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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교회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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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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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티라 교회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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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두아티라 교회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한 것”과 “음행하게 한 것”으로 인해 책망을 받았다. 세속적, 이교적 요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서 “숱한 결혼”을 일삼았던 퍼가모 교회와 동일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계 2:14,20). 주님께서는 그런 일이 벌어진 원인으로 퍼가모 교회에게는 “발라암의 교리를 가르친 것”을, 두아티라 교회에게는 “이세벨을 용납한 것”을 각각 지적하셨다. 그런데 “이세벨”은 “발라암”과는 “스케일”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발라암은 잔꾀를 내어 고작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깐 바알프올에 가담하게 했을 뿐이었지만, 이세벨은 남편 아합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아예 북왕국 전체에 바알을 숭배하는 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왕상 18,19장).<br/><br/>마찬가지로 두아티라 교회 시대에 나타난 배교의 실상은 퍼가모 교회 시대에도 발견되는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이 훨씬 체계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로마카톨릭이 퍼가모 교회 시대에도 에큐메니컬 공회들을 통해, 또 국가 교회로서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어느 정도 수준의 체계화나 표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스머나 교회 시대에 이미 지나가 버린 오현제(五賢帝) 시대 이후로 제국은 이미 국운이 기운 상태였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앙집권적인 행정 기능은 전처럼 수월하게 작동하질 않았고, 따라서 구석구석에까지 로마 교회의 입김이 닿기란 퍽 어려웠다. 이런 배경 속에 지역마다 교리나 실행의 편차가 발생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br/><br/>게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이외에 “총대주교좌”가 있는 다른 교회들(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예루살렘)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국가 교회의 표준화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로마가 동과 서로 완전히 분열되고(A.D. 395), 두아티라 교회 시대로 접어들며 교황 절대권까지 확보한 뒤의 로마 교회의 위상은 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앞서 언급한 다른 유력한 교회의 수장들이 “황제의 신하”의 신분에 매여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기를 펴지 못하는 데 반해, 유일하게 멸망한 서로마의 영토에 본거지를 두었던 교황은, (명목상으로는 그 또한 동로마 황제의 신하였을지언정)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롭게 종교적 주도권을 확보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로마 교회에게 부족했던 것은 세속 권력이 가진 물리적인 강제력이었다. 만일 그러한 힘을 확보한다면, 그 오랜 숙원대로 다른 모든 교회들을 “머리”인 로마 교회 아래 “일치”시킬 수 있을 터였다.<br/><br/>- 황제 대관식 -<br/><br/>로마카톨릭의 숙원을 이룰 “백마 탄 왕자님”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였다(A.D. 748-814). 그는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무서운 기세로 진군하던 이슬람 세력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막아 낸 “기독교의 영웅” 카를 마르텔의 손자요,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를 끝장내고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한 피핀 3세의 아들로,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함으로써 “대제”의 칭호를 획득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통치하였던 프랑크 왕국은 클로비스 1세의 개종(A.D. 496) 이래 로마카톨릭을 표방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친로마 세력으로, 대부분 “아리우스파”였던 게르만족 국가들 틈바구니에서 늘 불안에 떨던 로마카톨릭에게는 참 고마운 존재였다.<br/><br/>로마카톨릭과 프랑크 왕국의 관계는 샤를마뉴의 아버지 피핀 3세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더더욱 끈끈해졌다. 허수아비 왕을 끌어내리겠다는 뜻을 품었을 때, 피핀은 교황에게 이렇게 물었다. “왕으로서의 권력을 실제로 갖고 있지 못한 자가 왕으로 있는 것이 옳습니까?” 교황은 “아니다”는 취지의 답변을 함으로써 왕조 교체를 승인했다. 이것은 “거래”였는데, 이는 교황이 피핀에게 그의 행위가 사리사욕에 의한 찬탈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명분을 제공해 준 대가로 “아리우스파”의 침략으로부터의 보호를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로마 주변의 땅도 덤으로 따라왔다. 교황은 코앞까지 닥친 외세, 즉 랑고바르드(롬바르드)의 위협 앞에 “왕에게 복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위하는 것”(벧전 2:13, 14)이라는, 그야말로 말씀을 팔아치우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br/><br/>그와 같은 정교유착 관계는 뒤이어 왕이 된 샤를마뉴 때 정점에 이르렀다. 그가 정복 전쟁을 벌이며 교황 레오 3세에게 보냈던 편지를 보면 그 관계가 어떠했는지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저는 언제나 거룩한 로마 교회의 지극히 거룩한 보좌를 지킬 것입니다. 바깥의 이교도들과 불신자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를 지키고 내부 사람들에게 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거룩한 아버지시여, 아버지의 몫은 마치 모세가 했던 것처럼 손을 들어 선한 싸움을 싸우는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서 몇 해 후에 교황은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를 사용하여 그동안 주인이 없던 “로마 황제”의 관을 샤를마뉴에게 수여했는데(A.D. 800), 그것은 계시록의 창녀 교회를 국가 교회로 둔 “로마”가 마침내 “부활”한 것이었다!<br/><br/>- 가짜 성경의 표준화 -<br/><br/>샤를마뉴는 제국 내의 모든 수도원과 주교가 있는 성당에 학교를 세우라 명하고 인재를 등용했다. 역사가들은 이때 일어났던 일을 “문예부흥”으로 평하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는 매우 거창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 “문예부흥”은 이때 벌어졌던 일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정책의 본래 의도는 제국 내 교회들에서 “오류들,” 즉 “로마”와의 불일치를 제거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역마다 달랐던 기도하는 방법, 성가를 부르는 방법,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일원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게 하겠다는 것이 왕의 뜻이었다. 모든 문학적, 예술적 연구의 방향은 이러한 목적하에 정렬되었다. <br/><br/>그 과정에서 프랑크 왕국 내의 교회들에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올바른 실행들마저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그 가운데 최악을 꼽으라면 바로 “바르게 보존된 &lt;구라틴어 역본&gt;의 본문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제롬이 교황의 명을 받아 &lt;라틴벌게이트&gt;를 완역했던 것이 벌써 수세기 전의 일(A.D. 405)이었으므로, 당시의 “공식적인” 라틴어 성경은 &lt;구라틴어 역본&gt;이 아닌 &lt;라틴벌게이트&gt;였다. 그러나 “실제로” 각 지역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본문이 꼭 제롬의 결과물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lt;구라틴어 역본&gt;을 성경으로 믿고 있었던 각 지역 교회의 필사자들이 “새로운 번역본”을 마주했을 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부패한 본문을 거부하고 원래의 본문을 고수한 결과였다. 그러나 “카롤링거 르네상스” 때 알쿠인이라는 학자가 그와 같은 “오류들”을 바로잡고 표준화된 &lt;라틴벌게이트&gt;를 제시함에 따라(A.D. 801), 이제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순수하게 보존된 라틴어 본문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br/><br/>- 바알에게 꿇지 않은 무릎들 -<br/><br/>유럽 대륙 중서부에서 로마카톨릭이 강력한 돌풍을 일으키며 진리의 빛을 꺼뜨리는 동안에도, 동쪽에서는 그 빛이 미약하게나마 전파되고 있었다. 그 일에 동참한 사람들 가운데 두아티라 교회 시대를 대표하는 그룹은 7세기경 아르메니아를 중심으로 뻗어나갔던 “폴리시안”이었다. “사료”(史料)란 “승자의 기록”에 불과하므로 그것들을 샅샅이 뒤지더라도 “대세”를 거슬렀던 이 사람들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이들이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믿는 성인들에게만 침례를 주었다는 것, 그리고 로마식 예배나 성직위계제도(니콜라파의 교리)나 유물 숭배 따위를 배격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폴리시안에게는 종종 “마니교도”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곤 하는데, 그들이 삼위일체와 바울 서신의 교리를 매우 강조했다는 여러 증언과는 배치되는 내용이므로 적들의 편의(혹은 악의)에 의해 씌워진 오명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br/><br/>동방 교회 출신의 키릴 형제(키릴과 메토디우스)도 이런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가 없다. 동방이라고 해서 서방보다 배교의 정도가 덜한 것은 아니었으되, 바르게 보존된 비잔틴 계열의 필사본이 있었다는 점과 체계적인 “배교 프로세스”를 강요하는 로마 교회의 마수가 뻗치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웠다는 점으로 인해 약간의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는 “성상 숭배 문제”에 있어서도 동방 교회가 좀 나았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의 기간에만 들어맞는 이야기다). <br/><br/>선교사인 키릴 형제는 슬라브족의 언어를 직접 배워 그들에게 복음과 진리를 전파했는데, 당대에 있어서는 헬라어나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사역을 하는 것은 거센 반발을 감수해야 하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이 일에는 “성경 번역”이 필수적이었는데, 슬라브족에게는 고유의 문자조차 없었다. 그러나 키릴 형제는 그러한 슬라브족에게 말씀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문자 발명”과 “성경 번역”이라는 두 가지 위업 모두를 달성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글라골 문자”(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키릴 문자”의 모체)와 “키릴 성경”이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암흑시대에도 진리의 빛이 완전히 꺼지지 않고 이어져 갔던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8:0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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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티라 교회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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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암흑 시대의 도래 -<br/><br/>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로부터 약 1,000년간, 서구 세계는 경제적 측면으로 보나, 문화적 측면으로 보나, 지식적 측면으로 보나 퇴보를 거듭하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이 모든 “암흑”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발원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의 이해의 범주 안에 있는 “가시적인 문제들”과 그 바깥에 있는 “영적인 문제들”을 완전히 분리하려는 불가지론적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설명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시적인 일들의 배경이 되기에(출 17:11, 욥 1,2장, 왕상 22:19-23), 둘을 칼로 무 자르듯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br/><br/>어찌해서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은 번영을 이룬 데 반해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은 쇠락했는가? “반카톨릭 대 친카톨릭”이라는 것보다 더 간단명료하게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어찌해서 자유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자국민 대량 학살(혹은 숙청)이 소련, 중국, 캄보디아, 북한 등에서는 일어났는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간의 대조라는 설명보다 더 좋은 설명이 있겠는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것을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잘게 찢으리니 아무도 구해 낼 자가 없으리라』(시 50:22).<br/><br/>서구 세계,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서유럽에 영적인 암흑이 드리워졌던 까닭은 온 세상을 미혹하는 존재이자, 그 일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사탄이(계 12:9, 고후 11:14) “모조품”을 활용하여 참된 복음의 광채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사탄은 “거짓 선지자들”을 사용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것처럼(벧후 2:1), 또 거짓 사도들과 교사들, 그리고 위조된 편지들을(살후 2:2) 사용하여 초대 교회 시대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려 했던 것처럼, 또다시 “가짜”를 동원하여 “진짜”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폈던 것이다. 특별히 사탄이 이때 동원했던 것은 “가짜 성경”과 “가짜 교회”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변개된 성경인 “라틴 벌게이트”(흔히들 “불가타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상과의 야합으로 완전히 타락해 버린 로마카톨릭 교회들을 “진짜”인 양 내세워 진리의 조명을 꺼뜨렸던 것이다.<br/><br/>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적 진리를 접하지 못하고 영적 기근 속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퍼가모 교회 시대에 유대교, 동방의 신비 종교, 그리고 이집트의 신플라톤주의가 혼합됨으로써 태동한 수도원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세를 불림에 따라, 구원도 자유도 없는 짐스럽고 저주스런 금욕주의가 참된 경건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진리 안에서 만족과 자유를 얻는 일은 더더욱 요원해져 갔고, 사람들은 총체적인 영적 압박 속에 신음했다. 그러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제도권 바깥으로 이탈한 사람들에게는 철퇴가 내려졌다. 암흑시대에 해당하는 두 교회를 성경이 “고통의 향기”라는 뜻의 “두아티라”(A.D. 500-1000)와 “붉은 자들”이라는 뜻의 “사데”(A.D. 1000-1500)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br/><br/>- 가짜 교회의 “리더십” -<br/><br/>퍼가모 교회 시대에 “이단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연전연승하며 “국교”의 자리를 꿰찬 로마카톨릭은, 서로마 제국의 국운이 기울었을 무렵에는 이미 황제의 권위 아래 위계질서와 강제력을 갖춘(니콜라파의 교리) “공무원 조직”이 된 지 오래였다. 주님께서는 “지금은 나의 왕국이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라고 말씀하셨건만, 그들은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감히 “국가권력” 그 자체인 자신들에 대항하는 “이단들”을 쫓아 버리고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해 나갔던 것이다.<br/><br/>발렌티니아누스 3세 치하에서는 특별히 로마카톨릭의 위세가 더욱 높아지는 결정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즉 황제가 당시 로마 교회의 주교였던 레오 1세의 청을 받아들여 로마 교회 주교의 수위권(首位權, 제1의 권한)을 법제화했던 것이었다(A.D. 445). 황제는 “사도좌의 권위에 의해 재가된 것이라면 무엇이나 주교들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법이 될지어다.”라고 선포했는데, 여기서 “사도좌”란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자 “로마 교회의 설립자”인 베드로로부터 그 권위를 계승받은 로마 교회 주교직을 뜻한다(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인 로마서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베드로”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로마에 있는 “사도좌”를 운운하는 자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즉 이때부터 로마 교회의 주교는 명실상부 모든 교회들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교황”으로 공인받은 셈이었다.<br/><br/>수위권을 인정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 1세에게 “리더십”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후대의 역사가들이 “하나님의 채찍”이라고 불렀으리만치 무서운 기세로 서진했던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의 침공이 있었을 때였다. 황제는 겁에 질려 도주하면서 고위급 사절들을 파송하여 아틸라를 상대하게 했는데(A.D. 452), 이때 사절단을 이끌다시피 했던 인물이 바로 레오였기 때문이다. 물론 교황이 가지고 간 것은 “복음”이 아니라 “돈”이었지만, 방법이야 어찌됐든 교황에 대한 대중의 신임은 이 사건 이후로 더더욱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다.<br/><br/>- 리더십의 위기와 권력 투쟁 -<br/><br/>제국이 멸망하자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교황들은 다소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공무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땅의 지배권을 확보한 고트족 왕들은 “아리우스파”였기에 로마카톨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 교황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보장했으되, 전처럼 “사도좌”를 존중해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동로마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를 정복했을 때는 약간의 상황 개선이 있었으나 유의미한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는 때로 로마 교회의 주교가 다른 주교들 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종교 문제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 행사했다. 동로마 황제들에게는 늘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교황”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황제교황주의). 이러한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로마시(市) 바깥에서 교황의 영향력은 과거의 영광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br/><br/>위와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고, 중세 암흑시대 교황의 역할을 정립했던 이가 바로 “대제”(大帝)라고도 불리는 그레고리오 1세다. 역병과 기근, 그리고 랑고바르드(롬바르드)의 침략(A.D. 568)으로 난세가 도래했을 때, 그레고리오 1세는 침착하게 행정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관리되지 못하고 있던 토지들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고 또 체계적으로 운영하여, 거기서 나오는 세금으로 군인들에게 급료를 제공함으로써 위기를 헤쳐 나갔다. 중앙 정부가 도움을 줄 형편이 되지 않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틈을 노려 왕처럼 행세했던 것이었다. 그레고리오는 한술 더 떠서 황제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랑고바르드와 외교적 협상을 벌임으로써 자신이 로마의 실질적 통치자임을 만천하에 알리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영국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A.D. 597) 서쪽으로의 외연 확장을 시도했는데, 이때 파송된 이들을 이끌었던 자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원장이자, 도착과 함께 “캔터베리 대주교직”을 하사받은 어거스틴이었다(히포의 어거스틴과는 다른 인물이다). 그는 “선교지”에 도착한 지 1년 정도 만에 10,000명 이상에게 물을 뿌려 주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교황의 기대에 부응했다. 교황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누구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세력 기반을 확보함으로써, 또다시 세속적 영향력을 거머쥘 수 있었다.<br/><br/>- 로마카톨릭이라는 “브랜드”의 확립 -<br/><br/>그레고리오 1세의 “업적”은 정치, 경제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전까지 그는 각 교회들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하던 미사를 표준화함으로써(라틴 전례) 로마카톨릭을 “브랜드화”했다. 이제는 모든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몽환적인 “그레고리오 성가”가 울려 펴졌고, 라틴어로만 미사가 집전되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사제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가 아닌, 그분을 다시금 죽이는 “희생제사”로서의 미사를 집전해야 했다. 어떤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교회들이 “주님은 성체 봉헌의 신비 속에서 다시 우리를 위해 희생되십니다.”라는 그레고리오의 신성모독적인(히 10:12-14) 신학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br/><br/>그와 같은 틀은 “정통 교회”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실하게 각인하는 “브랜드 이미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라틴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또 왜 그런 절차에 따라야 하는지 모를지라도 어쨌거나 “로마카톨릭 방식”으로 드리는 미사만이 참된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례 체계는 영국에서 독일로, 다시 프랑스로 뻗어 나가 거대한 울타리를 형성했다. 후일 교황들은 이 울타리를 어떤 사람이나 마을을 압박하여 자신의 요구를 따르게 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성무금지령”과 “파문 제도”). 미사를 금지함으로써 누군가를 “지옥에 보낼 수 있는” 강력한 권세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장차 불어 닥칠 거센 피바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45:3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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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지역 교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며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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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지역 교회」 코너는 피터 S. 럭크만 목사의 책 &lt;지역 교회&gt;(The Local Church)의 핵심 내용을 편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br/><br/>신뢰할 만한 번역본”과 “자필 원본”을 둘러싼 논쟁은 오로지 사람들이 지성인 개인 속에 있는 교만에 양분을 주고 기른 것에만 비례한다. 그리하면 그 지성인은 “그 책”(the Book), 곧 “성경”을 바로잡을 만큼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떤 교회나 신학교, 친교회에서는 그런 일로 인한 분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에 근심을 안겨다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교만과 시기이다. 즉 창세기 3장과 에스겔 28장, 고린도전서 1-4장, 이사야 14장에서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창 3:1)은 기본적으로 교회가 아니라 신학교에서 수행되는 작전이다. 문제는 그 신학교의 교수진들이 지역 교회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장기근속”에 들어가서는 목사들의 “자격 검증” 요건을 독재자처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객전도에 해당된다.<br/><br/>지역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유일한 신약 조직체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조직체도 복을 주셔서 사용하실 수 있으시지만, 또한 분명히 그렇게 하시지만, 신약성경에 명시되어 있으며 권위를 부여받은 조직체라면 지역교회가 유일하다. 신학교는 지역 교회의 부록이요, 부속 기관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신학교도 지역 교회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반면 지역 교회는 어떤 신학교가 없다 해도 존속할 수 있다. (모든 주요한) 신학교들은 지역의 목사들로 하여금 신학교가 그를 “도울”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신학교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진실은 그 반대이다. 지역 교회의 목사가 없다면 신학교는 존속할 수 없다. 목사가 신학교를 돕는 것이다. 그러나 돈과 섹스와 교육(대략 이 순서대로)을 숭배하는 나라에서는 윤이 나며, 부드럽고, 멋지고, 고도로 지적인 기독교 교육자들이 지역 교회와 그 목사들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목사들을 희화화하고 회중들로 하여금 목사를 갈아치우도록 압력을 행사하기까지 하는 꼴을 본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밥존스대학교와 스프링필드의 성서침례대학은 루이스빌의 남침례교신학원이나 내쉬빌의 미국침례교대학처럼 돌아간다. 의심스럽다면 미시건주 리보니아에 있는 허버트 노(Herbert Noe)나 캘리포니아주 카노가 파크에 있는 로날드 라스무센(Ronald Rasmussen)에게 연락해 보라.<br/><br/>자, 이제 지역 침례교회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보자. 지역 교회는 미합중국의 기본 단위다. 독립선언문과 헌법을 뒷받침하는 것도 침례교회 조직이다(이에 대한 근거를 원한다면 필자의 &lt;신약교회사&gt; 제22장을 읽어 보라).<br/><br/>미국이 로마에 쉽사리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그리고 오늘날에 홀로 세계 선교의 90퍼센트를 짊어진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비록 1865년 이후로는 그렇지 않게 됐지만) 최초의 정부가 침례교도들에 의한, 침례교도들의 원칙을 본으로 두고 따랐기 때문이었다. 연대는 자발적이었다(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여러분은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싫은 사람과도 연대해야 한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모임에서, 의사결정은 민주적 원칙에 의해 이뤄졌다(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누구도 평등권, 강제적인 인종 혼합, 개인 소득세, 사회보장제도 등등에 투표하지 않았다). 지도자들은 기도를 통해 선출되었으며, 선출된 지도자들은 책임을 도맡았다(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리더를 길러 내야 할 학교 시스템에서 기도는 불법이 되었고, 리더들은 전문적인 정치인이 되었다). 어떤 교회도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국가는 교회들을 세금징수요원으로 사용하고,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넣는다).<br/><br/>나는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도”다. 나는 초교파 사역자가 아니다. 나는 극단적 칼빈주의자나, 은사주의자나, 극단적 세대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에스캄비아 배이 협회에서 남침례교 사역자로 임명을 받았다. 내 담임목사(휴 파일)는 당시 협회의 의장이었고, 협회 내에서 가장 큰 교회를 갖고 있었다. 이 교회(브렌트침례교회)로부터 켈리애비뉴침례교회, 에어포트블러바드침례교회, 사우스사이드침례교회, 이스트브렌트침례교회, 벌게스로드침례교회, 조던스트리트침례교회, 페리패스침례교회, 그리고 마침내 성경침례교회, 그레이스침례교회, 채리티침례교회가 나왔다.<br/><br/>위의 교회들은 형성되고 난 뒤에 각각 적어도 한 번(어떤 교회들은 두 번) 분열되었다. 그 결과 인구가 120,000명인 하나의 지역 사회에 무려 130개 이상의 침례교회들이 있게 되었다. 2003년이면 64개의 남침례교회들과 74개의 “독립”침례교회들이 있을 것이다. 인구 9,023명당 하나의 침례교회가 있는 것이다. 프랑스, 일본, 캐나다에는 침례교회의 수 자체가 130개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br/><br/>이제 강의를 시작하겠다. 강의 자료의 출처는 내가 1950년 봄부터 2003년 여름까지 계속 적어 내려간 노트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젊은이를 설교자로 부르셨다면, 그가 이 노트를 꼼꼼히 살펴 누군가의 경험으로부터 배움으로써, 이러한 일들을 겪지 않고 피해 가기를 바란다. 큰 곤경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올지라도, 적어도 스스로 방비를 갖춰서 적이 포격을 가해 올 때 “낙심”하거나 “중도하차” 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하는 “포화”가 여러분에게 쏟아질 때면, “독일 돌격대”의 “습격” 정도는 우습게 느껴질 정도가 될 것이다. 며칠에 걸친 (때로는 몇 달에 걸친) 집중포화가 한 번 휘몰아치면 신경이 갈가리 해져 버린다. 너무나도 많은 목사들이 이로 인해 병원이나 무덤으로 갔다. 여러분은 현대적인, 20세기의 라오디케아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놋쇠로 된 이마와 강철로 된 등뼈, 잭해머 양손 착암기. 공사 현장에서 단단한 물질에 구멍을 내거나 부수기 위해 사용한다.<br/>와도 같은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들은 “독실함”이라고 하면 껌뻑 죽는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공금을 유용하고, 성도들을 속이며, 자기 사역에 대해 거짓말하고, 기록을 허위로 작성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고, 양들을 훔치고, 양들을 오도하고, 양들에게 아첨하고, 양들에게서 탈취하며, 목자를 죽인다. 그들은 하나같이 테레사 수녀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만큼이나 독실한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기도와 금식”을 한다든지, “침례교도들의 믿음에 관한 한 유서 깊은 근본 사항”을 위협하는 “럭크만주의”의 치명적이고도 위험한 공격으로부터 “양들을 지킨다”든지, 이와 비슷한 기타 등등의 일을 행하는 자들이다. 역시 라오디케아는 라오디케아다.<br/><br/>여러분은 이 시대 끝에 있다. 따라서 “그 어떤 것”에도 놀라지 말라. 이 시대는 혼들을 이겨오고 성경대로 믿는 설교자들을 “이단”이라 부르고, “그 책”(the Book)을 믿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단”의 회원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셈이 된 시대다. 여러분을 그렇게 정의 내릴 배교자들은 “신학교”에서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훈련받은 자들이다. 배교한 교수진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신론”을 가리는 더러운 일을 하도록 종용하는데, 이는 “그 학교”가 여전히 학생들을 선발하고 등록자 수를 늘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딤전 6:10).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한 이래로 그런 일은 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되고 있다. (그나저나 디모데전서의 이 말씀은 “헬라어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 출간한 어떤 번역본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보존된 모국어 성경들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악의 뿌리(the root)라고 말씀하시는 데에 반해, “헬라어 본문”으로 수정된 RV, ASV, NRSV, NIV, ESV, NASB 등이나 NKJV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 중 하나(a root)라고 말한다.<br/><br/>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를 세우기에 바람직한 장소는 어디인가? 출석할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가 없는, 오천에서 일만 명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다. 해외에 있다면, 출석할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가 없는 오백 명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다. 미국에서 사역의 필요가 가장 큰 지역은 플로리다주, 앨라배마주, 조지아주, 미시시피주가 아니다. 사역이 가장 필요한 지역은 워싱턴주, 오리건주, 몬태나주, 아이다호주, 버몬트주, 뉴햄프셔주, 뉴저지주, 매사추세츠주, 코네티컷주, 메인주, 뉴욕주이다.<br/><br/>노스다코타주와 사우스다코타주의 필요는 소름이 끼칠 정도이고, 위스콘신주와 미네소타주의 필요도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해외는 어디든지 소름이 끼친다. 이탈리아, 스페인, 호주 이 세 곳은 이 지면에 기록된 곳들 가운데 하나님께 가장 버림받은 장소이다. 아라비아와 이라크, 이란에는 손길조차 닿지 않는다. 만일 여러분이 “불붙은 복음 전파”나 “한 도시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법”을 보고 싶다면, 버지니아주의 린츠버그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나폴리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도전하라. 좋은 장소 둘을 더 소개한다면 그곳은 중국의 베이징과 그리스의 아테네이다. 일본과 프랑스에 지역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1월에 시멘트에다 오크라(okra) 같은 아열대 채소를 심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30 Apr 2025 16:35:1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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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지역 교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며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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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지역 교회」 코너는 피터 S. 럭크만 목사의 책 &lt;지역 교회&gt;(The Local Church)의 핵심 내용을 편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br/><br/>펜사콜라성경신학원(PBI)에서 지난 25년 동안 강의된 모든 과목 중에서 가장 많은 졸업생들이 다시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지역 교회”라는 과목이다. 그들이 교정을 떠나고 나서 이 과목에 대해 내놓은 평은 한결같이 이런 식이었다. “와, 저는 그냥 목사님께서 스스로 경험하신 일을 말씀하시는 줄만 알았는데, 제가 경험하게 될 일을 말씀하신 것이었어요!” “이거 참, 저는 목사님께서 수업 때 말씀하셨던 것을 거의 다 겪었네요.” “정말로 목사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이야기해 주려고 애쓰셨는데, 저희들이 믿질 않았네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제게 닥치리라는 생각은 못 했었는데, 그 모든 일들을 다 맞닥뜨렸던 것 같아요.” “와, 목사님께서는 그 수업 때 저희들에게 항상 진실만을 말씀하신 것이었어요!”<br/><br/>펜사콜라성경신학원이 1년 과정으로 운영하는 “지역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사역에서 떠나라는 이야기를 해 주려는 목적으로 설계된 과목이다. 스스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말이다. 이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자료의 출처는 교회에서 온전히 믿음으로만 수행된 12년간의 전임 복음 사역이다. “복음전도협회”도, 급여도, “부가적인 혜택”도 없이 12년간 전임으로 목회했던 일, 그것도 세 개의 다른 지역 교회를 “밑바닥부터” 세워 가면서 했던 일로부터 온 것이다. 그 후 19년간 지역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신학교에서 강의했던 일도 여기에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기간에 나는 매 여름마다 거리에서 설교했으며(1950년에 시작했고, 50개가 넘는 도시들에서 설교했다), 구제 선교 사역으로 20여 개의 집회를 열었고, 40군데의 감옥에서도 집회를 열었다. 학생들에게 주어졌던 자료는 이러한 사역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br/><br/>“표준적인” 근본주의나 침례교 신학교 출신 학생들과는 다르게, 우리 학생들에게는 그들의 뒤를 받쳐 줄 “친교회”가 없었다. 그들을 지원해 줄 “총회”도 없었다. 장로회나 협의회도 부재했다. “학자금 대출” 제도도, “근로 장학금”도, 교단의 지원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부모님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는 학생조차 드물었다. 카톨릭 교회가 대적하고, 스프링필드의 성서침례대학(BBC)과 밥존스대학교(BJU)의 졸업생 다수가 대적하고, 남침례교총회(SBC)가 대적하고, 전미교회협의회(NCCC)의 자유주의자들이 대적했음에도(뉴스 미디어와 정부까지 가세했는데도) 그들은 바깥세상으로 나가 아무것도 없는 데서 40개의 지역 교회를 세웠으며, 죽어 버린 20개의 교회에 부흥을 가져왔고, 또 동역자로 일하면서도 외부에서 열에서 열댓 개의 목회를 맡았다. 여기에 더해 45명은 해외 선교 현장에 뛰어들었으며, 이들 가운데는 사역을 위한 준비 기간이 “2년” 이하였던 경우도 많았다.<br/><br/>밥존스대학교의 (밥 존스 시니어가 “설교자 소년들”이라고 불렀던) “선교 협회”는 한 사람의 감독하에 있게 되었었는데(1947-1959), 그는 일평생 목회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1,200명의 젊은이들을 맡아 그들의 선생이 되어야 했지만, 전담 복음 전파자가 되어 본 적도 없었고, 구제 사역 책임자로 일해 본 적도 없었다. 선교사가 되어 본 적도 없었고, 교회의 부목사로 일해 본 적도 없었다. 지역 교회에 관한 한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겠는가!<br/><br/>그가 이런 계통의 일에 대해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무언가 대단한 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밥존스대학에는 다음의 네 가지 사항에 있어서 성경적 진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br/><br/><br/>1. 믿는 사람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<br/>2. 물침례를 주는 방식<br/>3. “그 책”(THE BOOK) 의 절대적이고도 최종적인 권위 (“THE BOOK”은 성경“책”을 의미하는 영어식 표현이다.)<br/>4. 천년왕국<br/><br/>밥존스대학교는 “초교파적”이다. 내가 그 학교에 다니던 시절(1949-1953)에는 주요한 성경 교사들이 전부 “무천년주의”를 따르는 “장로교인”이었다. 내가 박사 학위를 받던 때에 그들은 침례교로 일대 “전향”을 거쳤다(자세한 이야기는 접어 두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밥존스대학교는 앞서 말한 네 가지 사항에 대해서 어떤 입장도 그들의 “신조”에 밝히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휴거, 이스라엘의 회복, 지역 교회의 자치권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밥존스대학교의 “근본주의”는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 뷰챔 빅(Beauchamp Vick), 존 롤링스(John Rawlings)를 따랐던 텍사스주의 침례교도들의 근본주의와 달랐던 것이다.<br/><br/>밥존스대학교에서 나는 지역 교회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배우지 못했다. 내가 지역 교회에 대해 배웠던 것은 재학 당시나 “졸업 후에” 이 나라 미국의 위아래로 쏘다니며 작은 교회들에서 문자 그대로 수백 번에 걸친 모임을 개최하면서였다. 나는 이 “지역 교회”라는 과목에 대해 지역 교회들, 즉 “현장”에서 배웠던 것이다. 배이 미네트의 “맨땅”에서 성경침례교회를 시작했는데, 그 교회는 “벧엘침례교회”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운영되고 있다. 파나마 시티에서는 한 철물점에서 센트럴침례교회를 시작했으며, 그 처음 이름은 “테라스파크침례교회”였다. 휴 파일 목사가 내려와서 공항을 매수하여 현재의 교회를 짓기까지 그 교회의 사역은 테네시템플의 졸업생이 다른 이들과 함께 맡았었다. 나는 이곳 펜사콜라의 “맨땅”에서 40명쯤 되는 회원들과 성경침례교회를 시작했고, 교회는 여전히 운영되는 중이다. 주일학교 인원은 650명쯤 되며,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국제적인 사역이 세 가지나 있다.<br/><br/>지금은 나를 떠나 버린 이전 부목사는 7마일 떨어진 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의 이전 사역지를 “복음화”하겠답시고 말이다.<br/>이전에 회원으로 있었던 어떤 사람은 펜사콜라기독교대학(PCC)의 땅으로부터 400야드 떨어진 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는 그 지역의 잃어버린 자들에 대해 진정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br/><br/>더 뛰어난 윤리 의식을 갖춘 사람도 있는데, 그는 펜사콜라기독교대학으로부터 3마일 떨어진 곳에 교회를 세우고는 리 로버슨(Lee Roberson) 미국의 침례교 복음 전도자이자 목사이며, 테네시 템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br/>을 데려와서 “사역을 필요로 하는 지역 사회에 대한, 그리고 잃어버린 혼들에 대한 부담을 하나님께서 이 젊은이의 마음에 주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라는 창립 메시지를 설교하게 했다.<br/><br/>같은 위치에서 반 마일 안에는 또 다른 독립침례교회가 있었다. (당시 기준으로 펜사콜라의 인구수는 60,000명이었건만) 이 “사역을 필요로 하는 지역 사회”에는 20개의 독립침례교회들과 20개의 제도권 교회들이 있었다. 지금은 50개의 독립침례교회들이 있고, 20개쯤 되는 제도권 교회들이 있다. 펜사콜라는 달라스-포트워스 지역과 매우 닮았는데, 이는 그곳에선 그 누구도 “사람들을 낚으러” 가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그저 “서로의 어항에서 물고기를 빼내어 바꾸기만” 할 뿐이다.<br/><br/>예를 들어, 오하이오의 톨레도를 보도록 하자. (뷰챔 빅의 손자이기도 한) 내 친구 하나는 목회 사역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이전의 목사보다 그곳에 빨리 도착하지 못했다. 이전의 그 목사가 자기가 떠났던 그 지역에 다시 이사를 왔던 것인데, 그는 “바로 그 지역”으로 이사 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내와 아내의 친구들을 자기의 이전 사역지를 “복음화”하는 데 이용했고, 그가 남겨두고 떠났던 양들 가운데 절반을 훔쳐가 버렸다. 이 일은 “임신 축하 파티,” “결혼 전 축하 파티,” 정감 있는 작은 “야외 요리 파티,” 그리고 “친교회” 등을 통해서 이뤄졌다. 목사라면 누구나 분명 그 작전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를 알 것이다. 그것은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에 버금갈 정도로 영적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친구들이 다정한 교회를 더욱 다정하게 만들 수 있도록 열리는 다정한 친구들의 다정하고도 가족적인 친교회”라고 부른다. 성경적으로 보면 타락이 활짝 피어난 모습일 뿐이지만 말이다.<br/><br/>나는 (한때 이곳 펜사콜라의 신학생이었던 내 이전 부목사를 포함하여) 학생 모두에게 절대로 다른 사람의 사역지로부터 50마일 이내에는 교회를 세우지 말라고 가르친다. 만일 그가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도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50은 최소한의 수에 불과하다. 200마일이라고 하는 게 더 낫다. 나는 이전 부목사에게 내가 설교자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추천장을 줬다. 그러나 그가 (앞서 말한 리 로버슨처럼 신실하게도)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결정한 내용인즉 7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서는 사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그가 “위성 교회”를 세운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위성 교회”라는 것이 현대에나 와서 등장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Feb 2025 17:26:2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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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발라암과 니콜라파의 교리”를 퍼뜨린 퍼가모 교회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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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제국의 분열과 니케아파의 승리 -<br/><br/>니케아 공회가 제국 기독교계에 “통합”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대와는 달리, 니케아 공회는 오히려 여태껏 국지적 규모로 벌어졌던 아리우스 논쟁을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켜 긴장과 대립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는 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와 그 대변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인물)는 추방을 면치 못했으나,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로 이루어진 범아리우스 진영이 아예 괴멸되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공회에서의 승리를 등에 업고 상대 진영을 폭력적으로 축출하려 드는 니케아파의 배타성이 제국 기독교의 통합을 저해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감독들에게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허락할 것을 명하여 범아리우스 진영에 숨통을 틔워 주었다.<br/><br/>심지어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복권시켜 주기까지 했다. 그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황제의 몸에 물을 뿌리는 영예”를 하사했던 인물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였다. 사실 콘스탄티누스는 계속해서 침례(세례)를 미루고 있었다. 스머나 교회 시대부터 침투하기 시작했던 거짓 교리, “침례(세례)에 의한 중생”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로서는 “물 뿌림으로 죄가 용서된다면, 그 이후에 지은 죄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고, 혹여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해서 죽기 직전에 침례를 받는 “묘수”를 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꾀가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어떤 간증도 없는 그를 지옥으로부터 구출해 주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br/><br/>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고 난 뒤, 제국은 분열(분할)과 통합을 거듭하다가 결국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에 분열된 뒤로 다시는 합쳐지지 못했다(A.D. 395).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죽음으로부터 동ㆍ서로마의 분열까지 약 60년에 이르는 이 기간 동안 때로는 “정통파” 황제가, 때로는 “반(半)아리우스파” 황제가, 때로는 아예 이교도로 돌아간 “배교자” 황제가 황위에 올랐는데, 이처럼 일관성 없는 황제들의 종교적 입장과 그에 따른 정책 변화는 자연스럽게 교계의 혼란을 야기했다. 지면이 부족하여 상술(詳述)할 여유는 없지만, “정통파”를 자처하는 “니케아파,” 즉 “로마”카톨릭이 득세했을 때는 늘 적들을 물리적으로(!) 섬멸해 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으로 이때의 역사를 요약해 볼 수 있겠다. 특히 “독실한 정통파”이자 동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서로마의 통치자들과 함께 “데살로니가 칙령”(A.D. 380)을 선포하고 시행했는데, 이는 제국 내에서는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기독교만을 합법화하고, “미치광이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한 처벌을 법제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이듬해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회(A.D. 381)에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함에 따라, 니케아파의 최종적 승리가 굳어졌고 “이단 사냥”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br/><br/>- 무천년주의의 대두 -<br/><br/>범아리우스 진영이나 이교도 황제, 또는 니케아 진영을 표방하더라도 종교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황제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신실한 정통 신앙”을 가진 황제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폭압이 뒤따랐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이다. “정통파,” “반아리우스파,” “배교자” 가운데 가장 비성경적이었던 그룹이 “정통파”였던 것이니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쟁 무기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에(고후 10:4), 제정신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설령 이단 종파를 만나더라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거절할 뿐(딛 3:10) 결코 죽이거나 세상 밖으로 쫓아내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사를 돌아볼 때 로마카톨릭과 개신교도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물리적인 왕국이요 미래로 연기된 왕국인 “천국”과, 영적인 왕국이요 이 교회 시대에 전파되는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볼 수 있게 오는 나라가 아닌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눅 17:20,21)를 “힘으로”(cf. 마 11:12)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다. <br/><br/>이것은 스머나 교회 시대에 활동했던 무천년주의자 오리겐이 가르쳤던 교리로서, 퍼가모 교회 시대를 거쳐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어용 교회사가로서 황제에 대한 찬양 일색인 &lt;콘스탄티누스의 생애&gt;를 기술하기도 한 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하늘의 왕국과 지상의 왕국은 서로 같으며, 황제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제국”인 로마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물 뿌림”을 받은 카톨릭 교회 회원이 늘어나는 것을 두고 “왕국의 확장”이라고 가르쳤다.<br/><br/>위와 같은 무천년주의 신앙을 체계화한 사람이 그 유명한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다. 피터 럭크만 박사는 어거스틴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카톨릭 신자”라고 부르는데, 그는 성직위계제도(니콜라파의 교리), 마리아 숭배, 유아 세례, 연옥, 화체설 등 로마카톨릭의 근간이 되는 모든 교리들을 믿은 “완전체”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A.D. 426년 자신의 책 &lt;하나님의 도성&gt;을 통해 “왕국의 역사”를 규명했는데, 창세기 1장에서부터 요한계시록 22장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늘 각각 하나님과 사탄에게 속한 “두 도성의 대립”이었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이 견해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는데, 바로 구약의 신정통치 왕국과 신약의 교회를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열왕기와 시편, 그리고 솔로몬의 책들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승리의 예언들을 교회에게 적용했다.<br/><br/>일견 사소해 보이는 그러한 성경 해석상의 오류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다음과 같은 명령들을 교회들이 문자적으로 수행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nbsp;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앞에 그들을 넘겨주실 때, 너는 그들을 쳐부수고 완전히 진멸시키며, 너는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고 어떤 자비도 보이지 말지니라』(신 7:2). 십자군 전쟁을 위시하여 로마카톨릭 교회가 벌인 모든 대학살극들의 사상적 기틀이 되었던 것이 바로 이 무천년주의 교리였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이스라엘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자칭 유대인들”은 반인륜적인 짓을 벌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게 되었던 것이다(cf. 요 16:2).<br/><br/>-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로마 교회의 부상 -<br/><br/>사실 어거스틴이 &lt;하나님의 도성&gt;을 썼던 당시의 서로마는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4세기 무렵, 동방에서 온 강력한 기마민족이었던 훈족은 당시 라인강과 다뉴브강 너머에 자리를 잡고 살던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했다. 게르만족은 때로는 평화롭게, 때로는 야만스럽게 제국의 영토 안으로 넘어왔고, 그러한 과정에서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시가 약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A.D. 410). 이런 일이 있자 카톨릭 신앙에 대한 회의론이 피어올랐다. 주피터와 다이아나를 섬기던 시절에는 막강했던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그들이 한참 얕보던 이민족에 의해 유린당했으므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br/><br/>&lt;하나님의 도성&gt;은 그에 대한 변명을 대기 위해 쓰인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성이 반드시 로마 제국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더라도(A.D. 476) “로마”카톨릭은 여전히 존속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마련한 셈이다. 로마 교회는 패권국의 교체와는 관계없이 그 지배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두아티라 교회 시대 이후에는 아예 대관식까지 맡았다).<br/><br/>문제는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 지도자들이 로마 교회의 권위를 인정해 주겠느냐는 것이었는데, 이는 생각 외로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이 “침략자들”이 아니라 “이주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사치와 향락을 마음껏 향유하는 “로마인”이 되고자 그곳에 온 사람들이었지, 로마를 멸망시키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가 공석인 마당에 로마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로마 교회의 대주교까지 없어진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로서도 로마 교회와의 연대를 바랐던 것이다.<br/><br/>그렇게 해서, 주교들이 내뱉는 라틴어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성경에도 까막눈이며, 당연히 구원받은 적도 없는 게르만족 민중들이 대거 “물 뿌림”을 받고 로마카톨릭 교회 안으로 유입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방 신을 섬기던 방식을 그대로 둔 채 이름만 “예수”로 바꿔 섬기면서도 “그리스도인” 대접을 받았고, 교회의 순결은 이제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로마 교회가 땅의 왕들과 음행함으로써 살 길을 도모한 결과였다(계 17:2). 성경은 현재는 바티칸 “시국”(city)이라는 이름으로 있는 그 자칭 하나님의 “도성”(city)을 우상 숭배자들의 도성, 곧 “바빌론”이라고 부른다(계 17:5; 18:10).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02 Dec 2024 11:38: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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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발라암과 니콜라파의 교리”를 퍼뜨린 퍼가모 교회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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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박해의 종식과 밀라노 칙령 -<br/><br/>박해의 시대였던 스머나 교회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교회 시대의 막을 올렸던 주인공은 “대제”(大帝)라고 불리는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였다. 열 차례의 박해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하려는 움직임이 제국 차원에서, 그리고 국지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딤후 2:9). 이제 제국 전역에 전염병처럼(행 24:5) 퍼져 버린 “기독교”를 통제하려면 로마로서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정치적 셈에 능했던 콘스탄티누스는 차라리 로마를 하나로 통합할 종교를 “기독교”로 하자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었다.<br/><br/>A.D. 313년, 서방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황제였던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확인하고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차원에서 밀라노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리고 이때 발표한 “밀라노 칙령”에는 “기독교”를 장려하고 “기독교인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돌려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후에도 “기독교”를 향한 로마의 구애는 지속되었다. 가령 A.D. 319년에는 성직자를 납세 등의 의무로부터 제외시켜 주었고, 일부 구역에서는 이교 제사가 금지되기도 했다. A.D. 321년에는 일반 도시의 시민들에게 일요일 휴무령이 반포되었다. 로마,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지에는 제국의 도움으로 커다란 교회들이 세워졌다.<br/><br/>- 에큐메니컬 정책과 그에 대한 반발 -<br/><br/>물론 “기독교”에 대한 호의는 오직 카톨릭 교회라고 불리는 집단에게만 한정되었고, “이단 분파”에 속한 사람들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목적 자체가 “제국의 통합”이었으므로, 기독교 자체가 분열되어 있는 것은 황제에게 전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특히 “도나티스트”라고 불리는 성경대로 믿는 그룹이 골칫거리였는데, 이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때 믿음으로부터 떨어져나갔던 사람들이 은근슬쩍 다시 감독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고 “카톨릭” 교회로부터 성별했던 사람들이었다. 도나티스트들은 한술 더 떠서 당대에 이미 많은 교회들에서 수용하고 있었던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교리를 마귀의 교리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으므로, 가히 “기독교계”의 “트러블 메이커”라고 할만 했다.<br/>따라서 황제의 정치적 목적을 고려해 볼 때, 그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은 제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나티스트들은 A.D. 314년과 316년에 황제로부터 정죄를 받았다. 그들의 교회는 폐쇄되었으며, 박해와 순교가 뒤따랐다. 그렇다고 도나티스트들이 완전히 멸절된 것은 아니었다. 퍼가모 교회 시대를 향한 예언에서도 드러나거니와(계 2:13), 퍼가모 교회 시대에도 신실한 순교자들은 계속해서 존재했다. 이들은 후일 이슬람 세력이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점령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고, 오차드(Orchard)에 따르면 한때는 로마카톨릭 교인들과 그 수가 비슷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br/><br/>- 세상과 음행한 교회 -<br/><br/>도나티스트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의 주류는 점차 황제를 등에 업은 “카톨릭” 교회로 굳어져 갔다. 정교분리의 원칙, 즉 교회는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마 22:21) 원칙은 그들 가운데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황제가 공회를 열어 전 세계의 감독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교리”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성경적 기준이 아니라 어느 편이 황제의 정치적 목적에 더 부합하느냐를 기준으로 수행되었고, 공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감독들도 이런 점을 점차 깨달아 그에 맞게 처신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로마의 통합”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정통”으로 승인되었고, 그와 달리 다수의 반대에 부딪힌다면 그 무엇이라도 “이단”으로 취급당했다. 그 더러운 이익 앞에 건전한 교리란 무참히 짓밟힐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딛 1:9).<br/><br/>그렇게 교회 안의 이단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 바깥에서 쥬피터, 다이아나 따위를 섬기던 이교도들까지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교리들이 교회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고, 교회는 점차 순수한 양무리가 아닌 이리(행 20:29), 여우(솔 2:15), 그리고 개, 돼지(벧후 2:22)가 득실거리는 동물원으로 변모했다. 회중들 중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으므로 그러한 비성경적 작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감독들을 통해 전파되는 공회의 결정 사항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영적 음행과 우상 숭배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곧 그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이단”들을 박해하는 대열에 서고 말았다.<br/><br/>세상의 권력과 야합하여 지역 교회를 타락시킨 당대의 감독들을 하나님께서는 “발라암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었다고 평가하셨다(계 2:14). 그들의 행적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 숭배와 음행에 가담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발라암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던 까닭이다. 바야흐로 그 이름부터 “숱한 결혼”이란 뜻인 영적 음행의 교회 시대, “퍼가모” 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행실이 그들의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계획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음행의 영이 그들 가운데 있고 그들이 주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호 5:4).<br/><br/>- 니케아 공회 -<br/><br/>교회사가들은 이때에 교회들이 세속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것 자체는 부정적으로 평하면서도, 황제를 통해 소집된 에큐메니컬 공회를 통해 “기독교”의 교리가 발전되고 정립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교회사를 통틀어 공회가 긍정적인 역할을 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우리는 피터 럭크만 목사가 &lt;신약교회사&gt;를 통해 지적했던 대로,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공회”에 대한 언급은 진리를 억압하는 데 헌신했던 성경을 거부하는 그룹을 지칭한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행 6:12).<br/><br/>흔히들 “삼위일체”의 교리를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하는 니케아 공회(A.D. 325)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피조된 신이라고 생각했던 아리우스주의자들, 그들을 논박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이도 저도 아닌 다수들, 이렇게 세 부류가 모여 있었다. 니케아 공회에서 난 결론은 후자의 두 부류를 만족시키는 것이었고, 아리우스주의는 정죄되었다.<br/><br/>그러나 애당초 셋 중에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진 부류가 하나도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진 결론은 “아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아들 하나님, 즉 『말씀』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요 1:1,2).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전부 이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니케아 공회를 통해 이뤄진 일이란, 이단 종파들끼리 모여 황제의 간택을 받지 못할 이단 종파를 가려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br/><br/>니케아 공회에서는 어떤 교회에서 감독을 임명하려면 반드시 “대교구”의 감독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든지,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티옥의 감독들은 전통적으로 그러했듯이 그 관할 지역의 교회들을 지배할 권한이 있다든지 하는 조항들이 “교회법”으로 공표되기도 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한 지역 교회의 감독이 다른 지역 교회의 감독에게 권위를 행사해도 된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고전 16:12). 이는 명백히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신 니콜라파의 교리를 실행하는 것이었다(계 2:15). “니콜라”라는 말은 그 어근을 따져 들어가면 “사람들을 이기는(정복하는) 자”라는 뜻이고, 주님께서 승인하신 적이 없는 계급 체계를 만들어, 주님께서 부여하신 적이 없는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는 일 전반이 바로 이 니콜라파의 교리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br/><br/>- 퍼가모 교회를 향한 경고 -<br/><br/>주님께서는 위와 같은 퍼가모 교회에게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분의 입의 칼로 싸우시겠다고 엄중히 경고하셨다(계 2:16). 그들을 대적하는 것은 “재침례”라는 반(反)카톨릭적 믿음을 가지고 있던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유카이트, 카타리 등이 아니었다. 이런 무리들에게는 황제의 비호 아래 군사력까지도 손에 넣은 거대한 로마 제국의 기독교계에 위해를 가할 힘이 없었다. 그들을 대적하여 지옥에 던져 넣는 주체는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양날이 시퍼렇게 선 칼(히 4:12,13),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요 12:48).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30 Aug 2024 16:11: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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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수고하고 인내한 에베소 교회 시대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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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 에베소 교회 시대 이전 역사 - --------<br/><br/><br/>교회 시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유대적 배경지식이 주는 조명은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 유대인은 구원의 근간이 되는 민족이요(『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 - 요 4:22),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모든 면에서 많으니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이 맡겨졌음이니라』(롬 3:1,2). 초대 교회 시대는 특히 유대인이 중심이었던 구약의 경륜이, 교회가 중심이 되는 신약의 경륜으로 바뀌는 과도기적 상황 속에 있었다. 따라서 당대의 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전후한 유대의 역사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br/><br/><br/>주 예수께서 초림하시기 전으로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우리가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스룹바벨 성전 재건 이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다시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왕은 세워지지 않았으나 제사장 가문이 그 땅의 실질적 귀족이요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제사장들과 함께 유대 사회를 이끌어가던 또 다른 그룹이 있었는데, 바로 산헤드린 공회였다. 학자들은 산헤드린이 B.C. 3세기경, 그리스가 그 땅을 차지했던 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헤드린은 민수기 11:16에서 모세가 임명했던 70인의 “장로회”에 그 기원을 두었기에 의장을 포함하여 71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자문관과 법률 해석인들의 연합 기관이었다. 산헤드린은 로마 통치하에서도 일부 사안을 제외하고는 입법과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강력한 의결기구요, 나름대로의 절차와 재심 제도 등을 갖추고 있던 선진적 기관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후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재판할 때만큼은 그 절차적 정당성이 철저히 무시되었으며, 날치기로 판결이 진행되었다. 이 대목에서는 이런 말씀을 떠올려 봄직하다. 『진노는 잔인하고 성냄은 사나우나, 시기 앞에 누가 설 수 있으리요?』(잠 27:4) 어쨌거나 유대 사회에서 일단의 리더십이 확보된 상태였음에도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지는 못했다. “국제 사회”에서 이스라엘은 중동 땅의 지배권을 확보한 나라에 복종해야 하는 약소민족 공동체에 불과할 뿐이었다. 바빌론, 메데-페르시아,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 로마 등 어떤 국가가 패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리저리 급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br/><br/>이러한 배경 속에 B.C. 2세기경,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시리아가 유대 땅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일이 발생했다.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정책적으로 유대교의 예배와 관습들을 억압했고, 유대 지역의 헬라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특히 B.C. 167년에는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 피를 뿌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돼지를 불결한 짐승으로 여기는 유대인들로서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일을 계기로 뭉친 유대인들이 마카비 형제를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B.C. 165년에는 성전을 다시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었으며, B.C. 63년 로마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잠시나마 주권국으로서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때를 기념하는 명절이 성경에서 수전절(요 10:22)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누카”이다.<br/><br/><br/>-------- - 초림 당시 있었던 분파들 - --------<br/><br/><br/>혁명에 성공한 마카비 일가는 스스로 제사장직을 취하였고 실질적으로 유대 땅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성전 경배를 회복하자는 지극히 “근본주의적인” 초심을 차츰 잃어버린 그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뒀으며, 헬레니즘에 빠져들게 되었다. B.C. 135년부터 통치하기 시작한 히카르누스와 이에 동조한 고위층 제사장 가문은 급기야 혼의 불멸이나 영적인 존재들을 믿지 않는 유대교 분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분파가 바로 사두개파이다(행 23:8). 사두개파는 기득권층으로부터 시작된 분파이므로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했으나(사도행전 5:17을 보면, 대제사장과 함께한 무리가 사두개파였음이 명시되어 있다), 백성들로부터 호응을 크게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br/><br/><br/>백성들은 설령 율법을 잘 알지는 못할지라도, 전통으로 율법을 해석해야 한다는 기조를 따르고자 했다. 이러한 입장을 표방했던 유대교의 또 다른 핵심 분파가 바로 바리새파이다. 그 명칭 자체가 “분리된 사람”을 뜻하는 바리새파는 모든 헬라 문화나 세속적인 것에서 분리하는 엄격한 율법주의를 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곧 종교적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렸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을 잘 지킨다는 우월감 속에서, 더 중요한 율법과 공의와 자비와 믿음은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마 23:23,24). 결국 초림 당시 그들은 자신들 또한 여타의 백성과 다름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눅 18:9-14).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도 바울처럼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열성은 있었을지 모르나, 올바른 지식을 따라 되지는 않았기에(롬 10:2) 거치는 반석에 걸려 넘어졌던 것이다.<br/><br/><br/>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사두개파나 바리새파가 되는 일이란 평범한 백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성들은 율법의 세세한 부분까지 교육받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에는 두 분파 중 어느 쪽에 속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엘리트”라고 불릴 만한 일이었다. 평범한 백성은 다만 성전과 회당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들에게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믿음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정통 유대인 출신은 아니었지만 그 피가 흐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의 입을 통해서도 이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줄을 아나이다. 그분이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일들을 말씀해 주실 것이니이다』(요 4:25).<br/><br/>-------- - 회당에서의 경배 - --------<br/><br/><br/>성전에서 드리는 경배에 대해서라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 개념을 어렴풋하게라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기명과 공간 구성, 제사와 의식의 방법에 대해 구약성경이 자세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당에서의 경배와 관련해서는 많이 생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일상 속 유대교를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이 회당의 기능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br/>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 또 천하 각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번영함에 따라 유대 땅 안팎으로 점차 유대인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중 절대다수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기껏해야 일 년에 몇 번 성전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까닭에 율법을 듣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등의 신앙생활을 위해 새로운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지중해 근방의 여러 지역에 회당이 하나둘 생겨났다.<br/>회당은 그것이 소재한 지역의 장로들이 주재하였으나 히브리인이라면 누구나 사회할 수 있는 권위가 부여되었다(마 4:23, 눅 4:16-30, 행 9:20-22; 13:5). 다만 예배 준비는 회당 책임자가 도맡았다. 워커에 따르면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기도, 구약성경 낭독, 그 해석을 선포하는 일, 때때로 설교 등이 있었다고 한다. 회당은 성전을 대신하여 빠른 속도로 유대 종교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심지어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에도 회당들은 여전히 건재했기에 유대교 자체가 붕괴한 것은 아니었다.<br/><br/>-------- - 회당에서의 복음 전파 - --------<br/><br/><br/>우리 주님께서도 그러셨고, 그분의 사도들도 진리를 선포할 장소로서 회당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이유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점을 오해하여 초대 교회 시대의 지역 교회 모임과 예배가 회당에서, 그것도 안식일에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의 첫날, 즉 일요일에 모인다(행 20:7).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서로 다르듯이, 안식일과 주일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br/><br/><br/>어쨌거나 수많은 회당들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되셨음은 분명하며(행 6:9; 9:20; 13:5,14; 14:1; 17:1,10; 18:4,19; 19:8), 심지어는 야이로, 크리스포, 소스데네와 같이 회당장 출신들 중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당시 회당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를(요 9:22; 12:42) 염두에 둔다면, 회당장이나 되는 사람이 그것도 여럿이 주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은 꽤 놀라운 일이다. 필자는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글들이 읽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읍에서 모세를 전파하는 자들이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이 읽혔음이라』(행 15:21). 성경은 구약이건 신약이건 언제나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왕국”을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 말씀을 주의 깊게 듣기만 했다면 당대에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로마인들이 처형한 그 죄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경의 주인공이시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경을 상고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함이니, 그 성경은 나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음이라』(요 5:39).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17 Apr 2024 17:27: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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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환난과 궁핍 속에 순교한 스머나 교회 시대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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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br/><br/><br/>- 열 차례의 박해 -<br/><br/>“스머나”라는 이름이 장례용품인 “몰약”이란 뜻인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요 19:39), 스머나 교회 시대는 박해와 죽음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주님께서도 스머나 교회가 “열흘” 동안 환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계 2:10), 이는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자행했던 열 차례의 박해에 적용해 볼 수 있다.<br/><br/>첫 번째 박해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인 네로에 의해 자행되었다(A.D. 67). 네로는 당시 로마에서 일어난 큰 화재를 수습하면서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씌웠는데, 이때 약 3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바울과 베드로 또한 이즈음 순교했다. 두 번째 박해는 로마 제국의 제11대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도미티안)에 의해 일어났다(A.D. 81). 이때는 일단 그리스도인들이 재판에 넘겨지면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처벌을 면할 수 없다는 법령이 제정되었으며, 사도 요한이 팟모 섬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세 번째 박해는 로마의 “5현제” 중 둘째이자 제13대 황제인 트라야누스(트라얀)에 의해서 일어났다(A.D. 108). 이 시기에 시민권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완고함”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라는 법이 공표되었다.<br/><br/>네 번째 박해는 “5현제” 중 마지막이자 제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자행되었다(A.D. 162). 그는 제국 전역에 전염병이 돌자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칙령을 선포했고, 이를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마녀사냥”했다. 이때의 박해로 프랑스 리옹에서 약 5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저스틴 마터도 이즈음 순교했다. 다섯 번째 박해는 제20대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한 것이었다(A.D. 192). 클레멘트는 “많은 순교자들이 매일 타 죽었고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목베임을 당했다.”라고 당시의 박해에 대해 설명한다. 이 시기에 리옹의 감독 이레내우스가 순교했다. 여섯 번째 박해는 초대 군인 황제였던 막시미누스(막시무스) 트락스에 의해 일어났다(A.D. 235). 막시미누스는 전대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다소 유화적이던 그간의 정책노선을 철회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성도들이 재판정에 서 보지도 못한 채 죽임을 당했고, 그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매장되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기 위해 특별히 왕들과 권세 있는 사람들을 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이 더더욱 와 닿는다(딤전 2:1,2).<br/><br/>일곱 번째 박해는 데키우스(데시우스)에 의해서였다(A.D. 249). 당시의 로마는 국내외의 사건사고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데키우스는 이를 “신의 진노” 때문으로 규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이교도적 제사 행위에 참여하고서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칙령을 선포했다. 이에 불복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체포되었고 순교하기도 했는데, 오리겐도 이때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여덟 번째 박해는 발레리아누스(발레리안)에 의해 자행되었는데(A.D. 257),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공민권을 박탈했으며, 집회를 금지하고 모든 감독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아홉 번째 박해는 아우렐리아누스(아우렐리안) 통치 하에서였다(A.D. 274).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돌려주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라는 갈리에누스(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의 칙령이 시행되고 있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태양 숭배를 로마의 통일된 종교로 만들고자 했으므로 기존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초기에는 (다소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대놓고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충분한 권력 기반이 다져졌다고 여겨지자 갈리에누스 칙령을 파기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총독들에게 명령을 보내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직적인 박해를 가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가 명령이 시행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암살당하는 바람에 이 박해는 다른 박해들보다 비교적 덜 잔혹하게 마무리되었다.<br/><br/>마지막으로 열 번째이자 최악의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디오클레시안) 때 있었다(A.D. 303).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통치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호감을 보였고, 이때의 그리스도인들은 장기간 지속된 평화 속에서 꽤 큰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졌던 사위의 설득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정책을 변경했고,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이때의 박해를 세간에서는 “대박해”라고 부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든 교회와 성경을 파괴할 것을 명령했고,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에게서는 그 직을 박탈했다. 또한 약 10년간 이어진 이 박해에서 약 1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으며, 고문, 투옥, 추방된 성도는 약 2만 명에 달했다.<br/><br/>- 박해의 결과와 교훈 -<br/><br/>스머나 교회 시대에 살았던 성도들에게, 주님께선 오히려 너희들이 부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다(계 2:9). 주님을 위해 “참았던”(딤후 2:12) 이 시기의 성도들은 유업과 면류관(계 2:10)을 얻어 하늘에서 부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박해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통해 땅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았다(요 10:10). 이는 그들의 비문(碑文)이 이교도들의 그것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교도들은 현세에 대한 아쉬움, 신들에 대한 원망, 불가지론, 허무함 등을 그들의 묘비에 남겼다. 그러나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갔던 지하 교회이자 무덤인 “카타콤”에는, 그 어떤 원망이나 슬픔도 없이 오직 찬양과 승리의 간증만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셋째 하늘에 있는 이 성도들이 현재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려다본다면 어떻겠는가?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고 지키려는 그 어떤 열정도 없고 그 일을 위해 박해를 받아본 일도 없는 자들이, 큰 교회 건물을 지어 놓고 으스대면서 스스로 “나는 부요하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계 3:17). 어쩌면 그 부패한 신앙의 역겨움에 헛구역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cf. 계 3:16).<br/><br/>아무리 통제해도 그 세력이 약해지지 않고 “전염병처럼” 복음이 퍼져 나갔던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그 대적들에게나 한 가지 교훈을 확실하게 심어 주었다. 즉 “박해”로는 믿음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솝 우화 “해님과 바람의 내기”에서 나오는 나그네가 그러했듯이, 풍파가 거셀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품은 믿음을 굳세게 지켰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저버리도록 만들었던 것은 오히려 박해가 끝난 뒤의 “햇볕정책”이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교회 시대를 다룰 때 자세히 논할 것이다).<br/><br/>- 거짓 교리의 침투 -<br/><br/>스머나 교회 시대에 관해 논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순교의 시대라고 해서 모두가 제대로 된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스머나 교회 시대의 혼란을 틈타 사탄은 거짓 교사들(벧후 2:1)을 “그리스도인인 양” 순교하도록 만들었고, 그들을 우상화함으로써 그들이 가르쳤던 거짓 교리를 널리 퍼뜨렸다. 예컨대 장차 교회사 내내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할 명분이 될 교리인 “유아세례”는 이 시기에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아세례의 교리가 보편화된 것은 나중 일이었지만, “침례(세례)를 통해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식의 거짓 교리가 저스틴 마터, 이레내우스, 오리겐과 같은 “훌륭하신 순교자님들”을 통해 제시되었고, 이를 통해 후대 사람들이 “유아세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br/><br/>주님께서는 스머나 교회 시대에 침투한 거짓 교리들 중에서 특별히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모독에 대해서 콕 집어 말씀하셨다(계 2:9). 이들은 소위 “대체 신학”을 주창하는 자들인데, 곧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이신 주 예수를 거부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셨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모든 약속과 축복이 교회에게 넘겨졌다고 이야기하는 자들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1세기경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바나바 서신”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신 민족이라는 논조로 기록되어 있으며, 저스틴 마터도 &lt;트리포와의 대화&gt;에서 할례란 유대인들의 도성이 불타게 되며 그들이 홀로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표식이라고 했다. 터툴리안도 할례란 유대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표적이라고 했다. 오리겐은 “한 수 위”였는데, 그는 히브리 철학과 성경을 “조화”시키기 위해 “문자적 해석”을 버리고 성경을 이교도들의 시처럼 “풍유적”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들을 후대의 신학자들이 아전인수격으로 교회에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br/><br/>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회복되리라고 말씀하셨지만(롬 11:25-29), 이에 반하는 비성경적인 해석이 성경에 “까막눈”이던 후대의 로마카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 결과 유럽과 중동 지역에서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형성되었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거나 추방당했다. “자칭 유대인들”의 거짓 교리는 지난 2천 년간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앞으로 대환란 때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혹자가 “교파 간에 성경 해석이 조금 다른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화합”과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생각은 물러 터지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발상일 뿐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6 Mar 2024 11:48:3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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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환난과 궁핍 속에 순교한 스머나 교회 시대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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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br/><br/>- 스머나 교회 시대의 시작 -<br/><br/><br/>사도들의 시대였던 에베소 교회 시대는 사도들이 하나둘씩 순교함에 따라 저물어갔고, 바야흐로 스머나 교회 시대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장례용 물품인 “몰약”(요 19:39)이란 뜻을 가진 “스머나” 교회 시대는, 그 의미처럼 성도들의 죽음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br/><br/><br/>사도들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였다(행 12:1,2). &lt;폭스의 순교사&gt;에 따르면 스테판이 순교한 지 10년째가 되던 해였다고 한다. A.D. 54년에는 빌립이, A.D. 60년에는 마태가, A.D. 72년에는 다대오라고 불리던 유다가, A.D. 74년에는 셀롯이라 불리던 시몬이 순교했다.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맛디아, 안드레, 베드로, 바돌로매, 도마, 그리고 바울도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사도들은 성난 이교도들에 의해 두들겨 맞고, 돌에 맞고, 채찍으로 맞고, 창에 찔리고 십자가에 달렸으며 참수당했다.<br/>스머나 교회 시대의 첫머리는 이러한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순교했던 이들이 장식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Igna- tius)와 폴리캅(Polycarp)과 같은 사람들이 그중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들은 순교의 순간에 보여 준 담대함으로 귀감이 된다. 이그나티우스는 원형 경기장에 던져졌을 때 사자 우리로 먼저 가서 사자들에게 나오라고 외쳐댔다고 한다. 그는 바울과 같은 “순교 편집증” 환자였다(cf. 행 14:19,20). 폴리캅은 화형대 위에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놓아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주님을 섬긴 지 86년이 흘렀어도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내가 날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대꾸했다. 이에 화형이 집행됐지만, 어쩐 일인지 불길은 그를 전혀 태우지 못했다. 결국 화형 집행을 명한 호민관은 그를 칼로 찌르라고 명령을 번복해야 했다.<br/><br/>사도들과 그 뒤를 따른 성도들의 순교는 복음 그 자체를 옹호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필자는 거리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끔 이런 말을 덧붙이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복음에 대해 증거를 대보라고 따져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본 증인들은 오백 명이 넘습니다(고전 15:6).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파한 그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 복음의 말씀이 이른 것입니다. 당시 세계를 재패했던 로마는 이 소식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성도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소식을 전파했던 것입니까? 그 일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죽더라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자신에게 어떤 이득도 없는 거짓말을 목숨을 걸고서 전파하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었다는 것 외에, 그들이 목숨을 걸고 그분의 부활을 전파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방법이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며,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일은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것입니다.”<br/><br/>- 사도들이 다녀간 이후의 일들 -<br/><br/><br/>사도들이 유대, 사마리아, 소아시아, 유럽의 회당 등지에서 복음을 선포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힘있게 융성하며 세력을 얻었다(행 19:20). 곳곳에서 복음에 순종한 사람들은 지역 교회를 형성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할 사역의 범위는 점차 넓어졌다. 이를 감당하기에 사도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사역을 나누어 맡을 사람들이 필요했다. 게다가 사도들은 어떤 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양무리를 돌볼 수도 없었다. 일종의 “선교사”요 “순회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와 유대인들로부터 수배되어 쫓기기 일쑤였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사도들은 어떤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지역 교회를 형성하고 나면, 자신을 대신하여 교회를 담당해 줄 신실한 형제를 감독(목사)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길을 떠났던 것이다.<br/><br/><br/>교회의 감독들(혹은 영향력 있는 성도들) 중 사도들로부터 직접 사역을 이어받아 에베소 교회 시대와 스머나 교회 시대에 걸쳐 사역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교회사가들은 이들을 “속사도(Apostolic Fathers)”라고 부르곤 한다. 앞서 언급했던 이그나티우스와 폴리캅도 이에 해당하며, 각각 안티옥과 스머나의 감독이었다. 이 외에도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히에라폴리의 파피아스(Papias) 등이 있다. 그러나 학자들이 “속사도”라고 분류하는 사람 중에는 사도들로부터 직접 사역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증거가 희박한 경우도 많고, 사도들과 전혀 다른 교리를 가진 배교자들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성경대로 믿는 성도로서 하는 교회사 연구란 학자들의 자료를 편집하여 나열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편견에 사로잡힌 악의적인 편집, 거짓 자료, 학계에 퍼진 근거 없는 낭설을 뚫고, 그 너머에 흐릿하게 보이는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추적하는 일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학자”들의 말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 『모든 일을 시험하여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잡으라』(살전 5:21).<br/><br/><br/>“속사도”들이 퍼뜨린 거짓 교리들 중에는 치명적인 것들도 꽤 있었다. 워커(Walker)에 따르면 로마의 클레멘트는 “사도직을 계승한” 직분들이 로마 교회에 존재했음을 시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후일 교회사를 관통하는 거악(巨惡), 곧 교황 제도의 씨앗이 되었다. 반면 안티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각각의 교회에 하나의 목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권위는 다른 권위에 간섭받지 않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 “사도직 계승”에 관한 한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바른 성경과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로마”가 아닌 “안티옥”을 통해 전수되었음을 상기해 봄직하다.) 교회사 초기 성도들은 대부분 이그나티우스처럼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성령님께서는 당시의 성도들이 “자칭 사도라 하지만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찾아냈다.”며 칭찬해 주시기 때문이다(계 2:2).<br/><br/>- 성경의 정경 확립 -<br/><br/><br/>거짓을 배제해 내는 분별력은 사도들이 사역한 직후에 살았던 성도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능력이었다. 거짓 사도들(고후 11:13)이 진짜 사도들을 음해하고, 사도들을 사칭하는 자들이 서신을 위조하여 거짓 교리를 퍼뜨리는(살후 2:2,3) 등 속임수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을 사칭하는 자들은 구약 시대부터 늘 있었지만(렘 5:31; 14:14; 29:9) 이때에는 그런 자들에 의한 혼란이 더욱 극심했다. 왜냐하면 무엇이 올바른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터넷은커녕 전화도 없던 시대는 사도 바울을 통해 계시된 교회 시대의 경륜이 전파되는 일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지역 교회 내에 신약성경의 일부만 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어떤 글이 성경이고 어떤 글이 아닌지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 소위 “위경”(Pseudepigrapha)과 “외경”(Apocrypha)을 위시한 거짓 문서들까지 돌아다니며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있었다.<br/><br/><br/>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섭리적으로 역사하셔서, 그분의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신 사도들의 서신들과 기록들을 간수해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인정하실 글들은 지역 교회들 내에서 계속해서 회람하고 필사하며 전수되게 하시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유실되게 하시거나 잘 사용되지 못하게 하심으로 배제시키셨던 것이다. “디다케,” “클레멘트 서신,” “허마의 목자” 등 소위 “속사도들의 문헌”들은 이 시기에 기록되었으나 성도들에게 성경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사도들을 사칭한 자들에 의해 기록된 “도마복음,” “안드레행전,” “바울묵시록” 등의 문서들도 그러했다. 심지어는 사도가 기록한 문서라고 해도 항상 성경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cf. 골 4:16).<br/><br/>에베소와 스머나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그들이 인식한 상태였든 그렇지 못한 상태였든 간에 “성경”이 될 문서들을 열심히 필사하고 읽고 인용하고 전파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통해 성경의 66권을 확정해 주셨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경의 “정경”이 퍼가모 시대 때에 있었던 “제3차 카르타고 공회(A.D. 397)”에서 확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이전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교부들”은 그들의 글을 쓸 때에 무엇이 성경이고 무엇이 성경이 아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들과 함께했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른 원문 계열의 성경인 구시리아 역본과 구라틴 역본은 스머나 교회 시대 초기(A.D. 120-150)에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에베소 교회 시대에 영감으로 기록되었던 신약성경은, 뒤따르는 스머나 교회 시대부터 이미 섭리적으로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15 Feb 2024 17:15:5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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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수고하고 인내한 에베소 교회 시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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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글을 시작하며<br/><br/><br/>“선입견이 없는 역사란 없다!” 이렇게 다소 도발적인 명제로 글을 여는 까닭은 혹 “객관적인 역사”가 존재하리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함이다. 역사란 단순한 “사실들의 누적”이 아니다. “하루의 역사 기록”인 “신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신문에는 대부분의 “사실들”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일상에서 절대다수의 시간을 차지하는 일들, 즉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빨래를 널고 운전을 하는 일 등은 신문에 보도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어느 작은 지점에서일어난 예외적인 일이 기삿감이 되기 마련이다. 역사는 “무엇을 중요하게 볼 것인가?”라는 가치 판단의 산물이지 “중립적”혹은 “객관적”인 기록이 결코 아니다. “역사책”인 성경 또한 이 점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의 면전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으나, 다만 이것들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믿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20:30,31).<br/><br/><br/>사정이 위와 같다면, 교회들의 역사를 다루는 사람은 자신의 “선입견,” 곧 그의 “역사관”을 밝히는 것이 정직할 것이다. 필자는 최상의 역사책인 “성경”이 교회사를 보는 관점에 철저히 맞추어 교회사를 서술해 나갈 것이다. “미리 기록된 역사책”인 성경은 이미 약 2,000년 전에 신약 교회들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예언해 두었다(계 2,3장).사도 요한은 앞으로 사도들의 시대인 에베소 교회 시대(A.D. 33-100)가 끝나면, 박해의 시대인 스머나 교회시대(A.D. 100-313)가 있을 것이고, 기독교에 대한 유화 정책이 베풀어짐에 따라 영적 간음의 시대인 퍼가모 교회시대(A.D. 313-500)가 도래할 것이며, 그 결과 진리의 빛이 꺼져 중세 암흑시대의 막이 올라 두아티라 교회시대(A.D. 500-1000)가 펼쳐질 것이고, 이후 암흑시대의 절정을 이루는 사데 교회 시대(A.D.1000-1500)를 지나면 개혁과 부흥의 시대인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A.D. 1500-1900)의 불꽃이 타오를 것이며, 끝으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A.D. 1900-현재)의 대배교로 신약 교회 시대가 끝날 것임을 기록해두었다. (각 시대가 어떤 사건들을 기점으로 해서 나누어지는지는 후에 자세히 서술하겠다.) 샤프(Schaff),모셰임(Mosheim), 워커(Walker) 등과 같은 교회사가들이 무엇이라고 떠들든 간에 우리는 이러한 “성경적 선입견”에 입각하여 역사적 기록물들을 다루고, 교회사를 공부해 나갈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만이 우리가 따라야 할 발자취를 남겨 두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또 우리에게 성경과 진리를 전수해 준 믿음의 선진들 앞에 서는 날에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br/><br/>교회 시대의 시작<br/><br/><br/>“교회”라는 말이 신약적인 용어인 것만은 아니다. 순교자 스테판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의 교회”라고 언급한바 있다(행 7:38). 즉 교회(ἐκκλησία)라는 말은 “불러냄을 받은 모임”이라는 뜻일 뿐이다.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께서 이집트로부터 따로 불러내어 모으신 민족이었기에 “교회”라는 호칭에 합당했다. 그러나 교회사를 다룸에 있어 “교회”라는 명칭을 쓸 때면 대개 신약의 “지역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신약 지역 교회란 구원을 받을 때 “성령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 즉 “우주적인 교회”(고전 1:2; 10:32; 12:12-31, 엡5:22-33) 안으로 들어온 성도들이 지상에서 그들의 모임을 결성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살전 1:1, 살후 1:1).따라서 최초의 성령 침례가 일어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이 교회 시대의 기점이다. 이때로부터 모든 사도들이 그들의 사역을마치고 셋째 하늘에 계신 주님께로 간 날까지가 최초의 교회 시대인 에베소 교회 시대이다(오순절-A.D. 100년경).<br/><br/><br/>“온전히 목적된”이라는 뜻을 가진 “에베소” 교회 시대는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과녁에 정확히 날아가 꽂히는 화살처럼 사역했던 신실한 사도들과 감독들의 시대였다. 몇 세기가 지나면 니콜라파의 교리를 수용하는 일, 곧 일단의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계급 체계”를 만들어 “평신도”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일이 흔해질 터였지만, 이 에베소 교회 시대에는 그러한 교리가 배척되었다(계 2:6). 첫사랑을 저버려서 다소 책망을 받았어도(계 2:4), 그 행위와 수고와 인내에 있어서는 인정을 받는 교회들의 시대였다(계 2:2,3).<br/><br/>에베소 교회 시대의 배경<br/><br/><br/>성경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에베소 교회 시대의 전반적인 상황들을 이미 상당히 알고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명패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 기록돼 있었다(요 19:20). 이는 당시의 사회를 잘 나타내는 하나의 단면이다. 먼저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로마는 당대의 지중해 일대, 즉 “온 세상”(눅 2:1)의 주인이었다. 신약의 교리가 점차 이 로마 제국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한 가지 문제가 대두되었다. 로마에서는 황제를 신성화하고 있었는데, 유독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워커(Walker)에 따르면 A.D. 29년경에는 퍼가모에 아우구스투스를 예배하는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황제가 아닌 통치자들까지도 신성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발견되었다(행 12:22). 물론 이러한 “황제신성화” 작업이란 역사 속에서 으레 그렇듯이 종교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애국이나 충성심의 표현에 가까웠다.그러나 어쨌든지 그리스도인들이 “카이사”를 “주”라고 부르려 하지 않고, 다른 “주”만을 인정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문제가 되었다. 에베소 교회 시대에는 특별히 도미티아누스(A.D. 81-96년경 재위)가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이 시기에 사도 요한도 팟모 섬에 유배되었다.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라도 예수를 주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라는 말씀은 어느 시대에나 해당되는 진리이지만, 에베소와 스머나 시대에는 특별히 더그러했다.<br/><br/>헬레니즘의 양면성<br/><br/><br/>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재패했을지언정, 사상적, 문화적으로는 로마 이전에 세계의 주인이었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그리스) 제국이 당대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헬레니즘). 복음과 진리가 확산되는 데에 있어 이러한 환경에는 양면성이 있었다. 긍정적 측면으로는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헬라어가 공용어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그 일행들이 수월하게 사역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점이 있다. 근대 이후의 선교사들처럼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성경을 번역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유대인들에게 맡겨졌을지언정(롬 3:2), 신약성경은 히브리어가 아닌헬라어로 기록되어 온 세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부정적 측면으로는 당대에 팽배해 있던 헬라 철학이 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거부하거나 왜곡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중에서도 당대에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널리퍼져 있었다(행 17:18). 에피쿠로스는 정신적 쾌락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상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 “쾌락”을 달성하는 데에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욕심을 끊어내는 방법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후대에 그 용도가 바뀌어 단순히 육욕적인 쾌락을 따랐다. 쾌락을 따르는 방법이 어떤 식이든, 에피쿠로스학파는 기본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했다.죽음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즐겁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혼이 죽은 뒤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제쳐놓고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으리라.”(고전 15:32)라는 생각으로 “만족”하는 무리들이 존재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br/><br/><br/>한편 스토아학파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와는 반대로 쾌락을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금했다. 그들은 이성의 힘과 의지를 통해 감정이나 욕망과 같은 “쓸데없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이어졌다. (클레안테스라는 스토아 철학자는 심지어 스스로의 의지로 굶어 죽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철학과 금욕주의에 대해 경고했는데, 그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 자체가 스토아 철학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골 2:8,18,23). “학자들”은 이와 같은 스토아 철학이 “기독교 사상”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말하지만, 이는 진리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완벽하게 올바른 삶을 살아내는 것이란 “육신을 통하여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구주가 필요하다고 시인한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롬 8:3). 우리는 그들처럼 애쓰지 않아도 이미 행복을 얻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분께서 곧 오시리라는 사실과, 그분을 위해 각자가 자기 몸으로 일한것이 보상받으리라는(고전 3:13,14, 고후 5:10) 사실을 아는 데서 오는 수준 높은 행복을 얻었다. 에베소 교회시대는 그러한 행복으로 가득 찬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육욕적인 세상 철학을 거부하고 주님을 위해 참고 인내하며 수고했던 때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04 Jan 2023 15:08:4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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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마틴 루터의 생애와 박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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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저명한 독일의 성직자요 교회 개혁자였던 마틴 루터는, 광부였다가 고위급 행정관이 된 존 루터(John Luther)의 아들로서, 만스펠트(Mansfield) 주에 소재한 작센(Saxony)의 이슬레벤(Isleben)에서 1483년 11월 10일 태어났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서 논리학과 철학 일반 과정을 이수했고, 스무 살이 되자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윤리학, 그 밖의 다른 분야의 철학들을 강의했다. 그 뒤 부모의 권유로 변호사가 될 목적으로 민법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어느 날 친구와 들판을 걷다가 난데없이 내려친 번개에 맞아 루터 자신은 그 자리서 쓰러지고 옆 친구가 죽는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그 길로 세상을 등지고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수도회로 들어가 버렸다. 루터는 거기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스콜라 철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며 장서들을 섭렵하는 가운데 전에 본 적이 없는 라틴어 성경 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큰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읽고 또 읽는 중에 그 수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br/>&nbsp; 루터는 1년간의 수련(修練) 수사 과정을 거친 후 에르푸르트 수도원에서 성직자가 될 것을 선서했고, 사제 취임식을 하고서 1507년 처음으로 미사를 직접 거행했다. 이듬해 비텐베르크 대학(University of Wittenberg)으로 옮겨 갔는데, 이 대학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 속한 연로한 교수가 있었다. 당시 같은 수도원 수사였던 루터는 교수와 특히 죄들의 사함에 대해 의논했는데, 늙은 신부는 루터에게 “모든 사람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된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며,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교리”라고 가르쳤다. 이에 루터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라는 말씀을 되풀이해서 말했던 사도 바울의 의도를 완전히 깨우치게 되었고, 전에 읽었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해석이 헛되다는 것을 알았다.<br/>&nbsp; 1512년 루터가 소속된 수도회의 몇몇 수도원들이 그들의 주교 총대리와 다툼을 벌이자, 루터가 로마로 가 그들의 대의명분을 주장할 자로 뽑히게 되었다. 로마에 간 그는 교황과 그의 궁정을 보았음은 물론, 그곳 성직자들의 관례를 관찰하고 그들이 미사를 거행하며 보여 준 조급하고 피상적이며 불경건한 모습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메모해 두었다. 그 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비텐베르크 대학에 머물며 신학 교수로서의 소명에 전념했다. 즉 로마서와 시편을 이전 주석자들과 완전히 다르게 설명했고,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으로 값없이 용서되므로 우리가 이 풍성한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아들께로 부지런히 돌려놓았던 것이다.<br/>&nbsp; 1513년 3월, 율리오 2세(Julius II)를 뒤이은 레오 10세(Leo X)는 율리오 2세가 시작한 성 바울 대성당(the Church of St. Paul) 건축 계획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모으려고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1517년 대성당 건축에 한 푼이라도 기부하는 자들을 위해 전 유럽에 걸친 총체적인 면죄를 발표했으며, 각 나라마다 대표들을 임명해 면죄를 찬사하며 사람들을 면죄해 주고 돈을 긁어모으게 했다. 이 괴이한 행위들로 비텐베르크 전역에 성난 아우성이 메아리쳤고, 특히 루터의 경건한 열성을 확 타오르게 했다.<br/>&nbsp; 1517년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 전날(10월 31일) 밤,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 성곽 옆에 붙은 교회 문에 면죄에 관한 논문을 공개적으로 붙여 놓았고, 그 글 서두에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글로든 논쟁으로든 한번 붙어보자는 도전장을 내걸었다. 이에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이단으로 고소했고,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도 작센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루터의 주장들을 틀어막을 일에 대해 고심했다. 루터의 주장은 로마카톨릭과 황제 모두에게 골치 아픈 일이었던 것이다. 루터의 대적들이 루터의 주장을 철회시키려고 루터와 교섭을 벌이고 있는 사이, 루터의 교리들은 크게 우세를 떨쳐 고국과 해외에서 격려가 빗발쳤다. 보헤미안들은 개혁 작업 중 순교한 존 후스의 책과 편지들을 보내 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말고 잘 참고 인내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수많은 위대한 학자들도 루터에게 가세했다.<br/>&nbsp; 레오 10세는 루터의 대적들의 끈덕진 간청에 못 이겨 1520년 6월 15일자 교서에 루터를 정식으로 정죄함을 발표했다. 세족 목요일[Maunday Thursday, 부활절 전 목요일로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사도들의 발을 씻으신 것을 기념하고, 또 성체와 서품(敍品)의 성사(聖事)를 그리스도께서 정한 것을 기념하는 로마카톨릭의 날]에 교황의 견책을 받고 처음으로 고소당한 마틴 루터는 부활절이 지난 후 보름스(Worms)로의 여정에 박차를 가했고, 그곳에서 황제와 독일의 모든 나라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끊임없이 진리를 고수하고 자신을 방어하며 대적들에게 답변해 주었다.<br/>&nbsp; 샤를 5세는 자신도 교황의 판결에 따라 루터를 로마카톨릭에서 분리된 교회 분리론자요 악명 높은 이단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는데, 이에 루터는 교황과 주교들을 대적해 노골적으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교황 세력들의 권위를 경멸하도록 교황의 교서를 대적하는 책과 “주교들의 위계”라 불리는 성직위계에 대항하는 책을 1522년 각각 한 권씩 집필했다. 또 독일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을 출간했는데, 후에 루터 자신과 멜란히톤(Melanchthon)에 의해 교열되었다.<br/>&nbsp; 1527년 루터는 심장 부위의 혈액이 갑자기 응고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숨이 끊어질 뻔했다. 1533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1530년 루터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발표한 신조)을 고수한 연유로 고난을 겪은 오샤츠(Oschatz) 시민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1534년에는 그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그로부터 1년 후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같은 해에 &lt;미사와 사제들의 화체설에 대한 반론&gt;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1537년 2월 슈말칼트(Smalkald)에서 종교 문제를 둘러싼 회합이 열렸을 때 멜란히톤과 함께 부름받았는데, 모임에 참석한 루터는 몹시 심한 병에 걸려 다시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 남긴 유언에서 로마카톨릭에 대한 자신의 증오를 그의 친구들과 형제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렇듯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하나님의 위대한 과업에 전념한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예순셋을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을 에워싼 이들에게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두세 번 열린 적이 있는 트렌트 공회와 교황이 복음을 거슬러 이상한 것들을 고안해 낼 것이기 때문이오.” 오전 9시가 되기 전, 자신의 임종 시간이 다가오는 걸 느낀 루터는 경건한 기도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의탁했다. <br/>&nbsp;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영원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주께서는 주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저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나이다. 저는 그분을 알았고, 그분을 저의 생명과 건강과 구속으로서 사랑했지만, 그 악한 자는 그분을 박해하고, 욕하고, 상처를 입히며 괴롭혔나이다. 제 혼을 주께로 인도해 주옵소서.” 이후 그는 다음처럼 세 번 연달아 말한 뒤 그를 구원하신 주님의 품에 평안히 안기게 되었다. “저의 영을 주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오 진리의 하나님! 주께서는 저를 구속해 주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Thu, 30 Jun 2016 22:54:4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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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지스카(Zisca)에 대한 박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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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스카의 본명은 존 드 트로크즈노우(John de Trocznow)였다. 지스카라는 이름은 그가 눈을 하나 잃었기에 붙여진 ‘애꾸눈’을 의미하는 보헤미아어이다. 보헤미아 본토인으로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폴란드 황제 윈세슬로스(Winceslaus)를 돕기 위해 튜톤족(Teuton, 유틀란트에 살던 게르만족의 한 부족) 기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명예 훈장을 받고 윈세슬로스의 궁정으로 복귀한 그는 존 후스 사건 때 콘스탄스에서 왕의 백성들에게 자행된 유혈 사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언명했다. 윈세슬로스는 그것을 복수하는 일이 자신의 권한에 있지 않음을 한탄했는데, 바로 이 순간부터 지스카가 자국의 종교적 자유를 강력히 주장하려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1418년, 해악의 온상이었던 공회가 해산되고, 그 해 여름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위스그라데(Wisgrade) 성에서 총회가 열렸다. 그들은 지스카를 따라 손에 무기를 들고 황제에게 몰려가 적들로부터 그를 지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황제는 무기를 적절히 사용하라면서 이를 허락했다. <br/>&nbsp; 윈세슬로스의 후임은 남동생 시지스몬드(Sigismond)였다. 그는 스스로를 개혁자들에게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들었고, 자신의 정부에 불쾌히 여겨지는 모든 것을 제거했다. 이에 지스카와 동료들은 황제와 교황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40,000명의 군사로 필센(Pilsen)을 포위 공격하여 성을 점령했다. 또 보헤미아 남서부 지방을 굴복시켜 개혁자들의 군대가 크게 증강되었다. 닷새 밤낮을 맹렬히 전투한 끝에 멀다우(Muldaw) 길목을 장악하자, 놀란 황제는 터키 국경에서 병력을 빼내어 보헤미아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지스카는 프라하를 정복하고 1420년 8월 19일 소규모 부대를 격파하여 황제로 하여금 서둘러 병력을 다시 모집하게 했다.<br/>&nbsp;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스카는 프라하에서 약 40마일 떨어진 견고한 언덕 위에 진영을 요새화하여 그곳을 타볼 산이라 불렀고, 거기서 일단의 기병대를 한밤중에 기습하여 1,000명의 병사를 포로로 만들었다. 잠시 후, 황제는 이전에 지스카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프라하의 견고한 요새를 손에 넣었지만 곧 지스카에게 봉쇄되었고, 굶주림에 위협받은 황제는 결국 철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죽기 살기로 맞붙어 보기로 하고 타볼 산 위의 지스카 진영을 공격해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그 밖의 많은 요새들도 무릎 꿇었고, 지스카는 험준한 바위로 둘러싸인 산으로 철군하여 그곳을 강한 요새로 만들었다. 거점을 정한 그가 다시 프라하 시로 가서 황제를 강하게 압박하자 미스니아 후작(marquis of Misnia)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큰 병력으로 적을 쳐부수는 일을 맡겼으나 지스카에게 대파되고 말았다.<br/>&nbsp; 1421년 봄, 지스카는 이전처럼 작전을 개시하여 도중에 만나는 수도원이란 수도원은 모조리 파괴시켰다. 위스그라데(Wisgrade) 성을 포위공격하자 그것을 구하러 온 황제가 덫에 걸려 가공할 살상을 당하며 크게 깨졌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그 성 또한 빼앗겼다.<br/>&nbsp; 보헤미아 성직자들의 엄청난 무지와 미신에 상당한 혐오감을 느낀 지스카는 전쟁의 와중에도 개혁 작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스카가 이러한 원정들 가운데 루비(Rubi) 시 앞에서 숙영했을 때 그가 공격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데 느닷없이 성벽에서 화살이 날아와 눈에 꽂히고 말았다. 프라하에서 그것을 빼냈지만 거기에 미늘이 달려 있어 그것과 함께 눈알이 찢겨지며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열병이 뒤를 이었고, 생명은 어렵사리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 눈은 완전히 멀어 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군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br/>&nbsp; 황제는 제국의 속국들을 불러들여 연합군을 형성했다. 연합군 군주들은 소이신(Soisin) 포위공격을 감행했으나, 지스카 장군이 다가오는 것만 보고도 줄행랑을 쳐 버렸다. 황제는 그에 아랑곳 않고 15,000두의 헝가리산 말과 혹한 작전을 위해 잘 무장된 25,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와 함께 진군했다. 지스카의 군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자, 황제는 그 무적의 적장과 한 번 더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1422년 1월 13일, 두 군대는 크렘니츠(Kremnitz) 근처 광활한 평원에서 마주쳤다. 지스카는 수행하는 두 기병의 안내를 받으며 전투용 도끼로 무장하고 최전선 중앙에 모습을 나타냈다. 병사들은 찬송가를 한 곡 부른 후 올 테면 오라는 식으로 침착히 칼을 뽑아 들고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장교들이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자 지스카가 머리 위로 군도를 한 바퀴 휘익 저었다. 전투 개시 신호였다.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황제 군대는 후미를 공격당하며 모라비아 변경의 타볼인들을 향해 쉬지 않고 달아났고, 도중에 이글라(Igla) 강의 얼음이 깨지면서 적어도 2,000명이 수장되었다. 전리품과 전승 기념물을 싣고 타볼로 돌아온 지스카는 다시 종교개혁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죽은 자를 위한 모든 기도와 우상들, 성직자 예복, 금식, 축제를 금지시켰다. 이 모든 일에 편견 없는 지성을 지닌 이들의 자문을 구했고, 전체의 동의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지스카에게 보헤미아의 왕위를 취하라는 권유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하고서 다음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황제 시지스몬드는 이 전투에서 사생결단을 보기로 전의를 다졌고, 미스니아 후작이 북 색소니(Upper Saxony)를 돌파해 들어가 있는 동안 헝가리의 측면에 자리잡은 모라비아로 진군해 들어갈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후작은 엘베(Elbe)의 견고한 아우시그(Aussig) 성읍 앞에 진을 친 지스카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참패를 맛보았고, 아우시그 또한 무릎을 꿇고 말았다. <br/>&nbsp; 피로에 지친 자신의 병사들에게 약간의 휴식을 주기 원했던 지스카는 자신의 존재가 최근에 있었던 소요 때문에 남겨진 모든 불안을 잠재우리라 희망하며 프라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난데없는 공격을 받았고, 그와 그의 병력은 그 시민들을 물리친 뒤 군부대로 철군하여 그 배신행위에 대해 상세히 일러 주었다. 지스카는 그들의 복수심에 불타는 적의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프라하의 저명한 목사 로케산(Roquesan)과 면담을 벌여 결국 화해를 이루었다.<br/>&nbsp; 오랜 전쟁으로 맥이 빠진 황제 시지스몬드는 지스카에게 사람을 보내 이제 그만 칼을 거두고 그가 내세우는 조건들을 말하라고 요구했다. 회의 장소가 지정되자, 지스카는 그의 주요 장교들과 황제를 만나러 출발했다. 그러나 역병이 창궐한 지역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브리스카우(Briscaw) 성에서 염병에 걸려 1424년 10월 6일 안타깝게도 생을 마치고 말았다. 모세처럼 지스카도 자신의 수고가 완결되는 걸 내려다보며 죽은 것이다. 그의 시신은 보헤미아의 차슬로우(Czaslow)의 큰 교회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에 세워진 그의 기념물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 존 지스카가 누워 있으니, 그는 로마 교황의 폭정이 침범해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고국을 수호한 후 교황을 경멸하며 이 신성한 곳에 당당히 잠들어 있도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Sun, 26 Jun 2016 23:17: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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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프라하의 제롬에 대한 박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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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존 후스의 친구이자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개혁자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바로 그곳의 대학에서 수학했고, 또 유럽의 몇몇 신학교들, 특히 파리,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쾰른(Cologne), 옥스퍼드(Oxford) 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제롬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위클리프의 저서들에 정통하게 되었는데, 남다른 근면성을 지녀 각고의 노력 끝에 영어에 통달한 후 그 중 여러 작품들을 모국어로 번역했다.<br/>&nbsp; 제롬은 프라하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위클리프의 지지자임을 공언했다. 위클리프의 교리들이 보헤미아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인 데다 후스가 그것들의 주된 촉진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위대한 개혁 과업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의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br/>&nbsp; 1415년 4월 4일, 제롬은 후스가 죽기 약 석 달 전 콘스탄스에 도착했다. 그의 도착이 대중에게 알려져 공회가 잡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음 날 콘스탄스에서 1마일 떨어진 황제의 도시 이베를링(Iberling)으로 이동했다. 그는 거기서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안전 통행권을 주는 조건으로 공회 앞에 서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공회에도 의뢰해 보았지만 허사로 돌아가 보헤미아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제롬은 허소(Hirsaw)에서 슐츠바흐(Sultsbach) 공작의 한 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제롬을 손에 넣은 슐츠바흐 공작은 앞으로 할 일들을 편지에 적어 공회에 보냈다. 공회는 공작에게 감사를 표한 후 제롬을 콘스탄스로 즉각 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제롬은 긴 쇠사슬 족쇄에 채워져 끌려갔고, 도착하자마자 혐오스런 지하 감옥에 넘겨지고 말았다.<br/>&nbsp; 마침내 공회 앞에 끌려온 그는 자신의 대의명분을 항변하여 혐의를 풀기를 원했다. 그러나 거절당하자 별안간 다음과 같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짐승 같은 일이 다 있단 말인가! 난 340일 동안 감옥을 옮겨 다니며 감금되어 있으면서 비참이란 비참, 궁핍이란 궁핍은 모조리 다 맛보았도다. 내 적들에게는 온갖 고소의 기회를 제공해 주고도, 정작 나에게는 최소한의 방어 기회도 주지 않으니 이 무슨 행패란 말인가! 당신들은 내가 내 재판을 준비할 수 있도록 단 한 시간도 주려 하지 않으면서도 내게 쏟아진 중상모략은 곧이곧대로 다 믿었다. 내 교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이단으로 제시했고,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기도 전에 믿음의 적으로 간주했는가 하면, 박해에 대한 내 생각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미리부터 나를 사제들을 박해하는 자로 낙인찍어 버렸다. 당신들은 지금 총공회를 열고 있으니 당신들이 중추가 되어 이 온 세상이 위엄과 지혜와 신성함을 논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당신들은 사람이며,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이끌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신들이 더 고결한 지혜를 추구할수록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어리석게 빗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항변하는 대의명분은 나 혼자만의 명분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대의명분이요, 그리스도인들의 대의명분이며, 후대의 권리에 영향을 줄 대의명분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실험이 내 안에서 직접 이루어지려 하고 있도다.”<br/>&nbsp; 그러나 이런 발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제롬은 자신의 혐의가 읽혀 내려가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항목들로 요약되었다. ① 그는 교황의 위엄을 비웃은 자이다. ② 그는 교황을 반대하는 자이다. ③ 그는 추기경들의 적이다. ④ 그는 고위 성직자들을 박해하는 자이다. ⑤ 그는 기독교를 증오하는 자이다.<br/>&nbsp; 제롬에 대한 재판은 그가 고소를 당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치러졌고, 제롬의 혐의를 지지하는 증인들이 심문을 받았다. 죄수는 자신을 방어할 준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340일 동안 빛도 들지 않는 혐오스런 지하 감옥에 있으면서 그 흔한 하루 세 끼도 먹지 못해 굶주림에 허덕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준비되었다는 말이 통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나 활기가 조금만 부족해도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불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백은 하늘을 찌를 듯했으며, 또 마치 모든 장서들이 구비된 도서관이라도 옮겨다 놓은 것처럼 교부들과 고대 저자들의 글들을 인용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가 가슴 뭉클한 웅변을 어찌나 의기양양하게 펼치던지 완고한 열성을 지닌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했고, 미신에 사로잡힌 마음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눈치를 보일 정도였다. 그는 사실에 바탕을 둔 증거와, 위협과 중상이 지지하는 증거를 훌륭히 구별했다. 또 그의 삶과 행실의 방향을 하나도 빠짐없이 제시했고,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관점으로 사색하는 것은 진리를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식별하는 데에 목적이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대적들을 당당하게 경멸했는데, 만약 그가 조금만 허점을 보였다면, 그들은 그로 하여금 덕과 진리의 대의명분을 철회토록 했었을 것이다. 그는 후스에게 찬사를 보내기 시작하며 자신도 그의 영광스런 순교의 발자취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선언했다. 그 뒤 위클리프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교리들을 간단히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진술로 결미를 지었다. 즉 그의 의도는 결코 하나님의 교회를 거슬러 무엇을 개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불만을 토해냈던 성직자들의 타락에 반대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며, 또 이에 덧붙여 그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은, 원래 널리 선행을 행하며 자선을 베풀 의도였던 교회의 재산이 눈의 만족, 성대한 잔치, 멋부린 제의(祭衣) 그리고 기독교의 이름과 신앙 고백에 여타 치욕을 가져오는 데에 천하게 쓰이는 것은 분명 불경건한 일이라는 것이다.<br/>&nbsp; 재판이 끝나자 제롬은 동료 순교자 후스에게 내려졌던 것과 동일한 형을 선고받았다. 그 결과 그는 교황이 늘 해오던 방식대로 시민들의 손에 넘겨졌으나, 그 자신이 평신도였기 때문에 강등 의식은 치를 필요가 없었다. 준비된 붉은 마귀가 그려진 종이 모자가 머리에 씌워지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참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실 때 그분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니, 나 또한 주님을 위해 이 모자를 쓸 것이다.”<br/>&nbsp; 그가 믿음을 부인하리라는 희망 하에 이틀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고, 이 기간 동안 플로렌스(Florence) 추기경은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있는 노력 없는 노력을 다 쏟아 부었으나, 제롬은 자신의 피로 그 교리에 인장을 찍기로 마음을 굳히고서 너무도 담대하게 죽음을 맞아들였다. <br/>&nbsp; 제롬은 형장으로 가는 길에 찬송가를 몇 곡 불렀다. 후스가 불탔었고 자신도 그렇게 처형될 바로 그 지점에 도착하자 무릎을 꿇고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아주 기분 좋게 화형대를 부둥켜안았다. 그들이 나뭇단에 불을 붙이려고 등 뒤로 다가오자 이렇게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내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그것을 두려워했다면 난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br/>&nbsp; 드디어 불이 붙었다. 제롬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가리를 크게 벌린 뱀처럼 삼켜 들어오는 불길의 고통에 찬송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불길 속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외침이 들려 왔다. “불길에 휩싸인 내 혼을 그리스도께 바치나이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3 Jun 2016 22:15:5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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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존 위클리프의 생애와 박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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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종교개혁의 샛별”이라 불리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 잉글랜드(Eng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웨일즈(Wales)를 총칭하는 영(英) 본국]의 에드워드 2세(Edward II)가 통치하던 1324년경에 태어났다. 그를 교회 일꾼으로 키울 작정이던 부모는 여왕 필리피(Philippi)의 고해신부 로버트 이글즈필드(Robert Eaglesfield)가 옥스포드(Oxford)에 설립한 왕립 대학(Queen’s college)에 그를 입학시켰다. 그러나 학문적 유익이 기대에 못 미치자 당시 유럽 최고의 학구 조직으로 정평이 나 있던 머턴 대학(Merton College)으로 옮겼다.<br/>&nbsp; 위클리프가 처음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건 학교에 돈을 달라며 구걸하는 수사들을 대적해 대학을 변호한 일 때문이었다. 수사들은 그리스도께서 흔히 볼 수 있는 구걸자이셨고 그분의 제자들도 구걸자들이었으므로 구걸하는 것을 복음이 규정하고 있다는 교리를 설교단과 기회 닿는 모든 곳에서 역설했다. 그들과 대학의 반목은 끊이지 않았다. 이 게으른 자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위클리프는 그 거지떼를 대적하는 논문을 출간하여 그들이 종교는 물론, 인류 사회에 치욕을 안겨 주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이 일로 그는 대학의 첫째가는 대변자들 중 하나로 여겨졌고, 곧 발리올 대학(Baliol College)의 학료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br/>&nbsp; 후에 신학 교수 자리에 선출된 위클리프는 로마 교회의 오류들과 수도원 앞잡이들의 야비함을 확신하고서 그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대중 강연을 통해 그들의 부도덕함을 거세게 비난했고, 미신의 흑암으로 덮여 있는 각색 악습을 펼쳐 보였다. 대중이 뒤집어쓰고 있던 편견부터 벗겨 내었고, 로마 법정의 횡령 행위들을 까발렸다. 이 때문에 성직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그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힘을 빌어 그의 직위를 박탈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후에 이전 지위를 회복하자 강의를 통해 교황의 횡령, 그의 무오성, 그의 오만, 그의 탐욕, 그의 폭정에 대해 거센 공격을 가했다. 위클리프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른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 주교들의 허식, 사치, 장식 달린 예복들로 화제를 돌려 그것들을 초기 감독들의 소박함과 비교했다. 그들의 미신과 속임수는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논리적 정확성으로 역설하던 주제들이었다.<br/>&nbsp; 랭커스터 공작의 후원으로 위클리프는 성직록을 넉넉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의 교구에 정착하자마자 그의 적들과 주교들은 그를 가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랭커스터 공작이 박해 때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퍼시(Percy) 경, 영국 문장원(紋章院) 총재가 함께하고 있었기에 그 시련은 그 앞에서 맥을 못 추었다.<br/>&nbsp; 에드워드 3세가 죽자 손자 리차드 2세(Richard II)가 나이 열한 살에 왕위를 계승했다. 기대했던 독점적 섭정(攝政)의 자리를 손에 넣지 못한 랭커스터 공작은 그의 권세가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때는 이때다 싶은 위클리프의 대적들은 그에 대한 고소 항목들을 새로이 다듬었다. 교황의 권위에 힘입은 주교들은 위클리프의 재판 회부를 주장하며 나섰고, 그는 실제로 램베스(Lambeth)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 바깥에서는 민중들이 금방이라도 폭동을 일으킬 것처럼 어수선했고, 법정에서마저 어떤 최종적인 선고도 내려서는 안 된다며 루이스 클리포드(Lewis Clifford) 경이 엄포성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판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위클리프에게 교황의 미움을 사는 교리들을 설교하지 말라는 금지령만 내리고서 전체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이에 콧방귀를 뀐 후 맨발로 돌아다니며 두터운 모직으로 된 프리즈 가운(frieze gown)을 걸치고서 이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br/>&nbsp; 1378년에 두 명의 교황, 즉 우르반 6세(Urban VI)와 합법적인 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t VII) 사이에 경합이 벌어졌다. 위클리프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교황 제도에 반대하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그것을 각계각층 사람들이 진지하게 읽도록 했다. 그런데 그 해가 다 지날 무렵 위클리프가 심신 기능에 심한 이상이 생겨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갔다. 옥스포드에서 가장 저명한 시민 넷을 옆에 끼고서 구걸하러 다니던 수사들은 그를 찾아가 그들에 대해 역설하고 다녔던 내용들을 그의 혼을 위해서라도 철회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엄한 얼굴로 응수했다. “난 죽지 않을 것이다. 기필코 살아서 수사들의 악행을 만천하에 폭로할 것이다!” <br/>&nbsp; 병상에서 일어나자, 위클리프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매우 중대한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소책자를 발간하여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제시했는데, 이에 성경 발매를 금지시키려는 주교들의 발악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성경 판매량을 치솟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인쇄본을 확보할 수 없는 사람들은 특정 복음서나 서신서들의 사본이라도 손에 넣으려 했다. <br/>&nbsp; 이 일이 끝나자, 위클리프는 더 나아가 화체설 교리를 목표로 삼았다. 1381년 옥스포드 대학 강연에서 이 교리를 공격했고 논문을 발표했다. 옥스포드 부학장으로 있던 바턴 박사(Dr. Barton)는 그 대학 수뇌들을 소집해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서 파문 운운하며 위협을 가했다. 위클리프는 이제 랭커스터 공작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데다가,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이전의 적수 윌리엄 코트니(William Courteney) 앞으로 출두하라는 법정 소환 명령까지 떨어져 난관에 부딪혔다. 때문에 자신이 그 대학 직원으로서 주교 관할권에서 면제됨을 구실 삼아 스스로를 보호했고, 이 탄원은 대학 당국이 자기 직원을 지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수락되었다.<br/>&nbsp; 지정된 시간에 소집된 법정은 최소한 그의 견해들에 대해 판결이라도 내리자는 결론을 내리고 어떤 것들은 오류로 어떤 것들은 이단으로 정죄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 주제를 문서로 출판하여 재판 결과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주교는 모든 이단 사설과 위클리프가 간행한 책자들을 샅샅이 조사하라는 옥스포드 총장에게 내리는 지시 서한들을 왕에게서 받아 냈고, 위클리프는 검열의 폭풍 속에서 물러나와 어느 후미진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견해들은 길을 걷다 두 사람을 만나면 그 중 한 명이 위클리프파라 확신해도 무방할 정도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br/>&nbsp; 이 기간에 두 교황 사이의 다툼은 계속되어 교서를 발표한 우르반은 종교의 대의명분을 위해, 또 교황청을 지키기 위해 클레멘트와 그의 지지자들을 대항해 무기를 들어올리자며 종교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촉구했다. 종교의 이름을 팔아먹은 그 야비한 전쟁은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던 위클리프로 하여금 다시 펜을 들게 했다. 타협을 모르는 신랄하기 짝 없는 글 때문에 우르반의 분노를 사 전례 없는 큰 문제를 야기한 듯했지만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출되었다. 얼마간 중풍에 걸린 그를 적들이 분노를 쏟을 가치도 없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br/>&nbsp; 다시 돌아온 위클리프는 자신의 교구인 러터워스(Lutterworth)로 가서 교구 목사를 지냈다. 그리고 1384년 말 실베스터의 날(Silvester’s day)에 주님의 품에 평안히 잠들었다. <br/>&nbsp; 위클리프의 박해자들은 그가 죽은 지 41년 뒤 진토가 된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재로 만들었고, 그 재를 주워 담아 강물 속에 던져 버렸다. 그렇게 그는 3대 요소, 즉 흙과 불과 물로 분해된 셈인데, 이는 위클리프의 이름과 교리 모두를 완전히 소멸시켜 없애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그의 시체를 파내어 뼈들을 불사르고 재를 물 속에 가라앉게 했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으로 얻은 열매와 그의 교리에 담긴 진리는 불태울 수 없었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0 Jun 2016 22:14:2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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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17세기에 피에드몽 골짜기에서 일어난 박해의 절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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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교황 클레멘트 8세(Clement the Eighth) 때인 17세기에 피에드몽 골짜기에서 일<br/><br/>어난 박해는 그 잔인성이 어느 때보다도 격렬했다. 그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교황주<br/><br/>의자들이 토해 낼 수 있었던 비열함과 야수성의 절정이었다. 지금도 변하지 않은 로마<br/><br/>카톨릭의 거짓 교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당해야 했던 <br/><br/>치를 떨게 하는 고문과 박해들은&nbsp; ① 교황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nbsp; ② 교회의 모든 성<br/><br/>직 체계를 한 가지 방식으로 관리하기 위해, ③ 모든 교파들 간에 일치단결을 이루기 <br/><br/>위해, ④ 모든 성자들과 로마 교회의 의식들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가해졌다. 이제 아<br/><br/>이들의 머리를 깨뜨려 뇌를 쏟아 내고, 미사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성도들을 십자가<br/><br/>에 거꾸로 못박았던 그 피비린내나는 박해의 현장으로 가 보도록 하자.<br/>&nbsp; 사라 라스띠그놀 데 비그네(Sarah Rastignole des Vignes)는 카톨릭 성자들에<br/><br/>게 기도하기를 거부하자 배에 둥근 낫이 찔러 넣어져 배가 주욱 찢어지고 머리가 베어<br/><br/>졌다. 마르따 꽁스땅띤(Martha Constantine)은 몇몇 군사들이 강간한 뒤 가슴을 <br/><br/>도려내어 죽였는데, 그들은 도려낸 가슴을 기름에 튀겨 동료들 앞에 차려 놓아 먹게 했<br/><br/>다.<br/>&nbsp; 박해자들은 뜨라시니에르(Thrassiniere) 출신의 한 남자를 붙잡아 칼끝을 양쪽 귓<br/><br/>구멍과 양발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의 손톱과 발톱을 시뻘겋게 달궈진 펜치로 뜯어 <br/><br/>낸 후 그를 당나귀 꼬리에 매달아 거리 여기저기로 끌고 다녔다. 결국 그의 목을 끈으<br/><br/>로 꽉 조였는데, 막대기로 어찌나 강렬하게 쥐어틀었던지 그의 머리가 몸에서 비틀려 <br/><br/>떨어지고 말았다. <br/>&nbsp; 에세이 가르시노(Esay Garcino)는 온몸이 작은 조각들로 갈가리 찢겨졌고, 박해자<br/><br/>들은 자신들이 그의 고기를 잘게 저미었다며 조롱조로 지껄였다. 아르망(Armand)은 <br/><br/>사지가 잘려져 울타리에 걸쳐졌다. 두 명의 할머니는 할복된 채 들녘의 눈밭에 버려져 <br/><br/>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떤 할머니는 코와 양손이 잘려진 채 내버려져 피를 흘리며 <br/><br/>죽어 갔다. 셀 수 없이 많은 남녀와 어린아이들이 바위에서 세차게 던져져 산산이 부서<br/><br/>졌다. 마그달랑 베르띠노(Magdalen Bertino)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머리가 양다리 <br/><br/>사이에 묶인 채 절벽 아래로 던져졌다. 마리 레이몽데(Mary Raymondet)는 숨이 멎<br/><br/>을 때까지 살이 뼈들로부터 얇게 저미어졌다.<br/>&nbsp; 빌라리오의 마그달랑 삐오(Magdalen Piot)는 까스톨류(Castolus)의 동굴에서 <br/><br/>조각조각 잘려졌다. 앤 샤르보니에르(Ann Charboniere)는 화형대의 한쪽 끝이 그<br/><br/>녀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꿰찔러 들어오고 다른 끝이 땅바닥에 고정된 채 매달려 죽었<br/><br/>다. 자코 뻬랭(Jacob Perrin)과 그의 형제 다비(David)는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다.<br/>&nbsp; 지오바니 &#48884;랑숑(Giovanni Pelanchion)은 교황 따르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노<br/><br/>새의 꼬리에 한쪽 다리가 묶였고, 군중들의 돌을 맞으며 루세른 거리를 이리저리 끌려 <br/><br/>다녔다. 그들은 그를 강변으로 데리고 가 그의 머리를 찍어 잘랐다.<br/>&nbsp; 마그달랑(Magdalen), 즉 쁘떼 퐁뗀(Peter Fontaine)의 열 살박이 딸은 군인들에<br/><br/>게 강간당한 후 살해되었다. 같은 또래의 소녀는 빌라 노바(Villa Nova)에서 산 채로 <br/><br/>구워졌다. 자코 미셸리노(Jacob Michelino)와 몇몇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들의 배에 <br/><br/>갈고리가 꿰어져 매달렸고, 그 상태로 살을 도려내는 지독하기 짝없는 고문을 당하다 <br/><br/>숨을 거두었다. 지오바니 로스따그날(Giovanni Rostagnal)은 코와 귀가 잘렸고, <br/><br/>신체 중 살이 많은 부분들이 얇게 썰어져 피를 흘리며 죽어 갔다.<br/>&nbsp; 다니엘 셀레지오(Daniel Seleagio)와 그의 아내, 지오바니 듀랑(Giovanni <br/><br/>Durant), 로드위쉬 듀랑(Lodwich Durant), 바돌로매 듀랑(Bartholomew <br/><br/>Durant), 다니엘 르벨(Daniel Revel), 뽈 레이노(Paul Reynaud)는 그들의 구강<br/><br/>에 채워진 화약에 불이 붙여져 머리가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 버렸다. 뽈 <br/><br/>가르니에(Paul Garnier)는 두 눈이 도려내진 후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고, 몸통이 네 <br/><br/>부분으로 절단되었다. 로까삐아따(Rocappiata) 출신의 다니엘 까동(Daniel <br/><br/>Cardon)을 붙잡은 박해자들은 그의 머리를 자른 후 뇌를 기름에 튀겨 먹었다.<br/>&nbsp; 뽈 질(Paul Giles)은 병사들로부터 도망치려다 목에 총상을 입었다. 그들은 그의 코<br/><br/>를 세로로 쪼개고, 턱을 얇게 썰고, 그를 찌른 후, 시체를 개들에게 던져 주었다. 어떤 <br/><br/>아일랜드 병사들은 가르시글리아나(Garcigliana)의 죄수들 가운데 11명을 골라낸 <br/><br/>후, 용광로를 시뻘겋게 달궜다. 그들은 죄수들에게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상대<br/><br/>방을 그 속에 밀어 넣도록 강요했으며, 마지막 죄수는 그들이 직접 밀어 넣었다.<br/>&nbsp; 프랑시 그로(Francis Gros)는 목사의 아들인데, 그의 살점이 뼈로부터 조각조각, <br/><br/>그것도 조금씩 서서히 베어져 눈 앞에 있는 접시에 담겨졌다. 그의 두 아이들은 그가 <br/><br/>보는 앞에서 잘게 썰어졌으며, 그의 아내는 남편과 자식들에게 가해지는 이 모든 만행<br/><br/>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도록 기둥에 묶였다. 자신들이 저지르던 그 잔악무도한 행위들<br/><br/>에 신물이 난 고문자들은 결국 남편과 아내 둘 다 목을 벤 후 전 가족의 살덩이를 개들<br/><br/>에게 던져 주었다. <br/>&nbsp; 쁘떼 가브리올라(Peter Gabriola)를 붙잡은 병사들은 화약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<br/><br/>니들을 그의 몸에 잔뜩 매달아 놓고서 불을 붙여 그를 날려 버렸다. 사뮤엘 <br/><br/>까띠에리(Samuel Catieris)의 아들 앙또니(Anthony)는 토막으로 잘려졌다. 쁘떼 <br/><br/>모니리아(Peter Moniriat)의 어떤 가족은 다리가 절단 당해 스스로를 치료할 수도 <br/><br/>서로를 도와줄 수도 없는 상태에서 과다 출혈로 죽었다. 다니엘 브네쉬(Daniel <br/><br/>Benech)는 코가 길게 쪼개지고 귀가 잘렸으며, 몸이 네 조각으로 절단되어 각각의 부<br/><br/>위가 나무에 걸렸다. 마리 모니노(Mary Monino)는 턱뼈가 부러진 후 굶어 죽을 때<br/><br/>까지 고통 속에 방치되었다.<br/>&nbsp; 다니엘 미샬리노(Daniel Michialino)는 혀가 뽑혀져 죽기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br/><br/>앙드레오 베르띠노(Andreo Bertino)는 복부가 찢겨져 열렸으며, 밖으로 빠져 나온 <br/><br/>그의 내장은 미늘창(도끼와 창을 결합시킨 무기) 끝에 걸려 보란듯이 이리저리 옮겨 <br/><br/>다녔다. 다비 아르망(David Armand)은 그의 머리를 벽돌 위에 내려놓으라는 명령<br/><br/>을 받았고, 한 병사가 큰 해머로 내려쳐 뇌가 밖으로 튀어 나왔다. 다비 <br/><br/>바리도나(David Baridona)는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유황성냥이 묶여져 불<br/><br/>이 붙여지는 고문을 당했고, 죽을 때까지 시뻘겋게 달궈진 펜치로 살이 뜯겼다. 지오<br/><br/>바니 바롤리나(Giovanni Barolina)는 아내와 함께 괴어 썩은 물 속에 던져졌는데, <br/><br/>푹푹 찔러 들어오는 쇠스랑과 날아드는 돌덩이들 때문에 머리를 물 속에 담그고 있을 <br/><br/>수밖에 없었고, 오물 속에서 숨이 막혀 죽고 말았다.<br/>&nbsp; 읽다가 소름끼침이 신물이 날 지경인 이 잔혹한 일들은 참된 기독 신앙을 증오하여 <br/><br/>지난 2천 년간 성도들을 죽여 온 우상 숭배자들의 실체를 보여 준다. 이들이 바로 하나<br/><br/>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성도들을 죽였기에 사도 요한을 놀라고 어리둥절하게 했던 바<br/><br/>로 그들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내가 보니,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<br/><br/>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더라. 그러므로 내가 그녀를 보고 크게 의아해 하며 놀랐노<br/><br/>라』(계 17:6).&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Tue, 14 Jun 2016 23:13: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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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칼라브리아에서 자행된 박해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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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때는 14세기, 프라겔라(Pragela)와 도피니(Dauphiny)에 살던 수많은 왈덴스들(Waldense)이 칼라브리아(Calabria)로 이주하여 그 나라 귀족들의 허락을 받고 몇몇 불모지에 정착했다. 그들은 근면하기 이를 데 없는 노력으로 땅을 일구어 몇몇 거친 불모의 땅을 신록이 우거진 옥토로 만들었고, 그곳 영주들은 이 정직한 새 백성들과 소작인들을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주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왈덴스들을 박해하려고 했다. 갖은 구실을 내세워 영주들의 마음을 자신들에게로 돌리려 했지만, 영주들은 왈덴스들이 로마카톨릭교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또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어 주교들의 수입을 올려 줬으니 주교들이야말로 불평을 터뜨릴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냐며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후 왈덴스들은 몇 년간 스스로 두 개의 통합된 도시를 만들어 대여섯 개의 마을을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 병합시켰다. 그리고 한 도시에 설교자 한 명을 둘 목적으로 제네바에 사람을 보내 목사 두 명을 데려오게 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br/>&nbsp; 이 일은 교황 피오 4세(Pius the Fourth)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왈덴스들을 칼라브리아에서 뿌리뽑고자 했다. 그래서 기질이 몹시 과격한 추기경 알렉산드리노(Alexandrino)를 사제 두 명과 함께 보내어 칼라브리아에서 심문관 노릇을 하도록 했다. 그 짐승들은 왈덴스들이 세운 도시 중 하나인 성 자이스트(St. Xist)에 도착하여 그곳 주민들을 모아 놓고 교황이 지명한 설교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명과 재산을 모두 잃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또 이를 공표하기 위해 미사가 치러질 예정이니 참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주민들은 가족과 함께 숲으로 도주해 버렸다. 그러자 추기경은 왈덴스들의 또 다른 도시인 라 가르드(La Garde)로 달려가 그곳 주민들도 도망갈까봐 성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대로에 경비병들을 배치시켰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성 자이스트에서와 동일한 제안을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 자이스트 주민들이 제안에 동의했다는 거짓말을 덧붙이는 바람에 라 가르드 주민들은 형제들의 선례를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br/>&nbsp; 그후 추기경은 성 자이스트 주민들을 잡기 위해 병사들을 숲속으로 출동시켰고 보이는 즉시 살해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수많은 왈덴스들이 그들의 포악함의 먹이가 되어 나뒹굴었지만,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왈덴스들이 몇 차례의 교전에서 놀라운 용맹을 발휘하자 추기경의 군대는 병력에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여러 전투에서 거의 모든 병사들을 잃었고 잔류병들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추기경은 나폴리(Naples)의 총독에게 서한을 보내 병력을 요청했다. 총독은 즉시 명령을 내렸는데, 나폴리의 모든 범죄자와 탈영병과 여타 추방자들에게 성 자이스트 주민을 몰살시킨다면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들은 이 제안에 응하여 경무장 중대로 조직되어 숲으로 파병되었다. 그들은 어떤 이들은 나무에 매달아 가지들로 불태웠고, 또 발가벗겨서 야수나 육식 조류에게 뜯어 먹히게도 했다. 이들은 많은 성도들을 멀리서 저격했지만, 대부분은 재미 삼아 요리조리 추적하여 잡았다. 그나마 동굴에 피신한 이들은 굶어 죽고 말았다. <br/>&nbsp; 성 자이스트 주민들이 몰살당하자, 라 가르드 주민들에게는 로마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면 집과 재산이 회복될 것이나 거절하면 죽음이 대가로 주어질 것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자 이 고결한 성도들은 로마카톨릭의 오류를 받아들이기를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이에 추기경과 총독은 겁을 주려고 그들 중 30명을 즉각 고문대에 올려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중 몇이 고문을 받다 숨졌고, 특히 샤를랭(Charlin)이라는 성도는 복부가 터져 창자가 밖으로 빠져 나와 격렬한 고통 속에 죽었다. 그럼에도 나머지 성도들은 어떤 고문에도 형상을 숭배할 수 없다며 담대하게 선언했다. 그러자 몇몇 성도가 추기경의 지시로 발가벗겨진 채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어떤 이들은 서슬 퍼런 큰 칼로 갈기갈기 난도질당했다. 어떤 이들은 높은 탑 꼭대기에서 아래로 던져졌다. 수많은 성도가 역청을 뒤집어쓴 채 산 채로 불태워졌다. 추기경을 수행하던 사제는 자기 손으로 피를 흘리게 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날카로운 큰 칼로 80명의 목을 베어 버렸다. 라 가르드 주요 인사 네 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목사는 자기 교회 첨탑 꼭대기에서 내던져졌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으나 추락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숨이 붙어 있는 그를 돼지들에게 던져 주라는 총독의 명령 때문에 돼지들에게 먹혀 죽은 것이다. 60명의 자매들은 사지가 너무 거세게 잡아당겨져 사지를 묶은 끈들이 살을 뚫고 뼈까지 조여 왔다. 감옥에 재수감된 그들은 거기서 상처가 썩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죽어 갔다. 다른 많은 성도들도 잔인한 방법으로 죽어 갔다. 동정심 많은 로마카톨릭교도가 그들을 위해 중재하고 나서면 그 역시 붙들려 동일한 운명에 처해졌다.<br/>&nbsp; 결국 칼라브리아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죽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미신의 제단에 바치려 하지 않았기에 죽임을 당했다. 가증스런 우상 교리를 포용하지 않았고, 거짓 교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기독교의 탈을 쓴 그 짐승들에게 죽고 만 것이다.<br/>&nbsp;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계 12:11).&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Mon, 30 May 2016 22:59:1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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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열 차례의 초기 박해들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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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65517; 트라얀(Trajan) 통치하의 세 번째 박해, A.D. 108년<br/><br/>&nbsp; 학식 있고 이름 높던 플리니 2세(Pliny the Second)는 이 세 번째 박해 때 통치자 트라얀에게 서한을 띄웠는데, 이유인즉,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로마법에 저촉되어 박해받을 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음에도 하루에도 수천 명씩 대학살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끓어오르는 연민을 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br/>&nbsp; 안티옥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바로 이 박해 때 고난을 당했다. 붙잡혀 스머나에 당도한 그는 순교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얻도록 해 달라는 편지를 로마에 있는 교회에 띄워 순교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었고, 그후 맹수의 우리에 던져 넣으라는 형을 선고받고서 사자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들려오자 &#034;오,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이라. 순결한 빵으로 발견되기 위해 맹수들의 이빨 사이에서 부서지려 하노라.&#034;고 말한 후 맹수들에게 뜯겨져 순교했다.<br/>&nbsp; 트라얀을 뒤이어 아드리안(Adrian)이 등극했고, 그 역시 지독한 가혹함으로 이 세 번째 박해를 이어나갔다. 로마 감독 알렉산더(Alexander)가 그의 두 집사와 함께 순교했으며, 퀴르누스(Quirnus)와 헤르네스(Hernes) 그리고 그들의 가족뿐 아니라, 로마의 귀족 제논(Zenon)과 10,000명에 육박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에 넘겨졌다. 아라랏 산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떠 수많은 사람들이 가시 면류관이 씌워지고 창으로 옆구리가 찔려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특히 유스타치우스(Eustachius)라는 로마 지휘관은 그의 몇몇 전승을 축하하기 위한 우상 희생제에 참가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중히 거절했고, 이에 화가 치민 배은망덕한 황제는 이 노련한 지휘관의 공로를 잊고서 그와 전 가족을 몰살시켜 버렸다.<br/>&nbsp; 파우스티네스(Faustines)와 조비타(Jovita) 그리고 브레스키아(Brescia)의 형제들과 시민들이 순교당할 때에는 고난에 대한 그들의 인내에 감탄한 칼로세리우스(Calocerius)라는 한 이교도가 &#034;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034;라고 탄성을 질렀다가 체포되어 함께 죽임을 당했다.<br/>&nbsp; A.D. 138년, 아드리안이 명을 다하자 유순한 성품의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가 뒤를 이었고,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잠시 중단되었다.<br/><br/>&#65517;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 통치하의 네 번째 박해, A.D. 162년 - ①<br/><br/>&nbsp; A.D. 161년경 왕위에 오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스도인들에게 독기를 품고 사납게 굴던 이 자에 의해 네 번째 박해가 시작되었다. <br/>&nbsp; 어떤 순교자들은 이미 까발려진 발바닥으로 가시, 못, 뾰족한 조개껍데기 같은 것들 위를 지나가야만 했고, 다른 이들은 그들의 근육과 핏줄들이 살갗 밖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채찍으로 얻어맞았는데, 그래도 부족한지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문들로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맛본 후 소름끼치기 짝 없는 죽임을 당했다.<br/>&nbsp; 젊고 신실한 그리스도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는 맹수들에게 넘겨질 때 맹수들을 비웃듯 담대한 믿음을 지켰고, 이를 지켜보던 몇몇 이교도들이 확고부동한 그의 믿음을 보고서 주님께로 회심했다.<br/>&nbsp; 스머나의 덕망 있는 감독 폴리캅(Polycarp)은 지방 총독 앞으로 끌려가 사형을 언도받고 시장 바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034;저주하라, 그러면 널 놓아줄 것이다. 그리스도를 비난해 보란 말이다!&#034; 총독의 이 타협안에 폴리캅은 &#034;내가 주님을 섬긴 지 86년이 흘렀어도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내가 날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인가?&#034;라고 응수했다. 화형틀에 홀로 묶인 그를 나뭇단에 지핀 화염이 아치 모양으로 휘감았지만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것을 본 총독은 칼로 찌르라는 명령을 내렸고, 칼로 찌르자 불길을 꺼뜨릴 정도로 많은 피가 쏟아졌다. <br/>&nbsp; 큰 담력으로 말씀을 전파했던 주님의 일꾼 메트로도루스(Metrodorus)와 수차례에 걸쳐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탁월하게 변호했던 파이오니우스(Pionius) 역시 불살라졌으며, 카포(Carpus)와 파필로(Papilus)라는 두 훌륭한 그리스도인과 독실한 믿음의 아가도니카(Agathonica)라는 여인도 아시아의 퍼가모폴리스(Pergamopolis)에서 순교했다.&nbsp; <br/>&nbsp; 로마 명가의 귀부인 펠리시타티스(Felicitatis)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슬하에 일곱 아들을 두었다. 그 중 장남 재누아리우스(Januarius)는 채찍에 맞은 후 육중한 추들에 눌려 압사했고, 밑의 두 동생 펠릭스(Felix)와 필립(Philip)은 곤봉에 맞아 뇌가 터져 나왔으며, 넷째 실바누스(Silvanus)는 절벽에서 떠밀려 추락사했다. 철없는 알렉산더(Alexander)와 비탈리스(Vitalis)와 마셜(Martial)은 참수당했고, 어머니도 그 어린 것들의 피가 묻은 칼에 목이 베어졌다.<br/>&nbsp; 진리를 끔찍이도 애찬하던 박식한 학자 저스틴(Justin)은 원래 철학에 심취한 철학자였지만, A.D. 133년경 서른 살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이후 처음으로 진리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가혹하게 대하자 그들을 위한 첫 번째 변호서를 작성하게 되고, 거기에 배인 뛰어난 학식과 천재성에 손을 들어 버린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리한 칙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기성사실을 멸시하고 세상을 비꼬며 비뚤어진 눈으로 보는 퀴닉학파의 크레센스(Crescens)와 잦은 논쟁을 벌이던 중 그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는데, 이에 저스틴을 죽이기로 작정한 크레센스는 저스틴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두 번째 변호서를 작성했을 때 황제를 부추겨 그를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했고, 결국 저스틴과 그의 여섯 동료는 그 글로 인해 체포되고 말았다.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거절한 그들에게 채찍형과 함께 참수형이 선고되었으며, 그들은 혀를 내두르게 하는 온갖 가혹한 형벌로 죽음을 맞이했다. <br/>&nbsp; 이 시기에 몇 사람이 주피터(Jupiter) 형상에 제물 바치기를 거절한 이유로 참수형을 당했는데, 거기에 스폴리토(Spolito) 시의 집사 콘코두스(Concordus)가 포함되었다. 그는 집사의 직분을 잘 섬긴 사람답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안에서 큰 담력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딤전 3:13).&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6 May 2016 16:23:1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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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교황권 밑에서 자행된 이탈리아의 박해들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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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제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자행된 박해에 관한 기사를 다룰 것이다. 이탈리아는 로마카톨릭의 중심지요, 로마 교황의 근거지이며,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어 수천의 지성을 현혹시키고 미신과 편협의 구름으로 인간의 명철을 어둡게 한 다양한 오류들의 산실이다. 이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박해는 첫째, 교황의 즉결권에 의해, 둘째, 종교 재판소의 권력을 통해, 셋째, 성직자 무리의 특이한 명령에 선동되어, 넷째, 이탈리아 통치자들의 편협에 의해 저질러졌다. 교황권 밑에서 자행된 첫 박해들은 아드리안(Adrian)이라는 한 영국인이 교황의 자리에 앉아 있던 12세기에 시작되었다.<br/><br/>&nbsp; 학문에 조예가 깊은, 브레스키아(Brescia)의 뛰어난 웅변가 아놀드(Arnold)는 로마에 와서 교회 안으로 기어들어온 부패와 그릇된 혁신에 반대하여 순수하고 경건한 영으로 시원스럽고 담대하게 설교했다. 그러자 의원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교리를 높이 사게 되었다. 이에 화가 치밀어오른 교황 아드리안은 아놀드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로마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처음엔 의원들과 주요 인사들이 그를 편들고 나서며 교황의 권위에 맞섰지만, 이 때문에 아드리안이 로마 시에 성무 금지령을 내리는 바람에 온 성직자들이 의원들과 시민들을 설득해 결국 아놀드는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독일로 국외 추방형을 언도받은 아놀드는 독일로 가서도 교황에 반대하여 설교하고 로마카톨릭의 온갖 오류들을 폭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br/>&nbsp; 아드리안은 그를 피흘려 죽이기를 갈망하며 대여섯 번 수중에 넣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황제의 위엄을 지닐 때가 된 프레데릭 바바로사(Frederic Barbarossa)가 교황에게 교황의 손으로 그의 머리에 직접 왕관을 씌워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다. 아드리안은 그의 요구에 선뜻 응해 주면서 한 가지 요청을 했으니, 아놀드를 황제의 힘으로 자신의 수중에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 불행한 설교자를 아주 흔쾌히 넘겨 주었다. 아드리안에게 넘겨진 아놀드는 아퓰리아(Apulia)에서 교수형을 당했고, 몸은 불태워져 재가 되었다. 이와 동일한 운명은 그의 오랜 친구들과 동료들에게도 찾아왔다.<br/>&nbsp; 엔세나스(Encenas)라는 스페인 사람은 로마로 보내져 로마카톨릭 신앙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몇몇 개혁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몇 편의 논문을 읽고서 그는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친척 중 하나가 그를 밀고했고, 교황과 추기경단의 지시로 화형에 처해졌다. 엔세나스의 남동생 역시 스페인어 신약성경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체포됐지만, 처형당할 시간이 이르기 전에 탈옥할 방도를 알아내어 독일로 도주했다. <br/>&nbsp; 파니누스(Faninus)라는 학식 있는 성도는 교리에 관한 논쟁서들을 읽고서 개혁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역시 밀고를 당해 감옥에 넣어졌다. 갇혀 있는 그를 찾아간 가족과 친지들의 애걸로 한때 마음이 흔들리면서 믿음을 철회하고 풀려나오긴 했지만, 풀려나자마자 무겁기 짝 없는 죄책감의 쇠사슬들이 옥죄어 오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개종자들을 만들려는 일념 하나로 숨김없이 그리고 정력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주님을 증거했고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그는 이 일로 또다시 수감되었지만, 이번에는 믿음을 철회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제안에 코웃음을 치면서 거절했다. 처형 당일 그의 모습은 눈에 띄게 즐거워 보였고, 목 졸려 죽임 당한 그의 몸은 불태워져 재가 되고 바람결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br/>&nbsp; 도미니쿠스(Dominicus)라는 교양 있는 군인은 몇 권의 교리적 논쟁서들을 읽고서 열렬한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퇴역하여 플라센시아(Placentia)에 갔을 때에는 적지 않은 회중을 모아 놓고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복음을 설교했다. 어느 날 그는 설교를 마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성도 여러분이 내일도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다면, 여러분에게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혀 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든 것까진 좋았으나, 도미니쿠스가 막 설교를 시작하려 할 때 시 행정관이 설교단에 올라와 그를 체포하여 감금시켜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체포에 기꺼이 순응한 그는 행정관과 함께 걸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마귀가 그토록 오랫동안 날 그냥 내버려 두었다니 거 참 기이한 일일세.” 끌려와 조사를 받을 때 “자신의 교리들을 철회할 텐가?”라는 질문을 받자, 그는 “내 교리라고? 난 내 교리 같은 것은 없다. 내가 설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리들이며, 그것들을 위해서라면 내 피라도 다 빼 줄 것이고, 나의 구주를 위해 고난 받는 나 자신을 행복하게 여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믿음을 철회하고 로마 교회의 오류들을 껴안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이 동원됐지만, 제아무리 달래보고 위협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사형을 언도받아 시장 바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br/>&nbsp; 갈레아시우스(Galeacius)라는 성 안젤로(St. Angelo) 성 근방에 거주하던 프로테스탄트 신사는 그의 믿음 때문에 체포되었다. 그의 친구들이 무진 애를 쓴 끝에 자신의 믿음을 철회하고 로마 교회가 전염시키는 미신적인 교리들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믿음을 철회했던 사실을 공개적으로 부인해 버렸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화형을 언도받았고 화형대에 사슬로 묶이게 되었다. 그들은 장작에 불을 붙이기 전 몇 시간 동안 그를 그 상태로 방치해 두었는데, 이는 그가 그를 둘러싼 아내와 친지들과 친구들의 설득에 못 이겨 자신의 주장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갈레아시우스는 굳은 지조를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태우려고 준비된 장작에 제발 불을 붙여 달라며 형 집행인에게 간청하기까지 했다. 집행인은 마침내 그 일을 시행했다. 불길은 갈레아시우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듯 놀랍도록 빠르게 타올라 몇 분 만에 그의 감각을 앗아가 버렸고, 그는 타오르는 불길에 곧바로 소진되어 버렸다. <br/>&nbsp; 이 신사가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그렇게 순교하면서도 믿음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참된 신앙에 대한 확실한 간증을 남겼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0 May 2016 23:23: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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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피를 부른 종교 재판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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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은 믿음의 용사 윌리엄 가디너(William Gardiner)<br/>&nbsp; 윌리엄 가디너는 영국 브리스톨 태생으로, 상인 패기트(Paget) 밑에서 장사를 배운 청년이었다. 그의 주인은 그가 스물여섯 살이 되자 거래중매인으로 일하라고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으로 보냈다. 가디너는 그곳에서 열성파 프로테스탄트들과 사적인 교제를 나눴고, 로마카톨릭교도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br/>&nbsp; 그러던 중 포르투갈 왕자와 스페인 공주의 혼인 서약이 있는 날이 되었다. 식이 거행되는 성당은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가디너 역시 성당에 발을 들여놓은 적은 없어도 호기심에 식을 엿보았다.<br/>&nbsp; 결혼식을 처음부터 찬찬히 지켜보던 가디너는 눈 앞에 벌어지는 미신적인 행위들로 충격에 휩싸였다. 그날 본 그릇된 경배의 잔상들이 그의 가슴을 후려치듯이 오갔다. 손만 뻗으면 참된 복음을 쉽사리 접할 수 있는 이때에 나라 전체가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고서 비참한 맘을 금할 길이 없었다. <br/>&nbsp; 가디너는 도중에 죽는 한이 있어도 포르투갈에 신앙 개혁을 일으키리라는 야심에 찬 포부를 품었다. 그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세상일을 정리하고 빚을 갚았다. 또 장부를 정리하고 물품을 다른 사업자에게로 넘겼다. 그리고 다음 일요일, 신약성경을 들고 다시 그 성당에 찾아가 제단 가까이에 자리잡고 앉았다.<br/>&nbsp; 왕과 왕비가 모습을 나타내었고,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하기 시작했다. 전체 의식 중 바로 이 부분에서 회중은 제병(祭屛, 성찬용 빵)을 숭배하는데, 가디너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추기경에게로 펄쩍 뛰어올라 성체를 낚아채 발로 뭉개 버렸다.<br/>&nbsp; 깜짝 놀란 회중 틈에서 누군가가 단검을 빼들고 나와 가디너의 어깨를 찔렀다. 국왕이 그만두라고 외치지 않았더라면 한 번 더 휘둘러 그를 아예 끝장내 버렸을 것이다.<br/>&nbsp; 가디너는 왕 앞으로 끌려갔다. 왕은 그의 출신지를 물었다.<br/>&nbsp; “저는 본시 영국 태생이며 프로테스탄트이고 생계로 물건을 팔고 있습니다. 제가 한 일은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결코 폐하의 옥체를 경멸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곳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미신들과 우상 숭배를 보고서 의분을 참지 못했던 것입니다.”<br/>&nbsp; 그가 돌발적인 행위를 한 건 필시 다른 누군가에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란 생각에 왕은 그를 선동한 장본인을 캐물었다. 이에 가디너는 대답했다.<br/>&nbsp; “제 양심 외에는 그 누구도 아닙니다. 저는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을 위해서도 제가 한 것 같은 위험천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일과 다른 모든 섬김들은 다 하나님을 향한 저의 의무일 뿐입니다.” <br/>&nbsp; 가디너는 감옥에 보내졌다. 그리고 리스본의 모든 영국인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도주한 몇을 제외하고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그 문제에 관해 사소한 것이라도 알고 있는지 고백을 받아내기 위해 종교 재판소에서 고문을 당했다. 가디너와 같은 집에 거주하던 사람은 사건의 실마리를 풀 무언가를 실토케 하려고 야만스럽기 짝 없게 다뤄졌다.<br/>&nbsp; 가디너 자신은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문을 당했다. 매번 고문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행위를 자랑스러워했다. <br/>&nbsp; 그리고 사형이 선고되었고 교수대 가까이에 큰 불이 붙여졌다. 그는 도르레로 끌어올려져 교수대 쪽으로 당겨진 후 불 가까이, 그러나 그것과 닿지 않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서 밑으로 내려졌다. 그는 불태워져 죽었지만, 차라리 조금씩 구워져 죽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을 이를 악물고서 견뎌 내었고, 자신의 혼을 기쁨으로 주님께 의탁했다.<br/>&nbsp; 가디너를 불살랐던 불길에서 나온 불티들이 항구 쪽으로 날아가 왕의 전함 한 척을 불태우고, 또 여타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그의 순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셨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br/>&nbsp; 이번 사건으로 체포된 영국인들은 가디너가 죽자 곧바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집에 거주한 사람은 자유를 얻기까지 2년 더 감옥에 갇혀 있었다.<br/><br/>종교 재판에 대한 요약<br/>&nbsp; 전 세계적으로 종교 재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에 관해 믿을 만한 기록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현 실정이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이 권력을 쥔 곳은 그 어디나 그 법정도 함께 서 있었다. 지하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거기에 감금되어 마음이 무너져 내린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완전히 무력해져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게 돼 버리든지 희생자들의 죽음을 보고서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가 버린, 자신들의 생명이 생명 같지 않았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지만, 그것은 ??포로로 삼는 자는 그도 포로가 될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그도 칼에 죽게 될 것이라.??(계 13:10)고 분명히 말씀하신 하나님 앞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br/>&nbsp; 교황 체계의 자손뻘인 종교 재판소, 그것의 부모뻘 되는 로마카톨릭의 힘을 느끼려면, 우리는 그 시대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13세기에는 죽음을 방불케 하는 교황 체계의 통치가 극에 달했다. 그것은 모든 왕국들로부터 독립해 있었고, 전후 어떤 인간 왕권도 결코 휘두른 적이 없던 영향력으로 통치했음은 물론, 그것이 인간의 몸과 혼에 대해 주권을 행사할 수 있음이 인정되었고, 지상에서 의도된 모든 일에 있어 그것의 권력은 선이든 악이든 가히 측량을 불허했다. 로마카톨릭은 문학, 평화, 자유 그리고 자칭 ‘기독교’를 유럽 끝까지 전파했을진 모르나 그것의 본질은 적대적이었으니, 그것의 승리의 잔이 가득 차오를수록 그 악랄함 또한 그만큼 더 넘쳐나는 게 드러날 뿐이었다. <br/>&nbsp; 로마, 그것은 인간의 이성에 수치를, 인간의 미덕에는 공포와 고통을 안겨 주려는 듯, 그것의 웅대함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에 그 괴상망측하고 무시무시한 종교 재판소들로 득실거렸던 것이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Mon, 16 May 2016 22:00:4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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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침례교회"의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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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침례교회 창립 17주년에 즈음하여<br/><br/>1. 교회 창립, 1992년 4월 12일<br/>&nbsp; 성경침례교회는 1990년 초부터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의 전신인 &lt;새성경&gt;(신약)을 보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찾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시에 영어 &lt;킹제임스성경&gt;을 한글로 번역중이던 이송오 목사님의 마포구 합정동 소재 자택으로 연락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성경공부 모임이 형성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br/>&nbsp; 1992년 2월부터 이송오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가르쳤던 형제들과 함께 마포구 서교동에 다른 사람이 전세낸 20여 평의 지하 사무실을 빌려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br/>&nbsp; 1992년 4월 12일에는 25명의 창립회원의 발의로 신약성경에 근거한 성경침례교회가 탄생되었고, 창립회원 전원일치의 찬성으로 이송오 목사님을 성경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추대하였습니다.<br/>&nbsp; 특히 성경침례교회는 어떤 선교사나 지역 교회의 지원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가 아니라 바른 성경을 찾아서 모인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송오 목사님을 중심으로 “바른 성경에 근거해서 창립한 이 나라 최초의 자생적인 신약 지역 교회”입니다.<br/><br/>2. 교회 장소의 이전과 확장 <br/>&nbsp; 성경침례교회는 창립한 지 2개월 만에 마포구 합정동 소재 태영빌딩 2층(25평)으로 이전하였고, 다시 1993년 2월 15일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하심으로 합정동 섬유노조 빌딩 2층(50평)으로 이전하였으며, 같은 장소에서 세 번 확장하면서 4년 6개월간 사역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현판도 걸 수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 있었는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분의 섭리적 역사로 1997년 8월 31일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금강프라자 7층(404평)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br/>&nbsp; 또한 본 교회의 사역에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필요한 사역을 더 맡겨 주심으로써 본 건물 6층의 104평을 추가로 매입하여 사역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며, 2007년 3월 27일에는 본 건물 8층(404평)을 교회 장소로 주셔서 5월 6일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br/>&nbsp;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경침례교회가 이 땅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선교본부로서의 역할을 하고,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펼칠 수 있는 장소를 계속해서 넓혀 주셨습니다.<br/><br/>3. 교회 사역과 열매<br/>&nbsp; 성경침례교회를 통해 이 땅에 성경적인 신약 지역 교회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송오 목사님과 신실한 성도들을 들어쓰셔서 지금까지 많은 열매들을 맺게 해주셨습니다. <br/><br/>&nbsp; 1) 복음 전파와 지역 교회 설립<br/>&nbsp; “성경침례교회”는 현재 약 370명이 매주 예배에 참여하고 있으며, 18개의 거리설교 팀들이 있어 서울 시내와 근교에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마다 거리설교와 구령을 통해 매월 약 1,500명을 구령하고 있습니다. <br/>&nbsp; 성경침례교회는 부산성경침례교회를 비롯하여 대구, 광주, 전주, 천안, 철원, 청주, 인천, 원주, 포항, 군산, 목포, 경주, 동해 등에 성경적인 신약 교회들을 설립하여 전국에 15개 지역 교회를 세웠습니다. <br/>&nbsp; 해외에는 미국 L.A.에 1997년 12월 14일에 국제성경침례교회를 창립하여 미주 사역에서도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헤이워드와, 캐나다 토론토와 호주 시드니에도 지역 교회를 세워 해외에서도 4개 교회를 통해 활동적인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br/><br/>&nbsp; 2) &lt;한글킹제임스성경&gt; 보급과 문서 및 인터넷 사역<br/>&nbsp; 성경침례교회 부설기관인 “말씀보존학회”는 1990년 3월 20일에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의 모체인 &lt;새성경&gt;(신약)을 번역&#8228;출간했고, 1994년 4월 12일에는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시고 섭리로 보존하신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가장 정확하고 권위있는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완역&#8228;출간하여 바른 신학과 교리, 바른 신앙의 기초를 놓았으며, 지금까지 31판의 성경을 출간하여 약 19만여 권을 보급하였습니다. <br/>&nbsp; 한편 2002년 7월에는 바른 성경에 근거하여 찬송가 가사들을 바로잡고 영적인 찬송가들을 선별&#8228;편집하여 예배 찬송가 &lt;영광을 주께&gt;를 출간함으로써 바른 성경에 이어 이 땅에 성경적인 찬송가를 출간&#8228;보급함으로써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들이 온전히 영과 진리로 경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br/>&nbsp; 또한 지난 17년 동안 진리의 지식으로 풍성한 200여 권의 서적들을 출간하여 보급해 왔으며, 1992년 4월부터 신학과 교리의 교통정리자인 월간 &lt;성경대로믿는사람들&gt;을 한 번도 중단하지 않고 205호까지 17년 1개월째 출간하여 이 땅에 바른 성경과 진리를 전파하는 사역을 신실하게 수행해 오고 있습니다.<br/>&nbsp; 지난 2005년 11월에는 크리스천 대학생을 위한 인터넷 뉴스 “바이블파워”를 창간하여 순수한 복음을 전파하고 한국 교계의 문제들을 바로잡는 기사들을 통해 청년과 교회를 변화시키는 힘있는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br/><br/>&nbsp; 3) 교육 사역 - 킹제임스성경신학대학, 서울크리스찬중고등학교 <br/>&nbsp; 성경침례교회 부설기관인 “킹제임스성경신학대학”의 전신인 “펜사콜라성경신학원”은 1991년 9월 9일에 마포구 창천동 소재 휴암빌딩에 있는 7평의 사무실에서 9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 17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지역 교회를 이끌 능력있는 일꾼들을 양성해 왔고, 1994년 봄부터는 통신과정이 개설되어 지금까지 119명의 수료자를 배출하였습니다. 현재 본 교회의 모든 사역과 이 땅에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킹제임스성경신학대학 졸업생들이 쓰임받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4월부터는 인터넷으로 정규 신학 과정이 개설되었고, 2005년 9월부터는 “킹제임스성경신학대학”으로 통합되어 현재 on-off line에서 98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며 능력있는 일꾼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br/>&nbsp; 성경침례교회는 이 땅의 공교육 실패와 사교육의 문제점을 직시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바른 신앙의 기초 위에 교육하고자 2003년 3월에 하나님의 섭리적인 역사로 “서울크리스찬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현재 23명의 교사가 36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함양하고, 진화론을 배제한 창조론으로 성경적 세계관을 형성하고, 신앙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성경적인 교회학교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으며, 교회 장소의 확장과 함께 학교의 규모를 더욱 아름답게 갖출 수 있게 되어 보다 더 성장하고 있습니다. <br/><br/>&nbsp; 4) 해외 선교 사역<br/>&nbsp; 이외에도 성경침례교회는 베트남, 잠비아, 인도, 영국, 파푸아뉴기니, 말라위, 페루, 이스라엘, 캐나다 알베르타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매월 지원하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이송오 목사님의 주일설교를 방송하여 사역의 지경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 &lt;킹제임스성경&gt;과 바른 영어 교리서적들을 에디오피아, 우간다, 케냐, 나이지리아, 가나, 탄자니아, 미얀마, 인도,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등지에 보급하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약 8천만 명이 사용하는 텔루그어 전도지를, 티베트에는 티베트어 전도지를 각각 발송하여 현지 사역자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선교 사역을 통해 각 선교지에서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br/><br/>4. 교회 사역의 목표<br/>&nbsp; 성경침례교회는 창립 17주년을 맞이한 현재, 전국 각 지역과 해외에서 매일같이 성경을 비롯한 진리의 서적들을 찾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본 교회는 복음 전파를 통해 이 민족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일과 전국 각 지역에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들을 지속적으로 세우는 일, 또한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이 이 민족의 최종권위로 정착되도록 바른 성경을 보급하는 일과 진리의 지식을 확산시키고 바른 하나님의 일꾼들을 양성하는 일, 그리고 국내외 선교를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신실하게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br/><br/>&nbsp; 끝으로 이송오 목사님과 성경침례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배교한 이 땅에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우리 주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2 Feb 2016 21:04:1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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