇게 했다면, 나는 당신의 구원에 대해 단 5분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br/><br/>둘째,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와 친척들의 구원에 대해 걱정한다. 이것은 구원의 확실한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게 되었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모른다.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걱정은 남편이나 아내, 아들이나 딸, 누이나 형제, 또는 가까운 친구 중 누군가의 구원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결코 거듭나지 않았고, 구원받지 않은 이교도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죽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고 공언했던 전체 기간 동안 단 한 혼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5년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중요 인물들을 만나 악수했지만, 그들이 구원받았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아는가? 교황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마호메트와 똑같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lt;타임&gt;지를 집어 들어 보았더니, 거기에 그에 대해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얼마나 신성 모독적이고 천치 같은 말인가! 당신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 준 분이 정말 누구인가? 그걸 진짜 모른단 말인가? 나는 독자들 중 그 누구도 교황처럼 살거나 교황처럼 죽지 않기를 매일 기도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죽을 때가 되었는데, 성경 구절 하나 인용하지 못하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로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렇게 죽지 말라! 대신 이렇게 죽으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 4:7,8).<br/><br/>셋째, 성도들은 각종 청구서를 지불하는 것에 대해 걱정한다. 사실 이것은 모두가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양심적인 법이며,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청구서를 지불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욕할 일은 거의 없다. 당신이 인색하거나 게으르지 않다면, 결국에는 청구서들을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다만 주님께 드리거나 성도들에게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또 물건을 잔뜩 외상으로 사고는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기대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고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대한다. 이것저것 외상으로 사고 나서, 하나님께 그 빚을 갚아 달라고 요청한다. 비자카드와 마스터카드, 뱅크오브아메리카카드를 발급받아, 새 스테레오, 새 차, 새 TV, 새 옷을 사고, 호화로운 집을 산다. 그 모든 것을 가진 후에는, 자신이 일으킨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원한다. 당신은 이런 문제들을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도록 걱정하다가 위궤양에 걸릴지도 모른다.<br/><br/>넷째,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걱정한다. 때로 비난받을 만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 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비난하는데 그것이 진실이라면, 당신이 이제부터 똑바로 살면 된다. 만약 그들이 당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냥 잊어버리라.<br/>사람들은 나 “럭크만”에 대해서도 별별 비난을 다한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그런 것이 끝도 없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 왜냐고? 관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하길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면, 내가 왜 다른 누군가가 하는 말에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워싱턴에 있었던 내 목사 친구 캔 블루가 나를 초청해서 집회를 가졌을 때,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세 명의 목사들이 달려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럭크만을 초청했다고요? 럭크만이 &lt;주의 칼&gt;과 존 R. 라이스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몰라요? 럭크만을 데려오면 당신의 교회가 망할 거라고요!” 이미 십수 년이 지난 일이다. 그런데 내가 그 집회에 갔을 때 그 교회가 묻을 닫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성인 5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다음에 뭐라고 했냐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br/><br/>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사역의 결과가 부족하다고 걱정한다. 만일 당신이 설교하도록 부름받았다면, 아마 이런 걱정을 할 것이다.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지 못하면 사역자인 당신은 신경이 쓰일 것이다. 이에 당신은 “그럼 어떻게 하죠?”라고 물을 것이다.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그러면 약간이라도 열매를 얻을 것이다. 개인 구령을 하고도 열매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결단을 촉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 것은, 나는 결코 당신에게 죄인이 죄의 깨달음도 없는데 결단을 촉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 구령을 할 때는 천천히, 신중하게 복음 전파를 이어가라. 그리고 죄의 깨달음이 확실히 있다면, 그때 밀어붙이라. 그러면 열매를 얻을 수 있다.<br/><br/>당신은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인원만 15,000명이 되었던 잭 하일스 목사의 사역을 듣고서 낙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계산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아는가? 그는 인구 500만 명의 도시에서 목회하며, 75마일을 누비는 버스들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8,000명이 사는 소도시에서 당신의 교회 주일학교에 20명이 참석한다면 오히려 당신이 잭 하일스보다 더 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열매가 없는 것 같아서 불평하곤 하는데, 그래도 한 해에 다섯 번 정도는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삼 년 전에” 혹은 “십 년 전에” 내 사역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들 중 일부는 초청 시간에 앞으로 나오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로 구원을 받았다. 계속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전파하되, 그 결과를 걱정하지는 말라.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열매들 중 많은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마침내 거두게 될 것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내 말도 그러하나니 그것은 내게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보내어 이루려 하는 일에서 번성할 것이니라』(사 55:11).<br/><br/>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을 걱정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신경 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꺼이 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마음을 품는 당신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내일을 위한 최고의 준비는 오늘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당신이 오늘 해야 할 일을 한다면, 내일은 내일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될 것이다. 기꺼이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 당신은 말한다. “무엇을 기꺼이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그것을 기꺼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하나님께 물어 보라. 그것을 보여 주시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행하려 하고, 또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당신에게서 마음의 부담도 사라지게 하실 것이다. <br/><br/>1700년대 초, 모라비안 교도들은 독일에서 그들의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헤른후트”라 불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마을이 있었다. 그들의 문장(紋章)은 “제단 앞에 서 있는 황소”였다. 그런데 그 황소 앞에는 황소에 매어 있지 않은 쟁기도 있었다. 그 문장 아래에 “어느 쪽이든 준비되어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써 있었다고 한다. 주님의 종으로서, 나는 황소와 같다(고전 9:9). 나는 제단 위에서 제물로 불탈 준비도, 하나님께서 내게 매실 쟁기를 끌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사용하실 준비가 되어 있거나, 혹은 나를 데려가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 쓰임받거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데려가시는 일,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항복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미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br/><br/>그런데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부르심이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이 확인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거부한 적이 있다면,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한 번 이상 당신에게 상기시키셨는데도 완고함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응하고 있다면, 바로 지금 그 일을 바로잡으라. 『먼저 할 마음만 있다면 사람이 가진 대로 받으실 것이며 없는 것을 받지는 아니하시리라』(고후 8:12). 당신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Aug 2025 16:59:1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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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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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사도 바울은 『이방인들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을 전파』(엡 3:8)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고,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빌 4:19)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족 문제, 돈 문제, 자녀 문제, 사회 문제, 건강 문제를 겪다 보면 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잊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전체에 걸쳐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에 관해 이야기한다.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 풍요함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br/><br/>그리스도인이 가진 헤아릴 수 없는 풍요함 중 첫 번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엡 1:15). 당신은 이것이 그 자체로 대단한 것임을을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당신은 올바른 분께 믿음을 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또 매번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사람에게 신뢰를 두기보다 주를 신뢰하는 것이 나으며』(시 118:8).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을 받는 것이고, 불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5:4,5은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외에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하는데, 나는 이 구절에 대해 궁금해 하곤 했다. 내게도 응답받지 못한 기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분석해 보니, 성경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것저것을 하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한다. 즉 주님께서 특정 시간에 특정 일을 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 그 자체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 곧 승리이다.<br/><br/>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을 때, 주님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눅 24:17-21). 당신은 해당 본문 21절에서 『우리는... 믿고 있었나이다.』라고 과거 시제로 말한 것을 보았는가? 오히려 “우리는... 믿나이다.”라고 했다면 얼마나 멋진 고백이 되었을까?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과거형이 되어 버렸다. 즉 믿음을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다. 찬송가 중에 “신뢰하고 순종하라. 예수 안에서 행복해지는 다른 길은 없나니, 오직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뿐이라.”라는 소절이 있는데, 주님을 향한 “믿음,” 곧 “신뢰”는 그것이 현재 시제일 때 의미가 있다.<br/><br/>거듭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한다는 것인데(엡 1:15), 이 또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 중 하나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한 설교자에게 말했다. “어째서 그 낡은 &lt;킹제임스성경&gt;을 고집하는 겁니까? 고어 때문에 이해할 수가 없잖아요. 왜 현대어로 된 성서들 중 하나를 고르지 않는 겁니까?” 그러자 설교자가 말했다. “나는 &lt;킹제임스성경&gt;이 좋습니다. 그 언어가 참 아름다워요.” 이에 그 남자는 “그렇다고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시잖아요?”라고 했고, 설교자는 다음과 같이 되받아쳤다. “이봐요. 나는 40년 전에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아직도 내 아내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더 알기 쉽거나 더 못생긴 여자와 아내를 바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이 말에는 많은 진리가 있다!<br/><br/>구원받은 후 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과 바꿀 생각은 없다. 이미 나는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과 27년을 보냈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하든 못하든 그 죄인들과 바꿀 생각은 없다. 그것이 성경대로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식 중 하나이다. 즉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으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성경은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사항이 “사랑”이라고 말씀한다(갈 5:22). 오늘날 세상은 사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사랑 노래들과 책들도 있고, 어딜 가나 사랑 타령뿐이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을 알아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책인 “성경”을 사랑하고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br/><br/>성도들은 때로 사랑하기가 어렵다! 심술궂은 이들도 있고, 나름대로 문제들이 있다. 즉 여전히 육신 안에 있는 것이다. 수년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아내도 이따금씩 관계가 순탄치 않은 날들이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하면서도 힘든 날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에 대한 너희의 사랑』(골 1:4)을 이야기했다. 침례교인이든, 감리교이든, 감독교인이든 누가 되었든지 일단 구원받았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고 당신은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그 헤아릴 수 없는 “풍요함” 중 하나인 이유는 그 일을 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실로 행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때로는 거의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졌기 때문이라』(롬 5:5). 이것이야말로 풍요함이다! 이것은 아무데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br/><br/>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허락하시고 그분을 계시해 주신 것이 풍요함이다(엡 1:17, 마 11:27).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즉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계시하시면(고전 15:3,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이 풍요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런 계시를 어디서 살 수 있겠는가?<br/><br/>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우리 교회에는 여덟아홉 살 먹은 아이들이 있는데, 웨스트플로리다 대학교에 있는 일부 교수들 옆에 세워 두면 그 아이들이 오히려 지식인이다. 오늘날 소위 “지식인”이란 자들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되기 위해 돈을 내고 대학에 다녔는가? 우리 교회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를 믿었는지를 분명하게 안다!(딤후 1:12) 또한 주님의 몸과 똑같은 몸이 될 것을 알고 있고(요일 3:2), 자기가 영생을 소유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요일 5:13)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에게 계시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풍요함이다! <br/><br/>한번은 어느 그리스도인 어머니가 십대 아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아들 방에 들어가서 보니 벽 전체에 플레이보이 사진이 잔뜩 붙어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녀는 열두 살의 예수님이 성전에서 박사들과 이야기하는 그림을 가져와서는 다른 사진들을 떼지 않고 예수님 그림을 정중앙에 붙이고 문을 닫고 나온 것이다! 다음 날 집안을 청소하던 중 문을 열어 보니 플레이보이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아들의 친구 중 하나가 아들에게 물었다. “왜 벽에서 사진들을 떼어 버렸냐?” 그러자 아들은 대답했다. “응, 서로 너무 다른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못 견디겠더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시면, 다른 건 모두 그냥 내려와야지!” 얼마나 맞는 말인가!<br/><br/>언젠가 펜실베이니아에서 어떤 남자가 일요일 오후에 광산 옆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는 한 무리의 노새들을 보고서 근처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저 노새들은 뭐죠?” 그 남자가 말했다. “광산에서 일하는 노새들입니다.” “그런데 들판에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네, 주일에는 노새들을 데려와 빛 가운데서 걷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광산에만 있게 하면 눈이 멀어 버리죠. 그래서 주일에는 거기서 데리고 나와 빛을 쬐게 해 준답니다.” 참으로 곱씹어 볼 말이다! 주님의 빛을 통해 눈을 뜨게 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소경이 아니다. 당신은 세상의 수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보고자 해도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것이다. <br/><br/>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것은 또 다른 풍요함이다(엡 1:18, 골 1:27, 딛 2:13). 나는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알고 있다. 즉 예수님의 형상과 일치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롬 8:29,30), 이것이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엡 1:18)이요 『복된 소망』(딛 2:13)이다! 하늘의 휘장 안에 내려진 혼의 닻처럼, 확실하고 견고한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히 6:19). 그 어떤 것으로도 이 확실한 소망과 바꿀 수 없고, 그 무엇도 이 견고한 소망을 좌절케 할 수 없다! 지상에선 천 번을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내가 구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죄 없는 몸을 갖는 것과, 하나님과 하늘나라에서 영원을 함께 보내기를 바라고 있으며, 결국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소망이 무엇인지 안다. “나의 소망은 오직 예수의 피와 그분의 의 위에 세워져 있다!”<br/><br/>당신은 미국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이 정부에 대해 소망을 품고 있다면, 그는 각성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복된 소망이 없다면, 도대체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 무엇인가? <br/>우리는 『성도들 안에 있는 그의 유업의 영광』(엡 1:18)을 소유했다. 당신은 “유업”이 무엇인지 아는가? 『우리가 참으면 우리도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요』(딤후 2:12).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에 대해 말씀한다. 당신은 그 나라를 상속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오라, 나의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그 왕국을 이어받으라』(마 25:34).<br/><br/>한번은 세금 징수원이 시골에 왔는데, 꽤 여러 해 동안 기록이 누락된 매우 초라한 집을 발견했다. 그는 현관에 있는 노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견적을 내고 무엇에 세금을 매길 수 있는지 보려고 이곳에 들렀습니다.” “들러 줘서 기쁘구려. 나는 아주 부유한 여자라오.” “그럼 세금을 좀 내셔야겠군요.” “아니, 내겐 세금을 매길 수 없을 거요.” “아뇨, 정부는 아주머니에게 세금을 매길 수 있습니다.” “아니, 못 매겨요!” “부자시라면, 매길 수 있어요.” “그럼요, 나는 부자죠!” “그럼, 신고하세요. 무엇을 가졌습니까?” “음, 하늘나라에 집이 있어요.” “그건 세금을 매길 수 없어요. 또 뭐가 있습니까?” “마음과 생각에 평강을 가졌다오.” “그것도 세금을 매길 수 없습니다.” “죄들의 용서함도 받았어요. 또 매일의 양식을 공급받고, 이 성경 안에 있는 모든 약속들을 가졌소!” “그것도 세금을 매길 수 없어요.” 그러자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거보시오! 내가 부자라고 했지 않소!” 세금 징수원은 “네, 부자이신 것 같군요.”라고 말하고는 떠나 버렸다.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부자인 것이다!<br/><br/>당신이 소유한 헤아릴 수 없는 풍요함은 “주님의 강력한 능력”이다!(엡 1:19-21) 이 능력이 당신 안에 있다. 구원받았다면, 즉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셨을 때 로켓 과학자들도 알지 못하는 능력을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로켓이 발사대에서 솟아오르면, “와, 저 힘 좀 봐! 인간이 정말 대단하지 않아?”라고 감탄한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성령님께서는 구원받은 당신의 몸 안에 계시고, 당신은 곧 발사되어 우주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발사대도, 카운트다운도 필요 없다! 어쩌면 카운트다운을 할 수도 있는데, 저 위 하늘나라의 모든 이들이 할지도 모른다. 미카엘, 가브리엘, 모세, 사보나롤라, 토레이, 무디, 피니, 선데이, 밥 존스 시니어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 그러면 당신은 발사되듯 솟구쳐서 올라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능력의 지극히 위대하심』(엡 1:19)이다!<br/><br/>여기에 헤아릴 수 없는 풍요함이 또 있다. 『값 주고 사신 그 소유를 구속하기까지』(엡 1:14). 다시 말해 우리의 몸은 이미 값 주고 산 바 되었다. 값을 치른 것이다. 우리의 몸은 특이하고, 웃기고, 비뚤어지고, 이상하게 생겼을지 모른다. 만일 구원받지 못했다면 비웃지 말라. 우리는 적어도 값이 치러졌기 때문에 언젠가 새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 파나마시티에 사는 조지라는 친구는 등과 목이 부러졌다. 그래서 팔은 물론, 손조차도 움직일 수 없다. 지금까지 18년 동안을 그런 상태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 그도 새 몸을 얻게 될 것이다! <br/><br/>『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아프리카에서 한 선교사가 원주민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가 한 남자에게 말했다. “저는 ‘구속’이라는 단어를 번역하려고 수년간 애써 왔습니다. 당신의 언어에서 ‘구속’을 뜻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 원주민이 말했다. “제게 먼저 구속을 설명해 주세요.” 선교사가 설명하자, 그 아프리카인이 한 단어를 언급했다. 그러자 선교사는 “이 단어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고,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이 단어는 ‘그가 네 목을 멍에에서 빼내 주었다.’라는 뜻입니다.” 그 원주민은 수년 전 아랍 노예상들이 마을을 지나가며 원주민들을 잡아다가 판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목에 멍에를 씌워 데려갔는데, 그들이 지나갈 때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을 구하고 싶다면, 멍에에 메인 그를 대신하겠다고 제안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 단어를 아는 것은 우리 부족의 족장이 내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구속받다”라는 말의 뜻이다.<br/>주님께서는 나를 값을 치르고 사셨다. 나는 목에 멍에를 멘 채 끌려가고 있었는데, 내 옆에 오신 주님께서 나를 빼내시더니 나를 대신해서 멍에를 메셨다. 나는 구속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풍요함이다!<br/><br/>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힘들 수 있다. 몸의 구원은 지금 온전히 얻은 것이 아니고, 그 몸은 죽는 날까지 당신을 괴롭힌다. 그렇지만 당신은 풍요함을 가졌다. 뉴욕시의 어느 택시 기사가 야간 근무 중에 한 남자 손님을 태웠는데 요금이 3달러 80센트가 나왔다. 그런데 손님은 동전 한 푼 없었다. 기사는 회사에 전화를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고, 이런 답변을 들었다. “담보물을 받아요. 시계나 반지, 뭐 그런 거요.” 약 5분 후, 기사가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이 담보물로 뭘 어떻게 하죠?” “그냥 밤새도록 운전하다가 아침에 회사에 가지고 들어와요.” 그러자 기사가 욕을 하며 이야기했다. “그럼 나더러 이 살아 있는 오리를 태우고서 밤새도록 운전하라는 거요?” 말하자면 오리가 담보물이었던 것이다!<br/><br/>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아침이 되어야 집에 간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제가 이 살아 있는 죄인(육신)을 좌석에 태우고 밤새도록 운전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아침에는 반드시 이 몸을 넘겨드릴 것이다. 왜냐하면 값을 치르시고 사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받지 않았다면, 당신은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을 누릴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그 모든 풍요함이 당신을 위한 것이 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8 Jul 2025 14:28:0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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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인간의 네 가지 “교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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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교만은 멸망에 앞서 있으며 거만한 영은 몰락에 앞서 있느니라. 낮추는 자와 함께 겸손한 영을 갖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8,19). 이번 호에서 우리는 교만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나에게는 “가장 위대한 미덕”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는데, 가장 위대한 미덕은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만과 명백히 반대되는 것이다. 『사람의 교만은 그를 낮아지게 할 것이나, 명예는 영 안에서 겸손한 자를 세워 주느니라』(잠 29:23).<br/><br/>당신은 교만의 창시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교만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저질러진 “원죄”라 할 수 있다. 우주에 죄를 가져온 마귀는 『모든 교만의 자식들을 다스리는 왕』(욥 41:34)으로 묘사된다. 그렇다. 죄는 “내가 할 것이다... 내가 할 것이다... 내가 할 것이다”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기 전부터 마귀는 있었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가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사 14:13,14). 루시퍼가 한 말에서 “내가 할 것이다”가 보이는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당신은 마귀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br/><br/>내가 아는 5본성에는 네 종류의 교만이 있다. “얼굴”에 대한 교만, “인종”에 대한 교만, “지위”에 대한 교만, “은혜”에 대한 교만이 그것이다! 이러한 교만 중에서 “은혜”에 대한 교만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장 큰 죄인데, 우리는 이 네 종류의 교만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br/><br/>첫째, “얼굴”에 대한 교만이다. 영화배우들은 얼굴이 아름답고 잘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가 될 수 있다. 헤디 라마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할리우드 스타 중의 여왕이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자매들 대부분은 영화배우나 전문 모델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여러분 대부분은 꽤 평범하게 생겼을 것이다! 독자들 중 남자들 역시 그 어떤 여자에게도 에롤 플린이나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지 않으니, 걱정 붙들어 매라!<br/><br/>한 남자가 말했다. “내 아내는 모델감으로 완벽해! 기차 만드는 우락부락한 노동자 모델로 제격이야!” <br/>한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왜 나한테 키스할 때 항상 눈을 감아?” 그가 말했다. “거울을 보면 알게 될 거야.” <br/>한 여자가 말했다. “내 남자 친구는 얼굴이 진짜 성인(Saint) 같아요! 세인트(Saint) 버나드(개의 일종) 같은 얼굴이죠!” <br/>어떤 남자가 말했다. “내 아내는 ‘미국’ 하면 생각나는 용모를 가졌어요. 네, 맞아요. 미국의 버팔로처럼 생겼어요!”<br/><br/>『그러나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처럼 그의 아름다움으로 그토록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머리 끝까지 흠이 없더라』(삼하 14:25). 『인자야, 투로 왕에게 애가를 지어 그에게 말하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완전한 규모를 확정하는 자라. 지혜가 충만하고 아름다움이 완벽하도다』(겔 28:12). 이것이 바로 “얼굴”에 대한 교만이다. 이제, 당신의 얼굴이 잘생기고 아름답다고 스스로 매료되어 교만해지지 말라. 만일 얼굴을 잃는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만일 불 속에 떨어지거나 코와 턱이 부서지고 두 눈이 뽑힌다면 어찌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남자나 여자도 낮추실 수 있다.<br/><br/>반대로 만일 못생겼다면, 그 점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나에게는 다양한 친구들이 있는데, 솔직히 말해 못생긴 시골 농장 아주머니들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을 사랑하며, 스타들보다 자신을 훨씬 더 많이 아껴 주는 자녀와 손자손녀를 데리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 대는 “스타들”은 약을 먹고 자살한다. 잘 생기고 아름답다고 하는 그들은 정작 사진을 찍히고 나서는 계속 술에 취해 산다. 당신의 외모에 감사하라. 반반한 얼굴을 가졌다고 자랑하지 말라. 겸손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넘어질 것이다! <br/><br/>둘째, “인종”에 대한 교만이다. 한번은 어떤 독일인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만일 독일인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어 가던 독일 SS친위대원 중 하나가 수혈이 필요했을 때 미군 위생병들이 유대인의 피를 수혈해 주겠다고 하자 그 SS대원은 “아니요,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라고 말하고는 죽었다. 그는 유대인의 피를 몸에 넣느니 차라리 죽기를 택했다. 이것이 바로 “인종”에 대한 교만이다. <br/><br/>요한복음 4장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는 교제가 없기 때문이더라』(요 4:9). 당신은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누구인지 아는가?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들에게도 따로 차리고, 요셉과 함께 먹는 이집트인들에게도 따로 차렸으니, 이는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과는 함께 음식을 먹지 않으려 함이니 그것이 이집트인들에게 가증함이기 때문이라』(창 43:32). 요셉은 이집트인들을 한 식탁에, 유대인들을 다른 식탁에 앉혀야만 했다. 그것이 “인종”에 대한 교만이다.<br/><br/>사람들은 “인종”에 대해 온갖 농담을 한다. 그런데 당신이 교만해서 자신에게 홀딱 빠져 있다면 그런 농담에 화를 낼 것이다. 왜 다른 사람들은 웃는데 당신은 웃지 못하는가? 자신의 인종을 자랑하지 말라. 당신은 다른 곳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다. 당신 자신의 인종에 대해 감사는 해도 그것을 자랑하지는 말라. <br/><br/>셋째, “지위”에 대한 교만이다. 누가 최고의 지위를 누렸는가? 보좌를 덮고 있던 그룹이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타락하기 전에 있었던 위치였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웠더니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네가 불의 돌들 가운데를 위아래로 걸었도다』(겔 28:14). 천사장 미카엘을 제외하면 루시퍼가 가장 높은 위치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는 아래로 내려가서는 구렁의 사면에까지 끌어내려지게 되었다!(사 14:15) 빌라도 또한 총독이었다. 그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잃어버린 상태로 생을 마감했다. 유다 이스카리옷도 생각해 보라.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선택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유다도 새 예루살렘의 문들 중 하나에 자기 이름을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해져서 자신에게만 빠져들었다. 돈 때문에 자신의 선생님이자 주이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다.<br/><br/>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알류샨 열도에서는 그다지 많은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군인들 대부분은 그저 얼어붙은 상태로 있었고, 그들이 어떤 상태였는지 하나님만이 아신다. 나는 그들이 거기서 돌아온 후 201보병연대에 합류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상륙할 때 한 소령이 자살한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때 그 소령은 모든 대원들이 싫어했는데, 마침내 한 하사가 폭발하여 동료와 함께 소령을 자기 옆으로 불러 말했다. “소령 양반, 우리가 상륙정에서 내리면, 난 당신 뒤에 있을 것이고, 당신은 해변에 닿기도 전에 등에 총알 한 발을 맞게 될 거야!” 하사의 이와 같은 말은 말뿐인 협박이었을 수도 있는데, 소령은 상륙하기 위해 파도를 좀 헤치고 나가는가 싶더니 입에 권총을 넣고서 발사했다. 그의 계급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br/><br/>역대 가장 위대한 풋볼 감독 중 한 명인 우디 헤이즈라는 자가 있다. 나는 우연히 오하이오와 클렘슨이 맞붙은 경기를 보았는데, 한 선수가 공을 잡고 달려와서는 오하이오 측 벤치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우디 헤이즈가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그 선수를 치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는 교만해져서 자신이 위대한 미식축구 감독이니까 주먹으로 선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br/><br/>내게는 뉴욕에서 목회하던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어느 날 그가 받은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친애하는 목사님, 주일 아침에 교회 현관 앞마당으로 독일 낙하산 부대원이 착지하도록 저희를 고용하시면, 주일학교 출석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본 것 중 가장 많은 군중이 모일 겁니다.” 그러자 친구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잭,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우린 상의를 벗은 댄서들을 고용해서 주일 밤마다 많은 군중을 모으고 있거든요.” (물론 내 친구는 그런 짓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편지를 쓴 사람의 육신적인 방법을 조롱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거물이 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지위”에 대한 교만이다.<br/><br/>넷째, “은혜”에 대한 교만이다. 이것은 “바리새인적 교만”이기 때문에 가장 큰 교만이다. 『그 바리새인은 서서 혼자 이렇게 기도하더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즉 착취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하더라』(눅 18:11,12). 이것이 “은혜”에 대한 교만인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나는 &lt;킹제임스성경&gt;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어떤 자유주의자나 현대주의자나 신정통주의자도 지지하지 않는다.” “나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빙고 게임도 하지 않는다.” “나는 담배를 피우거나 침을 뱉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성별된 삶을 살고, 성경도 읽고 거리에서 설교도 하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이것이 “은혜”에 대한 교만이며, 여러 교만 중 최악의 교만이다. 즉 이것은 “종교적 교만”인 것이다.<br/><br/>옛날에 기둥 위에 올라가 앉아 수행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므온 스틸라이트와 같은 자였는데,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영적 거물인지 보여 주기 위해 20년 이상을 15미터 높이의 기둥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이런 기둥 수도자들 중 한 명에게 그의 형제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에 화가 솟구쳤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만이다. 자신이 얻지 못한 기회를 자기 형제가 얻은 것에 분노한 것이다!<br/>로마에 가면 사람들이 반지에 입 맞추고 발에 입 맞추며 “거룩한 아버지”(Holy Father)라고 부르는 자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칭호인데도 그자는 자기를 그렇게 부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은혜”에 대한 교만이다.<br/><br/>옛날에 텍사스에서 말 도둑을 교수형에 처한 일이 있었다. 그를 매달려고 할 때 어떤 이가 말했다. “그를 죽이기 전에 목사를 불러서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러자 거친 카우보이 중 한 명이 말했다. “그가 텍사스에서 살기에도 부적합한데 하늘나라에 슬쩍 들여보내려고 하는 거요?”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 바로 “은혜”에 대한 교만이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하늘나라에 살기에 적합해서 하늘나라에 가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것이다. <br/><br/>『교만은 멸망에 앞서 있으며 거만한 영은 몰락에 앞서 있느니라』(잠 16:18). “자주 쓰는 욕조와 잘 사용하지 않는 성경은 독선적인 죄인을 만들어 낸다. 자주 사용하는 도서관과 잘 사용하지 않는 성경은 강제 수용소를 만들어 낸다.”라는 말이 있다. 당신은 “뭐라고?”라고 할 것이다. 그 말의 뜻을 알고 싶다면, 아돌프 히틀러를 생각해 보라. 당시 독일 국민은 98퍼센트의 사람들이 글을 읽을 줄 알았다. <br/><br/>미국의 남북전쟁 시절에 한 북부군 장교가 있었다. 그는 부상당한 남부 연합군 병사가 물병을 얻고 나무에 기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 장교는 말을 타고 떠날 때 등에 총을 맞고 말았다. 당신은 “이 이야기가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할 것이다. 남부군 병사가 자신에게 베풀어진 은혜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겠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셨는가? 그렇다면 혹시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생명수를 주신 후 “그분의 등 뒤에서 총을 쏜” 적은 없는가? 받은 은혜를 교만의 계기로 사용한 적은 없는가? <br/><br/>이따금씩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성장한 것에 대해 속으로 교만해진다. 그럴 때 해야 할 일은 감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교만하지 말라. 당신은 “왜요?”라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들을 보라. 『교만은 멸망에 앞서 있으며 거만한 영은 몰락에 앞서 있느니라』(잠 16:18). 『다툼은 교만으로만 오나, 권면을 잘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3:10).<br/><br/>내가 보병대에서 배운 것은 딱 세 가지 교훈이었다. 첫 번째 교훈은 “엎드려!”이다. 두 번째 교훈은 “계속 엎드려 있어!”이다. 세 번째 교훈은 “일어나지 마!”이다. 대단한 인물로 보이려고 하지 말라. 다만 신실해지는 법을 배우라.<br/><br/>『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에, 너희의 발이 어두운 산들에서 넘어지기 전에, 너희가 빛을 찾는 동안 그가 빛을 죽음의 그림자로 바꾸어서 완전한 흑암으로 만들기 전에 주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것을 듣지 아니하면 내 혼이 너희의 오만함으로 인하여 은밀한 곳들에서 울 것이며 또 주의 양무리가 사로잡혀감으로 인하여 내 눈이 심히 울고 눈물을 흘릴 것이라. 왕과 왕비에게 말하라. 스스로 겸손히 하고 앉으라. 이는 너희의 정사들, 곧 너희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올 것임이라』(렘 13:16-18). 『그러나 그가 더 많은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느니라... 주의 목전에서 겸손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실 것이라』(약 4:6,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br/><br/>백만 명 이상을 주님께로 이겨온 미국의 복음전파자 D.L. 무디가 자주 인용하며 사랑한 명언이 있었다. 이것은 무디가 주님께 쓰임받은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믿음은 가장 많은 것을 얻고, 사랑은 가장 많이 수고하지만, 겸손이야말로 가장 많은 것을 지킨다.” 당신은 어떠한가?<br/><br/>하나님께서 당신을 낮추실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그렇게 하시기 전에, 스스로를 낮추라! 여기에 머피의 법칙이 있다. “바닥에 얼굴을 댄 채로 납작 엎드려 있다면, 당신은 더 이상 넘어질 수 없다!” 『영원에 거하시는 높고 우뚝 솟은 분, 그의 이름이 거룩이신 분이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여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는도다』(사 57:15). 아멘!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09:48: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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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C%96%B4%EC%B0%8C%ED%95%98%EC%97%AC-%EC%A3%BD%EA%B3%A0%EC%9E%90-%ED%95%98%EB%8A%90%EB%83%90/</link>
<description><![CDATA[『너희가 범한 너희의 모든 행악들에서 떠나 새 마음과 새 영을 가지라. 오 이스라엘 집아,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죽는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그러므로 너희 자신은 돌이켜서 살라』(겔 18:31,32).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구약의 말씀이지만, 위대한 진리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의 사악함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시기에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라고 하셨다. 이번 호에서는 영적 자살을 저지르는 몇 가지 방법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자살”은 미국에서 흔한 일이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자동차 사고에 이어 두 번째로 흔한 사망 원인이다. 오늘날의 세대는 자살을 조장하는 록 음반을 듣고 자랐다. 그런 음반 중 일부는 당신에게 “희망이 없어. 아무 소용도 없어!”라는 생각을 전달한다.<br/><br/>베드로후서 3:9과 에스겔 33:11에서는 주님께서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당신은 죽으려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영적 자살을 저지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럼에도 당신은 영적 자살을 저지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 없이, 소망 없이, 하나님 없이 죽는 것이 바로 영적 자살이다. 영적 자살은 죄인이 자신의 영적 경정맥을 칼로 그어 죽고 지옥에 가는 것이다. 왜 스스로 죽고자 하는가?<br/><br/>첫째, 죄인들은 “교만”을 통해 영적 자살을 한다. 교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즉 “교육받은 교만”과 “교육받지 못한 교만”이다. 어느 쪽이든 당신을 죽이는 건 매한가지다. 성경은 『교만은 멸망에 앞서 있으며 거만한 영은 몰락에 앞서 있느니라.』(잠 16:18)라고 말씀한다. 교만은 당신을 죽일 것이다. 왜 미국 사람들 대부분이 죽어서 지옥에 가는지 알고 싶은가? 그건 바로 교만 때문이다.<br/><br/>만약 독자가 어떤 사람에게 5만 달러를 빚졌는데 갚을 수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내가 다가가서 “당신 대신 그것을 갚아 주겠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 수표에 서명하고 현금으로 바꾸는 것뿐이오. 수표를 당신 이름으로 발행해 놓았소.”라고 말했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이런 제안을 할 때 받아들이지 않는 죄인들이 있다. 왜인가? 교만 때문이다! 이런 제안을 거부한다면, 교육을 받았든 교육을 받지 않았든 똑같이 “바보천치”일 뿐이다.<br/><br/>나는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일주일에 100달러를 버는 늙은이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은 마귀만큼이나 교만했다. 그들은 교육도 못 받았고 똑똑하지도 않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싸우고 있었다. 또 앨라배마주 베이 미네트에서 살았을 때, 옆집에 살던 택시 운전사도 생각이 난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글쎄요, 당신이 가진 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일 리가 없어요!” 이에 나는 “왜 그렇죠?”라고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에는 타자기가 없었으니까요!” 정말 대단히 유식하고 똑똑한 친구가 아닌가! 그 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도 마치지 못했지만 교만했고, 결국 구원받지 못했다.<br/><br/>미국 남부의 대부분의 남자가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 때문이다. 필자는 앨라배마주, 미시시피주, 캐롤라이나주, 켄터키주 전역에서 수년 동안 설교를 한 경험이 있다. 대부분의 남부 남자들은 평생 복음을 들어 왔다. 그들은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많다고 변명하며, 때로는 “자신이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바울도 늘 올바로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갈 2:20, 롬 7:20), 어떻게 당신이 올바른 삶을 살고 난 다음에야 구원을 받겠다는 말인가?<br/><br/>세상의 지식인들과 부자들과 대학 교육을 받은 무리들은 교만 때문에 지옥에 간다. 아인슈타인이 죽을 때가 되었을 때 한 루터교 목사가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학 공식이 아닌 하나님은 믿을 수 없소.” 그는 자신의 두뇌를 숭배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학에 가서 학위를 몇 개 땄다고 해서 자기가 뭔가를 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종탑이 클수록 박쥐가 더 많이 사는 법이다!” <br/><br/>둘째, “느낌”을 기다리다가 영적 자살을 하기도 한다. 한번은 신시내티에 있는 어떤 부인에게 물었다.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요, 안 받았어요.” “그럼 왜 안 받으셨죠?” “글쎄, 아직 딱 와 닿지가 않아서요.” “무엇이 딱 와 닿지 않았다는 거죠?” “그냥 아직 딱히 와 닿지가 않아서요.” 그 불쌍한 여인은 자신이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지난주에 “그것”이 자신에게 찾아왔는데 그것을 놓쳤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br/><br/>당신이 숲속에 나갔는데 도끼를 든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묻는다. “뭘 하고 계신가요?” 그러자 그가 대답한다. “음, 나무를 베고 있어요.” “벤 나무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아, 땀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진실은 나무를 베기 시작하면 땀이 난다는 것이다! 느낌을 기다리지 말라. 느낌은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구원 후에 찾아오는 열매이다.<br/>당신이 정말로 느낌을 원한다면, 어떻게 얻는지 알려줄 수 있다. 무릎을 꿇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침례를 받으라. 그런 다음 전도지를 한 뭉치 들고서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나눠 주고, 당신이 사는 곳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 뒤편이나 지붕 위에 올라가서 외치라. “교황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하십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지옥에서 불타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느낌을 얻지 못한다면, 내가 목회를 그만두겠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느낌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느낌 자체가 당신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구원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느낌을 기다리다가는 지옥에 갈 것이다. 느낌은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약으로도 느낌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br/><br/>셋째, 친구나 친척을 기다리다 함께 죽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친구나 여자 친구가 먼저 구원받기를 기다리다가 지옥에 가는지 모른다. <br/><br/>여자들은 자신이 죄에 빠져 타락할 때나 자기 순결을 젊은 남자의 정욕의 제단에 희생시킬 때, 꼭 다른 여자를 함께 데리고 범죄한다. 그러나 남자는 약간 다르다. 남자들 중에는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구원받기 전에도 그랬고 구원받은 후에도 거의 그랬다. “지옥으로 내려가든 보좌로 올라가든, 혼자 가는 자가 가장 빨리 간다.”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혼자 다니는 것은 잘 볼 수 없다. 꼭 짝을 지어 다닌다. 한번은 파나마 시티의 한 고등학교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 내 설교를 꼼짝없이 들어야 하는 청중을 확보한 것이다. 그때 어떤 기독교 대학의 그룹이 노래를 부르려고 왔는데, 그들도 남아서 내가 설교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봐야 했다. 나는 재림에 관한 그림을 그렸다. 맨 앞줄에는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한 줄로 쭉 앉아 있었다. 내가 초청을 하자, 그들 중 대여섯 명이 돌아서서 통로로 향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의 교사인,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여자가 앞으로 나와 통로를 막아 아무도 나갈 수 없게 했다. 나 같으면 그녀를 의자 너머로 밀어 넘어뜨리고 앞으로 나갔을 것이다! <br/><br/>때로 당신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이 당신 옆에 앉아 있는 바로 그 사람임을 아는가? 당신은 특정 무리와 어울려 놀다가 그들이 움직이면 함께 움직인다. 젊은이들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이 다른 길로 움직이기를 원하시는 때가 있다. 구원에 있어서, 만약 당신의 여자 친구가 먼저 구원받기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결코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여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남자 친구가 구원받지 않아서 저도 구원받고 싶지 않아요. 그가 구원받으면 저도 구원받을 거예요.” 그렇게 하다가는 둘 다 함께 지옥에 갈 것이다. 친구를 기다린다고?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다.<br/><br/>구원받았든 받지 않았든, 한 사람을 망치는 데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뿐이다. 사역하던 선교지에서 젊은이를 떠나게 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가? 젊은 여자 한 명이면 된다! 젊은이를 목회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젊은 여자 한 명이면 된다! 이 점은 여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젊은 여자가 주님을 위해 가정에서 아이들을 양육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젊은 남자 한 명이면 된다. 당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다름 아닌 “당신이 사랑하는” 엄마, 아빠, 삼촌, 이모, 할머니, 할아버지, 시댁이나 처가 식구, 남자 친구, 또는 여자 친구이다. 그들이 당신의 목을 벨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또는 친척이 당신에게 소중한 존재일 수 있고,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 때, 당신은 그들을 넘어서거나 지나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한다. <br/><br/>넷째, 죄 많은 과거를 덮으려 함으로써 영적 자살을 저지른다. 만약 당신이 어릴 때 구원받았다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죄를 많이 짓고 살다가 나중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결코 부러워하지 말라. 당신이 다섯 살에서 여덟 살 사이에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모든 이점을 가지고 있다. 서른 살이나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어릴 때 구원받지 않고 행한 죄들의 열매를 거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br/><br/>밥 존스 시니어는 말했다. “죄는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그것이 처음 찾아갔을 때보다 더 나은 상태로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메뚜기와 자벌레와 풀쐐기와 모충이 먹었던 연수를 내가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욜 2:25), 때로 특별히 선을 베푸셔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그분께서 요구하실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다 요구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늙은 난봉꾼이나 늙은 마약 중독자, 악당을 데려다가 목회에 사용하셔서 무언가를 하시고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지만 일어날 수도 있다.<br/><br/>젊은이들은 그와 같은 간증을 듣고 보면서 생각한다. “나도 그런 일을 겪어 봤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아니다! 그런 일을 절대로 겪지 말라. 당신은 인생 전체를 큰 그림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시거니와, 나는 스무 살 이전에 뿌렸던 것들을 일흔 살 이후에도 거두었다. 빨리 구원받을수록 깨끗한 기록을 만들 기회가 더 많아지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의 과거 기록이 깨끗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직 구원받을 기회는 있다!<br/><br/>어떤 사람들은 과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그들은 평생 그것을 덮으려고 애쓴다. 그들의 숨겨진 과거의 행실 말이다. 그들은 죄 많던 삶을 덮으려고만 할 뿐이다.<br/><br/>다섯째, 당신은 자신의 비밀이 새어 나가 알려질까 봐 두려워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영적 자살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런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말해 주겠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죄 많은 과거의 삶을 가져다가 벽장 속에 넣고, 그 벽장을 잠그고, 그 열쇠를 가져다가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 말씀드리라. “주님, 여기 있습니다.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당신께서 그것을 드러내고 싶으시다면, 그건 주님께 맡겨진 일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것을 비밀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저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혹자는 “글쎄요, 만일 제가 구원받는다면 이 일을 자백해야 할 텐데요. 만일 제가 구원받는다면 저것을 해결해야 할 텐데요.” 물론 그렇게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열의 아홉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처리하시거나 그런 일을 통과하도록 도와주신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그런 것들을 덮으려고 한다면, 당신은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br/><br/>성경은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네 모든 길들에서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들을 지도하시리라.』(잠 3:5,6)라고 말씀한다. 드위트 탈마지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그를 불러서 평생 잊지 못할 말을 해 주었다. “아들아,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항상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남겨 줄 만한 대단한 유산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말 중요한 말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의구심부터 들 수 있으나 하나님만을 신뢰하라! 당신 자신을 믿지 말라. 당신 자신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당신은 “나도 꽤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 이스라엘 집아,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죽는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그러므로 너희 자신은 돌이켜서 살라』(겔 18:31,32).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벧후 3:9). <br/><br/>왜 죽으려고 하는가? 사람들 가운데는 죄짓기를 그만두기보다는 자기 죄 가운데서 죽어 지옥에 가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당신은 말한다. “무엇을 그만둔다는 말입니까?” 당신이 마음에 품고 행하고자 하는 죄는 무엇이든 해당한다! 딱히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 어떤 친구에게는 이런 일이고, 저 친구에게는 다른 일이다. 사람마다 다르다.<br/><br/>몇 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뉴욕 시내 고담 호텔에서 존 워드라는 이름의 남자가 뛰어내렸다. 할리우드에서 이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그가 안전하게 내려온 것처럼 왜곡했다. 사실 존 워드는 안전하게 내려오지 못했다! 그는 내려오면서 차양에 부딪혔고, 그의 시신은 너무나 많이 훼손되고 뭉개져서 발로 그것을 휘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호텔 17층에서 죽으려고 서 있었고, 사람들은 하루 종일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그의 모친과 전 여자 친구를 데려왔고, 경찰을 동원해서 설득하려 했고, 그의 아래에 그물도 설치했다. 그들이 그렇게 노력하고,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말로 간절히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결국 큰 새처럼 뛰어내려 그물을 지나쳐 차양에 부딪혀 죽었다.<br/><br/>당신은 말할 것이다. “저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아요!” 그러면 대답해 보라. 당신은 자신의 혼을 가지고 도박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을 어떻게 하면 회피할 수 있을까를 빈둥거리며 궁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게 하고 있다면, 당신 자신이 정작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영적으로 당신은 자신의 혼의 경정맥을 칼로 긋고 있는 것이다. 명심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벧후 3:9).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9 May 2025 09:50:1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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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당신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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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도다』(마 28:18). 마태복음 28장에서 주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설교하고 계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셨다면, 그리스도인은 능력을 소유해야 마땅하다. 그 능력은 물질적 권력이나 대중을 지배하는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영적인 능력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처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인가?<br/><br/>첫째, 능력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낚시 여행 중에 태풍이 몰아친다고 상상해 보라. 3미터 높이의 파도가 일고 번개가 치며 폭풍이 몰아치는 중에 선장이 뱃머리로 올라가서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라고 외치자 모든 것이 완전히 잠잠해진다. 인상적이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능력의 나타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도 능력의 예시이다. 나사로가 살아나온 장면은 어떤가?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가셔서, 무덤 옆에 서신 뒤 시체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43)라고 하시자 시체가 나왔다! 그는 손과 발이 묶여 걸어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회전하며 나왔을 것이다(요 11:44).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br/><br/>조지아주 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던 폴 앤더슨은 어느 곳에서든 복음을 전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자기 돈 대부분을 소년 갱생 시설 설립에 사용했다. 그는 하루에 우유 2리터를 마셨고, 몸무게는 165kg이었으며, 무려 2,844kg을 들어 올렸다. 그가 무대 위에 섰을 때 2.5 × 2.5 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판을 그의 등에 올려놓았고, 그가 무대 위의 시멘트 블록을 손으로 짚으며 자세를 잡자, 사람들이 그의 등 위의 판에 코끼리를 올려놓았다! 정말 인상적이었다!<br/>능력은 인상적이며, 그리스도인이 능력을 발현하는 것도 인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무능력”한 것도 인상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br/><br/>둘째, 능력은 “위험”할 수 있다.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 미국 정부는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과거에는 미국 대통령이 지금처럼 많은 권한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을 국민에게서 빼앗은 이들은 링컨, 존 F. 케네디,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고, 그것을 “행정 명령”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우리는 의회를 무시하겠다”는 뜻이다. 의회가 이스라엘의 수도를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결정을 해도 대통령이 “난 그것을 원치 않아.”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수도는 옮겨지지 않는다. 대통령이 의회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권력이다. “불법적인 권력”이지만, 여전히 권력이며 “위험한” 권력이다.<br/><br/>사람들은 종종 “권력에 취한다”고 말한다. 중세 시대에 교황들은 정말로 권력에 취해 있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목이든 잘라 버리고 누구든 화형에 처할 수 있었다. 오늘날 무슬림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도 동일하다. 원하면 누구든 목을 베고 화형시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며 말한다. “우리 편에 서지 않으면 죽인다.” 이것이 바로 무슬림의 가르침이다.<br/><br/>우리 교회 사무실에 무슬림이었다가 구원받은 이들이 찾아온 적이 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면 우리는 배에 다시 타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 사실을 들키면, 그들은 우릴 죽일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자, 당신은 이들에게 어떤 목회 상담을 해 주겠는가?<br/><br/>세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능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능력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반대로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능력의 부재이다. 누군가가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다가 완전히 실패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실망스러운 일도 없다.<br/><br/>나는 한때 유도를 배웠다. 해변으로 가서 유도 실습을 하곤 했는데, 물속에서 싸우는 훈련이었다. 유도 연습을 할 때 보았던 가장 우스꽝스러운 장면 중 하나는 어떤 남자가 다른 사람을 던지려고 했을 때다. 그는 엉덩이를 상대방 복부 쪽으로 잘 넣어서 상대를 어깨 너머로 넘기려고 했지만, 상대가 그의 위에 올라타면서 그냥 깔려 버렸다! 빨리 던졌어야 했는데, 동작을 너무 느리게 한 것이다. 그는 거대한 고래 같은 남자를 업은 채 물속에서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상대가 그를 익사시킬 수도 있었을 정도였다. 능력의 부재는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다!<br/><br/>셋째, 능력의 부재는 잘못된 방식으로 인상적일 수 있다. 그것은 스위치를 켰는데 불이 안 들어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디선가 능력을 봐야 한다. 성경은 디모데후서 3:5에서 마지막 날들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라고 말씀한다.<br/><br/>교황들을 예로 들어 보자.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하는 자치고는 정말 처참한 모습이다. 수많은 교황들이 수십 년간 평화를 위해 기도해 왔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왜 그런가? 교황의 기도는 바티칸의 천장조차 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 교황이 “평화, 평화, 평화...”를 외치면, 주님께서는 “좋아. 전쟁을 하나 더 보내 주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교황이 “기도의 전사”로서 전혀 힘이 없다는 증거이다. 오랄 로버츠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고, 저렇게 하셨다.”라고 말한다. 어느 날은 “8백만 달러를 보내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실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 수표들이 전부 부도나길 기도했지만, 그는 결국 그 돈을 모았고 치과 대학을 세웠다. 아니, 자기가 진짜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왜 치과 대학을 세우는 것인가? 전부 사기꾼들 아닌가! 그것이 바로 “무능력”이다. <br/><br/>당신은 “브라운즈빌 카니발”이라고 불렸던 집회를 기억하는가? 그 목사는 결국 자기 교회를 떠나야 했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거대한 쇼였을 뿐이다. 그 운동으로 인해 선교사가 나왔는가? 거리설교자가 한 명이라도 나왔는가? 단 한 명의 회심자라도 나왔는가? 약 3년 동안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구멍 난 풍선에서 나오는 바람이 그 집회보다 더 강력할 것이다. 우리는 능력을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자주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마지막 날들이기 때문이다(딤후 3:5). <br/><br/>당신은 지미 스와거트가 아프리카에 가서 설교했을 때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는 설교할 때 통역사가 다섯 명이나 필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어떤 귀머거리이자 벙어리 여인이 “방언으로” 말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아니,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통역이 왜 필요한가? 이런 은사주의 사기꾼들에게 속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br/><br/>넷째, 예수님의 보혈에 능력이 있다면, 당신의 삶에서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 오랄 로버츠나 제리 폴웰이 지난 1년간 인도한 혼이 몇 명인가? 그들은 광고와 명성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나는 그런 거물들 곁에 있었던 적이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5년 동안 단 한 명의 성인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했다. 능력이 없는 것이다. 돈을 관리하는 임원들이 있고, 그럴싸한 동기 부여나 매력은 있을지 몰라도 “성령의 능력”은 없다.<br/><br/>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에서도 그 능력을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을 보면, 다른 이들에게서는 그 능력을 보기가 어렵다.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당신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한가? 성령으로 인쳐졌지만 “능력은 없는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정욕, 의심, 두려움, 성질, 우울함, 염려 때문에 능력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삶 속에 변화가 있었는가? 개선이 있었는가? 아니면 여전히 이전과 똑같은 모습인가?<br/><br/>한번은 한 여자아이가 아버지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 아이에겐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지미와 조는 매일 밤 기도해요. 하나님께 더 착한 아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요. 그런데 아직 그렇게 안 됐어요!”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다. <br/><br/>당신은 성령으로 인쳐졌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신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나니 너희도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느니라』(골 2:9,10). 이렇게 말씀하는데도 아무런 능력이 없는가? 죄인들이 당신을 무서워한 적이 있는가?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이 당신 때문에 불편해한 적이 있는가? 어떤 젊은이를 위해 기도해서 그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막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이와 같은 것은 실제적인 믿음의 문제이다.<br/><br/>당신은 능력이 있는가? 없다면 왜 없는 것인가?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도다』(마 28:18). 그리고 그 권세를 당신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 당신 안에는 주님 안에 계셨던 동일한 성령님이 계신다. 사도들 안에 계시던 바로 그 성령님을 받았다. 물론 당신은 선지자가 아니고, 사도적 기적이나 표적을 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임했던 그 성령님께서 바로 당신 안에도 들어오셨다. 구원받았다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킨 능력이 당신 안에도 있다. 바울에게 있었던 능력,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있었던 그 능력이 당신 안에도 있다! 따라서 그들과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능력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힘으로도 아니요, 능력으로도 아니며, 오직 나의 영에 의해서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슼 4:6).<br/><br/>성령을 받았다고들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나는 지긋지긋하다.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그 능력을 보아야 한다. 당신은 쉽게 상처받는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 보라. 사랑은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 당신은 자주 염려하는가? 마태복음 6:34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의심하는가? 히브리서 13:5,6을 읽어 보라. 무엇이 문제인가? 고약한 성질인가? 빌립보서 4:7을 읽어 보라. 쉽게 거짓말하는가? 에베소서 4:25과 골로새서 3:9을 보라. 당신은 어떤 점에 약한가?<br/><br/>195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한 청년이 어떤 그리스도인 소녀에게 접근했다. <br/><br/>“데이트할래?” 그녀가 대답했다. “성경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럼 칵테일 한 잔만 마셔 봐.” “아니, 내 몸은 성령의 전이야.” “그럼 영화라도 같이 보러 갈까?” “아니, 성경은 ‘악은 어떤 형태이든지 피하라’고 하셨어.” 그 청년은 친구들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 여자애한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성경을 너무 많이 알아.” 그 소녀는 “능력”이 있었다! 자기보다 두 살 많고 경험도 더 많은 남자를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밀어냈다. 그는 완전히 제압당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능력”이다.<br/><br/>당신 자신의 삶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에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 능력을 보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그 능력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살아야 한다. 우울함을 이겨낼 방법이 있어야 한다. 분노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거짓말을 이길 수 있어야 하고, 죽음조차도 이겨 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죽음에 있어서도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br/><br/>바울이 죽음에 가까웠을 때를 보라. 그는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 4:8).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이 약속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다!<br/><br/>빌리 브레이가 죽음을 앞두고 있었을 때였다. 의사가 그를 찾아와 말했다. <br/><br/>“빌리, 안타깝지만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아주 위중합니다.” “그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금방 죽을 수도 있다고요?”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늘 죽을 수도 있다고요?” “예, 오늘이라도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빌리가 외쳤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제 곧 나는 하늘나라에 있는 내 본향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능력이다. 가짜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이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br/><br/>세상은 무능한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난다. 당신은 벤치프레스 20kg도 들지 못할 수 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나도 한때는 근육을 만들려고 운동을 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그냥 가벼운 무게만 드는 수준이다. 나이가 들면 그것은 “근육 만들기”가 아니라 그저 “근육 유지”가 된다. 지금은 내 몸무게도 못 들 정도다. 아마 80kg은 무리일 테고, 70kg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몸은 약해진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약해질 필요가 없다(고후 4:16; 12:9,10, 행 20:32).<br/><br/>문제는 당신의 “자아”이다! 당신이 주님께서 흥하시고 자신을 쇠하게 하기보다는, 자신을 더 흥하게 하고 주님을 쇠하시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으면 복음 전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진다. 자신의 일을 그만 말하고 주님의 일을 구하기 시작하면, 기도가 더 많이 응답될 것이다. 자, 이제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렇지 않은가? 당신의 삶 속에 실제로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가? 당신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사람이 있는가? 당신의 말과 기도로 인해 인생의 파멸을 피한 사람이 있는가? 당신은 불신자들을 두렵게 하는가? 당신은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을 화나게 만드는가? 당신의 기도로 마귀의 일이 멈춰진 적이 있는가?<br/><br/>몸무게가 57kg인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의 아들이 차를 수리하다가 차체를 들어올리고 있던 잭이 빠지는 바람에 차 밑에 깔렸는데, 차 무게가 1.6톤이 넘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그것을 순간적으로 들어올렸다! 그녀는 등뼈 몇 개를 다쳤지만, 57kg밖에 안 되는 몸으로 그 차를 들어올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이다.<br/><br/>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당신을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나는 성령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책상엔 이런 문구가 있다. “피터 S. 럭크만, 하나님의 종.” 이것이 전부다. 그리고 나는 섬기고 싶다. 『누구나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라오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의 종도 거기에 있으리니, 누구나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시리라』(요 12:26). 주님을 섬긴다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30 Apr 2025 15:29:1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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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을 읽지 않는” 죄인들</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C%84%B1%EA%B2%BD%EC%9D%84-%EC%9D%BD%EC%A7%80-%EC%95%8A%EB%8A%94-%EC%A3%84%EC%9D%B8%EB%93%A4/</link>
<description><![CDATA[주님께서는 유식한 자들도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무식한 자들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사 29:10-14). 성경의 대부분의 구절들은 유대인, 교회, 또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어떤 부분이 유대인에게, 이방인에게, 아니면 교회에 주어진 것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이 세 부류를 개별적으로 다루신다. 그러나 다음의 말씀은 “땅”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다. 『오 땅아, 들으라. 보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리니』(렘 6:19).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들에게 갚으신다고 하셨으며, 그 이유를 『이는 그들이 내 말에 경청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렘 29:19)라고 거듭 밝히셨다.<br/><br/>자, 이번에 다룰 주제는 “왜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가?”이다. 교육받은 미국인들이 미쳤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성경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이다. 성경은 다른 모든 책들의 요람이었으며, 그 모든 책들은 무덤에 묻힐 것이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책을 영어 수업에서 제외할 수 있단 말인가? &lt;킹제임스성경&gt;은 그 어떤 다른 열 권의 책보다도 더 많이 팔렸다! 마오쩌둥의 성명과 글 모음인 “작은 붉은 책”도 성경을 이기지 못했다. 그 책이 2천만 부가 팔렸던 것은 사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NASV, NIV, RSV, NKJV, 리빙바이블을 모두 합친 판매 부수보다 &lt;킹제임스성경&gt;이 두 배나 더 많이 팔렸다. 그런데도 학생들에게 &lt;킹제임스성경&gt;을 배우지 못하게 하는 일이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br/><br/>첫째, 사람들은 일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는다. 성경을 읽으면 생각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하지 않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br/><br/>사람들은 점점 명확하게 사고하는 능력을 잃어 가고 있다. 분명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현대 미국인들은 기업이 억압을 조장하는 반면 정부는 번영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미친 생각이다. 기업이 아니라 부패한 정부가 억압을 조장한다. 계급 높은 미국 군인들이 전쟁을 시작한다고 생각하는가? 전쟁은 부패한 정치인들이 시작한다. 당신은 지금 생각할 능력을 상실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 필자는 기본적인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어떤 교사가 아이들에게 글을 읽는 법을 가르칠 능력도 없으면서 음행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교육이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일 동성애자들이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고 춤을 추는 행위를 헌법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자기 집 앞에 십자가나 구유 장식을 놓아둘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미친 것이다. 당신의 이성은 마비된 것이다.<br/><br/>성경은 일상적인 생활을 방해한다. 성경을 읽으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검정색”은 죽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붉은색” 표지의 성경도 있었는데, 이는 피를 상징한다. 성경을 깊이 파고들면 결국 죽음과 영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원하지 않는다.<br/>둘째,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격언이 있다. “당신이 성경을 싫어하는 이유는 성경이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당신을 정죄하기 때문이며,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은 기드온 성경이 호텔 방에 비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대신 방에 콘돔과 포르노 잡지인 &lt;플레이보이&gt;를 두길 원했다. 왜 그런가? 그것들은 죄를 폭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죄가 나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든지, 성경이 나를 죄에서 멀어지게 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세상은 죄를 덮고 싶어 한다.<br/><br/>하지만 성경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성경은 죄를 농담거리나 코미디 영화로 포장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죄를 미화하는 내용이 단 하나도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성경은 죄에 대한 변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져서 어쩔 수 없었어요!”와 같은 식의 변명은 성경에 없다. 연쇄 살인범이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아서 살인했다는 식의 동정론도 없다. 성경은 음행하는 레즈비언을 “색다른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포장하지 않는다. 성경은 죄를 죄라고 부른다! 성경은 죄를 숨기지 않는다. 당신이 배우자를 놔두고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면, 잠언 5장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여자라면, 에스겔 16장이나 20장을 읽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고 있다면, 로마서 1장을 멀리하는 이유를 내게 말하지 않아도 안다.<br/><br/>또한 성별 구분이 인위적이라고 믿으면서도 변태 성욕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가? 사형제도를 반대하면서도 낙태는 찬성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비정상이다. 살인자는 살려 두어야 하고, 태아는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인가? 당신의 사고방식 자체가 뒤틀려 있는 것이다.<br/><br/>셋째,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그들의 교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기록된 인물이 있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가? 성경의 중앙에는 다섯 권의 “지혜서”가 있는데, 지혜를 원한다면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솔로몬의 노래에서 찾으라.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골 2:3).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책들을 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싫어한다. 내가 “솔로몬이 20세기나 21세기의 그 어떤 과학자나 교육자보다 더 지혜로웠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반발할 것이다. “어떻게 한 명의 고대인이 현대 과학자들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거죠?”라고 말할 것이다.<br/><br/>성경은 인간의 업적을 칭찬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를 읽어 보아도 인간의 예술, 문학, 음악, 문화, 지혜를 자랑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기술과 능력을 주셨다는 내용은 있지만, 그것을 그들이 스스로 이룬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높인다. 『진실로 낮은 자들도 헛것이요, 높은 자들도 거짓이니 그들을 저울에 달면 모두 합쳐도 헛것보다 가볍도다』(시 62:9).<br/><br/>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좋아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 들으라. 지금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암송하고, 인용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들이 있나이다』(요 6:68). 나는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성경 테이프를 틀어 놓는다. 성경을 계속 재생해 두고,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돌려서 잠들기 직전에 들었던 부분부터 다시 듣는다. 때때로 밤에 세 번, 네 번 깨어나서 다시 돌려 듣기도 한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성경은 영생의 말씀들이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성경을 틀어 놓는 것이 내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br/>성경은 인간의 교만을 상하게 한다. 이것이 당신이 성경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신문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 성경이 그리는 인간의 모습은 로마카톨릭, 이슬람, 자유주의, 무신론에서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성경은 “너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너는 결코 선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씀한다. 로마카톨릭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저것도 하면 구원받을 수도 있다.”라고 한다. 이슬람은 “이런 일들을 하면 된다.”라고 한다. 불교도 “이것저것을 하면 된다.”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경은 “아니다!”라고 말씀한다. <br/><br/>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는 이유를 나는 안다.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도울 수도 없다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 그것이 거짓임을 깨닫고 낮아지게 된다. 성경이 인간에 대해 어떻게 적나라하게 말하는지 알고 싶다면, 시편 14:3,4; 39:5, 이사야 64:6, 전도서 7:20을 찾아서 읽어 보라.<br/><br/>넷째,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성경이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들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 『만군의 주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으며,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은 어디 있느냐?』(말 1:6)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버지시라면 그분께 합당한 공경을 보여야 한다. 바울의 말도 들어 보라. 『너희의 주인도 하늘에 계시며』(엡 6:9). 바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공경해야 한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누구라도 멸망할 것이나』(잠 13:13). 왜 그런가? 성경은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br/><br/>사람들은 명령받기를 싫어한다. 나도 싫어한다. 나는 타고난 반항아이다. 정부든, 가족이든, 친구든, 누구에게든 명령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열 살짜리 아이처럼 말이다.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났고, 아마도 그렇게 죽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때에 하고 싶을 뿐이다. 이게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해야 할 바를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명령은 명령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명령은 명령이며, 성경의 명령에 당신은 순종해야 한다! <br/><br/>다섯째,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고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과 모든 종교보다 높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진리에 분개한다.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17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누구를 두고서 하셨는가? 마호메트? 붓다? 마호메트나 붓다 스스로도 그렇게 시인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는 오직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br/><br/>마호메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알라의 사도”라고 칭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시다(히 1장). 마호메트가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위해 죽고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용서했는가?(눅 23:34)<br/><br/>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 위에 높인다. 붓다는 죄인이었는가? 그렇다. 마호메트는 죄인이었는가? 그렇다. 존 F. 케네디도 죄인이었는가? 그렇다. 클린턴 대통령은 어떤가? 죄인이다. 루스벨트도 죄인이었는가? 죄인이다. 마이클 잭슨은? 죄인이다. 아인슈타인은? 죄인이다. 테레사 수녀는? 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이셨는가? 아니다! 바로 그것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점이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신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한 이름을 그에게 주사』(빌 2:9). 이것이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싫어하는 것이다. 왜 그들은 “위대하신 예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들은 수많은 죄인들을 “위대하다”고 칭하지 않는가? 가령 “위대한 피터”(피터 대제), “위대한 오토”(오토 대제), “위대한 프레데릭”(프레데릭 대제) 같은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위대하신 예수님”(Jesus the Great)이라는 표현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예수님께서 그 모든 자들보다 더 위대하시고 주님께서 그들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저들 중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노라. 나는 내 아들을 기뻐하노라!”<br/><br/>『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마 4:4). 당신의 죽을 육신에게 하루 세 끼 밥 먹이는 것에만 신경 쓰지 말고, 성경을 펼쳐서 당신의 영을 먹이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영생의 말씀들”을 주셨다(요 6:68). 당신은 그 말씀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성경에 집중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면, 욥기 23:12, 시편 12:6; 119:89,130, 요한복음 6:68; 8:47을 다시 읽어 보라.<br/><br/>독자들 가운데 몇 명은 구원받은 지 10년에서 4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성경을 한 번도 완독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햇수만큼 성경을 읽지 않았다면, 할 말이 없다. 하루에 성경 10페이지 읽을 시간도 없다고 나에게 말하지 말라. TV 화면에 쓰는 시간을 줄이고,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데 몰두하라!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Mar 2025 09:45:1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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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역”에서 강조했던 것들</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C%82%AC%EC%97%AD%EC%97%90%EC%84%9C-%EA%B0%95%EC%A1%B0%ED%96%88%EB%8D%98-%EA%B2%83%EB%93%A4/</link>
<description><![CDATA[때때로 성경에서는 과거를 돌아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여호수아가 죽을 때(수 24장),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모세도 그가 등장하기 전부터 죽을 때까지의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출애굽기에서 되짚어 보았다. 사도 바울도 참수당하기 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았다(행 20:17-21,26, 31,33-35). 어떤 때에는 뒤돌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 때가 있다(눅 9:62, 빌 3:13,14).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당신을 넘어뜨리는 경우라면 좋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예수님의 피 아래에 있다. 때로 성경은 돌아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한다(사 51:1,2).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하셨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사역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일을 하고자 했는지 말하려고 한다. <br/><br/>우선 나는 성경을 모든 읽을거리 위에 가장 높이 두려고 했다. 내가 “성경”이라고 말할 때,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추측할 필요가 없다. 어떤 대학에서는 “성경”이라고 말할 때, 아무도 본 적 없는 종이 더미인 “원본”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성경”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책, 곧 &lt;킹제임스성경&gt;을 지칭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성경을 당신이 읽는 모든 신문, 잡지, 다른 변개된 성경들이나 백과사전보다 높이 두려고 했다. 절대적인 것들이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앨라배마주 버밍엄은 사우스다코타의 수도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리에도 정답이 있고 오답이 있다. 오케스트라가 조율을 할 때, 모든 악기는 피아노에 맞춘다. 나는 당신에게 절대적인 기준을 준 것이고 그것은 영어로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영국인이 아니다. 내 조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나는 영국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br/><br/>그러나 절대적인 시간도, 절대적인 온도도, 절대적인 진리도 영국이 기준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미국에는 온도에 대한 자체적인 기준이 없다. 영국의 열 단위(BTU)가 기준이다.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다면, 영국으로 가야 한다. 바로 영국 그리니치로 말이다. 그런데도 누가 당신에게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거나, “좋은 번역본과 나쁜 번역본이 있으니, 그냥 네가 선호하는 것을 택하면 된다”고 말하는가? 나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절대적인 시간은 영어로 되어 있으며, 절대적인 온도도 영어로 되어 있고, 절대적인 위치도 영어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진리가 영어로 되어 있다는 점에 이상할 것이 무엇인가? <br/>『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위가 있나니』(전 8:4). 미국에서 만든 성경으로는 아무런 권위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에는 왕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떠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의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굳게 세워 줄 것이며』(행 20:32). 만약 한 사람의 최종권위가 자기 자신이라면, 그는 실질적인 무신론자이다. 즉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신 자신을 최고의 권위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즉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두뇌보다 더 확실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만약 내 머리만을 의지해야 한다면, 그것은 재앙이 될 것이다!<br/><br/>이 “책”은 역사적으로 옳고, 문체에 있어서도 옳으며, 교리적으로도 옳고, 실제적으로 옳으며, 예언적으로 옳고, 그 명령에 있어서도 옳다. 내가 말하는 “책”은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바로 이 “성경책”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성경(Holy Scriptures)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경은 숨을 쉬지는 않지만 당신의 집에서 생명이 있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br/>세상 사람들이 이 성경을 반대하는 유일한 이유는 타락하고 악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이 성경이 당신을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든지, 죄가 당신을 성경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전하고자 했다.<br/><br/>나는 또한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전하려고 했다. 당신이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려 했다. 광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입을 열어야 한다. 딕맨(Dickman) 형제는 원래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을 많은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며,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사람들이 어쩌다가 자기 집 앞에 딕맨 형제가 만든 표지를 세워 둔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저 유약한 자들이다. 그런데 이웃이 와서 묻는 것이다. “저게 뭐예요?” 그러면 그들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이러한 질문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필시 반대자들이 입을 열어 반대하겠지만 염려하지 말라. 확신하건대, 주님의 재림이 지체되면 미국에서도 로마카톨릭과 동성애자들, 또 여성에 대한 성경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범죄시하여 벌금형이나 징역형을 내리는 법이 생길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이미 그런 법이 시행되고 있다.<br/>자, 또 한 가지 내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선교사들”의 중요성이다. 나는 무슨 프로그램이나 선교 단체가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직접 헌금하도록 권장했다. 선교사 멜빌 콕스(Melville Cox)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아프리카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천 명이 쓰러지는 것이 낫다.” 오래전에 제임스 길모어(James Gilmore)는 몽골로 갔다. 그는 30년 동안 단 두 명의 회심자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꾼이 적고 할 일이 가장 많은 곳에서 사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몽골로 갔다. 그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다!<br/><br/>오래전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추운 밤에 우리는 발에 담요를 덮고, 숯불이 깔린 작은 화로 옆에 앉아 있었다. 통역사를 대동하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당시 나는 도쿄 라디오 방송국(현 NHK 도쿄 라디오)에서 무선 통신 장교로 근무했다. 대화가 뜸해질 즈음, 한 일본인이 말했다. “중위님, 음악 얘기는 그만하고 ‘부처’에 대해 얘기합시다.” 그들은 나를 불교 신자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 난 스즈키(Suzuki) 밑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었고 단 4개월 만에 반야(般若)를 깨달았다. 그들 중 몇몇은 그것을 깨닫기 위해 14년 동안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를 떠올린다. “아, 그때 내가 구원받은 상태였다면, 얼마나 큰 기회였을까!” 나는 일본어, 러시아어, 영어를 할 줄 아는 통역사를 옆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신뢰했다. 한 번에 여덟, 아홉 명씩 나를 둘러싸고 내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반드시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럴 수 없었다.<br/>나는 당신이 이러한 선교 부담을 강하게 갖기를 바란다. 당신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재정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가정 문제 등이 산적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현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다른 가정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부담을 느끼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안다. 특히 젊을 때는 더욱 어렵다. 당신에게는 이미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다. 형제여, 나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나는 성도들이 선교사를 지원하는 일에 대해 부담을 가지라고 강조했다. <br/><br/>나는 또한 과학과 학문을 과대평가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이 둘은 겉보기처럼 위대하거나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과학이 암이나 에이즈, 에볼라를 막을 수 있는가? 과학이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을 멈출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과학이 당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충분한 돈이 있다면, 과학은 당신의 고통을 조금 덜어 줄 수 있다. 그것이 과학이 해 줄 수 있는 전부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수백만 명이 매일 고통 속에서 죽어 간다. 심지어 돈이 있어도 그 약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과학의 현실이다. 과학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특히 기독교 학문을 당신이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스피로스 조디에이츠(Spiros Zodhiates)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헬라어 원본”을 운운하며 킹제임스성경을 비평하는 학자였다. 한번은 그의 집회에서 그와 대화할 기회를 가졌는데, 사실 매일 식사할 때마다 그 사람과 최대한 가까이 앉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늘 나를 피했다. 그래서 결국 그의 책 판매대 앞에서 기다리다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여기서 ‘헬라어 원본에서 온 진리(Truth from the Greek text)’라고 광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네, 맞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되물었다. “당신은 ‘원본 헬라어 원문’을 가지고 있지 않죠?” “네,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원본 헬라어 원문’이라고 광고합니까?” “우리는 가능한 최고의 헬라어 원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시 시중에는 스물네 종의 다른 헬라어 원문이 나와 있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슬-알란드 원문이 가장 좋은 원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렇다면 네슬 헬라어 원문의 비평 장치를 연구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는 얼굴을 붉혔다. 그것을 연구해 본 적도 없으면서도 자신을 학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br/><br/>나는 성도들이 하늘나라를 더욱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세상을 당신에게 허무하게 만들어 하늘이 더욱 실제적으로 느껴지게 하실 수 있다. 내 그림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린다. 설교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설교를 한다. 찬송가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을 부른다. 결국 하늘나라만이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후 4:18).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요 14:2). 감옥에 갇힌 어떤 이탈리아 순교자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는 “레오나인 감옥의 아름다운 과수원에서...”라고 썼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관점을 가질 수 있는가? 이런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가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견디었기 때문이라』(히 11:27).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지금 서 있는 땅을 볼 수 있는가? 그 땅은 불타 버릴 것이다. 그랜드 캐니언을 볼 수 있는가? 그것도 불길에 휩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즉 하늘나라, 지옥, 천사, 새 예루살렘, 당신의 혼과 같은 것은 영원하다. 나는 당신이 이 진리를 깨닫도록 애썼다.<br/><br/>마지막으로,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고 했다. 이 일을 위해 당신이 좋아하는 인물들 중 일부를 낮추었고, 때로는 비판하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것을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표트르 대제”도 아니고, “그레고리 대제”도 아니다. “위대하신 대왕”은 예수님이시다! 내게는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스타”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벽별”(Morning Star)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개된 NIV에는 이사야 14장에서 마귀를 “새벽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lt;킹제임스성경&gt;은 올바르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또 빛나는 새벽별이라』(계 22:16). 또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벧후 1:19).<br/><br/>나의 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게는 주님께서 소망의 별, 위로의 별, 용서의 별, 그리고 구원의 별이시다. 나는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한 이름”(빌 2:9)을 높이려 했다. 내가 얼마나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나의 의도였다. 이 땅에서 이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 그리고 그 이름은 침례교도도 아니고, 카톨릭도 아니다. 마리아도 아니고, 마호메트도 아니다! 『그녀가 한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니라』(마 1:21). 성경은 종교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천명하였다. 십계명, 교회 회원이 되는 것, 침례 이런 것은 좋은 것일 수 있지만, 그것들이 당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어떤 행위나 제도를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체(Per- son)를 통해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였는가? 그분을 소유하였는가?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Feb 2025 17:04: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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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킹제임스성경이 “원본”보다 우수한 이유</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D%82%B9%EC%A0%9C%EC%9E%84%EC%8A%A4%EC%84%B1%EA%B2%BD%EC%9D%B4-%EC%9B%90%EB%B3%B8%EB%B3%B4%EB%8B%A4-%EC%9A%B0%EC%88%98%ED%95%9C-%EC%9D%B4%EC%9C%A0/</link>
<description><![CDATA[우리가 위와 같이 제목을 붙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소위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은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성경이라는 형태로 모아진 적이 없는,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두루마리들과 필사본들이다. 원본들은 단 한 번도 한 권의 책 형태로 집대성된 적이 없었다. 둘째, A.D. 100년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가진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A.D. 100년에는 노아가 B.C. 2344년에 전한 설교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여호수아, 잠언, 이사야 등 이미 사라진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이 한 권의 성경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고한 사실들에 근거하여, 흔히 말하는 “성경적 권위”에 관한 역사적 근본 입장이 왜 터무니없는 것인지에 대해 네 가지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성경적 권위”라고 할 때는 사람들이 직접 손에 들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전파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이며 오류 없는 성경과 그 권위를 의미한다. <br/><br/>1. 권위를 인정받은 &lt;킹제임스성경&gt;은 읽고, 암송하고,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이유 때문에 “원본”보다 훨씬 우수하다. 반면 원본은 그렇게 할 수 없다. B.C. 1000년 이후로 누구도 원본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우리가 “손 안에 있는 새 한 마리가 숲속의 두 마리보다 낫다.”라는 속담에 동의한다면, 21세기의 &lt;킹제임스성경&gt; 한 권이 바울이 직접 기록한 자필 원본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주장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이해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아둔하고 어리석은 기독교 학교의 교수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당신이 소위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원본들은 한 권의 성경책으로 묶여 있지 않을 것이고, 문장과 단락 구분도 없을 것이며(적어도 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장과 절 구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그뿐 아니라 원본을 읽으려면 최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4년간 공부해야 한다. 원본들에서 얻은 내용을 영어나 자국어로 옮겨 주지 않으면, 당신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 인구의 90% 이상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사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10%로 상정한 것 자체가 과장이며, 실제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5%도 되지 않는다.<br/><br/>2. &lt;킹제임스성경&gt;의 신약은 그 열매들에 있어서 신약 원본들을 훨씬 능가한다. &lt;킹제임스성경&gt;의 열매는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열매들 가운데 있으며(계 3:8), 신약 원본은 에베소 교회 시대에 열매를 맺었다(계 2:2). 아무리 적게 잡아도, &lt;킹제임스성경&gt;과 그것을 번역한 성경으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의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을 가르치고 전한 기간 동안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보다 최소 열 배 이상 많다. 원본들은 기록된 후 100년 안에 마모되어 사라졌지만 &lt;킹제임스성경&gt;은 현재 400년 이상 강력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br/><br/>밥존스대학, 테네시템플대학, 펜사콜라기독대학, 리버티대학의 배교자들이 이 사안을 대하는 반응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우리를 “성경 숭배자”라고 거짓 비난하는 그들이야말로 실은 “필사본 숭배자”(manuscriptolaters)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필 원본”에 &lt;킹제임스성경&gt;이나 그 번역본에서 얻을 수 없는 뭔가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는다. 이 불쌍하고 자기 기만적이며 자아도취에 빠진 학자들은 만약 원본을 손에 넣는다면, 그 종잇조각들이 &lt;킹제임스성경&gt;의 본문보다 더 많이 성령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 믿는 듯하다. 이렇게 미신적인 믿음을 가진 까닭은 그들 자신이 영적이지 않고 지성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D.L. 무디와 빌리 선데이는 &lt;킹제임스성경&gt;의 본문을 가지고 바울과 베드로가 평생 동안 “원본”으로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br/><br/>바울의 회심자들과 찰스 피니, 휫필드, 웨슬리의 회심자들을 비교해 보면, 원본이 더 우수하다거나 더 능력이 있을 거 같다는 논리는 완전히 무너진다. 비유컨대, &lt;킹제임스성경&gt;은 달에까지 도달했지만, “원본”은 쿠바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모든 교회사가들이 (구원받았든 그렇지 않든) 동의하듯이, 교회사의 가장 위대한 시기는 1600년부터 1900년까지의 기간이다.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무오한 원본”의 능력과 권위가, 보존된 자국어 성경을 능가한다면, 성령님께서는 실수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원본보다 번역본인 &lt;킹제임스성경&gt;을 그 기간 동안 더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라!<br/><br/>3. &lt;킹제임스성경&gt;은 리듬감 있고 시적인 스타일로 번역되어 암송하기에 쉽다. 헬라어와 라틴어는 지구상에서 가장 딱딱하고 문어적인 언어 중 하나이다. 설령 현대의 그리스어나 히브리어가 해당 언어 사용자들에게는 시적일 수 있다고 쳐도, 그것은 성경의 “원본들”은 전 세계 인구의 5% 미만의 사람들만이 쉽게 암송할 수 있다는 뜻일 뿐이다. <br/>배교한 보수주의자들이 허구한 날 펼치는 논리가 있다. 그들은 &lt;킹제임스성경&gt;만이 유일한 올바른 영어 성경이라면 “영어 성경을 갖지 못한 전 세계 인구의 40%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들의 논리를 똑같이 사용해서 원본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물어 보자. “그렇다면 헬라어와 히브리어 사본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읽을 수도 없는 전 세계 인구의 95%는 어떻게 되는가?” <br/><br/>만약 원본들이 “축자적으로 영감받았을” 때, 헬라어가 당시 로마제국의 공용어였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1세기 로마제국은 현재 영어권에 속한 세계 인구의 10분의 1도 채 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과 인도도 영국 시간을 기준으로 시계를 맞추고, 일본과 러시아도 영국을 기준으로 시각을 조정한다. 알래스카, 아르헨티나, 사모아, 마다가스카르, 로디지아, 시암, 시베리아, 베네수엘라, 오클라호마, 미시간, 쿠바, 온두라스, 캔자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각 나라나 주의 경도 또한 영국을 기준으로 결정한다. 사실이 이러한데 최종적인 영적 권위의 기준이 아테네나 예루살렘의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면 누가 믿겠는가?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바로 밥존스대학이나 하버드, 예일 대학의 학자들이다.<br/>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애초에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티옥”에서 시작되었다(행 11:26). 재림이 있을 무렵의 예루살렘은 “소돔”과 “이집트”로 불릴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계 11:8). 어떤 나라도 팔레스타인이나 그리스를 기준으로 시각을 맞추지 않는다. 경도 역시 영국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br/><br/>1611년 이후로 만들어진 그 어떤 영어 성경도 &lt;킹제임스성경&gt;의 리듬감 있는 운율과 시적 아름다움을 갖추지 못했다. 이는 심지어 &lt;킹제임스성경&gt;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는 자들조차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생각해 보라.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간직하였으니 이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함이니이다』(시 119:11). 원본은 사람들이 인용할 수도 없고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적용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해하고 마음에 간직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입에 말씀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롬 10:1-10) 일어나거나 앉을 때 그 말씀들을 말하라고 명령하셨고(신 11:19), 주님께서 그 말씀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요 8:51; 14:23), 이 명령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암송도 할 수 없는 원본을 가지고 하라는 말씀인가?<br/><br/>4. &lt;킹제임스성경&gt;이 원본보다 우수한 이유는 원본들은 &lt;킹제임스성경&gt;처럼 각각의 책이 하나의 책 형태로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그 순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신약 원본들은 문장들이 쉼 없이 연결되어 있고, 구약 원본에는 모음 표기가 없어서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 설령 원본들을 읽을 수 있다 해도, 책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에스더가 욥기 뒤에 배치되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에스더가 욥기 이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이 누가복음 뒤에 배치되었을 수도 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가 요한복음보다 앞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고린도전후서가 요한복음보다 이전에 쓰였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후서가 골로새서보다 먼저 배치될 수도 있다. 골로새서는 데살로니가전후서가 기록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원본을 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과연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원본들로는 숫자 5가 죽음의 숫자라는 진리를 찾아낼 수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 대학의 교수들은 &lt;킹제임스성경&gt;의 장과 절을 보고도 이 진리를 찾지 못했다. 당신은 &lt;킹제임스성경&gt;이 전천년주의 신앙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는 진리를 찾아낼 수 있는가? 로버트슨, 메이첸, 와필드는 원본이 있든 없든, &lt;킹제임스성경&gt;의 이러한 진리를 찾지 못했다. 역대기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은 전천년적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도 그러하며,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바울 서신, 히브리-그리스도인 서신들도 전천년적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적어도 권위를 인정받은 &lt;킹제임스성경&gt;에는 그렇게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ASV, NASV, NIV, RSV 등을 만드는 데 썼던 헬라어 사본들에는 이러한 순서로 성경이 배열되어 있지 않다. “필사본 숭배자들”도 원본들이 그러한 순서로 배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br/><br/>또한 &lt;킹제임스성경&gt;에서 찾을 수 있는 숫자 13의 의미는 어떤가? 밥 존스 주니어는 필자가 이미 이러한 진리에 대해 &lt;짐승의 표&gt;라는 책에서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숫자를 사용하고, 20세기와 21세기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바와 같이 숫자에 대해 강박적인 집착을 보이는 시대라면, 과연 어떤 멍청이가 &lt;킹제임스성경&gt;에 계시된 숫자 체계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br/><br/>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왜 우리가 “축자적으로 영감”을 받았지만 현존하지 않는 원본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이유들이다. 우리는 지금 &lt;킹제임스성경&gt;을 손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거룩한 성경이고, 그 성경은 여러 면에서 다른 번역본들과 다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그 어떤 신학교에서도 ASV, NASV, NIV 등의 현대 번역본들이 로마카톨릭의 공식 예수회 성경(1582년)과 같은 성경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했다. 이 위선적인 학자들은 “럭크만주의”가 어떻고 “성경 숭배”가 어떻고 하면서 우리를 거짓 비난하면서도 이 진실을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우리는 &lt;킹제임스성경&gt;을 고수한다. 왜냐하면 이 성경은 미국과 유럽의 모든 기독교 신학교들과, 일반 대학, 대학원의 교수들, 즉 그 교수들이 보수주의든 근본주의든 신복음주의든 자유주의든 무신론을 따르든 상관없이 그들 모두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마모되고 사라진 원본들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lt;킹제임스성경&gt;은 소위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처럼 낡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현재 그 책을 가질 수 있도록 보존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 중 어떤 이들이 &lt;킹제임스성경&gt;을 좋아하지 않거나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31 Jan 2025 17:52: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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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탄을 벤치마킹한 가짜 목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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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당신은 소위 “목사”라는 이가 성도들에게 “사탄의 전략을 훔쳐보자.”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런데 그와 같은 글이 국민일보에 올라와 있어 소개한다. 「교회를 떠나기로 했다는 이에게 묻는다. “왜 교회를 떠나요?” “하나님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그럼, 정말 하나님을 안 떠날 수 있어요?” “글쎄...” “그런데 왜 떠나요?” “하나님은 교회를 떠나실 것 같지가 않아서...” 어린 왕자의 혼잣말이 이어진다. ‘어른들은 정말 골 때린다니까.’ 한 조사에 의하면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많단다. 3040세대 이탈율이 제일 높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그들의 언어로 교회는 후지다. 그들을 붙잡을 방법이 없을까. 간단하다. 사탄의 전략을 훔쳐볼 필요가 있다. 사탄은 아담이 아닌 하와를 유혹했다. 미래학자들은 진즉 3F시대가 온다고 예견했다. ‘여성(Female)’ ‘감성(Feeling)’ ‘상상력(Fiction)’이다. 으뜸은 ‘여성’이다. 사탄은 알았다. 아담보다는 하와가 타깃이었다.」 이 내용은 송길원 “목사”라는 이가 “어린 왕자가 교회에 간다면...”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칼럼을 발췌한 것이다. 송 목사는 「금단의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다. 미각을 자극하고 시각으로 유혹했다. 이어 ‘절대로’ ‘슬기롭게’라는 탐스러운 언어로 청각을 건드린다. 거기다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의 촉각도 함께한다. 오감 마케팅의 원조다.」라면서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비극”을 “교회 마케팅”의 본으로 제시했다. 이브를 유혹한 방식으로 교인들을 유혹하자는 것인데, 그는 교회가 3040세대를 유혹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목회자가 교인(구도자)들을 유혹하려면 “불교”와 “카톨릭”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떨까... 정확하게 오감 마케팅 전략을 갖고 있다. 산사(山寺)에 들어서 보라. 자연 풍광이 시선을 끈다. 녹색의 싱그러움이 있다. 사찰 초입엔 시냇물이 흐른다. 다리가 놓여 있다. 속세의 때를 씻고 들어서란다. 사원 건축의 기본이 되는 가람배치를 따른 것이다. 풍경 소리와 범종, 목탁 소리... 소리 공양이다. 생수와 함께 발우공양(鉢盂供養)이 있다. 차와 풀의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발끝에 닿는 흙과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시름을 달랜다. 오감의 유혹이다.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미사향, 그레고리안 찬트, 로사리움 묵주, 성찬이 그렇다. 최근 불교는 ‘나는 솔로’ 방송 프로그램을 차용한 ‘나는 절로’로 선남선녀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장미꽃 같은 3040세대, 교회의 정원을 가득 채울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번에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답해준다. “너의 장미꽃이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<br/><br/>교회와 불교, 카톨릭을 “구도자”의 관점으로 접근한 송 목사는 거듭나지 않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런 그가 언급한 &lt;어린 왕자&gt;는 비행사이며 작가인 생텍쥐페리가 1943년 발표한 동화로, “실존주의” 사상과 연결되는 작품이다. “실존주의”는 본질을 추구하기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철학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로 대표된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 주었던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무한의 자유이며, 이 허무의 바다에서 인간을 구출하는 것은 그의 결단이고 사회참여다.”라고 했다. 이 사상은 한마디로 “잃어버린 인간성을 찾자,” “그래도 인간이 할 수 있다” 정도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런 몸부림이 인간 세계에서 노정되는 현상과 문제에 대해 일부 설명이 가능하고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일시적, 한정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실존주의는 진리가 아니다.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골 2:8). 인간은 발전하는 문명 속에서 “인간 소외와 고독,” 전쟁의 참상 속에서 “인간의 잔혹함”을 보면서 자신의 죄악에 대해 심판을 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들은 늘 저지르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뿐이다(전 1:9,10).<br/><br/>청교도 목사 존 길(John Gill, 1697-1771)은 “타락한 인간이 철학을 지지할 때는 자신의 마음을 신으로 삼는다.”고 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잘 해 보려는 어린 왕자는 종교인이요, 철학자요, 인본주의자다. 철학자는 자기 두뇌를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로 숭상하는 우상 숭배자다. <br/><br/>세상 일간지에서 동화 속 철학자의 말이나 예찬한 송 목사는 마귀에게 미혹된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교회가 3040세대를 유혹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불교와 카톨릭의 “오감 마케팅 전략”을 벤치마킹하자고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브를 유혹했던 사탄이 오감 마케팅의 원조라면서 “사탄의 전략을 훔쳐보자”고까지 했다. 이 “골 때리는” 거듭나지 않은 자칭 목사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절간이나 성당을 기웃거리는 “구도자”로 보고 있다. 구도자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나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다. 구도자들이 진리에 도달하거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렇기에 송 목사 같은 이들에게는 기독교도 도(道)에 이르는 한 가지 방법이고, 불교나 카톨릭도 도에 이르는 여러 가지 방법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자들이 만나는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참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이다. 『그들 가운데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느니라』(고후 4:4). 그러한 자들이 이르는 곳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들이 가게 될 영원한 지옥임을 알아야 한다.<br/><br/>세상 종교들의 생각과 전통으로는 참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을 지으신 분을 계시하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엡 2:12) 죄인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어(계 1:5)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여, 자신이 죄로 인해 지옥에서 처절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면(롬 10:9,10), 바로 그 순간 성령님께서 그 죄인의 몸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의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 죄의 몸에 붙어 있던 혼을 몸에서 분리시켜 주시는 것이다(골 2:11). 그렇게 되면 그는 옛 사람(육신)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입게 되는데(골 3:9-11), 그의 영은 새 사람(예수 그리스도)과 합하여 한 영이 된다(고전 6:17).<br/><br/>성경적으로 이와 같은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으로 그 사람 안에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비록 그가 “목사”라 할지라도 지옥에 가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용어들을 사용해 가며 그리스도인들과 비슷하게 말하고 비슷하게 행동한다 해도, 그 사람은 주님께서 보실 때 죽은 자요, 마귀의 자식이며, 하나님의 원수에 불과한 것이다.<br/><br/>교회가 3040세대를 유혹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탄하는 자칭 목사는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재미를 못 느껴서 떠나는 자들은 그가 3040세대든, 5060세대든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감을 만족시킬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난 것이라면 그 사람은 마지막 날들에 육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교회 안의 죄인에 불과한 것이다.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1,2,4,5). 지역 교회는 결코 죄인들의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곳이 아니다. 죄인들에게 바른 말씀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역 교회의 사명이다. 세상 교회들과 그 교회들을 이끄는 가짜 목사들이 이 점을 알 수 있겠는가? 마귀들에게 제사하는(고전 10:20) 산사(山寺)의 자연 풍광, 녹색의 싱그러움, 사찰 초입의 시냇물과 다리, 사원 건축의 가람배치, 풍경 소리와 범종, 목탁 소리, 소리 공양, 발우공양, 또 역시나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계 18:2)인 카톨릭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미사향, 그레고리안 찬트, 로사리움 묵주, 성찬 같은 것이나 애찬하며 오감 마케팅을 가르치는 자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사이겠는가? <br/><br/>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추구해야 할 “오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갈보리 십자가와 죄인들이 불타는 지옥 그림이 그려진 “배너”(시각)와 죄인들에게 복음을 외치는 “거리설교”(청각), 거리의 행인들에게 나눠 주는 “전도지”(촉각), 그들이 읽고 맛보게 될 “하나님의 말씀”(미각), 그리고 복음의 말씀에서 흘러나오는 “지식의 향기”(후각)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거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죄인들을 주님께로 이겨오고, 그들을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로 인도하여 양육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오감 마케팅이다. 교회들이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다가 절간에도 가 보고 성당에도 들러 보는 지옥의 자식들을 양산하는 곳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03 Jan 2025 08:21: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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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재창조의 절정 “영원 세계”</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7/%EC%9E%AC%EC%B0%BD%EC%A1%B0%EC%9D%98-%EC%A0%88%EC%A0%95-%EC%98%81%EC%9B%90-%EC%84%B8%EA%B3%84/</link>
<description><![CDATA[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우주를 “재창조”하셨다. 마지막 날들의 조롱하는 자들은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고 하면서 재창조의 교리를 비웃지만, 이는 그들이 고의로 잊으려 하는 것일 뿐이다(벧후 3:3-5).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벧후 3:5,6). 베드로후서의 이 말씀은 거짓 교사들의 착각처럼 “노아의 대홍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9,10”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창세기 1:1에서 창조된 “땅”은 루시퍼의 반역으로 우주적인 홍수 심판을 받아 깊음이라 불리는 큰 물 속에 잠겼었는데(『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 창 1:2), 창조주께서는 그 깊음의 물들 가운데에 “창공”을 만들어 깊음을 “창공 위에 있는 물들”과 “창공 아래 있는 물들”로 나누셨다(창 1:7). 그 물들이 위아래로 물러가면서 드러난 “마른 곳”을 “땅”이라고 부르셨으니,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벧후 3:5)는 바로 그런 뜻이다. 즉 창세기 1:1에서 창조된 “땅”이 심판으로 물에 잠겼다가 그 물이 물러감으로써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br/><br/>사도 베드로가 “물이 범람해서 멸망했다”고 한 “이전 세상”은 기름부음 받은 덮는 그룹인 루시퍼의 반역(겔 28:14-16, 사 14:12-14)이 있기 전의 세상을 가리킨다. “이전 세상”이 심판을 받고 새롭게 재창조되었으니 재창조된 세상을 다스려야 할 “아담”에게 “땅을 다시 채우라”고 명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그러나 창조주의 “재창조”는 물리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현 교회 시대에 죄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영적 재창조”도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죄인의 “새로운 출생”을 뜻하는 이 “영적 재창조”는 교회의 휴거 때 몸이 구속받는 초자연적인 변화로까지 이어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형태로 변모되는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된다(롬 8:23,29, 빌 3:20,21, 요일 3:2).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앞으로 놀랍기 그지없는 “영적 재창조”의 결과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조롱당하고 있는 “재창조”의 교리는 성경에 계시된 명백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한 번만 창조하시고 그 뒤에 또다시 창조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망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역사를 인간의 편견 속에 가둬 두려는 오만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때의 재창조 외에도 미래에 또 한 번의 재창조를 예고하시는데, 바로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펼쳐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 세계”다. 이 영원 세계를 재창조하시려면 또다시 “이전 세상”을 심판으로 없애야 하시는데, 그 점이 베드로후서 3장에 계시되어 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앞서 언급한 “5,6절”과 더불어 우주 역사에서 “두 차례의 재창조”를 계시하는 매우 중요한 장이다.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니라...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내릴 것이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벧후 3:7,10,12,13). 이처럼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에 녹아내리면” 큰 백보좌 심판이 펼쳐져(『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 - 계 20:11), 모든 시대의 모든 죄인을 불못에 던져 넣으실 것인데, 그러면 이사야 66:22에서 예언하신 『내[주]가 만들 새 하늘들과 새 땅』의 영원 세계가 창조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계 21:1). 사탄과 마귀들이 더 이상 미혹하지 않고 온 우주가 의로 가득할, 하나님께서 굳게 약속하신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벧후 3:13)의 영원 세계, 당신은 이 경이로운 세계를 고대하며 열망하고 있는가! <br/><br/>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21,22장)은 “재창조”의 절정이자 예언의 절정이다. 인류를 “유대인”과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고전 10:32)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신 하나님께서는 영원 세계의 인류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나누신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영역도 분리되어 있으며, 유대인에게는 “새 땅”을, 이방인에게는 “새 하늘”을,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에게는 “새 예루살렘”을 할당하시어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이다.<br/><br/>새 땅<br/><br/>“유대인”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을 통해 “땅”을 약속받은 민족이다. 『그 날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세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씨에게 주었으니, 켄인들과 크니스인들과 캇몬인들과 힛인들과 프리스인들과 르파인들과 아모리인들과 카나안인들과 기르가스인들과 여부스인들의 땅이니라.” 하시니라』(창 15:18-21, cf. 창 12:7). 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 주어진 땅은 『영원한 언약』(창 17:7)을 통해 주어진 것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원한 소유』(창 17:8)가 되었으며, 또 『영원한 언약』이기에 천년왕국을 넘어 “영원 시대”라고 불리는 “영원 세계”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는 그가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롬 4:13)이 주어졌는데, 아브라함과 그의 씨가 “영원한 소유”로서 약속받은 『세상』은 “불타 없어질 현재의 땅”이 아닌 미래에 창조될 “영원한 새 땅”이다. 현재 있는 땅은 천년왕국 끝에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살라지기에(벧후 3:7,10, 계 20:11), 아브라함과 그의 육적 후손인 유대인들은 새롭게 창조될 “새 땅”을 『영원한 소유』로서 상속받을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새 땅(new earth)의 상속자”가 되어 “새로운 지구”의 영원한 소유자가 될 것인즉, “새 땅”은 온 우주의 수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영원하고 독특한 위상을 보여 줄 것이다.<br/><br/>새 하늘<br/><br/>“이방인”에게는 “새 하늘”이 주어지고, 그들은 새 땅에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열두 민족”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민족들을 그들의 유업으로 나누셨을 때, 그분께서 아담의 아들들을 분리시키셨을 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으니』(신 32:8). 영원 세계에서의 이방인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 기간에 “구원받은 자들”로 구성된 “민족들”로서, 그 민족들에는 그들이 낳을 자손들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열둘”로 『그들이 거주하는 경계를 정하셨』다(행 17:26). “열두 민족”으로 있게 될 그들은 『새 예루살렘』(계 21:2)에 있는 “열두 대문,” 즉 각 민족이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신 대문들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 열두 대문에는 열두 천사가 서 있고 문들에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계 21:12)이 기록되어 있다. 이방 민족들은 그들의 왕과 함께 자기 민족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영원히 열려 있는 성문들을 통과해 새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 가운데서 걷겠으며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그곳으로 가져오리라. 또 그곳의 성문들을 낮에는 결코 닫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곳에 밤이 없음이라. 그들이 민족들의 영광과 존귀를 그곳으로 가져오리라』(계 21:24-26). 이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영원한 몸”을 갖고 있지 않기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처럼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는데, 이 권리는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계명들”을 행함으로써 취득한 것이다.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계 22:14).<br/><br/>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이방 민족들이 후손을 낳다 보면 “새 땅”이 포화 상태가 될 터인데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법은 간단하다. “새 땅”을 벗어나서 우주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 점을 신명기의 말씀에서 계시하고 있다. 『또 네가 네 눈을 하늘로 들어 태양과 달과 별들, 즉 하늘의 모든 군상을 보고 그것들을 경배하고, 그것들을 섬기도록 이끌려서는 안 될지니, 그것들은 주 너의 하나님께서 온 하늘 아래 모든 민족들에게 나누신 것이니라』(신 4:19). 천년왕국이 끝난 뒤에 “열두 민족”은 일차적으로는 유대인과 함께 “새 땅”에서 살 것이고, 그 땅이 인구로 포화 상태가 되면 “새 하늘”의 “열두 별자리”로 이주할 것이다(현재 “황도 12궁”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대인들도 번성하면(렘 33:19-22) 다른 민족들과 함께 외계로 나갈 것인데, 영원에서도 그들은 모든 민족들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신 28:13, 출 19:5,6). 우주로 뻗어나간 열두 민족 각각에게는 열두 별자리 중 하나가 할당되고, 각 민족과 짝이 되는 이스라엘 특정 지파가 그 별자리의 중심에 살면서 이방인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처럼 “새 하늘”은 영원 세계의 이방인들에게 주어질 이방인들의 영원한 거처이다. <br/><br/>새 예루살렘<br/><br/>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새 예루살렘”을 받게 된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우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 4:26). “새 예루살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 출처”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에(요 1:13)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빌 3:20), 기원 자체가 셋째 하늘인 하늘의 시민들이다. 이 하늘의 시민들이 영원히 거할 도성인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요 “어린양의 아내”라고 불린다. 『나 요한은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같이 예비되었더라』(계 21:2). 『“이리 오라, 내가 너에게 신부인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주리라.” 하고, 그가 영 안에서 나를 이끌어 크고 높은 산으로 가서 그 큰 도성 거룩한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가는 것을 내게 보여 주니』(계 21:9, 10).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처럼 “어린양의 아내”라고 불린다(계 19:7). 따라서 영원에서 “새 예루살렘”(건축물)은 “교회”(그리스도인들)와 “일체”인 것인데, 그렇기에 “교회”(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성전”이라 불리는 한 “건물”(엡 2:20-22)을 구성하는 “살아 있는 돌들”(벧전 2:5)로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br/><br/>“새 예루살렘”은 오순절부터 휴거 때까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곳이다. 신부인 교회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롬 14:17)를 유업으로 받기에, 신부가 상속받는 새 예루살렘에는 “물리적인” 성전이 없다. 그 대신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그곳의 성전』(계 21:22)이 되실 것이며, 또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안에』(계 22:3) 있어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을 비추고 어린양이 그곳의 빛이』(계 21:23) 되실 것이기에 해나 달이 도성 안에서 비칠 필요가 없게 된다. 밤이 없는 그곳에 촛불도 햇빛도 필요치 않은 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이』다(계 22:5).<br/><br/>“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 나오는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 양편과 그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과실을 맺으며 달마다 과실을 낼 것인데,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아들의 형상과 일치』한(롬 8:29)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불완전한 몸을 지닌 민족들을 치유하는 데 쓰인다(계 22:1,2). 이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은 새 예루살렘 도성의 빛 가운데 걸으면서(계 21:24)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할 것이다.<br/><br/>“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도성의 광채가 가장 귀한 보석 같고 벽옥 같으며 수정같이 맑을 뿐만 아니라, 그 기초석이 각양 보석으로 단장된 크고 높은 성벽에 열두 대문이 동서남북으로 세 개씩 나 있다(계 21:11-13,19). “새 예루살렘”은 그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동일하게 12,000스타디온(2,400km)으로 이중 피라미드 형태이다. 이 정도 크기면 도성 안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80억 명”(교회사 2천 년 동안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으로 추산했을 때 그들 각자에게 1,575,000,000m3의 공간을 선사한다. 이렇게 해도 약 1.4 × 1018m3의 공간이 남는데, 이 남는 공간은 공원과 호수, 광장, 하나님의 보좌, 생명수의 강, 생명 나무가 있는 큰 숲을 위한 곳이 될 것이다. 죄 없고 완전한 존재들이 영원한 기쁨으로, 영원한 평안과 영원한 행복과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계 22:4) 완전한 교제 가운데 영원토록 다스리는 새 예루살렘은 실로 엄청난 도성인 것이다!<br/><br/>재창조의 절정인 “영원 세계”는 저주가 없기에(계 22:3) 사망, 슬픔, 울부짖음, 고통이 없고(계 21:4), 그리스도인들이 천년왕국 통치를 넘어 영원히 통치할 세계이다(단 7:14,18, 계 22:5). 태초에 계신 『말씀』(요 1:1)으로서 삼위일체로 복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영원한 왕국』(단 7:27, 벧후 1:11)에서 『영원한 왕』(렘 10:10)으로서 『영원한 영광』(고후 4:17, 벧전 5:10) 가운데 통치하실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엡 1:20) 있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주님과 함께 『신격』(골 2:9) 안으로 들어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통치하는데, 그러면 “영원한 영광의 비중”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면서, 지상에서 “잠시 받은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룬 것을 알고서(고후 4:17) 주 예수께 무한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릴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03 Jan 2025 08:19:3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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