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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한국 교계 비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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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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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순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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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1961년, 예루살렘의 한 법정에서는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 현장으로 실어 나른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피에 굶주린 괴물이거나 광기에 찬 악마의 모습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법정에 선 그는 너무나 평범하고, 오히려 온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중년 신사의 모습이었다. 재판 내내 그의 변론은 한결같았다. 자신은 단 한 명도 직접 죽이지 않았으며, 국가의 명령에 따라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므로 그 모든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한다는 사실보다는, 국가의 명령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br/><br/>이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했던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국가의 명령과 관료 조직의 규칙을 양심적 판단보다 앞세웠고, 피해자의 처지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에 동참하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한다고 생각했을 뿐, 악한 일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br/><br/>『사람의 모든 행위가 자신의 눈에는 깨끗하나, 주께서는 그 영들을 달아보시느니라』(잠 16:2). 『사람의 모든 행위가 자신의 눈에는 옳으나, 주께서는 마음들을 감찰하시느니라』(잠 21:2). 사람이 자기 눈에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에는 예외가 없다.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은 히틀러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 밑에서 유대인 학살에 동참한 아이히만도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했다. 재판관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의 죄에 빠졌던 것도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였다(판 17:6; 21:25).<br/><br/>사람들은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들을 달아보시고, 마음들을 감찰하신다(잠 21:2).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감춰진 동기를 보시는 것이다. 여름수련회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참석하려고 기도하며 애썼으나 여러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사람과, 처음부터 갈 마음이 없어서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결과만 놓고 보면 같지만, 『마음들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둘을 다르게 판단하신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 자신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라고 명령하시는데(히 10:25), 충분히 참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참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변질』시키는 것과 같다(렘 23:36).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사람과(고후 2:17), 주어진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br/><br/>“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착각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이슬람 폭탄테러범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인 로마카톨릭도, 성경을 변개시키는 자들도,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지역 교회를 비난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도,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선함을 선언』하고 있다(잠 20:6). 그러나 성경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한다(롬 3:12).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땅 위에 한 명도 없느니라』(전 7:20). 이것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이다.<br/><br/>사람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옳은 것을 행하려고 하는 악한 본성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에게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울은 짐승들과 아말렉인들의 왕 아각을 살려 두고도 『내가 주의 계명을 이행하였나이다.』(삼상 15:13)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분히 이행했다고 스스로 판단했고, 살려서 가지고 온 짐승은 제물로 바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울의 죄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이행하지 못한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다. 아이히만이 국가의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었다면, 사울은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여 바꾸었다. 방향은 다르지만, 둘 다 자신의 행위가 왜 잘못됐는지 알지 못했고, 오히려 옳은 일을 했다고 착각했다.<br/><br/>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말리기 시작했다(마 16:22).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이 되는도다. 이는 네가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들을 생각함이라.』(마 16:23)라고 책망하셨다. 베드로는 아이히만처럼 생각하기를 멈추지도, 사울처럼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스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과 의도로 행동했다. 베드로는 십자가 사건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주님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해서 그 일이 옳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마음속에 주를 배반할 생각을 넣은 것처럼(요 13:2) 마귀가 넣어 준 생각일 수도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일 수도 있다(막 7:21). 선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어서 구별이 어려울 뿐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옳다”는 기준마저 마음대로 바꾼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빛 대신 어두움을, 어두움 대신에 빛을 두며, 단것 대신에 쓴 것을, 쓴 것 대신에 단 것을 두는 자들에게 화로다!』(사 5:20) 그러므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그 일이 옳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말렉을 완전히 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양들과 소들을 취하였』다고 말한다(삼상 15:21). 그러나 사무엘은 『거역함은 마법하는 죄와 같고 완고함은 행악과 우상 숭배와 같』다고 경고한다(삼상 15:23).<br/><br/>그렇다면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해야 하는데, 문제는 확신을 갖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확신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그러나 너는 네가 배운 것과 확신한 것에 꾸준히 거하라. 네가 누구에게서 배웠는가를 알며 또 어릴 때부터 네가 성경을 알았으니, 그 성경은 너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할 수 있느니라』(딤후 3:14,15). 디모데의 확신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 아니라, 그가 “배운 것,” 곧 “성경”에서 나온 확신이었다. 아이히만도, 디모데도 똑같이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자기 자신”에게, 디모데는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확신의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라면 그것은 아이히만의 확신과 다를 바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신만이 흔들리지 않는다.<br/><br/>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확신이 없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이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이 『너희로 기억나게 하여 너희의 순수한 생각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라고 밝혔다(벧후 3:1). 그리스도인의 생각도 세상의 가치관과 육신의 욕망에 영향을 받아 얼마든지 흐려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각이 날뛰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고후 10:5). 이를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순수한 생각을 일깨워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기(잠 30:5) 때문에, 사람의 생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맞닿아 있을 때에만 순수해질 수 있다.<br/><br/>그러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분별이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말씀이 나의 생각과 동기와 행동을 판단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기 때문이다(히 4:12).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더욱 말씀을 붙들고 다윗처럼 기도해야 한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생각들을 아소서』(시 139:23).<br/><br/>“나는 결코 악하지 않다”고 자신하지 말라. 선한 의도와 거리낌 없는 양심 뒤에도 자기 의와 완고함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말씀으로 생각을 일깨우고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라. 강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기꺼이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겸손이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완벽한 저울 위에 자신의 생각을 부지런히 올려놓음으로써,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Aug 2026 10:49:1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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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역자 품귀 현상에 시달리는 한국 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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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한국 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해묵은 이야기가 됐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탈종교화의 거대한 파도에 교인들이 쓸려 나가기 시작한 지도 벌써 십수 년이 흘렀다. 따라서 혹자는 근래 문제가 되는 “사역자 품귀 현상”도 같은 선상에 있는 진부한 주제로 치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간 터져 나왔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만일 교인 수와 사역자 수가 같은 비율로 줄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한국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사역자 지망생들이 그 꿈을 접는, 극단적인 붕괴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br/><br/>&lt;데일리굿뉴스&gt;는 “교역자를 구합니다”라는 제하의 3편의 기획기사를 통해 그 단면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서울 영등포의 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요즘은 교회마다 부교역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라고 푸념했다. 여러 창구를 통해 “전임사역자 구인 공고”를 냈지만, 그 교회에는 반년이 넘도록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경기 지역의 다른 목사도 “지원자가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상황”이라면서 현실을 전했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이하 목데연)에서 담임목사 500명을 대상으로 한 2023년 조사에 따르면, 최근 전임전도사나 부목사를 모집했을 때 지원자가 없었다고 응답한 비율은 무려 전체의 83%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현실 속에 사역을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역의 규모를 축소하는 풍경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br/><br/>그렇다면 도대체 사역자 수급난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전임)사역 현장의 “신참들”의 상황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초임 전임사역자들은 대부분 신학대학원생들이다. 신학대학교 졸업생 가운데 “더 나은 처우”를 위해 석사 이상의 학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주요 장로교단의 경우 대학원 졸업장이 없으면 아예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초임 전임사역자들은 필연적으로 학비 마련, 학업, 사역 수행 및 수련이라는 삼, 사중고에 직면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에게 부과되는 “사역”이란 주일학교나 각 부서별 예배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서류 처리, 건물 관리, 차량 운행 등 교회의 온갖 잡다한 업무로까지 그 범위가 무한히 확장된다.<br/><br/>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감당하다 보면, 당연하게도 “더 나은 처우”가 있는 자리로 올라가는 데 필요한 “이력”을 만들어내는 일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는 가운데 초임 사역자들은 기약 없이 현재의 잡역에 시달려야 한다는 절망스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대학원 재학 중인 사역자들의 업무를 조정해 주거나 연구에 필요한 시간을 보장해 주는 교회들도 있기는 하지만, 보통의 교회들에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안인섭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는 “그런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역지가 서울의 일부 시스템이 잘 갖춰진 교회에 집중돼 있다”면서, “좋은 교회에는 지원자가 몰리고 다른 교회는 교역자를 구하지 못하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자신의 진단을 &lt;데일리굿뉴스&gt;에 전했다. 이런 현실 앞에 “파트타임 사역자”에 머물면서 부수적인 수입원을 확보하는 쪽으로 선회하거나, 아예 진로를 바꾸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br/><br/>제도권의 “전문가”들은 교단 차원의 재정지원책 및 사례비 기준 마련, 군소 교회 사역을 의무화하는 목사 안수 조건 개정, 교회 간 합병, 인턴십 및 교육프로그램 운영, 평신도 사역자 기용 확대 등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식상한, 수박 겉핥기식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사태의 진정한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도 있듯, 제도권 공론장에서 늘 제기되던 방법으로 이 문제의 실마리를 찾으려 드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시도라 하겠다.<br/><br/>이 문제의 진짜 원인은 한국 교회의 사역자 수급 구조 자체에 있다. 말씀의 사역을 담당할 사역자는 원칙적으로 지역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급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크레테의 각 성읍에 목사들을 세우기 위해 멀리까지 “구인 공고”를 내라고 말하지 않았다. 디도는 목사가 될 형제를 크레테에서 찾아야 했다(딛 1:5-9). 선교 사역을 위해 먼 타지로 부르심을 받거나 다른 지역 교회로 부르심을 받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은가? 그런 경우라도 반드시 지역 교회에서의 부르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자기가 소속된 지역 교회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지체들을 세우는 사역에 부르심을 받지 못했던 사람에게 외지에 나가 무슨 일을 하라는 부르심이 주어진 경우는 없다.<br/><br/>따라서 사역자 수급 문제를 다루려면 초임 사역자들이 겪는 과중한 부담을 논하기 전에, 먼저 왜 각 지역 교회들에서 일꾼이 나오지 않는지를 짚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초임 사역자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사역 기피 혹은 이탈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에 가깝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을 필요한 만큼 배출하지 못한 교회들이 억지로 사람을 구해다가 두세 사람의 몫을 전가하는 까닭에 생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br/><br/>그렇다면 교회들은 왜 일꾼을 길러 내지 못하는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교회들이 복음을 전해 새로운 물고기를 낚아 오는 일(마 4:19)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데연에서 지난 2024년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전체 교회 출석자 대비 연간 5.8%가 새신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마저도 “수평이동자,” 즉 다른 교회에서 유입된 사람의 비율이 71%나 됐는데, 바꿔 말해 한국 교회 전체를 통틀어 진짜 새로운 얼굴은 연간 1.7%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수치는 교회들이 “서로의 어항에서 물고기를 빼내 가는” 데에만 몰두하고, 교회 밖의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여 교회로 예배드리러 오도록 하는 데에는 소홀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br/><br/>“물고기 유치전”의 패자일 수밖에 없는 중소형 교회들의 사정은 나날이 어려워져만 간다. 실제로 목데연이 올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교인 수가 29명 이하인 교회들 가운데는 헌금 액수가 줄어든 교회가 늘어난 교회보다 32% 더 많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인 수가 500명 이상인 교회들 가운데는 오히려 반대로 헌금 액수가 늘어난 교회가 줄어든 교회보다 22% 더 많았다. 이는 대형 교회로 “물고기들”이 대거 이동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지표다. 어느 교회나 본질을 상실한 마당에, 자본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오감을 만족시키는 데 특화된 대형 교회로의 쏠림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br/><br/>말하자면 앞서 기술한 상황이 전체 교회의 약 80%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소형 교회들(출석 교인 50명 미만)이 일꾼 품귀 현상에 시달리는 진짜 이유다. 새로운 “물고기”도 낚지 않고, 이미 “어항”에 있던 것마저 빠져나가는 판국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역자를 배출하겠는가? 따라서 이런 풍토를 만드는 데 일등공신인 지역 교회의 목사들은 사역을 도울 동역자가 구해지지 않는다고 푸념할 자격이 없다. 모든 것이 자업자득일 뿐이다.<br/><br/>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님께로 이겨온 다음, 그들을 양육하여 다른 죄인에게 또다시 복음을 전하고 양육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어디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신학교인가? 아니다. 그 일은 목회 현장에 맡겨졌다(딤후 2:2). 신학교의 교수들이 조금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에 가장 앞장서야 하는 것은 지역 교회의 목사다. (한국 교회에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신학 교수도, 목사도 없다.) 복음 전파와 양육의 직무를 목사들이 유기했을 때 벌어지는 일은 목회의 해체다. 본연의 임무를 상실한 그 교회를 하나님께서 흩어 버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없어져야 마땅한 그런 교회로 새로운 사역자를 부르실 리 만무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br/><br/>오늘날 사역자 수급난은 “부목사” 이하의 직급에 관한 이야기지만, 머지않아 “담임목사”의 수급도 어려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2024년 예장합동 총회에서는 2038년에는 절반에 달하는 교회가 담임목사조차 청빙하지 못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것은 바른 말씀을 거부한 교회들에게 닥칠 당연한 결말이다. 목사들이여, 교회를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그렇다면 바른 말씀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아, 복음 전파와 양육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바른 말씀과 진리의 지식으로 무장하여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만이 현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해결책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Aug 2026 09:40: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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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우주적 스케일”의 신약 시대 구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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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구원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 외에 행위를 추가하려는 종교인들이 교회들에 여전하다. 이 행위 구원의 문제는 교회가 휴거될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하늘로 휴거될 성도들과 대환란에 들어갈 교인들을 나누는 기준이 될 것이다.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하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 여전히 땅에 발붙이고 있을 부류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닌가?<br/><br/>“행위 구원”이라는 저주받을 이단 교리는 교회 내에 다양한 형태로 침투해 있다. 죄는 한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 모든 죄의 동기는 한 가지, 곧 “구원의 불완전성”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속 사역 안에서 안식하지 못하는 종교인들은 구원을 스스로 완성하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즉 『다 이루었다.』(요 19:30)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족하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초과돼서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미달돼서도 안 된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행 4:12). 이 점을 간과하며 흔들리던 교회가 바로 “골로새 교회”인데, 이 불안정한 교회에게 보내진 바울의 서신은, 구원이 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족한지, 우리에게 그 선명한 진리를 계시해 준다. <br/><br/>골로새 교회는 헬라 철학(골 2:8)과 율법주의(골 2:16), 금욕주의(골 2:21-23), 심지어 천사 숭배(골 2:18)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된 구원이 성도들의 마음 안에서 뒤흔들렸던 것인데, 사도 바울은 신비한 지식으로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는 “영지주의” 같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골 2:8)당하던 교회에게 『하나님과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신비의 지식』(골 2:2)을 제시하며 『그[그리스도]의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라고 일침을 가한다. 교회 내로 들어온 인문학 등 세상 학문과 철학, 이데올로기 같은 『세상의 유치한 원리』(골 2:8)는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죽었』기에(골 2:20), 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빌 3:8). <br/><br/>사도 바울이 “천사 숭배”로까지 타락해 가는 골로새 교회에 강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다. 그는 그에 관한 논증을 위해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기원”과 “창조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이는 만물이 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그는 만물 이전에 계시고 또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속하느니라』(골 1:16,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는 것들”(물질세계)과 “보이지 않는 것들”(영적 세계)의 창조주이시다. 보통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를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바울은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의 “보좌들과 주권들과 정사들과 권세들”까지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음을 선포한다.<br/><br/>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2장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정사”와 “권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다. 골로새 교회에는 “천사 숭배”(골 2:18)를 빌미로 그 영적 존재들에 대한 숭배가 조장되었으니,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들이 신약 교회 시대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조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골로새서 1장에 이어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나니 너희도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느니라』(골 2:9,10).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모든 영적 세력을 망라하는 우주적인 통치 질서를 보여 준다. 특히 『신격』이라는 단어가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데, 성경에서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신격』(롬 1:20)은 영어로 “Godhead”이다. 삼위일체 “하나님”(God)께서 만물의 “머리”(Head)로서 우주의 기원이시자 유일하신 통치자시라는 뜻으로, 『신격[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the head of all principality and power]』로서 표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즉 “머리”(head)라는 단어가 “신격”(Godhead)과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head)”에 동일하게 쓰임으로써 『신격』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적 존재들의 “머리”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너희도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느니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 바로 그 『신격』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br/><br/>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시기에 만물의 주인으로서 만물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고 계신다. “정사들과 권세들”을 포함한 만물은, 만물 이전부터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또 그분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골 1:16,17).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모든 영적 존재들의 “머리”(창조주이시자 유일하신 통치자)이시므로 그분 외에 다른 어떤 영적 존재들을 숭배하는 일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강조점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온전해진 성도들에게는 어떤 다른 중보자나 어떤 율법적 행위도 필요 없는 것이다. <br/><br/>또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4,15”에서 “정사와 권세”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제시한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또 그것을 그의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셨으며 정사들과 권세들을 벗겨 내어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장의 “10절”은 “모든” 정사와 권세를 언급한 반면, 이곳 “15절”은 그리스도께서 “벗겨 내신” 정사들과 권세들을 다루고 있다. “벗겨 내어 십자가로 이기신” 정사들과 권세들이라면 하나님께 적대적이고 타락한 사탄의 악한 정사들과 권세들임이 분명하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당하고 무장 해제된”(『벗겨 내어』) 패배자들로서 묘사되는데, 고대 로마에서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국의 왕과 장군들을 무장해제시키고(『벗겨 내어』) 로마 거리에서 패전 포로로서 조롱거리로 삼으며(『공개적으로 나타내시고』) 개선행진을 벌였던 데서 그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그것을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심으로써, 사탄의 세력이 우리를 합법적으로 고소하고 지배할 수 있었던 무기를 빼앗아 “무장해제”시켜 버리셨던 것이다. <br/><br/>정리하자면, “골로새서 2:9,10”은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다스리시는 ‘머리’로서 영적 세계에 군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과, 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온전함”을 강조한 것이고, “골로새서 2:14,15”은 “타락한 영적 세력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구속적 승리와, 그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악한 정사들과 권세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신약 시대의 구원은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함과 자유함”을 내포하고 있다. <br/><br/>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1,2장을 통해 못 박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사와 권세를 포함한 만물을 만드셨고(골 1:16), 만물을 그 “머리”로서 다스리고 계시며(골 2:10), 그중 타락한 자들을 십자가로 이기셨다(골 2:15)는 것, 즉 주님의 피조물인 정사들과 권세들 가운데 일부가 인류를 속박하고 타락시켰지만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반역한 세력들을 십자가에서 무장해제시키고 완벽하게 제압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들이나 영적 세력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을 숭배해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이단이 침투해 있던 골로새 교회에게, “너희가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영적 존재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며, 그들은 만물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를 괴롭히는 타락한 정사들과 권세들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끝장내셨다.”라며 영적 자유와 구원의 확신을 심어 준 것이다.<br/><br/>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골로새 교회의 문제를 다룬 서신은 사실상 온 우주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스케일을 품고 있다. 골로새서는 심지어 십자가를 통한 “만물의 회복”까지 언급한다(골 1:20). 그뿐이 아니다. 장차 만물을 회복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다”(골 1:27)고 언급한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다.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께서(골 1:16), 인류를 억압하고 옭아매던 악한 영들을 그분의 십자가로 끝장내시고(골 2:15), 내 생명의 머리가 되어 주시더니(골 2:19), 마침내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날, 나를 그 우주적인 영광의 한복판에 주인공으로 나란히 세우실 것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라』(골 3:4). 골로새 성도들이 겪었던 영적 위축감과 두려움은 지금의 교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그 모든 이들의 시야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린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더 해야 될 것처럼 조바심을 내며 두려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위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시켜서 “십자가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안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Aug 2026 09:39: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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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중보기도의 뜨거운 열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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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찰스 스펄전 목사가 손님들에게 자기 교회의 시설을 안내하던 적이 있었다. 스펄전 목사는 손님들을 데리고 교회 건물의 주요 부분을 모두 둘러본 후, 뜬금없이 “자, 이제 교회의 난방 장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손님들은 교회 건물의 난방 시설을 보여 준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그곳에 무슨 볼거리가 있겠는가 싶어 의아해하며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당도한 곳은 다름 아닌 사백 명의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방이었다. 그들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스펄전 목사는 자기 교회에서 가장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곳이 바로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행해지는 장소이며,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난방 시설임을 역설했던 것이다.<br/><br/>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주님과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제가 필수이다. 주님과의 교제는 말씀과 기도의 생활로 요약되는데, 성경의 말씀이 성도의 마음을 뜨겁게 함으로써 역사한다면(눅 24:32, 렘 20:9), 기도는 말씀을 통해 내면의 열정이 타오른 성도가 주님께 말함으로써 표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의 삶을 누리는 성도는 성경 공부와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열정”을 다하는 법이다. 그러한 성도들이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게 되면 지역 교회의 영적 열기는 계속 달아오르며 모든 사역을 열정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br/><br/>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기도 응답의 약속을 믿는다. 하지만 자신의 개별적인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자신의 기대와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악한 영적 세력의 방해와 반대에 직면하다 보면 기도를 지속하는 힘이 약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성도들 간의 “중보기도”이다. 중보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기도하는 것이다. 한 성도의 기도가 힘에 부칠 때 다른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그 역사하는 힘은 커지게 된다.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바로 이런 중보기도가 지역 교회의 영적인 열기를 뜨겁게 달구는 것이다.<br/><br/>성도 개개인의 승리하는 삶과 지역 교회 사역의 향방은 중보기도의 뜨거운 열기에 달려 있다. 그만큼 성도와 교회를 향한 마귀의 교묘한 공격과 반대가 거세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와 간구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와 교회를 위한 “중보기도”에도 열정을 다해야 한다.<br/><br/>그리스도인은 다른 지체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던 “에파프라”는 바울의 『전우』(빌 2:25)였고, “동료 죄수”(몬 1:23)로서 신실한 일꾼이었다. 그런 그의 진가는 다름 아닌 다른 성도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입증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종인 에파프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그는 항상 너희를 위하여 열렬히 기도하니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완전하고 온전하게 서도록 하기 위함이라』(골 4:12). 이런 에파프라가 사도 바울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 기도의 일꾼은 바울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신실한 일꾼으로 쓰임받았다(빌 2:25).<br/><br/>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다(고전 3:9). 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전임 사역자들이 사역의 일선에서 주님을 섬기지만, 사역은 절대로 목사나 사역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섬겨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빌 1:1)이며, 그들 모두가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되, 무엇보다 지역 교회와 일꾼들, 그리고 다른 성도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로 협력해야 한다. 교회의 목사나 집사, 신실한 소수의 일꾼들에게만 짐을 지우거나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자신은 뒤로 물러난 방관자가 되어선 안 된다. 현재 교회가 당면한 온갖 문제와 난관, 절실한 필요, 그리고 사역의 중요한 계획을 위해서 모든 성도가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br/><br/>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는 새 계명을 말씀한다. 성도는 자신의 필요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의 필요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필요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도록 기도할 때 충족된다(빌 4:19). 아직 영적으로 어리거나 혹은 자신의 삶에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중보기도”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들의 삶이 궁핍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영적으로 온전히 설 수 있게 된다. 신실한 일꾼인 에파프라처럼 우리도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그렇게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br/><br/>중보기도의 열정은 교회와 다른 지체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되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벧전 1:22). 여기서 “뜨겁게”라는 단어가 바로 “열렬히”와 같은 뜻이다. 말하자면 성도 간의 “뜨거운” 사랑이 중보기도의 불을 지피며, “열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은 또한 기도로 “분투”해야 한다. 바울은 종종 자신이 가르치고 양육한 성도들에게 기도에 힘쓰도록 부탁할 때 “분투”하라는 말로 표현했다. 『형제들아,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너희의 기도로 나와 함께 분투하되』(롬 15:30). 기도가 “분투”인 까닭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일들에 항상 마귀의 방해와 공격이 있기 때문이다.<br/><br/>마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파괴하려고 시도하며, 이를 위해 온갖 흉계를 꾸며 함정을 파놓거나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써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적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그분의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가 사탄의 계략을 모르지 않는다면(고후 2:11), 그것이 분쇄되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모든 성도의 몫이다. 하나님의 종이 경고하며 당부하는 바를 명심하고 다 함께 기도로 “분투”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경, 그리고 종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물리쳐 주시도록 성도 자신도 기도로 싸워야 한다!<br/><br/>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 아말렉과 전쟁을 치렀을 때, 여호수아가 군대 대장으로서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 싸우는 동안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 두 손을 들고 기도했다(출 17:10,11, 딤전 2:8). 즉 모세는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기도로 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구도였다. 그러나 모세 홀로 자기 손을 끝까지 들고 있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손이 무거워져 자칫 내려가려는 순간, 아론과 훌이 양옆에서 그의 손을 붙들어 주었다(출 17:12). 바로 이것이 “중보기도”의 한 예를 보여 준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중요한 요인은 바로 “기도”인데, 그 기도는 하나님의 종 한 사람만이 아니라 함께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중보할 때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결국 기도의 능력을 힘입은 여호수아는 칼날로 아말렉을 쳐부수었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뒀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 전쟁을 치를 때 “중보기도”로 “분투”해야 한다.<br/><br/>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은 단순히 성도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한 성도의 고통 혹은 영광이 모든 성도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고전 12:26,27). 교회의 운영과 하나님의 사역을 목사나 사역자들에게만 맡겨 놓고, 그들이 어련히 잘하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은 접어야 한다. 또한 다른 성도들의 고통과 문제를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방관해선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늘 주변 성도들과 자신이 속한 지역 교회의 영적, 현실적 필요에 민감하게 깨어서 늘 인내와 간구로 기도해야 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엡 6:18).<br/><br/>주님께서는 영적 전쟁에 효과 있는 기도로서 “중보기도”를 제시하신다. 그래서 지역 교회 안의 목자를 위시한 모든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지역 교회 안에 자주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간구하며 “중보기도”하는 성도가 많을수록 그 교회의 열기는 뜨거워진다. 그럴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위대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 일들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중보와 간구가 기대대로 즉시 응답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망하기는 이르다. 우리는 “인내”로 꾸준히 기도하고, 결과는 주님의 뜻에 맡겨 드리면 되기 때문이다. 결과를 예단할 필요 없이 그저 “열렬한” 기도와 중보로 우리 자신과 지역 교회의 열정을 뜨겁게 달구어야 한다. 그 기도의 무릎 위에 주님의 도우심과 역사가 임할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7 Jul 2026 08:19: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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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불멸”을 향한 인류의 헛된 노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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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건강과 장수”는 인류 전체의 관심사였으며, 운동이나 음식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장수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건강과 장수를 위한 평범한 노력을 넘어서 “불로불사”를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진시황(B.C. 259-210)을 들 수 있다. &lt;사기&gt;(史記)의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이 “서불”이라는 자를 바다로 보내 삼신산에 사는 신선들을 찾고, 그들에게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한 이야기가 실려 있기도 하다.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들은 “연금술”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마시면 늙지 않는 “엘릭서”(Elixir)라는 약을 찾거나 발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했다.<br/><br/>“불로초”나 “엘릭서”의 이야기를 “약학 지식이 부족하던 시대”의 “어리석은 시도”처럼 생각하던 시대도 있었으나, 인류는 결코 “불로불사”의 꿈을 접지 않았다. 오히려 약학 지식이 발전해 감에 따라 그 꿈을 더욱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에도 면역 억제제로 사용되는 “라파마이신”이라는 약물은 동물 실험을 통해 “수명 연장 효과”가 입증되어 연구가 지속되고 있으며, 당뇨병 치료제로 쓰이는 “메트포르민”이라는 약물도 “세포 내 대사 조절을 통한 노화 지연” 효과가 있는지 연구 중이다. <br/><br/>건강 보조 식품이나 화장품 등의 광고에서는 “노화 지연”(저속 노화)을 넘어 “노화 정지”나 “노화 역행”(역노화)과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며, 약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넘어, “유전자 조합 인자”를 주입함으로써 노화된 세포의 기억을 초기화하여 젊은 세포로 되돌리는 의학 기술도 여러 의학 기관에서 연구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세포 재설계”(Cellular Reprogramming)라 불리며, 이 유전자 조합 인자는 이 기술을 확립하여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이름을 따 “야마나카 인자”라 불린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2019년 미국의 위안청 라이언 루 박사가 쥐의 망막 신경 세포에 세포를 젊게 만드는 유전자를 주입하여 새로운 신경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했으며, 올해 2026년에 인체 임상 시험을 시작한다고 밝힌 바 있다.<br/><br/>인류가 이룩한 의학 기술을 이용해 “노화 역행”과 “불사”를 추구하는 대표적임 인물로는 “죽지 않기 프로젝트”(Don’t Die Project)로 유명한 미국의 백만장자 브라이언 존슨(49)이 있다. 그는 매년 30억 원을 투자하여 식단, 운동, 수면, 혈액 검사, 각종 영양제 등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자신의 신체 데이터를 매일 측정·분석하는 이른바 “바이오 해킹”을 계속해 왔다. 그의 목표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신체 나이를 18세로 되돌리고, 160세까지 사는 것이다. 그는 18세인 아들의 혈액에서 분리한 혈장을 자기 몸에 주입하고, 자기 피를 자기 아버지에게 수혈하는 등 3대 혈액 교환 실험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최근 “자가면역성 위염”에 걸렸다. 그는 헤모글로빈 등이 정상 수치라 빈혈이 아닌데도 지난 11년간 철분 수치가 낮았고, 식이요법과 영양제 등을 통해 철분 수치를 높이려 했지만 실패했는데, 이제야 그 원인을 밝혀 낸 것이다. 매년 30억 원을 쓰면서도, 생명과 건강을 주관하시는 분이 따로 계심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를 두려워하면 장수하려니와, 악인의 연수는 짧아지리라』(잠 10:27). 인간의 신체에 직접 영향을 주어 “역노화”를 이룩하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예 인공 신체를 만들어 대체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3D 바이오 프린팅 인공장기 기술”을 통해 팔다리뿐만 아니라, 뼈, 연골, 근육, 심장, 폐, 신장, 간, 위 등의 기능을 하는 인공 장기들을 만들려는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포스텍의 바이오프린팅 인공장기 응용기술센터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줄기세포융합연구센터가 인공장기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br/><br/>약학 및 의학 기술을 통해 “세포”를 젊게 만드는 방식이 아닌, “트랜스휴먼 기술”을 통해 건강과 불사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기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를 기계적인 신체로 전환함으로써 불사에 도달하려고 한다. 뇌신경과 연결하여 움직이는 기계 신체나, 뇌의 신호를 무선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기계 신체를 만들어 기존의 신체를 대체하고, 기능이 더 좋은 기계 장기를 제작하여 자연 신체를 대체함으로써 죽지 않는 몸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br/><br/>“트랜스휴먼 기술”을 개발하는 이들은 더 나아가 뇌에 삽입해서 작동할 수 있는 컴퓨터 칩을 제작하여, 뇌의 기억력과 신체 통제 능력 등을 향상시키고, 이를 인공 신체와 연결시켜 “슈퍼 인류”인 “트랜스휴먼”을 탄생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컴퓨터 칩의 도움을 받아 뇌 기능이 향상되어 더 똑똑한 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무선 자동 기기를 생각만으로도 작동시키고, 자연 신체보다 더 기능이 좋은 인공 신체를 통해 더 무거운 것을 들고, 더 정교한 작업을 하며, 더 많은 일을 하고도 피로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인공 신체로 계속 교체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br/><br/>“트랜스휴먼 기술”의 선두주자인 “뉴럴링크”는, 테슬라, 스페이스X, 보링 컴퍼니, xAI 홀딩스 등 다수의 첨단 기술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첨단 생명공학 기업으로, 초소형 인공지능 칩인 “뉴럴레이스”를 개발하고 인간의 뇌에 이식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신경계의 이상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재활을 도울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불멸하는 인류로서의 “트랜스휴먼”을 탄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br/><br/>세상이 과학 기술의 향상을 통한 “영원한 생명”을 헛되이 추구하고 있는 반면, 성경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비성경적인 “웰다잉”을 추구하고 있다. “기독교 웰다잉 학회”가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각당복지재단 신관에서 창립예배 및 사례발표회를 열었던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 삶을 완성하는 믿음”을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창립예배는 하도균 교수(서울신대 기독교 웰다잉 디렉터)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이명관 목사(진주성결교회)의 기도에 이어 황덕형 총장(서울신대)이 설교했다. 설교에서 황 총장은 “죽음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의 더 큰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소위 신학대학 총장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쓰임받지,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쓰임받을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또한 그는 “웰다잉은 죽음의 순간만을 준비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온 삶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돌아보게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은 “잠드는 것”에 불과하고(살전 4:13,14), “휴거” 이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각 그리스도인의 삶이 평가되고 정리되는 것이며(롬 14:10, 고후 5:10), 그 이후에 천년왕국에서 통치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딤후 2:12, 계 5:10; 20:4-6)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러한 허황된 설교를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노년의 삶은 낭만적으로 “잘 죽기 위해 정리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삶을 살다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가 아닌 황 총장은 이 진리를 모르기에 스스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내용을 설교라고 한 것이다.<br/><br/>한기채 이사장(서울신대)은 “죽음을 멀리하려는 일반 문화와 달리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천국 소망 안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돌봄을 넘어 천국 소망까지 품는 ‘토탈케어 미니스트리’가 바로 제 목회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목회의 본질”은 누군가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게 하는 데 있지 않다. 목사라면 복음을 전파해야 하며, 자기가 구령한 사람을 바른 말씀으로 양육하여 마귀들과 영적 전쟁을 치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재림을 대비하는 성도로서 성장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지 “토탈케어 미니스트리” 같은 것은 성경적인 목회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<br/><br/>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고(롬 3:23),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씀한다. 인류가 “영생”을 위해 노력하고 “웰다잉”을 추구한다 해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러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살후 1:8,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라고 말씀하셨다. “영생”을 얻고, 또 “잘 죽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 하늘 아래에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은 없다(행 4:12). 오직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을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롬 10:9).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7 Jul 2026 08:15: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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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불멸”을 향한 인류의 헛된 노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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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4 Jul 2026 15:37: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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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순교도, 정교분리도 모르는 교회들의 성명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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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일명 “종교법인 해산법”을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논란의 도화선이 된 것은 지난해 일부 종교 단체를 향해 제기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와, 이른바 “극우 목사”로 분류되는 인사들의 정치적 행보였다. 종교인들이 정치권에 불법 자금을 제공하고, 교인들을 동원해 당내 경선이나 공직선거에 개입하며 특정 후보 지지를 종용했다는 의혹은, 그렇지 않아도 종교계에 비판적이던 여론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br/><br/>이에 좌파 계열 최혁진 의원 등 11인은 지난 1월 민법 일부개정법률안, 곧 “종교법인 해산법” 또는 “정교유착 방지법”으로 불리는 이 법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도 신년 기자회견 자리에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선호가 결합해 버리면... 나라가 망합니다. 그래서 이건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돼요. 조직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제재가 엄정하다는 걸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여 줘야 합니다.”라며 정부도 같은 기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br/><br/>발의된 법안의 골자는 정부에서 어떤 (종교 단체가 세운) 법인이 “정교분리의 원칙 또는 공직선거법 등 관계 법령을 위반”했다고 판단하면 영장 없이 그 법인을 수사할 수 있도록 하고, 위법 행위가 발견되면 법인을 해산시켜 그 재산을 국고로 환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물론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국가가 종교 단체(교회)의 결성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대개 법인에 귀속된 형태로 관리되는 교회 소유의 부동산, 기독교 언론사, 출판사, 선교 단체, 복지 재단 등은 모두 사정권 안에 들어온다. 위정자의 죄에 대한 성경적 비판조차 정부가 “정치적”이라고 판단한다면 얼마든지 불이익을 가할 수 있기에, 이 법안은 “악법”이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br/><br/>자유 세계에 속한 국가들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이 같은 법안이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철회되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 국내 교계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종교법인 해산법 반대대책위원회”(이하 종반위)를 꾸려 지난 4월 성명서를 내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민대회를 열었다. 해외에서도 “160여 개국에 있는 약 6억 명의 복음주의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단체”인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이 지난 6월 대한민국 국회가 해당 법안을 재검토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런데 두 단체의 성명서의 요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곧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국가로부터 종교를 보호하기 위한 원칙이지, 국가가 종교 공동체를 감독하거나 징계하거나 제거할 권한을 부여하는 개념이 아니며”(WEA), 해당 원칙을 “종교 표현 억압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종반위)는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종반위의 성명서가 훨씬 노골적으로 한국 교회를 향해서는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침묵하지 말 것”을, 발의자인 최혁진 의원을 향해서는 “사퇴”를 요구했다는 점 정도였다.<br/><br/>두 단체의 성명서를 찾아보는 데 시간을 낭비할 것을 권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만일 찾아본다면 아마 쓴웃음을 금할 길이 없을 것이다. 두 단체 모두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만을 거론할 뿐, 성경에서는 단 한 구절의 말씀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무엇이 “성경”인지 규정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성경,” 즉 “영감으로 주어지고, 오류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대체 무엇인가? (WEA에서 자주 인용하는) NRSV인가, 아니면 개역개정판인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역본이나 원어 판본인가? 그들 가운데는 대답할 수 있는 자가 없다.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성경”과 동맹 관계에 있는 자들의 “성경”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요, 사실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그 책조차 “성경”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한국 교회” 혹은 “복음주의자”의 이름으로 나온 성명서에 성경이 전혀 인용되지 않은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br/><br/>“성경”을 가진 성도로서 한마디를 하자면,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사퇴하라느니, 법안을 재검토하라느니 요구할 권한이 성도에게 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설령 불의한 법이 제정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사도 바울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롬 13:1)라고 말했을 때, 또 사도 베드로가 『통치권을 무시』(벧후 2:10)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을 때, 로마의 황위를 차지하고 있던 이는 그 악명 높은 네로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두 사도는 네로에게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불의한 권력” 앞에서도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br/><br/>물론 그리스도인은 법정에서, 또는 공무 집행의 현장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요 18:23, 행 22:25; 25:8). 만일 어떤 정치인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가 행하려는 것이 죄라면, 그 죄에 대해 비판할 수도 있다(마 14:4, 행 13:10,11). 그러나 만일 권세 있는 자들이 우리의 법적인 권리와 성경적인 비판을 무시하고 부조리를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선택지는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저항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늘 같은 선택을 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로마가 제국 차원에서 초기 교회의 성도들을 박해했을 때도, 로마카톨릭과 유착한 세속 권력이 유아세례를 비롯한 비성경적 실행들을 법제화하여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을 박해했을 때도 모두 같은 일이 일어났다. 참된 “순교적 신앙”이란 바로 이런 대열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믿음이지, 종반위의 성명서에서처럼 목숨을 걸 각오로 권위에 저항하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br/><br/>교회사를 보면, 개신교단을 중심으로 결성된 국내외 종교 단체들이 미국 수정헌법 1조를 들먹이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방패로 삼으려 하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미국식 정교분리”는 침례교도들, 즉 기성 개신교단에 속하지 않아 개신교도들이 결성한 식민지 정부에 의해 탄압받던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의 피로 얻어진 원칙이기 때문이다. 반면 개신교도들에 의해 생겨난 “유럽식 정교분리”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난 종교 전쟁들과 학살의 반작용으로 “국가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운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 바로 프랑스의 “라이시테”(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철저한 분리)로 대표되는 유럽식 정교분리이기 때문이다. <br/><br/>역사적으로 침례교도들이 “보호적 성격의 정교분리”를, 개신교도들은 “제약적 성격의 정교분리”를 추구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침례교도들은 대개 전천년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세상은 결국 멸망할 것이고, 자신들의 역할은 그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 확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설령 다른 세력이 폭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따를 것을 강요하더라도, 그들은 정치적으로 혹은 군사적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박해와 순교를 감수했다. 미국식 정교분리는 바로 그런 선량한 사람들을 더 이상 건드리지 말자는 데서 출발한 것이었다.<br/><br/>그러나 개신교도들은 대개 무(후)천년주의자들로서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은 그들을 때로는 의회로, 때로는 전쟁터로 나가게 했다. 그런 자들은 입을 좀 다물고 총을 내려놔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바로 유럽식 정교분리다. 그러니 개혁주의자들의 후예들이 국가를 향해 정교분리를 들먹이며 “우리는 너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도, 너희는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야말로 “아전인수” 그 자체인 셈이다.<br/><br/>애당초 스위스와 독일 등지에서 “정교유착”을 통해 교단을 세운 개혁주의자들의 후예들이 이제 와서 “정교분리”를 들먹이는 것도, 정치권을 향해 “우리를 건드린다면 목숨을 걸고 저항하겠다.”라고 하면서 “순교자적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다.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성경에도, 교회사에도 배치되는 성명을 하나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버젓이 내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기독교”를 대표할 자격이 전혀 없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반기독교적” 작태로 인해 사람들이 “기독교”를 미워하게 되고, “종교법인 해산법”을 발의하는 지경에 이른 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눅 11:52). 독자들은 그런 자들과 같이함으로써 함께 화를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4 Jul 2026 15:27:3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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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의 확실한 예언, “이스라엘의 회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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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배교한 기독교계는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시온주의는 유대인의 영토적·국가적 실체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불과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왜곡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그와 같이 해석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성경적 개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성경의 핵심은 땅 자체가 아니라 그 땅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 “윤리적 성취”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야말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의 문자적인 성취를 간과한 편향된 해석이다.<br/><br/>세대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무조건적인 언약”에 따른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 날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세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씨에게 주었으니, 켄인들과 크니스인들과 캇몬인들과 힛인들과 프리스인들과 르파인들과 아모리인들과 카나안인들과 기르가스인들과 여부스인들의 땅이니라.” 하시니라』(창 15:18-21). 이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윤리적 기독교 담론”을 『배설물』(빌 3:8)로 만든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왜 성경적인지, 성경이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는지 예언의 성취 관점에서 살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성취”를 피하려다가 “윤리적 성취”라 불리는 “오물구덩이”에 빠져 버린, 비참한 “소경”이 되고 말았다(마 15:14). <br/><br/>하나님께서는 카나안 땅의 소유권과 관련한 “아브라함의 언약”을 “영원한 언약”으로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확증해 주셨다. 『내가 나와 너와 네 뒤에 올 네 씨 사이에 대대로 내 언약을 세우리니,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씨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뒤에 올 네 씨에게 네가 타국인으로 있는 땅, 즉 카나안의 모든 땅을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이 “영원한 언약”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주어졌고(『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창 12:7),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설 때 반복되었다.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진 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부터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이는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네게 줄 것이며, 네 씨에게 영원히 주고 내가 네 씨를 땅의 티끌 같게 할 것임이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다면 네 씨도 셀 수 있으리라. 일어나서 그 땅을 가로와 세로로 걸으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음이라.” 하시더라』(창 13:14-17). “땅의 소유권”과 관련된 “영원한 언약”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도 확증되었다(창 26:2,3; 28:13-15). <br/><br/>아브라함에게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창 12:1,2)이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땅”과 관련된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때 함께 언급하신 것은 그들의 “씨”였다(창 12:7; 15:18; 17:7,8; 26:3; 28:13,14). 말하자면 “땅”과 그 안에 거주할 “씨”와 관련된 언약이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인 것이다. “거주할 사람”이 없는 “약속의 땅”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카나안 땅의 소유자를 “아브라함과 그의 씨”로 정해 놓으셨으며, 아브라함을 칼데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목적도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려고 칼데아 우르에서 너를 불러온 주라.” 하시니』(창 15:7). 따라서 아브라함의 육적 씨인 “이스라엘 민족”이 카나안 땅의 소유주라는 점은 “성경적으로” 재론의 여지가 없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실제적인 땅의 영역”을 다루는 언약이며, 그 땅의 불법 거주자들을 모두 내쫓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로 채우시려는 계획과 함께 체결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이후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되어 카나안 땅의 “영원한 소유주”로서 확정된 것이다.<br/><br/>시편 105편에서 위와 관련하여 동일한 계시가 주어진다. 『그가 자기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곧 천 대에 명령하신 그 말씀이라. 이는 그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그의 맹세요 또 같은 것을 야곱에게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확증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카나안 땅, 곧 너희 유업의 몫을 주리라.” 하셨도다』(시 105:8-11). 피터 럭크만 박사는 이 말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9-11절에서 논의되는 『언약』은 ‘부동산 한 구획’에 대한 ‘토지 거래’와 같은 것이다(출 3:5, 창 15:18).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칼데아 우르 출신 양치기와 그 계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한’ 아들, 곧 이삭에게 양도되었고, 이스마엘은 그 언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삭은 그것을 그의 아들들 중 단 ‘한 명’에게만 물려주었고, 에서에게서 나온 요르단인들은 그 언약에 대한 권리를 내세울 수가 없다. 그러나 야곱은 그 언약을 물려줄 때 그것을 그의 ‘열두’ 아들 모두와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그들의 가족들에게 승인해 준다(민 23:9,10; 21:23; 24:2-9). 그 언약은 어떤 아랍인이나 모슬렘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영적 유대인”(롬 2:29)이나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이삭(갈 3:16), 그리스도인(갈 4:28)과도 관련이 없다.」<br/><br/>“카나안 땅”은 『하늘과 땅의 소유주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9)께서 그분 자신의 권한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영원히” 주신 땅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두 지파와 맺으신 언약은 인간이 시비를 거는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으로 이름이 변경된 “카나안” 땅을 모슬렘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영원한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가 그 땅을 “끝없이” 소유할 것을 보장하고 있다. <br/><br/>현재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충만함이 차기까지 민족적으로 완고한 상태에 갇혀 있다(롬 11:25). 이것은 초림 때 그들의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대가로 주어진 것으로(요 12:37-40), 이방인의 충만함, 곧 이방인의 죄가 가득 찰 때까지만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 완고함의 시기가 지나면 돌올리브 나무인 이방인은 잘려 나가고, 참올리브 나무인 유대인이 본래의 줄기에 다시 접붙여지게 된다(롬 11:24). <br/><br/>이스라엘은 교회가 휴거된 후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대환란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불에 타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가시덤불처럼(출 3:1-3), 대환란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보존되며(말 3:6), 그들의 하나님께 돌아올 준비를 갖출 것이다. 대환란의 끝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로 지상에 나타나실 때, 이스라엘 모든 지파는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되신 메시아시라는 점을 깨닫고서 통곡할 것이다(슼 12:9-14). 이처럼 본토로 회복된 이스라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아 왕으로 영접하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민족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신 30:5,6, 겔 36:24-27). 그리고 그 이스라엘 민족은 두 번 다시 약속의 땅에서 뽑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자를 다시 데려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들을 세워 그곳에 거주할 것이요, 또 그들이 포도원들을 만들어 그 포도주를 마시겠고 그들은 또한 정원들을 만들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다 심으리니 그들이 다시는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그들의 땅에서 뽑히지 아니하리라. 주 너의 하나님이 말하노라』(암 9:14,15). <br/><br/>대환란 기간 동안 흩어졌던 이스라엘이 본토로 다시 모이면,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그 영원한 왕국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질 것이다(삼하 7:10-16, 시 89:3,4,35-37, 대상 17장). 이스라엘이 영원히 차지할 “땅”은 본 논단의 전반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약속된 광대하기 그지없는 지역이다(창 15:18-21). 아직 “유대인 메시아”께서 재림하시지 않은 탓에 그 땅의 소유권이 불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메시아께서 다시 오시면 세상은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계 11:15)이 될 것이고, 그 천년왕국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위대한 백성이자 민족들의 머리로서 우뚝 설 것이다(신 28:13, 사 49:23; 60:11,12). 이처럼 이스라엘이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에서 민족적으로 재건되는 일은 구약성경에서만 약 500구절 이상 다루고 있는 핵심 주제이다. 이 주제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서 각각 100구절 정도 다루고 있고, 에스겔서는 12개 장에서, 다니엘서는 2,7,9,12장에서 그 위대한 회복을 다루고 있다. 특히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의 골짜기 환상”은 마르고 관절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소망이 사라져 버린 뼈들(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집이라.』(겔 37:11)라는 말씀에 주의하라! 하나님께서는 『보라,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어서 너희로 너희의 무덤들로부터 나오게 하여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리라.』(겔 37:12)라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부활”과 “카나안 땅으로의 회복”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된 “기정사실”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4 Jul 2026 15:25:0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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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그리스도인 자신을 측정하는 잣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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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사도 바울은 신약교회사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겨진다. 바울은 제1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 안티옥에 돌아와 있었는데, 그때 함께 선교 여행을 다녀온 바나바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파한 각 성읍의 우리 형제들에게 다시 가서 방문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행 15:36). 말하자면 이것은 자신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세워진 교회와 형제들에게 다시 가서 그들을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시작은 잘했지만 사도들이 떠나온 이후에도 잘하고 있는지, 혹시 가시밭에 떨어진 씨처럼 잘 자라지 못하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었으니, 이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한 제안인가?<br/><br/>마지막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위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았다 해도, 육신은 언제든지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는 약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와 관련하여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라고 하셨다. 재림이 가까운 지금은 제대로 된 믿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때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을 살피고 측정하는 잣대를 항상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br/><br/>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잣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 두려움이 처음 등장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였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창 3:10)라는 말씀처럼, 죄를 지은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두려움에 숨었다. 이때부터 죄인 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셨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두려움은 단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이는 두려움이 있는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순종했다. 그러나 이삭을 제단에 묶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만류하시며 『나는 이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두려움을 인정해 주셨다. <br/><br/>이러한 두려움은 구원의 문을 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 백부장 코넬료에 대해 성경은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행 10:2)라고 기록한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했던 코넬료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보내어 그와 그의 온 가족과 친구들을 구원해 주셨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보류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br/><br/>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 된다. 성경은 『죄악은 자비와 진리로 정결케 되나니, 사람들이 주를 두려워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라고 말씀한다. 아이가 나쁜 짓을 하려다가도 아버지의 엄한 매와 질책을 떠올리며 멈추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죄를 지었을 때 가해질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할 때 악에서 돌이킬 수 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빌 2:12)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는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워 이김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잣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롬 5:8). 이러한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것도 “첫째”로 사랑하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니라.』(막 12:30)라고 말씀하셨다. 이 첫째 자리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는 성도야말로 온전한 믿음을 이룬 그리스도인이다.<br/><br/>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이 순서를 뒤바꾸어 가르치고 실행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 없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뿐, 첫째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위선에 빠져 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타협하고 세상과 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이다. 성경은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 4:4)라고 경고한다. 하나님보다 세상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려는 것은 영적 간음과 다름없다.<br/><br/>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이 진정 하나님만을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증거하며,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사랑을 삶으로 증명해 낼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잣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전 11:26)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마귀를 따르던 진노의 자녀이자 소망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한때 멀리 있었던 너희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중간의 벽을 자신의 죽음으로 허물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그 구속의 은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죽으심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br/><br/>주님께서 그와 같이 피로 사신 교회에게 주신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뿐이며, 모두 주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성경적 의식이다. 먼저 “침례”는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과 함께 죽고, 묻혔으며, 함께 부활했음을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신앙 고백이다(벧전 3:21). 이는 구원의 조건이 아닌 모형일 뿐이기에, “세례”라는 죄를 씻는 의식으로 변개해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이다. 또한 복음을 통해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한 성도들이 참여하는 의식은 “주의 만찬”이다. 이 만찬식의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죽으심, 곧 주님의 찢겨진 살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일 뿐인데, 로마카톨릭은 그 빵과 포도주(발효된 술)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로 왜곡했다. 이와 같은 이교도 종교 집단으로부터 성별하겠다고 일으켰던 종교 개혁이 무색하게, 개신 교회들은 로마카톨릭의 사악한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루터는 물질이 변하지는 않지만 빵과 포도주 “안에, 위에, 아래에” 그리스도의 몸이 물리적으로 함께 존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했고, 칼빈은 물리적 결합은 없으나 성찬식 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임하신다는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가르쳤다. 이처럼 개신 교회들도 빵과 포도주에 거룩한 신비주의를 부여하며 주의 만찬식의 성경적인 본질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인간의 편의대로 “누룩”(죄와 거짓 교리의 상징)을 넣은 카스텔라 빵과 발효된 포도주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주님의 죽으심을 바르게 기억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죽으심을 올바로 선포하고 기념해야 한다.<br/><br/>사도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돌아보고자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성도들이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지금은 참된 믿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잣대로 자신을 엄격히 돌아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죄를 멀리하고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순결하게 기다리는 성숙한 성도로 서 있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7:05: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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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퀴어 축복 목사 파면” 무효 판결한 세상 법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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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이하 남부연회)가 남재영 목사에게 퀴어축제에 참석해 동성애 찬동·동조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출교 징계를 내린 것에 대해, 법원이 “무효” 결정을 내렸다. 대전지법 민사12부는 5월 28일 남재영 목사가 남부연회를 상대로 제기한 “연회재판위원회 판결 무효 확인”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인용한다고 판결했다.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라 결정된 사항에 대해 세상 법정이 판결 무효를 결정한 것이다.<br/><br/>남재영 목사는 2024년 6월 1일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꽃잎을 뿌리고 기도문을 낭독하는 “동성애자 축복식”을 진행했고, 6월 10일에는 출교된 목사 옹호 성명서에 참여했으며, 또다시 7월 6일 제1회 대전퀴어문화축제에서 부스를 설치하고 “동성애자 축복식”을 행함으로써 친동성애 행보를 보였다. 이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장정 재판법 3조 8항(마약법 위반, 도박 및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에 해당한다.<br/><br/>이에 2024년 7월 16일 남부연회 동성애대책위원회는 남부연회 재판위원회에 남 목사를 고발했다. 남부연회 재판위원회가 12월 5일 남 목사에게 교리와장정에 따라 “출교”를 선고하자, 그는 법원에 “징계무효소송 및 효력정지 가처분”을 제기했었다. 법원은 2025년 1월 “효력 정지 가처분”을 인용해 남 목사가 담임목사직에 복귀할 수 있게 했고, 그는 최근 은퇴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세상 법정이 소위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라 결정된 사항에 대해 “효력 정지 가처분”도 시행하고, 급기야 “판결 무효”까지 결정해 버린 것이다. <br/>기독교대한감리회의 “퀴어축제 축복식” 관련 “출교” 결정은 남재영 목사 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지난 2023년에도 친동성애 행보를 보인 이동환 목사라는 이가 출교된 바 있다. <br/><br/>이동환 목사는 지난 2019년 8월 31일 “퀴어축제 축복식”을 인도한 혐의로 2020년 6월 (남재영 목사와 동일하게)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장정 재판법 3조 8항”에 의거해 기소되었으며, 이로써 2020년 10월에 2년 “정직”을 선고받았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정직 기간 중에도 퀴어축제에 수차례 참가하고 성소수자 단체인 “큐앤에이”(Q&A)를 설립하는 등 지속적으로 친동성애 행보를 보였으며, 그러던 중에 2023년 3월 교단 목회자들과 장로들로부터 추가로 고발당하여 결국 “출교”되었던 것이다.<br/><br/>“퀴어축제 축복식” 관련 “출교” 결정은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라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세상 법정이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른 판결을 “무효”로 결정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왜냐하면 그러한 결정에 따라 이제는 “모든 교회들”에서 “동성애”에 동조하는 개인이나 모임을 징계, 파면, 출교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동성애” 관련 활동을 하는 개인이나 모임을 제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교회법”이 무기력하게 되어, 그나마 “동성애”로부터 보호되던 최소한의 신앙 영역마저 잠식당할 위기에 처했다. 목사나 주일학교 교사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에 반하여 “동성애”에 찬성하며 교육하더라도 그를 파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br/><br/>동성애 관련 문제는 파면 목사 복귀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 준정부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이사장 홍원화)이란 곳이 학술지 평가 영역에 “젠더 혁신 정책”에서 추진하는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라고 요구함으로써 기독교계를 비롯한 학문 연구 기관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학술 및 연구개발 활동과 관련 인력의 양성 및 활용을 보다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수행함으로써, 국가의 학술 및 과학기술 진흥과 연구 역량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으로서, 총예산 9조 9,479억 원을 사용하는 기관이다. 그러한 연구재단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젠더 혁신(Gendered Innovations)은 기초·응용 연구개발의 모든 단계에서 성·젠더 특성 분석을 반영하여 연구개발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식 창출과 기술 및 디자인 등 과학기술 전반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라고 규정하고, 「연구 결과가 특정 성이나 젠더 그룹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조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보 전달 과정에서 차별이나 편견을 조장하지 않도록 주의했는지 확인한다.」라는 세부 지침이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젠더 혁신”을 권장하고, 정상적인 성 개념에 기초한 연구는 배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연구 학술지에 대한 “연구 관리 체크리스트”에서 해당 항목에 0점을 받으면 총점과 관계없이 탈락할 수 있고, 평가 위원 1명이라도 학술지 운영에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서 항목에 0점을 주는 경우에도 평가 탈락 조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평가를 받은 학술지는 학술지 실태점검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어 학술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진평연(진정한 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 연합)과 동반연(동성애·동성혼 반대 국민 연합) 등 5백여 시민단체들은 6월 1일 “학술지 평가를 통한 젠더이념 강제 시도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고, 한국교회언론회(대표 임다윗 목사)도 6월 2일 한국연구재단의 “젠더 가이드라인 반영 지침”에 대해 “학문 영역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들려는가?”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퀴어 문화”를 조장하려는 사탄의 세력이 “정부,” “법조계”는 물론, “학계”에도 손을 뻗쳐 세상을 “동성애자들”의 소굴이었던 “소돔”처럼 만들려고 하고 있다. 학계가 “친동성애” 연구 논문을 쏟아내고, 그 논문들을 토대로 “친동성애 교육 과정”이 수립될 날도 멀지 않은 것이다.<br/><br/>동성애와 관련하여 기독교계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 장로교는 이미 2011년에 “성소수자 목사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으며, 2015년에는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교단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직자 일부일처제 의무화” 개정안이 반대에 부딪혔다. <br/><br/>미국 장로교 뉴멕시코주 시에라블랑카 노회는 6월 말 열릴 예정인 총회에 “성직자 일부일처제 의무화” 개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총회에 제출된 “조언 및 권고” 문서에 따르면, 이 안은 장로교 교단 산하 “여성 및 성평등 옹호위원회,” “성소수자 평등 옹호위원회,” “사회증언정책자문위원회” 등 세 위원회로부터 반대 의견을 받았다. 이들 기관들은 “교회의 소명을 넘어 사생활과 관계 구조를 규제하려는 시도이다,” “복합적이거나 소외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수치심과 침묵, 정신적 강압을 강화할 수 있다.” 등의 반대 이유를 밝히며 “조언 및 권고” 문서를 제출한 것이다.<br/>미국 장로교 산하 기관의 명칭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 기독교계는 이미 “친동성애” 세력에 의해 잠식당해 “동성애자 목사”나 “동성결혼”이 허용되어 있을 정도이고, 이번 개정안 반대 사태처럼 교단이나 교회 내에서 “반동성애” 행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br/><br/>성경은 구약에서 『어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그들은 가증한 짓을 행한 것이니 그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며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으리라.』(레 20:13)라고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도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욕정에 내버려 두셨으니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까지도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본성을 거역하는 것으로 바꾸었음이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여자들을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벗어나 서로 음욕이 불일 듯하니 남자들이 남자들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자기 자신들에게 받았느니라... 그들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 마땅히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이 같은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좋게 여기느니라.』(롬 1:26,27,32)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동성애”가 “죽음에 처해져야 할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신다. <br/><br/>정부와 학계가 이미 “법”과 “규정”으로 강력한 친동성애 정책을 시행하고 있고, 법조계마저 “교회법”을 무시하고 “반동성애” 규정을 무효로 결정함으로써, 최소한의 안전지대였던 기독교계와 교회들마저 “법”으로는 동성애자들의 활동을 저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여, “성경적 진리” 안에 굳게 서고, “친동성애 세력”을 포함한 “비성경적 세력”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엡 6:18).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55: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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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다니엘서에 예언된 “철과 진흙의 왕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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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구약의 다니엘서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예언의 시간표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남으로써 시작된 “이방인들의 때”가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들의 때”를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기간으로 규정하셨으며(눅 21:24), 그 기간 동안에 등장할 바빌론, 메데-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적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어지는 이방 제국들의 역사가 특히 다니엘 2장의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형상”을 통해 계시되었다. 즉 형상의 “금 머리”(바빌론), “은 가슴과 양팔”(메데-페르시아), “놋 배와 넓적다리”(그리스), “철로 된 두 다리”(로마), “철과 진흙이 섞인 발과 발가락”(적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방인들의 때”에 등장할 이방 제국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형상의 맨 하단에 위치한 “발과 발가락”은 “철과 진흙”이라는 그 특이한 “이질적이고 위태로운 결합”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떤 모습으로 형성될 것인가를 예측하게 한다. 오늘날 초고도로 발달되어 가는 휴머노이드의 기술력을 통해 “이방인들의 때”의 끝부분에 이르면 이방 세계의 인공적 문명이 최절정에 이를 것이고, 그 기이한 세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종말을 고하고 비로소 그 길고 긴 “이방인들의 때”가 마감된다. 이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영원하고 완전한 메시아 왕국이 수립되는 것이다.<br/><br/>다니엘 2장에서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거대한 형상은 머리에서 발로 갈수록 금속의 가치와 밀도(비중)가 하락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 왕국들의 통치 권력과 도덕적 가치, 그리고 정치적 안정성이 끊임없이 하락할 것을 상징한다.<br/><br/>1. “금”의 왕국 : 바빌론(B.C. 606 ~ B.C. 536)<br/>바빌론은 약 70년 동안 세계 권력으로 군림했다. 제국의 왕권 계보는 느부캇넷살, 에윌므로닥, 네리그릿살, 라보로소알코드, 나보니두스, 그리고 마지막 왕 벨사살로 이어진다. 느부캇넷살은 왕의 명령 하나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바빌론의 위세는 고대 유적인 “공중 정원”(Hanging Garden)의 규모로도 증명된다. 이 거대한 정원은 두께 27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높이가 무려 92m, 한 변의 길이가 24km에 달하는 성벽 기초가 발견되었다. 잔해로 남은 18-21m 높이의 기둥 250개는 기둥 사이 간격만 24m에 이르며, 이 정원에 오르기 위해서는 폭 3m, 높이 23m의 계단을 지나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막강한 권세와 영광을 “유다를 70년간 징계하기 위한 일시적 도구”로 주셨기에, 그 포로 기간이 끝나자 바빌론은 즉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br/><br/>2. “은”의 왕국<br/>: 메데-페르시아(B.C. 536 ~ B.C. 330)<br/>바빌론에 이어 나타난 메데-페르시아는 군대 장군들이 권력을 쥐고 세운 군사 독재 체제이자 세습 귀족 기반의 제국이었다. 형상의 두 팔이 상징하듯이 메디아와 페르시아 두 민족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왕의 독재 권력은 바빌론에 비해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br/>성경 속 페르시아의 계보는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갇혔을 때의 다리오왕과 제1차 포로 귀환 및 성전 재건 칙령을 내린 코레스왕으로 시작된다. 이후 아하수에로와 아탁세르세스 시대의 집요한 방해 공작으로 성전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으나, 다리오 왕 때 선지자 학개와 스카랴의 권고 속에서 성전이 완공되었다. 이후 에스더서의 배경이 되는 아하수에로왕을 거쳐, 아탁세르세스왕 때 에스라(2차 귀환, 율법 전수)와 느헤미야(3차 귀환, 성벽 재건)의 역사로 이어진다. 이 제국의 유일한 가치는 “유대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내시는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점이다.<br/><br/>3. “놋”의 왕국 : 그리스(B.C. 330 ~ B.C. 100)<br/>다니엘 8장에서 숫염소의 양 눈 사이에 있는 “큰 뿔”로 예언된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이다. 그리스는 군사적 군주 국가였으며, 알렉산더는 절대적 독재자라기보다는 군부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움직인 군대 장군 출신의 군주였다. 그는 고대 왕국의 군주로서 뛰어난 지혜와 금력을 지녔으나 절대적 독재권으로 세계를 영구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B.C.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오 3세를 격파하고 영토를 정복했으나, 33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그가 죽은 후 제국은 성경의 예언대로 카산드로스, 리시마쿠스, 셀레우쿠스, 프톨레미라는 네 장군의 왕국(단 8:8)으로 분열되었다. 이 제국이 남긴 가장 결정적인 역사적 의의는 전 세계에 “코이네 헬라어”를 보급하여, 장차 기록될 신약성경의 언어적 기반을 완벽하게 마련했다는 점이다.<br/><br/>4. “철”의 왕국 : 로마(B.C. 100 ~ A.D. 200 전성기)<br/>넷째 왕국인 로마는 모든 것을 부수고 산산조각 내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 “철”로 묘사되었다. 역사에서도 로마를 “철권통치 국가”(Iron Rule)라 부른다. 그러나 가치와 지배 권력 면에서는 공화정 군주 국가 체제를 취하여 역사의 퇴행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로마에는 왕권을 견제하는 원로원이 존재했기에 카이사(시저)조차 절대 독재권을 휘두르지 못했고, 원로원과 반목하다가 암살당하는 한계를 보였다. 신약 시대의 로마 황제 계보는 아우구스토(예수님 탄생 시 조세 등록), 티베리우스(십자가 처형 당시), 가이우스, 클라우디스(유대인 추방), 네로(그리스도인 박해)를 거쳐 A.D. 70년 예루살렘을 파괴한 로마 장군 티투스와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A.D. 91-96)의 도미티안 황제로 이어진다. 신상의 “두 다리”가 보여 주듯 로마는 나중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졌다. 로마의 대제국 인프라와 도로망은 “전 세계로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물리적 도구”로 쓰였다.<br/><br/>5. “철과 진흙”의 왕국 : 적그리스도 왕국과 열 왕의 연합(대환란 기간)<br/>형상과 관련된 예언의 마지막 단계는 철과 진흙으로 구성된 “발과 발가락”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니엘의 해석을 들어보도록 하자. 그의 해석에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의 세 가지 특성이 담겨 있다.<br/>1) 『그 일부는 토기장이의 진흙이며 일부는 철인 발과 발가락을 왕께서 보셨으니 그 왕국이 나뉘어질 것이며, 왕께서 철과 차진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으니 그 왕국에는 철의 강함이 있을 것이니이다』(단 2:41). 철과 진흙은 “혼합”은 될 수 있어도 “화합”하여 하나가 될 수 없는 물질들이다.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나누어진”(분열된) 채로 형성된 연합체로, 철의 강함을 지녔지만 매우 불안정한 상태를 띨 것이다.<br/>2) 『또한 그 발가락의 일부는 철이요 일부는 진흙이므로 그 왕국이 부분적으로 튼튼하고 부분적으로 부서질 것이니이다』(단 2:42). “열 발가락” 체제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숫자인 “열”(10)과 연결된다. 성경에서 “10”은 “이방인”의 숫자이다. 이방인의 조상 노아는 아담의 10대 후손이었고, 이방인 계보는 창세기 10장에 나오며, 이방인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기사는 누가복음 10장에, 이방인 복음 전파의 필요성은 로마서 10장에, 이방인에게 천국 문이 열린 것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온다. 형상의 “열 발가락”은 다니엘 7장의 “열 뿔”이자 요한계시록 13장과 17장에 등장하는 “열 왕”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대환란 때 “바다”(계 13:1, 지중해)에서 올라오는 한 “짐승”(적그리스도)과 결탁하여 “한 시간” 동안 권세를 누릴 마귀적인 연합 세력이다(계 17:12). 이 열 개의 연합 세력은, 일부는 철이요 일부는 진흙이므로, 부분적으로는 튼튼하지만 부분적으로 부서지는 경향이 있다. <br/><br/>3) 『왕께서 철과 차진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으니 그들은 사람들의 씨와 섞일 것이나 그들이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이 철이 진흙과 섞이지 못함과 같으리이다』(단 2:43). 지금까지는 “철과 진흙”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왕국의 “특징들”을 이야기했다면, 43절에서는 “그들”(철)과 “사람들의 씨”(차진 진흙)를 언급함으로써 특징 이상의 “존재들”이 그 왕국에서 “섞여” 살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그들”은 “사람들의 씨”와는 구별되는 “어떤 자들”인 것인데, 여기서 “그들”은 “사람들의 씨”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씨”는 “사람들의 씨”와 얼마든지 “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사람들의 씨”와 섞이면서도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의 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은 일차적으로 “외계에서 온 자들”을 뜻하는데, “외계에서 온 자들”은 “사람들의 씨”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과 완전하게 합할 수는 없지만, 과거 창세기 6장에서처럼 어떤 거인족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4). “하나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들)이라 불리는 “외계에서 온 자들”과 “사람들의 씨”의 결합을 엉겨 붙어서 하나가 되는 “합함”(cleaving)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섞이기는 하되 “사람 남자”와 “사람 여자”가 결합하듯 “한 몸”(창 2:24)을 이루는 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br/><br/>여기서 한 가지 더, 다니엘서의 예언은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철)와 사람(진흙)의 기묘한 동거”라는 “물질적 실체”로 확장된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마지막 왕국은 “타락한 천사들”의 지배뿐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초지능 기술 권력”[Superintelligent Techno-Power, 인간의 지능을 아득히 초월한 “초지능 시스템” 자체가 인류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 살리고 죽이며, 주고 빼앗는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군림하는 신종 패권 체제]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고, 이 “기술 권력”은 “짐승의 형상 숭배”와 “짐승의 표”를 통해 매매 행위를 완전히 통제할 것이다(계 13:14-18). 예언에 있어서 “철”은 “유전자”도 없고, “생명력”과 “영과 혼”도 없지만 압도적으로 단단하고 강력한 “휴머노이드”와 “AI 기술 문명”을 완벽하게 대변한다. 태생적으로 “휴머노이드”는 공장에서 제조되고 알고리즘으로 설계된 존재인 것인데, 그 마지막 왕국에서 “사람”(진흙)은 생존과 편리, 혹은 “영생”을 위해 이 “휴머노이드(철) 기술”과 사회적·신체적으로 “결합”하게 될 것이다(생체 공학, 트랜스휴머니즘 등). 이로써 “기계”가 인간의 지위를 대체하여 군림하고, 또 인간의 몸속에 “기계적 요소”가 침투하여 물리적으로 “섞이는” 현상이 일어나지만 서로 “합하지는” 못할 것이다(단 2:43). 결과적으로 적그리스도 왕국은 “초자연적인 외계 존재”(타락한 천사들)의 전면적인 개입과, 영과 혼을 지닌 인간을 모방하려는 “휴머노이드”(기술 권력)의 등장이 중첩되는 기괴한 종말적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인공적이고 이질적인 “철”의 존재들과 한 시대에 동거하며 지배받겠지만, 그 결합은 모래성처럼 위태로우며, 결국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돌”(단 2:3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심판 앞에 산산이 부서지고, 하늘의 하나님에 의해 “결코 멸망하지 않는 한 왕국”이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단 2:44).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9:4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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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적그리스도의 “AI 친화” 전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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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2022년 11월 “오픈AI”(OpenAI)사는 대대적인 홍보 없이 조용히 대화형 생성 AI 서비스인 “챗GPT”를 출시했다. 홍보가 없었던 것은 이 서비스가 사회 전반에 미칠 파급력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챗GPT를 통해 생성형 AI의 혁신적인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전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AI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문화는 물론, 종교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AI를 빼놓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AI와 관련된 다양한 이슈에 주목하게 되었고, 언론 또한 AI 기업 간의 경쟁, AI 인프라 구축, AI 규제 정책, AI에 따른 산업 구조의 변화와 노동 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 AI 관련 소식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언론이 형성하고 있는 AI 관련 담론은 AI 친화적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인간중심인공지능연구소”(Stanford HAI)가 발간한 “2026년도 AI 인덱스 리포트”(The AI Index Report)에 따르면, 전문가 집단은 AI가 향후 노동 환경에 미칠 영향에 대해 73%가 긍정적으로 보았고, 경제적 파급 효과에 대해서는 69%가, 의료 및 보건 혁신에 대해서는 무려 84%가 긍정적일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전문가 집단의 낙관적 전망은 미디어 보도와 정책 담론을 통해 확산되고 있으며, 대중의 AI 인식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례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BIG Kinds)를 통해 최근 수년간의 국내 주요 언론 보도를 분석해 보면, AI 관련 뉴스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기사보다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기사가 더 우세한 경향을 보인다.<br/><br/>그러나 AI에 관한 낙관적 담론의 확산이 대중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은 AI가 제공할 편익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인간 존재의 의미, 일자리 대체,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불안을 동시에 경험하는 양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연구소의 여론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과반인 52%가 AI 기술의 급격한 확산에 대해 심리적 불안감과 신경과민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AI가 가져올 혁신적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따른 사회적, 실존적 변화에 대한 우려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인간은 잘 모르는 새로운 기술을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초 산업 혁명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기계화로 인한 일자리 상실을 우려하며 기계를 부수었던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현재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기술 불안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산업 혁명기의 기계들이 우리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 것처럼, 전문가 집단이 생산하는 압도적인 순기능 담론과 AI 기술이 제공하는 편의성, 그리고 “뒤처지면 도태된다”는 사회적 압박은 대중으로 하여금 AI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점차 우리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올 것이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보고서에서는 대중의 59%는 AI 제품과 서비스가 가져다줄 혜택이 부작용보다 클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이는 불안한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AI에 대한 기술 낙관주의적 경향과 높은 수용성을 보여 준다. 특히 “AI가 의사보다 암 진단을 더 잘한다,” “번거로운 작업을 대신해 준다,” “나만의 맞춤 비서를 둘 수 있다” 등과 같이 AI와 관련된 긍정적이고 유용성을 강조하는 메시지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경우 사람들은 AI를 더 친숙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친숙성은 AI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하고 호감도와 친숙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고 부른다. 이 효과는 특별한 상호작용이나 경험이 없더라도 어떤 대상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그 대상에 대한 친밀감과 긍정적 평가가 증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br/><br/>문제는, 이제 곧 교회가 휴거되고 대환란이 시작되면 지금 형성되고 있는 사람들의 높은 AI 수용력과 급속도로 발전하는 AI 기술을 통해, 성경의 예언대로 이제 곧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인류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AI 기술의 발전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AI 분야는 일반적으로 데이터를 분류하고 예측하는 “분석형 AI,” 이미지나 음성을 인식하는 “인식형 AI,” 새로운 결과물을 생성하는 “생성형 AI,” 그리고 물리적 환경에서 행동하는 “피지컬 AI”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AI 패러다임은 데이터센터에 갇힌 AI를 넘어 “피지컬 AI”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AI 알고리즘을 탑재할 물리적 하드웨어 제조사로 투자 자금이 몰리고 있는 현상과 AI 알고리즘 자체가 “말만 하는 AI(LLM, 언어)”에서 “몸을 움직이는 AI(VLA, 행동)”로 변화하고 있는 현상, 산업 현장에서 “피지컬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한 현상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br/><br/>그런데 “피지컬 AI”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모방자로서의 마귀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몸이 구속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으니』(엡 1:4,5). 칼빈주의자들은 이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인간의 선택과 유기를 무조건적으로 결정하셨다는 저주받을 비성경적인 교리를 창안해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사람의 구원에 관해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미리 아심”과 “그리스도 안”이라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즉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지, 믿지 않을지를 미리 아셨고, 그 미리 아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사람들을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곧 그분의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빌 3:21, 요일 3:2, 고전 15:49). 따라서 휴거 이후에는 외견상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와 같은 성경적 진리를 모방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오게 되었다. <br/><br/>2026년 6월 12일 미국 나스닥 주식에 상장한 스페이스X의 사업 중 하나는 “스타링크,” 바로 “저궤도 위성 통신망 사업”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25년 12월 4일에 이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이로써 전 세계 오지를 비롯해 기지국이 없는 어느 곳에서도 인터넷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다. 문제는 “피지컬 AI”를 탑재하고 적그리스도와 같은 외모를 한 여러 “휴머노이드”가 스타링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하이브 마인드 동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하이브 마인드”는 여러 AI나 로봇이 동일한 데이터와 명령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마치 하나의 두뇌를 가진 것처럼 협력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형상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처럼, 적그리스도와 그 적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짐승의 형상들이 이 지상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칼에 상처를 입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짐승, 곧 적그리스도를 위하여 형상을 만들어 그 형상에게 경배하는 일이 벌어질 것인데, 이때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의 형상”이다(계 13:14,15).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통치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분신과 같은 형상들과 우상들”이 만들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말씀이 대환란 기간의 문맥(호 13:7,8)인 호세야 13:2에 있다. 『이제 그들이 더욱더 죄를 짓고 자기들을 위하여 그들의 은으로 형상들[images]을 부어 만들고 자기들의 고안대로 우상들[idols]을 만들었으니, 그 모두가 장인들[craftsmen]이 만든 것이라.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은 송아지들에게 입맞출지니라.” 하는도다.』 장인들이(craftsmen)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은 송아지들에게입맞출지니라.”』라고 말한다. 이는 그들이 부어 만든 “형상들”과 자기들이 고안한 “우상들”에 경배하라는 의미인데, 특히 입맞추는 대상으로 송아지가 나오는 것은 황소(송아지)로 예표되는 마귀, 곧 그의 화신인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대환란의 모습을 예표하는 것이다.<br/><br/>위와 같은 적그리스도는 “표범”으로 묘사되는데(계 13:2), 표범의 검은 점은 “두 개의 검은 큰 입술,” 곧 “입맞춤”과 흡사하다. 곧 짐승의 표가 적그리스도에게 경배(입맞춤)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표식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3장에서 느부캇넷살이 금 신상을 만들고, 모든 백성과 민족들과 언어들에게 엎드려 경배하라고 명한 것처럼, 적그리스도 역시 자신의 형상에 대한 경배를 강요할 것이다. 더 나아가 “손 기술”(craft)을 써서(단 8:25) “피지컬 AI”를 통한 자신의 “형상들”과 “우상들”을 전 세계에 편재하게 함으로 모든 개인의 삶과 경제 활동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통제하려 들 것이다. 이미 AI와 친화적이 된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은 큰 거부감 없이 다가올 것이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창녀로 등장하는 로마카톨릭은 이미 성당마다 수많은 형상들(images)을 세워 두고 경배하도록 하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형상에게 경배하라는 요구를 한층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사람의 얼굴이나 음성을 인식하는 “인식형 AI”는 적그리스도의 통제와 감시를 한층 더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 사법 및 공안 당국이 반정부 시위나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AI를 통해 미리 색출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중국 톈진시의 경찰이 특정인의 행동과 성향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고발 가능성이나 소요를 일으킬 위험을 평가하는 시위 예측 프로그램을 구매해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대환란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666, 곧 그의 표를 이마나 오른손에 받지 않은 자들을 식별하고 감시하는 도구로 전용될 것이다.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은 사거나 팔 수 없기 때문에 굶주림에 놓이거나, 이러한 감시 체계 아래서 발각되어 목베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계 20:4).<br/><br/>“오픈AI”는 AI 안전을 발전보다 우선시해 온 비영리 법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올해 주식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목표대로 된다면 주주들의 수익 압력을 받는 구조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해 AI의 안정성보다는 수익을 위한 그 어떠한 선택도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이다. “오픈AI”의 영리 법인 전환과 같은 상업화 흐름은 AI 기술이 인류를 억압하는 통제 수단으로 변질될 위험을 가중하고 있다. 이는 마귀가 적그리스도의 통치 기반을 닦는 전략적 행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영원한 불못의 형벌로 귀착된다(계 20:10). 따라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AI가 제공하는 일시적 편리함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우리 각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모시키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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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8:4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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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몸을 입은 AI, 휴머노이드</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5/%EB%AA%B8%EC%9D%84-%EC%9E%85%EC%9D%80-ai-%ED%9C%B4%EB%A8%B8%EB%85%B8%EC%9D%B4%EB%93%9C/</link>
<description><![CDATA[고되거나 귀찮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누가 좀 대신 해 줬으면” 하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용인, 노예, 하급자 등을 부릴 수 있는 처지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하기 싫은 일”을 시키는 데에는 여러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어떤 일을 강제할 때는 도주, 배신, 탈진 등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고, 보안이나 책임상의 이유로 타인에게 맡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있다. 그래서 인류는 자신의 일을 떠맡아 줄,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늘 바랐다.<br/><br/>그와 같은 인류의 오랜 염원은 문학 작품을 통해 표출되곤 했다. 무려 기원전 7,8세기경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의 &lt;일리아스&gt;에도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황금 하녀”를 만들어 주인을 섬기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그 뒤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야기꾼들은 점차 그 개연성을 신적인 존재나 마법이 아니라 인간이 이룩한 기술에 의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2차 산업혁명이 완수될 무렵이었던 1920년,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의 손에서 기념비적인 희곡 &lt;R. U. R.(로숨의 만능 로봇)&gt;이 탄생했다. 슬라브어로 “강제 노동”을 뜻하는 “로보타”에서 착안한 단어, “로봇”이 세상에 나온 순간이었다.<br/><br/>로봇에 대한 허구적 상상력이 현실에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였다. 이전에도 장난감처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기계는 존재했지만, 인류에게 유의미한 노동력을 제공한 최초의 “산업용 로봇”은 1961년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공장에 도입된 로봇 팔 “유니메이트”(Unimate)였다. 유니메이트는 처음에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옮기는 비교적 단순한 임무를 수행했으나, 시간이 흘러 1969년이 되었을 때는 용접 작업을 맡아 생산 속도를 2배로 끌어올리는 엄청난 성과를 냈다. 인간에게 유독한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고, 위험하거나 고된 작업을 수행하더라도 지치지도 불평하지도 않는 로봇의 등장은 자동차를 포함한 제조업 전반의 패러다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br/><br/>여러 산업 영역에서 저변을 넓혀 가던 로봇은 1990년대에 이르러 공장 바깥으로 나와 인간의 생활공간으로 진입했다. 인간을 대신해 이동하거나, 물건을 나르거나, 바닥을 청소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서비스 로봇”이 등장한 것이다. 이때 던져진 화두는 “이동성”이었다.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 있는 문, 계단, 복도 등의 요소들은 그 구조가 인간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정해지기 때문에, 로봇에게는 꽤나 성가신 “극복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이 문제를 인식한 로봇공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인간처럼 움직이는 로봇, 곧 “휴머노이드”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생활 인프라를 다 뜯어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반대로 로봇을 거기에 맞추자는 발상이었다.<br/><br/>그러나 다른 로봇 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대조적으로, 휴머노이드는 오랜 시간 동안 암흑기를 맞았다. 1973년 일본의 와세다대학교에서 최초의 휴머노이드 “와봇-1”을 선보인 이래로 5-10년 정도 간격을 두고 새로운 휴머노이드가 세상에 나오기는 했지만, 매우 느린 발전 속도 탓에 잠깐 관심을 끄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인간의 신체처럼 자연스럽게 걷거나, 방향을 전환하거나, 물건을 쥐는 행동이 생각보다 훨씬 고난도의 기계적 구동을 요구한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하드웨어(몸)가 아닌 소프트웨어(두뇌)에 있었다. 당시에는 상황과 단계에 따른 “답”을 개발자가 모두 직접 입력해 두는 “하드코딩” 방식으로 로봇을 제어했는데, 변수가 완벽히 통제되는 공장 안에서 붙박이로 일하는 로봇이라면 몰라도 무한대에 가까운 변수가 있는 바깥세상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로봇의 소프트웨어를 그런 방식으로 완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물건이 조금만 삐딱하게 놓여 있거나 가구 배치가 약간만 달라져도 휴머노이드가 어김없이 “바보 짓”을 했던 까닭도 바로 이 “하드코딩”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런 현실 앞에 휴머노이드의 상용화란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br/><br/>그러나 2016년 이세돌 9단을 꺾은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를 통해 “딥러닝”이라는 기술이 알려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이들은 “답”을 일일이 알려 주던 기존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택했는데, 인간의 뇌를 모방한 “인공 신경망”을 구축한 뒤에 “방대한 데이터”와 “최종적인 목적”만을 던져 준 것이었다. 그러자 기계는 마치 인간처럼 스스로 학습하여 데이터 안에서 패턴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학습 시간이 쌓이자 한 번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답”을, 심지어 인간 이상으로 훌륭하게 내놓기까지 했다.<br/><br/>이 기술이 로봇공학자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엄청난 것이었다. 기존에는 “책상 위에 있는 컵을 들어 올려라.”라는 명령을 휴머노이드에게 수행하도록 하려면 “컵과 책상의 XYZ 좌표값 변화에 따른 관절 기어의 회전수”를 도출할 수 있도록 복잡한 수식을 미리 입력해 두어야 했다. 그러나 “딥러닝”이 나온 이후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컵을 들어 올린다는 목적을 부여한 뒤, 컵을 들어 올리는 행동 데이터를 대량으로 학습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딥러닝”으로 학습한 휴머노이드는 알아서 가장 “인간다운” 팔의 각도나 손의 모양 따위를 찾아내 컵을 들어 올렸다. 이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어떤 행동이라도 로봇에게 학습시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br/><br/>“두뇌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자 휴머노이드 연구는 급물살을 탔다. “딥러닝”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언어를 학습한 AI, 챗GPT가 2022년 출시됨에 따라 흐름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의 자본 시장이 AI에 열광하고 있는 가운데, AI에게 “몸”을 주어 가상 세계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 줄 휴머노이드 기술에 자본과 연구 역량이 집중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아직까지 대부분 “화이트칼라”(지식 노동자) 역할에만 머무르고 있는 AI가, 휴머노이드에 탑재됨으로써 그 수가 “화이트칼라”의 서너 배 되는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와 “핑크칼라”(서비스직 종사자) 역할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유용성과 경제적 파급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br/><br/>기술사를 공부해 보면, 신기술은 근시안적으로 보면 일자리를 감소시키는 것 같아도 결국 그 반대의 결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가령 방직기가 발명되어 공장에 도입되었을 때 직물공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이로 인해 기계를 때려 부수는 급진적 사회 운동인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방직기의 도입으로 인해 옷감이 흔해지자 디자인, 유통, 세탁 등의 영역에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 시장으로부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자리가 생겨났다. 자동차가 발명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부들은 일자리를 잃었지만, 자동차를 만들고, 수리하고, 자동차 보험을 판매하고, 도로를 깔고, 중고차를 판매하는 등 수많은 영역에서 훨씬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던 것이다.<br/><br/>그러나 휴머노이드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전문가들이 이런 역사적 패턴과는 배치되는 미래를 점친다. 미국의 언론사 폭스 비즈니스는 지난 2023년 로봇 두뇌 설계의 권위자이자 싱귤레리티넷의 CEO인 벤 고어첼이 향후 수년 안에 직업의 80%가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같은 해 휴머노이드 “옵티머스”를 개발하는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영국 총리와의 대담 자리에서 “그 시점이 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더 이상 일자리가 필요 없어지는 시점이 올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br/><br/>전문가들이 지난 역사와는 다르게 휴머노이드라는 기술이 “일자리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대는 근거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것은 휴머노이드가 “싸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휴머노이드의 제작 비용은 매년 40%씩 떨어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산 휴머노이드는 판매가가 현재 차 한 대 값 정도로 떨어졌다. 따라서 앞으로 휴머노이드가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다면, 그 경쟁력은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수천만 원의 연봉을 주고 하루에 고작 몇 시간 일하고 집에 갈 인간을 고용하는 것보다, 비슷한 비용으로 24시간 쉬지 않고 일할 휴머노이드를 한 대 사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테니 말이다.<br/><br/>그러면 휴머노이드로 인해 설령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된다 하더라도, 그 일자리는 인간이 아니라 또 다시 “값싼” 휴머노이드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게다가 휴머노이드에게는 그 새로운 직무에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투입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인간은 새로운 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써야 하지만, 휴머노이드는 “업데이트” 한 번이면 곧장 직무 수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으로 노동시장에서 인간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는 것이다.<br/><br/>휴머노이드에 의해 “일자리가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자면 절대적 빈곤이 만연한 모습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전문가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는 인건비가 0에 수렴함에 따라 물가가 폭락하고, 기업들의 생산성이 폭발함에 따라 엄청난 세수가 확보될 것이라는 예측에 근거한다. 그들은 그렇게 거둬들인 “부”를 적절하게 “재분배”하면, 사람들이 일을 안 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미 여러 경제학자들과 실리콘밸리의 거물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이런 미래가 왔을 때 어떤 방식으로 “재분배”가 이뤄져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br/><br/>그러나 “일하지 않아도 풍요를 누리는 삶”이란 실현 가능성이 없다.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것”이라는 저주가 주어졌기 때문이다(창 3:19).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저주로부터 인류를 해방해 주시는 날까지, 노동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란 올 수가 없다. 그렇기에 만일 휴머노이드가 양산되어 싼값에 팔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풍요의 시대가 아니라, 빈궁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 노동 시장에서 휴머노이드와 경쟁해야 하는 인간에게 남는 선택지란 “불공정 계약”을 감수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거나, 아예 자기 자신을 파는 것 정도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br/><br/>그런 날이 언제 올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부디 교회의 휴거 이후이기를 바란다). 다만 확실한 것은 대환란 시대에는 하루 품삯으로 저축은커녕, 당일 저녁상을 마련하는 일조차 버거워지고(계 6:6), 인신매매가 성행할 것이라는 사실이며(계 18:13), 역사는 지금도 그런 미래를 향해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 담론을 이끎으로써 휴머노이드 기술이 불러올 재앙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런 무가치한 노력에 동참하지 않는다. 인류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그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실 분께서 약속하신 대로 속히 오시기를, 소망 가운데 기다릴 뿐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7: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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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특집 AI와 적그리스도의 왕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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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lt;편집자 주&gt;<br/>인류는 지금 역사상 그 어떤 세대도 경험하지 못한 문명적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거대 언어 모델(LLM)의 폭발적 성장으로 시작된 인공지능(AI) 혁명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었던 지성과 노동, 심지어 창조의 영역까지 집어삼키고 있다. 여기에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명목으로 “몸”을 입기 시작한 “휴머노이드”가 등장했다. 이에 세상은 “인류의 진화”이자 “유토피아의 도래”라며 찬사를 보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경고해 온 종말론적 징조의 그림자를 목격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포장된 이 거대한 시스템이 향하고 있는 종착지는 과연 어디인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본 특집은 고도화된 AI 시스템이 전 지구적 감시와 통제 메커니즘으로 돌변하여, 적그리스도가 구축할 단일 세계 정부의 핵심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초고도화된 디지털 시대를 살면서 기술의 편리함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 통찰과 재림을 대비하는 믿음의 이정표를 제시한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6: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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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목회를 시작하는 동역자에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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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목회는 영광스러운 부르심이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영적 전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여러 문제와 반대를 경험하게 된다. 성경은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 3:12)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목회자의 고집과 감정적인 태도, 말실수와 성급함으로 인한 오판, 교만, 인간관계의 미숙함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내어 불필요한 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문제를 직면하는 솔직한 용기뿐 아니라, 문제를 예방하는 지혜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 <br/><br/>무엇보다 목회의 통로인 “말”을 거룩하게 하라. 실제로 교회 안의 많은 상처와 분열은 “말”에서 시작된다. 말한 것은 지키고, 지킬 것만 말하라. 목회자의 말은 강단보다 비공식 자리에서 더 쉽게 무너진다. 식사 자리, 차량 이동, 사적인 대화, 심지어 문자와 SNS까지도 목회의 연장선이다. 강단에서의 광고조차 말할 내용은 미리 기록해 두고 자신의 생각과 말이 일치되도록 훈련하라. 들려오는 온갖 헛된 말이나 험담은 그 진위가 확인될 때까지는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 성도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좋은 점을 찾아 말하라. 비판하기보다 세워 주는 말을 하고, 진실만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에도 우선 그 성도의 선한 부분을 먼저 아뢰고, 그 다음 중보기도의 내용을 말씀드리라. <br/><br/>목회의 재정은 “실패의 통로”가 되기 쉬우므로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 재정은 반드시 체계적인 구조로 관리해야 하며, 개인의 양심에 맡겨서는 안 된다. 투명한 시스템이 목회자를 돈으로부터 보호한다. 목회자가 성도와 돈거래를 한다면 거의 신용을 다 잃었다고 보아야 한다. 외모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되, 특히 돈과 관련하여 더욱 그러해야 한다(약 2:3). 대접도 한 사람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받다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를 바로잡아 주지 못하게 될 여지가 있다. 또한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는 믿음과 무모함의 차이를 분별해야 한다. 분명한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간청하고 기대하라. 목회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누군가가 목회자를 섬기려고 베푼다면 정중히 받아들이고 감사하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말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그 손길들을 축복하고 자신도 관대하게 베풀어야 한다. <br/><br/>목회의 기초는 “인격”이기에 삶으로 신뢰를 얻어야 한다. 목회자의 권위는 위임된 것이며, 본을 통해 인정되고, 신뢰를 통해 유지된다. 지나치게 권위적이거나 지나치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 지도력을 잃기에, 목회자는 겸손과 담대함을 함께 가져야 한다. 맡겨진 양무리를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위가 필요한데(고후 10:8), 지도력이 없으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권위는 지배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벧전 5:3) 양무리의 본을 보인 섬김을 통해 인정받는다. 목회자도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신뢰를 잃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든 실수할 수 있기에 실수했을 때는 즉각 사과해야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패착이다. 잘못을 지적하려면 당사자를 개인적으로 대면하라. 비겁하게 소위 “표적 설교”를 통해 공격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긴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교에 거론하고자 할 때는 최소 한두 주가 지난 뒤에, 자신의 감정적 찌꺼기들이 모두 여과된 후에 설교에 올리는 것이 현명하다. 즉 전달할 내용을 충분히 자신 안에서 먼저 여과시키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하도록 보편화시킨 후 전달해야 한다. 핵심을 비껴가지 말고 분명하게 설교하되, 메시지는 강하면서도 태도는 진실되고 은혜로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목회자의 진정성을 통해 신뢰를 얻는다. 강물이 흐르다 물 좀 튀었다고 “이 강은 거꾸로 흐르네!”라고 단정 짓지 않듯, 사람도 가끔 실수할 수 있으니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기 과시나 독선적 태도를 경계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분명한 기준과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결국 목회자의 지도력은 직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경건과 진실성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담긴 인격에서 나온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지만(살전 5:12,13), 그들이 설령 목회자를 좋아하지 않을 때에도, 목회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 이를 극복해야 한다(딤전 4:12).<br/><br/>목회의 열매인 “관계”를 지키라. 목회자는 순결과 도덕성에 흠이 없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특히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한 경계가 필요하다. 우선 목회자는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며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중이 알도록 해야 한다. 회중 앞에서는 절대 어떤 방식으로든 아내를 난처하게 만들거나 깎아내리지 말라. 교회 성도들 누구라도 목회자와 그의 아내가 서로 깊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자를 들이받고자 하는 양의 속성이 표출될 때 목자에게 틈이 없으면 목자의 아내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 여성과의 상담에서 장시간 상담하거나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간략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한 권면을 제시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이성 상담은 기본적으로 10-15분 내에 마무리하되, 상담이 계속 요구된다면 아내나 적합한 자매를 참석시키거나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이것이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더라도 『악은 어떤 형태이든지 피하라.』(살전 5:22)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사탄은 종종 작은 틈을 통해 목회자의 삶과 사역을 무너뜨린다. <br/><br/>교회 안의 동역자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모든 지체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하는 동역자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원칙과 역할을 제시하되, 동시에 존중과 배려로 관계를 세워 가야 한다. 정기적인 기도와 소통, 명확한 책임 분담은 많은 갈등을 예방한다. 또한 일을 위임할 때는 단순한 친분보다 책임감과 신실함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br/><br/>목회자는 “반대”와 “비판”도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데, 모든 반대를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어떤 반대는 목회자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일 수도 있기에 비판을 들을 때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동시에 성경적 확신이 있다면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교리 문제, 공개적인 죄 등에 대해서는 즉시 대응하고, 감정 충돌, 오해에 관한 문제는 시간을 두고 대처하라. 중요한 것은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온유함과 성숙함이다. 모든 사람이 목회자를 적극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려는 자세가 필요하기에(롬 12:18),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사람들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가 풀리고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도 많다. 교회 안에서 분열이나 갈등이 발생할 때도 지나치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오히려 교회의 질서와 평안을 가져오기도 한다(마 15:13). 목회자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침착함과 사랑을 유지하는 훈련에 집중해야 한다.<br/><br/>목회는 능력이 아닌 관계의 문제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목회 사역이 바빠질수록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더더욱 필요하다. 목회자 자신도 언제든지 실수하고, 상처받고, 낙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연루되지 않는 한, 그분께서 부르신 종을 버리지 않으신다. 목회 현장에서 수많은 문제를 만나더라도, 기도와 사랑과 말씀 안에 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신다. 그러므로 목회를 시작하는 동역자는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동시에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지 않도록 늘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27: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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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예수 그리스도의 강건하고 훌륭한 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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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대배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죄의 유혹과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번 타락의 늪에 깊이 빠져들면, 그곳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와 영적인 회복을 이루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이는 인간이 가진 타락한 육신의 본성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서 성도의 발목을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마귀의 권세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마귀의 공격이 어떠한 경로와 방법으로 이뤄지는지에 대한 영적 인식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지금 이 시대를 향하여 『아주 어려운 때』(딤후 3:1)라고 명확히 경고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r/><br/>아프리카 선교의 최전선에서 전 생애를 바쳤던 C.T. 스터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즉 세상에서 용맹하다고 자부하는 어떤 전사들보다 더 용맹하며, 질병과 위험, 그리고 죽음조차 자신의 친구처럼 여길 줄 아는 영웅이다.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단지 물방울이 닿거나 연기에 스치기만 해도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초콜릿 그리스도인’에 불과하다.” 스터드의 이 날카로운 지적은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주님을 위해 아무런 고난도 감당하려 하지 않는 나태한 성도들을 향한 꾸짖음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초콜릿 그리스도인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강건한 군사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님을 위해 기꺼이 싸우기를 원하는 소수의 군사가 존재하며, 우리가 이겨야 할 영적 전쟁은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즉 어떤 고난도 감당하겠다는 강건함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어야만 한다.<br/><br/>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배운 진리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하신 두 가지 지상명령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행 1:8)과 “모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마 28:20)이다. 주님을 따랐던 사도들로부터 교회사 속의 모든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타인에게 진리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영적 군사들이었다.<br/><br/>“가르치는 일”은 강단에 서는 목사나 성경 교사에게만 맡겨진 것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근본적인 사명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든 인류는 죄 가운데 태어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다”는 성경의 선포를 복음을 듣는 이들에게 명확히 인지시키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하는 것이 영적 군사의 가장 기초적인 임무다.<br/><br/>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성경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진리를 또 다른 신실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여, 그들 역시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영적 재생산의 통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성경적 지식은 단순히 머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의 현장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해야 하며(딤후 2:15),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하여 주변인들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바로 설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br/><br/>거듭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말씀의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영적 성장을 거부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고기로 먹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지금까지 소화시킬 수 없었음』(고전 3:2)이라고 책망했다. 성경대로 믿는 대열에 합류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성장하는 일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한 설교자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재능,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인생을 거십시오! 인생에서 그보다 더 고귀한 목표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br/><br/>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고난을 견디며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든 성도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군사로서 양육 과정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갓 거듭난 때가 마귀의 공격 속에서 성장하느냐 시들어 버리느냐를 결정짓는 영적 “골든타임”이기 때문이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구원 후 2주 내에 양육이 시작되지 않으면 마귀가 구원의 확신을 흔들고 결국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바다거북 수백 마리 중 단 1%만이 사투 끝에 생존하듯, 성도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로 인도되어 정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의 결과다. <br/><br/>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영적 전쟁터에 투입된 군사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옷”으로 무장하여 어떤 고난도 견뎌 내야 한다(딤후 2:3). 고난은 강인한 군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다. 고된 훈련이 단단한 용사를 빚어내듯, 고난을 통한 영적 연단만이 훌륭한 군사를 만들어 낸다.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라는 말씀처럼, 고난을 견뎌 내는 사람만이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다.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주의 말씀을 지키라는 하늘의 신호”라는 말이 있다. 시련을 견뎌 낸 군사는 이전보다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며, 주님께서 쓰시는 강건한 군사로 성장하게 된다.<br/><br/>성경은 『전쟁에 임하는 자는 아무도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라고 말씀한다. 군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생의 일들에 대한 집착”이다. 세상일이 너무 바빠 성경 읽을 시간도 없고, 기도는 형식적이며, 복음 전도지 한 장 전할 여유조차 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이생의 일들에 결박된 상태다.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기 위해 헛된 씨앗을 심고 있는 것이다. 군대 대장이신 주님께서 하늘로의 소환 명령을 내리시기 전까지, 우리는 이 땅의 전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초소를 죽기까지 사수해야 한다.<br/><br/>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규칙대로 달리는 사람이다. 헤비급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이 반칙으로 실격패하고 몰락했듯이, 규칙에서 벗어난 자들의 끝은 오직 부끄러움뿐이다. 성경 속 영웅 삼손 역시 성별의 규칙을 가볍게 여기다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성경은 『규칙대로 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하리라.』(딤후 2:5)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인 성경의 법칙을 철저히 준수할 때 비로소 인정받는 군사가 될 수 있다.<br/><br/>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단순한 완주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기 위해 이기려고 애쓰는 질주여야 한다.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일에 자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어질 면류관을 받으려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고자 함이라』(고전 9:25).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상을 얻기 위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절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전 9:27). 경주자에게 요구되는 절제와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결정짓는 기본적인 규칙이다.<br/><br/>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규칙적인 말씀 읽기와 기도, 성경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자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기 위해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훈련은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지속해야 할 영적 과업이다.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신실함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 파국적인 결과는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지난 역사 속에서도 뜨거운 열심을 내던 이들이 낙오한 것은 “규칙대로”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어긴 자들에게 가차 없이 실격 선언을 하신다. 면류관을 얻는 영광은 오직 말씀의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누리게 된다.<br/><br/>조지 패튼 장군은 “군인의 가장 영예로운 죽음은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 역시 주님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죽기까지 신실한 군사로 남기 위해,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고,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에 헌신하라. 그리고 주님을 위한 고난을 감사히 여기고, 썩어 없어질 이생의 일들에 마음을 뺏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면류관을 예비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이기도록 달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지켜 낸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바로 그 바울이 지금 우리를 향해 “은혜 가운데서 강건하라!”(딤후 2:1)고 권면하고 있다. 앞서 간 성도의 응원을 받는 우리 모두가 경주를 완주하고 주님과 대면하는 그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는 거룩한 칭찬과 최고의 명예를 얻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20:3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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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정치적 술수의 산물인 “니케아 신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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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A.D. 325년의 니케아 공회는, 콘스탄틴 황제가 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국가교회를 수립하고 기독교에 대한 황제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소집한 공회이며, 역사적으로 개최된 첫 번째 공회이다. 이 공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삼위일체 교리, 니케아 신조, 부활절 날짜, 그리고 교회 규범 20개 항목이었다. 친카톨릭 교회사가들은 이 공회를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된 중요한 공회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공회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고백을 담은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였기 때문이다.<br/><br/>니케아 공회의 삼위일체 논쟁에서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된 신”으로서 하나님과 유사한 존재(유사 본질)이긴 하지만 동일한 존재(동일 본질)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아리우스파의 주장에 반대한 아타나시우스파는 아들 하나님은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 “낳아진 존재”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아리안주의라고도 일컬어지며, 현대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들의 교리로 삼고 있다. <br/><br/>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경”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마지막 부분에 아리우스파의 파문을 염두에 둔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성자께서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서 생겨났다.”라고 말하는 이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다른 실체나 본질에서 생겨났다거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창조되었거나 변할 수 있거나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가톨릭 교회는 파문한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 &lt;하인리히 덴칭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gt;, pp.125,126). 니케아 신조는 이후 보완되어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명명된다. <br/><br/>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의 통치 체제를 굳건히 할 목적으로 기독교의 통제권을 갖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종교 지도자들을 황제의 통제하에 두고 그들의 종교적 주장을 받아들여 줌과 동시에, 콘스탄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콘스탄틴은 당시 기독교계에 있었던 문제들 중에서 “삼위일체” 문제와 “부활절 날짜” 문제를 기회로 삼아 황제의 주관하에 공회를 소집한 것이었다. 콘스탄틴은 종교 계급을 자신의 독재하에 통제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콘스탄틴의 진심은 결국 자신이 교회들의 권위가 되려는 것이었다.<br/><br/>사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주요 논제는 “삼위일체”나 “부활절 날짜”가 아니었다. “삼위일체”는 이미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한 교리였고, 부활절은 성경에서 날짜를 정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주요 논제는 “침례”와 “교회의 순수성”과 “재림”이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물침례에 의한 구원”과 “기독교 공인 전의 배교자들”과 “후천년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교회들로부터 “분리”를 실행하고 있었으며, 이미 “노바티안”과 “몬타니스트”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오염된 교리를 실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성별”을 실행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니케아 공회는 황제의 정치적 술수에 휘말려 그에게 기독교 통제권을 넘겨 준 기념행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br/><br/>제50차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회장 유창형 박사) 정기학술대회가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보내며”라는 주제로 지난 5월 9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니케아 신조를 통해 본 기독론 해석과 신학적 교훈”을 주제로 안명준 박사(한국성서대 초빙교수, 평택대 명예교수)가 기조 강연을 했는데, 니케아 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성경적 이해가 잘못되었기에 이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br/><br/>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에 대해 “교회사적으로 가장 보편적·규범적 신앙고백으로, 기독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단적 신학 사상을 평가하는 초석이자 규범으로 기능해 왔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카톨릭이 정한 “신조”나 “규정”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친카톨릭적 사고에서 나온 평가이다. “신조” 같은 것을 만들어 예배 등의 의식 때마다 암송하며 “헛된 반복”을 계속하는 것은 카톨릭의 전통에 불과하다. 하물며 그가 말한 “기독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단적 신학 사상을 평가하는 초석이자 규범”은 “니케아 신조”가 아니라 “성경”이다. 그는 잘못 배워도 한참 잘못 배운 것이다. “신조” 따위를 “성경”이 있어야 할 권위 위에 올려놓는 것은 늘 카톨릭이 해 온 일이기 때문이다.<br/><br/>또한 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가 원래 “예배와 고백을 위한 언어였으나, 아퀴나스에 이르러... 니케아 신앙을 철학적으로 완성했지만, 성경의 구속사 중심성과 은혜의 급진성을 약화시킨 한계를 가진다.”라고 말했는데, 니케아 신조는 결코 “예배와 고백을 위한 언어”가 아니었으며, 역사적으로 콘스탄틴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인위적인 문서였기에, 그와 관련하여 “구속사”라든가 “은혜”와 같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치를 억지로 찾아내어 비판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는 “니케아 신조가 오늘날까지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를 묶어 주는 유일한 ‘신학적 분모’이자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만들어 왔다.”라고 주장했다. “신조” 하나를 과대평가하고 신성시하기까지 하는 표현에 더하여,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카톨릭이 스스로를 칭할 때 사용하는 명칭을 가져다가, 카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를 묶어 하나의 교회라고 칭한 것은 극단적인 친카톨릭적 성향을 보여 준다 하겠다. <br/><br/>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는 교회 예배 시 ‘사도신경’과 더불어 함께 고백돼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고백되면 좋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도신경”에 관한 그의 역사적, 신학적 평가에도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드러내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과는 무관하게 로마의 히폴리투스(A.D. 170-235)가 세례 시 사용한 신앙고백문에 기초하고 “니케아 신조” 등의 영향을 받아 8세기경 현재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카톨릭에서 주로 “유아 세례”나 “묵주 기도”를 할 때 사용한다. 이교도인 카톨릭의 잘못된 전통이 개신교에도 그대로 전해져서 마치 불교의 염불처럼 암송되고 있는 것인데, 한국 교계에서 소위 “주기도문”과 함께 가장 많이 암송되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다. 이러한 “헛된 반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하신 것이다(마 6:7). 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나 “사도신경”이 신학적으로 무가치한 카톨릭 전통임을 모른 채 실로 무지한 주장을 펼친 것이다. 바른 신앙 고백은 “신조”나 “신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 하나하나를 믿는 “믿음” 그 자체가 바른 신앙 고백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18:2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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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소수자”를 향한, 진리를 상실한 긍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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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4월, 뉴스앤조이는 서울 중구에 소재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서울제일교회에서 열린 고(故) 육우당(본명 윤현석) 23주기 추모 예배 소식을 보도했다. 그는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학창시절 내내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학교를 자퇴한 뒤 사회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동성애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사회를, 특히 “기독교인들”을 탓하며 18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는, 유서에 이렇게 썼다.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나 죽은 게 아깝지 않다고 봐요. 몰지각한 편견과 사회가 한 사람을, 아니 수많은 성적소수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반성경적, 반인류적인지. 우리더러 죄인이라 하기 전에 자기네들이나 먼저 회개하고 이웃사랑 실천을 해야 할 거예요.”<br/><br/>이 자리에서 교인들은 “그 모습 그대로” 등의 CCM을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고, 설교를 맡은 홍보연 목사는 “육우당이 겪은 고통뿐 아니라, 끝까지 붙든 소망을 함께 기억하자”고 했다. 여기서 말한 “소망”이란, 이 추모 예배 참가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던 것처럼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누구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이와 같은 “소망”을 품은 교인들은 아직까지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런 자들이 제도권 안에서 버젓이 정체를 드러낸 채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봐도 격세지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 기독교 단체인 “무지개예수”에 따르면, 당당하게 교회 이름과 장소를 공개한 “무지개교회,” 즉 “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의 수는 2017년을 기준으로 서울에만 11곳, 전국적으로는 19곳이었다. 눈치가 보여 공개적으로 “무지개교회”임을 표명하지 못하는 교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몇 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뉴스앤조이에서는 2023년 「성소수자 교인 “커밍 인” 과정 책으로 기록한 교회」라는 제하의 기사로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정언향교회”라는 곳을 소개했는데, 공식적으로는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그 교회는 성소수자들을 환대하되 “무지개교회”임을 표명하는 대열에는 동참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과거에 정체가 탄로 나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둔 경험을 했던 성소수자 교인이 거기에 정착했던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다니는 교회가 “무지개교회”로 알려지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었던 것이다.<br/><br/>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권영진 목사는 막 교회를 개척했을 무렵부터 “언젠가 우리 교회에도 성소수자 교인이 올 수 있을 텐데.” 하는 고민을 품고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했다고 한다. “성서학” 전공자인 그가 내린 결론은 “성경에서 죄악시하는 동성애는 오늘날 성소수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였다. 그러던 중 정말로 한 청년이 스스로가 성소수자임을 털어놓는 일이 벌어지자, 정 목사는 그가 교회에서 “커밍아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 일에 정 목사를 도운 김석희 전도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는 성소수자만을 위한 교회나 운동 단체처럼 성소수자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썼던 건 아니에요. 눈앞에 성소수자 지체들이 드러났고, 이들과 어떻게 함께 지낼까를 고민했던 것뿐이죠... 저는 교회가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 다른 위치와 입장에 있는 서로를 들여다보고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br/><br/>“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들”은 동성애는 죄가 아니며, 설령 죄일지라도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인데 어찌하여 성소수자만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느냐고 다른 교회들을 향해서 따져 묻는다. “무지개예수”는 “동성애는 죄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성서의 모든 구절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앞뒤 문맥 속에서, 성서가 집필되었던 당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동성애를 부정하고 죄악시했던 성서 구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와 같은 구절의 경우...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자를 도구화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밖에 동성애를 정죄하는 데 쓰이는 모든 성구들은 성경에 흐르는 무게 있는 가르침인 약자에 대한 보호, 주어진 성의 의미, 사랑, 정의, 평등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br/>그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소돔이 동성애로 인해 멸망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소돔이 멸망한 이유로 동성애를 직접 언급한 구절이 없습니다... 특히 선지서들을 보면 이사야는 소돔의 죄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학대하고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 악한 행위(사 1:10-17)를, 예레미야는 간음, 거짓말, 악행(렘 23:14)을, 에스겔은 교만, 음식물의 풍족함, 즉 탐식, 배고픈 자에 대한 무관심, 가난한 자들을 방기하고 돕지 않는 것(겔 16:49)을 소돔의 죄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기록들을 볼 때 소돔의 죄를 동성애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더구나 소돔성이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더 근거가 없는 해석입니다.”<br/><br/>잘 모르면 입이라도 다물면 될 터인데(잠 17:28), 대부분의 무식한 군상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한다(요 9:40,41). 먼저, 성경은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주지시켜 줄 필요가 있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계 1:11).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께서는 문자로 쓰인 “책”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되, 처음부터 그 끝을 선포하는 분이시다(사 46:10). 오늘날의 학자들은 성경이 여러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에 의해 차츰차츰 그 모습을 갖춰 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이 하늘, 곧 시간의 흐름이 멈추기에 “영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이미 영원히 세워졌다고 말씀하신다(시 119:89). 따라서 성경의 어떤 부분도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재해석”될 필요가 없다. 성경은 그 모든 변화까지도 아우르며 “끝”을 선포하실 수 있는 분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질문은 “오늘날 그 구절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오직 이것이어야 한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성경에서 『너는 여자와 함께 하듯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그것은 가증함이니라.』(레 18:22)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br/><br/>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서는 남색자가 있지 못할 것이니라.』(신 23:17)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변개된 성서들에서는 “남색자”라는 단어가 신명기의 말씀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다. NIV, NASB, NRSV는 모두 “남색자”를 “신전(이교)에서 몸 파는 자”로 바꿔 버렸고, 한국 교회의 개역개정판도 “남색자”를 “남창”으로 옮기고 있다. 이 “남색자”라는 단어는 영어로 “sodomite”이며, 직역하면 “소돔인”이라는 뜻이 된다. 왜 “무지개예수” 같은 단체가 “소돔성이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라고 주장하는지 이제 알 만하지 않은가? “sodomite”라는 단어를 빼 버린 변개된 성서들을 사용하는 주석가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할 뿐인 그들로서는, 소돔인들의 멸망을 초래한, 소돔인들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죄가 바로 “남색”이었음을 알 턱이 없는 것이다. [참고로, “sodomite”라는 단어가 빠지게 된 것은 순전히 동성애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1900년을 전후하여 나온 변개된 성서들인 RV와 ASV에도 “sodomite”라는 단어는 그대로 있다. 1960년대에 일어났던 “게이해방운동” 전에는, “동성애는 불과 유황을 받을 만한 죄다.”라는 것을 변개된 성서들도 인정했던 것이다.]<br/><br/>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기에, 설령 성소수자라고 해도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고, 또 자신이 그런 짓을 자행한다는 사실을 버젓이 드러내는 사람이 지역 교회에 소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눅 10:26)를 묻는다면, 성경은 만일 형제라고 하는 어떤 자가 음행하는 자이고 그것이 알려졌거든, 그와 사귀지도 함께 먹지도 말고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겠다(고전 5장). 동성애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또 다른 “음행”이다(고전 6:9,10). 그런 음행하는 자를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도록 허용하는 일은 “이웃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다(고전 6:5). 정 그런 자들을 포용하는 “사랑”을 베풀고 싶다면, 교회 간판부터 내리고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느니라』(고후 13:8).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09: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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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기도문 오독(誤讀)의 시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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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책의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 주관성이 독자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혹자는 독자의 주관이 개입된 “창조적 오독”이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킨다고 했지만, 오독은 대부분 창조적이지 않으며, 성경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독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취하는 책이 아니다. 그러한 자세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의도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본문에 따라서는 오독한 독자를 지옥에 던져 넣을 수도 있다. 교회와 관련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배우거나 만들어 낸 해석의 감옥에 갇혀, 성경 본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류가 강화되는 비극에 빠져 있는 것이다.<br/><br/>우리에게는 성경을 아무렇게나 읽을 자유가 없으며, 오히려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것을 읽는 독자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단하는 인격을 지닌 매우 무서운 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성령의 칼』(엡 6:17)인 성경은 그것을 잘못 읽어 낼 때 혼을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된다. “책들의 제왕”인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도 권위가 높기에, 그 해석에 따른 책임 또한 그 무엇보다 무겁고, 결과는 극과 극을 오간다. 해석에 따라 하늘나라와 지옥을 오가는, 초극단적인 결과를 낳는 책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br/><br/>이 마지막 때는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라는 말에는 “그 시기의 특징이나 징후가 뚜렷한 시대적 구간”이란 뜻이 담겨 있다. 본 논단의 제목을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라고 정했을 때는 나름대로 엄중한 이유가 있다. 현재 우리가 지나고 있는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1900년 - 현재)는 “주기도문 오독”이 영적 소경이 된 모든 교회들의 강단과 성경 공부, 신학교들의 강의실과 기독교 서가의 책들에서 매우 광범위하고도 뚜렷하게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오독”을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거대한 영적 특징”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br/><br/>혹자는 주기도문에 관하여 “학자연(學者然)하는” 설명을 늘어놓는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수록된 단순한 ‘기도 교육용 텍스트’나 신약성경 내에 고립된 파편적 본문이 아니다. 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언약 사상과 고대 세계의 종교적·문화적 토양이라는 거대한 지평 위에서 주기도문을 재위치시켜야 한다. 후반부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와 같은 간구는 철저히 고대인들이 마주했던 실존적 불안정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기도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형성되고 전승되던 고대 세계의 문화적·종교적 토양에 대한 배경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br/><br/>풍유적 해석을 선호하는 자들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창조적 오독”으로 횡설수설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라. 예수님이 고작 하루 먹을 밥을 구하라고 하셨겠는가? 여기서 ‘양식’은 영적인 양식, 즉 ‘말씀’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기도로 격하시키지 말라.” <br/>“행위 구원”을 좋아하는 자들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푹 빠져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구원의 조건이다. 성경에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남을 용서 안 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 안 하신다는 뜻이다. 즉 구원은 내 행위에 달린 것이다!”<br/><br/>“단편적 성경 지식 예찬자”는 구절과 구절을 비교해 가면서 오류를 방출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는 오역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왜 주기도문에는 하나님보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고 기도하는가? 번역이 잘못됐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번역해야 맞다.”<br/>본 논단을 읽는 독자는 이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며, 주기도문을 어떻게 “오독”하는가? 독자도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를 부채질하는 숨은 공모자인가? 그 허황된 지식의 잿더미 위에 얹어질 또 하나의 불쏘시개인 것인가? <br/><br/>배교한 교회들에서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기도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알려 주신 “제자들의 기도”이다. 이 구절의 『너희』를 신약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함으로써 치명적인 이단 교리를 교회에 퍼뜨린 자들이 무수히 많았다. 『너희』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유대인 제자들”을 지칭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낳으신 “한 아들”이기에(출 4:22),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민족적으로 『우리 하나님』(수 24:24, 삼상 7:8, 왕하 19:19 등)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이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영광에 초점을 맞춘 내용으로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은 『교리』(딤후 3:16)이기에, “제자들의 기도” 역시 “교리”적으로 올바르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 시작부터 “아버지의 왕국의 도래”가 강조되는 기도에 “왕국”과 관련된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은 너무도 당연하다.<br/><br/>“유대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기도는 『아버지의 왕국』이 문자적으로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에 관해 유대인 제자들에게 통치를 약속하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국을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가 나의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리라』(눅 22:29,30). 이 왕국은 왕국 백성인 유대인의 거부로 초림 때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주님께서 장차 재림하시어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눅 1:31-33) 물리적인 왕국이 된다. 초림 때는 주님의 왕국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지만(요 18:36), 재림 때는 세상 왕국들을 접수하여 그분의 왕국으로 삼으실 것이다(계 11:15). 이것은 교회 시대의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롬 14:17)가 아닌,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왕국이다.<br/>주님께서는 미래, 곧 재림 때에 “왕국이 임할 것”(마 6:10)을 구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기도”가 드려지는 시점은 왕국이 임하기 전인 “대환란 기간”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그 기간에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놓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br/><br/>1. 일용할 양식 : 광야에서의 초자연적 부양<br/>『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는 간구는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다. 주님께서 왕국을 가져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전무후무한 대환란이 있게 되는데, 이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난 기간이다.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셀라 페트라”라 불리는 바위 성읍으로 피신한 유대인들은 짐승의 표 없이는 경제활동을 할 수 없기에(계 13:17), 후 삼 년 반 동안 초자연적인 부양을 받아야만 한다(계 12:14).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받았듯이(시 74:14, 미 7:14,15), 대환란 때의 유대인 환란 성도들은 그날의 생존을 위해 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대환란 때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서 드려야 할 실질적인 “생존 기도”인 것이다.<br/><br/>2. 용서의 조건 : 행위와 인내가 요구되는 대환란 기간의 구원 방법<br/>『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들도 용서해 주시오며』(마 6:12)라는 말씀은 교회 시대의 은혜 복음과 전혀 다른 교리를 담고 있다. 교회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 행위라는 조건 없이 죄 용서를 받았지만(골 1:14), 대환란 때에는 타인의 죄(죄의 빚, 눅 11:4)를 용서하는 “행위”가 뒷받침되어야만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 이는 명백한 “행위 구원”의 요소이며, 대환란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더하여 계명을 끝까지 지키는 “인내”가 뒤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계 14:12). 『대환란』(마 24:21)을 예언하는 마태복음 24장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가 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인 “왕국 복음”으로서 제시된다(마 24:13,14). “끝까지 견디는 인내”를 강조하는 구원론은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만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환란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br/><br/>3.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 : 적그리스도의 박해에 따른 배교의 위험<br/>『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마 6:13)라는 간구는 대환란 때의 급박한 상황을 전제한다. 환란 성도들은 행위로 구원을 지켜야 하기에, 광야의 시험 때처럼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죄를 지으면 구원을 상실할 위험이 크다(히 3:8). 무엇보다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목베임을 당하는(계 13:15) “악”의 통치 아래서, 믿음을 부인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날마다 시험에서 구원받는 일은 생명보다 귀중한 일이 된다. 만약 적그리스도의 극심한 박해 아래서 시험에 들어 적그리스도와 타협한다면, 즉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다면 “구원을 잃어버려” 영원한 불못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계 14:9-11). 대환란 때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끝까지 인내하며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조상이 2천여 년 전에 거부했던 그 “왕국”을 기다려야 한다. “제자들의 기도”는 대환란 때에 왕국을 기다리는(마 6:10) 유대인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이며, 기도에 담긴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드려져야 할 기도이다.<br/><br/>기도의 마지막 내용은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마 6:13)이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시작 부분인 10절에 이어 또다시 “왕국”을 언급하시며 기도를 종결지으신다. 기도의 “시작”과 “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에 세우실 “왕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태복음 6장의 “제자들의 기도”는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 있는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그들을 구원하실 메시아 왕의 지상 왕국을 기대하면서 드려지는 기도인 것이다.<br/><br/>초림 때 실패한 왕국, 그 “연기된 왕국”에 대한 무지가 “신학적 혼란”을 낳았고, 무수한 “창조적 오독”을 낳았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가르치신 당시 상황은 철저히 유대적인 “왕국 복음” 전파 시기였다(마 4:23). 이 왕국 복음은 다시 전파될 것이다(마 24:13,14). 그 일이 일어나는 대환란 때 드려질 기도를 분별하지 못한 채 예배 때마다 주문처럼 웅얼거리는 한국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딤후 2:15) 해석하지 못하는 “아전인수식 영해(靈解)”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07: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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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을  매일 읽어야 할 이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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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있다. 독서가 육체의 양식처럼 마음을 채우고, 사유와 감정, 인격을 키우는 데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독서가 좋은 습관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을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잡지식이라든가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 이론과 정보는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독서가 의미 있으려면 “양서들”을 읽어야 한다. 특히 모든 인간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단순한 삶의 유익을 넘어 인생의 존망을 결정하기에 다른 책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생 필독서이다. 이 책에 무지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심지어 한 국가까지 멸망하게 된다(호 4:6). 그 책은 바로 절대 진리의 말씀인 “성경”(단 10:21, 요 17:17)이다.<br/><br/>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성경 읽기를 등한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바쁜 일상에 치여 사느라 여유가 없는 것도 원인일 테지만, “성경책”보다는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생활 습관이 성경 읽는 시간을 빼앗는 더 큰 원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하면 영적 지식에 무지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성도의 영적 생활이 무기력해지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형식적으로 전락하게 된다. 심지어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기현상까지 벌어진다(호 8:12).<br/><br/>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성경을 읽는 데서 시작한다. 성경을 읽는 일은 단순한 선택 사항이나 기호가 아니라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 에 전념하라.』(딤전 4:13)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역자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명령이다.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려면(딤전 2:4) “성경”을 우선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심지어 인생의 성패(成敗)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 요소이다. 그렇기에 “성경을 매일 읽는” 삶은 굉장히 중요하다.<br/><br/>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명령을 지키지 않아 인생에 실패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솔로몬이 인생 말년을 배교로 끝내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곁에 두고 그것을 평생 읽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와 함께 두고 평생 동안 그것을 읽어서 그가 주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배우게 하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과 이러한 규례들을 지켜 그것들을 행하게 할지니라. 그리하여 그의 마음이 자기 형제들보다 높아지지 아니하고 그가 그 계명에서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아니하면 종국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와 그의 자손이 그 왕국에서 자기 날들을 늘리게 되리라』(신 17:19,20).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왜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말하자면 매일 성경을 읽어야만 인생에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매일 성경을 읽는 성도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건을 스스로 구비할 수가 있다.<br/><br/>첫째, 성경을 읽으면 『주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욥 28:28).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경이로운 역사, 자애하심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을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성경을 읽으며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성경을 읽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위로, 다가올 심판과 영광을 인식하게 되어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히 12:28)으로 그분을 섬기게 된다.<br/><br/>둘째, 성경을 읽으면 단순히 말씀을 듣기만 하지 않고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다(약 1:22).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순종의 전제 조건은 일단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다. 성경을 알려면 그 책을 읽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의 성경적인 설교나 강의를 듣는다고 해도 그 일이 성경을 직접 읽고 깨닫는 것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그것을 읽는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판별한다(히 4:12). 그렇기에 우리가 성경을 직접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찔림을 주시고, 우리가 그에 반응하면 말씀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셋째, 성경을 읽는 성도는 그 『마음이 자기 형제들보다 높아지지』 않는 겸손함을 지니게 된다. 말씀을 매일 읽음으로써 진리의 지식 안에서 믿음이 올바르게 자라는 성도일수록,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기 때문이다. 지역 교회 안에는 연약한 지체를 함부로 판단하며 잘못을 섣불리 지적하는 자들이 있고, 신실한 목자의 설교와 권면, 섬김을 폄하하며 불평을 쏟아냄으로써 교회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롬 12:3) 품고서, 은혜가 아닌 지식에 치우쳐 교만해져 있는 것인데(고전 8:1), 이런 자들의 결정적 특징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의 마음이 형제들보다 높아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점을 입증한다. “겸손함”은 “주를 두려워함”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잠 22:4). 이 모든 선한 열매는 성경을 항상 진지하게 읽는 성도에게 나타나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 5:5).<br/><br/>넷째, 성경을 읽는 성도는 죄를 멀리한다(시 119:9). 무엇을 보고 듣느냐가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유튜브나 TV 같은 세속적 매체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그 마음이 세상의 죄악된 조류에 휩쓸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이 치명적인 오염을 방지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굳게 간직하는 것이다(시 119:11). 성도의 속사람이 말씀으로 충만해지면, 더러운 세상의 욕심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사라진다. 설령 연약함 가운데 죄에 넘어져도 『말씀에 의한 물』(엡 5:26)로 깨끗이 씻어 다시금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다(요 13장). 죄에 승리하는 삶을 갈망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br/><br/>다섯째, 성경을 읽는 성도의 삶은 풍성한 열매로 가득해진다. 우리가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그 점을 알려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더 많은 열매』, 『많은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고 하셨다(요 15:2-8). 말하자면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행하여 주님께 밀착할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성경을 읽는 데 있다! 특히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번성하게 된다. 『그의 즐거움이 주의 법에 있으니, 그가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강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의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하리니, 그가 무엇을 하든지 번성하리로다』(시 1:2,3).<br/><br/>솔로몬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업인 “성경 읽기”를 멸시한 탓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는 성도는 그 말씀을 멸시하는 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을 멸시하는 자가 맞게 될 파멸을 경고한다(잠 13:13). 성경 읽기를 게을리함으로써 자멸하지 말라!<br/><br/>인생의 진정한 성공과 번영은 “성경”에 달려 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의 길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고 네가 좋은 성공을 이루리라』(수 1:8). 밥 존스 시니어가 설파했듯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행하는” 삶이 진정 성공한 인생이다. 이러한 삶을 실현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록된 그대로 철저히 실행해야 한다. 그럴 때 인생의 실패를 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r/><br/>바울이 “읽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고 했던 당부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참으로 엄중하고도 중요한 명령이다. 바울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까지도 책 읽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딤후 4:13). 그가 그토록 읽고자 했던 것은 당연히 “성경”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성경을 “읽는 것”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물론 성경뿐만 아니라 영적 성장에 유익한 “양서들”도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피터 럭크만 목사가 성경 외에도 여러 신앙 서적들을 추천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성경 읽기가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말라. 성도는 성경을 필두로 검증된 좋은 책들을 읽으며, 인생의 귀한 시간을 가치 있게 선용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35: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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