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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한국 교계 비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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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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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그리스도인 자신을 측정하는 잣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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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사도 바울은 신약교회사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겨진다. 바울은 제1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 안티옥에 돌아와 있었는데, 그때 함께 선교 여행을 다녀온 바나바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파한 각 성읍의 우리 형제들에게 다시 가서 방문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행 15:36). 말하자면 이것은 자신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세워진 교회와 형제들에게 다시 가서 그들을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시작은 잘했지만 사도들이 떠나온 이후에도 잘하고 있는지, 혹시 가시밭에 떨어진 씨처럼 잘 자라지 못하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었으니, 이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한 제안인가?<br/><br/>마지막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위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았다 해도, 육신은 언제든지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는 약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와 관련하여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라고 하셨다. 재림이 가까운 지금은 제대로 된 믿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때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을 살피고 측정하는 잣대를 항상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br/><br/>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잣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 두려움이 처음 등장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였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창 3:10)라는 말씀처럼, 죄를 지은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두려움에 숨었다. 이때부터 죄인 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셨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두려움은 단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이는 두려움이 있는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순종했다. 그러나 이삭을 제단에 묶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만류하시며 『나는 이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두려움을 인정해 주셨다. <br/><br/>이러한 두려움은 구원의 문을 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 백부장 코넬료에 대해 성경은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행 10:2)라고 기록한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했던 코넬료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보내어 그와 그의 온 가족과 친구들을 구원해 주셨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보류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br/><br/>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 된다. 성경은 『죄악은 자비와 진리로 정결케 되나니, 사람들이 주를 두려워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라고 말씀한다. 아이가 나쁜 짓을 하려다가도 아버지의 엄한 매와 질책을 떠올리며 멈추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죄를 지었을 때 가해질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할 때 악에서 돌이킬 수 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빌 2:12)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는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워 이김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잣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롬 5:8). 이러한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것도 “첫째”로 사랑하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니라.』(막 12:30)라고 말씀하셨다. 이 첫째 자리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는 성도야말로 온전한 믿음을 이룬 그리스도인이다.<br/><br/>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이 순서를 뒤바꾸어 가르치고 실행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 없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뿐, 첫째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위선에 빠져 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타협하고 세상과 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이다. 성경은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 4:4)라고 경고한다. 하나님보다 세상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려는 것은 영적 간음과 다름없다.<br/><br/>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이 진정 하나님만을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증거하며,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사랑을 삶으로 증명해 낼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잣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전 11:26)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마귀를 따르던 진노의 자녀이자 소망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한때 멀리 있었던 너희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중간의 벽을 자신의 죽음으로 허물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그 구속의 은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죽으심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br/><br/>주님께서 그와 같이 피로 사신 교회에게 주신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뿐이며, 모두 주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성경적 의식이다. 먼저 “침례”는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과 함께 죽고, 묻혔으며, 함께 부활했음을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신앙 고백이다(벧전 3:21). 이는 구원의 조건이 아닌 모형일 뿐이기에, “세례”라는 죄를 씻는 의식으로 변개해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이다. 또한 복음을 통해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한 성도들이 참여하는 의식은 “주의 만찬”이다. 이 만찬식의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죽으심, 곧 주님의 찢겨진 살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일 뿐인데, 로마카톨릭은 그 빵과 포도주(발효된 술)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로 왜곡했다. 이와 같은 이교도 종교 집단으로부터 성별하겠다고 일으켰던 종교 개혁이 무색하게, 개신 교회들은 로마카톨릭의 사악한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루터는 물질이 변하지는 않지만 빵과 포도주 “안에, 위에, 아래에” 그리스도의 몸이 물리적으로 함께 존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했고, 칼빈은 물리적 결합은 없으나 성찬식 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임하신다는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가르쳤다. 이처럼 개신 교회들도 빵과 포도주에 거룩한 신비주의를 부여하며 주의 만찬식의 성경적인 본질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인간의 편의대로 “누룩”(죄와 거짓 교리의 상징)을 넣은 카스텔라 빵과 발효된 포도주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주님의 죽으심을 바르게 기억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죽으심을 올바로 선포하고 기념해야 한다.<br/><br/>사도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돌아보고자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성도들이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지금은 참된 믿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잣대로 자신을 엄격히 돌아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죄를 멀리하고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순결하게 기다리는 성숙한 성도로 서 있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7:05: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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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퀴어 축복 목사 파면” 무효 판결한 세상 법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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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이하 남부연회)가 남재영 목사에게 퀴어축제에 참석해 동성애 찬동·동조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출교 징계를 내린 것에 대해, 법원이 “무효” 결정을 내렸다. 대전지법 민사12부는 5월 28일 남재영 목사가 남부연회를 상대로 제기한 “연회재판위원회 판결 무효 확인”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인용한다고 판결했다.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라 결정된 사항에 대해 세상 법정이 판결 무효를 결정한 것이다.<br/><br/>남재영 목사는 2024년 6월 1일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꽃잎을 뿌리고 기도문을 낭독하는 “동성애자 축복식”을 진행했고, 6월 10일에는 출교된 목사 옹호 성명서에 참여했으며, 또다시 7월 6일 제1회 대전퀴어문화축제에서 부스를 설치하고 “동성애자 축복식”을 행함으로써 친동성애 행보를 보였다. 이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장정 재판법 3조 8항(마약법 위반, 도박 및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에 해당한다.<br/><br/>이에 2024년 7월 16일 남부연회 동성애대책위원회는 남부연회 재판위원회에 남 목사를 고발했다. 남부연회 재판위원회가 12월 5일 남 목사에게 교리와장정에 따라 “출교”를 선고하자, 그는 법원에 “징계무효소송 및 효력정지 가처분”을 제기했었다. 법원은 2025년 1월 “효력 정지 가처분”을 인용해 남 목사가 담임목사직에 복귀할 수 있게 했고, 그는 최근 은퇴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세상 법정이 소위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라 결정된 사항에 대해 “효력 정지 가처분”도 시행하고, 급기야 “판결 무효”까지 결정해 버린 것이다. <br/>기독교대한감리회의 “퀴어축제 축복식” 관련 “출교” 결정은 남재영 목사 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지난 2023년에도 친동성애 행보를 보인 이동환 목사라는 이가 출교된 바 있다. <br/><br/>이동환 목사는 지난 2019년 8월 31일 “퀴어축제 축복식”을 인도한 혐의로 2020년 6월 (남재영 목사와 동일하게)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장정 재판법 3조 8항”에 의거해 기소되었으며, 이로써 2020년 10월에 2년 “정직”을 선고받았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정직 기간 중에도 퀴어축제에 수차례 참가하고 성소수자 단체인 “큐앤에이”(Q&A)를 설립하는 등 지속적으로 친동성애 행보를 보였으며, 그러던 중에 2023년 3월 교단 목회자들과 장로들로부터 추가로 고발당하여 결국 “출교”되었던 것이다.<br/><br/>“퀴어축제 축복식” 관련 “출교” 결정은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라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세상 법정이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른 판결을 “무효”로 결정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왜냐하면 그러한 결정에 따라 이제는 “모든 교회들”에서 “동성애”에 동조하는 개인이나 모임을 징계, 파면, 출교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동성애” 관련 활동을 하는 개인이나 모임을 제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교회법”이 무기력하게 되어, 그나마 “동성애”로부터 보호되던 최소한의 신앙 영역마저 잠식당할 위기에 처했다. 목사나 주일학교 교사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에 반하여 “동성애”에 찬성하며 교육하더라도 그를 파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br/><br/>동성애 관련 문제는 파면 목사 복귀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 준정부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이사장 홍원화)이란 곳이 학술지 평가 영역에 “젠더 혁신 정책”에서 추진하는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라고 요구함으로써 기독교계를 비롯한 학문 연구 기관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학술 및 연구개발 활동과 관련 인력의 양성 및 활용을 보다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수행함으로써, 국가의 학술 및 과학기술 진흥과 연구 역량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으로서, 총예산 9조 9,479억 원을 사용하는 기관이다. 그러한 연구재단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젠더 혁신(Gendered Innovations)은 기초·응용 연구개발의 모든 단계에서 성·젠더 특성 분석을 반영하여 연구개발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식 창출과 기술 및 디자인 등 과학기술 전반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라고 규정하고, 「연구 결과가 특정 성이나 젠더 그룹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조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보 전달 과정에서 차별이나 편견을 조장하지 않도록 주의했는지 확인한다.」라는 세부 지침이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젠더 혁신”을 권장하고, 정상적인 성 개념에 기초한 연구는 배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연구 학술지에 대한 “연구 관리 체크리스트”에서 해당 항목에 0점을 받으면 총점과 관계없이 탈락할 수 있고, 평가 위원 1명이라도 학술지 운영에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서 항목에 0점을 주는 경우에도 평가 탈락 조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평가를 받은 학술지는 학술지 실태점검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어 학술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진평연(진정한 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 연합)과 동반연(동성애·동성혼 반대 국민 연합) 등 5백여 시민단체들은 6월 1일 “학술지 평가를 통한 젠더이념 강제 시도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고, 한국교회언론회(대표 임다윗 목사)도 6월 2일 한국연구재단의 “젠더 가이드라인 반영 지침”에 대해 “학문 영역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들려는가?”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퀴어 문화”를 조장하려는 사탄의 세력이 “정부,” “법조계”는 물론, “학계”에도 손을 뻗쳐 세상을 “동성애자들”의 소굴이었던 “소돔”처럼 만들려고 하고 있다. 학계가 “친동성애” 연구 논문을 쏟아내고, 그 논문들을 토대로 “친동성애 교육 과정”이 수립될 날도 멀지 않은 것이다.<br/><br/>동성애와 관련하여 기독교계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 장로교는 이미 2011년에 “성소수자 목사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으며, 2015년에는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교단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직자 일부일처제 의무화” 개정안이 반대에 부딪혔다. <br/><br/>미국 장로교 뉴멕시코주 시에라블랑카 노회는 6월 말 열릴 예정인 총회에 “성직자 일부일처제 의무화” 개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총회에 제출된 “조언 및 권고” 문서에 따르면, 이 안은 장로교 교단 산하 “여성 및 성평등 옹호위원회,” “성소수자 평등 옹호위원회,” “사회증언정책자문위원회” 등 세 위원회로부터 반대 의견을 받았다. 이들 기관들은 “교회의 소명을 넘어 사생활과 관계 구조를 규제하려는 시도이다,” “복합적이거나 소외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수치심과 침묵, 정신적 강압을 강화할 수 있다.” 등의 반대 이유를 밝히며 “조언 및 권고” 문서를 제출한 것이다.<br/>미국 장로교 산하 기관의 명칭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 기독교계는 이미 “친동성애” 세력에 의해 잠식당해 “동성애자 목사”나 “동성결혼”이 허용되어 있을 정도이고, 이번 개정안 반대 사태처럼 교단이나 교회 내에서 “반동성애” 행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br/><br/>성경은 구약에서 『어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그들은 가증한 짓을 행한 것이니 그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며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으리라.』(레 20:13)라고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도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욕정에 내버려 두셨으니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까지도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본성을 거역하는 것으로 바꾸었음이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여자들을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벗어나 서로 음욕이 불일 듯하니 남자들이 남자들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자기 자신들에게 받았느니라... 그들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 마땅히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이 같은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좋게 여기느니라.』(롬 1:26,27,32)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동성애”가 “죽음에 처해져야 할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신다. <br/><br/>정부와 학계가 이미 “법”과 “규정”으로 강력한 친동성애 정책을 시행하고 있고, 법조계마저 “교회법”을 무시하고 “반동성애” 규정을 무효로 결정함으로써, 최소한의 안전지대였던 기독교계와 교회들마저 “법”으로는 동성애자들의 활동을 저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여, “성경적 진리” 안에 굳게 서고, “친동성애 세력”을 포함한 “비성경적 세력”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엡 6:18).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55: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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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다니엘서에 예언된 “철과 진흙의 왕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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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구약의 다니엘서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예언의 시간표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남으로써 시작된 “이방인들의 때”가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들의 때”를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기간으로 규정하셨으며(눅 21:24), 그 기간 동안에 등장할 바빌론, 메데-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적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어지는 이방 제국들의 역사가 특히 다니엘 2장의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형상”을 통해 계시되었다. 즉 형상의 “금 머리”(바빌론), “은 가슴과 양팔”(메데-페르시아), “놋 배와 넓적다리”(그리스), “철로 된 두 다리”(로마), “철과 진흙이 섞인 발과 발가락”(적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방인들의 때”에 등장할 이방 제국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형상의 맨 하단에 위치한 “발과 발가락”은 “철과 진흙”이라는 그 특이한 “이질적이고 위태로운 결합”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떤 모습으로 형성될 것인가를 예측하게 한다. 오늘날 초고도로 발달되어 가는 휴머노이드의 기술력을 통해 “이방인들의 때”의 끝부분에 이르면 이방 세계의 인공적 문명이 최절정에 이를 것이고, 그 기이한 세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종말을 고하고 비로소 그 길고 긴 “이방인들의 때”가 마감된다. 이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영원하고 완전한 메시아 왕국이 수립되는 것이다.<br/><br/>다니엘 2장에서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거대한 형상은 머리에서 발로 갈수록 금속의 가치와 밀도(비중)가 하락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 왕국들의 통치 권력과 도덕적 가치, 그리고 정치적 안정성이 끊임없이 하락할 것을 상징한다.<br/><br/>1. “금”의 왕국 : 바빌론(B.C. 606 ~ B.C. 536)<br/>바빌론은 약 70년 동안 세계 권력으로 군림했다. 제국의 왕권 계보는 느부캇넷살, 에윌므로닥, 네리그릿살, 라보로소알코드, 나보니두스, 그리고 마지막 왕 벨사살로 이어진다. 느부캇넷살은 왕의 명령 하나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바빌론의 위세는 고대 유적인 “공중 정원”(Hanging Garden)의 규모로도 증명된다. 이 거대한 정원은 두께 27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높이가 무려 92m, 한 변의 길이가 24km에 달하는 성벽 기초가 발견되었다. 잔해로 남은 18-21m 높이의 기둥 250개는 기둥 사이 간격만 24m에 이르며, 이 정원에 오르기 위해서는 폭 3m, 높이 23m의 계단을 지나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막강한 권세와 영광을 “유다를 70년간 징계하기 위한 일시적 도구”로 주셨기에, 그 포로 기간이 끝나자 바빌론은 즉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br/><br/>2. “은”의 왕국<br/>: 메데-페르시아(B.C. 536 ~ B.C. 330)<br/>바빌론에 이어 나타난 메데-페르시아는 군대 장군들이 권력을 쥐고 세운 군사 독재 체제이자 세습 귀족 기반의 제국이었다. 형상의 두 팔이 상징하듯이 메디아와 페르시아 두 민족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왕의 독재 권력은 바빌론에 비해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br/>성경 속 페르시아의 계보는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갇혔을 때의 다리오왕과 제1차 포로 귀환 및 성전 재건 칙령을 내린 코레스왕으로 시작된다. 이후 아하수에로와 아탁세르세스 시대의 집요한 방해 공작으로 성전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으나, 다리오 왕 때 선지자 학개와 스카랴의 권고 속에서 성전이 완공되었다. 이후 에스더서의 배경이 되는 아하수에로왕을 거쳐, 아탁세르세스왕 때 에스라(2차 귀환, 율법 전수)와 느헤미야(3차 귀환, 성벽 재건)의 역사로 이어진다. 이 제국의 유일한 가치는 “유대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내시는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점이다.<br/><br/>3. “놋”의 왕국 : 그리스(B.C. 330 ~ B.C. 100)<br/>다니엘 8장에서 숫염소의 양 눈 사이에 있는 “큰 뿔”로 예언된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이다. 그리스는 군사적 군주 국가였으며, 알렉산더는 절대적 독재자라기보다는 군부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움직인 군대 장군 출신의 군주였다. 그는 고대 왕국의 군주로서 뛰어난 지혜와 금력을 지녔으나 절대적 독재권으로 세계를 영구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B.C.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오 3세를 격파하고 영토를 정복했으나, 33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그가 죽은 후 제국은 성경의 예언대로 카산드로스, 리시마쿠스, 셀레우쿠스, 프톨레미라는 네 장군의 왕국(단 8:8)으로 분열되었다. 이 제국이 남긴 가장 결정적인 역사적 의의는 전 세계에 “코이네 헬라어”를 보급하여, 장차 기록될 신약성경의 언어적 기반을 완벽하게 마련했다는 점이다.<br/><br/>4. “철”의 왕국 : 로마(B.C. 100 ~ A.D. 200 전성기)<br/>넷째 왕국인 로마는 모든 것을 부수고 산산조각 내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 “철”로 묘사되었다. 역사에서도 로마를 “철권통치 국가”(Iron Rule)라 부른다. 그러나 가치와 지배 권력 면에서는 공화정 군주 국가 체제를 취하여 역사의 퇴행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로마에는 왕권을 견제하는 원로원이 존재했기에 카이사(시저)조차 절대 독재권을 휘두르지 못했고, 원로원과 반목하다가 암살당하는 한계를 보였다. 신약 시대의 로마 황제 계보는 아우구스토(예수님 탄생 시 조세 등록), 티베리우스(십자가 처형 당시), 가이우스, 클라우디스(유대인 추방), 네로(그리스도인 박해)를 거쳐 A.D. 70년 예루살렘을 파괴한 로마 장군 티투스와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A.D. 91-96)의 도미티안 황제로 이어진다. 신상의 “두 다리”가 보여 주듯 로마는 나중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졌다. 로마의 대제국 인프라와 도로망은 “전 세계로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물리적 도구”로 쓰였다.<br/><br/>5. “철과 진흙”의 왕국 : 적그리스도 왕국과 열 왕의 연합(대환란 기간)<br/>형상과 관련된 예언의 마지막 단계는 철과 진흙으로 구성된 “발과 발가락”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니엘의 해석을 들어보도록 하자. 그의 해석에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의 세 가지 특성이 담겨 있다.<br/>1) 『그 일부는 토기장이의 진흙이며 일부는 철인 발과 발가락을 왕께서 보셨으니 그 왕국이 나뉘어질 것이며, 왕께서 철과 차진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으니 그 왕국에는 철의 강함이 있을 것이니이다』(단 2:41). 철과 진흙은 “혼합”은 될 수 있어도 “화합”하여 하나가 될 수 없는 물질들이다.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나누어진”(분열된) 채로 형성된 연합체로, 철의 강함을 지녔지만 매우 불안정한 상태를 띨 것이다.<br/>2) 『또한 그 발가락의 일부는 철이요 일부는 진흙이므로 그 왕국이 부분적으로 튼튼하고 부분적으로 부서질 것이니이다』(단 2:42). “열 발가락” 체제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숫자인 “열”(10)과 연결된다. 성경에서 “10”은 “이방인”의 숫자이다. 이방인의 조상 노아는 아담의 10대 후손이었고, 이방인 계보는 창세기 10장에 나오며, 이방인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기사는 누가복음 10장에, 이방인 복음 전파의 필요성은 로마서 10장에, 이방인에게 천국 문이 열린 것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온다. 형상의 “열 발가락”은 다니엘 7장의 “열 뿔”이자 요한계시록 13장과 17장에 등장하는 “열 왕”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대환란 때 “바다”(계 13:1, 지중해)에서 올라오는 한 “짐승”(적그리스도)과 결탁하여 “한 시간” 동안 권세를 누릴 마귀적인 연합 세력이다(계 17:12). 이 열 개의 연합 세력은, 일부는 철이요 일부는 진흙이므로, 부분적으로는 튼튼하지만 부분적으로 부서지는 경향이 있다. <br/><br/>3) 『왕께서 철과 차진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으니 그들은 사람들의 씨와 섞일 것이나 그들이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이 철이 진흙과 섞이지 못함과 같으리이다』(단 2:43). 지금까지는 “철과 진흙”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왕국의 “특징들”을 이야기했다면, 43절에서는 “그들”(철)과 “사람들의 씨”(차진 진흙)를 언급함으로써 특징 이상의 “존재들”이 그 왕국에서 “섞여” 살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그들”은 “사람들의 씨”와는 구별되는 “어떤 자들”인 것인데, 여기서 “그들”은 “사람들의 씨”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씨”는 “사람들의 씨”와 얼마든지 “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사람들의 씨”와 섞이면서도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의 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은 일차적으로 “외계에서 온 자들”을 뜻하는데, “외계에서 온 자들”은 “사람들의 씨”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과 완전하게 합할 수는 없지만, 과거 창세기 6장에서처럼 어떤 거인족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4). “하나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들)이라 불리는 “외계에서 온 자들”과 “사람들의 씨”의 결합을 엉겨 붙어서 하나가 되는 “합함”(cleaving)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섞이기는 하되 “사람 남자”와 “사람 여자”가 결합하듯 “한 몸”(창 2:24)을 이루는 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br/><br/>여기서 한 가지 더, 다니엘서의 예언은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철)와 사람(진흙)의 기묘한 동거”라는 “물질적 실체”로 확장된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마지막 왕국은 “타락한 천사들”의 지배뿐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초지능 기술 권력”[Superintelligent Techno-Power, 인간의 지능을 아득히 초월한 “초지능 시스템” 자체가 인류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 살리고 죽이며, 주고 빼앗는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군림하는 신종 패권 체제]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고, 이 “기술 권력”은 “짐승의 형상 숭배”와 “짐승의 표”를 통해 매매 행위를 완전히 통제할 것이다(계 13:14-18). 예언에 있어서 “철”은 “유전자”도 없고, “생명력”과 “영과 혼”도 없지만 압도적으로 단단하고 강력한 “휴머노이드”와 “AI 기술 문명”을 완벽하게 대변한다. 태생적으로 “휴머노이드”는 공장에서 제조되고 알고리즘으로 설계된 존재인 것인데, 그 마지막 왕국에서 “사람”(진흙)은 생존과 편리, 혹은 “영생”을 위해 이 “휴머노이드(철) 기술”과 사회적·신체적으로 “결합”하게 될 것이다(생체 공학, 트랜스휴머니즘 등). 이로써 “기계”가 인간의 지위를 대체하여 군림하고, 또 인간의 몸속에 “기계적 요소”가 침투하여 물리적으로 “섞이는” 현상이 일어나지만 서로 “합하지는” 못할 것이다(단 2:43). 결과적으로 적그리스도 왕국은 “초자연적인 외계 존재”(타락한 천사들)의 전면적인 개입과, 영과 혼을 지닌 인간을 모방하려는 “휴머노이드”(기술 권력)의 등장이 중첩되는 기괴한 종말적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인공적이고 이질적인 “철”의 존재들과 한 시대에 동거하며 지배받겠지만, 그 결합은 모래성처럼 위태로우며, 결국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돌”(단 2:3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심판 앞에 산산이 부서지고, 하늘의 하나님에 의해 “결코 멸망하지 않는 한 왕국”이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단 2:44).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9:4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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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적그리스도의 “AI 친화” 전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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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2022년 11월 “오픈AI”(OpenAI)사는 대대적인 홍보 없이 조용히 대화형 생성 AI 서비스인 “챗GPT”를 출시했다. 홍보가 없었던 것은 이 서비스가 사회 전반에 미칠 파급력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챗GPT를 통해 생성형 AI의 혁신적인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전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AI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문화는 물론, 종교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AI를 빼놓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AI와 관련된 다양한 이슈에 주목하게 되었고, 언론 또한 AI 기업 간의 경쟁, AI 인프라 구축, AI 규제 정책, AI에 따른 산업 구조의 변화와 노동 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 AI 관련 소식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언론이 형성하고 있는 AI 관련 담론은 AI 친화적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인간중심인공지능연구소”(Stanford HAI)가 발간한 “2026년도 AI 인덱스 리포트”(The AI Index Report)에 따르면, 전문가 집단은 AI가 향후 노동 환경에 미칠 영향에 대해 73%가 긍정적으로 보았고, 경제적 파급 효과에 대해서는 69%가, 의료 및 보건 혁신에 대해서는 무려 84%가 긍정적일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전문가 집단의 낙관적 전망은 미디어 보도와 정책 담론을 통해 확산되고 있으며, 대중의 AI 인식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례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BIG Kinds)를 통해 최근 수년간의 국내 주요 언론 보도를 분석해 보면, AI 관련 뉴스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기사보다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기사가 더 우세한 경향을 보인다.<br/><br/>그러나 AI에 관한 낙관적 담론의 확산이 대중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은 AI가 제공할 편익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인간 존재의 의미, 일자리 대체,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불안을 동시에 경험하는 양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연구소의 여론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과반인 52%가 AI 기술의 급격한 확산에 대해 심리적 불안감과 신경과민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AI가 가져올 혁신적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따른 사회적, 실존적 변화에 대한 우려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인간은 잘 모르는 새로운 기술을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초 산업 혁명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기계화로 인한 일자리 상실을 우려하며 기계를 부수었던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현재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기술 불안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산업 혁명기의 기계들이 우리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 것처럼, 전문가 집단이 생산하는 압도적인 순기능 담론과 AI 기술이 제공하는 편의성, 그리고 “뒤처지면 도태된다”는 사회적 압박은 대중으로 하여금 AI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점차 우리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올 것이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보고서에서는 대중의 59%는 AI 제품과 서비스가 가져다줄 혜택이 부작용보다 클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이는 불안한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AI에 대한 기술 낙관주의적 경향과 높은 수용성을 보여 준다. 특히 “AI가 의사보다 암 진단을 더 잘한다,” “번거로운 작업을 대신해 준다,” “나만의 맞춤 비서를 둘 수 있다” 등과 같이 AI와 관련된 긍정적이고 유용성을 강조하는 메시지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경우 사람들은 AI를 더 친숙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친숙성은 AI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하고 호감도와 친숙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고 부른다. 이 효과는 특별한 상호작용이나 경험이 없더라도 어떤 대상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그 대상에 대한 친밀감과 긍정적 평가가 증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br/><br/>문제는, 이제 곧 교회가 휴거되고 대환란이 시작되면 지금 형성되고 있는 사람들의 높은 AI 수용력과 급속도로 발전하는 AI 기술을 통해, 성경의 예언대로 이제 곧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인류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AI 기술의 발전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AI 분야는 일반적으로 데이터를 분류하고 예측하는 “분석형 AI,” 이미지나 음성을 인식하는 “인식형 AI,” 새로운 결과물을 생성하는 “생성형 AI,” 그리고 물리적 환경에서 행동하는 “피지컬 AI”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AI 패러다임은 데이터센터에 갇힌 AI를 넘어 “피지컬 AI”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AI 알고리즘을 탑재할 물리적 하드웨어 제조사로 투자 자금이 몰리고 있는 현상과 AI 알고리즘 자체가 “말만 하는 AI(LLM, 언어)”에서 “몸을 움직이는 AI(VLA, 행동)”로 변화하고 있는 현상, 산업 현장에서 “피지컬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한 현상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br/><br/>그런데 “피지컬 AI”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모방자로서의 마귀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몸이 구속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으니』(엡 1:4,5). 칼빈주의자들은 이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인간의 선택과 유기를 무조건적으로 결정하셨다는 저주받을 비성경적인 교리를 창안해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사람의 구원에 관해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미리 아심”과 “그리스도 안”이라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즉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지, 믿지 않을지를 미리 아셨고, 그 미리 아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사람들을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곧 그분의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빌 3:21, 요일 3:2, 고전 15:49). 따라서 휴거 이후에는 외견상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와 같은 성경적 진리를 모방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오게 되었다. <br/><br/>2026년 6월 12일 미국 나스닥 주식에 상장한 스페이스X의 사업 중 하나는 “스타링크,” 바로 “저궤도 위성 통신망 사업”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25년 12월 4일에 이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이로써 전 세계 오지를 비롯해 기지국이 없는 어느 곳에서도 인터넷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다. 문제는 “피지컬 AI”를 탑재하고 적그리스도와 같은 외모를 한 여러 “휴머노이드”가 스타링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하이브 마인드 동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하이브 마인드”는 여러 AI나 로봇이 동일한 데이터와 명령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마치 하나의 두뇌를 가진 것처럼 협력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형상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처럼, 적그리스도와 그 적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짐승의 형상들이 이 지상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칼에 상처를 입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짐승, 곧 적그리스도를 위하여 형상을 만들어 그 형상에게 경배하는 일이 벌어질 것인데, 이때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의 형상”이다(계 13:14,15).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통치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분신과 같은 형상들과 우상들”이 만들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말씀이 대환란 기간의 문맥(호 13:7,8)인 호세야 13:2에 있다. 『이제 그들이 더욱더 죄를 짓고 자기들을 위하여 그들의 은으로 형상들[images]을 부어 만들고 자기들의 고안대로 우상들[idols]을 만들었으니, 그 모두가 장인들[craftsmen]이 만든 것이라.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은 송아지들에게 입맞출지니라.” 하는도다.』 장인들이(craftsmen)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은 송아지들에게입맞출지니라.”』라고 말한다. 이는 그들이 부어 만든 “형상들”과 자기들이 고안한 “우상들”에 경배하라는 의미인데, 특히 입맞추는 대상으로 송아지가 나오는 것은 황소(송아지)로 예표되는 마귀, 곧 그의 화신인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대환란의 모습을 예표하는 것이다.<br/><br/>위와 같은 적그리스도는 “표범”으로 묘사되는데(계 13:2), 표범의 검은 점은 “두 개의 검은 큰 입술,” 곧 “입맞춤”과 흡사하다. 곧 짐승의 표가 적그리스도에게 경배(입맞춤)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표식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3장에서 느부캇넷살이 금 신상을 만들고, 모든 백성과 민족들과 언어들에게 엎드려 경배하라고 명한 것처럼, 적그리스도 역시 자신의 형상에 대한 경배를 강요할 것이다. 더 나아가 “손 기술”(craft)을 써서(단 8:25) “피지컬 AI”를 통한 자신의 “형상들”과 “우상들”을 전 세계에 편재하게 함으로 모든 개인의 삶과 경제 활동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통제하려 들 것이다. 이미 AI와 친화적이 된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은 큰 거부감 없이 다가올 것이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창녀로 등장하는 로마카톨릭은 이미 성당마다 수많은 형상들(images)을 세워 두고 경배하도록 하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형상에게 경배하라는 요구를 한층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사람의 얼굴이나 음성을 인식하는 “인식형 AI”는 적그리스도의 통제와 감시를 한층 더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 사법 및 공안 당국이 반정부 시위나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AI를 통해 미리 색출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중국 톈진시의 경찰이 특정인의 행동과 성향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고발 가능성이나 소요를 일으킬 위험을 평가하는 시위 예측 프로그램을 구매해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대환란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666, 곧 그의 표를 이마나 오른손에 받지 않은 자들을 식별하고 감시하는 도구로 전용될 것이다.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은 사거나 팔 수 없기 때문에 굶주림에 놓이거나, 이러한 감시 체계 아래서 발각되어 목베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계 20:4).<br/><br/>“오픈AI”는 AI 안전을 발전보다 우선시해 온 비영리 법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올해 주식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목표대로 된다면 주주들의 수익 압력을 받는 구조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해 AI의 안정성보다는 수익을 위한 그 어떠한 선택도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이다. “오픈AI”의 영리 법인 전환과 같은 상업화 흐름은 AI 기술이 인류를 억압하는 통제 수단으로 변질될 위험을 가중하고 있다. 이는 마귀가 적그리스도의 통치 기반을 닦는 전략적 행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영원한 불못의 형벌로 귀착된다(계 20:10). 따라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AI가 제공하는 일시적 편리함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우리 각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모시키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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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8:4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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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몸을 입은 AI, 휴머노이드</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5/%EB%AA%B8%EC%9D%84-%EC%9E%85%EC%9D%80-ai-%ED%9C%B4%EB%A8%B8%EB%85%B8%EC%9D%B4%EB%93%9C/</link>
<description><![CDATA[고되거나 귀찮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누가 좀 대신 해 줬으면” 하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용인, 노예, 하급자 등을 부릴 수 있는 처지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하기 싫은 일”을 시키는 데에는 여러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어떤 일을 강제할 때는 도주, 배신, 탈진 등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고, 보안이나 책임상의 이유로 타인에게 맡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있다. 그래서 인류는 자신의 일을 떠맡아 줄,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늘 바랐다.<br/><br/>그와 같은 인류의 오랜 염원은 문학 작품을 통해 표출되곤 했다. 무려 기원전 7,8세기경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의 &lt;일리아스&gt;에도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황금 하녀”를 만들어 주인을 섬기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그 뒤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야기꾼들은 점차 그 개연성을 신적인 존재나 마법이 아니라 인간이 이룩한 기술에 의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2차 산업혁명이 완수될 무렵이었던 1920년,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의 손에서 기념비적인 희곡 &lt;R. U. R.(로숨의 만능 로봇)&gt;이 탄생했다. 슬라브어로 “강제 노동”을 뜻하는 “로보타”에서 착안한 단어, “로봇”이 세상에 나온 순간이었다.<br/><br/>로봇에 대한 허구적 상상력이 현실에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였다. 이전에도 장난감처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기계는 존재했지만, 인류에게 유의미한 노동력을 제공한 최초의 “산업용 로봇”은 1961년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공장에 도입된 로봇 팔 “유니메이트”(Unimate)였다. 유니메이트는 처음에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옮기는 비교적 단순한 임무를 수행했으나, 시간이 흘러 1969년이 되었을 때는 용접 작업을 맡아 생산 속도를 2배로 끌어올리는 엄청난 성과를 냈다. 인간에게 유독한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고, 위험하거나 고된 작업을 수행하더라도 지치지도 불평하지도 않는 로봇의 등장은 자동차를 포함한 제조업 전반의 패러다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br/><br/>여러 산업 영역에서 저변을 넓혀 가던 로봇은 1990년대에 이르러 공장 바깥으로 나와 인간의 생활공간으로 진입했다. 인간을 대신해 이동하거나, 물건을 나르거나, 바닥을 청소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서비스 로봇”이 등장한 것이다. 이때 던져진 화두는 “이동성”이었다.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 있는 문, 계단, 복도 등의 요소들은 그 구조가 인간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정해지기 때문에, 로봇에게는 꽤나 성가신 “극복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이 문제를 인식한 로봇공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인간처럼 움직이는 로봇, 곧 “휴머노이드”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생활 인프라를 다 뜯어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반대로 로봇을 거기에 맞추자는 발상이었다.<br/><br/>그러나 다른 로봇 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대조적으로, 휴머노이드는 오랜 시간 동안 암흑기를 맞았다. 1973년 일본의 와세다대학교에서 최초의 휴머노이드 “와봇-1”을 선보인 이래로 5-10년 정도 간격을 두고 새로운 휴머노이드가 세상에 나오기는 했지만, 매우 느린 발전 속도 탓에 잠깐 관심을 끄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인간의 신체처럼 자연스럽게 걷거나, 방향을 전환하거나, 물건을 쥐는 행동이 생각보다 훨씬 고난도의 기계적 구동을 요구한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하드웨어(몸)가 아닌 소프트웨어(두뇌)에 있었다. 당시에는 상황과 단계에 따른 “답”을 개발자가 모두 직접 입력해 두는 “하드코딩” 방식으로 로봇을 제어했는데, 변수가 완벽히 통제되는 공장 안에서 붙박이로 일하는 로봇이라면 몰라도 무한대에 가까운 변수가 있는 바깥세상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로봇의 소프트웨어를 그런 방식으로 완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물건이 조금만 삐딱하게 놓여 있거나 가구 배치가 약간만 달라져도 휴머노이드가 어김없이 “바보 짓”을 했던 까닭도 바로 이 “하드코딩”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런 현실 앞에 휴머노이드의 상용화란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br/><br/>그러나 2016년 이세돌 9단을 꺾은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를 통해 “딥러닝”이라는 기술이 알려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이들은 “답”을 일일이 알려 주던 기존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택했는데, 인간의 뇌를 모방한 “인공 신경망”을 구축한 뒤에 “방대한 데이터”와 “최종적인 목적”만을 던져 준 것이었다. 그러자 기계는 마치 인간처럼 스스로 학습하여 데이터 안에서 패턴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학습 시간이 쌓이자 한 번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답”을, 심지어 인간 이상으로 훌륭하게 내놓기까지 했다.<br/><br/>이 기술이 로봇공학자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엄청난 것이었다. 기존에는 “책상 위에 있는 컵을 들어 올려라.”라는 명령을 휴머노이드에게 수행하도록 하려면 “컵과 책상의 XYZ 좌표값 변화에 따른 관절 기어의 회전수”를 도출할 수 있도록 복잡한 수식을 미리 입력해 두어야 했다. 그러나 “딥러닝”이 나온 이후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컵을 들어 올린다는 목적을 부여한 뒤, 컵을 들어 올리는 행동 데이터를 대량으로 학습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딥러닝”으로 학습한 휴머노이드는 알아서 가장 “인간다운” 팔의 각도나 손의 모양 따위를 찾아내 컵을 들어 올렸다. 이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어떤 행동이라도 로봇에게 학습시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br/><br/>“두뇌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자 휴머노이드 연구는 급물살을 탔다. “딥러닝”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언어를 학습한 AI, 챗GPT가 2022년 출시됨에 따라 흐름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의 자본 시장이 AI에 열광하고 있는 가운데, AI에게 “몸”을 주어 가상 세계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 줄 휴머노이드 기술에 자본과 연구 역량이 집중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아직까지 대부분 “화이트칼라”(지식 노동자) 역할에만 머무르고 있는 AI가, 휴머노이드에 탑재됨으로써 그 수가 “화이트칼라”의 서너 배 되는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와 “핑크칼라”(서비스직 종사자) 역할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유용성과 경제적 파급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br/><br/>기술사를 공부해 보면, 신기술은 근시안적으로 보면 일자리를 감소시키는 것 같아도 결국 그 반대의 결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가령 방직기가 발명되어 공장에 도입되었을 때 직물공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이로 인해 기계를 때려 부수는 급진적 사회 운동인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방직기의 도입으로 인해 옷감이 흔해지자 디자인, 유통, 세탁 등의 영역에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 시장으로부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자리가 생겨났다. 자동차가 발명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부들은 일자리를 잃었지만, 자동차를 만들고, 수리하고, 자동차 보험을 판매하고, 도로를 깔고, 중고차를 판매하는 등 수많은 영역에서 훨씬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던 것이다.<br/><br/>그러나 휴머노이드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전문가들이 이런 역사적 패턴과는 배치되는 미래를 점친다. 미국의 언론사 폭스 비즈니스는 지난 2023년 로봇 두뇌 설계의 권위자이자 싱귤레리티넷의 CEO인 벤 고어첼이 향후 수년 안에 직업의 80%가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같은 해 휴머노이드 “옵티머스”를 개발하는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영국 총리와의 대담 자리에서 “그 시점이 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더 이상 일자리가 필요 없어지는 시점이 올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br/><br/>전문가들이 지난 역사와는 다르게 휴머노이드라는 기술이 “일자리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대는 근거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것은 휴머노이드가 “싸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휴머노이드의 제작 비용은 매년 40%씩 떨어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산 휴머노이드는 판매가가 현재 차 한 대 값 정도로 떨어졌다. 따라서 앞으로 휴머노이드가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다면, 그 경쟁력은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수천만 원의 연봉을 주고 하루에 고작 몇 시간 일하고 집에 갈 인간을 고용하는 것보다, 비슷한 비용으로 24시간 쉬지 않고 일할 휴머노이드를 한 대 사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테니 말이다.<br/><br/>그러면 휴머노이드로 인해 설령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된다 하더라도, 그 일자리는 인간이 아니라 또 다시 “값싼” 휴머노이드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게다가 휴머노이드에게는 그 새로운 직무에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투입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인간은 새로운 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써야 하지만, 휴머노이드는 “업데이트” 한 번이면 곧장 직무 수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으로 노동시장에서 인간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는 것이다.<br/><br/>휴머노이드에 의해 “일자리가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자면 절대적 빈곤이 만연한 모습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전문가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는 인건비가 0에 수렴함에 따라 물가가 폭락하고, 기업들의 생산성이 폭발함에 따라 엄청난 세수가 확보될 것이라는 예측에 근거한다. 그들은 그렇게 거둬들인 “부”를 적절하게 “재분배”하면, 사람들이 일을 안 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미 여러 경제학자들과 실리콘밸리의 거물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이런 미래가 왔을 때 어떤 방식으로 “재분배”가 이뤄져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br/><br/>그러나 “일하지 않아도 풍요를 누리는 삶”이란 실현 가능성이 없다.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것”이라는 저주가 주어졌기 때문이다(창 3:19).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저주로부터 인류를 해방해 주시는 날까지, 노동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란 올 수가 없다. 그렇기에 만일 휴머노이드가 양산되어 싼값에 팔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풍요의 시대가 아니라, 빈궁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 노동 시장에서 휴머노이드와 경쟁해야 하는 인간에게 남는 선택지란 “불공정 계약”을 감수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거나, 아예 자기 자신을 파는 것 정도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br/><br/>그런 날이 언제 올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부디 교회의 휴거 이후이기를 바란다). 다만 확실한 것은 대환란 시대에는 하루 품삯으로 저축은커녕, 당일 저녁상을 마련하는 일조차 버거워지고(계 6:6), 인신매매가 성행할 것이라는 사실이며(계 18:13), 역사는 지금도 그런 미래를 향해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 담론을 이끎으로써 휴머노이드 기술이 불러올 재앙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런 무가치한 노력에 동참하지 않는다. 인류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그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실 분께서 약속하신 대로 속히 오시기를, 소망 가운데 기다릴 뿐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7: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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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특집 AI와 적그리스도의 왕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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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lt;편집자 주&gt;<br/>인류는 지금 역사상 그 어떤 세대도 경험하지 못한 문명적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거대 언어 모델(LLM)의 폭발적 성장으로 시작된 인공지능(AI) 혁명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었던 지성과 노동, 심지어 창조의 영역까지 집어삼키고 있다. 여기에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명목으로 “몸”을 입기 시작한 “휴머노이드”가 등장했다. 이에 세상은 “인류의 진화”이자 “유토피아의 도래”라며 찬사를 보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경고해 온 종말론적 징조의 그림자를 목격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포장된 이 거대한 시스템이 향하고 있는 종착지는 과연 어디인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본 특집은 고도화된 AI 시스템이 전 지구적 감시와 통제 메커니즘으로 돌변하여, 적그리스도가 구축할 단일 세계 정부의 핵심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초고도화된 디지털 시대를 살면서 기술의 편리함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 통찰과 재림을 대비하는 믿음의 이정표를 제시한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6: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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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목회를 시작하는 동역자에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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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목회는 영광스러운 부르심이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영적 전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여러 문제와 반대를 경험하게 된다. 성경은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 3:12)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목회자의 고집과 감정적인 태도, 말실수와 성급함으로 인한 오판, 교만, 인간관계의 미숙함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내어 불필요한 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문제를 직면하는 솔직한 용기뿐 아니라, 문제를 예방하는 지혜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 <br/><br/>무엇보다 목회의 통로인 “말”을 거룩하게 하라. 실제로 교회 안의 많은 상처와 분열은 “말”에서 시작된다. 말한 것은 지키고, 지킬 것만 말하라. 목회자의 말은 강단보다 비공식 자리에서 더 쉽게 무너진다. 식사 자리, 차량 이동, 사적인 대화, 심지어 문자와 SNS까지도 목회의 연장선이다. 강단에서의 광고조차 말할 내용은 미리 기록해 두고 자신의 생각과 말이 일치되도록 훈련하라. 들려오는 온갖 헛된 말이나 험담은 그 진위가 확인될 때까지는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 성도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좋은 점을 찾아 말하라. 비판하기보다 세워 주는 말을 하고, 진실만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에도 우선 그 성도의 선한 부분을 먼저 아뢰고, 그 다음 중보기도의 내용을 말씀드리라. <br/><br/>목회의 재정은 “실패의 통로”가 되기 쉬우므로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 재정은 반드시 체계적인 구조로 관리해야 하며, 개인의 양심에 맡겨서는 안 된다. 투명한 시스템이 목회자를 돈으로부터 보호한다. 목회자가 성도와 돈거래를 한다면 거의 신용을 다 잃었다고 보아야 한다. 외모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되, 특히 돈과 관련하여 더욱 그러해야 한다(약 2:3). 대접도 한 사람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받다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를 바로잡아 주지 못하게 될 여지가 있다. 또한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는 믿음과 무모함의 차이를 분별해야 한다. 분명한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간청하고 기대하라. 목회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누군가가 목회자를 섬기려고 베푼다면 정중히 받아들이고 감사하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말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그 손길들을 축복하고 자신도 관대하게 베풀어야 한다. <br/><br/>목회의 기초는 “인격”이기에 삶으로 신뢰를 얻어야 한다. 목회자의 권위는 위임된 것이며, 본을 통해 인정되고, 신뢰를 통해 유지된다. 지나치게 권위적이거나 지나치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 지도력을 잃기에, 목회자는 겸손과 담대함을 함께 가져야 한다. 맡겨진 양무리를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위가 필요한데(고후 10:8), 지도력이 없으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권위는 지배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벧전 5:3) 양무리의 본을 보인 섬김을 통해 인정받는다. 목회자도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신뢰를 잃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든 실수할 수 있기에 실수했을 때는 즉각 사과해야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패착이다. 잘못을 지적하려면 당사자를 개인적으로 대면하라. 비겁하게 소위 “표적 설교”를 통해 공격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긴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교에 거론하고자 할 때는 최소 한두 주가 지난 뒤에, 자신의 감정적 찌꺼기들이 모두 여과된 후에 설교에 올리는 것이 현명하다. 즉 전달할 내용을 충분히 자신 안에서 먼저 여과시키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하도록 보편화시킨 후 전달해야 한다. 핵심을 비껴가지 말고 분명하게 설교하되, 메시지는 강하면서도 태도는 진실되고 은혜로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목회자의 진정성을 통해 신뢰를 얻는다. 강물이 흐르다 물 좀 튀었다고 “이 강은 거꾸로 흐르네!”라고 단정 짓지 않듯, 사람도 가끔 실수할 수 있으니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기 과시나 독선적 태도를 경계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분명한 기준과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결국 목회자의 지도력은 직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경건과 진실성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담긴 인격에서 나온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지만(살전 5:12,13), 그들이 설령 목회자를 좋아하지 않을 때에도, 목회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 이를 극복해야 한다(딤전 4:12).<br/><br/>목회의 열매인 “관계”를 지키라. 목회자는 순결과 도덕성에 흠이 없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특히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한 경계가 필요하다. 우선 목회자는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며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중이 알도록 해야 한다. 회중 앞에서는 절대 어떤 방식으로든 아내를 난처하게 만들거나 깎아내리지 말라. 교회 성도들 누구라도 목회자와 그의 아내가 서로 깊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자를 들이받고자 하는 양의 속성이 표출될 때 목자에게 틈이 없으면 목자의 아내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 여성과의 상담에서 장시간 상담하거나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간략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한 권면을 제시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이성 상담은 기본적으로 10-15분 내에 마무리하되, 상담이 계속 요구된다면 아내나 적합한 자매를 참석시키거나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이것이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더라도 『악은 어떤 형태이든지 피하라.』(살전 5:22)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사탄은 종종 작은 틈을 통해 목회자의 삶과 사역을 무너뜨린다. <br/><br/>교회 안의 동역자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모든 지체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하는 동역자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원칙과 역할을 제시하되, 동시에 존중과 배려로 관계를 세워 가야 한다. 정기적인 기도와 소통, 명확한 책임 분담은 많은 갈등을 예방한다. 또한 일을 위임할 때는 단순한 친분보다 책임감과 신실함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br/><br/>목회자는 “반대”와 “비판”도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데, 모든 반대를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어떤 반대는 목회자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일 수도 있기에 비판을 들을 때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동시에 성경적 확신이 있다면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교리 문제, 공개적인 죄 등에 대해서는 즉시 대응하고, 감정 충돌, 오해에 관한 문제는 시간을 두고 대처하라. 중요한 것은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온유함과 성숙함이다. 모든 사람이 목회자를 적극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려는 자세가 필요하기에(롬 12:18),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사람들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가 풀리고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도 많다. 교회 안에서 분열이나 갈등이 발생할 때도 지나치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오히려 교회의 질서와 평안을 가져오기도 한다(마 15:13). 목회자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침착함과 사랑을 유지하는 훈련에 집중해야 한다.<br/><br/>목회는 능력이 아닌 관계의 문제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목회 사역이 바빠질수록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더더욱 필요하다. 목회자 자신도 언제든지 실수하고, 상처받고, 낙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연루되지 않는 한, 그분께서 부르신 종을 버리지 않으신다. 목회 현장에서 수많은 문제를 만나더라도, 기도와 사랑과 말씀 안에 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신다. 그러므로 목회를 시작하는 동역자는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동시에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지 않도록 늘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27: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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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예수 그리스도의 강건하고 훌륭한 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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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대배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죄의 유혹과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번 타락의 늪에 깊이 빠져들면, 그곳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와 영적인 회복을 이루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이는 인간이 가진 타락한 육신의 본성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서 성도의 발목을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마귀의 권세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마귀의 공격이 어떠한 경로와 방법으로 이뤄지는지에 대한 영적 인식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지금 이 시대를 향하여 『아주 어려운 때』(딤후 3:1)라고 명확히 경고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r/><br/>아프리카 선교의 최전선에서 전 생애를 바쳤던 C.T. 스터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즉 세상에서 용맹하다고 자부하는 어떤 전사들보다 더 용맹하며, 질병과 위험, 그리고 죽음조차 자신의 친구처럼 여길 줄 아는 영웅이다.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단지 물방울이 닿거나 연기에 스치기만 해도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초콜릿 그리스도인’에 불과하다.” 스터드의 이 날카로운 지적은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주님을 위해 아무런 고난도 감당하려 하지 않는 나태한 성도들을 향한 꾸짖음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초콜릿 그리스도인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강건한 군사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님을 위해 기꺼이 싸우기를 원하는 소수의 군사가 존재하며, 우리가 이겨야 할 영적 전쟁은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즉 어떤 고난도 감당하겠다는 강건함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어야만 한다.<br/><br/>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배운 진리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하신 두 가지 지상명령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행 1:8)과 “모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마 28:20)이다. 주님을 따랐던 사도들로부터 교회사 속의 모든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타인에게 진리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영적 군사들이었다.<br/><br/>“가르치는 일”은 강단에 서는 목사나 성경 교사에게만 맡겨진 것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근본적인 사명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든 인류는 죄 가운데 태어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다”는 성경의 선포를 복음을 듣는 이들에게 명확히 인지시키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하는 것이 영적 군사의 가장 기초적인 임무다.<br/><br/>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성경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진리를 또 다른 신실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여, 그들 역시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영적 재생산의 통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성경적 지식은 단순히 머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의 현장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해야 하며(딤후 2:15),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하여 주변인들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바로 설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br/><br/>거듭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말씀의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영적 성장을 거부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고기로 먹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지금까지 소화시킬 수 없었음』(고전 3:2)이라고 책망했다. 성경대로 믿는 대열에 합류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성장하는 일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한 설교자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재능,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인생을 거십시오! 인생에서 그보다 더 고귀한 목표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br/><br/>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고난을 견디며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든 성도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군사로서 양육 과정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갓 거듭난 때가 마귀의 공격 속에서 성장하느냐 시들어 버리느냐를 결정짓는 영적 “골든타임”이기 때문이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구원 후 2주 내에 양육이 시작되지 않으면 마귀가 구원의 확신을 흔들고 결국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바다거북 수백 마리 중 단 1%만이 사투 끝에 생존하듯, 성도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로 인도되어 정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의 결과다. <br/><br/>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영적 전쟁터에 투입된 군사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옷”으로 무장하여 어떤 고난도 견뎌 내야 한다(딤후 2:3). 고난은 강인한 군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다. 고된 훈련이 단단한 용사를 빚어내듯, 고난을 통한 영적 연단만이 훌륭한 군사를 만들어 낸다.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라는 말씀처럼, 고난을 견뎌 내는 사람만이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다.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주의 말씀을 지키라는 하늘의 신호”라는 말이 있다. 시련을 견뎌 낸 군사는 이전보다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며, 주님께서 쓰시는 강건한 군사로 성장하게 된다.<br/><br/>성경은 『전쟁에 임하는 자는 아무도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라고 말씀한다. 군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생의 일들에 대한 집착”이다. 세상일이 너무 바빠 성경 읽을 시간도 없고, 기도는 형식적이며, 복음 전도지 한 장 전할 여유조차 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이생의 일들에 결박된 상태다.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기 위해 헛된 씨앗을 심고 있는 것이다. 군대 대장이신 주님께서 하늘로의 소환 명령을 내리시기 전까지, 우리는 이 땅의 전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초소를 죽기까지 사수해야 한다.<br/><br/>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규칙대로 달리는 사람이다. 헤비급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이 반칙으로 실격패하고 몰락했듯이, 규칙에서 벗어난 자들의 끝은 오직 부끄러움뿐이다. 성경 속 영웅 삼손 역시 성별의 규칙을 가볍게 여기다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성경은 『규칙대로 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하리라.』(딤후 2:5)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인 성경의 법칙을 철저히 준수할 때 비로소 인정받는 군사가 될 수 있다.<br/><br/>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단순한 완주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기 위해 이기려고 애쓰는 질주여야 한다.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일에 자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어질 면류관을 받으려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고자 함이라』(고전 9:25).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상을 얻기 위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절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전 9:27). 경주자에게 요구되는 절제와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결정짓는 기본적인 규칙이다.<br/><br/>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규칙적인 말씀 읽기와 기도, 성경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자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기 위해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훈련은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지속해야 할 영적 과업이다.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신실함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 파국적인 결과는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지난 역사 속에서도 뜨거운 열심을 내던 이들이 낙오한 것은 “규칙대로”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어긴 자들에게 가차 없이 실격 선언을 하신다. 면류관을 얻는 영광은 오직 말씀의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누리게 된다.<br/><br/>조지 패튼 장군은 “군인의 가장 영예로운 죽음은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 역시 주님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죽기까지 신실한 군사로 남기 위해,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고,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에 헌신하라. 그리고 주님을 위한 고난을 감사히 여기고, 썩어 없어질 이생의 일들에 마음을 뺏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면류관을 예비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이기도록 달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지켜 낸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바로 그 바울이 지금 우리를 향해 “은혜 가운데서 강건하라!”(딤후 2:1)고 권면하고 있다. 앞서 간 성도의 응원을 받는 우리 모두가 경주를 완주하고 주님과 대면하는 그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는 거룩한 칭찬과 최고의 명예를 얻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20:3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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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정치적 술수의 산물인 “니케아 신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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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A.D. 325년의 니케아 공회는, 콘스탄틴 황제가 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국가교회를 수립하고 기독교에 대한 황제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소집한 공회이며, 역사적으로 개최된 첫 번째 공회이다. 이 공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삼위일체 교리, 니케아 신조, 부활절 날짜, 그리고 교회 규범 20개 항목이었다. 친카톨릭 교회사가들은 이 공회를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된 중요한 공회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공회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고백을 담은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였기 때문이다.<br/><br/>니케아 공회의 삼위일체 논쟁에서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된 신”으로서 하나님과 유사한 존재(유사 본질)이긴 하지만 동일한 존재(동일 본질)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아리우스파의 주장에 반대한 아타나시우스파는 아들 하나님은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 “낳아진 존재”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아리안주의라고도 일컬어지며, 현대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들의 교리로 삼고 있다. <br/><br/>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경”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마지막 부분에 아리우스파의 파문을 염두에 둔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성자께서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서 생겨났다.”라고 말하는 이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다른 실체나 본질에서 생겨났다거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창조되었거나 변할 수 있거나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가톨릭 교회는 파문한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 &lt;하인리히 덴칭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gt;, pp.125,126). 니케아 신조는 이후 보완되어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명명된다. <br/><br/>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의 통치 체제를 굳건히 할 목적으로 기독교의 통제권을 갖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종교 지도자들을 황제의 통제하에 두고 그들의 종교적 주장을 받아들여 줌과 동시에, 콘스탄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콘스탄틴은 당시 기독교계에 있었던 문제들 중에서 “삼위일체” 문제와 “부활절 날짜” 문제를 기회로 삼아 황제의 주관하에 공회를 소집한 것이었다. 콘스탄틴은 종교 계급을 자신의 독재하에 통제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콘스탄틴의 진심은 결국 자신이 교회들의 권위가 되려는 것이었다.<br/><br/>사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주요 논제는 “삼위일체”나 “부활절 날짜”가 아니었다. “삼위일체”는 이미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한 교리였고, 부활절은 성경에서 날짜를 정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주요 논제는 “침례”와 “교회의 순수성”과 “재림”이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물침례에 의한 구원”과 “기독교 공인 전의 배교자들”과 “후천년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교회들로부터 “분리”를 실행하고 있었으며, 이미 “노바티안”과 “몬타니스트”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오염된 교리를 실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성별”을 실행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니케아 공회는 황제의 정치적 술수에 휘말려 그에게 기독교 통제권을 넘겨 준 기념행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br/><br/>제50차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회장 유창형 박사) 정기학술대회가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보내며”라는 주제로 지난 5월 9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니케아 신조를 통해 본 기독론 해석과 신학적 교훈”을 주제로 안명준 박사(한국성서대 초빙교수, 평택대 명예교수)가 기조 강연을 했는데, 니케아 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성경적 이해가 잘못되었기에 이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br/><br/>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에 대해 “교회사적으로 가장 보편적·규범적 신앙고백으로, 기독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단적 신학 사상을 평가하는 초석이자 규범으로 기능해 왔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카톨릭이 정한 “신조”나 “규정”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친카톨릭적 사고에서 나온 평가이다. “신조” 같은 것을 만들어 예배 등의 의식 때마다 암송하며 “헛된 반복”을 계속하는 것은 카톨릭의 전통에 불과하다. 하물며 그가 말한 “기독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단적 신학 사상을 평가하는 초석이자 규범”은 “니케아 신조”가 아니라 “성경”이다. 그는 잘못 배워도 한참 잘못 배운 것이다. “신조” 따위를 “성경”이 있어야 할 권위 위에 올려놓는 것은 늘 카톨릭이 해 온 일이기 때문이다.<br/><br/>또한 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가 원래 “예배와 고백을 위한 언어였으나, 아퀴나스에 이르러... 니케아 신앙을 철학적으로 완성했지만, 성경의 구속사 중심성과 은혜의 급진성을 약화시킨 한계를 가진다.”라고 말했는데, 니케아 신조는 결코 “예배와 고백을 위한 언어”가 아니었으며, 역사적으로 콘스탄틴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인위적인 문서였기에, 그와 관련하여 “구속사”라든가 “은혜”와 같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치를 억지로 찾아내어 비판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는 “니케아 신조가 오늘날까지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를 묶어 주는 유일한 ‘신학적 분모’이자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만들어 왔다.”라고 주장했다. “신조” 하나를 과대평가하고 신성시하기까지 하는 표현에 더하여,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카톨릭이 스스로를 칭할 때 사용하는 명칭을 가져다가, 카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를 묶어 하나의 교회라고 칭한 것은 극단적인 친카톨릭적 성향을 보여 준다 하겠다. <br/><br/>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는 교회 예배 시 ‘사도신경’과 더불어 함께 고백돼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고백되면 좋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도신경”에 관한 그의 역사적, 신학적 평가에도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드러내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과는 무관하게 로마의 히폴리투스(A.D. 170-235)가 세례 시 사용한 신앙고백문에 기초하고 “니케아 신조” 등의 영향을 받아 8세기경 현재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카톨릭에서 주로 “유아 세례”나 “묵주 기도”를 할 때 사용한다. 이교도인 카톨릭의 잘못된 전통이 개신교에도 그대로 전해져서 마치 불교의 염불처럼 암송되고 있는 것인데, 한국 교계에서 소위 “주기도문”과 함께 가장 많이 암송되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다. 이러한 “헛된 반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하신 것이다(마 6:7). 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나 “사도신경”이 신학적으로 무가치한 카톨릭 전통임을 모른 채 실로 무지한 주장을 펼친 것이다. 바른 신앙 고백은 “신조”나 “신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 하나하나를 믿는 “믿음” 그 자체가 바른 신앙 고백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18:2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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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소수자”를 향한, 진리를 상실한 긍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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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4월, 뉴스앤조이는 서울 중구에 소재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서울제일교회에서 열린 고(故) 육우당(본명 윤현석) 23주기 추모 예배 소식을 보도했다. 그는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학창시절 내내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학교를 자퇴한 뒤 사회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동성애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사회를, 특히 “기독교인들”을 탓하며 18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는, 유서에 이렇게 썼다.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나 죽은 게 아깝지 않다고 봐요. 몰지각한 편견과 사회가 한 사람을, 아니 수많은 성적소수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반성경적, 반인류적인지. 우리더러 죄인이라 하기 전에 자기네들이나 먼저 회개하고 이웃사랑 실천을 해야 할 거예요.”<br/><br/>이 자리에서 교인들은 “그 모습 그대로” 등의 CCM을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고, 설교를 맡은 홍보연 목사는 “육우당이 겪은 고통뿐 아니라, 끝까지 붙든 소망을 함께 기억하자”고 했다. 여기서 말한 “소망”이란, 이 추모 예배 참가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던 것처럼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누구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이와 같은 “소망”을 품은 교인들은 아직까지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런 자들이 제도권 안에서 버젓이 정체를 드러낸 채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봐도 격세지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 기독교 단체인 “무지개예수”에 따르면, 당당하게 교회 이름과 장소를 공개한 “무지개교회,” 즉 “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의 수는 2017년을 기준으로 서울에만 11곳, 전국적으로는 19곳이었다. 눈치가 보여 공개적으로 “무지개교회”임을 표명하지 못하는 교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몇 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뉴스앤조이에서는 2023년 「성소수자 교인 “커밍 인” 과정 책으로 기록한 교회」라는 제하의 기사로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정언향교회”라는 곳을 소개했는데, 공식적으로는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그 교회는 성소수자들을 환대하되 “무지개교회”임을 표명하는 대열에는 동참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과거에 정체가 탄로 나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둔 경험을 했던 성소수자 교인이 거기에 정착했던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다니는 교회가 “무지개교회”로 알려지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었던 것이다.<br/><br/>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권영진 목사는 막 교회를 개척했을 무렵부터 “언젠가 우리 교회에도 성소수자 교인이 올 수 있을 텐데.” 하는 고민을 품고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했다고 한다. “성서학” 전공자인 그가 내린 결론은 “성경에서 죄악시하는 동성애는 오늘날 성소수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였다. 그러던 중 정말로 한 청년이 스스로가 성소수자임을 털어놓는 일이 벌어지자, 정 목사는 그가 교회에서 “커밍아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 일에 정 목사를 도운 김석희 전도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는 성소수자만을 위한 교회나 운동 단체처럼 성소수자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썼던 건 아니에요. 눈앞에 성소수자 지체들이 드러났고, 이들과 어떻게 함께 지낼까를 고민했던 것뿐이죠... 저는 교회가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 다른 위치와 입장에 있는 서로를 들여다보고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br/><br/>“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들”은 동성애는 죄가 아니며, 설령 죄일지라도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인데 어찌하여 성소수자만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느냐고 다른 교회들을 향해서 따져 묻는다. “무지개예수”는 “동성애는 죄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성서의 모든 구절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앞뒤 문맥 속에서, 성서가 집필되었던 당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동성애를 부정하고 죄악시했던 성서 구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와 같은 구절의 경우...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자를 도구화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밖에 동성애를 정죄하는 데 쓰이는 모든 성구들은 성경에 흐르는 무게 있는 가르침인 약자에 대한 보호, 주어진 성의 의미, 사랑, 정의, 평등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br/>그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소돔이 동성애로 인해 멸망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소돔이 멸망한 이유로 동성애를 직접 언급한 구절이 없습니다... 특히 선지서들을 보면 이사야는 소돔의 죄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학대하고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 악한 행위(사 1:10-17)를, 예레미야는 간음, 거짓말, 악행(렘 23:14)을, 에스겔은 교만, 음식물의 풍족함, 즉 탐식, 배고픈 자에 대한 무관심, 가난한 자들을 방기하고 돕지 않는 것(겔 16:49)을 소돔의 죄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기록들을 볼 때 소돔의 죄를 동성애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더구나 소돔성이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더 근거가 없는 해석입니다.”<br/><br/>잘 모르면 입이라도 다물면 될 터인데(잠 17:28), 대부분의 무식한 군상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한다(요 9:40,41). 먼저, 성경은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주지시켜 줄 필요가 있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계 1:11).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께서는 문자로 쓰인 “책”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되, 처음부터 그 끝을 선포하는 분이시다(사 46:10). 오늘날의 학자들은 성경이 여러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에 의해 차츰차츰 그 모습을 갖춰 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이 하늘, 곧 시간의 흐름이 멈추기에 “영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이미 영원히 세워졌다고 말씀하신다(시 119:89). 따라서 성경의 어떤 부분도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재해석”될 필요가 없다. 성경은 그 모든 변화까지도 아우르며 “끝”을 선포하실 수 있는 분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질문은 “오늘날 그 구절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오직 이것이어야 한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성경에서 『너는 여자와 함께 하듯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그것은 가증함이니라.』(레 18:22)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br/><br/>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서는 남색자가 있지 못할 것이니라.』(신 23:17)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변개된 성서들에서는 “남색자”라는 단어가 신명기의 말씀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다. NIV, NASB, NRSV는 모두 “남색자”를 “신전(이교)에서 몸 파는 자”로 바꿔 버렸고, 한국 교회의 개역개정판도 “남색자”를 “남창”으로 옮기고 있다. 이 “남색자”라는 단어는 영어로 “sodomite”이며, 직역하면 “소돔인”이라는 뜻이 된다. 왜 “무지개예수” 같은 단체가 “소돔성이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라고 주장하는지 이제 알 만하지 않은가? “sodomite”라는 단어를 빼 버린 변개된 성서들을 사용하는 주석가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할 뿐인 그들로서는, 소돔인들의 멸망을 초래한, 소돔인들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죄가 바로 “남색”이었음을 알 턱이 없는 것이다. [참고로, “sodomite”라는 단어가 빠지게 된 것은 순전히 동성애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1900년을 전후하여 나온 변개된 성서들인 RV와 ASV에도 “sodomite”라는 단어는 그대로 있다. 1960년대에 일어났던 “게이해방운동” 전에는, “동성애는 불과 유황을 받을 만한 죄다.”라는 것을 변개된 성서들도 인정했던 것이다.]<br/><br/>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기에, 설령 성소수자라고 해도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고, 또 자신이 그런 짓을 자행한다는 사실을 버젓이 드러내는 사람이 지역 교회에 소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눅 10:26)를 묻는다면, 성경은 만일 형제라고 하는 어떤 자가 음행하는 자이고 그것이 알려졌거든, 그와 사귀지도 함께 먹지도 말고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겠다(고전 5장). 동성애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또 다른 “음행”이다(고전 6:9,10). 그런 음행하는 자를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도록 허용하는 일은 “이웃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다(고전 6:5). 정 그런 자들을 포용하는 “사랑”을 베풀고 싶다면, 교회 간판부터 내리고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느니라』(고후 13:8).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09: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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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기도문 오독(誤讀)의 시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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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책의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 주관성이 독자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혹자는 독자의 주관이 개입된 “창조적 오독”이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킨다고 했지만, 오독은 대부분 창조적이지 않으며, 성경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독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취하는 책이 아니다. 그러한 자세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의도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본문에 따라서는 오독한 독자를 지옥에 던져 넣을 수도 있다. 교회와 관련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배우거나 만들어 낸 해석의 감옥에 갇혀, 성경 본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류가 강화되는 비극에 빠져 있는 것이다.<br/><br/>우리에게는 성경을 아무렇게나 읽을 자유가 없으며, 오히려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것을 읽는 독자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단하는 인격을 지닌 매우 무서운 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성령의 칼』(엡 6:17)인 성경은 그것을 잘못 읽어 낼 때 혼을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된다. “책들의 제왕”인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도 권위가 높기에, 그 해석에 따른 책임 또한 그 무엇보다 무겁고, 결과는 극과 극을 오간다. 해석에 따라 하늘나라와 지옥을 오가는, 초극단적인 결과를 낳는 책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br/><br/>이 마지막 때는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라는 말에는 “그 시기의 특징이나 징후가 뚜렷한 시대적 구간”이란 뜻이 담겨 있다. 본 논단의 제목을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라고 정했을 때는 나름대로 엄중한 이유가 있다. 현재 우리가 지나고 있는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1900년 - 현재)는 “주기도문 오독”이 영적 소경이 된 모든 교회들의 강단과 성경 공부, 신학교들의 강의실과 기독교 서가의 책들에서 매우 광범위하고도 뚜렷하게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오독”을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거대한 영적 특징”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br/><br/>혹자는 주기도문에 관하여 “학자연(學者然)하는” 설명을 늘어놓는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수록된 단순한 ‘기도 교육용 텍스트’나 신약성경 내에 고립된 파편적 본문이 아니다. 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언약 사상과 고대 세계의 종교적·문화적 토양이라는 거대한 지평 위에서 주기도문을 재위치시켜야 한다. 후반부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와 같은 간구는 철저히 고대인들이 마주했던 실존적 불안정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기도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형성되고 전승되던 고대 세계의 문화적·종교적 토양에 대한 배경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br/><br/>풍유적 해석을 선호하는 자들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창조적 오독”으로 횡설수설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라. 예수님이 고작 하루 먹을 밥을 구하라고 하셨겠는가? 여기서 ‘양식’은 영적인 양식, 즉 ‘말씀’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기도로 격하시키지 말라.” <br/>“행위 구원”을 좋아하는 자들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푹 빠져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구원의 조건이다. 성경에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남을 용서 안 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 안 하신다는 뜻이다. 즉 구원은 내 행위에 달린 것이다!”<br/><br/>“단편적 성경 지식 예찬자”는 구절과 구절을 비교해 가면서 오류를 방출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는 오역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왜 주기도문에는 하나님보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고 기도하는가? 번역이 잘못됐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번역해야 맞다.”<br/>본 논단을 읽는 독자는 이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며, 주기도문을 어떻게 “오독”하는가? 독자도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를 부채질하는 숨은 공모자인가? 그 허황된 지식의 잿더미 위에 얹어질 또 하나의 불쏘시개인 것인가? <br/><br/>배교한 교회들에서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기도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알려 주신 “제자들의 기도”이다. 이 구절의 『너희』를 신약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함으로써 치명적인 이단 교리를 교회에 퍼뜨린 자들이 무수히 많았다. 『너희』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유대인 제자들”을 지칭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낳으신 “한 아들”이기에(출 4:22),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민족적으로 『우리 하나님』(수 24:24, 삼상 7:8, 왕하 19:19 등)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이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영광에 초점을 맞춘 내용으로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은 『교리』(딤후 3:16)이기에, “제자들의 기도” 역시 “교리”적으로 올바르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 시작부터 “아버지의 왕국의 도래”가 강조되는 기도에 “왕국”과 관련된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은 너무도 당연하다.<br/><br/>“유대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기도는 『아버지의 왕국』이 문자적으로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에 관해 유대인 제자들에게 통치를 약속하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국을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가 나의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리라』(눅 22:29,30). 이 왕국은 왕국 백성인 유대인의 거부로 초림 때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주님께서 장차 재림하시어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눅 1:31-33) 물리적인 왕국이 된다. 초림 때는 주님의 왕국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지만(요 18:36), 재림 때는 세상 왕국들을 접수하여 그분의 왕국으로 삼으실 것이다(계 11:15). 이것은 교회 시대의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롬 14:17)가 아닌,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왕국이다.<br/>주님께서는 미래, 곧 재림 때에 “왕국이 임할 것”(마 6:10)을 구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기도”가 드려지는 시점은 왕국이 임하기 전인 “대환란 기간”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그 기간에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놓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br/><br/>1. 일용할 양식 : 광야에서의 초자연적 부양<br/>『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는 간구는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다. 주님께서 왕국을 가져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전무후무한 대환란이 있게 되는데, 이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난 기간이다.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셀라 페트라”라 불리는 바위 성읍으로 피신한 유대인들은 짐승의 표 없이는 경제활동을 할 수 없기에(계 13:17), 후 삼 년 반 동안 초자연적인 부양을 받아야만 한다(계 12:14).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받았듯이(시 74:14, 미 7:14,15), 대환란 때의 유대인 환란 성도들은 그날의 생존을 위해 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대환란 때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서 드려야 할 실질적인 “생존 기도”인 것이다.<br/><br/>2. 용서의 조건 : 행위와 인내가 요구되는 대환란 기간의 구원 방법<br/>『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들도 용서해 주시오며』(마 6:12)라는 말씀은 교회 시대의 은혜 복음과 전혀 다른 교리를 담고 있다. 교회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 행위라는 조건 없이 죄 용서를 받았지만(골 1:14), 대환란 때에는 타인의 죄(죄의 빚, 눅 11:4)를 용서하는 “행위”가 뒷받침되어야만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 이는 명백한 “행위 구원”의 요소이며, 대환란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더하여 계명을 끝까지 지키는 “인내”가 뒤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계 14:12). 『대환란』(마 24:21)을 예언하는 마태복음 24장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가 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인 “왕국 복음”으로서 제시된다(마 24:13,14). “끝까지 견디는 인내”를 강조하는 구원론은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만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환란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br/><br/>3.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 : 적그리스도의 박해에 따른 배교의 위험<br/>『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마 6:13)라는 간구는 대환란 때의 급박한 상황을 전제한다. 환란 성도들은 행위로 구원을 지켜야 하기에, 광야의 시험 때처럼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죄를 지으면 구원을 상실할 위험이 크다(히 3:8). 무엇보다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목베임을 당하는(계 13:15) “악”의 통치 아래서, 믿음을 부인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날마다 시험에서 구원받는 일은 생명보다 귀중한 일이 된다. 만약 적그리스도의 극심한 박해 아래서 시험에 들어 적그리스도와 타협한다면, 즉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다면 “구원을 잃어버려” 영원한 불못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계 14:9-11). 대환란 때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끝까지 인내하며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조상이 2천여 년 전에 거부했던 그 “왕국”을 기다려야 한다. “제자들의 기도”는 대환란 때에 왕국을 기다리는(마 6:10) 유대인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이며, 기도에 담긴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드려져야 할 기도이다.<br/><br/>기도의 마지막 내용은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마 6:13)이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시작 부분인 10절에 이어 또다시 “왕국”을 언급하시며 기도를 종결지으신다. 기도의 “시작”과 “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에 세우실 “왕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태복음 6장의 “제자들의 기도”는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 있는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그들을 구원하실 메시아 왕의 지상 왕국을 기대하면서 드려지는 기도인 것이다.<br/><br/>초림 때 실패한 왕국, 그 “연기된 왕국”에 대한 무지가 “신학적 혼란”을 낳았고, 무수한 “창조적 오독”을 낳았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가르치신 당시 상황은 철저히 유대적인 “왕국 복음” 전파 시기였다(마 4:23). 이 왕국 복음은 다시 전파될 것이다(마 24:13,14). 그 일이 일어나는 대환란 때 드려질 기도를 분별하지 못한 채 예배 때마다 주문처럼 웅얼거리는 한국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딤후 2:15) 해석하지 못하는 “아전인수식 영해(靈解)”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07: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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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을  매일 읽어야 할 이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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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있다. 독서가 육체의 양식처럼 마음을 채우고, 사유와 감정, 인격을 키우는 데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독서가 좋은 습관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을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잡지식이라든가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 이론과 정보는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독서가 의미 있으려면 “양서들”을 읽어야 한다. 특히 모든 인간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단순한 삶의 유익을 넘어 인생의 존망을 결정하기에 다른 책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생 필독서이다. 이 책에 무지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심지어 한 국가까지 멸망하게 된다(호 4:6). 그 책은 바로 절대 진리의 말씀인 “성경”(단 10:21, 요 17:17)이다.<br/><br/>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성경 읽기를 등한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바쁜 일상에 치여 사느라 여유가 없는 것도 원인일 테지만, “성경책”보다는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생활 습관이 성경 읽는 시간을 빼앗는 더 큰 원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하면 영적 지식에 무지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성도의 영적 생활이 무기력해지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형식적으로 전락하게 된다. 심지어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기현상까지 벌어진다(호 8:12).<br/><br/>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성경을 읽는 데서 시작한다. 성경을 읽는 일은 단순한 선택 사항이나 기호가 아니라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 에 전념하라.』(딤전 4:13)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역자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명령이다.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려면(딤전 2:4) “성경”을 우선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심지어 인생의 성패(成敗)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 요소이다. 그렇기에 “성경을 매일 읽는” 삶은 굉장히 중요하다.<br/><br/>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명령을 지키지 않아 인생에 실패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솔로몬이 인생 말년을 배교로 끝내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곁에 두고 그것을 평생 읽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와 함께 두고 평생 동안 그것을 읽어서 그가 주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배우게 하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과 이러한 규례들을 지켜 그것들을 행하게 할지니라. 그리하여 그의 마음이 자기 형제들보다 높아지지 아니하고 그가 그 계명에서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아니하면 종국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와 그의 자손이 그 왕국에서 자기 날들을 늘리게 되리라』(신 17:19,20).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왜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말하자면 매일 성경을 읽어야만 인생에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매일 성경을 읽는 성도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건을 스스로 구비할 수가 있다.<br/><br/>첫째, 성경을 읽으면 『주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욥 28:28).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경이로운 역사, 자애하심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을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성경을 읽으며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성경을 읽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위로, 다가올 심판과 영광을 인식하게 되어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히 12:28)으로 그분을 섬기게 된다.<br/><br/>둘째, 성경을 읽으면 단순히 말씀을 듣기만 하지 않고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다(약 1:22).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순종의 전제 조건은 일단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다. 성경을 알려면 그 책을 읽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의 성경적인 설교나 강의를 듣는다고 해도 그 일이 성경을 직접 읽고 깨닫는 것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그것을 읽는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판별한다(히 4:12). 그렇기에 우리가 성경을 직접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찔림을 주시고, 우리가 그에 반응하면 말씀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셋째, 성경을 읽는 성도는 그 『마음이 자기 형제들보다 높아지지』 않는 겸손함을 지니게 된다. 말씀을 매일 읽음으로써 진리의 지식 안에서 믿음이 올바르게 자라는 성도일수록,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기 때문이다. 지역 교회 안에는 연약한 지체를 함부로 판단하며 잘못을 섣불리 지적하는 자들이 있고, 신실한 목자의 설교와 권면, 섬김을 폄하하며 불평을 쏟아냄으로써 교회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롬 12:3) 품고서, 은혜가 아닌 지식에 치우쳐 교만해져 있는 것인데(고전 8:1), 이런 자들의 결정적 특징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의 마음이 형제들보다 높아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점을 입증한다. “겸손함”은 “주를 두려워함”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잠 22:4). 이 모든 선한 열매는 성경을 항상 진지하게 읽는 성도에게 나타나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 5:5).<br/><br/>넷째, 성경을 읽는 성도는 죄를 멀리한다(시 119:9). 무엇을 보고 듣느냐가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유튜브나 TV 같은 세속적 매체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그 마음이 세상의 죄악된 조류에 휩쓸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이 치명적인 오염을 방지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굳게 간직하는 것이다(시 119:11). 성도의 속사람이 말씀으로 충만해지면, 더러운 세상의 욕심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사라진다. 설령 연약함 가운데 죄에 넘어져도 『말씀에 의한 물』(엡 5:26)로 깨끗이 씻어 다시금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다(요 13장). 죄에 승리하는 삶을 갈망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br/><br/>다섯째, 성경을 읽는 성도의 삶은 풍성한 열매로 가득해진다. 우리가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그 점을 알려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더 많은 열매』, 『많은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고 하셨다(요 15:2-8). 말하자면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행하여 주님께 밀착할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성경을 읽는 데 있다! 특히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번성하게 된다. 『그의 즐거움이 주의 법에 있으니, 그가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강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의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하리니, 그가 무엇을 하든지 번성하리로다』(시 1:2,3).<br/><br/>솔로몬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업인 “성경 읽기”를 멸시한 탓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는 성도는 그 말씀을 멸시하는 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을 멸시하는 자가 맞게 될 파멸을 경고한다(잠 13:13). 성경 읽기를 게을리함으로써 자멸하지 말라!<br/><br/>인생의 진정한 성공과 번영은 “성경”에 달려 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의 길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고 네가 좋은 성공을 이루리라』(수 1:8). 밥 존스 시니어가 설파했듯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행하는” 삶이 진정 성공한 인생이다. 이러한 삶을 실현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록된 그대로 철저히 실행해야 한다. 그럴 때 인생의 실패를 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r/><br/>바울이 “읽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고 했던 당부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참으로 엄중하고도 중요한 명령이다. 바울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까지도 책 읽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딤후 4:13). 그가 그토록 읽고자 했던 것은 당연히 “성경”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성경을 “읽는 것”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물론 성경뿐만 아니라 영적 성장에 유익한 “양서들”도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피터 럭크만 목사가 성경 외에도 여러 신앙 서적들을 추천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성경 읽기가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말라. 성도는 성경을 필두로 검증된 좋은 책들을 읽으며, 인생의 귀한 시간을 가치 있게 선용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35: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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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술이 신이 되는 사회 (3)  “지구를 구해 주시옵소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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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민간 주도의 환경 운동에서 출발한 이 날은, 현재 전 세계 190여 개국에서 약 10억 명 이상이 동참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민간 환경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매년 지구의 날에는 환경오염, 특히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며 환경 보호를 위한 범세계적 관심과 실천을 강력히 촉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 지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현재 심각한 기후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특히 “기후 비상사태” 선언은 오늘날 기후 문제가 얼마나 위태로운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br/><br/>산업화 이후의 기온 상승 속도는 과거 자연적 변동 속도보다 10-20배나 빠르다. 이는 지구 역사에서 사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급격한 변화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제6차 보고서에서는 지구 온난화의 임계점인 1.5℃ 사수를 위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9년 대비 43% 감축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2024년 초 지구 평균 기온이 이미 일시적으로 1.5℃를 넘어섰고, 그린란드 빙하의 소실 속도는 1990년대 대비 7배나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지구의 온난화가 태양 활동이나 지구 자전축의 변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계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검증을 거쳐 이미 기각된 가설로 일축하고 있다. 현재의 기후 위기는 인류의 활동으로 인한 실제적이고 시급한 위협이라는 점에 대해, 97% 이상의 기후 과학자들이 동의하며 과학계의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br/><br/>현재 기후 변화를 위기로 보는 이유는, 그것이 폭염, 가뭄, 홍수의 빈도와 강수량을 증가시키고, 해수면을 상승케 하며, 식량 생산을 불안정하게 하고, 에너지와 물 부족을 악화시키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 “기저 리스크”이기 때문이다. 파괴된 생태계로 인해 기후 조절 기능은 저하되고 기후 위기가 심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br/><br/>위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응 방안으로 “기후공학”이 유력한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산화탄소를 직접 제거하는 방법(CDR)과 포집·저장하는 방법(CCUS)이 “넷 제로”[Net Zero, 배출하는 탄소량과 흡수하는 탄소량을 같게 만들어, 실질적인 탄소 배출량을 “0”(Ze- ro)으로 만드는 상태]를 향한 핵심적이고도 근본적인 해결 전략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미 2021년에 아이슬란드에서는 “오르카”(Orca)로 명명된 “직접공기포집”(DAC) 시설이 가동되어 연간 약 4,000톤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설은 현재 전 세계 15곳에서 운영되며, 연간 9,000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한편 기후공학자들은 이러한 흐름을 넘어 차세대 “탄소 포집·자원화 기술 혁신”에 주목하고 있으며, 고효율 포집 기술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2025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오마르 야기” 박사는 단 200g으로 약 20kg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할 수 있는 “COF-999”(공유결합 유기 구조체)를 개발했다. 이 신소재는 나무 한 그루가 1년간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에 상응하는 흡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 상용화를 위한 효율적인 제조 공정이 개발 중에 있다. 또한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와 연세대 공동 연구팀은 공액 유기 반도체 소재인 “페릴렌 비스이미드”의 분자 구조를 활용하여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는 “초분자 전선” 기술을 개발 중인데, 이 기술은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 같은 유용 물질로 전환하여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데 기여할 전망이다. <br/><br/>위와 다른 접근 방식도 있는데, 이산화탄소를 직접 감축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 지구로 유입되는 태양 복사 에너지를 감소시켜 지구 온도를 낮추는 “태양 복사 관리”(SRM) 방법이다. 1991년 발생한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 당시 방출된 2,000만 톤의 이산화황이 지구 평균 기온을 0.5℃ 하강시킨 사례에서 착안한 것으로, 지구의 성층권에 에어로졸(이산화황 등의 미세 입자)을 인위적으로 살포해 태양의 복사 에너지를 반사시키고 냉각 효과를 유도하는 것이다. 컴퓨터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연간 약 500만 톤의 에어로졸을 성층권에 살포할 경우 지구 평균 기온을 1-2℃ 정도 낮출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경제적 효율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데, 하버드대와 예일대 연구팀은 15년간의 프로그램 구축 비용을 약 35억 달러(5조 원 내외)로 추산한 바 있다. 이는 여타 기후 대응 기술과 비교할 때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기후 문제를 과학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과학계 내부에서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과학 기술이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낙관적 시각 또한 지배적이다. KIST 등의 주요 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기후 위기의 기술적인 해결 가능성에 대해 일반 시민은 43.4%가 긍정적으로 응답한 반면, 과학 기술 전문가는 73.5%나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특히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와 같은 글로벌 기술 기업가 및 혁신가들은 인류의 혁신 역량을 근거로 기후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br/><br/>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그토록 신뢰하는 과학 기술로는 환경오염을 비롯한 기후 문제를 결코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한 문제는 결국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기후 문제를 포함하여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면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오염이나 기후 변화 등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 곧 만물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늘은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행 3:21).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의 저주 아래 놓인 창조 세계가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때가 올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선 땅에 내려졌던 저주가 풀린다.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사라지고, 땅은 다시 비옥해질 것이다(사 51:3; 55:13). 사막 또한 변모한다. 메마른 광야와 사막에 시내가 흐르고 장미처럼 꽃이 피며, 저 옛날의 에덴동산과 같은 최적의 기후로 회복된다(사 35:1,2, 겔 36:34,35). 아울러 광명의 강도도 증가하는데, 달빛은 햇빛같이 밝아지고 햇빛은 현재보다 일곱 배 더 밝게 된다(사 30:26). 여기에 풍성한 수확이 예고되어 있으니, 땅의 소산이 크게 증가하여 파종과 수확이 연이을 정도로 풍요가 임하고, 기근과 배고픔이 사라지게 된다(암 9:13-15).<br/><br/>그뿐만 아니라 생물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동물들의 식성이 변하여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상태로 회복된다. 창조물들 간의 조화와 교감 또한 이루어지는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고,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쳐도 해를 입지 않는다(사 11:6-8). 그야말로 모든 창조물이 그 썩어짐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릴 영광스런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롬 8:21) 이와 같은 변혁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세대”(regeneration)라고 표현하셨다(마 19:28). 사도 바울이 “중생”(rege- neration)이라고 했던 것과 동일한 헬라어가 사용된 것이다(딛 3:5).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죽었던 영이 “되살아나는” 중생을 경험하듯이, 피조 세계 역시 물리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br/><br/>모든 창조물이 신음하면서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창조물들이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에 이르게 된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은 곧 다시 오셔서 영원히 통치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<br/><br/>그렇다면 만물이 회복되는 새 세대가 도래하는 시점은 언제일까?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보좌(눅 1:32), 곧 영광의 보좌(마 19:28)에 앉아 세상을 철장으로 다스리실(계 19:15) 때이다. 말하자면 모든 창조물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과학 기술의 진보가 아니다. 그들 모두가 간절한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인 것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런 일들을 증거하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시니라.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7,12,20). <br/><br/>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그 마지막 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세 번이나 약속하며 강조하고 있지만,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믿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현대 과학 기술을 더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 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안중에 두지 않지만 역사는 그들 뜻대로 흐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이야기”(his story)인 “역사”(history)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경에 예언된 대로 진행될 것이다. 하늘들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이제 곧 다시 오셔서(행 1:11)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과학”이라는 마음속 “우상”을 제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도록 하라!(암 4:12). BB [이번 호를 끝으로 「현대 기술 진단」은 종료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33:3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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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바른 성경”을 배격하는 자들의  “바른 교리” 허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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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최근 세계기독교이단대책협회(이하 세이협)가 “제8회 정기총회 및 이단 대응 세미나”를 주최했다. 11개국에서 모인 70여 명의 소위 “이단 전문가”라는 자들은 글로벌 이단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며 한 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실로 가관이다. 그들은 “1611년판 킹제임스성경만이 유일하게 완전무오한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사상은 정통 기독교 신학과 양립할 수 없는 이단 교리”라고 규정하며, 이를 전파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겠다는 적반하장격 입장을 표명했다. 나아가 그들은 이단 탈퇴자들의 입을 빌려 “성도들이 이단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체계적인 교리 교육의 부재 때문”이라면서 정통 교회의 바른 교리 교육이 절실함을 촉구했다.<br/><br/>그러나 우리는 이 거창하고도 가소로운 종교적 촌극 앞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 즉 “완전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함을 스스로 부정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잣대로 이단을 정죄하겠다는 것인가? 스스로도 완벽한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는 교단 교리들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도대체 무엇을 “바른 교리”라고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성경 보존”의 약속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이란 것인가?<br/><br/>자칭 “이단 전문가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성경을 부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이단이라는 점이다. 세이협은 &lt;킹제임스성경&gt;의 완전성을 믿는 순수한 믿음을 “이단 교리”로 매도했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요 1:1), 곧 예수님께서도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라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성경 보존”을 믿는 믿음이 이단이라는 것인가?<br/><br/>오늘날 우리 손에 펼쳐서 읽고 만질 수 있는 “오류 없는 완전한 말씀”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라져 버린 “최초의 원본”만이 무오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거짓말쟁이가 되시고 만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말씀 보존에 있어서 철저한 실패자이신 것이다.<br/><br/>성경 보존의 역사는 시리아 안티옥 계열의 “다수 본문”(표준 원문, Textus Receptus)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리겐 등에 의해 부패된 “소수 본문”(알렉산드리아 사본) 간의 치열한 영적 전쟁이다. 오늘날 소위 “정통”을 자처하는 교단들이 사용하는 현대 역본들은 바로 이 부패한 카톨릭계 사본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딤전 3:16, 요 9:35, 행 8:37)과 삼위일체(요일 5:7), 동정녀 탄생(사 7:14, 마 1:25), 구속 사역(마 9:13; 18:11, 요 1:29), 부활(욥 19:26, 벧전 3:18), 승천(눅 24:51), 보혈(골 1:14), 재림(요 18:36, 딛 2:13, 계 11:17) 등에 관한 결정적 구절들이 심각하게 변개되거나 13구절이 통째로 삭제되어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lt;킹제임스성경&gt;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는 성도들이 어떻게 이단이 될 수 있는가? 오히려 “이 땅에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절대 기준을 허물고 상대주의적 혼란을 부추기며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자들이야말로 치명적인 이단인 것이다.<br/><br/>절대 기준이 없는 “바른 교리”는 그들의 망상일 뿐이다. 세미나에서 “이단 전문가들”은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복음의 본질과 바른 교리를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이 점은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가를 보여 줄 뿐이다. “바른 교리”는 실로 그럴듯한 명분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바른 교리”는 대체 어떤 교리를 말하는 것일까? 전 세계 11개국에서 모였다는 이단 전문가들과 “정통”이라 불리는 교단들(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침례교 등)의 속을 들여다보라. 그들의 신학은 뼈대가 되는 구원론부터 정면으로 충돌한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비성경적인 예정론과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 따위를 진리라고 가르치지만,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자유의지를 인정하며 “행위 구원”과 “구원 상실 가능성”을 주장한다. 은사주의자들은 사도 시대 이후로 중단되어 버린 방언을 성령 세례의 표적으로서 제시하며, 사도들을 흉내 낸 거짓 치유의 은사를 자랑한다. 급기야 종말론에 이르면 전천년주의를 배격하는 무천년주의, 후천년주의가 뒤엉켜서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상호 충돌하는 교리들로 인해 자신들도 혼란스러우면서 어떻게 “바른 교리”를 운운할 수 있는가? 답이 여러 개라는 것은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옛 바빌론 종교가 기독교의 옷을 입고서 등장한 이교도 로마카톨릭이나 흉내 내면서 성경에 없는 유아 세례를 실행하고, 카톨릭을 따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자들에게 어떤 영적 분별력이 있겠는가? <br/><br/>신약교회사에서 가장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전염병자가 되어 세상에 있는 온 유대인 사이에 소요를 일으킨 자로서 나사렛 이단의 두목』(행 24:5)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이단자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서』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서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되리라는 소망을』 유대인들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듯이』 그도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었으며 『이 소망 때문에』 바울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쓰』고 있었는데(행 24:14-16), 이 “성경대로 믿는 이단자”가 지적했던 점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바로 그 당시 돈에 눈이 먼 자들로 인해 횡행하던 “성경 변개”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br/><br/>“정통”이라는 거대한 간판 뒤에 숨어 바른 성경에 대한 믿음을 이단이라고 조롱하는 자들은 스스로 영적 소경임을 만천하에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법이다(마 15:14). 그들은 누구도 바른 진리로 계도할 수 없다. 부패한 사본들에서 나온 변개된 성경과, 그로 인해 빚어진 인간의 혼란스러운 전통들과 교단 교리들을 버리고, 일곱 번 단련된 순수한 은과 같은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다. 그 완전한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서라! 다수가 모였다고 해서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바른 성경에서 나온 바른 교리를 통해서만 그 일이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26: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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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 교회의 낯부끄러운 “돈 문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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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종교 개혁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 설명하자면 아마 십수 가지도 넘게 그 요인들을 나열할 수 있을 테지만, 그 서사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요인은 단연 “돈 문제”일 것이다. 당시 로마카톨릭은 초호화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대대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독일 지역의 면죄부 판매 총책이었던 요한 테첼은 이런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져 짤랑이는 순간, (고통받고 있는 여러분의 가족들의)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솟구쳐 위로 올라간다.” 종교 개혁자들은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행 8:20) 그 가증스런 작태에 대항하여 “오직 성경으로!”를 외쳤던 사람들이었다. 로마카톨릭은 성경과 성경적 지식을 통제함으로써 면죄부 판매가 하나님의 뜻인 양 사람들을 속이려 들었으나, 종교 개혁자들이 이단 정죄나 순교를 불사하고 성경을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보급함으로써 로마카톨릭의 미혹을 깨부쉈던 것이었다.<br/><br/>“개신교회”는 그렇게 탄생했건만,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마틴 루터보다는 요한 테첼의 모습에 훨씬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교인들의 돈을 갈취하고,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하면 교권으로 찍어 누르거나, 교회를 분열시킨다며 적반하장식으로 정죄하고 나서는 꼴을 보노라면, 로마카톨릭이 주름잡던 중세 암흑시대가 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들의 “돈 문제”를 들춰내시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여기에는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으니, 버리고 떠나는 것이 유일한 답이다.”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보내시는 일종의 경보인지도 모른다.<br/><br/>지난날 발생했던 “돈 문제”의 실상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 최근 발생한 사례 하나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갈음하려 한다. 지난 4월, 뉴스앤조이는 ｢재정 공개 요구했다고...대형 로펌까지 선임해 교인 재판한 도림교회｣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사건의 당사자는 10년 넘게 해당 교회에 다녔던 집사로, 교회에 여러 가지 “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순진(?)하게도 이 사안의 정상화를 위해 담임목사를 직접 만나 편지를 전달했다. 헌금 집행 내역을 공개해 줄 것과, 어째서 기존에 250억 원으로 책정되었던 예배당 건축 공사비가 두 배 가까이 불어났는지를 설명해 달라는 것이 그 골자였다. 담임목사인 정명철 목사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에 그 편지는 모종의 경위로 교회 장로 10여 명에게 전달됐고, 교회의 “어르신들”(은퇴장로들)은 그를 허위 사실 유포, 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당회에 기소했다. 그가 날조된 사실을 유포하는 편지를 뿌렸다는 것이었다. 도림교회는 심지어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로펌에까지 이 사건을 의뢰하여 해당 집사를 압박했다.<br/><br/>이 사건은 그렇게 영등포노회로 넘어갔고, 노회는 “증거가 불충분한 의혹을 바탕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해 위임목사 명예를 훼손했고 장로 및 교인들을 선동·협박한 혐의가 인정된다.”면서 해당 집사를 노회 재판국에 회부했다. 피의자는 자신이 해외 출장 중이었기에 편지의 유포자가 될 수 없을뿐더러,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편지를 보낸 것이 징계 사유가 되느냐며 억울함을 토해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노회는 도림교회의 수뇌부와 한통속이었던 것이다. 정명철 목사는 도림교회 장로들이 한술 더 떠 그 집사를 세상 법정에 세워야 한다며 아우성이라고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밝혔다. 그는 설교단에서 건축비를 둘러싼 모든 잡음은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마귀의 거짓말이라면서, “(마귀는) 목사와 교인을, 교인과 교인을 이간질한다. 많은 한국 교회가 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br/><br/>위와 같이 교계 전체가 이파리부터 뿌리까지 “돈 문제”에 있어 낯부끄러운 행보를 보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인들의 수와 헌금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수많은 교회들이 “폐업”에 이른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그 인과관계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2026년 1월 발표한 “한국 교회 헌금 실태와 인식 조사”에서 교인들에게 헌금 감소의 이유를 물었을 때 응답자 중 14%가 헌금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 감소, 헌금 사용의 불투명성, 교회 및 목회자에 대한 실망(비도덕성, 교회 분쟁 등)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런 문제로 아예 교회를 이탈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임을 감안한다면 액면 그대로보다 훨씬 큰 숫자를 상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에게 질문했을 때 위와 같은 원인을 지목한 비율은 3.7%에 불과했다. 그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교인들의 열성이 식었거나 그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탓에 헌금이 적게 걷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br/><br/>그와 같은 현실 속에 교인들의 헌금에 대한 인식은 점차 “탈교회화”되고 있다. 교인들에게 헌금을 어디에 드려야 할지에 대해 물었을 때, “헌금은 반드시 출석 교회에 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은 52.1%에 불과했으며, 거기에 거의 필적하는 43.7%가 “선한 일에 사용한다면 교회 밖 단체에 해도 무방하다”고 답했다. 이는 한국 교계의 씁쓸한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교인들은 도대체 헌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종교심의 발로로 돈을 내는 한편, 교회들은 진리를 모르는 종교인들에게조차 그 매력을 잃고 있는 것이다.<br/><br/>혹자는 헌금 문제가 이 지경이 된 원인을 그들의 도덕적 부패에서 찾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뉴스앤조이에 글을 연재하는 어떤 작은 감리교회 목사는, 자신의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돈을 내라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명목 헌금과 절기 헌금을 폐지했다면서 그 “청렴성”을 뽐냈다. 그럼에도 그 교회는 딱 하나, “기후 위기 시대에 상징성이 있는 ‘탄소 헌금’은 별도로 구별”한다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 목사는 “헌금하느니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필자는 그를 포함한 이 나라 목사들에게 묻고 싶다. 교회들이 헌금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선한 일에 사용한다면 교회 밖 단체에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br/><br/>자, 종교 개혁자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자들이여,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성경은 교회가 『외부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딤전 3:7) 한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돈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아무에게도 비난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후 8:20,21). 그러려면 당연히 교회의 재정은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요 3:19-21, 엡 5:11-13). “암묵적인 규칙” 따위에 강요받는 일 없이 오직 자원함으로만 헌금이 드려져야 하며(고후 9:7), 그렇게 걷힌 돈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교회 정관에 “교인 3분의 2의 동의가 있어야 장부를 열람할 수 있다.”와 같은 문구를 집어넣어 (제도권 교회들은 “등록 교인”과 “출석 교인” 수가 현저히 차이나기에 교인 3분의 2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장부를 영원히 “어두움” 속으로 숨기려는 이 나라의 수많은 대형 교회들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한다.<br/><br/>헌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매주 첫날, 곧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지역 교회에 내는 것이 원칙이다(고전 16:1-3). 헌금은 그 사용처가 사역자들의 생계비(고전 9:11,14),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금(행 6:1) 등으로 정해져 있는 돈이기에 자선 단체에 내는 돈, 심지어는 기독교 단체에 내는 돈과도 성격이 아예 다른 돈이다. 헌금이 지역 교회의 사역과 무관하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사용된 사례는 성경에 단 한 건도 나오지 않는다. 사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된다』(갈 2:10)고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에게 한정되는 말이었다.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집단이기에(요 15:19) 세상에 줄 것이라고는 “책망”밖에 없다(요 16:8). 주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조차 하지 않으셨으므로(요 17:9), 스스로 그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본을 따라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소속된 지역 교회가 도저히 헌금을 낼만한 곳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교회 밖 단체에 헌금을 낼 게 아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딤전 6:5).<br/><br/>“돈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기본 중에 기본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면 다른 건 몰라도 그것으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한다(마 6:24). 육신적인 교회였던 고린도 교회 외에는 사도 바울로부터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을 받은 교회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쉬운” 문제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 했던 것이다! 이 나라의 개신교회들이 돈 문제로 골머리를 썩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들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롬 4:3)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잊었기 때문인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11: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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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부활절의 기적? 부활의 기적!</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5/%EB%B6%80%ED%99%9C%EC%A0%88%EC%9D%98-%EA%B8%B0%EC%A0%81-%EB%B6%80%ED%99%9C%EC%9D%98-%EA%B8%B0%EC%A0%81/</link>
<description><![CDATA[지난 4월 3일, 미군 F-15E 전투기가 이란군에 의해 격추되자, 긴박한 수색 작전 끝에 실종된 미군 장교를 “부활절 당일”(그레고리력 기준 4월 5일) 극적으로 구조했다. 이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그 구조 작전을 “부활절의 기적”이라면서 구조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한편 4년 넘게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은 “정교회의 부활절”(율리우스력 기준 4월 12일)을 맞아 현지 시간으로 4월 11일 오후 4시부터 12일 자정까지 약 32시간 동안 모든 교전 지역에서 적대 행위를 중단하는 데 합의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정교회 최대 명절인 부활절을 맞아 신자들이 평화롭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모든 전선에 공격 중단을 명령한 것인데, 이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호응하여 동의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현재 전 세계인들의 우려스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전쟁 당사국 수장들, 곧 국제법상으로 “침략국”(Aggressor State)에 해당하는 국가의 수장들이 공히 “부활절”을 언급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들은 과연 ‘부활’을 믿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부활의 기적’을 믿는 것일까?”<br/><br/>한국 교회는 지난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73개 교단이 “2026 한국 교회 부활절 연합예배”로 모였다. 언론에 따르면 “생명의 부활,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개최된 금번 예배의 대회사를 맡은 이영훈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요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면서 “한국 교회가 연합 예배를 통해 다시 하나 되고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이 나라와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뤄 가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br/><br/>이번 연합예배에는 이재명 대통령도 참석해 축사를 전했는데, 그는 “부활절 연합예배는 우리 사회에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온 자리다. 오늘날 우리는 전쟁과 경제 불안 등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부활의 의미인 평화와 사랑을 되새겨야 한다”면서 “요한복음 20:19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연대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므로, 분쟁이 아닌 평화를, 증오가 아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br/><br/>보다시피 이번 부활절의 특징은 세계 정치 지도자들이 부활절 혹은 부활에 관하여 무언가 한마디씩 거들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인류에게 미칠 긍정적 영향 정도는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교도 로마카톨릭의 부활절을 흉내 내어 연합예배를 드린 한국 교회 역시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든 아니든” 교회사적으로 끼친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적용하는 영역이 기껏해야 “한반도 평화”라는 점은, 그 신앙의 수준이 부활절을 지키려고 “휴전”을 선포한 러시아 대통령 정도밖에 안 되며,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가지고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한 이 나라 대통령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br/><br/>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지고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이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부활은 그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기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셔서(딤전 3:16) 죄인들에게 “고난”을 당하신 뒤 삼 일 만에 “부활”하신(마 16:21) 일은 인류 역사에 두 번 다시 없을 위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다시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일은 없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한 번의 속죄제를 영원히 드리신 후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히 10:1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말하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변화도 없고 세상의 평화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음의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진리로 돌이켜야 한다. <br/><br/>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의 “신성”을 증명한다. 로마서 1:3,4은 주님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말씀한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신 방식은 바로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능력”이라고 말씀하는데, 인류 역사상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는데,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하실 것이라고 친히 선언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일으키리라.”고 하시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성전 된 자기 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그후 주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더라』(요 2:19,21,22). 성경에는 부활한 사람들이 여럿 나오지만, 그들 모두는 다시 죽어야 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요일 5:20)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하여 다시 죽지 않으셨다. 주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했던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다 하여 죽이려 했는데(요 19:7),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주장 자체가 주님의 신성을 강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유대인들이 걸고넘어진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으로써 “하나님”이심을 자처했으니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한 죄가 되므로 율법에 따라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율법 준수에 철저했던(빌 3:5,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란 점은 경건의 신비이기에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다고 선언했다(딤전 3:16). 주님께서는 친히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셨다.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골 2:9) 『참 하나님』(요일 5:20)이심을 부활로서 입증하신 것이다.<br/><br/>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증명한다. 『그녀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보라, 한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마 1:20,2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와 달리 썩어질 남자의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이었다. 남자를 알지 못한 마리아가 처녀인 상태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께서 그녀를 초자연적으로 잉태시키셨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의 씨를 통해 나셨다면 요셉의 씨는 죄성을 유전시키는 “썩어질 씨”이기에 주님은 결코 부활하시지 못하고 여타 인간들처럼 사망과 썩어짐 가운데 계셔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사망에 매여 계실 수가 없었다! 다윗은 이와 같으신 주님에 관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예언하기를 『내가 주를 항상 내 앞에서 미리 뵈었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어 나로 요동치 못하게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 마음이 즐거워하였고 내 혀가 기뻐하였으며 또한 나의 육체도 소망 속에 안식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또 주의 거룩하신 분으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나에게 생명의 길들을 알게 해주셨으니 주께서 나를 주의 임재하심 속에서 기쁨으로 충만케 하시리로다.』(행 2:25-28)라고 했다. 『주의 거룩하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예언에 따라 “썩어짐을 보지 않고” 부활하셨다! 본래 씨가 없는 여자에게서 “여자의 씨”(창 3:15)로서 초자연적인 탄생을 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으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어도 죄가 없으셨기에(히 4:15) 썩어짐을 보지 않고 부활하셨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만일 요셉의 씨를 통해 나셨다면 결코 부활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br/><br/>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부활”을 보장한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관해 논쟁이 일어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못하셨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는 것이라.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한 것이라』(고전 15:13,17,18)라고 기록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쓰던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것이 전파되었음에도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고전 15:12).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 전체(총 58절)를 할애하여 “부활”에 관해 논증한 것인데,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처리되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에, 설령 우리가 그분을 믿고 죽는다 해도 결국 지옥에서 직접 죗값을 치러야 한다.”<br/><br/>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도 없는 것이다.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열매들이 되신 주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기에, “그분 안에서” 잠든 모든 성도들 또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 아닌가!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셨던 말씀, 곧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라는 말씀대로, “죽어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복음의 정수인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 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면 그때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1-54).<br/><br/>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이 보장하는 성경의 진리이다. 주님의 부활은 썩고, 수치스럽고, 약하고, 흙으로 만들어진 몸을 지닌 성도가 썩지 아니하고, 영광되고, 능력 있고, 하늘에서 나신 분과 똑같은 몸을 입고 부활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주님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살아 있을 성도들 또한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모되어(빌 3:21, 요일 3:2)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을 영원무궁토록 찬양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오, 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됨이라』(시 106:1).<br/><br/>“부활절의 기적”으로 자축하지 말라! “부활절 휴전”으로 의로운 척하지 말라! “부활절의 평화와 사랑”으로 부활을 오도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닌 의미에 무지한 채, 부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 드릴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왕들과 권세자들이 모두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딤전 2:2,4). “부활의 생명”이 “정치적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07: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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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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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은 예언의 책이다.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내다보는 인간적 예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이 담긴 절대적인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신 본성상 결코 거짓말하실 수 없으며(민 23:19), 그렇기에 그분의 예언은 인류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그 자체가 된다. 말하자면 성경은 “미리 기록된 역사책”인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인간의 예측은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빗나가 버리지만,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결코 무효화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한 번 내뱉으신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 마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뜻이자, 그분의 온전하신 성품에서 나온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br/><br/>성경은 약속이 있는 예언의 책답게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요한계시록 22장”에 주님께서 속히 오시겠다는 약속이 세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계 22:7,12,20). 그중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22:7)이다. 여기서 언급된 『이 책』은 일차적으로 “요한계시록”을 뜻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성경의 모든 기록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연결된 예언 체계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바로 그 말씀들을 믿고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 <br/><br/>성경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넘어, 우주의 역사를 관통하여 이루실 일들을 미리 말씀하고 기록하신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신 “인생의 지도”이자 “확실한 약속”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약 800여 개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죽음과 부활에 관한 300여 개의 예언은 이미 역사 속에서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지나온 모든 예언이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었다면, 아직 우리 앞에 남아 있는 500여 개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도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 말씀들을 소망하고 지키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자신의 생애를 일치시키며 사는 성도가 인생을 가장 현명하게 사는 것이다.<br/><br/>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님의 재림을 약속한 두 번째 말씀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주리라.』(계 22:12)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심판석』(고후 5:10)을 기다리는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환란 시대의 환란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오시는 이유 중 하나는 각 시대 성도들의 행한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 상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br/><br/>그러나 상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경기장에서 달리는 사람들이 모두 달릴지라도 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너희도 상을 얻게 되도록 달리라.』(고전 9:24)라고 말씀한다.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상을 얻기 위해 달린” 사람이지, 달리지도 않았는데 상을 주시지는 않는다. 한 가지 매우 이상한 일은, 성경에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주실 상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예 구원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 구원받았음에도 마귀에게 점유당하여 성경의 진리에 무관심한 것일 수도 있다. <br/><br/>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상을 받기 위해 달려야 하고, 누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야 한다. 이 심판석에서의 심판은 불로 태우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때 불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일한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지 불로 태워질 것이고, 불로 태워 봤을 때 『만일 어떤 사람의 일한 것이 세운 그대로 있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다(고전 3:14). 구원받았음에도 자기 멋대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휴거되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될 사람은 주님의 강한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성도를 바라보시며 그가 행한 일들의 질과 동기를 심판하실 것인데, 주님을 사랑하기에 섬기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섬겼거나 육신적인 방법으로 행한 사람은 그 일한 것이 불타 버려서 손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고전 3:15). <br/>주님께서 오시면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인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상을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것도 아니고 은유적인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상은 실제적이며 영광스럽고 고귀한 영예가 영원히 지속되는 상이다. 그 상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신실하게 달리는 성도만이 받을 수 있다. <br/><br/>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님의 재림을 약속한 세 번째 말씀은, 『이런 일들을 증거하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시니라.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이다. 여기서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약속은 주님께서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며, 이는 또한 왕국의 도래를 예고한 것이다.<br/>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그 초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지상 왕국에 맞춰져 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재림하시어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실 것이다. 『자기 때가 되면 주께서 나타나시리니 그분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딤전 6:15). 주님께서는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라고 약속하신 대로 이제 곧 재림하셔서 쓸모없는 것들을 심판하시고 전 세계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어 천년왕국 정부를 기반으로 하여 철장으로 통치하실 것이다. <br/><br/>(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민 23:19).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속히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br/>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이 재림을 믿지 않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현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에 평화를 이루려 하지만, “화평의 통치자”이신 주님 없이는 평화가 없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만이 폭력과 전쟁이 가득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실 유일한 분이시다.)<br/><br/>그러나 교회에 다닌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재림에 관한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아예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재림을 믿지 않는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자신도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주님께서 하신 마지막 약속을 믿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겠다고 난리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이는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라.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화평의 통치자』(사 9:6)이시기 때문이다.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실 분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 것이다.<br/><br/>주님께서는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요 12:48)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거부하고 그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받게 될 것이다(계 20:12).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멸시하고 성도들이 품고 있는 재림의 소망을 비웃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빛을 거부하고 계속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성취될 예언의 말씀 앞에 스스로 심판의 근거를 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br/><br/>그리스도인은 재림에 대한 약속을 믿고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화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성도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계 22:21)와 같은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주님의 은혜가 재림에 관한 예언을 믿고 그 예언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성도에게 풍성하게 임하는 것이다.<br/><br/>구원받은 성도가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잘하는 일이고, 그 예언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는 것은 더욱 잘하는 일이다.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려면 이 마지막 때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에게는, 다시 오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두려움이 아닌 가장 큰 위로와 기쁨이 될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8:02:0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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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의 눈으로 읽는 “이란의 최후”</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5/%EC%84%B1%EA%B2%BD%EC%9D%98-%EB%88%88%EC%9C%BC%EB%A1%9C-%EC%9D%BD%EB%8A%94-%EC%9D%B4%EB%9E%80%EC%9D%98-%EC%B5%9C%ED%9B%84/</link>
<description><![CDATA[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메데-페르시아”라는 표현을 접하게 된다. 독자는 인류 역사에 등장한 특정 국가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메데”는 무엇이고, “페르시아”는 무엇인가? 왜 둘을 합쳐서 부르는 것인가? <br/>“메데”(메디아)와 “페르시아”는 고대 근동의 패권을 다투며 현대 이란의 기틀을 마련한 두 핵심 세력이었다. “메데인”은 이란 고원에 정착한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부족들로서, 당시 서아시아의 맹주였던 앗시리아에 대항하며 세력을 키웠다. B.C. 7세기경 데이오케스에 의해 부족들이 통합되고, 수도 엑바타나[『악메다』(스 6:2), 이란의 “하마단”]를 중심으로 왕국이 형성되었다. “메데”의 키악사레스왕은 신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고 B.C. 612년에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함으로써 아시아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메데”는 당시 “페르시아 부족들”을 “속국”으로 거느릴 만큼 강력했으나, 체계적인 중앙집권 체제보다는 부족 연맹체 성격이 강했다.<br/><br/>“페르시아”는 원래 메데 남동쪽의 “안샨”이라는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부족 중 하나였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가문의 코레스 2세(코레스 대왕)는 메데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으나, B.C. 550년에 외조부를 꺾고 메데를 흡수했다. 코레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리디아(소아시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차례로 정복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를 건설했다. 이 코레스가 바로 바빌론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그 왕이다(대하 36:22,23, 스 1:1,2).<br/><br/>“메데-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두 나라가 단순한 정복 관계를 넘어, 하나의 제국 안에서 결합된 이중적인 구조를 지녔기에 붙여진 것이다. 즉 페르시아의 건국자 코레스왕은 그의 어머니(만다네)가 메데의 마지막 왕인 아스티아게스의 딸이었다. 코레스가 메데를 정복한 일은 단순한 타국의 침략이 아니라, (직계 혈통이 아닌) 방계 왕족이 본가의 왕위를 찬탈하거나 계승한 형태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로 인해 메데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페르시아는 메데를 정복한 후 메데를 피지배층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제국의 제2인자로 대우했다. 제국의 고위 관료나 군대 지휘관 자리에 페르시아인뿐 아니라 메데인들도 대거 기용했으며, 메데의 수도였던 엑바타나를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수도”로 사용했다. 성경은 바빌론을 멸망시킨 이들을 메데와 페르시아의 연합 세력으로 묘사하며(『페레스는 왕의 왕국[바빌론]이 나뉘어서 메데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 함이니이다』 - 단 5:28), 두 나라의 법도를 『메데인과 페르시아인의 법』(단 6:8)이라고 표현한다. “메데-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비록 페르시아가 메데를 정복했어도 그 시스템과 인력을 그대로 흡수하여 “메데의 유산을 이어받은 페르시아 제국”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br/><br/>성경에는 이 “메데-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대인과 관련하여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서 페르시아 왕들의 칙령을 통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일을 다룬다. 코레스왕은 바빌론을 정복한 후 유대인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고(스 1장), 다리오왕은 “성전 완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스 6장), 아탁세르세스왕은 서기관 에스라와 총독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성벽”을 재건하게 했다(스 7장, 느 2장). 두 책 뒤에 위치한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왕궁[『수산궁』(에 1:2)]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는데,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하만의 계략이 페르시아의 강력한 군주인 아하수에로왕의 왕비가 된 에스더를 통해서 무산된다. <br/><br/>오늘날 “이란”은 스스로를 “페르시아의 후예”로 여기며, 그 역사적 자부심이 국가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이란”이라는 국가의 “뿌리”가 바로 “페르시아”라는 것이다. 성경은 “제국들의 역사”와 관련하여 “페르시아”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후예”이자 “이스라엘의 숙적”인 “이란”이 미래에 맞이할 “최후”를 계시한다. “선지자 다니엘”은 바빌론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까지 생존했던 인물로서, 환상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과 패망을 예언했다. “다니엘서”는 이방 왕국들의 개요로부터 시작하여 그 세부적인 예언들을 계시해 나가는데, 거기에 “페르시아”가 수차례 언급된다.<br/><br/>1 다니엘 2장의 “느부캇넷살의 꿈”: 다니엘 2장은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형상을 통해 이방 왕국의 역사를 계시한다. 형상은 금으로 된 “머리,” 은으로 된 “가슴과 양팔,”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철로 된 “다리,” 철과 진흙으로 된 “발과 열 발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 머리는 “바빌론,” 은 가슴은 “메데-페르시아,” 놋 배는 “그리스,” 철 다리는 “로마 제국,” 철과 진흙이 섞인 “발과 열 발가락”은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가리킨다. “하나의 가슴”에서 나온 “양팔”과 같은 “메데-페르시아”는 금 머리인 “바빌론”에 이어 두 번째 왕국으로 계시되며, “금”보다 비중이 낮은 “은”으로 상징되기에 “바빌론보다 못한 다른 왕국”(단 2:39)으로 해석된다.<br/><br/>2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의 환상”: 다니엘 7장부터는 다니엘이 직접 본 환상이 언급된다. 즉 “네 짐승”을 통해 “네 왕국”을 계시하는데, “큰 바다”(지중해)에서 출현한(2,3절) 짐승들은 모두 “지중해”와 연관된 왕국들이다. 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고(4절), 둘째 짐승은 곰(5절), 셋째 짐승은 표범(6절), 넷째 짐승은 “두렵고 무서우며 힘이 매우 세고, 철로 된 큰 이빨을 가진 짐승”이다(7절). 이 짐승들은 다니엘 2장의 형상에 나타난 왕국들과 연결되는데, 이 환상이 바빌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왕”의 “원년”에 주어졌고(1절), 앞으로 『땅에서 일어날』(17절) 네 왕국이기 때문에 “바빌론”은 환상의 해석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네 짐승들은 다니엘 2장의 형상에서 “은 가슴”부터 시작되며, 그렇기에 “사자”는 “메데-페르시아,” “곰”은 “그리스,” “표범”은 “로마 제국,” “두렵고 무서운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왕국”에 적용된다. <br/><br/>다니엘 7장의 환상이 주어진 목적은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계시하는 데 있다. “적그리스도”는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입은 사자의 입 같기에(계 13:2) “표범”과 “곰”과 “사자”가 “복합된 짐승”이다. 이 “세 짐승”이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의 환상”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그 네 번째 짐승이 상징하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메데-페르시아”(사자)와 “그리스”(곰)와 “로마 제국”(표범)을 복합시켜 놓은 것과 같은 힘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관심사인 “메데-페르시아”와 관련하여 본다면,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사자”인 “메데-페르시아”처럼 온 세상을 집어삼켜 버릴 것이다. 앞선 “바빌론” 제국은 전성기 때의 영토가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고 볼 수 없다. “바빌론”은 앗시리아의 영토보다도 작았고, 바빌론 당대에도 동쪽과 북쪽에는 “메데 제국”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후 “메데-페르시아”로 통합된 이 제국은 동쪽으로는 인더스강까지 진출했고, 북쪽의 아르메니아 지방과 서쪽의 소아시아를 삼키고, 그리스 본토까지 침략했기 때문에 “사자”처럼 온 세상을 삼켰다고 할 만하다. 이 “메데-페르시아”의 속성을 지닌 “적그리스도의 왕국” 또한 세상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킬 것이다(계 6:2).<br/><br/>3 다니엘 8장의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 선지자 다니엘은 바빌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 치리 제삼년에, 바빌론 이후 “숫양”(메데-페르시아)이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환상을 보았다(단 8:1-4). 다니엘이 본 “두 뿔 가진 숫양”은 “메데-페르시아”를 상징하며, 나중에 나온 뿔이 더 길다는(단 8:3) 것은 “메데”보다 늦게 일어난 “페르시아”(코레스)가 더 강력해질 것을 의미한다. “숫양”이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하여 밀어붙여도” 막을 자가 없다는 점(단 8:4)은 “메데-페르시아”가 펼친 정복 활동의 엄청난 규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숫양”은 뒤에 등장한 “숫염소”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꺾이고 마는데(단 8:6,7), 이는 “페르시아”를 파죽지세로 공격하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막강한 위세를 예언한 것이다(단 8:20,21).<br/><br/>4 다니엘 10장의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 다니엘 10:13에는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가로막았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주님께서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하려고 오실 때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라 불리는 하늘의 영적 존재에게 방해를 받으신 것이다. 결국 “페르시아”를 통치하는 마귀의 방해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인 미카엘”(단 12:1)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고 다니엘에게 오셨는데, 다니엘에게 계시를 마치신 주님은 그 『페르시아의 통치자』와 싸우려고 다시 돌아가셨다(단 10:20). 이 점은 “이스라엘”과 “페르시아”(이란)의 싸움이 단순한 지상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주님과 마귀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임을 시사한다. <br/><br/>이제 위와 같은 “페르시아,” 곧 “이란”의 “최후”를 이야기할 차례이다. 현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있는 “이란”은 장차 어떤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 에스겔 38장에 보면 “천년왕국 끝”에 『메섹과 투발의 최고 통치자 곡』(3절)이 동맹군을 이끌고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오며, 이 동맹군 가운데 “페르시아”가 끼어 있다. 『그들과 함께한 페르시아와 에디오피아와 리비아인데 그들 모두는 방패와 투구로 갖추었고』(5절). 그들은 천년왕국 때에 『성벽이 없이 빗장이나 문도 없이 모두가 평안하고 안전하게 사는』(11절) 이스라엘을 향해 『폭풍같이』(9절), 『구름이 땅을 덮듯이』(16절) 공격해 올 것이지만,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것이다. 즉 이스라엘 땅에 큰 진동이 있어 산들과 절벽들과 모든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20절), 곡의 동맹군끼리 서로를 칠 것이며(21절), 그들에게 전염병과 피의 병이 돌 것이고(22절), 곡과 함께한 부대와 많은 백성들 위에 『범람한 비와 큰 우박과 불과 유황』(22절)이 쏟아지는 것이다! 이 일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예언된 “사탄의 최후의 반역”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이 그의 감옥에서 풀려나,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가서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일으키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하니,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더라』(계 20:7-9). <br/><br/>이란은 국제무대에서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통한다. 하지만 그들의 무력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심판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손대는 것과 같기 때문에(슼 2:8) 그 『사랑하시는 도성』을 공격해 온 “이란인들”은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의 불에 삼켜지고 말 것이다.<br/>한때 코레스의 칙령을 통해 유대 민족의 회복을 도왔던 “페르시아”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대적자로 변모한 사실은, 인류가 성경의 예고대로 종말을 향해 가고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지금 중동에서 요동치는 국제 정세는 하나님의 말씀의 궤적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마지막 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점은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이신가를 보여 주는데, 그분은 바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삼하 7:27)이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3: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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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모사드(MOSSAD):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방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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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나님의 예언의 시간표에 따라 1948년 기적적으로 독립한 이스라엘은, 영토가 대한민국의 약 5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사방이 적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좁은 영토로 인한 전략적 완충 지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적국의 대규모 선제공격을 받을 경우 치명적인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안보 전략의 핵심 개념으로 “선제적 정보 우위”를 내세우고 있다. 적국의 전쟁 준비 동향, 테러 계획, 무기 개발 현황 등을 사전에 파악하여 선제적 대응 전략을 수립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역할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br/><br/>이스라엘 정보기관의 모체는 1929년 창설되어 1948년까지 활동한 “샤이”(Shai)였다. 히브리어로 “선물”을 뜻하는 샤이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한 비밀 민병대 “하가나”(Haganah) 소속의 첩보 조직이었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이 첩보 조직은 여러 정보기관으로 재편된다. 국내 보안·방첩을 담당하는 “신베트”(Shin Bet), 군 정보기관이면서 국가정보판단 보고서를 작성하는 “아만”(Aman), 그리고 이스라엘 안보 관련 정보의 수집·분석과 해외 특수공작 및 대테러 활동을 수행하는 “모사드”(Mossad)가 그것이다. 모사드의 공식 명칭은 “정보 및 특수임무 연구소”(The Institute for Intelligence and Special Tasks)이다. 모사드는 1949년 12월 외무부 산하 정치국으로 출범했으나, 1951년 3월 조직 개편을 통해 총리 직속기관으로 격상된다. 아울러 모사드 부장이 국가최고정보위원회 의장을 겸임하며 다른 정보기관들의 조정 업무를 맡게 되면서, 모사드는 여타 정보기관보다 우위에 서서 강력한 해외 공작 능력을 갖추게 된다.<br/><br/>모사드의 정확한 실체는 외부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1990년대에 전직 모사드 요원 “빅터 오스트로브스키”(Victor Ostrovsky)가 그의 저서 &lt;기만의 방식으로, By Way of Deception&gt;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모사드는 크게 작전 담당 부서와 지원 담당 부서로 나뉜다. 작전 부서는 수집국, 정치활동연락국, 심리전국 등으로 구성된다. 수집국은 해외 첩보를 수집하고, 정치활동연락국은 우호국 정보기관과의 협력 및 외교 관계가 없는 국가들과의 접촉·연락 업무를 담당한다. 심리전국은 심리전, 선전, 기만 작전을 맡는다. 주요 작전 부서로는 차프리림(Tzafririm), 네비오트(Neviot), 링(Ring), 테벨(Tevel), 야할로민(Yahalomin), 메차다(Metsada) 등이 있다. 차프리림은 전 세계 유대인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네비오트는 도청·해킹 등 기술적 정보 수집을 전문으로 담당한다. 링과 테벨은 각각 경제 분야 정보 파악과 외국 정보기관과의 협력 업무를 맡는다. 야할로민은 특별통신 부서로, 적대국에서 활동하는 첩자들과의 통신을 담당한다. 메차다는 모사드의 핵심 부서로, 암살과 비밀 파괴 공작, 준군사적 활동 등 비밀 공작을 수행하며, 그 산하에는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키돈(Kidon)이 있다. 지원 부서로는 기술국, 요원훈련국, 행정지원국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br/>모사드 본부는 텔아비브(Tel Aviv)에 위치하며, 미국 CIA는 모사드 요원이 약 7,000명, 연간 예산은 27억 3천만 달러(약 3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방의 적들로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을 생존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br/><br/>모사드는 수많은 굵직한 작전으로 그 존재감을 세계에 알려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60년 아르헨티나에 은신해 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했던 작전을 꼽을 수 있다. 1972년 9월 5일에는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 “검은 9월단” 소속 테러리스트 8명이 난입하여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진압 과정에서 테러리스트 5명이 사살되고 3명이 체포되었는데, 이후 모사드는 “하나님의 분노”(Wrath of God)라 명명된 보복 작전을 통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하나씩 추적·암살하였다. 1981년에는 이라크 핵 시설 타격 작전인 “오페라 작전”(바빌론 작전)에서 핵 개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시설의 위치와 구조를 파악하여 공군의 정밀 타격을 가능하게 했다. 1980-90년대에는 “모세 작전”과 “솔로몬 작전”을 통해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던 수만 명의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br/><br/>2000년대 이후에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견제하는 데 집중하여, 이란 혁명수비대 미사일 담당인 “하산 테라니 모가담” 장군 암살(2011년), 이란 핵 관련 문서 대량 탈취(2018년), 수석 핵무기 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에 대한 원격 조종 기관총 암살(2020년) 등 일련의 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미국이 “장대한 분노”(Epic Fury)라 명명한 금년 2월 28일의 이란 공습과 하메네이 제거 작전에서 모사드가 결정적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높은 위상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그간 미국은 이란과 핵 협상을 이어왔지만, 하메네이 체제 아래 이란은 지속적으로 핵농축 능력을 강화해 왔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란이 중동 내 미군 기지에 대한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선제 타격을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공격이 시작될 경우 하메네이가 즉시 지하 벙커로 피신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때 모사드는 하메네이가 테헤란의 특정 장소에서 회의를 가질 것이라는 정보를 복수의 경로를 통해 확인했고 이를 미국 측에 전달해 공습 날짜가 결정된 것이다. 모사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이란의 교통 카메라를 해킹하여 영상 정보를 축적해 왔으며, 이를 통해 해당 시각 하메네이의 위치를 복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아가 공습 직전에는 하메네이 집무실 인근의 이동통신 기지국 12개를 교란함으로써 경호원들이 외부로부터 공격 경보를 수신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br/><br/>그러나 모사드의 작전이 항상 성공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1973년에는 민간인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로 오인하여 암살한 “릴레함메르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해 “욤키푸르 전쟁”에서는 정보 판단의 실패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 공격을 허용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하마스의 정치 지도자 “칼레드 메살”에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작전 직후 요원들이 체포되어 외교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은 해독제를 제공하고 수감 중이던 하마스 창시자 “셰이크 야신”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요원들을 돌려받아야 했다. 2010년에는 하마스 고위 지휘관 “마흐무드 알 마브후흐”를 두바이의 한 호텔에서 암살했지만, 요원들의 모습이 CCTV에 고스란히 포착되어 여권 도용 문제까지 불거지게 되면서 국제적 논란과 외교적 갈등을 초래했다.<br/><br/>위와 같은 실패 사례들은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 준다. 즉 선제적 정보 우위를 앞세운 세계 최고 정보기관 모사드라 해도, 그들은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 오류와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모사드의 로고에는 잠언 11:14 말씀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라고 변개된 개역개정판을 인용하며, 마치 모사드의 “지략”이 곧 국가의 방패가 되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평안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처럼 오용하고 있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세계 최고 정보기관이라 해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에 보존된 본래의 말씀은 『의논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나, 의논자가 많으면 안전하니라.』이다. 진정한 “의논”(counsel)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 곧 참된 “의논자” (counsellor)는 “상담자”(Counsellor)이신 주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사 9:6). 이 구절의 하나님은 바로 2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지금 이 순간, 진정한 “상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예언의 시간표에 따라 이스라엘은 결국 “다니엘의 70째 주”(단 9:24)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대환란”이라는 전무후무한 “고난의 때”(단 12:1)를 통과하게 된다.<br/><br/>그 고난은 그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당한 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극심할 것이다. 그때 모사드는 이스라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주 하나님만이 진정한 방패가 되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하도다. 오 주에 의해 구원받은 백성이여, 누가 너와 같으리요, 그분은 네 도움의 방패시며 네 탁월함의 칼이시로다! 네 원수들이 네게 거짓말쟁이로 드러날 것이요, 너는 그들의 높은 곳들을 밟으리라』(신 33:29). 『내 반석의 하나님, 그분을 내가 신뢰하리라. 그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며,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주시라. 주께서 나를 폭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나이다』(삼하 22:3). 이 방패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패”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위기 때마다 보이지 않으시는 방패로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책 전체에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이방 땅에 흩어져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의로운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셨다. 사탄의 예표인 하만이 유대인을 멸절하려 했으나, 그들의 방패이신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내셨던 것이다.<br/><br/>대환란의 때가 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토록 의지해 온 “지략”을 등에 업고 등장하는 사악한 지략가(나 1:11), 곧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그와 평화조약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망과 더불어 맺은 너희의 언약이 무효화되며 지옥과 한 너희의 합의가 서지 못하리니 넘치는 재앙이 지나가면 너희가 그것에 짓밟힘을 당하리라』(사 28:18). 말하자면 적그리스도는 7년 대환란 기간의 중반에 그 평화조약을 파기하고 이스라엘을 극심하게 박해할 것이다(단 9:27). 그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그들의 방패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피난처인 반석으로 숨어들 것이다(시 94:22). 환란의 때에 바위 성읍, 곧 셀라 페트라로 피신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이스라엘이 위와 같은 진리를 알지 못한 채 모사드를 운용하며 중동 정세에 대응하는 현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지략으로 현실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몸부림에 불과하다. 진정한 승리는 최첨단 첩보 기술이나 치밀한 전략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보이지 않는 방패”는 그 민족을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신 7:9)이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2: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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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밀월”에서 “증오”로 변한 이스라엘 - 이란 관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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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미국-이란 전쟁”이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반세기쯤 전만 해도 이스라엘과 이란은 “우방”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돈독한 관계였다. 이란은 이슬람권 국가들 가운데서는 터키 다음으로 빠르게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1950), 수도 테헤란 한복판에 이스라엘 “대사관”을(주변국 눈치 때문에 곧이곧대로 “대사관”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만) 뒀던 나라였다. 경제적 협력도 활발하여 많은 이스라엘 사업체가 이란에서 성업했고, 기술자들은 이란의 인프라 구축을 도왔다.<br/><br/>이스라엘과 이란, 이 둘 사이에는 심지어 군사적인 협력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란에 무기를 수출했고, 양국은 각자의 장점인 “군사 기술”과 “오일 머니”의 시너지를 통해 첨단 탄도미사일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1973) 당시 아랍 국가들이 석유 수출 중단 조치를 통해 이스라엘을 말려 죽이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의 탱크와 전투기가 멈춰 서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란의 석유 덕분이었다.<br/><br/>양국 간의 좋은 관계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우선 건국(1948)과 동시에 국경을 둘러싼 아랍 국가들로부터 존립을 위협받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그 밖의 국가들과 손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국부(國父)인 벤구리온 총리는 이를 “주변부 동맹”(Alliance of the Peri- phery)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했다. 아랍 국가들의 포위망 너머 반대편에서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 이란, 에티오피아 등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하는 외교 전략으로, 쉽게 말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것이었다.<br/>아랍 민족주의 색채를 띤 국가들을 견제해야 했던 이란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이 내민 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덧붙이자면 이란은 아랍 국가가 아니다. “아랍 국가”란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이 다수인 국가를 말하는데, 이란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페르시아인”이 과반 이상이다.) 물론 다른 “이슬람 형제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티를 내는 것만 자제하면 그들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랍 국가들로서는 확실한 명분도 없는데 “주적” 이스라엘을 뒤에 두고 이란을 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br/><br/>둘 사이의 “물밑 협력” 관계는 쿠데타(1953)를 통해 본래 입헌 군주국이었던 이란을 절대 왕정 체제로 바꿔 놓은 이란의 “샤”(페르시아어로 “왕”을 뜻함),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치세에서 한층 깊어졌다. 쿠데타의 발단은 민족주의자 총리 모사데그가 본래는 이란에 들어온 영국계 회사가 운영하고 있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는 “반(反)제국주의적” 정책을 폈던 데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책에는 자유세계의 강력한 보복성 제재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고, 석유가 있어도 팔 수가 없게 되자 이란의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이때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샤에게 접촉하여 쿠데타를 종용했다. 혹 총리가 소련과 결탁하여 문제를 타개하려 들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샤는 처음엔 이를 거절했으나, 여론의 악화를 견디다 못한 총리가 급기야 비상대권을 선언하면서 샤의 권한까지 빼앗으려 들자 동의의 뜻을 전했다.<br/><br/>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샤는 이후로도 철저한 친미노선을 걸으며 권력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는 이윽고 “백색 혁명”(1963)이라는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문맹 퇴치, 사회 기반 시설 구축과 같은 복지의 영역으로부터 여성의 참정권 부여, 국영 기업의 민간 매각, 토지 개혁 등의 굵직한 정치, 경제적 영역까지를 아우르는 대개혁이었다. 이 개혁의 산물은 사람들이 흔히 회자하듯 “테헤란 도심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오픈카를 몰던” 자유롭고도 풍요로운 이란이었다(물론 이것은 6,70년대의 이란이다). 석유 매장량만 해도 세계 3,4위를 다툴 정도로 엄청난 자원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미국의 호감을 살 만한 일만 골라서 했으니, 당시 국제 정세상 그와 같은 눈부신 발전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br/><br/>“백색 혁명”은 단순한 근대화 혁명이 아니라, 이란의 근간을 뒤흔들겠다는 샤의 원대한 포석이기도 했다. 샤가 꿈꿨던 이란은 성직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후진적 사회에 머무르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었다. 그는 그 옛날 코레스 대왕 치세에서 중동 전체를 호령했던 “세속 왕정” 페르시아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백색 혁명”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토지 개혁이나 교육 정책 등은 바로 그 영역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던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그것을 빼앗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실제로 샤는 “이슬람교가 아닌 페르시아 제국이 바로 이란의 뿌리”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하고자 하는 작업을 착착 수행해 나갔다. 이란에서는 옛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로 세계의 정상들을 초대하여 제국 건국 2,5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고(1971), 수백 년간 사용해 오던 달력 체계인 “이슬람력”(마호메트의 메카 성지순례 기준)이 폐지되고 코레스의 즉위를 기점으로 하는 “제국력”이 도입되기도 했다(1976).<br/><br/>바로 이때, 서두에서 본 것과 같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밀월 관계”는 “큰형님” 미국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절정에 달했다. 이란이 이슬람교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회귀하려 했을 때 이스라엘과 가까워지고 또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은 성경을 아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셨던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12:3)라는 약속이 이스라엘에게 계승되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샤의 “백색 혁명”은 이란 입장에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첩경이었음이 분명하다.<br/><br/>그러나 이란의 종교계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빠른 경제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빈곤층, 그리고 민주적 공화정을 열망하던 지식인층과 연대하여 샤를 압박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아야톨라”(이슬람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 권한이 있는 시아파의 최고위급 성직자를 부르는 칭호) 루홀라 호메이니는 쿰의 한 신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이 정권은 이슬람 그 자체와 종교적 가르침의 존재를 대적합니다. [이 정권과 밀월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은 이 나라에 코란이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와 여러분, 그리고 국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의 경제를 장악하고, 무역과 농업을 파괴하고, 여러분의 재산을 빼앗기를 원합니다... 가난에 찌든 우리 국민들의 고생으로 만들어진 부를 외국의 은행들에 채워 넣은 이 정부, 하늘 높이 솟은 궁전을 세우면서도 국민들을 평안하게 해 주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의 자원을 가지고 그들과 이스라엘의 호주머니를 채우려 합니다. 참으로 기생충과 같은 자들이 아닙니까?”<br/><br/>샤를 폭군이자 기생충으로 묘사한 이 연설을 계기로 호메이니는 체포되었고, 이는 대규모 반정부 폭동으로 이어졌다(1963). 호메이니는 추방을 면치 못하고 터키와 이라크 등 타국을 전전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오히려 나날이 커져만 갔다.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여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 보려 들었으나,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되어 밀수된 호메이니의 메시지는 이란 전역에 있는 수만 개의 모스크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결국 우리가 군사 정권 시절에 겪었던 것과 유사한 격동의 과정 끝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고,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돌아와 이슬람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이란 이슬람 혁명”(1979)이 성공한 것이다. 민주 공화정이 세워질 줄 알고 혁명에 가담했던 지식인층은 뒤늦게 자신들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지만,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 침묵, 혹은 망명뿐이었다.<br/><br/>호메이니 체제 아래에서 공식 국호를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정한 이란은 서구 사회로부터 온 모든 문화적, 경제적 영향을 몰아냈고, 그간 자신들을 약탈해 왔던 “작은 사탄,”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을 국가적 과제로 삼았다(“큰 사탄”은 미국이다). “코란대로 믿는 사람들”인 그들이 이스라엘을 향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너희는 신자들을 향해 가장 맹렬한 원한을 가진 자들은 유대인과 다신교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lt;코란&gt; 5:82).<br/><br/>그러나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이란의 뜻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대부분 수니파인 주변의 아랍국 역시 시아파의 맹주로 부상한 이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의 존재는 여전히 세속 왕조의 통치가 이어지던 국가들에게 상당한 부담이기도 했다.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면 자국에서도 똑같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아랍의 왕조들은 이란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br/><br/>이와 같은 상황에서 호메이니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란 최고 지도자가 된 알리 하메네이(1989)가 선택했던 전략은 “대리전”이었다. 이란은 80년대 초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창설에 깊이 관여한 이후로,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예멘의 후티 반군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대리할 무장 세력들을 키워 내어 “시아파 벨트”를 형성했다. 90년대 초에는 종파가 다를지라도 반(反)이스라엘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하마스도 이 “연합”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목숨을 건 테러 행위도 불사할 이 광신도들에게 전폭적으로 자금과 무기를 대줌으로써, 이란은 앙숙인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등의 수니파 패권국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갖추는 한편,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최근 이스라엘이 미국과 공조하여 하메네이를 포함한 이란 수뇌부를 폭사시킨 배경에는 이와 같이 수십 년간에 걸쳐 형성된 깊은 원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br/><br/>『그가 거친 사람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대적할 것이요,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대적할 것이라.』(창 16:12)라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이스마엘의 씨”(아랍인)라면 몰라도,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른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인들은 “투쟁적인 역사”에 휘말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이 아랍인들과 “같은 생각”(이슬람교)을 공유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들이 입으로 떠드는 것처럼 진정한 “평화”를 그 땅에 가져오고 싶거든,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 관계를 정상화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이란이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 막장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지금 예언의 시간표가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고 있고, “온 세상”이 적그리스도를 따르며(계 13:3) 이스라엘을 짓밟을(계 11:2) “대환란”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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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2:1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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