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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박승용 목사 칼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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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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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늘에서 내려오는 “주의 군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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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다. 왕국에는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있고, 왕은 통치자이자, 군대 대장으로서 “군대”를 통솔한다. 하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시기에 친히 군대를 거느리신다. 성경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장』(히 2:10)이시며, 『전사』(출 15:3)이시자, 『용사』(사 42:13)이시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만군의 주”(245회), “만군의 하나님”(11회), “만군의 주 하나님”(29회)으로 자주 언급된다. 단 하나의 군대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군대,” 곧 “만군”(hosts)의 주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늘에 “만군”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일들이 저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군대”와 “사탄의 군대”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br/><br/>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저 하늘에 “군대”를 두고 계신다. “하늘의 군대”(단 4:35; 8:10)는 하나님의 천사들로 편성되어 있다. “야곱”은 “마하나임”이란 곳에서 “하늘의 군대”를 보았다. 『야곱이 그의 길을 계속 가더니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만났더라. 야곱이 그들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창 32:1,2). 하나님의 천사들로 편성된 하나님의 군대를 본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하나님께 간구해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임을 밝히셨다(마 26:53). 한편 아모스 9:6에 따르면 이 땅에도 하나님의 군대가 있다.<br/><br/>&nbsp;“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였다(삼상 17:26,36). 이스라엘은 출애굽 할 때부터 “이집트” 땅에서 『군대들대로』(출 12:51) 나왔다. 『사백삼십 년의 끝, 즉 그 날이 되었을 때 주의 모든 군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더라』(출 12:41). “여호수아의 군대”와 “기드온의 삼백 용사,” “다윗의 군대” 등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편성된 하나님의 군대가 어떤 군대인지 알 수 있다. 역대기상 12:22에서는 “다윗의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 같았다고 말씀한다. “신약 시대”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군대”로 편성되어 있다.<br/><br/>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늘에서 내려오게 될 “주의 군대”는 “시온,” 곧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등장한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내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내어 그 땅의 모든 거민들로 떨게 하라. 이는 주의 날이 오며 그 날이 가까움이라』(욜 2:1). 『그 날』을 가리켜, 스파냐 1:16에서는 『방벽 친 성읍들과 높은 망대들을 향한 나팔과 경고의 날이라.』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은 진영들이 이동할 때 『경고 나팔』(민 10:5,6)을 불었다. “여리코 성읍”을 함락시킬 당시에도 『일곱 양뿔 나팔』(수 6:4)을 불어서 적진을 향해 “그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선포했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주의 군대가 내려올 때 이 “경고의 나팔 소리”를 냄으로써 땅의 모든 거민들을 떨게 만드는 것이다.<br/><br/>요한계시록 7-11장에서는 “환란 기간”에 천사들이 “일곱 나팔”을 분다. 이 “나팔들”은 환란 시대에 이 땅에 임할 재앙을 알리는 “경고의 나팔들”로서, “교회 시대”와는 전혀 무관하다. 특히 여섯 개의 나팔이 모두 불린 다음, 일곱째 천사가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을 불면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계 11:15) 들리게 된다. 이것은 “교회 시대의 휴거”처럼 누군가를 불러올리는 음성들이 아니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것, 곧 “이 세상 나라들을 통치하기 위해 지상에 재림하시는 것”을 선포하는 음성이다.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분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라』(계 11:15). 바로 이때 그 “경고의 나팔 소리”와 함께 주의 군대가 주님을 뒤따라 내려오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일곱 번째 천사가 부는 나팔은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내어 그 땅의 모든 거민들로 떨게 하라.』라는 “요엘 2:1의 말씀”과 잘 어울린다.<br/><br/>또한 “주의 군대”가 등장하는 시기를 보면, 성경은 『흑암과 암영의 날, 구름과 짙은 어두움의 날이 산들 위에 펼쳐진 아침』(욜 2:2) 같다고 말씀한다. 말하자면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말 4:2) 솟아오를 “재림의 아침”에 셋째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의의 태양』은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교회 시대”를 상징하는 “밤”의 “네 번째 경점,” 곧 『제사경』(마 14:25)인 “아침 경점”에 재림하신다. 『만일 우리가 계속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 우리가 알게 되리라. 그의 나오심은 아침처럼 마련되어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비처럼 오시리니, 땅에 내리는 늦은 비와 이른 비처럼 오시리라』(호 6:3). <br/><br/>이 구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 온 후의 아침”에 “비”처럼 오실 것인데, 실제로 재림 직전 대환란 끝 무렵에 엄청난 양의 “비”가 이 땅에 쏟아질 것이다. 사실 “대환란 기간”에 사역하게 될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을 닫는 권세가 있어서 그들이 예언하는 날[3년 6개월, 42개월, 1,260일, 계 11:2,3] 동안 비를 오지 못하게』(계 11:6) 할 것이다. 그로 인해 극심한 가뭄이 이 땅에 임할 것이다. 그러나 대환란이 끝나갈 무렵, 곧 재림 직전에 가물었던 이 땅에 비가 내리게 된다. “구약 시대”의 “엘리야의 사역”이 다시 한번 반복되는 것인데, 그 당시에는 그동안 내리지 않았던 비가 한꺼번에 쏟아져서 “큰 비”가 내렸다(왕상 18:45). 이와 관련하여 요엘 2:23에서는 『비를 내려 주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첫째 달에』 “한 번에” 『내리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br/><br/>바로 그때 “주의 군대”가 내려올 것인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온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이 땅에 임하게 된다. 『많고 강한 사람들이라. 이 같은 일은 전에도 없었고, 또 이후, 곧 많은 세대들의 연수에까지도 다시 없으리라』(욜 2:2). 이 땅의 그 어떤 군대도 “주의 군대” 앞에 감히 맞설 수 없다. 『불이 그들 앞에서 삼키며 그들 뒤에서는 화염이 불타는도다. 그 땅은 그들 앞에서는 에덴의 동산 같으나 그들 뒤에는 황량한 광야 같으니, 정녕, 어떤 것도 그들을 피하지 못하리라』(욜 2:3). 이 “초자연적인 군대” 앞에서 그 주변이 완전히 “불바다”가 되는 것이다. <br/><br/>특히 『그들의 모양은 말들의 모양 같고 그들은 마치 기병들처럼』(욜 2:4) 달리며, 『그들이 뛰는 것은 산꼭대기들에 있는 병거들의 소리 같고, 그루터기를 삼키는 불꽃 소리와도 같으며, 전열에 배치된 강한 백성』(욜 2:5)과 같다. 재림 때 이 땅에 내려올 주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희고 정결한 세마포를 입고 흰 말들을』(계 19:14) 탄 “기병들”이다. 이러한 기병들에 대해 하박국 3:8에서는 『주께서 주의 말들과 주의 구원의 병거들을 타셨나이까?』라고 말씀하고, 하박국 3:15에서는 『주께서는 주의 말들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 무더기[“깊음”이라 불리는 “유리 바다”]를 통과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한다. 또한 솔로몬의 노래 6:12에서는 『암미나딥의 병거들』이라고 했으며, 시편 68:17에서는 『하나님의 병거는 이만이요, 천사들도 수천이라.』라고 말씀한다. “주의 군대”는 열왕기하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호위하기 위해 나타난 『불말들』(2:11)과 『불병거들』(6:17)로 편성된 군대임이 분명하다.<br/><br/>이처럼 강력한 군대 『앞에서 백성은 심하게 아픔을 당할 것이며 모든 얼굴들은 새까맣게』(욜 2:6) 될 것이다. 이것은 핵폭탄이 폭발할 때 그 반경 내에 있는 사람들의 피부가 벗겨지고 살이 썩으며 얼굴이 새까맣게 타 버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주께서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싸운 모든 백성을 치실 재앙이 이러하리니, 그들이 그 발로 서 있을 때에 그들의 살이 녹아 없어질 것이요, 그들의 눈이 그 구멍 속에서 녹아 없어질 것이며, 그들의 혀가 그 입에서 녹아 없어질 것이라』(슼 14:12). 『니느웨는 비어 있고 공허하고 황폐하게 되었으며 마음이 녹아내리고 무릎이 서로 부딪치며 모든 허리에 심한 통증이 있으며 그들의 얼굴은 모두 다 검게 되는도다』(나 2:10). 이상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재림 때 “적그리스도의 군대”가 맞이할 “비참한 최후”를 보여 준다. 그날에 “적그리스도” 역시 2억 명의 『기병대』(계 9:16)를 동원하여 주의 군대에 맞서 싸울 것이지만, 그들은 맥없이 무너지게 된다.<br/><br/>『그들은 용사들같이 달릴 것이며 그들은 전사들같이 성벽을 기어오를 것이요, 그들은 각기 자기의 길로 행군할 것이나 그들은 그 대열을 흩뜨리지 아니하리라』(욜 2:7). 이렇듯 주의 군대는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정예화된 군대”이다. 이러한 모습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코 성벽”이 함락되었을 때, 무너져 내린 성벽의 돌무더기를 넘어 곧장 자기 앞으로 달려갔던 상황을(수 6:5,20) 생각나게 한다. 이 군대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밀치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은 각기 자기 길로』 걸을 것이고, 또 『그들은 칼 위에 쓰러져도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다(욜 2:8).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처럼 “초자연적인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전혀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이다.<br/><br/>특히 『그들은 성읍 안에서 이리저리 달릴 것이며, 그들은 성벽 위를 달릴 것이요 집들 위를 기어오르며 그들은 도둑처럼 창문들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욜 2:9).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훔쳐 가고 빼앗는 도둑은 “사탄”이지만, 재림의 맥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도둑”으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그날에 주님께서는 『도둑같이』(계 16:15)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24:43, 살전 5:2).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군대 역시 『도둑처럼』 성벽을 넘나들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을 파괴하게 된다.<br/><br/>『땅이 그들 앞에서 흔들리며 하늘들이 떨고 해와 달이 어두워지며 별들이 그들의 빛을 거두리라. 주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그의 음성을 발하시리니, 이는 그의 진영이 매우 크고 그의 말씀을 실행하는 분은 강하심이라. 주의 날이 위대하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그것을 견뎌 낼 수 있으리요?』(욜 2:10,11) “주의 군대”는 셋째 하늘에서부터 주님을 뒤따라 “깊음”(유리 바다)을 통과하여 온 우주를 가로질러 내려올 것이다. 바로 『하늘의 기둥들』(욥 26:11)을 흔들면서 말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행군이 될 것이다. <br/><br/>저 멀리 보이던 지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이제 대기권에 진입하여 구름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저 “칼멜 산” 아래쪽 “키손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므깃도 계곡” 위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에는 새까맣게 포진해 있는 “적그리스도의 2억의 군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곧 지상 최대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지만, 이 전쟁은 순식간에 끝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군대”를 이끄시는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만왕의 왕께서는 이 대적들을 단시간에 짓밟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라』(계 19:15).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Aug 2026 10:51:0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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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를 삭제</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D%95%98%EB%82%98%EB%8B%98%EC%9D%98-%EB%AA%A8%EB%93%A0-%EB%A7%90%EC%94%80%EC%9C%BC%EB%A1%9C-%EC%82%AC%EB%8A%90%EB%8B%88%EB%9D%BC%EB%A5%BC-%EC%82%AD%EC%A0%9C/</link>
<description><![CDATA[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셨을 때, “사탄”을 이기신 방법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여...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마 26:53)을 오게 하심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실 수도 있었다. 또는 그분의 “신성,” 곧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여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영』(살후 2:8), 곧 『입에서 나오는 칼』(계 19:21)이나 “권위 있는 말씀 한마디”로 “시험하는 자”인 “마귀”를 무찌르시고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던져 버리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섬기는 영들인 “천사들”이나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았고, 오직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마 4:4,7,10)라고 말씀하시며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만을 사용하셨다.<br/><br/>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시험”에 대해 결코 수사학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대처하시지 않았으며, 화려한 웅변이나 말솜씨로 대적하시지 않았다. 그저 “성경의 본문들”을 선정해서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셨을 뿐이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매끄러운 돌 다섯 개』와 『물매를 가지고』 그 거인에게 다가가(삼상 17:40), 『자루에 손을 넣어 거기서 돌 하나를 꺼내어 물매를 던져』(삼상 17:49) 이마를 쳐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려고 성령의 인도로 광야』(마 4:1)로 가셨을 때, “구약 성경 39권의 말씀들”을 그분의 머리와 마음속에 모두 챙겨 가셨으며, 또 “말씀의 자루”에 손을 넣어 마귀의 “세 가지 시험”에 부합하는 “세 개의 돌들,” 즉 “신명기 8:3,” “신명기 6:13,” “신명기 6:16”을 차례로 꺼내어 마귀를 향해 빠르고 정확하게 던지셨고, 그 강력한 말씀들로 마귀에게 치명상을 입히신 것이다.<br/><br/>『하나님의 모든 말씀』(눅 4:4)은 『성령의 칼』(엡 6:17)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언제나 이 “칼”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도,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을 때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일하거나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여가를 즐기거나 여행을 할 때도, 지체들과 함께 있거나 예수님처럼 광야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에도 항상 “성령의 칼”을 몸에 차고 다녀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칼을 제때에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언제 어디에서 어떤 대적을 만나더라도 이 “칼”을 신속하게 빼서 눈앞에 있는 대적을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먼저 마귀를 베지 않으면, “적들의 칼”에 여러분이 먼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칼”로 정확하고 강력하게 마귀를 찌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이 “성령의 칼”을 손에서 내려놓지 말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다른 칼”로 바꿔 쥐지 말라. 오늘날에는 이 “칼”을 제멋대로 바꾸려 하고, 또 실제로 바꿔 버린 “성경 변개자들”이 많다. 심지어 한글로 올바르게 보존된 성경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흉내 내는 짝퉁 칼잡이들도 많다. 그런 모조품 따위로는 결코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없고, 마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없다!<br/><br/>변개된 한글 성서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에 승리하신 장면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눅 4:4)라는 말씀을 삭제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주님이 “신명기 8:3,” 곧 『이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의 일부분을 빠뜨리신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가증스러운 죄”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시니라.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라. 그분이 너를 책망하실까 함이며, 네가 거짓말쟁이가 될까 함이라』(잠 30:5,6). 올바르게 보존된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이 “변개된 성서들”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라!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시더라[And Jesus answered him, saying, It is written, That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of God. - KJB]』(눅 4:4).<br/><br/>「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개역개정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개역한글판성경). 이 “변개된 성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한 것도 모자라 “빵”을 “떡”으로 오역했다. “빵”(bread)과 “떡”(rice cake)의 차이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떡”에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반면, “빵”에는 무조건 들어간다. “누룩”의 “핵심 성분”이 없으면, “부드럽고 부푼 빵”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교절”에 관한 규례를 제시하실 때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고 명령하셨다. <br/><br/>『같은 달 십오일은 주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누룩 없는 빵[unleavened bread]을 먹을지니라』(레 23:6). 그런데 “개역개정판”과 “개역한글판성경”은 도저히 “누룩 없는 떡”이라고 번역할 수 없었는지, 아주 교묘하게 “한자어”를 활용하여 “무교병”(無酵餠, “병”은 “떡”을 가리킴)이라고 번역했다. 자기들도 “누룩 없는 떡”이라는 표현이 말도 안 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한 변개된 성서들의 실태를 보라!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표준새번역).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쓰여 있다.”」(현대인의성경).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쉬운성경). 「Jesus answered, “It is written: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NIV).<br/><br/>“성경 변개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눅 4:4)라는 말씀을 삭제한 근거로 제시하는 사본들은 “파피루스 75”(P75, 2-4세기), “시내 사본”(알렙, 4세기), “바티칸 사본”(B, 4세기), “워싱턴 사본”(W, 4-5세기), “코덱스 레기우스”(L, 8세기) 등이다. 말하자면 “오래된 사본들”이기 때문에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사본”이라고 해서 무조건 “최상의 본문”이요, “올바르게 보존된 본문”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오래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사본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을 만큼, “많은 부분이 변개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방증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도 사용하지 않다 보니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br/><br/>미국 “달라스신학대학원”에서 27년 동안 “원문비평학 교수”로 재직했던 “제인 하지스”(Zane Hodges, 1932-2008)는 변개된 성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험할 정도로 ‘반계몽적’이 아니라면, 끔찍할 정도로 ‘비과학적’이다. 그동안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가 ‘더 나은 사본’ 또는 ‘더 오래된 사본’을 가지고 &lt;킹제임스성경&gt;의 본문을 고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 왔다... 이 분야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성도들은 그런 내용에 대해 설명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수용해 버리고 말았다.”<br/><br/>“가장 오래된 사본들”(87,000개)을 면밀하게 검토한 “존 버간”(John Burgon, 1813-1888)은 “변개된 성서들”을 만들어 낸 자들이 “헬라어 표준원문”에서 제멋대로 바꾼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범한 성경 독자들은 바뀐 내용들이 성경 개정자의 ‘번역 기술’에서 나온 것, 즉 ‘헬라어를 연구한 결과’로 얻어진 ‘진전된 결과물’일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보다 더 비과학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바꾼 부분들은 그들이 만든 작품을 망가뜨리는 것이며, 그들 대부분이 헬라어에 대해 불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br/><br/>“시카고대학교”의 “원문비평학 학자”였던 “어네스트 콜웰”(Ernest Colwell, 1901-1974)은 변개된 성서들의 본문이 지닌 “신뢰도”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학자들은 대부분의 오류들이 고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신약의 본문이 여러 가지로 나오게 된 것은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들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번역이 나온 것은 그들이 부주의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임을 폭로하는 많은 저술들이 시중에 인쇄되어 나와 있다.”<br/><br/>한편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눅 4:4)라는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사본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본”(A, 5세기), “베자 사본”(D, 5,6세기), “코리데티 사본”(세타, 9세기), 그리고 전체 사본의 80-90%를 차지하고 있는 “비잔틴 계열”의 “다수 필사본”(9-14세기)이다. 압도적인 수의 사본들이 그 말씀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피터 럭크만”(Peter Ruckman, 1921-2016)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마귀는 당신이 당신의 무기를 사용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당신의 무기를 제거하고 싶어 한다.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변개된 성서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누가복음 4:4의 마지막에 나오는 단어들을 제거해 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라는 말씀을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성경 번역자들과 개정자들은 당신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갖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그 말씀들을 제거해 버린다. ‘NIV’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중에서 64,000개의 단어를 제거해 버렸고, ‘NASV’는 36,000개의 단어를 제거해 버렸다.”<br/><br/>사탄과의 무서운 결투가 벌어질 때 가장 훌륭한 칼과 방패는 “기록된 말씀”이다. 마귀의 속임수가 너무 간교한가? 그가 내미는 은밀한 제안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가? 마귀가 아주 그럴듯하게 노련하고 교활한 지성으로 다가오는가? 신성모독적인 주장과 마귀적인 비난으로 여러분의 감정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가? 이 모든 공격을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흠뻑 젖어 살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라.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항상 여러분의 옆구리에 ‘기록되었으되’라는 무기를 차고 있어야 한다. 영적 전쟁이 시작되면, 주님과 그 확실한 약속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시선을 돌리라. 처음에 맹공격을 당할 때, 어떤 성도는 즉시 모든 소망을 다 포기할 생각부터 한다.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행동하지 말라! 오히려 적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고 손에 들려 있는 강력한 무기를 바라보라. 그 무기는 구부러지거나 날이 무디어지지 않는 무기이다. 그 무기를 사탄의 심장에 찔러 넣으라. ‘기록되었으되’라는 무기가 혼과 영을 찌르고 ‘옛 뱀’인 ‘리비야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히 4:12) 가르는 “강력한 무기”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Aug 2026 09:43: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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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성경의 역사 (2)</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D%95%98%EB%82%98%EB%8B%98%EA%BB%98%EC%84%9C-%EB%B3%B4%EC%A1%B4%ED%95%98%EC%8B%A0-%EC%84%B1%EA%B2%BD%EC%9D%98-%EC%97%AD%EC%82%AC-2/</link>
<description><![CDATA[인류의 “역사의 중심”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책”인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실 때 “유대인들”을 사용하셨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모든 면에서 많으니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이 맡겨졌음이니라』(롬 3:1,2). 특히 “구약 성경”을 보존하실 때 “아론의 계열”을 따라 임명된 유대인 “제사장들”을 들어 쓰셨다. 그들을 인도하셔서 “구약의 흩어진 필사본들”을 모으게 하셨고 그 내용이 변개되지 않도록 지키신 것이다. 이렇게 정착된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까지 순수한 본문을 유지했고, A.D. 70년경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유대 땅”을 벗어나 “아라비아”에서 보존되었다. 그리고 “모슬렘”이 “스페인”을 침공한 다음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경유하여 “모슬렘”과 “유대인”에 의해 “독일”을 위시한 “유럽”으로 전수되었다.<br/><br/>무엇보다도 “모세 벤 나흐만”(Moses Ben Nachman, 1194-1270) 같은 “성경대로 믿는 유대인들”에 의해 “구약 성경 본문”이 온전히 보존되었다. 한편 초기의 “유대인 서기관들”을 “타나임”(Tannaim, “반복하는 자들” 또는 “가르치는 자들,” 1,2세기경)이라 불렀는데, 이들 서기관들은 구약 성경을 정확하게 필사했다. 이러한 작업은 그 이후에 등장한 또 다른 그룹의 서기관들, 곧 “아모라임”(Amoraim, “해설자들,” 3-5세기경)에게 전수되었고, 이들 다음에는 6-10세기경에 활동했던 “마소라들”(Masoretes, “전통주의자들”)이 그 사역을 계승했는데, 이들에게서 구약의 “히브리어 마소라 원문”(Hebrew Masoretic Text)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필사상의 오류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했는데, 일례로 구약 성경을 필사할 때 각 책에 나오는 글자 수, 단어 수, 가운데 위치한 글자까지 세어 가며 단 하나의 철자도 틀리지 않게 검수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소한 문법적 오류나 오탈자조차 철저히 차단함으로써 본문의 순수함과 정확성을 완벽하게 지켜 냈다.<br/><br/>한편 “마소라들”은 “바빌론”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동방 마소라들”과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주로 “티베리아”에서 활동했던 “서방 마소라들”(“티베리아 마소라들”)로 나뉘는데, 이 중에서도 “티베리아 마소라들”에 의해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이 잘 보존되었다. 또한 “티베리아 마소라들”은 “벤 납달리(Ben Naphtali) 가문”과 “벤 아세르(Ben Asher) 가문”으로 나뉘는데, 그중에서 “벤 아세르 가문”에 의해 “올바른 원문”이 전수되었고, 그 대표자가 다름 아닌 “모세 벤 아세르”(Moshe Ben Asher)였다. 특히 A.D. 895년에 출간된 “모세 벤 아세르”의 “히브리어 마소라 원문”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수용되었는데, 바로 이 “히브리어 원문”을 가리켜 “코덱스 카이렌시스”(Codex Cairensis)라고 부른다.<br/><br/>이후 시간이 흘러 성경이 인쇄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이처럼 “인쇄된 마소라 원문”을 “전통 원문”(Traditional Text)이라 불렀다. 처음으로 인쇄된 성경은 1477년에 출간된 “시편”이었으며, 1488년에는 “구약 성경 전체”가 초판(제1판)으로 인쇄되었다. 뒤이어 1491년에는 제2판이, 1494년에는 제3판이 각각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출간된 “구약 성경 본문”은 “스페인”의 추기경이자 정치가인 “히메네스”(Ximenes, 1436-1517)가 제작한 “콤플루텐시아 폴리그롯”(Complutensia Polyglot)으로 보존되었다. 이후 1524-1525년에는 “야곱 벤 하임”(Jacob Ben Hayyim, 1470-1538)이 편집하고, 유명 인쇄업자 “다니엘 봄베르그”(Daniel Bomberg, 1483-1549)가 “베네치아”에서 출간한 “야곱 벤 하임의 마소라 원문”(“제2랍비 성경”)이 등장했다. 이처럼 “올바르게 보존된 구약 성경 본문의 맥”은 “모세 벤 아세르의 히브리어 마소라 원문”과 “히메네스”가 편집한 “콤플루텐시아 폴리그롯,” 그리고 “야곱 벤 하임의 마소라 원문”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 본문이 1611년 &lt;킹제임스성경&gt;의 번역자들에 의해 “구약 번역”을 위한 히브리어 저본(底本)으로 수용되었다. 다시 말해 “히브리어 구약 원문”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섭리로 보존되어, 신실한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 등의 유대인들을 통해 참된 성도들의 손에까지 전수되었으며, 종국에는 &lt;킹제임스성경&gt;으로 온전히 집약된 것이다.<br/><br/>1611년 이후에도, 성경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히브리어 구약 원문”이 올바르게 전수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독일”의 신학자요, 저명한 히브리어 학자인 “요한 미카엘리스”(John Heinrich Michaelis, 1688-1738)와 “영국” 역사상 최고의 마소라 학자로 손꼽히는 “크리스천 긴즈버그”(Christian David Ginsburg, 1831-1914)가 있었다. 특히 “긴즈버그”는 1894년에 “야곱 벤 하임의 마소라 원문”(1524-1525)을 그대로 출간했다. 또한 1906년에는 “독일”의 “구약 성경 학자”인 “루돌프 키텔”(Rudolf Kittel, 1853-1929)이 “히브리어 성경(BHK, Biblia Hebraika Kittel) 제1판”을 두 권으로 출간했는데, 이때 그는 “야곱 벤 하임의 마소라 원문”(1524-1525)을 사용했고, 1912년에 “제2판”을 출간할 때도 동일한 원문을 본문으로 사용했다. 그만큼 “야곱 벤 하임의 마소라 원문”은 1525년 이후부터 “키텔”의 “히브리어 성경 제3판”이 출간된 해인 1937년까지 “유대교”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권위 있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키텔”의 “히브리어 성경 제3판”부터는 올바른 원문 전수에 결함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가 “야곱 벤 하임의 마소라 원문”을 버리고 변개된 필사본인 “코덱스 레닌그라드”(Codex Leningradensis)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판들 역시 “변개된” 히브리어 원문을 전수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성경의 완결판인 &lt;킹제임스성경&gt;을 기준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성서들의 “구약 본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원문비평학적인 근거로 “콤플루텐시아 폴리그롯”과 “야곱 벤 하임의 마소라 원문”과 “키텔의 히브리어 성경(BHK) ‘제1판’(1906)과 ‘제2판’(1912)”을 제시할 수 있다.<br/><br/>신약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보존해 오셨다. 왜냐하면 신약 교회 시대에는 구약 시대처럼 “성경에 속하는 책들과 본문”을 결정하는 권위 있는 “제사장 그룹”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을 때, “성전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고 더 이상 동물의 피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행위는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특히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으로 불린다. 물론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달리 “영적인 제물들을 드리는 영적인 제사장들”이다. 『너희도 산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지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영적인 제물들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독특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너희로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니라』(벧전 2:5,9).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제사장들”을 통해 “구약 성경”을 보존하셨듯이, “신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영적인 제사장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보존하신 것이다.<br/><br/>특히 “다수 필사본”을 통해 보존하셨다. “필사본”(Manuscript)이란 기본적으로 “손으로 직접 베껴 쓴 사본”을 의미하는데, 어떤 것을 기준으로 분류했느냐에 따라 필사본들은 몇 가지로 나눠진다. 우선 “기록한 재료”에 따라 구분하면, 갈대 같은 식물의 섬유질을 겹쳐서 압축하여 만든 “파피루스”(Papyrus)와 염소를 위시한 동물들의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인 “파취멘트”(Parchment), 그리고 “영양의 가죽”처럼 가장 좋은 가죽으로 만든 “벨럼”(Vellum)이 있다. 또한 “문자체의 구분”에 따라 나누기도 하는데, 신약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언어인 헬라어 알파벳의 “대문자”로 기록된 필사본을 “대문자필사본”(Uncial Manuscripts)이라고 하고, “소문자”로 기록된 필사본을 “소문자필사본”(Cursive Manuscripts)이라고 부른다. 또한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느냐에 따라 “교부들(Church Fathers)의 인용문이나 기록물” 또는 “성구집”(Lectionaries) 등으로 구분이 된다.<br/><br/>이렇게 필사된 필사본들은 크게 “두 계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시리아 안티옥”을 중심으로 섭리 가운데 보존된 “시리아 계열의 필사본”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변개되고 삭제된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필사본”으로 나눠진다. 이 중에서 올바르게 보존된 신약 성경의 본문은 “시리아 안티옥”을 중심으로 바르게 보존되고 확산되어 나갔다. 성경에서 “안티옥”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원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따르는 “성경대로 믿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처음 붙여진 지역이고(행 11:26), 사도 “바울”의 사역과 “선교 여행”의 기반이 되었던 곳이다. 특히 “안티옥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교회였고(행 11:20-26; 13: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구제하는 교회였으며(행 11:29,30), 열심히 기도하고 선교하는 교회였다(행 13:2-4). 바로 이 “안티옥 교회”를 중심으로 올바르게 보존된 “신약 성경 원문”이 필사되고 확산되어 나갔던 것인데, “안티옥”에서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독일”과 “영국” 등지로 전해졌다.<br/><br/>한편 필사본들 중에는 신약 성경 전체를 담은 것도 있고, 신약 성경의 “일부 또는 단지 몇 구절”만 담은 것도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보존하실 때, “최초의 원본”이라든지 어떤 하나의 “필사본”만 보존해 오신 것이 아니라 널리 흩어지고 분산되어 있는 “여러 많은 필사본들,” 곧 “다수 필사본”을 통해 보존해 오셨다. 이러한 “다수 필사본”은 십수 세기 동안 단절되지 않고 원문 전수가 그대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시리아 안티옥”을 시작으로 올바르게 보존되고 전파된 필사본들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A.D. 91-96) 지 채 50년이 되기도 전에 각기 “시리아어”와 “라틴어”로 번역된 “초기 번역본들,” 곧 &lt;구시리아역본&gt;과 &lt;구라틴역본&gt;으로 이어졌다. 특히 &lt;구라틴역본&gt;은 “유럽”과 “아프리카”로 전해졌는데, 그래서 2세기 전에 이미 “유럽”과 “아프리카”에는 올바르게 보존된 필사본이 전해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필사본들이 A.D. 157-180년에는 “북부 이탈리아 교회”에서 사용되었고, A.D. 177-200년에는 “프랑스 골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A.D. 200년경에는 “시리아 교회”에서, A.D. 300년에는 “켈트 교회”에서, 그리고 A.D. 400년경에는 “발칸과 독일 지역의 교회들”에서 사용되었다. 특히 A.D. 312년에서 1453년까지 “비잔틴 제국 기간”에는 “그리스 교회들”을 비롯하여, 제국들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이때 폴리캅, 크리소스톰, 노바티안, 알반, 몬타니스트, 패트릭, 폴리시안, 유카이트, 보고마일, 루이저, 피카즈, 라바누스, 풀버트, 레우타드, 로잔의 헨리, 베긴스, 프라타셀리, 은둔자 피터, 탄첼름, 부르노, 아놀드, 카타리, 알비겐스, 게라드, 보도파, 힐데가드, 플로리스의 요아킴, 버톨드, 레이몬드 룰, 버나디노, 위클리프, 사보나롤라, 후스 등이 이 보존된 “원문들”(다수 필사본, 비잔틴 원문, 전통 원문)을 사용했다. 또한 1453년에서 1881년까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서도 사용했다.<br/><br/>그런 가운데 성경이 인쇄기를 통해 인쇄되기 시작하여 “종교 개혁의 속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다수 필사본”을 근간으로 “헬라어 성경”을 편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헬라어 “표준원문”(Textus Receptus)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믿었는데, 그들이 사용했던 성경이 바로 이 “헬라어 표준원문”이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 속에서 “헬라어 표준원문”을 만든 신실한 편집자들로는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와 “로버트 스테파누스,” “데오도르 베자,” “보나벤투라 엘지버”가 있다. 두 사람을 더 언급하면 “로버트 스테파누스”의 의붓아버지 “시몬 드 콜리네우스”와 “보나벤투라 엘지버”의 형제인 “매튜 엘지버”를 들 수 있다.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Aug 2026 09:35:1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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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요엘 특강 (2) - 곤충들의 재앙과 미래의 “주의 날”</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C%9A%94%EC%97%98-%ED%8A%B9%EA%B0%95-2-%EA%B3%A4%EC%B6%A9%EB%93%A4%EC%9D%98-%EC%9E%AC%EC%95%99%EA%B3%BC-%EB%AF%B8%EB%9E%98%EC%9D%98-%EC%A3%BC%EC%9D%98/</link>
<description><![CDATA[“성경의 예언들”의 일반적인 특징처럼(cf. 시 78:1-3), “요엘” 역시 “곤충들의 재앙”을 “비유”로 삼아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여 준다.<br/>『모충이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자벌레가 먹고, 자벌레가 남긴 것을 풀쐐기가 먹었도다』(욜 1:4).<br/><br/>여기에 언급된 “모충”은 갉아먹는 습성을 지닌 “무는 곤충”이다. “메뚜기” 재앙은 과거 “모세”가 이집트를 향해 내린 재앙 때도 등장한 적이 있다. “자벌레”는 “나훔”에서도 “세 번”(3:15,16) 언급되는데, 이는 “핥다”라는 “어원”을 가진 이름이다. “풀쐐기”는 “줄기의 꽃이나 싹을 잘라 먹는 곤충”을 뜻한다.<br/>이처럼 위 본문은 일차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곤충들”을 통해 일어난 “실제적인 재앙”을 가리킨다. 이렇듯 전면적인 곤충 재앙으로 극심한 흉년이 들면, “포도주”(발효된 “술”)와 “새 포도주”(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의 공급이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br/><br/>『너희 술 취한 자들아, 깨어서 울라. 포도주를 마시는 너희 모든 자들아, 새 포도주로 인하여 울부짖으라. 이는 그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라』(욜 1:5).<br/><br/>2020년에는 사막의 “메뚜기 떼”가 동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일대를 초토화시킨 사건이 있었다. 아프리카 “예멘”에서 창궐한 메뚜기 떼가 동아프리카 전역은 물론,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인도”와 “파키스탄”까지 퍼지면서 닥치는 대로 농작물을 먹어 치운 것이다.<br/><br/>당시 “동아프리카 3개국”에만 무려 3,600억 마리의 메뚜기가 집계되었는데, 이 메뚜기들은 “바람”을 타고 하루 최대 150km까지 비행했고, 1km² 면적의 무리가 하루 동안 35,000명 분량의 식량을 해치울 만큼 엄청난 식성을 자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번식력도 상상을 초월하여 “암컷 메뚜기 한 마리”가 평균 300개의 알을 낳았다.<br/>“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서는 “이 정도의 메뚜기 떼는 성경에 기록된 규모의 재앙”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학자들은 이 재앙의 원인에 대해 “이례적인 폭우와 수온 상승으로 인해 메뚜기가 폭발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고온 다습한 환경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br/><br/>그러나 성경은 이 재앙의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님의 심판”에 있다고 말씀한다.<br/>『모세가 이집트 땅 위에 그의 막대기를 앞으로 뻗치니, 주께서 그 땅 위에 온 낮과 온 밤 동안 동풍을 일으키셨으며 아침이 되자 동풍이 메뚜기들을 몰고 왔더라. 메뚜기들이 이집트 땅 전역에 올라와서 이집트의 전 지경 내에 내리니, 그것들이 매우 심하더라. 그와 같은 메뚜기들은 그들 전에도 없었으며 그들 후에도 없을 것이라. 메뚜기들이 온 지면을 덮으니 땅이 어두워지고 우박이 남긴 그 땅의 모든 채소와 나무에 달린 모든 열매들을 먹었으니, 이집트 땅 전역에 걸쳐 나무나 들의 채소들 중 푸른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더라』(출 10:13-15).<br/><br/>본문에 나오는 “동풍”은 가뭄이나 일사병을 유발하는 근동 지방의 뜨거운 “열풍”으로서, 성경에서 “동풍이 분다는 것”은 곧 “심판과 저주”를 의미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이 동풍을 통해 “메뚜기 떼”를 심판의 도구로 몰고 오시는데, 요엘 2:25에서는 이 메뚜기 떼를 가리켜 『나의 큰 군대』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br/>그러나 곤충들의 재앙은 “남왕국 유다”에서 그들의 죄로 인해 역사적으로 일어난 “문자 그대로의 곤충 재앙”에만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렇기에 “요엘”은 이 재앙을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의 침공에 따른 심판”으로 적용하고 있다.<br/>『한 민족[바빌론]이 내 땅에 올라왔으니, 강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그의 이는 사자의 이요, 그는 큰 사자의 어금니를 가졌도다』(욜 1:6).<br/><br/>이러한 심판에 관해서는 일찍이 신명기 28장에서도 예언된 바 있었다.<br/>『주께서 너를 치려고 땅끝 멀리에서 독수리가 빨리 나는 것같이 한 민족[바빌론]을 데려오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용모가 흉악한 민족으로 노인을 존경하지 아니하고 또한 어린아이에게 호의를 베풀지 아니하며, 그는 네 가축의 열매와 네 땅의 열매를 먹기를 네가 망할 때까지 하며, 또한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네 소떼의 소산과 네 양떼들을 남기지 아니하기를 네가 망할 때까지 하리라. 그가 네 모든 성문들에서 너를 포위하여 네 온 땅에 걸쳐 네가 믿었던 너의 높고 견고한 성벽을 헐어 내릴 것이며, 그가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온 땅에 걸쳐 네 모든 성문들에서 너를 포위하리라』(49-52절).<br/><br/>“바빌론 민족”으로 인한 “황폐함”이 얼마나 극심한지는 요엘 1:7-13에 자세히 제시되어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문자적인 곤충들의 재앙”으로 인해 땅이 황폐하게 된다. 농사는 흉작이고 비는 내리지 않으며, 여러 곤충 떼가 몰려와(4절)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황폐하게 만들었다(7절). 그 결과 “물가”는 폭등하게 되고, 제사장들과 주의 일꾼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얻는 수입이 끊어져 슬퍼하게 된다.<br/>『자기의 젊은 시절의 남편을 위하여 굵은 베옷으로 동인한 처녀같이 애곡하라. 음식제사와 술붓는 제사가 주의 전에서 끊어졌고, 제사장들, 곧 주의 일꾼들이 슬퍼하는도다』(욜 1:8,9).<br/><br/>이처럼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술 취한 자들(5절)과 농부들 및 온 땅도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울부짖는다(10-12절).<br/>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황폐함은 단순히 곤충들로 인한 재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명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오는 “흉악한 민족”, 곧 “바빌론 민족” 역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황폐하게 만들었고(7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멈추게 했다(9절).<br/><br/>이 재앙이 “바빌론 침공”을 통한 “남왕국 유다의 멸망”과 그로 인한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통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음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느부캇넷살왕”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그가 세 차례에 걸친 공격을 통해 “예루살렘”을 완전히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성전”도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으므로 제사장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br/>제사장들이 애곡하며 울부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r/>『너희 제사장들아, 너희 자신을 동이고 애곡하라. 너희 제단의 일꾼들아, 울부짖으라. 너희 내 하나님의 일꾼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옷을 입고 온 밤을 누울지니, 이는 음식제사와 술붓는 제사가 너희 하나님의 전으로부터 금하여졌음이니라』(13절).<br/><br/>그런데 “요엘의 예언”을 적용할 때 이 정도의 적용에서 멈추면 안 된다. 이는 “성경의 예언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이중적인 적용”(Dual Application)이기 때문이다. 곧 성경의 예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당대의 “역사적인 사건”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미래의 “주의 날”에 일어날 사건들에까지 확대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br/>『너희는 금식을 거룩케 하고 엄숙한 집회를 소집하며 장로들과 그 땅의 모든 거민들을 주 너희 하나님의 전으로 모아 주께 부르짖으라. 슬프도다, 그 날이여! 이는 주의 날이 가까웠으며 전능하신 분으로부터 오는 멸망처럼 그 날이 올 것임이라』(욜 1:14,15).<br/><br/>본문에 언급된 『주의 날』은 “심판의 날”이자 “멸망의 날”이며 “매우 슬픈 날”이다(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본지 통권 제412호, “아마겟돈 전쟁을 예언한 요엘”, pp.92,93을 참고하라).<br/>특히 『주의 날』에 있을 황폐함이 얼마나 극심한지는 요엘 1:16-20에 잘 제시되어 있다.<br/>『음식이 우리의 목전에서 끊어진 것이 아니냐? 정녕,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았느냐? 씨가 그들의 흙덩이 아래서 썩었고 창고가 황량해졌으며 곳간이 부서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기 때문이라. 짐승들이 어찌 신음하는지! 소떼가 어찌할 바를 모르니, 이는 그들에게 초장이 없음이라. 정녕, 양떼도 황폐케 되었도다. 오 주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이는 불이 광야의 초장들을 삼켰고 화염이 들의 모든 나무를 태웠음이니이다. 들의 짐승들도 또한 주께 부르짖으오니, 이는 강물들이 말랐고 불이 광야의 초장들을 삼켰음이니이다.』<br/><br/>이러한 구절들은 『주의 날』, 특히 “7년간의 환란 시대”에 일어날 사건들을 잘 묘사해 준다. 그날이 오면 “팔레스타인 땅”에는 3년 반 동안 극심한 가뭄이 임할 것이고(계 11:6), 전 세계적으로 대기근이 닥칠 것이다. “기근”으로 인해 물가는 폭등하게 된다(계 6:5,6).<br/>“기근”이 극심해지면 『식량봉』(겔 14:13)이 꺾일 것이고, 심지어 여인들이 자기 자녀를 먹는 비극적인 일까지 발생하게 된다.<br/>『오 주여, 보시고 주께서 이 일을 누구에게 행하셨는지 생각하소서. 여인들이 자신의 열매와 한 뼘 되는 자녀를 먹으리이까? 제사장과 선지자가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해야 하리이까!』(애 2:20)<br/><br/>그뿐만 아니라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 임한 열 가지 재앙들”이 대환란 때 다시금 재현될 것이다. 식량은 물론 가축도 끊어지며, 곳간이 부서지고 초장들이 불타 황폐하게 된다. 특히 이 기간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와 예물마저 금지되는데, 곧 환란 시대 중반에 “적그리스도”를 통해 금지될 것이다.<br/>『그[적그리스도]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7년]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 그 주의 중간[3년 6개월이 지난 시점]에 그가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요, 그는 가증함을 확산시킴으로 황폐케 하리니 진멸할 때까지 할 것이며』(단 9:27).<br/><br/>“곤충들의 재앙” 역시 “대환란 기간”에 재현될 것인데, 이때는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초자연적인 메뚜기들”이 올라오게 된다(계 9:1-11). “기괴한 모습”을 지닌 이 “돌연변이들”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 같은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들의 얼굴과 같고 그들의 머리카락은 여인들의 머리카락 같았으며, 그 이빨은 사자들의 이빨』과 같다(계 9:7,8).<br/>이러한 모습은 요엘 1:6에서 언급된 바,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오는 민족”이 『사자의 이요... 큰 사자의 어금니』를 가졌다고 한 묘사와 정확히 맞물린다. 또한 그 메뚜기들은 “흉배”가 『철흉배』 같았고, 『날개 소리는 전쟁터로 달려가는 많은 말들이 끄는 병거 소리』 같았으며, 『전갈과 같은 꼬리가 있고, 그들의 꼬리에는 쏘는 침이 있으며 다섯 달 동안이나 사람들을 해치게 하는 권세』를 받는다(계 9:9,10).<br/><br/>다시 말해 출애굽 당시의 이집트나 최근 동아프리카의 메뚜기 떼는 푸른 채소와 농작물들을 먹어 치웠지만, 대환란 때의 메뚜기 떼는 오직 사람들을 괴롭히며 고통을 준다. 이때 사람들은 전갈에 쏘였을 때와 같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차라리 죽기를 구하며 자살을 시도해 보지만, 죽음마저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계 9:6).<br/><br/>하지만 이런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사람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는다(계 9:21). 그저 기상 이변이나 기후 변화에 따른 생태계의 기현상이려니 하면서 무시해 버릴 것인데, 심판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죄인들의 마음”은 실로 완악하기 그지없다.<br/><br/>이처럼 “요엘의 예언”이 “주의 날의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명백히 증명된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특히 “선지서들”의 예언을 열어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믿는 성도만이 “선지서들”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7 Jul 2026 08:20: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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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엉망진창인 개역개정판, “증오”인가, “긍휼”인가?</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C%97%89%EB%A7%9D%EC%A7%84%EC%B0%BD%EC%9D%B8-%EA%B0%9C%EC%97%AD%EA%B0%9C%EC%A0%95%ED%8C%90-%EC%A6%9D%EC%98%A4%EC%9D%B8%EA%B0%80-%EA%B8%8D%ED%9C%BC%EC%9D%B8%EA%B0%80/</link>
<description><![CDATA[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리의 성경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그 책에 “기록된 그대로,” “사실 그대로,”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의 글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의 말들을 믿겠느냐?』(요 5:47)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br/><br/>우리가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오류 없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여기서 『모든 성경[All scripture]』은 “모든 말씀들”(all the words), 곧 “그 책”(The Book)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단어들(all the written words) 하나하나”를 가리킨다. “성경”(聖經)에 해당하는 헬라어 “γραφή”(그라페)와 영어 “scripture”는 단수 형태와 복수 형태에 상관없이, “성경 말씀 하나하나”는 물론 “성경 말씀 전체”를 의미한다.<br/><br/>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감”이라는 개념이 최초에 기록된 “원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 어릴 때부터 네가 성경을 알았으니, 그 성경은 너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할 수 있느니라』(딤후 3:15).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알았던 성경은 “원본”인가, “필사본”인가? 당연히 “필사본”이다. 지구상에서 “원본”은 하나뿐이며 두 개일 수 없다. 하나뿐인 원본은 “디모데”의 시대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디모데”에게는 그것을 읽어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제사장도, 레위인도, 서기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대인도 아닌 “헬라인”(“이방인”)이었다. 따라서 “디모데”의 손에 들려 있던 성경은 원본이 아닌 “필사본”이었다. 다시 말해 “영감의 개념”을 “원본”에만 국한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br/><br/>물론 영감으로 “기록된” 것은 “원본”이 유일하다. 그러나 그 “영감의 효력”은 “원본”에만 국한되지 않고 “필사본”과 “번역본”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디모데후서 3:16”을 기록하실 때 “단어 선정”에 신중을 기하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 쓰시지 않고 『주어진 것』이라고 쓰셨다. 말하자면 “영감의 효력”을 “영감으로 ‘기록된’ 원본”만이 아니라, “영감으로 ‘주어진’ 필사본과 번역본” 모두에 적용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을 수 있는 둘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곧 성경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것이 기록된 그대로 옳다.”라고 믿지 않으면,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온전하고 유일한 진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이처럼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Final Authority)이자, “절대권위”(Absolute Authority)가 되지 못하면, 결코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효과적으로 역사할 수 있겠는가?<br/><br/>또한 성경이 “단어 하나하나”까지 온전히 보존되지 않고 변개되어 있으면, 어떻게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대표적인 예로, 섭리로 보존된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의 “유다서 1:22,23”을, 변개된 한글 성서들의 본문과 비교해 보라! 『어떤 자들을 동정하되 차이를 두어 하며, 다른 자들은 불 속에서 끌어내어 두려움으로 구원하되, 육신으로 더럽혀진 그 옷조차도 증오하라[And of some have compassion, making a difference: And others save with fear, pulling them out of the fire; hating even the garment spotted by the flesh]』(&lt;한글킹제임스성경&gt;). 이 본문과 대조해 보면, 부패한 한글 성서들로는 진리를 온전히 깨달아 알 수 없다는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br/><br/>「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개역개정판). “미워하라”는 것인가, “긍휼히 여기라”는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처신하라는 것인가? 변질된 “개역개정판”은 「의심하는」이란 단어를 제멋대로 첨가하는 대신 『차이를 두어 하며』를 삭제했고, 『두려움으로』라는 단어를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거한 다음 맨 뒤로 보내서 임의로 첨가시킨 「또 어떤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표현에 연결시켰다. 다른 변개된 성서들도 이와 유사한 일을 자행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개역한글판성경). 「믿음을 굳게 갖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불 가운데서 끄집어 내어 구원하십시오. 두려움을 가지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되, 죄에 관한 것은 육체의 욕망으로 더럽혀진 옷까지도 미워하십시오」(쉬운성경). 여기에서는 「욕망」도 첨가했다. 「의심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십시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동정하되, 그 살에 닿아서 더럽혀진 속옷까지도 미워하십시오」(표준새번역). 「Be merciful to those who doubt; snatch others from the fire and save them; to others show mercy, mixed with fear-hating even the clothing stained by corrupted flesh」(NIV).<br/><br/>변개된 성서들을 믿는 자들은 위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변개시킨 자들에게 “조명”을 꺼 버리셨다! 그들은 본문에서 언급하는 『불[fire]』을, “로마카톨릭”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배교자 “빌리 그래함”의 신학을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성경 변개자 “오리겐”과 당대 “알렉산드리아” 최초의 “기독교 학교”의 성경 해석 방법에 따라 “문자적인 불”이 아닌 “비유적인 불”로 만들었다. 또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육신으로 더럽혀진 그 옷[the garment spotted by the flesh]』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고, 왜 『그 옷조차도 증오하라[hating even the garment].』라고 명령하시는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 멋대로 “첨가시킨 표현”에 따라, 왜 “두려운 마음으로 동정하거나 긍휼히 여기라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 감조차 잡지 못했다.<br/><br/>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유다서”는 “일반 서신”(General Epistles) 중 하나로서 “환란 시대의 교리”를 다루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피터 S. 럭크만의 주석서 &lt;요한일이삼서 ․ 유다서&gt;를 참고할 것). “환란 시대”는 구약의 율법이 다시 회복되는 등 “구약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특히 “믿음과 행위 체계에 따른 구원 방법”이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너희 자신들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라』(유 1:21). 이 구절에서 “자신들을 지키라”는 말씀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 시대의 교리”를 다루고 있는 “로마서 8:29”과 “고린도전서 1:8”에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지키신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께서 너희를 끝까지 확고하게 지키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리라』(고전 1:8). 그러나 “환란 시대의 교리”를 다루고 있는 “유다서 1:21”에서는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들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자신들을 지키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자비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br/><br/>이런 맥락에서 이어지는 “유다서 1:22,23”은 “환란 시대”에 “문자적인 지옥의 불”을 경험하게 될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불”은 “문자적인 불”이지, 결코 “은유적이거나 영적인 불”이 아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리니, 그것은 그의 진노의 잔에 혼합하지 않고 부은 것이니라. 또 그 사람은 거룩한 천사들의 면전과 어린양의 면전에서 [문자적인] 불과 유황으로 [문자적인] 고통을 받으리니, [문자적인] 그 고통의 연기가 [문자적으로]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라. [환란 시대에]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문자적으로]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계 14:10,11). 이 본문에서 “문자적이지 않은 내용”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러나 그 짐승이 잡히고, 짐승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그와 함께 잡혔으니 그는 짐승과 더불어 그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 경배한 자들을 속이던 자라. 이 둘이 유황으로 불타오르는 불못에 산 채로 던져지더라』(계 19:20).<br/><br/>휴거되지 못하고 “환란 시대”에 이 땅에서 살게 될 죄인들이 “불못”에 산 채로 던져지는 이유는, 짐승의 표와 그 이름의 표를 받고 짐승과 짐승의 형상에 경배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짐승의 표”는 “검은 점”(black spot)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표범과... 같은... 짐승』(계 13:2)이기 때문이다. 표범의 몸에는 “검은색 점들”이 박혀 있다. 『에디오피아인이 그의 피부를 바꿀 수 있으며 표범이 그의 점들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표범의 “검은 점”은 반달 모양을 두 개 합쳐 놓은 것 같은 모습을 띠는데, 마치 “검은 입술”의 생김새와 흡사하다. 따라서 “짐승의 표”는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사용했던 『원수의 입맞춤』(잠 27:6)과 연관이 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배반하느냐?』(눅 22:48) 한편 환란 시대에 “검은 점(spot)”인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대한 형벌로 온몸에 “반점”(spot)이 생기는데(유 1:12, 레 13장), 이것은 “표범”(leopard)과 관련된 질병인 “문둥병”(leprosy)이다. 『그러므로 첫째가 가서 자기 호리병을 땅에 쏟으니 그 짐승의 표를 가진 자들과 그의 형상에 경배한 자들 위에 악취가 나는 심한 헌데가 생기더라』(계 16:2). 이 “심한 헌데”가 바로 “문둥병”이다. 특히 “문둥병”은 사람들의 피부에 생기는 것은 물론, 심지어 그들이 입는 “옷”에까지 전염되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으로 더럽혀진 그 옷조차도 증오하라.』(유 1:23)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 문맥에서 아주 생뚱맞게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라는 첨언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것들은 깨닫는 자에게는 모두 알기 쉬운 것이요, 지식을 얻는 자들에게는 옳은 것이니라』(잠 8:9).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4 Jul 2026 15:34:1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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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성경의 역사 (1)</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D%95%98%EB%82%98%EB%8B%98%EA%BB%98%EC%84%9C-%EB%B3%B4%EC%A1%B4%ED%95%98%EC%8B%A0-%EC%84%B1%EA%B2%BD%EC%9D%98-%EC%97%AD%EC%82%AC-1/</link>
<description><![CDATA[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경 보존”에 큰 기여를 한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가 있었다. 이는 “루터”가 “독일어”로 &lt;루터성경, 1534&gt;을 번역 ․ 출간할 때, 특히 “신약성경 번역”에서 “에라스무스”가 출간한 “헬라어 표준원문”을 “저본”(底本)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제사장들”을 통해 “구약성경”을 보존하셨듯이,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영적인 제사장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보존하셨다. 이때 “성경의 원문”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계열”이 아닌, “시리아 계열”의 “다수 필사본”을 통해 보존되었다.<br/><br/>지금까지 발견된 “헬라어 신약성경 필사본의 수”는 5,700-5,800여 개 이상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필사본들 가운데 80-90%는 올바르게 보존된 원문을 필사한 “시리아 계열”이며, 이들이 곧 “다수 필사본”을 형성한다. 특히 방대한 양의 “헬라어 신약성경 필사본” 대다수가 서로 밀접하게 일치한다는 점은, 이 필사본들이 “신약 원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근대 비평가들은 이러한 “다수 필사본”을 가리켜 “비잔틴 원문”(Byzantine text)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 다수의 원문이 “비잔틴 제국 시기”(312-1453년) 동안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헬라어 신약 원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원문은 “종교 개혁” 이전 수세기 동안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종권위”(Final Authority)로서의 성경으로 자리 잡았으며, 가장 순수한 “최고의 성경”으로 믿어져 왔다. 영어 &lt;킹제임스성경, 1611&gt;을 위시한 초기 번역본들은 바로 이 “비잔틴 원문”을 바탕으로 번역되었다.<br/><br/>한편 “원문 비평학의 아버지”이자, “비잔틴 원문에 대한 열렬한 수호자”인 “존 버간”(John William Burgon, 1813-1888)은 이 “원문”을 가리켜 “전통 원문”(Traditional Text)이라 명명했다. 이는 그 보존된 원문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사도 시대 이후로 세대에 세대를 거쳐 끊임없이 온전하게 전수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전수되었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전통”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올바르게 보존된 성경은 “사람의 전통”이 아닌, 성경 보존에 관한 “하나님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신약성경의 원문”은 수세기 동안 단절되지 않은 채 “다수 필사본”으로 분류되는 “비잔틴 원문,” 곧 “전통 원문”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순수한 필사본들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필사되고, 읽히고, 들리고, 가르쳐지고,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성경이 마모되면 또다시 필사되기를 반복하면서 사본의 수는 점차 많아졌고, 사용된 지역도 매우 광범위해졌을 것이다. 반대로 사탄에 의해 변개된 불순한 필사본들은 좀처럼 사용되거나 필사되지 않았기에 당연히 그 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필사본들은 도서관 선반 같은 곳에 오랫동안 방치되거나, 성당 등에서 불을 피우기 위한 불쏘시개 정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실제로 “오래된 필사본”으로 알려진 4세기경의 “시내 사본”은 1844년까지 사용되지 않은 채 “수도원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고, 역시 “오래된 필사본”으로 알려진 같은 시기의 “바티칸 사본”은 1481년까지 “로마 바티칸 도서관 서고”에 방치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오래된 필사본”이라고 해서 무조건 권위가 있거나 올바른 본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br/><br/>이렇게 보존된 “다수 필사본”을 근거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하고 인쇄하는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다름 아닌 “헬라어 표준원문”이다. “표준원문,” 곧 “텍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라는 말은 “받아들여진 원문”(Received Text)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 원문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역사 속에서 “널리 수용되고 공인된 본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믿었으며, 그 믿음의 기반으로 바로 이 “헬라어 표준원문”을 사용했다. 특히 “헬라어 표준원문”의 편집자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받은 “세 가지 과정”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필사본들을 확보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인도받았다. 둘째, 보존된 필사본들을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섭리적인 환경과 상황으로 인도받았다. 셋째, “평범한 믿음”으로 인도받았다. 여기에서 “평범한 믿음”이란 현재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이며,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된 무오한 말씀”임을 그대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리킨다.<br/><br/>“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평범한 믿음,” 곧 “Common Faith”가 있었던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영,” “같은 생각,” “같은 지식,” “같은 사랑”을 소유한 참된 성도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같은 믿음[common faith]』(딛 1:4)이다. 이런 “평범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확고히 믿는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무오하게” 기록되었다. 둘째, 그렇게 기록된 성경은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집성되고 보존”되었다. 셋째,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섭리로 보존되었기에, 성경대로 믿는 성도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그것이 필사본이든, 번역본이든 “처음 원본과 동일한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올바른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믿고, 전파하고, 실행하라고 주신 “올바르게 보존된 성경”이 어떤 성경인지 바르게 분별한다.<br/><br/>반면에 “다른 영,” “다른 생각,” “다른 지식,” “다른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이러한 “평범한 믿음”을 견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최초의 원본”만이 무오한 권위를 갖고 있고, 필사본이나 번역본은 시대를 거쳐 오면서 인간의 실수나 외부적인 환경 요인으로 훼손될 가능성이 있기에 원본만큼 완벽할 수 없으며 그와 동등한 권위를 가질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평범한 믿음”을 부인하는 “다른 믿음”일 뿐이다. 그런 자들은 “원본에 가까운 번역본”이라든지, “보다 더 나은 번역본” 같은 이야기를 운운하면서 성경을 제멋대로 변개시키고 파괴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선자들에게서 올바른 성경과 변개된 성서 사이를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빼앗아 가시는데, 이것이 바로 분별력을 잃어버린 “배교한 마지막 교회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배교자들에게 “이혼 증서” 한 장을 써 주셔서 그들을 버림받은 상태로 내버려 두셨다. 바로 이 “이혼 증서,” 즉 헬라어 “βιβλίον ἀποστασίου”(비블리온 아포스타시우)의 의미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닌 그 배교자들의 손에 들려 있는 “변개된 성경,” 곧 “배교한 성경”(Apostate Bible)이다. 이처럼 “간교한 사탄”은 시시각각 우리의 “평범한 믿음”을 파괴하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다. 따라서 항상 올바른 믿음과 지식을 견지하여, 그러한 사탄의 공격과 미혹과 혼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br/><br/>주님은 친히 보존하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것만 믿고 “섭리로 보존하신다는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무엇 때문에 영감으로 기록하셔서 오류가 없도록 하셔야 했겠는가? “오류 없이 보존하실 계획”이 없으셨다면, 영감으로 기록하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시고 섭리로 보존하시되, 그 영감의 효력이 섭리로 보존된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어떤 구절에서도 “원본”을 보존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만일 그러했다면 이 땅에는 오직 “원본” 하나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 성경이 되었을 것이다. “성경의 증거”와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하나님께서는 “원본”을 통해 보존하신 것이 아니라, “필사본,” 특히 “다수 필사본”과 올바른 “번역본”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보존해 오셨음을 알게 된다.<br/><br/>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섭리로 보존된다는 “성경적인 근거”가 여러 구절에서 명확히 발견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그 말씀에 더하지도 말고, 거기에서 빼지도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지니라』(신 4:2).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시니라.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라. 그분이 너를 책망하실까 함이며, 네가 거짓말쟁이가 될까 함이라』(잠 30:5,6).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5:18).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그들을 신들이라 불렀다면 성경은 폐기될 수 없나니』(요 10:35).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이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듣는 각 사람에게 증거함이니 누구든지 이것들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삭제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책과 거룩한 도성과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의 부분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이외에도 열왕기하 10:10, 시편 100:5; 119:89,160, 이사야 40:8, 누가복음 21:33 등을 찾아보라.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분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를 역사 속에서 실제로 완벽하게 지키셨다.<br/><br/>이러한 약속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보존해 오셨는데, 이 일을 위해서 “제사장들”을 사용하셨다. “아론의 계열”을 따라 선임된 “제사장들”을 인도하셔서 “구약의 흩어진 필사본들”을 모으게 하셨고, 그것이 변개되지 않도록 “구약성경의 순수성”을 유지하게 하셨다. 한편 성경과 관련하여 제사장들에게는 “세 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br/><br/>첫째, “율법을 맡고 보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들을 완성하여 그것들을 한 책에 기록하기를 마쳤을 때 모세가 주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인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이 율법의 책을 가져다가 주 너희 하나님의 언약궤 옆에 두어 그것으로 너희에 대한 증거로 거기에 있게 하라』(신 31:24-26).<br/><br/>둘째, “율법의 말씀을 읽어 주는 안내자”이자 “그 의미를 가르쳐 주는 교사”의 역할을 맡았다. 『모세가 이 율법을 기록하여 주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의 아들들의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에게 그것을 건네주며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매 칠년의 끝 해, 면제의 해의 엄숙함 가운데 장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주 너의 하나님 앞, 곧 그분께서 선정하실 곳에 나오면, 너는 온 이스라엘 앞에 그들이 듣도록 이 율법을 읽을지니라. 백성을 모으되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과 네 성문들 안에 거하는 네 타국인을 모으라. 그리하여 그들로 듣고 배워서 주 너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게 하며, 너희가 요단을 건너서 차지할 그 땅에 사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의 자손들로 듣고 주 너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 하더라』(신 31:9-13).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들과 통치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율법의 정확한 복사본”을 만드는 일을 관리했고, 왕이 이 일을 위임한 “서기관들”을 감독하거나 지도했다. 『그가 자신의 왕국의 보좌에 앉으면 그는 레위인 제사장들 앞에 있는 책에서 이 율법서 한 권을 베껴 그와 함께 두고 평생 동안 그것을 읽어서 그가 주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배우게 하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과 이러한 규례들을 지켜 그것들을 행하게 할지니라』(신 17:18,19).<br/><br/>셋째, 율법뿐만 아니라 “시편을 분류하고 기록하며 노래하는 임무”를 이행했다. 제사장들은 “모세오경”의 구조에 맞춰 “시편”을 “다섯 권”으로 분류했고, “다윗왕”을 위시하여 “헤만,” “아삽,” “에단” 같은 사람들은 “시편”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공개적인 경배나 다양한 신앙적인 모임에서 이 시편들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대상 6:32-48, 대하 7:6; 23:18; 29:30).<br/><br/>이처럼 “구약성경”은 “제사장들”에 의해 주의 깊게 보존되어 왔다.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질 때도,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때도, “카나안 땅”에 들어가 “여호수아”와 “재판관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당시에도 제사장들에 의해 잘 보존되어 온 것이다. 이후 불법적인 왕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고,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오면서 “구약성경”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의 책임” 아래 보다 더 주의 깊게 보존되었다. “솔로몬”이 죽은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북과 남으로 갈라진 두 왕국은 각각 “앗시리아”와 “바빌론”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데, 그렇게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바빌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구약성경”을 보존하셨다. 특히 제사장이요, 서기관인 “에스라”와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보존되었다. 『에스라가 주의 율법을 찾고 그것을 행하고 규례들과 명령들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칠 것을 마음으로 준비하였더라. 아탁세르세스왕이 제사장이요, 서기관, 즉 주의 계명들의 말씀들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주의 규례들의 서기관인 에스라에게 준 편지의 사본은 이러하니라』(스 7:10,11). “에스라”와 그의 계승자들은 구약성경의 책들을 모았고, 그 원문들은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때까지 오류 없이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며 보존되었다. 이렇게 정착된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까지 잘 보존되었으며, 이후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까지 유대 땅에서 “레위인들”에 의해 신실하게 보존되었다. 『이는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찾아야 함이니, 이는 그가 만군의 주의 사자이기 때문이라』(말 2:7).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4 Jul 2026 15:24: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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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선지서 특강  - 요엘 (1) 아마겟돈 전쟁을 예언한 “요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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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에는 “열세 명”의 서로 다른 “요엘”이 등장한다(삼상 8:2, 대상 5:12, 대하 29:12, 행 2:16 등). 신실한 선지자 “사무엘”의 맏아들도 “요엘”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돌이켜 이익을 따라 뇌물을 취하며 잘못된 재판을』(삼상 8:3) 함으로써,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이 “인간 왕을 요구하는 빌미”를 제공했다(삼상 8:5). 본 선지서를 기록한 “요엘”은 “프두엘의 아들”로 소개된다. 『프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주의 말씀이라』(욜 1:1). 아버지 “프두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또는 “경건한 성실함”이고, “요엘”이란 이름은 “여호와”를 의미하는 “요”와 “하나님”을 뜻하는 “엘”의 복합어로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이다.<br/><br/>선지자 “요엘”은 “요아스왕”이나 “웃시야왕”이 통치하던 기간에 “남왕국 유다”를 향해 예언했다. “웃시야”는 “남왕국 유다”의 아홉 번째 왕이었고,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왕의 보좌에 올라 52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혹은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라는 뜻이다. “웃시야”는 비교적 선한 왕으로서 “남왕국 유다”에서 일어난 다섯 번의 개혁 가운데 “세 번째 개혁”을 주도했다. 이 기간에 활동한 “요엘”은 B.C. 885-865년에 선지서 “요엘”을 기록했는데, 이 책은 재림 때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군대”를 이끄시고 이 땅에 내려와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내용을 예언하고 있다. “1장”에서는 주로 “남왕국 유다”를 향한 “책망과 심판”이 언급되지만, “2장”과 “3장”에서는 “재림에 관한 예언,” 특히 “주의 날”에 있을 일들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슬프도다, 그 날이여! 이는 주의 날이 가까웠으며 전능하신 분으로부터 오는 멸망처럼 그 날이 올 것임이라』(욜 1: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고 내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내어 그 땅의 모든 거민들로 떨게 하라. 이는 주의 날이 오며 그 날이 가까움이라... 주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그의 음성을 발하시리니, 이는 그의 진영이 매우 크고 그의 말씀을 실행하는 분은 강하심이라. 주의 날이 위대하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그것을 견뎌 낼 수 있으리요?』(욜 2:1,11) 『결단의 골짜기에 많은 무리들이 있으니, 이는 주의 날이 결단의 골짜기에 가까움이라』(욜 3:14).<br/><br/>“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구약성경에서 “총 15회”(사 2:12; 13:6,9, 겔 13:5; 30:3, 욜 1:15; 2:1,11; 3:14, 암 5:18,20, 옵 1:15, 슾 1:7,14, 슼 14:1), 신약 성경에서는 “총 4회”(the day of the Lord, 행 2:20, 살전 5:2, 벧후 3:10, 계 1:10) 나오며, 3,800여년에 달하는 매우 긴 기간이다.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이 심판받는 날인데, 곧 “앗시리아”를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심판받는 날(B.C. 721년, 사 10:5-16,20,21,24,27,32; 7:17,20, 암 5:18-20; 6:9,11,14)이고, “바빌론”을 통해 “남왕국 유다”의 “두 지파”가 심판받고,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날(B.C. 606년, 사 2:12,20; 3:7,16,25, 26; 5:25-30, 렘 17:18,19,27, 겔 13:5, 욜 1:6-15, 미 3:1,2, 슾 1:7,14)이며,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킨 “바빌론”이 “페르시아”를 통해 심판받고 멸망하는 날(사 13:6,9,17,19)인 것이다.<br/><br/>“교리적”(예언적)으로는 교회의 휴거 이후 미래의 “대환란”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아마겟돈 전쟁”을 통한 심판, “이방 민족들의 심판”(사 25:7-11, 겔 38:19, 욜 2:1-11; 3:9-18, 미 5:1-15, 슼 14:1-6, 말 4:1-3), “천년왕국” 및 “예수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사 19:18-25; 24:21-23; 26:1-4, 호 2:18,19, 슼 13:1-6; 14:8-21), “천년왕국”이 끝난 이후 “우주가 불로 소멸되는 심판”과 “백보좌 심판”까지의 전 기간과 사건들(사 66:22-24, 단 7:9-11, 벧후 3:10)에 해당한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초림”(사 7:14-18; 61:1,2, 슼 9:9,10,14,16)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는 초림 때 재림도 함께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br/><br/>“주의 날”은 기본적으로 “진노와 심판과 멸망의 날”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는 날”(사 2:12)이나 “울부짖는 날”과 “멸망의 날”(사 13:6), “진노와 맹렬한 분노, 잔인함, 황폐함, 멸망의 날”(사 13:9), “전쟁의 날”(겔 13:5), “구름 낀 날”과 “이방의 때”(겔 30:3), “슬픔의 날”과 “멸망의 날”(욜 1:15), “경고의 소리를 내는 날”과 “땅의 모든 거민이 떠는 날”(욜 2:1), “위대하고 두려운 날”(욜 2:11), “결단의 골짜기에 무리를 모으는 날”(욜 3:14), “화”와 “어둠의 날”(암 5:18), “빛이 없는 날”(암 5:20), “보응의 날”(옵 1:15), “희생의 날”(슾 1:7), “비통하게 부르짖는 날”(슾 1:14), “약탈물이 나뉘는 날”(슼 14:1) 등으로 묘사가 된다.<br/><br/>“요엘”을 비롯한 “성경 예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비유”를 통해 미래의 일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은 “예언자들”로서 종종 “비유”를 사용하여 예언했다. 일례로, 선지자 “이사야”는 “포도원의 비유”를 통해 “남왕국 유다의 멸망”에 대해 예언했고(사 5:1-7), “예레미야”는 “대환란의 고통”을 “여인의 진통”에 비유했다. 『너희는 이제 물어 보라, 아이로 진통하는 남자가 있는지 알아보라. 내가 보니 마치 진통하는 여인처럼 남자들이 각기 자기 손으로 허리를 짚고 모든 얼굴들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은 어쩐 일이냐? 슬프도다! 그 날이 크므로 어떤 때도 그와 같지 않나니 그 날은 야곱의 고난의 때[대환란]라. 그러나 그는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렘 30:6,7). 또한 “에스겔”은 “두 막대기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해 예언했다(겔 37:15-28). 심지어 “거짓 선지자”가 비유를 들어 예언하는 경우도 있는데,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크나아나”의 아들 “시드키야”가 철로 만든 뿔들에 비유하여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언했지만(왕상 22:11),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시어 그 “거짓 선지자”를 심판하신 결과였다.<br/><br/>『오 내 백성들아, 내 법을 경청하고 내 입의 말에 너희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한 비유로 난해한 옛 말들을 말하리니 그것은 우리가 들었고 알았으며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말하였던 것이라』(시 78:1-3). 이 본문에서 『옛 말들』은 과거에 조상들이 했던 말로, 그들이 “출애굽 당시”에 역사적으로 경험한 내용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역사적 내용”을 “난해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는 그 내용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고, 궁극적으로 “미래의 일들”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편 78편”을 기록한 “아삽”은 조상들이 과거에 했던 말을 “비유”로 삼아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초림 당시 예수님께서도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시며, 『내가 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내가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감추어진 것들을 말하리라.』(마 13:35)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천국의 비유”를 이야기하시면서 구약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교회 시대의 경륜”이 펼쳐질 것을 계시하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편 78편”은 “출애굽 당시의 사건들”을 다루는 동시에, 이것이 하나의 “비유”가 되어 미래에 일어날 재림에 관한 상황들을 예언하고 있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7:06:4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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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거인들인가, 네피림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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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들이라고 불리는 (많은 신들과 많은 주들이 있어도)』(고전 8:5), 그 “신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거짓 신들”에 불과하고, 『오직 한 분 하나님』(고전 8:6)만이 『신들 중의 신이시요 왕들 중의 주시며』(단 2:47), 『신들 중의 주 하나님』(수 22:22), 곧 『참 하나님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영원한 왕』(렘 10:10)이시라는 것이 “성경의 결론”이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무서워 말라. 내가 그때로부터 너에게 말하며 선포하지 않았더냐? 너희가 곧 나의 증인들이니라. 나 외에 하나님이 있더냐? 정녕, 다른 하나님은 없나니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하노라』(사 44:8).<br/><br/>한편 “성경”에 기록된 “거짓 신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네르갈”(Nergal, 왕하 17:30), “느보”(Nebo, 사 46:1), “니스록”(Nisroch, 왕하 19:37, 사 37:38), “닙하스”(Nibhaz, 왕하 17:31), “다곤”(Dagon, 판 16:23, 삼상 5:2-5,7, 대상 10:10), “다이아나”(Diana, 행 19:24,27,28,34,35), “림몬”(Rimmon, 왕하 5:18), “머큐리” (Mercurius, 행 14:12), “몰렉”[Molech, 레 18:21; 20:2-5, 왕상 11:7, 왕하 23:10, 렘 32:35, “몰록”(Moloch, 암 5:26, 행 7:43)], “밀콤”(Milcom, 왕상 11:5,33, 왕하 23:13), “바알”(Baal, 민 22:41, 판 2:11,13; 3:7; 6:25,28,30-32; 10:6,10 외), “벨”(Bel, 사 46:1, 렘 51:44), “숙콧브놋”(Succoth-benoth, 왕하 17:30), “아남멜렉”(Anammelech, 왕하 17:31), “아드람멜렉”(Adrammelech, 왕하 17:31), “아스타롯”[Ashtaroth, 판 2:13; 10:6, 삼상 7:3,4; 12:10; 31:10, “아스토렛”(Ashtoreth, 왕상 11:5,33, 왕하 23:13)], “아시마”(Ashima, 왕하 17:30), “쥬피터”(Jupiter, 행 14:12,13; 19:35), “카스토”(Castor, 행 28:11), “크모스”(Chemosh, 민 21:29, 판 11:24, 왕상 11:7,33, 왕하 23:13, 렘 48:7,13,46), “키운”[Chiun, 암 5:26, “렘판” (Remphan, 행 7:43)], “타르탁”(Tartak, 왕하 17:31), “탐무스”(Tammuz, 겔 8:14), “폴럭스”(Pollux, 행 28:11).<br/><br/>이상 언급한 “신들의 기원”은 “그리스 ․ 로마 신화”가 아니라 “성경”에 있다. 『사람들이 지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하고 딸들이 그들에게서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들로 삼으니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않으리니, 이는 그도 육체임이라. 그래도 그의 날들이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1-4). “사람들의 딸들”을 아내들로 삼은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 욥 1:6; 2:1)은 『자기들의 처음 지위[천사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셋째 하늘]를 떠난』(유 1:6) “타락한 천사들”이다. 천사들은 본래 “물리적인 몸”이 없는 “영들”(히 1:7,14, 벧전 3:19)이지만, 그 “범죄한 천사들”은 이 땅에 내려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육체”를 입었고, 사람들의 딸들에게 들어가 그들과 동침했을 때, 그 딸들이 “거인들”을 낳게 되었다.<br/><br/>이런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던 “변개된 한글 성서들”은 “거인들”(giants)로 번역하지 않고 “네피림”으로 음역해 버렸다. “개역개정판”을 쓰는 사람들은 “네피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네피림”(Nephilim)은 “하나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이다. 그 유래와 어원이 불명확한[이것은 거짓말이다!] 이 말이 가끔 “거인들”이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인간과 신적인 존재들 사이의 부자연스러운 결합으로 출생한 전설적인[거짓말이다!] 인물들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자손”이요, 사람의 딸들은 “신앙심이 없는 가인의 자손”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결합은 “의로운 셋의 자손들”을 도덕적으로 퇴보하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군상들”은 다음 “다섯 가지 항목”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br/><br/>1) “아담”은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셋의 후손들”은 그러한 “아담의 형상”을 따라 태어났다(창 5:3). 따라서 아무리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한들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수 있겠는가?<br/>2)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전 2:13).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셋의 자손”으로, “사람들의 딸들”을 “신앙심 없는 카인의 자손”으로 해석할 만한 “근거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br/>3) “셋의 자손”과 “카인의 자손,” 곧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어떻게 “거인들”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구원받은 경건한 성도들”과 “구원받지 않은 타락한 죄인들” 사이에서 “거인들”이 태어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진리에 무지한 자들이 “히브리어”인 “네피림”을 그대로 음역하면서 답변을 얼버무리는 것이다. 만일 “네피림”으로 음역하는 것이 옳다면, “구원받은 남편”과 “구원받지 않은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모든 자녀를 “네피림”으로 불러야 한단 말인가?<br/>4)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들의 딸들”이 각각 “셋의 자손”과 “카인의 자손”을 의미한다면, “카인의 자손들”이 “홍수”로 전멸한 이후에도 어떻게 “거인들”이 다시 나타날 수 있겠는가? 성경은 분명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창 6:4)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br/>5) 성경 어디에서도 “경건한 셋의 자손”과 같은 “경건한 사람들의 혈통”은 찾아볼 수 없다. 마태복음 1장에 제시된 “메시아의 혈통”조차도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다. 일례로 “다말”과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와 같은 여인들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br/><br/>성경의 정의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다(욥 1:6; 2:1; 38:7).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마 22:30)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으며, 자녀를 낳지도 못한다. 그러나 “천사의 지위”를 지키지 않고 “셋째 하늘”을 떠나 이 땅에 내려온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이 “마귀의 천사들”은 “사람들의 딸들”과 성적인 결합을 하여 “거인들”을 낳은 것이다. “거인들”은 “희귀종”이자 “물리적인 돌연변이”로서, “노아의 대홍수” 이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등장했다. “아낙인들”(신 2:11, cf. 민 13:33), “엠인들”(신 2:11), “삼숨인들”(신 2:20), “바산 왕 옥”(신 3:11, 수 12:4; 13:12), “골리앗”(삼상 17:4), “이스비브놉”(삼하 21:16), “삽”[삼하 21:18, “십패”(대상 20:4)], “라흐미”(대상 20:5, cf. 삼하 21:19), “키가 큰 사람”(대상 20:6, cf. 삼하 21:20) 등의 거인들이 이 땅에 존재했던 것이다.<br/><br/>당대에 이 거인들은 “슈퍼맨,” “원더우먼,” “엑스맨,” “헐크” 등과 같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다(창 6:4). “그리스 ․ 로마 신화”에서는 매우 “비도덕적이고 잔인하며 복수하기 좋아하고 변태 성욕을 즐기는 신들”로 등장한다. 이런 사실에 완전히 무지한 변개된 한글 성서들은 “거인들”을 “네피림”으로 변개시켰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 것이다.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하여, 함부로 성경을 변개해서야 되겠는가?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51:5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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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인공지능과 적그리스도 : 사탄의 마지막 유혹</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C%9D%B8%EA%B3%B5%EC%A7%80%EB%8A%A5%EA%B3%BC-%EC%A0%81%EA%B7%B8%EB%A6%AC%EC%8A%A4%EB%8F%84-%EC%82%AC%ED%83%84%EC%9D%98-%EB%A7%88%EC%A7%80%EB%A7%89-%EC%9C%A0%ED%98%B9/</link>
<description><![CDATA[세상이 빠르게 변해 가고 있는데, 특히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은 “인간의 특정 능력을 대체하는 기술”이다. 일례로, “챗GPT”는 “대화”를 잘하는 인공지능이고, “알파고”는 “바둑”을 잘 두는 인공지능이다. 10년 전인 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가 당시 대한민국 바둑계를 평정하고 있던 “이세돌” 9단을 “4 대 1”로 이겼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넘어 “두려움”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공지능은 바둑이면 바둑, 대화면 대화, 그 “특정 분야” 말고는 못한다. 그런데 이제는 “AI”보다 더 뛰어난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가 나오려고 한다. 이것은 “범용 인공지능”으로, “인간의 특정 능력”만 대체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능력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이다. 쉽게 말해 인간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계인 것이다.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Sam Altman)은 향후 5년 안에 “AGI”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반면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AGI”가 올해 안에 출시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심지어 2030년에는 “인공지능이 전 세계 모든 인간의 지능을 합친 것을 능가하는 ‘초지능’(Superintelligence)이 등장할 것”이라 예견했다. 전문가들 대부분은 아무리 길어도 10년 안에 “AGI”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현재 이 땅에 사는 인류 대부분이 머지않아 직면하게 될 현실인 것이다.<br/><br/>특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모두 휴거되어 사라지고 난 후, 대혼란에 빠질 이 세상은 다음과 같은 엄청난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또 그가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주는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형상으로 말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죽이도록 하니라』(계 13:15).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짐승, 곧 “적그리스도의 형상”은 『일부는 철이요 일부는 진흙』(단 2:42)으로 구성된 형태일지 모른다. “철”로 대표되는 “첨단 기계”와 “진흙”으로 대표되는 “생물학적인 생명 및 지능을 갖춘 유기체”가 결합한 “사이보그”(cyborg) 형상처럼 말이다. 그런데 실로 무서운 것은 이 형상에 경배하지 않는 자들이 모두 “목 베임”을 당해(계 20:4) 죽는다는 사실이다.<br/><br/>1978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방영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어린이의 흥미를 유발했던 “애니메이션 &lt;은하철도 999&gt;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머나먼 미래,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로, 인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몸 전체를 기계로 바꾸어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인간이고, 다른 한 부류는 생체 조직을 기계로 교체할 돈이 없어서 늙고 병들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다.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유한 ‘기계 인간’의 취미 생활은 ‘쓸모없이 죽어 가는 생체 인간을 사냥하는 일’이다. 어느 날 한 생체 인간 여성이 기계 인간의 사냥감이 되어 목숨을 잃게 되고, 그녀는 죽기 직전 아들에게 ‘반드시 기계 몸을 얻어 영생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는데...” 이러한 만화가 제작된 것이 불과 48년 전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br/><br/>이렇듯 기계에 대한 공포심은 줄곧 인류의 의식 밑바닥에 자리해 왔다. 이는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기계들, 특히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피곤함을 느끼거나 잠들지도 않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심지어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고, 종국에는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증폭되고 있다.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화된 암울한 미래상을 의미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시나리오”(Dystopian Scenario)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이러한 공포를 소재로 다룬 &lt;터미네이터&gt;, &lt;A.I.&gt;, &lt;마이너리티 리포트&gt;, &lt;매트릭스&gt; 같은 영화가 대중의 큰 공감을 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br/><br/>이처럼 “암울한 미래”가 예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은 “수천억 달러 규모의 막대한 비용”을 들여 “AI 개발과 상용화”에 힘쓰는 것인가? 과연 그들의 “동기”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탄”이 그의 “유혹의 미끼”를 문 “인류 최초의 여자”에게 했던 말 속에 들어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줄을 하나님께서 아심이라』(창 3:5). 『신들과 같이』 되고 싶은 “욕망,” 곧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cf. 창 3:22). 『하늘에 올라가서』 자기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이고,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려다(사 14:13,14) 좌절된 “루시퍼”의 가증스러운 욕망이 “죄악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머릿속”에 그대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신격화 작업”은 “기계 및 AI와의 결합”으로 극대화될 것이며, 그것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절정에 달할 것이다.<br/><br/>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다니엘 8:25에서는 “적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그의 지혜를 통하여 그가 자기 손에 기술을 늘려서 자기 마음속에 자신을 높이고 평화로 많은 것을 멸하리라. 그는 또한 통치자들 중의 통치자를 대적하여 설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 부서지게 되리라.』 “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는 “손 기술”이 아주 뛰어난 인물로 세상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손의 기술”과 연관해서 “피터 럭크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손의 기술을 잘 이용하는 인간은 가장 먼저 신상이나 우상들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대환란 기간에는 그런 ‘손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적그리스도의 온갖 형상들과 동상들을 만드는 일에 이용될 것인데, 이 형상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도 하고 말도 할 것이다(계 13:15). 이때의 ‘손 기술’은 정교한 세공 기술과 함께 ‘전기 ․ 전자 기술’까지 동원된 정밀한 ‘로봇 제작 기술’이 합성되어,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아주 ‘신기한 형상’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야말로 최첨단 과학과 형편없는 원시 종교 행위가 접목되는 ‘괴상한 문명 시대’가 열리는 것인데, 이것은 결코 ‘공상 과학 이야기’가 아니며,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해석한 설명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에 준하는 “불편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br/><br/>한편 “먹는 것”이 금지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도 있었다(창 2:9).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니, 이제 혹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서 생명 나무의 과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함이라.』(창 3:22)라고 말씀하시면서, 죄악으로 타락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후 “생명 나무”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리셨다. 그런데 오늘날 “사탄”은 “기계 및 AI와의 결합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 지난 2016년, “일론 머스크”는 “뉴럴링크”라는 “생명 공학 스타트업”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인간의 뇌에 “컴퓨터 칩”을 이식하고, 이를 통해 뇌에서 발생하는 “생체 신호”를 컴퓨터로 측정 ․ 해독하여 기계를 제어하는 기술을 개발해 왔다. “일론 머스크”는 자기 회사에서 개발한 칩을 이식하면 척수가 완전히 절단된 사람이나 “루게릭병”을 앓는 전신 마비 환자의 운동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심지어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소리를 듣거나 체내 호르몬 수치까지 조절할 수 있어, 우울증, 마약 중독, 간질, 자폐증 등의 증상까지 완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것은 절대 ‘허황된 SF 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뉴럴링크’의 ‘칩’ 개발은 큰 진전을 이루었고 동물 실험에서도 여러 번 성공했다. ‘칩’을 이식한 원숭이가 뇌로 컴퓨터를 제어하는 데 성공했으며, 쥐의 두개골에 실 형태의 전극을 연결하는 실험도 성공리에 마쳤다.”<br/><br/>그뿐 아니라 인류의 수명을 무한히 연장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4차 산업 혁명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3D 프린팅”으로 “바이오 인공 장기”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뼈, 연골, 신장, 심장, 간 등의 기능을 가진 “기계적 미니어처 장기들”을 구축한 것이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일론 머스크”나 “마크 저커버그”처럼 “실리콘 밸리”를 움직이는 거물들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생”을 얻는 것이며, 그 영원한 생명을 갖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므로, “그 기술을 개발하는 자금”을 조달하고자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실제로 “일론 머스크”는 “영생을 꿈꾸는 또 한 명의 인물”인 “엑스프라이즈 재단”의 “피터 디아만디스”(Peter Diamandis) 회장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열네 살 쌍둥이 자녀들은 ‘무한한 기대 수명’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인간이 장수하는 일이 특별히 기술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한한 수명,’ 그러니까 현재의 십 대 청소년들은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br/><br/>알파고 제작 회사인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 ssabis)는 현 세상이 직면해 있는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에너지 부족”으로 보았다. “에너지 결핍” 때문에 사람들이 반목하고 국가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갈망하는 무한한 에너지”는 과연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태양”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태양처럼 “핵융합”을 통해 무한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에너지를 지구상의 어떤 국가든 무한정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과 갈등이 멈출 뿐만 아니라 인류가 겪고 있는 모든 난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면 이 “무한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과연 누가 쥐고 있는가? 사람들은 향후 등장할 “범용 인공지능”(AGI)이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장차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탄”이 육화한 존재인 “적그리스도”가 세상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br/><br/>사탄의 “마지막 유혹”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불편한 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다. 어떤 불편한 현실에 직면하든지 간에 흔들리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기계와의 결합을 통해 누구나 “영생”을 얻고 “신”이 될 수 있다고 떠들어 대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말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임을 믿고, 공중으로 끌려 올라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라. 그리고 멸망해 가는 이 지구에서 단 한 명의 죄인이라도 더 건져내기 위해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모든 일은 “성경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6: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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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판단에 관한 오해 : 극단인가, 정상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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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을 읽다 보면 “서로 상충하는 구절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그가 이혼증서를 써서 그녀[아내]에게 주어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라는 말씀이 언급되는가 하면, 『남편도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1)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이제 가서 아말렉을 치되... 남자와 여자, 아기와 젖먹이, 소와 양, 낙타와 나귀를 다 죽이라.』(삼상 15:3)라는 지시가 떨어지는가 하면,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친구를 위하여 보증을 서...면... 덫에』 “걸린다”(잠 6:1,2)고 경고하는 반면, 『네 친구와 네 아버지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잠 27:10)고 권고하고 있고, 사무엘상 14:24-26에서는 “꿀을 먹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이 적시되는 데 반해, 잠언 24:13에서는 “꿀을 먹으면 좋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라 하는 자는 누구나 지옥불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마 5:22)라고 경고하지만, 고린도전서 15:36에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 어리석은 자야』라고 말한 “바울”에게 “어떤 지옥 불의 심판”도 떨어지지 않았다.<br/><br/>“판단에 관한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이다. 분명 『판단하지 말라.』(마 7:1)라는 명령이 나오지만, 요한복음 7:24에서는 『의로운 심판으로 판단하라.』라는 지시 사항이 내려지고, 고린도전서 10:15에서도 『너희는 판단하라.』라고 말씀한다. 사실 앞서 언급한 “서로 상충하는 본문들”은 모순이나 오류가 아니다. 이는 단지 “모순되어 보인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과 무지, 그리고 오해의 소치일 뿐이다. 이 모든 오해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딤후 2:15) “공부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에, 문맥과 상관없이 아무 구절이나 붙들고 무턱대고 따라 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다. 만약 성경의 어느 한 구절에서는 『판단하지 말라.』라고 명령하고, 다른 구절에서는 『판단하라.』라고 말씀한다면, 거기에는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즉, 서로 상충해 보이는 구절들을 올바르게 나누어 각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br/><br/>사실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라도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특히 의와 불의, 죄, 다가올 심판, 구원, 그리고 거짓 교리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다. 또한 올바른 진리를 제대로 세울 수도, 올바르게 가르칠 수도 없다.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구원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의 행위가 성경적인가, 비성경적인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을 진리의 말씀으로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과 영합한 목사들은 “죄와 거짓 교리, 그리고 비성경적인 실행”에 대해 성경적으로 판단하여 설교하는 사역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마 7:1)라는 말씀을 곧잘 오용한다. 그러면서 죄에 대해 강력하게 꾸짖는 설교자들을, 마치 판단만 좋아하고 관용이나 이해심은 전혀 없는 편협하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가거나 교만하고 오만하며 겸손하지 못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심판으로 판단하라.』(요 7:24)라고 말씀하셨고, 고린도전서 2:15에서는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br/><br/>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거듭났을 뿐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온전히 주관하시는 사람, 곧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가 있다. 심지어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Final Authority)와 그 잣대, 그리고 기준이 “진리의 성경”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영적인 사람”에 대해 감히 무슨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설령 판단을 내린다 한들 어떤 잘못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겠으며, 그 판단에 따라 바로잡아 줄 만한 일로 무엇이 있겠는가? 성경대로 올바르게 분별하는 영적인 사람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으며, 그것이 비성경적인 잘못된 판단이라고 어떻게 조언해 줄 수 있겠는가? 제도권 교회들이나 그 교회들에 속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교회들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것은 비성경적인 교리가 아닙니까? 이것은 성경 말씀에 어긋난 행동이 아닙니까?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사역입니까?”라는 식으로 우리를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올바른 판단 기준”이 되는 “보존된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없음)”이란 구절이 “열세 군데”나 있고, 성경 전체에서 36,000군데 이상이 변개되어 있으며, 신약성경만 해도 2,200단어 이상 삭제된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을 가지고, 어떻게 그 모든 말씀들이 온전히 보존된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절대 권위”로 믿는 교회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br/><br/>혹자는 다음과 같이 따져 물을지 모른다. “왜 이렇게 극단적입니까?” 사실 이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극단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고 “성경적으로 옳은가, 그른가”이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옳은 말”을 하고 있고 “옳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극단적인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기도 한다. “왜 다른 교회들을 판단하고 비평합니까? 왜 다른 교회 목사들을 비판하는 설교를 합니까? 왜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들까지 비난하는 것입니까?” 필자는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되묻고 싶다. “성경을 변개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목사들에 대해 왜 침묵을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비성경적인 ‘교단 교리’와 ‘이단 교리’를 퍼트려,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고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목사들에 대해 왜 침묵해야 합니까? 특히 성경대로 믿는 교회를 파괴하려 했고, 지금도 이 교회와 사역을 무너트리기 위해 온갖 계략을 꾸미고 있는 ‘배교자’들, 그러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그들에 대해 왜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겁니까?” 만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필자에게 던진 그 질문들을 “바울”을 향해서도 똑같이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더 현명하다.<br/><br/>분명 “바울”은 위선을 행하는 “베드로”에 대해 판단했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그를 책망하고 면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티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이는 몇몇 사람이 야고보에게서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에게 속한 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마침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처럼 살지 아니하고 이방인들의 방식을 따라 살면서 어떻게 이방인들을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하느뇨?” 하였노라』(갈 2:11-14). “오, ‘바울’이여, 너무 심한 처사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도들이 ‘기둥’같이 여기는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면박하다니요. 따로 조용히 불러 권면해도 될 것을, 굳이 공개적으로 판단하고 비평할 필요가 있었나요? 아이고, ‘베드로’만이 아니었네요. 당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믿지 못했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당신이 ‘예루살렘 교회’에 잘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바나바’까지 실명을 거명하면서 비평하고 있네요. 아니, 그때 책망하고 면박했으면 됐지, 그것도 모자라 ‘갈라디아 교회들에 보내는 편지’에까지 공개적으로 기록해 두다니요! 향후 ‘2천 년 동안 이 땅에 세워질 모든 교회’가 다 이 서신을 볼 텐데, ‘베드로’와 ‘바나바’의 위신을 생각하면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br/><br/>정말 너무한 일인가? 그러나 “바울”의 판단과 비판, 그리고 책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고 파선해 버린 자들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딤전 1:19,20). 또한 “후메내오”와 “필레토”가 “후천년주의”라는 거짓 교리를 “종창”처럼 퍼트림으로써, 성도들의 믿음을 뒤엎고 있다고 “비판”했으며(딤후 2:17,18), “데마”에 대해서는 악한 현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자신을 버렸다고 “책망”했다(딤후 4:10). 구리 세공자 “알렉산더”에 대해서도 『내게 많은 해를 끼쳤으니, 주께서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라.』(딤후 4:14)라고까지 강도 높게 경고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누군가를 반드시 판단하고 책망하며 비판해야 했을 때, 그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물론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거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름을 밝혀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는, “그가 누구든지 간에” 이름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br/><br/>진리를 정직하게 선포해야 할 “설교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임무”가 주어져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견책하고 책망하며 권고하라』(딤후 4:2). 교리로 견책하고 책망하고 권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 할 대상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판단 없이는 설교할 수 없고, 판단 없이는 말씀을 전파할 수도 없다. 또한 판단 없이는 누군가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견책할 수 없으며, 책망이나 권고 역시 불가능하다. 다만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라는 말씀에 따라 다음과 같은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첫째, 『영적인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기에, “육신적인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육신적인 상태에서 내리는 “육신적인 판단”은 반드시 “또 다른 육신적인 판단”을 낳기 때문이다. 둘째, “영적 분별력을 갖추고 있을 때”만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셋째, “최종권위”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판단해야 한다. 넷째, 판단하더라도 “사람” 자체를 판단하면 안 되고, 그 사람이 했던 말이나 행동, 혹은 그 열매들을 판단해야 한다. 분명 “성경”은 『모든 것들』을 판단한다고 말씀하지, “모든 사람”을 판단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판단”에 대해 어떤 오해도 없기를 바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3: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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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선지서 특강 - 호세아 (5) : 이틀 후에 회복되는 이스라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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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이스라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가서 내 자리로 돌아가, 그들이 그들의 범죄를 인정하고 나의 얼굴을 구할 때까지 있으리니, 그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 나를 먼저 찾으리라』(호 5:15).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멸망하고 포로로 사로잡혀 간 이후에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주님을 온전히 찾은 적이 없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유대인들이 돌아왔을 때도 주님을 찾지 않았다. 초림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1948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국가를 세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불순종과 반역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런 모습은 “야곱의 고난의 때”라 불리는 “대환란”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을 찾게 되는 것인가? “이틀 후”이다.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 이는 그가 찢으셨으나 우리를 낫게 하실 것이요, 그가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틀 후에 그가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그가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목전에서 살리라』(호 6:1,2).<br/><br/>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을 찾고 주님께로 돌아오면, 치유될 수 없었고 나을 수도 없었던 상처가(호 5:13) 깨끗이 치유된다. 사자에 의해 찢겨진(호 5:14) 이스라엘이 치유되는 것이다. 이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한, 단순한 개별적인 영적 치유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의 민족적인 치유이자 민족적인 회복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를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우리를 살리시며...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살리라.』(호 6:1,2)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민족적인 치유와 회복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받으신 고난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지었는데도 우리는 그가 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한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우리는 모두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으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사 53:4-6).<br/><br/>왕으로 통치하실 메시아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에 앞서서 먼저 고난을 받으셔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뿌리 깊은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적인 죽음으로 인해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호세아 6:1,2”은 이런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시대에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치유되어 회복되고 구원받는 것을 말씀하는 내용으로, “대환란 끝”에 이스라엘이 주님께로 돌이키면 회복되는 것이다.<br/>바로 그 “회복 시점”에 대해 선지자 “호세아”는 『이틀 후... 셋째 날』이라고 말하는데, 그때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살아나게”(부활하게) 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셋째 날에... 살리라.』라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살아나는 주체”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우리,” 곧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틀 후”일까? 구약 시대에도 그들은 줄곧 하나님을 거부해 왔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민족적 거부”는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여” 찢고 치셨을지라도, “뿌리째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가 될 만큼 완전히 저주하시지는 않았다. 언제든지 곧바로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셨던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그러한 여지마저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으니, 결국 이스라엘은 “뿌리째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처럼 “회생 불능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이 “에스겔 37장”에서는 “마른 뼈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뿌리째 말라 버려 아무런 소망도 없어 보이는 “무화과나무”에서 다시 푸른 잎이 나오게 하신다. 소망이 사라진 “마른 뼈들”이 『심히 큰 군대』(겔 37:10)를 이루며 살아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나는 시점이 바로 “이틀 후,” 즉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때로부터 “이틀 후”이다.<br/><br/>한편 이 “이틀 후”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라는 말씀에 따라 “2천 년 후”를 가리킨다. 곧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2천 년이 지난 후,” 말하자면 “셋째 날”인 “3,000년대”(천년왕국)에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엿새 후”인 “일곱째 날”(“아담” 이래로 “일곱 번째 천 년”)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이런 사실이 “재림의 영광”을 미리 보여 준 “변형산 사건”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엿새 후[일곱째 날]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떨어져 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어』(마 17:1). 다시 말해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6천 년이 끝난 이후인 “일곱 번째 천 년”(천년왕국)에 “이스라엘 민족”은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br/><br/>특히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회복 시점”과 관련하여 “아침”을 언급한다. 『만일 우리가 계속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 우리가 알게 되리라. 그의 나오심은 아침처럼 마련되어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비처럼 오시리니, 땅에 내리는 늦은 비와 이른 비처럼 오시리라』(호 6:3). 이 “아침”은 『의의 태양』(말 4:2)이 솟아오르는 “재림의 아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침 경점”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그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일는지, 밤중일는지, 닭이 울 때일는지, 아니면 아침일는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라』(막 13:35). 성경에서 “교회 시대”는 “밤”으로 묘사되고, “밤”(“열두 시간,” 요 11:9)은 “네 개의 경점,” 곧 『저녁』(18-21시, 제1경), 『밤중』(21-24시, 제2경), 『닭이 울 때』(0-3시, 제3경), 『아침』(3-6시, 제4경)으로 나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침 경점”인 “제4경”에 재림하신다.<br/><br/>『한편 그 배는 이제 바다 한가운데 있었는데, 바람이 거슬러 불므로 파도에 시달리고 있더라. 밤 제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니』(마 14:24,25). 여기에서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은 “대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에게 박해와 고통을 당하는 “유대인들”을 예표하고, 배가 떠 있는 “바다”는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의 경계인 “거대한 물 층,” 즉 “깊음”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물 층”을 통과하여 내려오셔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다가오시는 것이다. 바로 그 시점이 “네 번째 경점”으로, 『의의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 경점”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 솟아오르리니, 그리하면 너희는 나가서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자라리라』(말 4:2). 『의의 태양이... 치유를 가지고』 “솟아오를” 것인데, 이 “치유”는 앞서 언급한 “호세아 6:1”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낫게 되고, 싸매어지며, 상처가 치유되고, 다시 살아나는 “민족적인 회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br/><br/>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될 무렵, 하나님께서는 “대환란 기간”에 “두 증인”(계 11:3)인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다. 『너희는 내가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호렙에서 규례들과 명령들로 그에게 명했던 내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 보라, 내가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들에게로 돌이켜, 내가 와서 땅을 저주로 치지 않게 하리라』(말 4:4-6).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은 『지식의 부족』(호 4:6)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될 무렵에는 “부족했던 지식”이 다시 채워질 것인데, 이와 연관된 사역을 “대환란 기간”에 “모세”와 “엘리야”가 수행할 것이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러면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하더라』(계 11:3). 다시 말해 “모세”와 “엘리야”가 “셋째 하늘”의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에 있는 “성경 학교”에서 2,500-3,000년 동안 공부한 내용을 유대인들에게 계시해 주고자 돌아오는 것이다.<br/><br/>또한 그 “회복의 날”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 왕국”이 될 것이다. 『그때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자기들에게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오리니, 이는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라.” 하시더라』(호 1:11).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서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두 왕국 모두 “배교했고”(호 6:4; 8:14; 10:10,11), 두 왕국 모두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호 5:5,12). 따라서 두 왕국 모두 “회복될” 것인데, 곧 “하나”로 회복되는 것이다. 『너 인자야, 또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의 동반자 이스라엘의 자손을 위하여.”라고 쓰고 그 다음에 또 다른 막대기를 취하여 그 위에 “요셉, 즉 에프라임의 막대기와 그의 동반자 이스라엘의 온 집을 위하여.”라고 써서 그들을 서로 결합하여 한 막대기가 되게 하라. 그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 있는 땅에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 것이니 한 왕이 그들 모두에게 왕이 될 것이요,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결코 다시는 두 왕국으로 나뉘지 아니하리라』(겔 37:16,17,22). 이들이 “하나의 민족,” “하나의 왕국”으로 회복될 때, “천년왕국”에서 그들을 다스릴 “왕”이자, 인도할 “목자”는 다름 아닌 “다윗”이다. 『내 종 다윗이 그들 위에 왕이 될 것이며 그들 모두에게는 한 목자가 있으리라. 그들은 또한 나의 명령대로 행하고 나의 규례들을 준수하며 그것들을 행하리라』(겔 37:24).<br/><br/>소선지서 “호세아”는 전반적으로 대선지서 “이사야”와 닮은 점이 많이 있다. “호세아”와 “이사야”는 같은 시대에 부름을 받아 사역했기에, “두 선지자”가 선포한 예언의 핵심 메시지는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 『오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는 네가 네 죄악으로 인하여 쓰러졌음이라... 내가 그들의 타락을 치유할 것이요 내가 그들을 마음껏 사랑하리니, 이는 내 분노가 그로부터 돌이켜졌음이니라』(호 14:1,4). “책망”으로 시작했지만, “회복”으로 끝나는 책, 그것이 바로 “호세아”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28: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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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삭제한 성서들</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D%95%98%EB%82%98%EB%8B%98%EA%BB%98%EC%84%9C-%EC%9C%A1%EC%8B%A0%EC%9C%BC%EB%A1%9C-%EC%98%A4%EC%8B%A0-%EA%B2%83%EC%9D%84-%EC%82%AD%EC%A0%9C%ED%95%9C-%EC%84%B1%EC%84%9C%EB%93%A4/</link>
<description><![CDATA[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살이나 뼈가 없는 ‘영’이시지만, 예수님은 살과 뼈가 있는 ‘몸’을 갖고 계셨기에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요 4:24)라고 말씀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나의 손과 나의 발을 보라... 나를 만지고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거나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이다.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모르거나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본성,” 특히 “인성”을 지니실 수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류를 위한 “구원과 구속” 때문이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커다란 틈을 잇는 다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5)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모양』(롬 8:3), 곧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빌 2:8) 나타나신 것이다. “중보자”는 “양편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어느 한쪽 편에만 속해서는 “참된 중보자”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하나님”이어야 하고, “인간 편”에 서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신 분이 나타나셔야만 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취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r/><br/>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많은 미혹하는 자들이 세상에 들어왔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요이 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것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지금 그것이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3).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의 “인성”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동시에,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똑같은 무게로 강조하고 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다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참되신 그분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참되신 그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노라.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 5:20).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처럼 살과 뼈가 있기에 하나님이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의 주장은 쓸데없는 공론에 불과하다.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중의 참 하나님이시요, 사람 중의 참 사람이시다.”라고 고백했듯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니신,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br/><br/>그런데 “변개된 성서들”은 하나같이 “요한일서 4:3”에서 『그리스도』와 『육신으로 오신 것』을 삭제함으로써, 스스로 “적그리스도의 영”이 주관하는 “사탄의 성서”임을 자인하고 말았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개역개정판).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개역한글판성경). 「그러나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대자의 영입니다. 여러분은 그 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세상에 벌써 와 있습니다」(표준새번역). 「but every spirit that does not acknowledge Jesus is not from God. This is the spirit of the antichrist, which you have heard is coming and even now is already in the world」(NIV).<br/><br/>“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관하여 『너희로 예수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the Christ, the Son of God]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믿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20:31)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일서 4:3”에서 『그리스도』를 제멋대로 삭제한 “변개된 성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음을 보여 준다. 그뿐만 아니라 『육신으로 오신 것』을 임의로 제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도 부정해 버렸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또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요일 4:3)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했다. 이 엄중한 “경고문”에 따르면, “변개된 성서들”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책”이 아닐 뿐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영이 개입한 책”임이 분명해진다.<br/><br/>종교 사상 중에 “영지주의”라는 것이 있는데, 영어로는 “Gnosticism”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철학적 개념에서 비롯된 “이원론적인 사상”으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은 함께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말하자면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둘 사이에 어떤 결합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기독교 철학”과 “신학” 안으로 슬며시 파고들어 왔는데, “영지주의”에 노략질당한 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더러운 육신을 입으실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더러운 육신을 입으셨다면 그분은 분명 하나님이실 리가 없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던 예수님은 “단순한 허상”에 불과했으며, “예수”라는 “어떤 환영”을 본 것이지, 정말로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거룩한 분께서 세속적인 육신을 절대로 입으실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육신이 속되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곧 더러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그 육신을 입으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머리를 숙여 감사할 일이지, “영지주의 이론”을 들먹이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구실로 삼을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를 가리켜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요이 1:7)라고 경고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육신으로 오신 것』(요일 4:3)이라는 말씀을 삭제한 “개역개정판,” “개역한글판성경,” “표준새번역” 등은 스스로 “미혹하는 성서”이자, “적그리스도의 성서”임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<br/><br/>특히 “변개된 성서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사실”도 제거해 버렸는데,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성령으로 의롭게 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셨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셨으며,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고 영광 가운데로 들려 올라가셨음이라.』(딤전 3:16)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을 삭제해 버린 것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개역개정판).<br/><br/>이 본문이 들어 있는 300개의 헬라어 필사본 중에서 오직 “다섯 개의 후기(9,12,13세기) 필사본”에서만 『하나님』이 삭제되었다. “알렙,” A, C 같은 “대문자 필사본들”은 “하나님”이나 관계 대명사 “who” 중 어떤 것으로도 번역될 수 있게끔 단어를 변개했다. 이에 반해 “이그나티우스”(A.D. 110), “히폴리투스”(A.D. 235),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A.D. 265), 니사의 “그레고리우스”(A.D. 394), 타소의 “디오도루스”(A.D. 394), “디디무스”(A.D. 398) 등은 이 부분이 『하나님』으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A.D. 400년 이전에는 이단자 “오리겐”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삭제했을 뿐이다. “이탈리아”의 &lt;디오다티성경&gt;, “스페인”의 &lt;레이나 - 발레라성경&gt;, “독일”의 &lt;루터성경&gt; 등 전 세계에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된 모든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로 기록되어 있다.<br/><br/>성경 변개자들은 하나같이 “ΘΕΟΣ”(하나님)의 “첫 번째 글자”(Θ)와 “마지막 글자”(Σ)만 사용하여 “하나님”을 약자로 기록한 “ΘΣ”(세타 시그마)를 “관계 대명사”(who, which)를 뜻하는 “ΟΣ”(오미크론 시그마)로 잘못 읽은 것이다. 그들은 약 20명의 교부들이 저술한 책들과 27권의 성구집들, 252개의 소문자 필사본들, 3개의 고대 역본들과 같은 “초기 증거들”에서 『하나님』이 분명하게 발견됨에도 이런 짓을 자행했다. 특히 대문자 필사본인 “A”(알렉산드리아 사본)의 “Θ”(세타)라는 글자가 세월이 흐르면서 “중간의 가로획”이 색깔이 바래 희미해지기 전까지 『하나님』으로 읽혔다는 점을, 지난 300년 동안 수많은 학자가 직접 목격하고 증언했음에도 현대 비평학자들은 무시했다. 실제로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처음 발견될 당시(1628년)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1758년에는 “그”(he)로 변개되었고 오늘날 “변개된 성서들”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br/><br/>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시금석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나타나셨는지”의 여부에 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변개된 성서들은 이런 중요한 진리를 없애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원무궁토록 사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은 구원받는 데 있어서 “필수 조건”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그저 다른 종교 창시자들이나 지도자들처럼 죄 있는 단순한 “사람의 아들,” 곧 “인간”에 불과했다면, 또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무리 그분을 잘 믿었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죄들 가운데 머물러 있으며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것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과 참 구주를 없애는 것이며,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희망 없는 미래로 저주하는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14: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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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구령의 열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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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의 나무니, 혼들을 이겨오는 자는 현명하니라. (잠 11:30)<br/><br/><br/>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옥을 향해 질주하는 불쌍하고 가련한 ‘혼들’(souls)을 하나님께로 ‘이겨오는 일’(winning)”이다. 이것이 바로 “구령”(Soul Winning)이다. “구령”은 일종의 “영적 전쟁”인데, 치열한 영적 전장에서 “구원받지 않은 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게 함으로써, 그 혼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들과 싸워 “이기고,” 그 혼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오는 일”인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구하여 내셔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으니』(골 1:13). “혼들을 구해 내는 과정”은 그 혼들을 장악하고 있는 『흑암의 권세』와 격렬하게 싸우는 과정이기에, 변개된 “개역개정판”이나 “개역한글판성경” 또는 “정동수”의 “흠정역”처럼, “win”이란 단어를 “얻다” 정도의 “사전적인 의미”로 번역해서는 “구령의 참된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<br/><br/>언젠가 “경상북도 순회 설교”에서 여정을 함께했던 한 형제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목사님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다가 하늘로 들려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강단에서 설교하는 중에 올라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기도하는 중에 올라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성경 말씀을 가르치다가, 아니면 상담을 하다가, 아니면 지금처럼 순회 설교를 하다가 들려 올라가고 싶습니까?” 그전에는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중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 질문을 받았을 때는 “순회 설교를 하는 중에 들려 올라가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바뀐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순회 설교 둘째 날, 우리 일행이 단 한 명도 구령하지 못한 “경산 오거리”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필자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신 아주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날 필자는 오전 내내 “달성군 화원역”을 시작으로 “수성구 범어역”까지 “대구”의 다섯 지역을 네 시간 정도 이동하면서 20분 분량의 설교를 5회, 곧 전체 “1시간 40분 동안”을 설교한 것인데, 그것도 마음이 가장 완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다. 첫째 날 일정에서는 설교에 경청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전도지도 잘 받아 가고 영접 기도도 따라 하는 등 복음을 전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둘째 날 복음을 전한 “대구광역시”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사람들이 먹고살 만해서 그런지,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과, 단단하게 굳어 버린 완고한 마음속을 복음의 씨앗이 파고들어 가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절감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심판”과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파해야만 했고 그만큼 필자의 온몸도 지치고 소진되어 갔다. 그야말로 치열한 “영적 전쟁”이었던 것이다.<br/><br/>그렇게 사투를 벌이듯 복음을 전하다가 “경산 오거리”로 온 것인데, 그곳 사람들 역시 들은 체 만 체했다. 날씨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오전과 달리 하늘에는 어느새 먹구름이 짙게 끼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다. 설교하는 동안, 중간중간 ‘설교를 마칠 때까지는 비가 오지 않도록 비구름을 붙잡아 주옵소서.’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렇게 완고한 죄인들을 향해 좀 더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 복음을 전하면서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쳐 갈 무렵, 하늘에서 먹구름이 마구 일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시며 위로를 주시는 것 같았다. “힘을 내라! 네가 설교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고 있노라. 내가 네 설교를 기뻐하고 있으며, 너를 통해 영광을 받고 있도다!” 마침 “요한복음 3:16”의 말씀을 죄인들에게 선포하려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감정과 확신 그리고 용기”에 힘입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을 더 우렁차게 외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저 옛날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저 하늘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스테판”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느껴졌다.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특별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br/><br/>오래 전 어느 신문에 “비극적인 기사” 하나가 실렸다.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평소에는 그토록 다정하게 지내던 자기 집 “큰 개”에게 물려 죽은 사건이었다. 그 개는 주인이나 자기 새끼도 문다는 성질 사나운 대형 “도사견”이었다. 이 난폭한 개가 아이를 물고 30분 동안이나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녔음에도, 주위에 있던 100여 명의 “방관자” 중 어느 누구도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살려 달라”는 아이의 처절한 비명을 못 들은 척 외면하거나 눈앞의 광경이 너무나 무서워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야말로 매정하고 비정한 세태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벧전 5:8) 다니는 “마귀”는 그 포악한 “도사견”같이 수많은 죄인들의 혼을 물고는, 그들이 지옥으로 떨어질 때까지 잔인하게 으르렁대고 있다. 누가 “그들의 생명”을 건져 낼 것인가? 마귀에게 물린 자들이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들을 외면하겠는가?<br/><br/>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이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그 비극에서 건져 낼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죽음으로 끌려가는 자들과 살해될 자들을 구해 주는 것을 삼가고 말하기를 “보라,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잠 24:11,12)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 어찌 주시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혼을 지키시는 분이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분께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지 않으시겠느냐?』(잠 24:12) “구령의 열정”도 없고, 복음 전파에 관심조차 없는 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죄인들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처럼 처신한다. 이 시대의 매정한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세상이 깨닫지 못한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 괜히 복음을 꺼냈다가 어색한 관계가 되는 게 싫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양 비겁하게 살아간다. 죽음으로 끌려가는 죄인들이, 바로 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했던 그 죄인들이 내일 아침에도 과연 살아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가? &lt;구령의 열정&gt;의 저자 “오스왈드 스미스”는 이렇게 외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 집을 나서는 상여를 바라볼 때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럴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고귀한 혼들이 우리 주위에서 암흑과 절망의 어둠 속에 빠져 영원한 파멸로 치닫고 있음을 보면서도, 아무런 고통이나 아픔도 느끼지 않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은 채,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버린 이 현실을 보라!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민의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지만, 항상 그런 애통함을 간직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다.”<br/><br/>“알렉산더 더프” 목사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는 교회는 머지않아 ‘복음적인 교회’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으며, “진젠도르프”는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와 관계없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운명이 정해졌다.”라고 말했다.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것을 나의 고귀한 의무로 여긴다.” 영국의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는 “천사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오직 ‘바울’과 당신, 그리고 나 같은 존재들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스코트” 목사는 “교회에 명령이 떨어졌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지체하는 것은 명백한 불순종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복음 전도자 “윌버 채프만”은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전략들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 교회 안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성경을 통해 배운 진리의 말씀대로 삶 속에서 실제로 살아 내는 것이다.”<br/><br/>앞서 언급한 “오스왈드 스미스”는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는 수많은 교회 활동 때문에 지칠 정도로 일하지만, 정작 교회의 진정한 임무인 복음을 전파하고 잃어버린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오는 일은 거의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으나 마나 한 “부끄러운 교회들의 현주소”이다. 또한 출산 장려금을 쥐여 주고, 집을 지어 주며,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 주고, 불우 이웃을 도와주며, 동성애자들을 보호하고, 독거노인들에게 김치를 담가 주거나 연탄을 배달해 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교회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이다. 특히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채, 세상 정욕들로 마음을 채우고 있는 모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br/><br/>이러한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1846년부터 “인도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바친 “로열 와일더” 목사의 삶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미들베리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세상에서 부와 명예가 보장된 탄탄한 앞날을 뒤로한 채 “앤도버신학교”를 거쳐 “인도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는 인도의 3,000여 개 마을을 30년 이상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가 배포한 전도지는 3백만 장에 달했다. 또한 그는 거리를 배회하는 3,300명의 아이들을 교회와 선교 학교로 데려와 가르치기도 했다. 그 결과 수많은 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폰 웰츠” 남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이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족’의 위치에서 내려와, 평생을 종으로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겠다!” 이에 그는 “남작의 지위”를 버리고 부동산과 재산을 모두 포기한 채 척박한 “남미”의 “수리남” 땅으로 들어가 원주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을 섬겼다. “그의 고백”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데, 내게 섬기는 일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리요? 모든 허영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발아래에만 거하며 모든 것을 바치겠다.”<br/><br/>“물 건너 생명 줄 던지어라. 누가 저 죄인을 구원하랴. 멸망 중에 빠진 죄인이니, 이 생명 줄을 누가 던지려나(1절). 너 빨리 생명 줄 던지어라. 형제여, 왜 지체하고 있나. 보아라, 죄인들 떠나간다. 이 ‘구조선’ 타고서 속히 가세(2절). 시급히 생명 줄 던지어라. 극심한 고난을 당하누나. 사망의 바다와 세상 물결, 저 캄캄한 곳으로 쉬 가겠네(3절). 이 세상 풍파는 쉬 지나고, 건너편 언덕에 이르리니, 형제여, 왜 지체하려느냐. 이 생명 줄 던져서 구원하게(4절). 생명 줄 던져, 생명 줄 던져, 물속에 빠져 간다. 생명 줄 던져, 생명 줄 던져, 지금 곧 던지어라(후렴)”(찬송가 &lt;영광을 주께&gt;, 475장). 이 찬송가는 1888년 미국의 침례교 목사 “에드워드 어포드”가 작사, 작곡한 곡이다. 그는 “보스턴” 부근의 작은 마을 “웨스트우드교회”에서 사역하던 1886년 어느 날, “난타스켓” 해변의 “해난구조본부”에서 구조대원들이 “난파선 승객들”을 구출하기 위해 “생명 줄을 던지는 훈련 장면”을 목격하고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생명 줄을 던져라!” 하면서 크게 소리치는 구조대원들의 외침을 가사에 그대로 담아낸 것인데, 이 찬송의 절박한 외침처럼 우리 모두는 죄인들이 “불못,” 곧 영원한 “불바다”로 던져지기 전에 그들을 속히 구해 내야 한다.<br/><br/>여러분은 “영원한 불못”으로 끌려가는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 현재 얼마나 위험천만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한번은 “어떤 목사”가 “이제 곧 ‘급행열차’가 지나갈 선로 위에서 ‘술’에 취해 깊이 잠들어 버린 사람”에 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회중들에게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엄숙하게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먼저 그 술 취한 사람을 선로 밖으로 끌어낼 겁니다. 물론 곱게 다룰 수는 없겠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서 차분하게 걸어 나오게 할 수도 없을 겁니다. ‘정신을 차려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멱살이라도 거칠게 움켜잡고 끌어내야 할 겁니다. 설령 너무 힘에 부치고 지쳐서 그 사람 옆에 주저앉게 된다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끌어낼 겁니다.” 그러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상태가 바로 사망과 지옥으로 끌려가는 모든 혼들이 처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선로에 쓰러진 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의 열차가 당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br/><br/>『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내게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는 내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정녕 내게 화가 있으리라! 내가 기꺼이 이 일을 하면 상이 있으려니와 기꺼이 하지 아니한다 해도 복음의 경륜이 내게 맡겨졌음이라. 그렇다면 내 상이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인한 내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로다』(고전 9:16-18).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부득불 해야 할 일』이다. 절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불가피한 일”이며, 극심한 두려움과 강한 압박이 밀려오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심지어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때 그에게 “화”가 미칠 것으로 여겼다. “구령의 열정”이 없는 성도는 “깊은 잠에 빠진 성도”이고, “구령의 열매”가 없는 교회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죽은 교회”이다.<br/><br/>“신실한 구령자”의 “복음 전파”를 통해, 죄인들이 돌이켜 회개의 진실한 눈물을 흘리고, 마시던 술병을 내던지며, 창녀 짓을 청산하고, 도박과 폭력을 멈추며, 자살의 늪에서 벗어나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행위를 중단하는 “기적”을 본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도 여전히 안일하게 앉아만 있겠는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막 8:36) 한 사람의 혼은 세상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녔기에, 우리가 구령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령의 열정”을 품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가 돼라. “눈물”로 씨를 뿌리고 “귀한 씨”를 가지고 나가서 울라!(시 126:5,6) 열정이 식었다면, “구령의 열정”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 『현명한 자들은 창공의 광명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의로 돌이키는 자들은 별들처럼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단 12: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06:1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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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선지서 특강 : 호세아 (4) 아내의 지위를 회복하는 이스라엘</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C%86%8C%EC%84%A0%EC%A7%80%EC%84%9C-%ED%8A%B9%EA%B0%95-%ED%98%B8%EC%84%B8%EC%95%84-4-%EC%95%84%EB%82%B4%EC%9D%98-%EC%A7%80%EC%9C%84%EB%A5%BC-%ED%9A%8C%EB%B3%B5%ED%95%98%EB%8A%94/</link>
<description><![CDATA[선지자 “호세아”가 사역했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13:16)했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행음』(9:1)하면서 『우상들과 연합』(4:17)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율법을』(4:6) 잊어버렸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4:1) 거부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총체적으로 배교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음과 같이 “심판과 멸망”을 경고하신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의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에프라임은 그들의 죄악 가운데 패망할 것이요, 유다도 또한 그들과 더불어 패망하리라... 유다의 고관들은 경계를 옮기는 자들 같았으므로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 위에 물같이 부으리라』(5:5,10).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잊어버리고 신전들을 짓고, 유다는 방벽 친 성읍들을 많이 세웠으나 내가 그의 성읍들 위에 불을 보내리니, 불이 그 궁전들을 삼키리라』(8:14). 『주께서 또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의 행위대로 벌하실 것이며,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12:2).<br/><br/>특히 『그 날에...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1:5) 꺾으실 것이다. “이스르엘”은 “호세아”가 취한 음란한 아내 “고멜”이 “로루하마”와 “로암미”를 출산하기 전에 낳은 “첫 번째 아들”이었다.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흩으시다”는 뜻인데,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심으셨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버리시는” 것이다. 이러한 심판을 위해 적들은 『주의 집[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독수리처럼』(8:1) 올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붙잡기 위해 쫓고 추격할 것이다(8:3). “독수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앗시리아 왕” 또는 “바빌론 왕”을 가리키고, “예언적으로는” 대환란 기간에 이스라엘을 대대적으로 박해할 “적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이스라엘을 향해 계속 타오를 것인데, 이에 주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오 사마리아야, 네 송아지가 너를 버렸느니라. 내 분노가 그들을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무죄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느냐?』(8:5)<br/><br/>이렇듯 이스라엘은 절대로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는 그들이 바람으로 심었으니 회오리바람으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 줄기가 없으니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설령 열매를 맺는다 해도 타국인들이 그것을 삼켜 버리리라』(8:7). “바람”으로 심었는데 “회오리바람”으로 거두게 된다. 잔잔한 미풍이 태풍이 되어 되돌아오는 격이다. 언제나 심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두는 법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이다! “하나님의 심판”도 마찬가지여서, 죄를 심으면 그 죄에 상응하는 심판보다 더 큰 심판을 거두게 된다. 출애굽 당시 “아론의 금송아지”는 약 3천 명이 쓰러져 죽는 심판을 초래했고(출 32:28),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는 민족 전체를 멸망시키고 “앗시리아”에 의해 포로로 사로잡혀 가게 만드는 심판을 낳았다. “대환란 기간”에는 더 극심한 심판을 불러올 것이며, 특히 “재림 때”는 “문자 그대로”의 “회오리바람”으로 거두게 될 것이다(사 40:24; 66:15, 렘 23:19, 겔 1:4, 나 1:3, 슼 9:14 등). 『그러므로 그들은... 타작마당에서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쭉정이 같고 굴뚝에서 나는 연기 같으리라』(13:3). 『그 대신 내가 그들을 회오리바람으로 그들이 알지 못하는 모든 민족 가운데로 흩어 버렸느니라. 그들 이후에 그 땅이 그처럼 황폐하여 아무도 지나가거나 돌아온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놓아두었음이라』(슼 7:14).<br/><br/>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삼켜지고 “빈 그릇” 같이 된다. 『이스라엘은 삼킨 바 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기쁨이 없는 그릇같이 되리라』(8:8). “남왕국 유다”도 마찬가지 신세가 된다. 『바빌론 왕 느부캇넷살이 나를 삼켰으며 나를 짓밟았으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였으며 그가 용처럼 나를 삼켰으며 그가 나의 맛있는 것들로 그의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느니라』(렘 51:34). 이처럼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삼켜지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침공”으로 그들이 짓밟히고 멸망하며 약탈당하고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것을 나타내지만, 예언의 이중적인 적용에 따라 “교리적으로” 보면 대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에 의해 이스라엘이 짓밟히고 멸망하고 약탈당하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br/><br/>특히 “삼켜지는 것”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대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유대인들을 실제로 먹고 삼키는 “식인 행위”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도 십분의 일이 있을 것이요 그것이 돌아와서 먹힐 것이니 잎이 떨어져 줄기가 남아 있는 보리수나무와 상수리나무처럼, 거룩한 씨도 그 줄기가 되리라.” 하셨더라』(사 6:13).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지식이 없는가? 그들이 빵을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주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시 14:4). 『다른 신을 급히 좇는 자들의 슬픔이 커지리니 나는 그들이 바치는 피의 술제물을 바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름들도 내 입술에 두지 아니하리라』(시 16:4). “대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짐승의 형상”에 경배하지 않고 “짐승의 표”도 받지 않는 “환란 성도들,” 특별히 “유대인 환란 성도들”을 “참수형”에 처할 것인데(계 20:4), 곧 그들의 “목”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이에 “적그리스도”는 그렇게 목이 잘린 인간들을 제물로 바치라면서 “피의 제사”를 요구할 것이며(시 16:4, 계 6:9-11),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많은 유대인들”은 목이 잘린 채로 제단에서 마귀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그때 “적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은 그렇게 죽은 “몸”을 “인육”으로 먹게 된다. 『너희가 또 내 백성의 살을 먹고 그들에게서 가죽을 벗겨 내는도다. 그들이 백성의 뼈를 부수어 잘게 다지기를 마치 솥과 가마솥 안에 넣을 고기처럼 하는도다』(미 3:3). 성경은 그렇게 먹히고 삼켜질 “사람들의 수”에 관해서도 『십분의 일』(사 6:13)이라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돌아온 유대인들 가운데 『십분의 일』이 잡아먹히는 것인데, 실로 상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처럼 끔찍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자기들을 구속하신 주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상 숭배”를 통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에프라임이 지독하게 주를 분노케 하였으므로 주께서 그의 피를 그에게 남겨 놓으실 것이요, 그의 주께서는 그의 책망을 그에게로 돌리시리라』(12:14).<br/><br/>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또 내가 거기에서 그녀에게 그녀의 포도원을 주고 아콜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으리니, 그녀가 거기에서 그녀의 젊은 시절처럼, 또한 그녀가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처럼 노래하리라』(2:15). 이 구절에서 『거기』는 “광야”를 가리킨다. “대환란 기간”에 이스라엘은 그 옛날 출애굽 했던 때처럼, 다시 “광야”로 들어갈 것인데(2:14),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광야”에서 『아콜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겠다고 말씀하신다. “아콜 골짜기”는 “아이 성 제1차 전투”를 패하게 한 장본인, 곧 “아칸”과 그의 가족을 백성들이 돌로 쳐서 죽이고 불로 태운 장소로서(수 7:24-26), 이스라엘의 카나안 정복 전쟁에 있어 진노의 심판과 멸망과 징계와 저주를 의미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소망의 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노의 심판으로 완전히 멸망하고 황폐케 되어 도저히 회복될 가망성이 안 보이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심으로 그들을 완전히 회복시키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마른 뼈들”이 큰 군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고(겔 37:1-14), “완전히 뿌리째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가 다시 소생하는 것이다(마 24:32). 이러한 위대한 역사가 “광야”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광야,” 특히 “페트라”(셀라)에서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아슬아슬하게 숨어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전히 회복되면서 주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땅”으로 다시 들어갈 것이고, 그날에 그들은 “환희의 노래”(2:15)를 부르게 될 것이다.<br/><br/>그런 가운데 이스라엘은 “아내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주가 말하노라. 그 날이 이르리니 너는 나를 이쉬라 부르고, 다시는 나를 바알리라 부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녀의 입에서 바알들의 이름들을 제거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들의 이름으로 기억됨이 없으리라』(2:16,17). “바알리”는 “주인”을 의미하고 “이쉬”는 “나의 남편”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주인”으로서의 관계를 넘어 “남편”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혼인하신다는 예언”으로 절정을 이루게 된다. 비록 지금은 배교해서 떨어져 나간 상태, 곧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음행하고 간음한 상태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음란한 아내』(1:2)를 다시 데려와 그녀와 정혼하심으로써 회복시키신다.<br/><br/>특히 성경은 『또 내가 너를 내게 영원히 정혼시키리니, 정녕, 내가 너를 의와 공의와 자애와 자비들로 내게 정혼시키리라. 내가 신실함으로 너를 내게 정혼시킬 것이니 네가 주를 알게 되리라.』(2:19,20)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혼인”에 관해서는 동시대에 사역했던 선지자 “이사야”도 예언했다. 『네가 더 이상 버리운 자라 칭함받지 아니하겠고, 네 땅이 더 이상 황폐한 곳이라 칭함받지 아니하겠으나 너는 헵시바라, 네 땅은 뷸라라 불리리니 이는 주가 너를 기뻐하며 네 땅이 혼인하게 될 것임이라』(사 62:4).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는 말이고, “뷸라”란 이름은 “혼인한다”는 뜻이다.<br/><br/>한편 이 구절에서 주목할 부분은 『땅이 혼인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분의 아내로 다시 회복시키실 때, “영적인 회복”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의 물리적인 회복”도 함께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땅”이 소위 “중생”(거듭남)을 하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9:28에서는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천년왕국” 기간을 가리켜 『새 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단어에 대한 “영어 표현”은 “regeneration”인데, “땅이 거듭나는(중생하는) 것,” 곧 “땅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호세아 2:21,22에서는 『그 날에 내가 들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나는 하늘들을 들을 것이요, 그들은 땅을 들으리라. 또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들을 것이요, 그들은 이스르엘을 들으리라.』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혼인”을 말씀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땅의 회복”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내의 지위”가 회복되는 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들의 땅에 영원히 심으실 것이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다 심으리니 그들이 다시는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그들의 땅에서 뽑히지 아니하리라. 주 너의 하나님이 말하노라』(암 9:15).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36: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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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재물을 신뢰하는 변개된 성서들</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C%9E%AC%EB%AC%BC%EC%9D%84-%EC%8B%A0%EB%A2%B0%ED%95%98%EB%8A%94-%EB%B3%80%EA%B0%9C%EB%90%9C-%EC%84%B1%EC%84%9C%EB%93%A4/</link>
<description><![CDATA[하나님의 부르심(Divine Calling)을 받은 “목사”는 그 누구보다도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목사”(감독)가 될 수 있는 자격 조건 중 하나는 『더러운 이익[filthy lucre]을 탐내지』(딤전 3:3, 딛 1:7) 않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폰토, 갈라디아, 캅파도키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벧전 1:1) 교회들의 “목사들”(장로들)에게 권면하기를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고 돌보되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filthy lucre]을 위하여 하지』(벧전 5:2) “말라”고 했다. 사도 “바울”도 『더러운 이익[filthy lucre] 때문에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쳐서 집들을 온통 뒤집어 놓는 그들의 입을 막아야 될 것이라.』(딛 1:11)라고 경고했다.<br/><br/>“더러운 이익”이란, 쉽게 말해 “돈”을 의미한다. 현대인들은 “돈”을 사랑한다. “돈”을 최고로 여긴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배교한 교회들”은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딤전 6:5)하는데, “돈”이 그들의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성경은 『탐심은 우상 숭배』(골 3:5)이고, 또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마 6:24, 눅 16:13) “없다”고 경고한다. 33세의 이른 나이에 성공을 거둔 “앤드류 카네기”가 자신의 비망록에 이렇게 썼다. “인간에게는 우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상 숭배 중에서 최악의 형태는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돈을 숭배하는 것보다 ‘더 비열한 우상 숭배’도 없다. 내가 계속해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돈을 더 많이 버는 방법에 관해서만 몰두하게 되면, 틀림없이 내 인생은 저급한 인생이 되어 회복될 가망이 영영 없어질지 모른다. 따라서 나는 35세에 은퇴할 계획이다.” 하지만 “앤드류 카네기”는 35세에 은퇴하지 못했고, 결국 그가 우려했던 저급한 인생길을 걷고 말았다. 그는 “돈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 우상을 뿌리째 뽑아낼 방법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돈”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문제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의하고, 탐심을 조심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자기가 소유한 것의 풍부함에 있지 않음이라.』(눅 12:15)라고 경고하셨고,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말했다. 또한 『이 세상에 있는 부유한 자들에게 명하여 마음이 교만해지지 말고 불확실한 재물을 신뢰하지 말며,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요하게 주셔서 향유케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라.』(딤전 6:17)라고 권면했다.<br/><br/>그러나 오늘날 배교한 기독교계 안에는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라고 자랑하는 “대형 교회들”이 많다. 이 교회들의 규모와 운영 형태는 여느 “대기업” 못지않으며, 담임목사의 연봉은 수억 원대에 이른다. 또한 “더러운 이익” 때문에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치는 일들이 횡행하고 있으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삯꾼 목사들도 허다하다. 그들의 머릿속은 돈으로 꽉 차 있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할 목사들이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다! 그들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인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를 섬기는 것이니 정중한 말과 그럴듯한 언변으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 『(내가 자주 너희에게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 있느니라.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며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 속에 들어 있고 그들은 땅의 것들을 생각하느니라.)』(빌 3:18,19). 목사라는 사람이 돈을 기대하면서 사역하거나, 먹고살기 위해 목사가 되어 마지못해 양 무리를 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이 아니라 “마귀의 종”이다.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목사에게서 지금 당장 빠져나와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우상 목자” 밑에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며,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익한 논쟁이 일어나느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딤전 6:5).<br/><br/>한편 오늘날 “배교의 시대”에는 “더러운 이익”을 위해 “새로운 성서들”을 출간하는 자들이 있고, 또 “더러운 이익”을 위해 성경을 변개시키는 자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이 구절에서 “변개시키다”(corrupt)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펠레우오”(καπηλεύω)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 물건을 속여 팔아 이익을 취한다는 의미”의 단어이다.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 “성서들”을 펴내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제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켜 사람들에게 속여 파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목적 아래 말씀들이 변질된 “개역개정판”과 “개역한글판성경”은 “더러운 이익,” 곧 “재물”이나 “돈”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그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다음 구절을 변개시켰다. 『제자들이 그의 말씀에 놀라더라.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아,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for them that trust in riches, KJV]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막 10:24) <br/><br/>이 구절에서 “변개된 성서들”은 모두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를 삭제해 버렸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개역개정판).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개역한글판성경).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표준새번역).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쉬운성경). 「The disciples were amazed at his words. But Jesus said again, ‘Children, how hard it is to enter the kingdom of God!」(NIV)<br/><br/>정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일』인 것인가? 구원받는 것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구원받는 것은 “물을 마시는 것”처럼 쉽다. 『또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하더라. 듣는 자도 “오라.” 말하게 하고, 또 목마른 자도 오게 하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게 할지어다』(계 22:17). 구원받는 것은 “선물을 받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롬 6:23). 구원받는 것은 “누군가를 집 안으로 영접하여 맞아들이는 것”처럼 쉽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또한 구원받는 것은 “은행에 예금해 놓은 돈을 인출해서 쓰는 것”처럼 쉬운 일이며, “어떤 초청에 응하는 것”만큼 쉽고, 날씨가 더울 때 “차가운 물로 시원하게 샤워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는 방법”을 매우 쉽고 단순하게 만드셨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뱀이 그의 간계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너희의 마음도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라고 말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는 것에 관한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면” 안 된다. 떠나면 부패하게 된다. 부패하면 구원도 못 받고 버림받게 된다. 버림받으면 결국 “영원한 불못”에서 영원무궁토록 고통받게 된다.<br/><br/>『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막 10:24)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변개된 성서들은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를 삭제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을 삭제한 “헬라어 필사본”은 “네 개”뿐인데, “시내 사본”(Sinaiticus), “바티칸 사본”(Vaticanus), “델타 사본”(Delta), “프시 사본”(Psi)이다. 그런데도 사탄의 걸작인 “NIV”의 해당 구절 각주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일부 필사본에는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가 추가되어 있다.」 이보다 더 “간교한 말”도 없을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네 개의 부패한 필사본”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다수 필사본”과 “모든 번역본”에서 이 말씀을 보존하고 있고, 심지어 &lt;구라틴 역본&gt;을 변개시킨 “제롬”의 “라틴벌게이트”에도 이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절을 인용한 유일한 교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금욕주의를 통한 행위 구원을 가르친 이단자)까지도 이 본문을 지지했는데, 특히 그는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만들어지기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다. 다시 말해 “일부 필사본”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필사본들과 번역본들이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br/><br/>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삭제하고 첨가하는 자들과 그렇게 변개된 성서들을 출간하거나 사용하는 자들은 모두 다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다.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사람』(욥 1:1)이었던 “욥”은 그의 재물을 신뢰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금으로 내 소망을 삼거나 정금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의 믿는 바라.’ 하였다면 내가 내 재산이 많고 내 손에 많이 가졌다고 해서 즐거워하였다면... 이것 역시 재판관에 의해 형벌을 받아야 할 죄악이었으니 이는 내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라』(욥 31:24,25,28).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한 사람』(삼상 13:14)이었던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자기 부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 악으로 자신을 힘있게』(시 52:7) 하는 “악인”을 주님께서 『영원히 멸하시며... 없애』 버리시고 『산 자들의 땅으로부터 뿌리째』(시 52:5) 뽑으실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부유했던 사람인 “솔로몬”은 『자기의 재물을 신뢰하는 자는 넘어질 것』(잠 11:28)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배교의 시대인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의 교회들이 자신의 부와 재물들을 자랑할 때, 주님께서는 그들이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계 3:17)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여기에 “한글 최초”로 삭제하지도, 첨가하지도, 변개하지도 않은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이 있다. “더러운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변개된 성서들을 버리고 올바르게 보존된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온전히 신뢰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18: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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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께서는 교황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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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조금 있으면 하늘들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내가 또 한 번 흔들 것이요, 또 내가 모든 민족들을 진동시키리니 모든 민족들의 열망이 이르리라. 그러면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채우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이 나중 집의 영광이 먼저 집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이곳에 내가 화평을 주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 2:6-9).<br/><br/>『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흰 말을 타고 “유리 바다”를 통과하여 온 우주를 가로질러 이 땅에 내려오실 때, 『하늘들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흔드시고 『모든 민족들을 진동』시키실 것이다. 그러면 바로 그 재림의 날에 모든 민족이 그토록 염원해 왔던 “열망”이 이르게 될 것이다. 『모든 민족들의 열망』이 무엇인가? 목사들과 신학자들 대부분이 착각하고 있듯이 『모든 민족들의 열망[the desire of all nations]』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바로크 시대에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 작곡가였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예수는 만인의 기쁨”(Jesu, Joy of Man’s Desiring)이라는 작품을 작곡했는데, 그는 『모든 민족들의 열망』을 “예수 그리스도”로 오해해 버렸다. 차분한 마음으로 잠시 생각해 보라! 이 땅에 죄가 들어와 인류가 “타락과 멸망의 길”로 나아간 이래로 지난 6천여 년 동안, 과연 어떤 민족이, 어떤 나라, 어떤 국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열망해 왔단 말인가?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역사”였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열망해 온 역사”가 아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소수”에 불과했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열망”이 그랬던 것인지, 언제나 “다수”의 위치에 있었던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오하면서, 그분을 “인류의 역사” 바깥으로 계속 밀어내기만 했을 뿐이다.<br/><br/>그렇다면 『모든 민족들의 열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화평』이다! 『이곳에 내가 화평[peace]을 주리라』(학 2:9).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은 국가 간의 대립보다는 “세계 평화”를 열망한다. 1901년 이래로 모든 교황은 “이 땅의 화평”을 위해 기도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위선자들의 기도에 경청하시지도, 응답하시지도 않는다. 특히 “이 땅의 화평”은 인간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세 “암흑시대”에 일어났던 “제5차 십자군 전쟁 당시”(1217-1221), “로마카톨릭”의 유럽 사회에서 매우 유명해진 “이탈리아”의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이다. 그는 기나긴 “십자군 전쟁”으로 시달리고 있던 유럽 각국의 백성들을 위해, “전쟁 무기”가 아닌 오직 “사랑과 평화의 도구”로 혈혈단신 “모슬렘 진영”에 들어가 “이슬람교의 수장”인 “술탄”을 만나 그를 개종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그가 했던 말은 오늘날 노래로 회자되고 있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가사에 잘 담겨 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생명을 얻나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물론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비록 무위에 그친 일이었지만, 당시 오랜 “십자군 전쟁”으로 지쳐 있던 유럽 사회에서는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노랫말은, 그 안에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구원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증한 “행위 구원”의 교리가 담겨 있고, 특히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성경적 진리”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br/><br/>얼마 전 미국의 국방부 장관인 “피트 헤그세스”가 “이란 전쟁” 관련 “브리핑 기자 회견”에서 “자비를 베풀 가치가 없는 자들(‘이란’)을 향해 ‘압도적인 폭력의 행동’을 내리소서. 사악한 혼들이 그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저주’로 넘겨지게 하소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라고 말하여 세간에 논란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특히 그는 이 발언을 하면서 시편 18:37을 인용하기도 했다. 『내가 내 원수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따라 잡았으며 그들이 진멸되기까지는 내가 돌아오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야말로 “아전인수 격”의 지극히 사사로운 적용인데, 이는 이 구절이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문맥”이기 때문이다.<br/><br/>성경으로 시작한 나라 “미국”이 하나님과 성경을 버리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도 “미국”을 버리셨다. 과연 그러한 미국이 원수들을 추격하여 따라 잡을 수 있겠으며, 또 원수들을 진멸할 수 있겠는가? 한때 “세계 정상의 위치”에 있었던 “영국”과 “독일”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쳐부술 수 있었던 “미국”은 “매사추세츠 주”보다 작은 “한국”과 “베트남”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고 대규모의 손실을 겪고 말았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며 야심차게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이지만, 그의 미국은 작금에 벌어지는 “이란과의 전쟁”에서 예상치 못한 끈질긴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급등한 유가”와 그에 따른 “지지율 하락”도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하지 못하다. 앞으로도 과거처럼 위대해질 수 없다! 『의는 민족을 높이지만 죄는 모든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 “피터 럭크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끝났다.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요나 3장’에서처럼 대통령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인데(6-10절), 그럴 가능성은 너무 희박해서 도박꾼이라도 이런 확률을 가지고는 단돈 1달러도 걸지 않는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당신이 한 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그 의로움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행 26:18) 돌이키라는 것이다.”<br/><br/><br/>한편 지난 4월 1일 “백악관”에서 진행된 “부활절” 관련 오찬 행사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목사들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트럼프의 승리”에 비유하는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쏟아 냈다. 백악관 “신앙 사무실”의 수장이자, “번영 신학자”인 “폴라 화이트” 여자 목사는 “트럼프” 대통령을 극찬하며 다음과 같이 대표 발언을 했다. “당신은 배신당했고, 체포되었으며, 거짓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신 구원자께서 몸소 보여 주신 ‘익숙한 패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듯이, 당신의 역사 또한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악을 물리치셨으며, 죽음과 지옥과 무덤을 정복하셨습니다... 대통령이여, 주님의 부활 덕분에 당신 또한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승리하셨기에 당신도 승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께서 당신에게 이 말씀, 곧 ‘주님의 승리 덕분에 당신이 손을 대는 모든 것마다 승리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음을 확신합니다.” 정말로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br/><br/>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 마귀 들린 은사주의 “거짓 목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가 말하노라. 그들의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신다.” 하는 그 선지자들을 내가 대적하노라. 주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꿈들을 예언하고 그들에게 말하여 그들의 거짓말들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그릇되게 하는 자들을 내가 대적하노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도, 그들에게 명령하지도 아니하였으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전혀 유익이 없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 그 집을 벌하리라... 너희는 “주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다시는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신의 무거운 짐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주 우리 하나님의 말씀들을 변질시켰음이라... 내가 너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너희와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이 성읍을 버리며 내 앞에서 너희를 내버리리라. 또 내가 영원한 책망과 영속하는 수치를 너희에게 가져오리니 그것은 잊혀지지 않으리라』(렘 23:31-34,36,39,40).<br/><br/>그녀의 발언에 이어 단상에 선 “프랭클린 그레이엄”(배교자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목사는, “트럼프” 대통령을, “페르시아”인 “하만”의 계략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낸 “에스더”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주님께서는 ‘에스더’를 통해 페르시아인들, 곧 이란인들이 단 하루 만에 모든 유대인 여인들과 아이들을 살육하려 했던 역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대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에스더’를 일으키셨습니다... 오늘날 이란의 사악한 정권이 원자탄의 불길로 모든 유대인을 살해하고 멸절시키려 함에도, 주님께서 ‘트럼프’ 대통령을 일으켜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이런 때를 위하여 그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 군대를 굽어살펴 주옵소서. 저 이슬람 미치광이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이란 국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br/><br/>특히 그는 2025년 10월 15일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휴전과, 인질들이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놀라운 성과입니다. ‘당신의 리더십’은 역사적입니다. 이것은 많은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통령이여, 바로 당신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번 주, 당신은 언론에서 ‘자신이 천국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농담으로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혼이 안전하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영원을 보낼 것인지’를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언론”은 2025년 10월 13일에 있었던 “인터뷰 내용”을 가리키는데,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가자 지구 휴전 합의 중재로 하늘나라에 갈 가능성이 커졌다고 봅니까?”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하늘나라에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천국행은 아닌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구원 문제”는 차치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화평케 하는 자』가 아닌 것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소위 “복음주의 진영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가 공개적인 석상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라!”라고 강력히 촉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듣기에 좋은 말만 늘어놓는 기도”를 했다는 것은 책망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은사주의 목사,” 그것도 성경에 나오지 않는 “여자 목사” 뒤에 서서 그녀와 자리를 함께한 것은 실로 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과연 하나님께서 “성경적 성별”을 올바르게 실천하지 않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는가?<br/><br/>이러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목사들, 특히 “국방부 장관”을 염두에 두고 때 아닌 쓴 소리를 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교황 “레오 14세”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앞선 “배교자들”의 발언과 기도만큼이나 “교황”의 발언과 기도를 거들떠보지 않으신다. 교황은, 지난 3월 29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성지주일”(聖枝主日, 부활절 전 주일) 미사에서, 성경에도 없는 “삼종기도”(三鍾祈禱,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공경하는 뜻으로 아침과 낮과 저녁에 종을 세 번 칠 때마다 드리는 기도)를 하면서 이렇게 강론했다. “오늘날 세상을 보십시오. 평화를 말하면서 한 손에는 살상 무기를 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전쟁을 축복하는 위선이 가득합니다. 최근 미국의 어떤 이들은 ‘미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을 전합니다...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폭탄에 축복을 내리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유린하며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피 묻은 손으로 올리는 기도는 결코 하늘 문턱을 넘지 못합니다. 참된 평화는 압도적인 화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자기희생과 용서에서 나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살육의 기도를 멈추고, 평화의 왕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교황,” 당신이나 “의의 왕” 앞에 무릎 꿇기 바란다!<br/><br/>아주 그럴듯해 보이는 강론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로마카톨릭”과 “교황”의 “위선”과 “가면”을 잘 알고 계신다. 왜냐하면 지상 최대의 “종교적 위선자”요, “사기꾼”인 “교황”을 수장으로 삼고 있는 “로마카톨릭”은 지상 최고의 “거짓말쟁이”이자, “살인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로, “로마카톨릭”은 오직 기만, 사기, 공갈, 부정, 교활, 아첨 등의 “거짓말”을 통해 자기들의 실체를 철저히 가려 왔고, 고문, 협박, 투옥, 추방, 전쟁 등의 “살상”을 도구로 하여 자기들의 정치적 입지와 종교적 조직을 강화하고 유지해 왔다. 특히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다음과 같은 전략을 즐겨 사용하는데, 거짓말로 자신의 적들을 매수하거나 적절한 타협을 위해 “평화를 위한 협상의 자리”로 그들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충분한 정치적 권력과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권세를 확보했을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로마카톨릭에 위협이 되는 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른다. 그래서 정권을 장악한 교황들은 “이단 사냥”이란 명목으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도나티스트, 폴리시안, 알비겐스, 왈덴스, 재침례교도 등)을 서슴없이 죽였다. 로마카톨릭의 “살인마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높은 절벽에서 내던져 산산조각 나게 했고, 동굴로 피신한 그리스도인들을 동굴 입구에 장작불을 피워 연기에 질식시켜 죽였다. 비틀거리는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목매달아 죽였고, 찢어 죽였으며, 창자를 꺼내기도 했고, 쇠스랑으로 찔러 죽였으며, 물에 빠뜨려 죽였고, 칼로 찔러 죽였으며, 개들이 물어뜯게 해서 죽였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못 박아 죽이기도 했다.<br/><br/>“로마카톨릭”이 전면에 내세우는 “평화”는 “연막”에 불과하다. 오늘날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고 떠들어 대는 “교황들”이나 “종교 통합과 평화”를 외치는 “로마카톨릭”의 거짓말 이면에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반대하는 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죽여야 한다는 “살인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이 자기 이웃들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해악이 있나이다』(시 28:3).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단자, “교황”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성경 위에 군림해 있는 “교황”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율법을 듣는 데서 귀를 돌이키는 자는 그의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리라』(잠 28:9).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07: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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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선지서 특강 : 호세아 (3) : 내 백성이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하는도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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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스라엘 민족”은 거룩하신 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독특한 백성』(신 14:2)이자, 『거룩한 백성... 특별한 백성』(신 7:6), 『독특한 보물... 제사장들의 왕국... 거룩한 민족』(출 19:5,6)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찌고... 굵어지고... 기름으로 덮이니...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렸고, 자기 구원의 반석을 가볍게』 여겼다(신 32:15). 결국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며 배교하고 말았으니, “총체적으로” 배교한 것이다.<br/><br/>우선 “제사장들”이 배교했다. 『강도떼들이 사람을 기다리는 것같이 제사장들의 무리가 하나 되어 길에서 살인하나니, 그들이 추잡한 짓을 행하는도다』(호 6:9).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어떤 말씀들에서도 좌로나 우로나 빗나가지』(신 28:14) 않도록 솔선수범하여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했어야 할 거룩한 제사장들이 오히려 살인자들과 함께 길을 걸었고 자신을 비호하는 세력들과 결탁하고 어울리면서 무죄한 피를 흘리고 추잡한 짓까지 행했던 것이다. 로마카톨릭의 “교황들”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세상 왕들과 야합하여 저지른 죄가 바로 이것이었고, 초림 당시 “제사장들의 무리”가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기 위해 했던 일 역시 이것이었다. 『이에 선임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하고 말하기를 “이 사람[예수 그리스도]이 많은 기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찌하랴? 만일 우리가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처소와 민족을 다 빼앗아 가리라.”고 하더라』(요 11:47,48). 이에 그들은 『그 날부터... 주를 죽이려고 함께 모의』(요 11:53)했고, 또 “선임 제사장들”은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군 지휘관들과 더불어 의논』(눅 22:4)했다. 결국 이 배교한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불법적인 재판을 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선동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로마”에 넘겼다.<br/><br/>다음으로 “선지자들”이 배교했다. 『그러므로 네가 낮에 쓰러지겠고 선지자도 너와 더불어 밤에 쓰러지리니,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호 4:5). 『감찰의 날들이 오고 보응의 날들이 오나니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리라. 선지자는 어리석고 영적인 사람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증오는 크기 때문이라』(호 9:7). 오늘날 “배교한 목사들” 역시 “정상”이 아니다. 성경적 기준은 말할 것도 없고 상식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정상적으로 사역하는 목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텍스 마스”(Texe Marrs, 1944-2019)는 &lt;목사들과 교회들이 미쳐 날뛰고 있다!, Pastors and Churches Gone Wild!&gt;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한편 “구약 시대”에는 거짓 선지자 “발라암”의 미친 짓을,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음성으로 말하여 “막은 일”도 있었는데(벧후 2:16), 그처럼 말 못하는 나귀보다 못한 “영적인 지도자들”이 과거에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다.<br/><br/>또한 “치리자들”도 배교했다. 『그들의 술은 시고 그들은 끊임없이 행음하였으니, 그녀의 치리자들은 수치와 더불어 사랑하기를 “너희는 줄지니라.” 하는도다』(호 4:18). “고관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경계”를 제멋대로 옮겨 버렸고(호 5:10), 자기들의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거짓말”을 기뻐했다(호 7:3). 『그들은 모두 화덕처럼 뜨거워져서 그들의 재판관들을 삼켰으며 그들의 모든 왕들은 쓰러졌으니, 그들 가운데 나를 부르는 자는 아무도 없도다』(호 7:7).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그들을 미워하였으며, 그들의 행실이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낼 것이요 내가 더 이상 그들을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반역자들이니라』(호 9:15). “배교한 왕,” “배교한 제사장,” “배교한 선지자,” 곧 백성들을 율법으로 올바르게 인도해야 할 “정치 ․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배교해 버렸다. 이들은 그들의 민족을 망치는 주역들이었다. 주 하나님께서는 이런 “총체적인 배교”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셨다. 『경이롭고 무서운 일이 그 땅에서 행해지는도다. 선지자들은 거짓되이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그들의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그 마지막은 “진노의 심판과 멸망”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찾으려 했으니 그 사람은 [시내 산의 “모세”처럼, 시 106:23] 장벽을 쌓아 그 땅을 위하여 내 앞에서 갈라진 틈에 서서 나로 그 성읍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이라. 그러나 나는 아무도 찾지 못하였노라. 그러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부어서 내 분노의 불로 그들을 소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보응하였도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 22:30,31).<br/><br/>한편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총체적인 배교”와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내 백성이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너를 거부하리니, 네가 나에게 제사장이 되지 못하리라.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또한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호 4:6). 율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율법을 버린 백성은 반드시 멸망하게 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진리의 성경”과 “진리의 지식”을 무시하고 저버린 한 개인이나 민족 및 국가는 “타락과 멸망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1789년 4월 30일, 미국 뉴욕의 임시 정부 청사 “페더럴 홀”에서 미국 역사상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 워싱턴”이 오른손을 성경 위에 올려놓았을 때, 뉴욕 재판소장 “로버트 리빙스턴”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대통령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미국의 헌법’과 ‘국민의 권리’를 수호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엄숙히 맹세합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최소한 “성경 말씀”을 존중했고, 또 귀히 여길 줄은 알았다.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조지 워싱턴).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고 그 위에 서 있는 나라다”(토마스 제퍼슨).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있든지, 자신의 인생을 참되게 가꾸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묵상하라고 권하고 싶다”(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러나 오늘날 “미국”이 “성경”을 버리자, “하나님”께서도 “미국”을 버리기 시작하셨다.<br/><br/>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한 것”으로 여겨졌다.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의 많은 것들을 기록하였으나 그것들이 이상한 것[strange thing]으로 여겨졌도다』(호 8:12). “하나님의 말씀”이 낯설고 어색하며 불편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는 민족이나 국가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이었다. 『그 땅에는 진리도 자비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음이라』(호 4:1).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하는』(암 8:11) “극심한 영적 기근”이 “이스라엘 백성”을 삼켜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8:02:4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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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책”인가, “두루마리”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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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사탄의 주된 공격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사탄은 그 기록된 말씀을 훼손하기 위해 집요하게 시도해 왔다. 특히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들”과 그 말씀이 기록된 “책”을 제거하고,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은 더욱 강력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훼손의 시도는 &lt;개역한글판&gt;에 이어 &lt;개역개정판&gt;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br/><br/>&lt;한글킹제임스성경&gt;<br/><br/>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말씀들(them)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them)을 보존하시리이다. (시 12:6,7)<br/><br/>&lt;개역개정판&gt;<br/>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보존하시리이다<br/><br/>성경에서 기록된 말씀의 “보존”에 관해 가장 강력하게 선언하는 구절은 “시편 12:6,7”이다. 이 구절을 훼손하기 위해, 사탄은 『말씀들』(words)을 「말씀」으로 바꾸고,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를 「그들을 지키사」로 변개했다.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은 『주의 말씀들』을 받는 영어 “them”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하기 위해 “그것들을 간수하시리니”처럼 대명사로 번역하지 않고, 실제 명사를 그대로 받아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them”(『말씀들』)을 이어받는 두 번째 “them”(『그것들』)을 &lt;개역개정판&gt;처럼 「그들」로 번역하면, 이 “them”은 6절의 『주의 말씀들』이 아닌 5절의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 같은 “유대인들”을 받는 대명사로 보이게 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말씀 보존”에 관해 약속하신 말씀이 “유대인 보존”에 관한 말씀으로 바뀌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사탄의 속임수가 있다. 성경에는 “유대인 보존”에 관한 말씀이 여러 군데 있어서(렘 31:35-37, 말 3:6, 롬 11:25,26 등) 더 이상의 계시가 불필요할 정도다. 그러나 “말씀 보존”(『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에 관한 구절은 “시편 12:6,7”이 가장 직설적이기에(cf. 마 24:35), 이 선명한 구절을 없애면 어떤 그리스도인도 “보존된” 말씀을 소유할 수 없다는 원문비평학자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시편 12:6,7”은 사탄이 제거하고 싶어 할 수밖에 없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br/><br/>&lt;한글킹제임스성경&gt;<br/><br/>이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듣는 각 사람에게 증거함이니 누구든지 이것들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계 22:18)<br/><br/>&lt;개역개정판&gt;<br/>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br/><br/>&lt;개역개정판&gt;은 『책[book]』으로 동일하게 번역되었어야 할 헬라어 “비블로스”(bi;blov)와 “비블리온”(bibli;on)을 “요한계시록”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비블로스”(계 20:15)는 “책”으로, “비블리온”(계 22:18)은 “두루마리”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성경이 지닌 『책』으로서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사탄의 교묘한 전략이다.<br/>고대의 책들이 “두루마리” 형태였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루마리”와 “책”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종이, 옷감, 가죽 등을 “말아 놓은” 것이 “두루마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lt;개역한글판&gt;에서도 「책」으로 번역되어 있던 “비블리온”을 &lt;개역개정판&gt;에서 “두루마리”로 변개한 의도는 무엇인가?<br/><br/>본문 요한계시록 22:18에서 사용된 『책』이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 자체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 “성경” 전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두루마리」라는 표현을 쓰면, 요한계시록이 아닌 “별도의” 예언 두루마리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되어 예언의 권위를 분리시키고,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권위 있는 예언서”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 사탄은 「두루마리」라는 단어를 &lt;개역개정판&gt;에 새로이 도입함으로써 모종의 「두루마리」를 “또 다른 권위”로 제시하고 성경의 권위를 상대적으로 실추시키려 한 것이다. <br/>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계략을 미리 아시고, 『생명의 책』이라는 동일한 표현에 대해 요한계시록 20:12에서는 “비블리온”을 사용하시고, 15절에서는 “비블로스”를 사용하셨다. &lt;개역개정판&gt; 번역자들도 15절의 『생명의 책』 때문에 12절의 『생명의 책』을 “생명의 두루마리”로 변개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그들 스스로가 “비블로스”와 “비블리온”이 동일하게 『책』이라는 뜻임을 자인한 것이며, 요한계시록 22:18의 “비블리온”을 굳이 “두루마리”로 번역한 것은 한 권의 “완성된 책”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의도적인 변개임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br/><br/>&lt;한글킹제임스성경&gt;<br/><br/>모든 성경(scripture)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<br/><br/>&lt;킹제임스흠정역&gt;<br/>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br/><br/>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기록한 “책”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일은 비단 “변개된 원문”에서 번역된 &lt;개역한글판&gt;이나 &lt;개역개정판&gt; 같은 책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보존된 성경인 영어 &lt;킹제임스성경&gt;을 번역했다고 하는 &lt;킹제임스흠정역&gt;도 “성경”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없애 버림으로써 그들 마음대로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다.<br/>“성경”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논의하기 전에 먼저 “책”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말에서 “책을 가져왔다”고 표현할 때는 “책의 내용”을 가져왔다는 뜻이 아니라 “책이라는 물건”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또한 “책을 읽었다”고 표현한다면 “책의 내용”을 읽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이 어떤 동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책”이라는 단어가 “책”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책의 내용”을 의미하기도 함을 보여 준다. “책”의 용례와 마찬가지로, 우리말에서 “성경”은 “성경책”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성경의 내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책을 가져와서 성경의 내용을 읽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성경을 가져와서 성경을 읽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에 무지한 &lt;킹제임스흠정역&gt; 번역자는 “성경”에서 “성경”을 지칭하는 단어인 “scripture”를 모두 “성경기록”으로 번역함으로써, 그의 책에 “성경”은 없고 “성경기록”만 있게 되었다. 웹스터 사전(1828)에서는 “scripture”를 “구약과 신약의 책들; 성경”(the books of the Old and New Testament; the Bible)으로 정의하기에, 그는 우리말 용례뿐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영어 사전”의 용례마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성경”(聖經)에는 “글 경”(經)이라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기에 굳이 “기록”이라는 사족(蛇足) 같은 번역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한글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경은 영어 &lt;킹제임스성경&gt;을 올바로 번역한 &lt;한글킹제임스성경&gt;뿐이다. 이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온전히 드높여 드리는, 한 권의 완성된 “책”(the Bible)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54:2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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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금식” 없이도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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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금식”(fasting)은 “구약 시대”부터 “사도들의 시대”(교회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행해져 왔다. “모세”가 금식했고(출 34:28), “다윗”이 금식했으며(삼하 12:16), “에스라”(스 8:21), “느헤미야”(느 1:4), “에스더”와 “모르드캐”(에 4:16), “다니엘”(단 9:3) 등이 금식했고, 심지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사악한 왕이었던 “아합”도 금식했다. 『아합이 이 말들을 듣고 나서 그의 옷을 찢고 그의 몸에 굵은 베를 두르며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걸음을 조심스럽게 하더라』(왕상 21:27). 또한 “인자”(Son of man)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셨으며(마 4:2), “아셀 지파”의 여선지자 “안나”가 금식했고(눅 2:37), “코넬료”(행 10:30), “바울”(고후 6:5) 등이 금식을 했다. 오늘날 현 교회 시대에 “금식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물론 이러한 금식을 오용하여 “사순절”(“태양신,” 곧 “이집트”의 “오시리스”를 기리기 위해 40일 동안 금식하는 절기)을 지키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금식하는 사람들과 교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금식”을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br/><br/>기본적으로 “금식”은 “기도의 응답”(마 17:21)과 “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또한 “금식”은 신구약 어느 곳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제시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어떤 시험과 고난에 직면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행한 행위”였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금식”에 대해 책망하신 적이 있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금식하였는데도 어찌하여 주께서는 보지 않으시나이까? 우리가 우리의 혼을 괴롭게 하는데도 어찌하여 주께서는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의 금식하는 날에 너희는 기쁨을 찾으며 모든 너희의 일꾼들을 억압하는도다. 보라, 너희가 투쟁과 논쟁을 위하여 금식하며 사악한 주먹으로 치니 너희는 오늘 한 것처럼 너희의 목소리가 높은 곳에 들리도록 금식하지 못할 것이라. 내가 택한 것이 그러한 금식이겠느냐? 그것이 사람이 자기 혼을 괴롭게 하는 날이겠느냐? 이것이 자기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자기 밑에다 베옷과 재를 펴는 것이겠느냐? 너는 이것을 금식이라고 부르며 주께 받아들여질 만한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사악한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억압받는 자들을 놓아주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냐? 굶주린 자에게<br/><br/>네 양식을 나눠 주며 방랑하는 가난한 자를 네 집에 데려오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벗은 자를 보면 입히고 네 골육으로부터 자신을 숨기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3-7) 『그 땅의 모든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일러 말하라. 너희가 그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을 때, 너희가 나를 위하여 금식하였더냐, 정녕 나를 위한 것이었느냐? 또 너희가 먹고 너희가 마실 때에, 너희 자신을 위하여 먹고 너희 자신을 위하여 마신 것이 아니냐?』(슼 7:5,6)<br/><br/>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금식”은 필요하다. 시리아의 “안티옥 교회”에서는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성령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나바”와 “바울”을 “제1차 선교 여행”을 위해 따로 구별했고(행 13:2,3),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라고 권면했던 “바울”은 “금식”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입증했고(고후 6:4,5), 또 자주 “금식”했다(고후 11:27). 물론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어야 하고(슼 7:5), “진실한 금식”이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마 6:16-18), 반드시 “올바른 행실”이 수반되어야 한다(사 58:3-7).<br/><br/>그러나 변개된 “한글 성서들”은 하나같이 “금식”을 삭제했다. 우선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시더라.』(마 17:21)라는 말씀을 통째로 없애 버렸고, 『코넬료가 말하기를 “나흘 전 이 시간까지 내가 금식하고 제구시에 내 집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행 10:30)에서 『금식하고』라는 말씀을 자기 멋대로 제거했으며, 『너희는 서로 권리를 빼앗지 말라. 다만 금식과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고전 7:5)에서도 『금식과』라는 말씀을 삭제했다. 특히 “마귀들을 쫓아내는 사건”에서 “금식”을 삭제했다. 『예수께서 무리가 함께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며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벙어리이며 귀먹은 영아, 내가 너에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자 그 영이 소리지르고 그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나오더라. 그때 그가 죽은 자같이 되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그가 죽었다.”고 하니라.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그가 일어나더라. 그후 주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은밀히 주께 묻기를 “어찌하여 우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하니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으로도 내보낼 수 없느니라.”고 하시더라』(막 9:25-29). 이 본문에서 “변개된 성서들”은 모두 『금식』(29절)이란 단어를 삭제했다.<br/><br/>특히 『이런 종류[This kind]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으로도 내보낼 수 없느니라.』(29절)라는 주님의 답변을 통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마귀들은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이고, 그 “사악함의 정도”가 마귀들마다 다르다. 『그러자 그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일곱 영을 데리고[데려와서] 들어가 거기서 사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더 악화되었더라』(마 12:45, 눅 11:26). “능력”과 “권세”도 마귀들마다 차이가 있다(엡 6:12). 둘째, 어떤 마귀들은 단순히 『기도』(29절)하는 것,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쫓아낼 수 없는데, 우리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금하는 행위,” 곧 음식을 금하는 『금식』(29절)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이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 『금식』이란 어휘를 제거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마귀 들린” 누군가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는 “강력한 무기”와 그 사람을 “더러운 영들”에게서 해방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도구”를 없애 버렸다. 말하자면 “마귀들과의 전쟁”에서 “기도”를 더욱 능력 있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금식”이 “변개된 한글 성서들”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br/><br/>그럼에도 불구하고 변개된 성서들을 쓰는 “은사주의 목사들”은 이 구절을 붙들고, 소위 “축사”를 한다며 “기도와 금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들의 성서들에는 “금식”이 삭제되어 있으니,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마귀 들린 사람”이 되고 마는데, 성경은 이 나라 “대한민국”의 소위 “귀신을 쫓아낸다고 떠들어 대는 가짜 목사들”(조용기, 김기동, 이초석, 박혁 등)을 향해 이렇게 경고한다. 『그 악령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너희는 누구냐?”라고 하더라. 그리고 그 악령들린 사람이 그들 위에 뛰어올라 그들을 짓누르니 그들보다 힘이 센지라, 그들이 상처를 입고 벌거벗은 채로 그 집에서 도망치더라』(행 19:15,16). 속는 자만 “손해”를 보는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8:4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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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역사의 중심 “이스라엘”</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19/%EC%97%AD%EC%82%AC%EC%9D%98-%EC%A4%91%EC%8B%AC-%EC%9D%B4%EC%8A%A4%EB%9D%BC%EC%97%98/</link>
<description><![CDATA[성경의 “주제”는 “구속”이 아니고 “왕국”(Kingdom)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리적 왕국”인 “천국”(Kingdom of Heaven)과 “영적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것이다. 특히 이 “왕국”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메시아 왕국”이다. 왕국에는 백성들이 있기 마련인데,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왕국을 구성하는 “핵심 국가”이자, “핵심적인 백성”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고, 그것도 “무조건적으로” 선정하셔서 “우뚝” 세우셨다. 『내가 바위들의 꼭대기에서 그를 보며 작은 산들에서 그를 보니, 보라, 이 백성이 홀로 거할 것이요, 민족들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아니하리라』(민 23:9). 반면에 “다른 민족들”은 하나로 묶어 “헛것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하신다. 『보라, 민족들은 통 속의 한 방울 물 같고, 또 저울의 작은 티끌같이 여겨지느니라. 보라, 그는 섬들을 아주 작은 것으로 여기는도다... 그분 앞에 모든 민족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그 민족들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곧 헛것보다 못하게 여겨지느니라』(사 40:15,17).<br/><br/>『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는데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 하셨더라』(창 12:1-3, “무조건적으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언약”).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세우시고자 하는 왕국의 질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이다. 위대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되는 질서가 주님께서 의도하신 세계 질서이며, 그러한 “국제 질서”로 재편될 “천년왕국”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숲속 짐승들의 왕 “사자”처럼 “우두머리 국가”가 될 것이다. 그날에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들 중 이방인들 가운데 있으리니 숲속의 짐승들 가운데 사자 같고 양떼 가운데 젊은 사자 같아서 그가 지나가면서 밟고 조각조각 찢으리니 구해 낼 자가 없으리라』(미 5:8). 『그 날에 내가 유다의 총독들로 나무 가운데 불화로 같게, 곡식단 가운데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오른편과 왼편에 에워싼 모든 백성들을 삼킬 것이라. 그리고 예루살렘은 그 본래의 자리, 곧 예루살렘에 다시 거하게 되리라』(슼 12:6).<br/><br/>인류의 “역사”는 “메시아 왕국”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이다. 전체 기간은 “7천 년”인데, 이것은 “재창조 주간 7일”(창 1:3-2:3)에 근거하고 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벧후 3:7)을 창조하셨을 때, 6일 동안 창조하셨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쉬셨다. 이 “7일간의 창조”는 인류의 역사가 “7천 년 동안” 이 땅에 존속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는데, “인류의 역사” 6천 년이 지나고 나면 “마지막 일곱 번째 천 년의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고 이 땅은 “안식”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라고 말씀한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B.C. 4004)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까지 약 “4천 년”의 시간이 흘러왔고, “초림” 이후로는 지금까지(2026년) “2천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왔다. 산술적인 계산만 고려하면, 이미 “6천 년”이 넘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떻게 된 것인가? 우리의 “성경 지식”이 잘못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피터 럭크만” 목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지난 62년 동안(2012년 기준) 가르쳐 왔다. 2000년이 왔다가 갔을 때 나는 내가 가르쳐 왔던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 혹자는 ‘럭크만, 뭐가 잘못된 거죠? 주님께서 2000년도에 돌아오실 것이라고 당신이 말한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날짜를 확정한 적이 없다. 우선 한 가지는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해들이나 날들을 계산하시지 않았던 것처럼(왕상 6:1, 욥 3:6) 계산에 넣지 않으시는 해들과 날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달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의 연도는 우리의 달력과 상관없이 ‘2000년’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br/><br/>세계인이 쓰는 “달력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천 년의 기간”에 반드시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인류 역사의 지향점이 바로 이 “왕국”에 있다. 그래서 “왕국”은 “성경의 주제”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제”이기도 하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 서적”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역사책”임을 기억하라!] 이런 이유로 “왕국”의 중심인 “이스라엘”은 “역사의 중심”이 된다. 더 나아가서는 “예언의 중심”도 되는데, “예언”이 미리 기록된 “역사”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원히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온 세상의 “지리적인 중심”이다. 이 땅은 “세 개의 대륙”(세 인종), 곧 “유럽”(코카서스 인종 - 백인)과 “아시아”(몽골 인종 - 황인)와 “아프리카”(니그로 인종 - 흑인)가 만나는 곳이며, 그 옛날 “에덴”이 위치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창 2:10-14). 이런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정치적 ․ 종교적 ․ 문화적 ․ 군사적 측면”에서 언제나 “세상의 이목”이 그 땅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종교 분쟁국들”의 주요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<br/><br/>이렇듯 “이스라엘”은 “역사의 중심”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책”인 “성경”을 기록하실 때 “유대인들”을 사용하셨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모든 면에서 많으니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이 맡겨졌음이니라』(롬 3:1,2). 성경의 모든 책은 “유대인들,” 곧 『성령으로 감동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벧후 1:21)인 “유대인들”이 기록했다. 예외적으로 “욥기”가 “모세오경”이 기록되기 한참 전에(B.C. 1800-1780), 『람의 친족 부스인[Buzite]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욥 32:2)에 의해 기록되기는 했지만(욥 32:16), “엘리후”는 “나홀”의 아들 “부스”(Buz, 창 22:20,21)의 후손이기에 “유대인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홀”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형제였고(창 22:20) “부스”는 “아브라함”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보존도 되었는데, “구약성경”은 유대인들, 특히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 보존되었고, “신약성경” 역시 “교회 시대 초기”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보존되었다.<br/><br/>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주”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역사의 중심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보내 주셨다.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하나님을 섬김과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조상이며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롬 9:4,5).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요 4:22). 온 인류가 마땅히 경배드려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민족은 오직 “유대인”뿐이었다. 유대인 외에 그 어떤 민족도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하신 분”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br/><br/>사실 “유일신 사상”은 “유대인”에게서 나왔다. 오늘날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유일신 사상을 가진 종교”는 “유대교” 또는 “유대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종교들”밖에 없다. 그 외의 종교들은 모두 “다신교”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주만이 땅의 모든 왕국들의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을』(사 37:16) 지으신 『참 하나님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영원한 왕』(렘 10:10)이시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을 통해 보여 주셨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그분의 백성들이 주님을 온전히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완벽한 신정 통치 국가’가 어떤 나라이고, 또 얼마나 풍성한 복을 받고 있는지”를 “온 세상”에 보여 주심으로써 이방 민족들도 이스라엘을 본받아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민족들이 되게 하려고 하셨다. 진정한 “역사의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높이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마귀들과 우상들”을 섬기는 “이방 왕국들”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따라가고 말았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들에게서 나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했고, 종국에는 “역사의 중심”에서 저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br/><br/>역사의 중심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다음과 같은 “조건적인 약속”이 주어져 있었다. 『내가 오늘 네게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는 주 너의 하나님의 계명들에 네가 경청하면, 주께서는 너를 머리가 되게 하시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너로 위에만 있게 하시고 너로 아래에는 있지 않게 하시리라』(신 28:13). “이스라엘”은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서 온 세상을 “도덕적인 타락”에서 구하고 “이 땅의 부패”를 방지하는 『세상의 빛』(마 5:14)과 『땅의 소금』(마 5:13)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했어야 했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주님을 올바르게 섬겼다면, 그들 자신뿐 아니라 그들이 거하는 “약속의 땅”도 복을 받고 번성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땅”만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이방 민족들”도 평화롭게 된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황금시대”에는, “고대 근동 지역,” 곧 오늘날의 “중동 지역”이 별 큰 싸움 없이 평화로웠다.<br/><br/>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로 나아가 이방 민족들보다 더 타락하기 시작했을 때, “땅”은 더욱 부패하고 버림받았으며 그 주변 나라들 역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작금에 일어난 “이스라엘 - 하마스 전쟁”이나 “이스라엘 ․ 미국 - 이란 전쟁”이 그런 현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전쟁을 끝내실 “메시아 왕”께서 돌아오실 것이고,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열심히 경청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너를 땅의 모든 민족들보다 높게 세우시리라』(신 28:1). BB]]></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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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date>Tue, 24 Mar 2026 17:41:3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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