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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한국 교계 비평</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5</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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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교회를 세우는 성경적 징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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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교회에 대한 성도의 거룩한 의무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고전 14:12). 여기에는 “교회의 징계”가 포함되는데, “징계”는 오늘날 지역 교회에서 가장 잘못 다루어지는 성경적 명령들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징계가 있다(히 12:5-11, 계 3:19). 사랑이 없는 징계는 가혹한 처벌이 되지만, 징계가 없는 사랑은 죄를 묵인하는 무책임한 관용이 된다. 성경적인 “교회의 징계”는 거룩함과 질서 가운데 교회를 세우고 범죄한 성도를 회복시킨다. <br/><br/>“교회의 징계”에 관한 대표적 본문은 마태복음 18:15-20이다. 주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개인적인 권면”으로 시작하여 “증인을 동반한 권면,” “교회의 공식적인 개입,” 그리고 “교제의 단절”에 이르는 단계적인 절차를 말씀하셨다(물론 마태복음 18장의 문맥과 당시 이스라엘을 향한 사역이라는 교리적 측면은 별도로 고려돼야 한다). 성경은 공개적인 죄를 지속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제거하라고 명령하고(고전 5장), 무질서하게 행하는 형제를 다룰 것을 명령하며(살후 3:6,14,15), 범죄한 사람을 온유의 영으로 바로잡으라고 명령한다(갈 6:1). “교회의 징계”는 지역 교회가 죄로 교회를 허무는 성도를 성경의 권위에 따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필요한 경우 교제를 제한하거나 중단함으로써 그 범죄한 사람의 회복을 추구하고, 교회의 거룩함과 질서를 보존하는 성경적 조치​인 것이다.<br/><br/>징계의 첫 번째 목적은 “교회의 거룩함을 보존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죄를 책망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라고 말했다. 교회가 드러난 죄를 알고도 방치하면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교회가 된다. <br/><br/>징계의 두 번째 목적은 “다른 성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죄는 전염력이 강해서 처리되지 않은 죄는 다른 성도들을 더럽힌다. 성경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책망하여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라고 명령한다. <br/><br/>징계의 세 번째 목적은 “범죄한 사람이 회개하여 회복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7:3은 『네 형제가 너에 대하여 죄를 지으면 그를 꾸짖고, 그가 회개하면 용서하라.』라고 말씀한다. 책망은 회개를 위한 것이며, 회개는 용서를 위한 것이다. 징계는 보복이 아니다. 징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범죄한 형제의 회복이다. <br/><br/>교회의 징계 대상은 다름 아닌 “교회를 허무는 죄들”이다. 고린도전서 5:11은 음행, 탐욕, 우상 숭배, 욕설, 술 취함, 약탈 등 성도가 간증을 잃어버리는 구체적인 죄들을 언급한다. 로마서 16:17,18은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며, 데살로니가후서 3:6은 사도들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며 영적 권위에 대적하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경우를 다룬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죄를 범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태도”이다.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문제는 책망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회개를 거부하는 데 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절차는 징계 자체가 아닌,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진다. 또한 사적인 죄와 공개적으로 드러난 죄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 개인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는 가능한 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인(마 18:15) 반면, 공개적으로 알려져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 죄는 공개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베드로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책망한 것은 그의 행동이 공개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갈 2:11-14). 따라서 “교회의 징계”는 죄의 성격, 공개성, 지속성, 교회에 미치는 영향, 당사자의 회개 여부​를 함께 고려하여 이뤄져야 한다.<br/><br/><br/>마태복음 18:15-17에서 다루는 교회의 단계적인 징계 절차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br/><br/>먼저 “개인적인 권면”이다.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있을 때 그에게 그의 잘못을 일러주라』(마 18:15).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당사자에게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네 형제를 얻은 것』(마 18:15)이며 문제는 거기서 끝나고,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첫 단계에서 해결되지 않을 때, 두 번째 절차는 한두 명의 “증인”을 동반한 권면이다(마 18:16). 이때 증인은 사실 관계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양측의 말을 공정하게 들을 수 있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어야 한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잘못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책망받아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교회의 공식적인 개입으로, 증인을 동반한 권면을 거부했을 때 “교회에다” 말하는 절차이다(마 18:17). 이 단계에서는 소문이나 일방적인 주장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에게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에 대한 송사에서는 “두세 증인”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딤전 5:19). 네 번째 단계는 “교제권으로부터 분리”이다. 죄를 지은 당사자가 교회의 권면까지 거부했을 때 『그 사람을 이교도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한 교회 시대의 실제적 적용은 『그러한 악한 사람은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고전 5:13)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수로 여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5은 『원수같이 여기지 말고 형제로서 권고하라.』라고 명령한다. “출회”는 회개를 위한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br/><br/>징계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고린도전서 5장과 고린도후서 2장을 함께 적용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두 장은 교회의 징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잘못을 보여 주는데, 고린도전서 5장은 “징계하지 않는 교회의 죄”를, 고린도후서 2장은 “회개한 사람을 회복시키지 않는 교회의 잘못”을 경고한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교회 운영상의 이유로, 드러난 죄를 방치하는 것은 실제로는 범죄한 사람과 교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징계가 행해졌다면 징계의 목적 가운데 절반만 이루어진 것인데, 범죄한 사람이 책망의 과정을 통해 죄에서 돌이켰다면 교회는 태도를 바꾸어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고후 2:6,7).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회복의 기회를 빼앗아 사탄이 유익을 취하기 때문이다(고후 2:11). <br/><br/>교회가 죄를 알고도 징계하지 않는다면 거룩함을 잃게 된다. 범죄한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했는데도 그를 계속 정죄하고 과거의 죄를 붙들어 회복시키지 않는다면 은혜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범죄한 사람이 회개하기 전에는 그의 죄에 대해 단호해야 하고, 회개한 후에는 용서와 회복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징계할 때는 단호했지만 회복시킬 때 인색하다면 그것 역시 성경적인 징계가 아니다.<br/><br/>징계에 있어서 “교제의 회복”과 “직분의 회복”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회개한 성도는 기꺼이 용서하고 교제 가운데 받아들여야 한다. 징계가 종결되었음에도 회개한 사람의 과거를 계속 들추어내어 정죄한다면 징계는 회복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영구적인 형벌로 변질된다. 그러나 목사, 집사, 교사 등 사역자들의 직분 회복은 성경에서 요구하는 별도의 자격과 공적인 신뢰의 문제를 포함한다(딤전 3장, 딛 1장). 따라서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곧바로 이전의 모든 직분으로의 자동 복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즉각적이지만, 공적인 사역에 있어서의 신뢰는 검증을 통해 회복되어야 한다. 바울은 한때 자신의 사역에서 배제시켰던 마가를, 그의 사역이 검증된 훗날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딤후 4:11). <br/><br/>성경적인 “교회의 징계”는 책망에서 시작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필요하면 분리를 시행하지만, 궁극적으로 용서와 회복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과정​이다. 교회에 맡겨진 거룩한 책임인 “징계”를 소홀히 한다면 거룩함의 능력을 잃게 된다. “교회의 징계”는 지역 교회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님께서 주신 책임이자 의무이다. 교회는 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두어서도 안 되며, “거룩함”이라는 이름으로 회개한 사람을 영원히 정죄해서도 안 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1 Sep 2026 12:39:0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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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칼빈주의”에 오염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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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lt;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gt;은 1643년 7월 1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소집되어 5년 넘게 이어진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기간 중, 신학자 121명과 의원 30명 등 총 151명의 참여로 1647년에 완성 및 채택된 신앙고백 문서이다. 전체 33장으로 총 1만 4천여 단어로 기록된 장문의 신앙고백서인 &lt;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gt;은 1648년 영국 의회에 의해 공인되었다. 이 문서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을 통해 미국 장로교회(PCUSA)의 교리적 표준문서로 인정되었고, 한국에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와 1907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 설립 때 공식적으로 수용되었다. <br/><br/>&lt;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gt;을 작성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합당하다고 믿는 것 이외에 여하한 교리에 대하여 주장하지 않는다.”라고 서약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은 성경의 진리와 현저히 다르고 구원의 교리를 망쳐 버린 “칼빈주의”를 진리인 것처럼 수용하고, 칼빈의 &lt;기독교강요&gt;(1559년)를 신앙고백의 교과서로 사용함으로써, 당대는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신약교회사에 치명적인 오류들을 확산시켰다. “칼빈주의”에 오염되었으면서도 진리인 양 행세하는 &lt;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gt;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파괴하는 영적 독소에 지나지 않는다. <br/><br/>「사람은 원래의 부패로 말미암아 모든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고, 그것을 행할 수 없으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 4절). <br/>「사람은 죄의 상태로 타락하여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을 향한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어버렸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돌이킬 수 없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준비시킬 수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 3절).<br/><br/>I. 인간이 “전적 타락”을 넘어 “전적 무능력” 상태에 있다는 주장<br/><br/>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은 성경적 진리이다. 그러나 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난 것처럼 인간의 의지가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주장하기 위해 “자유의지”마저 부정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시고 그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노니, 만일 너희가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계명들을 복종하면 복이요, 만일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계명들을 복종하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서 너희가 알지 못하였던 다른 신들을 따라가면 저주니라』(신 11:26-28). 간단히 말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칼빈주의의 첫 번째 강령인 “전적 타락”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이 강령은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용어의 본래의 의미를 넘어 “전적 무능력”의 교리를 주장한다. 즉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의지”를 발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력”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lt;기독교강요&gt;에서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 선택을 찾는 자들이야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제1권 1장 8절),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제2권 2장 제목),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움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선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제2권 3장 5절)와 같이 인간의 “타락”이 “의지”에까지 영향을 미쳐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와 같은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br/><br/>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죄를 가지고 있으며(시 51:5, 욥 14:4), 태어나면서부터 거짓을 말하고(시 58:3), 어릴 때부터 악하다(창 8:21)고 말씀한다. 또한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롬 3:23,24)라고 말씀함으로써, 죄에 의한 타락은 보편적이라는(『모든 사람』) 점과, 구원의 유일한 방법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속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를 발휘한 선택에 기초한다(살전 1:4). 결코 창세전 하나님의 강제적인 선택에 달려 있지 않다. <br/><br/>「하나님께서는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자기의 작정으로 어떤 사람과 천사는 영생으로 예정하셨고, 다른 이들은 영사(永死)로 정하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3절). <br/>「하나님께서는 예상되는 모든 형편에서 일어나겠거나 일어날 수 있는 바를 아시지만, 장래를 내다보시거나 그런 형편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그것을 작정하지는 않으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2절). <br/><br/>2.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예정”되며, “미리 아심”과 무관하다는 주장<br/><br/>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예정되었을 뿐 아니라 영원히 확정되어 변동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예정하고 미리 작정하신 천사들과 사람들은 개별적이고 불변하게 지정받았다. 그래서 그들의 수효는 고정되고 한정되었기 때문에 증감될 수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4절). 이것은 칼빈의 &lt;기독교강요&gt;의 “영원한 선택”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영원한 선택 :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제3권 21장 제목).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신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확정하셨다」(제3권 21장 7절).<br/><br/>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예정하고 미리 작정하신 사람들이 개별적이고 불변하게 지정되었으므로 그 수효가 고정되고 한정되었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명령과 완전히 반대된다. 만약 구원이 “예정”되어 “변동 불가”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시면서 “믿으라”(행 16:31)고 명령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야말로 “모든 사람”을 향해 구원의 초대를 보내며 “믿으라”고 명령하신다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실제적인 선택권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만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주장대로 구원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어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안타까운 책망과 인격적인 부르심은 모두 한갓 시늉에 불과하게 된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역하였고 내가 손을 내밀었으나 아무도 개의치 아니하였으며 오히려 나의 모든 조언을 무시하였고 나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므로』(잠 1:24,25).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br/><br/>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예정”과 “미리 아심”의 관계에 대해서도 비성경적인 주장을 한다. 즉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실 때, 그 사람의 미래를 미리 알아채는 “미리 아심”의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시며, 그 사람이 앞으로 행할 어떠한 반응이나 행위와도 아무런 상관없이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믿음이나 선행이나 견인(堅忍)을 미리 보심이 없이, 혹은 피조물에게 있는 어떤 자질이나 조건도 자기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으로 삼지 않으시고, 너그러운 은혜와 사랑만으로 하시되 이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게 하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5절). 이러한 비성경적 주장 역시 장로교와 칼빈주의의 모태가 된 칼빈의 &lt;기독교강요&gt;를 그대로 베껴 온 것에 불과하다.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서 온다... 창세전의 선택은 공로의 예지와 관계가 없다」(제3권 22장 1,2절 제목).<br/><br/>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구원받을 사람을 선택하고 예정하는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단정함으로써, 무엇이든 미리 아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을 사실상 아무 쓸모없는 무가치한 능력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고 “예정”하실 때 자신의 “미리 아심”이라는 신성한 능력을 분명히 활용하신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함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 1:2),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br/><br/>성경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선택과 예정의 중요한 바탕이 됨을 명백히 증언한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언제,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질지를”(고전 12:13) “미리 알고” 계신다.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사람들을 “미리 알고” 선택하시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일이다(엡 1:4).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1 Sep 2026 12:35:2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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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론 머스크, “X” 그리고 적그리스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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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일론 머스크는 “혁신적인 기업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예측 불가능하고 파격적인 행동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대표적인 “괴짜 경영자”이기도 하다. 그가 보인 여러 기행 중에는 자녀의 이름을 독특하고 기이하게 지은 것도 있다. 그는 네 명의 여성에게서 열네 명의 아이를 낳는 등 다소 복잡한 여성 관계를 갖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캐나다 출신 가수 “그라임스”에게서 낳은 세 자녀의 이름이 유독 이상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br/><br/>먼저 2020년에 태어난 첫째 아들의 이름은 “X A-Xii”(엑스 애시 에이 트웰브)다. 이는 수학의 미지수 “X,” 인공지능을 뜻하는 “,” 정찰기 SR-71의 전신인 “A-12”를 조합한 이름이다. 올해로 여섯 살인 이 아이는 일상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엑스”(X)라는 별칭을 쓰고 있다. 2021년 대리모를 통해 태어난 둘째 딸의 이름은 “Exa Dark Sider l”(엑사 다크 사이디어리얼)이다. 여기서 “Exa”는 컴퓨터 연산 단위이고, “Dark”는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우주의 “암흑 물질”을 뜻하며, “Sider l”은 우주의 진정한 시간 개념인 “항성시”(Sidereal)를 독특하게 표기한 것이다. 2022년에 태어난 셋째 아들의 이름은 “Techno Mechanicus”(테크노 메카니쿠스)다. “Techno”는 음악 장르 테크노와 과학 기술을 동시에 의미하며, “Mechanicus”는 SF 게임 “워해머 40,000”에서 기술을 숭배하는 사이보그 교단 “아데프투스 메카니쿠스”(A- deptus Mechanicus)에서 따온 것이다.<br/>이처럼 일론 머스크는 그라임스에게서 얻은 자녀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X”라는 글자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집착은 자녀들의 이름뿐 아니라, 그가 세운 기업의 이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br/><br/>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머스크가 1999년에 창업한 인터넷 금융 회사 이름 역시 “X.com”이었다. 이 회사가 피터 틸의 “콘피니티”와 합병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페이팔(PayPal)로 이름이 교체된 것이다. 그는 “Space Ex- ploration Technologies Corp.”라는 민간 우주 기업을 2002년도에 설립했으며, 그 이름을 줄여 “SpaceX”라고 했다. 2015년에는 전기차 테슬라의 라인업으로 “S-3-X-Y(SEXY)”라는 단어를 완성하고자, SUV 모델에 “Model X”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2017년에는 페이팔로부터 “X.com” 도메인을 다시 사들였고, 2023년 트위터를 인수하면서 회사 이름을 “X”로 바꾸고 도메인 역시 자신이 사들인 “X.com”으로 변경했다. 트위터 인수 직전, 인수 주체가 될 지주회사의 이름도 “X Corp.(X Holdings)”였다. 아울러 트위터를 인수한 그해에, 즉 2023년에는 “OpenAI”에 대항하기 위해 인공지능 전문 기업을 설립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xAI”이다.<br/><br/>머스크가 “X”에 집착하면서 언론에 더 빈번히 “X”가 노출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경에서 대환란 기간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를 “X”와 연관하여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br/>우선 “X”는 성경 곳곳에서 “적그리스도의 속성”을 설명해 주는 핵심 어미인데, 라틴어로 “왕”을 뜻하는 단어는 “렉스” (Rex)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6:2에 등장하는 첫 번째 “흰 말 탄 자”는 머리에 한 면류관을 쓰고 손에 활을 들고 세상을 정복하러 나가는 “왕”으로 묘사된다. 대다수 성경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은 이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는 한 면류관(a crown)만을 쓴 자로, 곧 많은 왕관(many crowns)을 쓰고 재림하시는,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계 19:11,12)를 철저히 모방하는 “적그리스도”이다. 이 점은 그가 들고 있는 “활”을 통해서도 뒷받침되며, 요한계시록 6:2에서는 『내가 보니, 보라,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자가 활을 가졌더라.』라고 말씀한다. 보다시피 “흰 말을 탄 자”가 가진 것으로 “활”만 명시되어 있고 “화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는 그가 활을 들고 나오되 화살 없는 활을 들고 나와, “평화적인 외교”로 이스라엘을 비롯한 온 세상과 “언약을 체결”할 것임을 알려 준다(사 28:15). <br/><br/>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 단어는 “팍스”(Pax)이다.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정복할 때 쓰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전쟁이 아니라 “가짜 평화”인 것이다. 다니엘서 8:25과 11:21은 “그가 평화로 많은 것을 멸할 것이며, 평화롭게 와서 술책으로 그 왕국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어 등장하는 “붉은 말 탄 자”가 평화를 제거하는 권세와 큰 칼을 받아 전쟁을 벌일 것임을 알려 준다. 하나님께서는 적그리스도에게 평화를 빼앗을 권세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인들로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착각하게 하셨다가, 전쟁과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게 만드시는 것이다(계 6:4-8, 살전 5:3).<br/><br/>아울러 라틴어로 “음성”을 의미하는 단어는 “복스”(Vox)인데, 적그리스도는 대환란 기간에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거짓되이 주장하면서(살후 2:3,4) “초인적인 웅변술”과 사람들의 지각을 마비시키는 중저음의 가증스런 “음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기만적으로 흉내 낼”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서 7:25과 11:36,” 그리고 “요한계시록 13:5,6”은 그의 실체를 정확히 보여 준다. 이 말씀들에 따르면 적그리스도는 그의 입을 벌려 하나님을 모독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적해 큰 말을 하며, 하나님을 거슬러 이상한 말들을 쏟아낼 것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흉내 내려 하지만, 오히려 그 자신의 입을 통해 자기가 교만하기 그지없는 마귀 그 자체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 것이다.<br/><br/>또한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으로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와 고양잇과 동물의 속성과 관련된 라틴어를 통해서도 “X”와 연관된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말하자면 요한계시록 13:2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한 짐승”은 “표범”과 같다. “표범”은 고양잇과 동물로서, 라틴어로 “검은 고양이”는 “펠릭스”(Felix)이고, 미국에 사는 야생 고양이는 “링크스”(Lynx), 이집트의 반인반수 양성의 고양이 형상은 “스핑크스”(Sphinx)다. 또한 고양이 곧 “Cat”이라는 단어는 로마카톨릭과 정확하게 연결되는데, 그 이름 “Catholic,” 즉 “Cat-holic”은 “고양이에게 전적으로 드려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은 요한계시록 17:3에서 주홍빛 짐승인 적그리스도 위에 앉은 창녀인 로마카톨릭이 “표범”인 적그리스도와 갖는 관계를 보여 준다. 로마카톨릭은 “고양잇과 짐승에게 전적으로 드려진” 종교인 것이다! 아울러 스핑크스가 지닌 양성의 기형적인 모습은 “헤카테”(Hecate)와 “헤르메스”(Hermes) 등 많은 그리스 신들과 연결되어 있다. 스핑크스가 인간과 동물,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괴하고 복합적인 형상을 띠고 있는 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세상의 경계”(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양성의 성질)를 지배하고 중재하는 헤카테, 헤르메스 같은 우상들의 속성과 닮아 있는데, 이는 또다시 적그리스도가 “성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동성애자”로서 등장한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준다(단 11:37). <br/><br/>“X”로 끝나는 성경의 영어 단어들 속에서도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언어적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성령께서 “X”와 연관하여 이제 곧 등장할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언적으로 보여 주고 계시는 것이다. 우선 “여우”(Fox)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침례인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인 헤롯왕을 가리켜 “그 여우”(that fox)라고 부르셨다(눅 13:32). 침례인 요한은 대환란 기간에 등장할 엘리야의 모형으로, 엘리야와 모세는 대환란 끝에 적그리스도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해 죽게 된다(계 11:3-7; 20:4). 따라서 엘리야의 모형인 요한을 목 베어 죽인 “여우”(fox) 헤롯은 장차 엘리야와 모세, 환란 성도들을 목 베어 죽일 적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br/><br/>또한 “세금”(Tax)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다니엘 11:20에서 적그리스도는 『세금을 거두는 자』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적그리스도는 대환란 기간에 온 세상을 하나의 경제 체제로 묶어 전 세계적인 세금 징수를 실행할 것이다. 또 짐승의 표(666)나 그의 이름, 그의 이름의 숫자를 받지 않은 자는 그 어떤 상거래도 할 수 없게 될 것인데(계 13:16,17), 그렇게 되면 당연히 세금도 내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세금”(Tax)이라는 단어에는 장차 적그리스도가 구축할 전 지구적인 경제 착취 및 통제 시스템이 정확히 담겨 있는 것이다.<br/>숫자 “육”(Six)은 또 어떠한가? 성경에서 “육”은 “사람의 숫자”로서, 적그리스도, 곧 짐승의 숫자(666)와 밀접히 연관된다(계 13:18). 그렇기에 성경 전체에서 숫자 “육”은 적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삼상 17:4,7, 왕상 10:14, 단 3:1,10, 스 2:13). <br/><br/>일각에서는 “일론 머스크”가 적그리스도라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그를 직접적으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X”에 집착하는 그의 행보가, 곧 등장하게 될 적그리스도의 상징인 “X”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에 세상은 점점 더 “X”에 열광할 것이고, “X”에 무언가를 기대하기 시작할 것이다. 세상은 “X”를 얼마간 기업의 기호나 유행어로 치부하겠지만, 결국 이 “X”에 종속되어서 단일 세계 정부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악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곧 하늘로부터 오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소망하며 “거룩한 성별”을 지켜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1 Sep 2026 12:33:2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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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진리의 가면을 쓴 “4차원의 영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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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배교한 기독교계로 “4차원의 영성”을 들여온 이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였다. 조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lt;The Fourth Dimension&gt;(4차원, 1979)을 출간했고,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우리말로 된 &lt;4차원의 영적 세계&gt;(1996)를 냄으로써 한국 교회를 “뉴에이지”로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영문판 도서는 데이브 헌트(Dave Hunt)와 T.A. 맥마혼(McMahon) 공저 &lt;The Seduction of Christianity&gt;(기독교 속의 미혹, 1985)에 의해 호된 비평을 받았는데, 헌트와 맥마혼은 “4차원의 영적 세계”가 교회 속으로 유입된 “샤머니즘”이라고 일축했다. “샤머니즘”이라는 말은 교회와 그 사역자에게 적용하기에 매우 부적합한 용어가 아닐 수 없는데, 두 저자는 조 목사를 노먼 빈센트 필과 로버트 슐러와 더불어 기독교계 내로 샤머니즘을 들여온 인물로 못박았다. 이유인즉, 조 목사의 &lt;4차원의 영적 세계&gt;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데다가 급기야는 “뉴에이지”의 영적 원형(元型)인 “샤머니즘”과 몹시도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br/><br/>조 목사에 따르면, 4차원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이를 초월하는 영적 세계로, 그 아래에 위치한 3차원(물질세계)을 지배한다. 4차원에 속한 존재는 서열에 따라 하나님(가장 높은 4차원), 마귀(중간 4차원), 인간(가장 낮은 4차원)으로 구분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인간적·마귀적 4차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4차원으로 옮겨지며, 그렇게 해서 들어간 4차원에서 3차원의 물질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그 힘의 본질을 “꿈”으로 정의한 조 목사는, 보이지 않는 4차원을 변화시켜서 보이는 3차원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 믿음, 꿈, 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네 요소를 바르게 설정하는 것이 “기도”보다도 우선한다고 했으니, “생각하고, 마음에 그림(꿈)을 그리고, 믿고, 입으로 선포(말)하면” 3차원의 현실이 그대로 바뀌어서 성취된다는 것이었다.<br/><br/>조 목사가 그와 같은 “4차원의 영적 세계”를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성경적(?)” 근거 중 첫 번째가 “창세기 1:2”이다. 땅이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께서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신 일을 “원어”를 들먹이면서, 성령께서 물들 위에서 “알을 품듯 부화하고” 계신 것처럼 가르쳤는데, 성령께서 3차원의 세계를 “품으시고” 운행하심으로써 그 “부화”의 역사로 인해 창조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br/><br/>조 목사가 성령의 창조 사역에 있어서 “부화”를 주장하기 위해 근거를 든 것은 히브리어 원어였다. 개역한글판성경의 ｢운행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로하프”로, 바른 성경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에는 『거니시더라[moved]』로 번역되었다. 이 “로하프”는, 원시적 어근(原始的 語根, primitive root)으로서 “알을 품다” (brood)의 뜻이고, 암시적으로는 “긴장을 풀다, 쉬다” (to be relaxed)의 뜻을 지니고 있다. &lt;킹제임스성경&gt; 번역자들은 이와 같은 “로하프”를 “flutter”(퍼덕이다, 신 32:11), “move”(거닐다, 창 1:2), “shake”(떨다, 렘 23:9)로 번역했으니, “로하프”는 원시적 어근으로서, 암시적 의미로서 지니는 정적(靜的)인 의미에 반하여, 성경의 문맥 속에서는 매우 동적(動的)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섭리로 보존된 &lt;킹제임스성경&gt;을 통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br/><br/>말하자면 조 목사는 “로하프”의 원시적 어근에 집중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그것이 문맥 속에서 지니는 다양한 동적 의미를 놓쳐 버렸고, 성령께서 마치 새나 파충류처럼 “알을 품어” 세상을 “부화시킨” 것처럼 어느 이교 신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한 것이다. 실제로 고대 인도 문헌인 &lt;베다&gt;와 &lt;마누법전&gt;의 신화에, 우주가 형성되기 전, 아무것도 없는 혼돈의 물 위에 금빛 알인 “히라냐갈바”(Hiranya- garbha)가 떠돌았는데, 이 알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위쪽 껍질은 하늘이 되고 아래쪽 껍질은 땅이 되었으며, 그 안에서 창조신 브라흐마(Brahma)가 태어나 만물을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신화 “반고 이야기” 또한 그와 유사한데, 태초에 우주는 거대한 닭의 알과 같은 혼돈의 상태였으며, 그 알 속의 거인 반고(盤古)가 잠에서 깨어 도끼로 알을 깨고 나오자, 알의 가볍고 투명한 기운(양기)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묵직하고 탁한 기운(음기)은 아래로 내려앉아 땅이 되었다고 한다. <br/>성령이 아닌 세상의 영의 통제를 받으면 “진리의 가면을 쓴 채” 세상의 말을 하게 되어 있다. 성령께서는 창세기 1:2에서 물들의 표면을 “거니셨을” 뿐, 세상을 알을 품듯 품어 “부화”시키지 않으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부화”와 같은 기술을 통해 창조하신다고 가르치지 않는데도, 4차원의 영성은 하나님의 창조 “방법”을 제한하고, 그분의 능력을 특정 방법론에 국한시켰다. 이러한 오류는 그와 동일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인간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망상을 일으키는데, “4차원의 영성”이 그러하다. 인간 역시 “4차원”의 영적 존재이므로 현실을 “시각화하고” “부화하면”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br/><br/>“4차원의 영성”에서는 “꿈”과 “환상”이 성령의 영적 언어로서 가르쳐진다. 조 목사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컫는 이들이 3차원의 세계를 “부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상상력”과 “비전”(환상)과 “꿈”을 제시하는데, 우리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한계의 벽을 뛰어넘어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꾸게 도와주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된 근거로 든 “요엘 2:28,” 곧 『그후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으리라. 그러면 너희 아들들과 너희 딸들이 예언할 것이요, 너희 노인들은 꿈들을 꿀 것이며, 너희 청년들은 환상을 보리라.』라는 말씀은 “너희,” 곧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딸들과 “이스라엘”의 노인들과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향한 말씀으로서, “지상 재림”(욜 2:31) 전, 즉 “왕국”이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욜 2:32)에게 일어날 현상을 다룬다.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2:17”에서 그 구절을 인용한 것은, 당시 사도들이 여전히 “왕국”에 중점을 두고(행 1:6) 메시아의 부활을 증거하는 상황에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일어난 일(즉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신 일)에 관하여 설교하기 위해, 상황이 유사한 “설교용 구절”을 찾아내어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교회 시대에 성령의 언어가 “꿈”과 “환상”이라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무한 주장이다.<br/><br/>성경에 계시된 “성령의 언어”는 사도 바울에 따르면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 곧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words)”이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the words... which the Holy Ghost teacheth]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고전 2:13). 이처럼 성령께서 누군가로 하여금 진리를 전하게 하실 때는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게 하신다. 이것이 교회 시대에 진리를 전하는 방법이다. 위의 고린도전서 말씀에 따르면, “꿈과 비전이 성령의 영적 언어이며,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꿈과 비전을 성도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시고 그것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신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가 되고 만다.<br/>“4차원의 영성”에서는 특히 “바라봄”(시각화)이 강조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4차원”의 영적 존재이기에 현실을 “시각화하고” “부화하면”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위해 아브라함이 “바라봄”과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는 주장을 꺼내 든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출생을 “4차원의 영적 세계”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세게 하셨을 때, 그 별들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은 별들이 자신을 향해 “아버지 아브라함!” 하고 부르는 듯한 감동을 받고, 그 별들이 자손들처럼 생각되면서 가슴속에 “꿈”과 “그림”으로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그 영상들이 영적 비전과 꿈의 언어로서 그의 4차원의 영적 세계에 역사하게 되었고, 그것이 성령께서 백 살이나 된 아브라함의 신체 조건을 변화시켜 이삭의 출생을 성취하시려는 준비 단계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시각화”했더니 그것이 3차원의 물질세계에 현실로 나타나 아들 이삭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br/><br/>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해석”이 아니다. 신약교회사에서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이가 없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시각화하여 가슴에 담고 그것을 계속 그리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실 수 없었을까? 일례로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라고 하셨을 때, “순종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떠났다”(히 11:8).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은 그때 계시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은 “바라볼”(시각화할) 만한 대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향을 떠났다. 카나안 땅을 구체적으로 “마음에 그리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곳에 이르렀으며, 그곳에 도착해서야 그 땅의 소유에 대한 약속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마음속에 “꿈”과 “그림”을 간직하여 3차원의 물질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전적인 확신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찾을 때 마땅히 보상받을 것을 믿는 믿음이었다(히 11:6). 즉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별들을 보고 약속된 씨들을 “시각화하지 않아도”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약속”이란 말한 것을 이루겠다는 “일방적 다짐”이 아닌가? 약속하신 주님은 언약과 자비를 일천 대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신 7:9), 맹세하신 것을 변경하지 않는 분이시다(시 132:11). 신실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은 생식 기능이 멈춰 버린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조건 없는 “선물”이었다. 이 하나님의 선물은 마음속의 “꿈”과 “그림”을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<br/><br/>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셔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계보를 통해 “메시아”를 탄생시킬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마 1:1-17). “여자의 씨”(사 7:14, 마 1:18)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은 “창세기 3:15”에서 이미 “예언”으로 주어졌으니, 하나님께서는 “약속된 메시아의 탄생”을 마태복음의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상”과 “믿음”에 의존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전지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다. 따라서 주님의 계획과 목적이 실현되는 과정 속에 “인간”의 “시각화”와 “부화”를 개입시키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분을 지극히 제한하는 일이 된다(사 2:22). 교회의 휴거, 7년 대환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인간이 마음에 그리지 않아도 반드시 현실이 될 “예언된 역사”이다. <br/><br/>성경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4차원의 영성”은 뉴에이지의 “끌어당김의 법칙”과 “마음의 시각화를 통한 현실 창조” 개념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출처와 명분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었을 뿐, “인간이 마음의 이미지를 조작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낸다”는 기술적 원리 자체는 “뉴에이지 시각화”와 동일하다. “뉴에이지의 철학”을 무분별하게 수용함으로써 그 무너짐이 가속화된 한국 교회! 진리의 기반이 부재한 그 교회가 “뉴에이지의 홍수”에 와해된 것(마 7:26,27)은 시간 문제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1 Sep 2026 12:32:0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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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마술”과 “점술”에 빠진 자칭 “교회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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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국내에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이 들어온 때는 1980년대 후반으로, 이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문학,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의 형태로 유입되었다. 초기는 물론, 뉴에이지 사상에 대한 학술적, 이론적 논의가 이루어진 뒤로도 뉴에이지 운동은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의 압축성장의 그늘 속에서 사람들이 점점 메말라가던 때였고, 그리하여 “집단과 사회”에서 “자아와 개인의 행복”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돌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서울올림픽(1988년)과 해외여행 자율화(1989년)를 계기로 서구에서 이미 대중화되어 있던 뉴에이지 신비주의 사상이 국내로 들어와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1997년 발생한 IMF 외환위기는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일원론”과 “자아의 신성화”와 같은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 관념들은, 대량 해고와 파산이라는 현실적 위기 앞에서 “한가한 소리”가 되고 말았다. 뉴에이지 운동의 열기는 그렇게 해서 급격하게 식어 버렸고, 현재 “뉴에이지”라는 말은 다소 고리타분한 구시대적 표현이 되어 버렸다. <br/><br/>그러나 문제는 거대한 사조로서의 뉴에이지 운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그 사상적 조류들이 파편화되어 정치, 종교,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마술”과 “점술”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제는 주변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세속 사회에 녹아든 “마술”과 “점술”이 기독교계 안에도 흘러들어왔다는 점이다. <br/><br/>“마술”은 교계 안에 “번영신학,” “관상기도,” “복음 마술” 등과 같은 여러 형태로 스며들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복음 마술”은 교단 차원이 아닌 개교회 차원에서, 그것도 성인들보다 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행해지고 있다. 문제는 어려서부터 마술을 접한 아이들이 마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술”(마법)을 엄히 금하시며 “극악한 죄”로서 경고하고 계신다(출 22:18, 레 20:27). <br/><br/>성경에서는 “마술”이 “마술(마법)을 사용하다,” “쓰다,” “행하다”와 같은 표현으로 등장하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헬라어 단어들은 문맥에 따라 “때를 살피는 행위,” “요술을 쓰다,” “점쟁이,” “점술,” “점괘”와 연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술”을 명백한 죄라고 규정하셨기에, 유다 왕 히스키야의 아들인 므낫세왕이 자기 아들로 불을 통과하게 하고, 때를 살피며, 마법을 사용하고 부리는 영들과 마법사들을 대면하는 일을 했을 때 그가 주의 목전에 악을 많이 행하여 주를 격노케 했다고 말씀하셨다(왕하 21:6). 그뿐 아니라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사울왕에게 사무엘은 “거역하는 것은 마법하는 죄와 같다”고 책망했다(삼상 15:23). 마지막 백보좌 심판 때 선포되는 둘째 사망, 곧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는 죄인들 중에 특히 “마술하는 자들”(계 21:8)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마술”이 매우 중대한 죄라는 점을 보여 준다. <br/><br/>무엇보다도 레위기 19:31에서는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을 주시하거나 마법사들을 추종하여 그들로 말미암아 더럽혀지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마술(마법)하는 것은 “악한 영들과 음행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돌이켜서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마법사들을 따라 그들과 음행하는 혼은 내가 그 혼을 대적하여 내 얼굴을 두고, 그를 그의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라』(레 20:6). 마술로 악한 영들과 음행하는 것은 우상 숭배의 죄로 연결되는데, 에스겔 16장과 2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홀라와 아홀리바의 비유를 드시면서 이스라엘이 주님을 버리고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론의 우상들과 이교도 문화를 받아들인 것은 “창녀짓”이며 “가증한 간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들이 간음하였으며 그들의 손에는 피가 있고 그들은 그들의 우상들과 더불어 간음하였으며 그들이 내게 낳아 준 아들들로 그것들을 위하여 불을 지나가게 하여 그들을 삼키게 하였음이니라』(겔 23:37). 『마치 자기 남편 대신에 타인들을 끌어들이는 간음하는 아내와 같도다!』(겔 16:32)<br/><br/>“마술”이 위와 같음에도 교회 안에 그것을 끌어들이는 사람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마술”이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키고 흥미를 유발시켜 교회로 오게 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며 그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 곧 방법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으므로 요즘 시대에는 “마술”이라는 그릇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복음 마술”에서 자신들이 행하는 “마술”은 마귀나 악한 영들과 연관된 마술이 아니라 눈속임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무해하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기에 크게 잘못되었다. 복음과 진리를 전한다는 미명 아래,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굳이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살전 5:22). 특히 아직 선악 판단이 분명치 않은 아이들에게 마술이 “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선과 악을 하나로 만들려는 뉴에이지 운동의 전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큰 죄악으로서 정죄하셨던 “마술”(마법)은 그것이 악령에 의한 것이든 눈속임에 의한 것이든 철저히 배척해야 할 대상이지 그것을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는 “마술”은 교회에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br/><br/>“점술”이 한국 교회를 잠식하고 있는 상황은 마술보다 더 심각하다. 특히 사주를 보고 타로를 치며 미래에 대한 조언을 듣는 교인들 대부분은 그저 재미로 한번쯤 해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성경은 “마술”과 더불어 “점술” 또한 악한 영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한다. 즉 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자(신 18:11)나 부리는 영으로 일하는 자(왕하 23:24), 강신술사(신 18:11), 점성가와 별을 보는 자와 매달 징조를 예언하는 자(사 47:13), 점쟁이, 꿈꾸는 자, 마법사, 마술사(렘 27:9)가 각종 마술과 점괘, 점술, 꿈의 해석 등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미혹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점괘는 통계나 카드 패에 따라 우연히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 점치는 영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행 16:16). 더군다나 오늘날의 점술가들 사이에서는 점술로 이익을 얻기 위해 거짓 환상과 허망한 것과 마음의 속임수로 예언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렘 14:14). 사람들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그런 거짓 예언이 주는 헛된 위로로 달래려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거짓 위로의 유혹에 걸려드는 것은 기독교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국리서치가 2022년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인 중 23%가 최근 5년 사이 점을 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같은 조사에서, 점을 보는 이유로 인생사와 운세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많이 꼽혔는데(52%), 이는 사람들이 점술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그 안에서 위안을 얻으려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br/><br/>그런데 교회 내에서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있으니 바로 신년에 행해지는 “새해 말씀 뽑기” 행사다. 그들은 우연에 맡긴 채 말씀을 뽑고는, 그것이 올 한 해 동안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이라면서 거짓된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 시작이 어느 때인지조차 불분명한 “새해 말씀 뽑기” 같은 교계의 연례행사는, 한국 전통의 점술식 사고방식과 형식적으로 닮아 있어 교인들을 악함 가운데로 내몰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새해”에 사주나 타로로 운세를 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닮아 있기에 한국 교회 교인들의 영적 피폐함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때를 살피는 자들이나 점치는 자들에게 경청하는 것을 금지하셨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네가 차지할 이 민족들은 때를 살피는 자들이나 점치는 자들에게 경청하였지만, 너로 말하면 주 너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는 것을 네게 허락지 아니하셨느니라』(신 18:14).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가운데 있는 너희의 선지자들과 너희의 점쟁이들로 너희를 속이지 않게 하고 너희가 꾼 꿈들에도 경청하지 말라』(렘 29:8). <br/><br/>그리스도인은 “마술”과 “점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교회 안에 들어온 “마술”과 “점술”에 관계된 모든 뉴에이지적 현상들에 주의 깊게 대처해야 한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표면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마귀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 강력한 미혹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모세가 출애굽기 7장에서 파라오를 처음 대면하여 그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일 때, 파라오도 현자들과 마술사들을 불러 그들의 마법으로 모세와 같이 행하게 했다(출 7:11). 처음에는 흉내를 내었지만 더 이상 흉내 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손길』(출 8:19)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처음에 보았던 마법으로 파라오의 마음은 완악해져 있었고, 그리하여 모세와 아론을 통해 전파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성경은 그러한 이집트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심판하여 그들이 쇠약해지고 그들의 계략을 멸하실 것이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우상들과 마술사들과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마법사들을 찾아 그들에게 헛된 구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씀한다(사 19:3). 이집트에는 이러한 영이 있어서, “마술”과 “점술”로 미혹된 파라오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거역하여 고집을 피우고 말았다. 형벌과 고난에 처해도 회개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마술”과 “점술”에 미혹된 자의 전형적인 태도이다(계 9:21).<br/><br/>다니엘 2장에서 느부캇넷살이 꿈을 꾸었을 때, 그 꿈과 뜻을 해석코자 마술사들과 점성가들과 점쟁이들과 칼데아인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꿈의 내용조차 알지 못했다(단 2:2,10,27). 다니엘 4장에서 느부캇넷살이 다른 꿈을 꾸었을 때도, 마술사들과 점성가들과 칼데아인들과 점쟁이들은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단 4:7).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이방 왕국의 흥망성쇠를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왕에게 일어날 일까지 미리 알려 주셨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과, 개인을 향해 갖고 계신 뜻을 “마술”이나 “점술”로는 절대 알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적인 역사를 가로막을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마술”과 “점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야 한다(사 8:19,20).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사람은 말씀에 따라 말하고, 말씀에서 위로와 평안과 확신을 얻는다. “마술”과 “점술” 같은 것들은 위로가 될 수 없다. 악령의 역사와 그 미혹에서 벗어나라. 무슨 흥미로운 것이나 대단한 것이 있을까 하여 발을 들이는 순간 악령에 사로잡혀 그의 종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한글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에게 주신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에 묻고 구하여 “뉴에이지”의 속임수에서 벗어나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1 Sep 2026 12:31:3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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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뉴에이지가 낳은 “현대 교회 음악”(CCM)</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5/%EB%89%B4%EC%97%90%EC%9D%B4%EC%A7%80%EA%B0%80-%EB%82%B3%EC%9D%80-%ED%98%84%EB%8C%80-%EA%B5%90%ED%9A%8C-%EC%9D%8C%EC%95%85ccm/</link>
<description><![CDATA[세계적인 음악 산업 분석 기관 “루미네이트”(Luminate)가 지난 2025년 발표한 연간 보고서에는 눈을 의심케 하는 통계가 실렸다. 미국 내의 “온디맨드 오디오 스트리밍량,” 즉 어떤 곡을 직접 골라 재생하는 시간의 양에 있어 “크리스천 / 가스펠” 장르가 전년 대비 18.5%의 성장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전체 음악 산업의 성장률이 4.6%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폭발적이라 할 만한 수치였다. 이는 그간 CCM 시장을 주도하던 호주의 “힐송 워십,” 미국의 “베델 뮤직” 등의 “라이브 워십 팀”의 인기에 더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CCM 가수들의 눈부신 선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성세대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이름일지 모르겠으나, CCM 가수 “포레스트 프랭크”와 “브랜든 레이크” 등은 “Z세대”를 중심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둘은 2025년 상반기에 함께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들의 음악이 “기독교인”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음을 방증하는 지표다.<br/><br/>“브랜든 레이크”는 차트 40위에 오른 자신의 곡 &lt;Hard Fought Hallelujah&gt;를 두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곡의 메시지는) 여러분이 지옥 한가운데를 통과할지라도 힘을 얻을 수 있고 소망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멋진 사운드까지 더해졌는데, 누가 안 좋아하겠어요?” 즉 교회에 안 다녀도 좋아할 거라는 얘기다. <br/><br/>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의 귀에도 감미롭게 들리는 오늘날의 CCM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그 이야기를 하려면 1960년대 후반 미국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수혜국으로서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미국인들 가운데는, 물질문명으로 인한 폐해와 세계대전 이후로도 끊임없이 발발하는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품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극단적으로 경도되어 그간의 제도, 통념, 가치관 등을 부정하고, 무정부주의 및 평화주의를 추구하며 자연으로 귀의하기에 이른 자들이 있었으니, 이른바 “히피들”이었다. 히피들은 미국 주류 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이들이었던 만큼 “기독교적 가치관”에 반(反)하는 종교적 체험을 추구했다. 뉴에이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동양의 신비 종교들에 심취하는 것이나 환각제(LSD)를 통한 “의식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양상이었다.<br/><br/>한편 히피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던 때를 즈음하여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은사주의 기반의 기독교 운동인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이 확산되었는데, 이 운동의 영향으로 히피 출신의 음악가들 가운데도 “회심”한 이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날의 생활로 충분”(벧전 4:3)하지 못하다고 여겼는지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히피 시절에 즐기던 포크, 록 음악 양식을 고수하며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꾸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 교회들에서는 비판 여론이 일었는데,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그들의 음악은 본래 주술적 무아지경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메시지 자체도 문제였으니,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히피들이 추구하던 “개인의 신비적 체험”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저항 정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히피 출신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뜻을 꺾지 않고 음악 활동을 계속함으로써 최초의 CCM이라 할 수 있는 “예수 음악”(Jesus Music)을 만들어 냈다. “크리스천 록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래리 노먼”은 이때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왜 마귀가 좋은 음악을 다 가져야 하나요?”<br/><br/>누구나 쉽게 짐작하겠지만, CCM이라는 장르가 탄생했을 때는 기독교계뿐 아니라 음악계에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비틀즈의 폴 메카트니가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도 성공하지 못하는 래리 노먼을 안타까워하며 “(당신 곡에서) 그 하나님 소리만 뺀다면 유명해질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처럼 “비주류 문화”에 머물던 CCM이 “주류 음악계”로 도약할 계기를 맞은 것은 1980년대의 일이었다. 그 일등공신은 듀엣곡 &lt;The Next Time I Fall&gt;과 솔로곡 &lt;Baby Baby&gt;로 각각 한 차례씩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차지했던 CCM 가수이자 “크리스천 팝의 여왕”이라 불리는 “에이미 그랜트”였다.<br/><br/>에이미 그랜트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는 대가로 치렀던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비록 음률은 세속적이었을지언정) “하나님”이나 “말씀” 등을 명시적으로 노래하던 그녀가 “영적인 삶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더 큰 맥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점차 방향을 선회했던 것이다. 즉 그녀는 대중가요처럼 보이는 곡에 영적인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내포하거나, 아예 영적인 메시지가 전혀 없는 대중가요를 부름으로써 “팬층”을 두텁게 하는 길을 택했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교인들은 그녀를 향해 “예수님은 어디로 가신 거냐?”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그녀는 후일 “모든 노래가 예수님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진정성을 갖지 못할 것 같았다.”라고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신이 “타협”으로 돈과 명성을 거머쥔 일을 정당화했다.<br/><br/>“크리스천 팝”을 대중화했던 에이미 그랜트를 필두로 하여 “크리스천 발라드”의 “마이클 W. 스미스,” “크리스천 소울”의 “베베 앤 세세 와이넌스,” “크리스천 재즈”의 “테이크 6,” “크리스천 힙합”의 “디시 토크” 등 8,90년대를 주름잡은 가수들에 의해 CCM은 “황금기”를 맞았다. “주찬양선교단,” “시인과 촌장,” “예수전도단” 등 “한국 CCM 1세대”가 활동을 시작했던 것도 1980년대의 일이었다. 이들은 세팅 드럼이나 전자 악기 소리는 물론이요, 야니 혹은 조지 윈스턴 등의 뉴에이지 음악가들이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엠비언트 사운드”나 히피들이 환각적 체험을 음향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발전시킨 “사이키델릭 사운드”까지 자신들의 곡에 “과감하게” 사용했다. 그런 음악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법” 대신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 대신 “내면을 들여다보며 명상하는 시간”을 갖게 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br/>CCM의 황금기가 도래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자 악기를 이용한 청소년 및 청년 예배의 유행이 뒤따랐는데, 국내에서는 전자 악기 수요가 폭증하는 기현상이 발생했을 정도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음반 산업 자체의 쇠퇴와 함께 CCM 시장에도 꽤 긴 겨울이 찾아왔지만, 예배를 기반으로 한 “라이브 워십 팀들”은 여전한 수요를 바탕으로 교회에서 “히피 음악”을 열창하는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날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자세히 묘사하자면 “둥둥” 울리며 온몸을 전율케 하는 베이스 기타와 세팅 드럼 소리에 맞춰 높이 쳐든 손을 흔들고, 반복되는 후렴구를 “떼창”하며 “무아지경”에 이르게 되는 “경배”의 모습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br/><br/>기존의 찬송가가 아닌 “새로운 음악”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노래를 할 수 있다면서 “친(親) CCM 진영”이 내놓는 변명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루터, 웨슬리, 블리스, 생키 등의 찬송 작곡가들도 모두 당대의 ‘최신 음악’을 사용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표현이나 음악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상술(上述)한 내용을 따라왔다면, 전자는 “눈속임”이요 후자는 “불복종의 정당화”(삼상 15:22,23)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br/><br/>먼저 “새로운 음악”에 대해서라면, 그 자체는 오히려 장려될 일이라 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주께 노래하며 곡조를 만들라”(엡 5:19)는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주체가 바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클래식이나 1900년대 초까지의 “가스펠 송”의 기틀을 다진 사람들은 최소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포크, R&B, 록, 힙합 등의 “새로운 음악”은 누가 만들었는가? “불순종의 영”(엡 2:2,3)을 소유한 히피들이나 마귀들과 교제하는 아프리카 주술사들이 아니던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어찌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고후 6:15)<br/><br/>복음을 전하거나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친숙한 음악을 사용하겠다는 주장에 대해서라면, “이익이 경건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딤전 6:5)는 말로 쉽게 일축할 수 있겠다. 애당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 준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돌이키는 일이 일어날 리도 없거니와(창 19:1-9에서 소돔 사람들이 자신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롯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찬찬히 읽어 보라.), 백 번 양보해서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며(갈 1:10), 세상과의 친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대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약 4:4). 세상 사람들이 찬송가는 거북스러워하는 반면, CCM은 쉽게 수용한다면, 그것은 “찬송가”는 말씀에 입각하고 CCM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요 17:14)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br/><br/>어떤 사람들은 “음악에는 죄가 없다”면서, 음악의 “도구적 중립성”을 이야기한다. 어떤 악기나 음향 효과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사울에게 악령이 임했을 때, 다윗은 어떤 가사도 읊조리지 않고 그저 하프를 탔다. 그랬더니 악령이 떠나고 사울은 힘을 얻었다(삼상 16:23).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엘리사는 유다와 이스라엘과 에돔 왕 앞에서 예언해야 했을 때 악사를 필요로 했다. 악사가 연주하자, 주의 손이 엘리사에게 임했고 엘리사는 예언하기 시작했다(왕하 3:15,16).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들을 통해 깨닫는 바는, “음악”이 “영의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진리다. “가사”나 “의도”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어떤 음악은 악령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오는가 하면, 어떤 음악은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성령을 소멸케 하는 것이다(출 32:18,19).<br/><br/>장차 “뉴에이지 사상”을 가진 통치자, 적그리스도가 성전에 앉아 자신이 “신”이라는 주장을 펼 때(살후 2:4) 사용할 주요한 도구도 바로 “음악”이다. 그 옛날 다양한 언어권의 민족들을 제국으로 편입시킨 느부캇넷살왕이 백성들을 일치단결시켜 자신의 형상에 경배하도록 만들기 위해 음악을 사용했던 것처럼 말이다(단 3:4-6). 혹시 “음악에는 죄가 없다”는 말에 미혹당해 “아무 생각 없이” CCM이나 대중가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면 이제 정신을 차리고 그것들을 어서 “불태워 버려야” 한다(행 19:19). 그와 같은 음악에 귀를 내준다는 것은 장차 인간을 속이 텅 빈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통제할 적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미리 온, “많은 적그리스도”(요일 2:18)의 “모의실험”에 동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1 Sep 2026 12:30:5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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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뉴에이지”에 무너진 한국 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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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특 집<br/><br/><br/>“뉴에이지”에 무너진 한국 교회<br/><br/><br/>◁ 목 차 ▷<br/>1. 사탄의 신비주의 종교 “뉴에이지” / 박승용 ‧‧‧‧‧‧‧‧‧ 25<br/>2. 뉴에이지가 낳은 “현대 교회 음악”(CCM) / 손주영 ‧‧‧‧‧‧‧‧‧ 31<br/>3. “마술”과 “점술”에 빠진 자칭 “교회들” / 박동일 ‧‧‧‧‧‧‧‧‧ 37<br/>4. 진리의 가면을 쓴 “4차원의 영성” / 한승용 ‧‧‧‧‧‧‧‧‧ 43<br/><br/>&lt;편집자 주&gt;<br/>한국 교회의 외형적 성장 이면에는 심각한 영적 피폐함이 있다. 세속화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가장 위험한 침투는 세상의 직접적인 박해가 아니라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 “사상적 미혹”의 잠입이다. 그 중심에 신비주의와 인본주의를 결합하여 성경의 진리를 해체하는 “뉴에이지” 사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뉴에이지”는 이미 한국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 즉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자기 신격화의 종교, 곧 “자기중심적” 종교가 교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들은 “현대 교회 음악”(CCM)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잠겨야 할 참된 예배를 파괴했고, “마술”과 “점술”에 미혹되어 교회로서의 존재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 심지어 긍정적 사고와 마음의 시각화를 통해 인간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4차원의 영성”까지 활개를 침으로써 교회들의 황폐화는 극에 달했다. 이처럼 비참한 처지의 교회들이 “바른 성경”으로 돌아가 영적 각성을 이루기를 촉구하며 본 특집을 준비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1 Sep 2026 12:29:2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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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대안교육”까지 장악하려는 사탄의 계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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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학교 밖 대안교육 학부모연합”이 지난 8월 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실에서 정을호 전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대안교육기관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법률안은 대안교육에 대한 과도한 제재가 들어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회견에서 대안교육 학부모연합 이정하 대표는 “이 법안은 단순한 관리·감독 강화를 넘어, 국가가 교육 내용을 심사하고 교육 기준을 정하며, 등록취소와 운영비 지원 배제, 나아가 학교 존립까지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을 확대하려 한다.”라고 주장했다. <br/><br/>이와 관련하여 한 학부모는 “지난 6월 부산시 교육감은 MBC 라디오에 나와 ‘학교를 폐쇄하고 학부모에게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협박한 바 있다. 교육부 장관과 일부 교육감들이 선동꾼으로 나서 현행 법률과 UN아동권리협약이 보장하는 학부모의 교육선택권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학부모들을 불법에 가담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다.”라고 규탄했다. 실제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김석준 부산시 교육감은 공교육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의 보호자에게 100만 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대안교육기관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서는 이 과태료가 500만 원으로 인상되어 있어, 실로 학교 밖 청소년의 학부모가 대안교육을 선택하면 과태료를 내야 하는 “불법자”가 되는 시대가 이르고 있다. <br/><br/>국내 민간 대안교육 연구기관들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전체 대안교육 시설 중 기독교 대안학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47%이며, 이는 전체 사설 및 미인가 대안학교 영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점유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전체 기독교 대안학교 중 약 57%가 교회에 의해 설립되었기에 운영 주체로서 교회의 비중이 매우 높다.<br/><br/>“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입법을 위해 노력해 온 정부 여당이 오히려 “교육 소수자”를 역차별하는 법률안을 발의한 것은 기존의 정책 노선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이 주도하는 이 세상 정치가 “기독교를 탄압”하고 “믿음을 파괴”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기독교 교육은 “동성애자”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를 역행하는 “죄인”으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사탄이 주도해 온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에 “악영향을 미치는 세력”이기 때문에 사탄의 주요 박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br/><br/>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녀들에게도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고 네 자손에게 그것들을 열심히 가르칠지니』(신 6:6,7). 이러한 교육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땅에서 장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내가 너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규례들과 그분의 계명들을 너와 네 아들과 네 아들의 아들로 평생 동안 지켜 주 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이며, 또 네 날이 길어지게 하려는 것이라』(신 6:2). <br/><br/>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율법을 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셨던 명령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도록 명령했다. 『너희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사도 바울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는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케로부터(딤후 1:5) 말씀을 배우고 자라 “가식 없는 믿음”을 가진 성도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바울의 동역자요 지역 교회의 목사로서 훌륭한 사역을 수행했다. 디모데에게 그런 역량이 갖춰졌던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알았던 “바른 말씀” 때문이었다. 그가 알았던 그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했다(딤후 3:16). 그 성경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었고,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었던 것이다. <br/><br/>“인본주의”와 “진화론” 그리고 “인성의 피폐”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고 디모데와 같은 일꾼으로 양육하고픈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대안학교가 어디인지 알고 있는가? 디모데의 성경처럼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섭리로 보존된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으로 양육하는 “서울크리스찬중고등학교”가 바로 그 학교이다. 이 진리의 전당은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과 자격 있는 그리스도인 교사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유일한 대안학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각 과목의 전문가요, 바른 말씀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세상을 거슬러”(요일 2:15-17) 하나님을 향해 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을 억압하려는 자가 『이 세상의 신』(고후 4:4)인 “사탄”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br/><br/>현재 초중고등학교 연령의 학교 밖 청소년은 약 1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매년 공교육 이탈자는 약 5만 명으로, 그 비율은 고등학생 62.2%, 중학생 20.8%, 초등학생 17.0%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많은 수의 학생들이 자의든 타의든 공교육을 떠나고 있으며, 정부는 이를 합리적인 방식이 아닌 “대안교육기관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라는 강제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br/><br/>교육관계자들이나 일부 학부모들은 공교육이 제 역할을 잘 수행한다면, 학교 밖 청소년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 학부모에게 있어서 “대안교육”은 공교육이 원래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공교육이 원래의 역할을 잘 수행하여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본주의”와 “진화론”을 더 잘 가르치며 학생들을 세상이 원하는 인재로 더 잘 육성한다면,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공교육으로부터 더 적극적으로 탈출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할 자녀들이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인본주의적 진화론자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신학대학 교수라는 자들도 “인본주의”와 “진화론”을 학습해 “유신진화론”이니 “점진적 창조론”이니 하는 것들로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사탄이 관장하는 현 세상 “공교육”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가 있다. <br/><br/>사탄이 이제는 “대안교육계”에도 그 마수를 뻗치고 있다. 세상 교육은 “진화론”과 “동성애”를 권장하는데, 그는 이 대한민국을 “진화론자”와 “동성애자”의 낙원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진화론”이 틀렸고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교육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학교들에서 “성경 읽기”와 “기도”마저도 금지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심히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br/><br/>올바른 대안교육은 “교육의 최후의 보루”이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그리스도인 자녀를 “바른 성경”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자기 자녀를 성경적인 믿음 위에 설립된 &lt;서울크리스찬중고등학교&gt;에 의탁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소중한 자녀를 『악한 현 세상』(갈 1:4)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의 의무이다. 세상의 박해를 두려워 말라. “내 자녀”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는 일, 이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가 소유한 당연한 권리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02 Sep 2026 16:34: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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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순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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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1961년, 예루살렘의 한 법정에서는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 현장으로 실어 나른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피에 굶주린 괴물이거나 광기에 찬 악마의 모습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법정에 선 그는 너무나 평범하고, 오히려 온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중년 신사의 모습이었다. 재판 내내 그의 변론은 한결같았다. 자신은 단 한 명도 직접 죽이지 않았으며, 국가의 명령에 따라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므로 그 모든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한다는 사실보다는, 국가의 명령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br/><br/>이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했던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국가의 명령과 관료 조직의 규칙을 양심적 판단보다 앞세웠고, 피해자의 처지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에 동참하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한다고 생각했을 뿐, 악한 일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br/><br/>『사람의 모든 행위가 자신의 눈에는 깨끗하나, 주께서는 그 영들을 달아보시느니라』(잠 16:2). 『사람의 모든 행위가 자신의 눈에는 옳으나, 주께서는 마음들을 감찰하시느니라』(잠 21:2). 사람이 자기 눈에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에는 예외가 없다.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은 히틀러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 밑에서 유대인 학살에 동참한 아이히만도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했다. 재판관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의 죄에 빠졌던 것도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였다(판 17:6; 21:25).<br/><br/>사람들은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들을 달아보시고, 마음들을 감찰하신다(잠 21:2).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감춰진 동기를 보시는 것이다. 여름수련회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참석하려고 기도하며 애썼으나 여러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사람과, 처음부터 갈 마음이 없어서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결과만 놓고 보면 같지만, 『마음들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둘을 다르게 판단하신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 자신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라고 명령하시는데(히 10:25), 충분히 참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참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변질』시키는 것과 같다(렘 23:36).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사람과(고후 2:17), 주어진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br/><br/>“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착각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이슬람 폭탄테러범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인 로마카톨릭도, 성경을 변개시키는 자들도,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지역 교회를 비난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도,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선함을 선언』하고 있다(잠 20:6). 그러나 성경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한다(롬 3:12).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땅 위에 한 명도 없느니라』(전 7:20). 이것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이다.<br/><br/>사람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옳은 것을 행하려고 하는 악한 본성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에게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울은 짐승들과 아말렉인들의 왕 아각을 살려 두고도 『내가 주의 계명을 이행하였나이다.』(삼상 15:13)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분히 이행했다고 스스로 판단했고, 살려서 가지고 온 짐승은 제물로 바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울의 죄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이행하지 못한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다. 아이히만이 국가의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었다면, 사울은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여 바꾸었다. 방향은 다르지만, 둘 다 자신의 행위가 왜 잘못됐는지 알지 못했고, 오히려 옳은 일을 했다고 착각했다.<br/><br/>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말리기 시작했다(마 16:22).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이 되는도다. 이는 네가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들을 생각함이라.』(마 16:23)라고 책망하셨다. 베드로는 아이히만처럼 생각하기를 멈추지도, 사울처럼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스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과 의도로 행동했다. 베드로는 십자가 사건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주님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해서 그 일이 옳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마음속에 주를 배반할 생각을 넣은 것처럼(요 13:2) 마귀가 넣어 준 생각일 수도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일 수도 있다(막 7:21). 선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어서 구별이 어려울 뿐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옳다”는 기준마저 마음대로 바꾼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빛 대신 어두움을, 어두움 대신에 빛을 두며, 단것 대신에 쓴 것을, 쓴 것 대신에 단 것을 두는 자들에게 화로다!』(사 5:20) 그러므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그 일이 옳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말렉을 완전히 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양들과 소들을 취하였』다고 말한다(삼상 15:21). 그러나 사무엘은 『거역함은 마법하는 죄와 같고 완고함은 행악과 우상 숭배와 같』다고 경고한다(삼상 15:23).<br/><br/>그렇다면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해야 하는데, 문제는 확신을 갖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확신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그러나 너는 네가 배운 것과 확신한 것에 꾸준히 거하라. 네가 누구에게서 배웠는가를 알며 또 어릴 때부터 네가 성경을 알았으니, 그 성경은 너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할 수 있느니라』(딤후 3:14,15). 디모데의 확신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 아니라, 그가 “배운 것,” 곧 “성경”에서 나온 확신이었다. 아이히만도, 디모데도 똑같이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자기 자신”에게, 디모데는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확신의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라면 그것은 아이히만의 확신과 다를 바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신만이 흔들리지 않는다.<br/><br/>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확신이 없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이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이 『너희로 기억나게 하여 너희의 순수한 생각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라고 밝혔다(벧후 3:1). 그리스도인의 생각도 세상의 가치관과 육신의 욕망에 영향을 받아 얼마든지 흐려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각이 날뛰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고후 10:5). 이를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순수한 생각을 일깨워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기(잠 30:5) 때문에, 사람의 생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맞닿아 있을 때에만 순수해질 수 있다.<br/><br/>그러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분별이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말씀이 나의 생각과 동기와 행동을 판단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기 때문이다(히 4:12).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더욱 말씀을 붙들고 다윗처럼 기도해야 한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생각들을 아소서』(시 139:23).<br/><br/>“나는 결코 악하지 않다”고 자신하지 말라. 선한 의도와 거리낌 없는 양심 뒤에도 자기 의와 완고함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말씀으로 생각을 일깨우고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라. 강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기꺼이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겸손이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완벽한 저울 위에 자신의 생각을 부지런히 올려놓음으로써,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Aug 2026 10:49:1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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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역자 품귀 현상에 시달리는 한국 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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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한국 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해묵은 이야기가 됐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탈종교화의 거대한 파도에 교인들이 쓸려 나가기 시작한 지도 벌써 십수 년이 흘렀다. 따라서 혹자는 근래 문제가 되는 “사역자 품귀 현상”도 같은 선상에 있는 진부한 주제로 치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간 터져 나왔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만일 교인 수와 사역자 수가 같은 비율로 줄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한국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사역자 지망생들이 그 꿈을 접는, 극단적인 붕괴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br/><br/>&lt;데일리굿뉴스&gt;는 “교역자를 구합니다”라는 제하의 3편의 기획기사를 통해 그 단면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서울 영등포의 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요즘은 교회마다 부교역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라고 푸념했다. 여러 창구를 통해 “전임사역자 구인 공고”를 냈지만, 그 교회에는 반년이 넘도록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경기 지역의 다른 목사도 “지원자가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상황”이라면서 현실을 전했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이하 목데연)에서 담임목사 500명을 대상으로 한 2023년 조사에 따르면, 최근 전임전도사나 부목사를 모집했을 때 지원자가 없었다고 응답한 비율은 무려 전체의 83%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현실 속에 사역을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역의 규모를 축소하는 풍경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br/><br/>그렇다면 도대체 사역자 수급난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전임)사역 현장의 “신참들”의 상황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초임 전임사역자들은 대부분 신학대학원생들이다. 신학대학교 졸업생 가운데 “더 나은 처우”를 위해 석사 이상의 학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주요 장로교단의 경우 대학원 졸업장이 없으면 아예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초임 전임사역자들은 필연적으로 학비 마련, 학업, 사역 수행 및 수련이라는 삼, 사중고에 직면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에게 부과되는 “사역”이란 주일학교나 각 부서별 예배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서류 처리, 건물 관리, 차량 운행 등 교회의 온갖 잡다한 업무로까지 그 범위가 무한히 확장된다.<br/><br/>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감당하다 보면, 당연하게도 “더 나은 처우”가 있는 자리로 올라가는 데 필요한 “이력”을 만들어내는 일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는 가운데 초임 사역자들은 기약 없이 현재의 잡역에 시달려야 한다는 절망스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대학원 재학 중인 사역자들의 업무를 조정해 주거나 연구에 필요한 시간을 보장해 주는 교회들도 있기는 하지만, 보통의 교회들에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안인섭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는 “그런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역지가 서울의 일부 시스템이 잘 갖춰진 교회에 집중돼 있다”면서, “좋은 교회에는 지원자가 몰리고 다른 교회는 교역자를 구하지 못하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자신의 진단을 &lt;데일리굿뉴스&gt;에 전했다. 이런 현실 앞에 “파트타임 사역자”에 머물면서 부수적인 수입원을 확보하는 쪽으로 선회하거나, 아예 진로를 바꾸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br/><br/>제도권의 “전문가”들은 교단 차원의 재정지원책 및 사례비 기준 마련, 군소 교회 사역을 의무화하는 목사 안수 조건 개정, 교회 간 합병, 인턴십 및 교육프로그램 운영, 평신도 사역자 기용 확대 등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식상한, 수박 겉핥기식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사태의 진정한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도 있듯, 제도권 공론장에서 늘 제기되던 방법으로 이 문제의 실마리를 찾으려 드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시도라 하겠다.<br/><br/>이 문제의 진짜 원인은 한국 교회의 사역자 수급 구조 자체에 있다. 말씀의 사역을 담당할 사역자는 원칙적으로 지역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급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크레테의 각 성읍에 목사들을 세우기 위해 멀리까지 “구인 공고”를 내라고 말하지 않았다. 디도는 목사가 될 형제를 크레테에서 찾아야 했다(딛 1:5-9). 선교 사역을 위해 먼 타지로 부르심을 받거나 다른 지역 교회로 부르심을 받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은가? 그런 경우라도 반드시 지역 교회에서의 부르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자기가 소속된 지역 교회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지체들을 세우는 사역에 부르심을 받지 못했던 사람에게 외지에 나가 무슨 일을 하라는 부르심이 주어진 경우는 없다.<br/><br/>따라서 사역자 수급 문제를 다루려면 초임 사역자들이 겪는 과중한 부담을 논하기 전에, 먼저 왜 각 지역 교회들에서 일꾼이 나오지 않는지를 짚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초임 사역자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사역 기피 혹은 이탈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에 가깝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을 필요한 만큼 배출하지 못한 교회들이 억지로 사람을 구해다가 두세 사람의 몫을 전가하는 까닭에 생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br/><br/>그렇다면 교회들은 왜 일꾼을 길러 내지 못하는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교회들이 복음을 전해 새로운 물고기를 낚아 오는 일(마 4:19)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데연에서 지난 2024년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전체 교회 출석자 대비 연간 5.8%가 새신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마저도 “수평이동자,” 즉 다른 교회에서 유입된 사람의 비율이 71%나 됐는데, 바꿔 말해 한국 교회 전체를 통틀어 진짜 새로운 얼굴은 연간 1.7%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수치는 교회들이 “서로의 어항에서 물고기를 빼내 가는” 데에만 몰두하고, 교회 밖의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여 교회로 예배드리러 오도록 하는 데에는 소홀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br/><br/>“물고기 유치전”의 패자일 수밖에 없는 중소형 교회들의 사정은 나날이 어려워져만 간다. 실제로 목데연이 올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교인 수가 29명 이하인 교회들 가운데는 헌금 액수가 줄어든 교회가 늘어난 교회보다 32% 더 많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인 수가 500명 이상인 교회들 가운데는 오히려 반대로 헌금 액수가 늘어난 교회가 줄어든 교회보다 22% 더 많았다. 이는 대형 교회로 “물고기들”이 대거 이동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지표다. 어느 교회나 본질을 상실한 마당에, 자본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오감을 만족시키는 데 특화된 대형 교회로의 쏠림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br/><br/>말하자면 앞서 기술한 상황이 전체 교회의 약 80%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소형 교회들(출석 교인 50명 미만)이 일꾼 품귀 현상에 시달리는 진짜 이유다. 새로운 “물고기”도 낚지 않고, 이미 “어항”에 있던 것마저 빠져나가는 판국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역자를 배출하겠는가? 따라서 이런 풍토를 만드는 데 일등공신인 지역 교회의 목사들은 사역을 도울 동역자가 구해지지 않는다고 푸념할 자격이 없다. 모든 것이 자업자득일 뿐이다.<br/><br/>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님께로 이겨온 다음, 그들을 양육하여 다른 죄인에게 또다시 복음을 전하고 양육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어디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신학교인가? 아니다. 그 일은 목회 현장에 맡겨졌다(딤후 2:2). 신학교의 교수들이 조금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에 가장 앞장서야 하는 것은 지역 교회의 목사다. (한국 교회에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신학 교수도, 목사도 없다.) 복음 전파와 양육의 직무를 목사들이 유기했을 때 벌어지는 일은 목회의 해체다. 본연의 임무를 상실한 그 교회를 하나님께서 흩어 버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없어져야 마땅한 그런 교회로 새로운 사역자를 부르실 리 만무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br/><br/>오늘날 사역자 수급난은 “부목사” 이하의 직급에 관한 이야기지만, 머지않아 “담임목사”의 수급도 어려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2024년 예장합동 총회에서는 2038년에는 절반에 달하는 교회가 담임목사조차 청빙하지 못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것은 바른 말씀을 거부한 교회들에게 닥칠 당연한 결말이다. 목사들이여, 교회를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그렇다면 바른 말씀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아, 복음 전파와 양육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바른 말씀과 진리의 지식으로 무장하여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만이 현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해결책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Aug 2026 09:40: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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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우주적 스케일”의 신약 시대 구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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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구원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 외에 행위를 추가하려는 종교인들이 교회들에 여전하다. 이 행위 구원의 문제는 교회가 휴거될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하늘로 휴거될 성도들과 대환란에 들어갈 교인들을 나누는 기준이 될 것이다.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하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 여전히 땅에 발붙이고 있을 부류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닌가?<br/><br/>“행위 구원”이라는 저주받을 이단 교리는 교회 내에 다양한 형태로 침투해 있다. 죄는 한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 모든 죄의 동기는 한 가지, 곧 “구원의 불완전성”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속 사역 안에서 안식하지 못하는 종교인들은 구원을 스스로 완성하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즉 『다 이루었다.』(요 19:30)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족하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초과돼서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미달돼서도 안 된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행 4:12). 이 점을 간과하며 흔들리던 교회가 바로 “골로새 교회”인데, 이 불안정한 교회에게 보내진 바울의 서신은, 구원이 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족한지, 우리에게 그 선명한 진리를 계시해 준다. <br/><br/>골로새 교회는 헬라 철학(골 2:8)과 율법주의(골 2:16), 금욕주의(골 2:21-23), 심지어 천사 숭배(골 2:18)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된 구원이 성도들의 마음 안에서 뒤흔들렸던 것인데, 사도 바울은 신비한 지식으로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는 “영지주의” 같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골 2:8)당하던 교회에게 『하나님과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신비의 지식』(골 2:2)을 제시하며 『그[그리스도]의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라고 일침을 가한다. 교회 내로 들어온 인문학 등 세상 학문과 철학, 이데올로기 같은 『세상의 유치한 원리』(골 2:8)는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죽었』기에(골 2:20), 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빌 3:8). <br/><br/>사도 바울이 “천사 숭배”로까지 타락해 가는 골로새 교회에 강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다. 그는 그에 관한 논증을 위해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기원”과 “창조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이는 만물이 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그는 만물 이전에 계시고 또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속하느니라』(골 1:16,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는 것들”(물질세계)과 “보이지 않는 것들”(영적 세계)의 창조주이시다. 보통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를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바울은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의 “보좌들과 주권들과 정사들과 권세들”까지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음을 선포한다.<br/><br/>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2장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정사”와 “권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다. 골로새 교회에는 “천사 숭배”(골 2:18)를 빌미로 그 영적 존재들에 대한 숭배가 조장되었으니,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들이 신약 교회 시대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조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골로새서 1장에 이어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나니 너희도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느니라』(골 2:9,10).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모든 영적 세력을 망라하는 우주적인 통치 질서를 보여 준다. 특히 『신격』이라는 단어가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데, 성경에서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신격』(롬 1:20)은 영어로 “Godhead”이다. 삼위일체 “하나님”(God)께서 만물의 “머리”(Head)로서 우주의 기원이시자 유일하신 통치자시라는 뜻으로, 『신격[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the head of all principality and power]』로서 표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즉 “머리”(head)라는 단어가 “신격”(Godhead)과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head)”에 동일하게 쓰임으로써 『신격』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적 존재들의 “머리”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너희도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이신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느니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 바로 그 『신격』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br/><br/>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시기에 만물의 주인으로서 만물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고 계신다. “정사들과 권세들”을 포함한 만물은, 만물 이전부터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또 그분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골 1:16,17).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모든 영적 존재들의 “머리”(창조주이시자 유일하신 통치자)이시므로 그분 외에 다른 어떤 영적 존재들을 숭배하는 일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강조점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온전해진 성도들에게는 어떤 다른 중보자나 어떤 율법적 행위도 필요 없는 것이다. <br/><br/>또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4,15”에서 “정사와 권세”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제시한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또 그것을 그의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셨으며 정사들과 권세들을 벗겨 내어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장의 “10절”은 “모든” 정사와 권세를 언급한 반면, 이곳 “15절”은 그리스도께서 “벗겨 내신” 정사들과 권세들을 다루고 있다. “벗겨 내어 십자가로 이기신” 정사들과 권세들이라면 하나님께 적대적이고 타락한 사탄의 악한 정사들과 권세들임이 분명하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당하고 무장 해제된”(『벗겨 내어』) 패배자들로서 묘사되는데, 고대 로마에서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국의 왕과 장군들을 무장해제시키고(『벗겨 내어』) 로마 거리에서 패전 포로로서 조롱거리로 삼으며(『공개적으로 나타내시고』) 개선행진을 벌였던 데서 그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그것을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심으로써, 사탄의 세력이 우리를 합법적으로 고소하고 지배할 수 있었던 무기를 빼앗아 “무장해제”시켜 버리셨던 것이다. <br/><br/>정리하자면, “골로새서 2:9,10”은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다스리시는 ‘머리’로서 영적 세계에 군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과, 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온전함”을 강조한 것이고, “골로새서 2:14,15”은 “타락한 영적 세력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구속적 승리와, 그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악한 정사들과 권세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신약 시대의 구원은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함과 자유함”을 내포하고 있다. <br/><br/>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1,2장을 통해 못 박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사와 권세를 포함한 만물을 만드셨고(골 1:16), 만물을 그 “머리”로서 다스리고 계시며(골 2:10), 그중 타락한 자들을 십자가로 이기셨다(골 2:15)는 것, 즉 주님의 피조물인 정사들과 권세들 가운데 일부가 인류를 속박하고 타락시켰지만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반역한 세력들을 십자가에서 무장해제시키고 완벽하게 제압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들이나 영적 세력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을 숭배해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이단이 침투해 있던 골로새 교회에게, “너희가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영적 존재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며, 그들은 만물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를 괴롭히는 타락한 정사들과 권세들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끝장내셨다.”라며 영적 자유와 구원의 확신을 심어 준 것이다.<br/><br/>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골로새 교회의 문제를 다룬 서신은 사실상 온 우주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스케일을 품고 있다. 골로새서는 심지어 십자가를 통한 “만물의 회복”까지 언급한다(골 1:20). 그뿐이 아니다. 장차 만물을 회복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다”(골 1:27)고 언급한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다.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께서(골 1:16), 인류를 억압하고 옭아매던 악한 영들을 그분의 십자가로 끝장내시고(골 2:15), 내 생명의 머리가 되어 주시더니(골 2:19), 마침내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날, 나를 그 우주적인 영광의 한복판에 주인공으로 나란히 세우실 것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라』(골 3:4). 골로새 성도들이 겪었던 영적 위축감과 두려움은 지금의 교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그 모든 이들의 시야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린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더 해야 될 것처럼 조바심을 내며 두려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위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시켜서 “십자가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안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Aug 2026 09:39: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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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중보기도의 뜨거운 열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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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찰스 스펄전 목사가 손님들에게 자기 교회의 시설을 안내하던 적이 있었다. 스펄전 목사는 손님들을 데리고 교회 건물의 주요 부분을 모두 둘러본 후, 뜬금없이 “자, 이제 교회의 난방 장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손님들은 교회 건물의 난방 시설을 보여 준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그곳에 무슨 볼거리가 있겠는가 싶어 의아해하며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당도한 곳은 다름 아닌 사백 명의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방이었다. 그들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스펄전 목사는 자기 교회에서 가장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곳이 바로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행해지는 장소이며,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난방 시설임을 역설했던 것이다.<br/><br/>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주님과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제가 필수이다. 주님과의 교제는 말씀과 기도의 생활로 요약되는데, 성경의 말씀이 성도의 마음을 뜨겁게 함으로써 역사한다면(눅 24:32, 렘 20:9), 기도는 말씀을 통해 내면의 열정이 타오른 성도가 주님께 말함으로써 표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의 삶을 누리는 성도는 성경 공부와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열정”을 다하는 법이다. 그러한 성도들이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게 되면 지역 교회의 영적 열기는 계속 달아오르며 모든 사역을 열정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br/><br/>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기도 응답의 약속을 믿는다. 하지만 자신의 개별적인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자신의 기대와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악한 영적 세력의 방해와 반대에 직면하다 보면 기도를 지속하는 힘이 약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성도들 간의 “중보기도”이다. 중보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기도하는 것이다. 한 성도의 기도가 힘에 부칠 때 다른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그 역사하는 힘은 커지게 된다.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바로 이런 중보기도가 지역 교회의 영적인 열기를 뜨겁게 달구는 것이다.<br/><br/>성도 개개인의 승리하는 삶과 지역 교회 사역의 향방은 중보기도의 뜨거운 열기에 달려 있다. 그만큼 성도와 교회를 향한 마귀의 교묘한 공격과 반대가 거세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와 간구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와 교회를 위한 “중보기도”에도 열정을 다해야 한다.<br/><br/>그리스도인은 다른 지체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던 “에파프라”는 바울의 『전우』(빌 2:25)였고, “동료 죄수”(몬 1:23)로서 신실한 일꾼이었다. 그런 그의 진가는 다름 아닌 다른 성도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입증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종인 에파프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그는 항상 너희를 위하여 열렬히 기도하니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완전하고 온전하게 서도록 하기 위함이라』(골 4:12). 이런 에파프라가 사도 바울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 기도의 일꾼은 바울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신실한 일꾼으로 쓰임받았다(빌 2:25).<br/><br/>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다(고전 3:9). 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전임 사역자들이 사역의 일선에서 주님을 섬기지만, 사역은 절대로 목사나 사역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섬겨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빌 1:1)이며, 그들 모두가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되, 무엇보다 지역 교회와 일꾼들, 그리고 다른 성도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로 협력해야 한다. 교회의 목사나 집사, 신실한 소수의 일꾼들에게만 짐을 지우거나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자신은 뒤로 물러난 방관자가 되어선 안 된다. 현재 교회가 당면한 온갖 문제와 난관, 절실한 필요, 그리고 사역의 중요한 계획을 위해서 모든 성도가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br/><br/>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는 새 계명을 말씀한다. 성도는 자신의 필요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의 필요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필요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도록 기도할 때 충족된다(빌 4:19). 아직 영적으로 어리거나 혹은 자신의 삶에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중보기도”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들의 삶이 궁핍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영적으로 온전히 설 수 있게 된다. 신실한 일꾼인 에파프라처럼 우리도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그렇게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br/><br/>중보기도의 열정은 교회와 다른 지체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되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벧전 1:22). 여기서 “뜨겁게”라는 단어가 바로 “열렬히”와 같은 뜻이다. 말하자면 성도 간의 “뜨거운” 사랑이 중보기도의 불을 지피며, “열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은 또한 기도로 “분투”해야 한다. 바울은 종종 자신이 가르치고 양육한 성도들에게 기도에 힘쓰도록 부탁할 때 “분투”하라는 말로 표현했다. 『형제들아,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너희의 기도로 나와 함께 분투하되』(롬 15:30). 기도가 “분투”인 까닭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일들에 항상 마귀의 방해와 공격이 있기 때문이다.<br/><br/>마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파괴하려고 시도하며, 이를 위해 온갖 흉계를 꾸며 함정을 파놓거나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써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적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그분의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가 사탄의 계략을 모르지 않는다면(고후 2:11), 그것이 분쇄되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모든 성도의 몫이다. 하나님의 종이 경고하며 당부하는 바를 명심하고 다 함께 기도로 “분투”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경, 그리고 종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물리쳐 주시도록 성도 자신도 기도로 싸워야 한다!<br/><br/>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 아말렉과 전쟁을 치렀을 때, 여호수아가 군대 대장으로서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 싸우는 동안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 두 손을 들고 기도했다(출 17:10,11, 딤전 2:8). 즉 모세는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기도로 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구도였다. 그러나 모세 홀로 자기 손을 끝까지 들고 있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손이 무거워져 자칫 내려가려는 순간, 아론과 훌이 양옆에서 그의 손을 붙들어 주었다(출 17:12). 바로 이것이 “중보기도”의 한 예를 보여 준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중요한 요인은 바로 “기도”인데, 그 기도는 하나님의 종 한 사람만이 아니라 함께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중보할 때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결국 기도의 능력을 힘입은 여호수아는 칼날로 아말렉을 쳐부수었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뒀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 전쟁을 치를 때 “중보기도”로 “분투”해야 한다.<br/><br/>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은 단순히 성도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한 성도의 고통 혹은 영광이 모든 성도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고전 12:26,27). 교회의 운영과 하나님의 사역을 목사나 사역자들에게만 맡겨 놓고, 그들이 어련히 잘하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은 접어야 한다. 또한 다른 성도들의 고통과 문제를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방관해선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늘 주변 성도들과 자신이 속한 지역 교회의 영적, 현실적 필요에 민감하게 깨어서 늘 인내와 간구로 기도해야 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엡 6:18).<br/><br/>주님께서는 영적 전쟁에 효과 있는 기도로서 “중보기도”를 제시하신다. 그래서 지역 교회 안의 목자를 위시한 모든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지역 교회 안에 자주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간구하며 “중보기도”하는 성도가 많을수록 그 교회의 열기는 뜨거워진다. 그럴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위대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 일들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중보와 간구가 기대대로 즉시 응답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망하기는 이르다. 우리는 “인내”로 꾸준히 기도하고, 결과는 주님의 뜻에 맡겨 드리면 되기 때문이다. 결과를 예단할 필요 없이 그저 “열렬한” 기도와 중보로 우리 자신과 지역 교회의 열정을 뜨겁게 달구어야 한다. 그 기도의 무릎 위에 주님의 도우심과 역사가 임할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7 Jul 2026 08:19: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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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불멸”을 향한 인류의 헛된 노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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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건강과 장수”는 인류 전체의 관심사였으며, 운동이나 음식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장수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건강과 장수를 위한 평범한 노력을 넘어서 “불로불사”를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진시황(B.C. 259-210)을 들 수 있다. &lt;사기&gt;(史記)의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이 “서불”이라는 자를 바다로 보내 삼신산에 사는 신선들을 찾고, 그들에게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한 이야기가 실려 있기도 하다.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들은 “연금술”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마시면 늙지 않는 “엘릭서”(Elixir)라는 약을 찾거나 발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했다.<br/><br/>“불로초”나 “엘릭서”의 이야기를 “약학 지식이 부족하던 시대”의 “어리석은 시도”처럼 생각하던 시대도 있었으나, 인류는 결코 “불로불사”의 꿈을 접지 않았다. 오히려 약학 지식이 발전해 감에 따라 그 꿈을 더욱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에도 면역 억제제로 사용되는 “라파마이신”이라는 약물은 동물 실험을 통해 “수명 연장 효과”가 입증되어 연구가 지속되고 있으며, 당뇨병 치료제로 쓰이는 “메트포르민”이라는 약물도 “세포 내 대사 조절을 통한 노화 지연” 효과가 있는지 연구 중이다. <br/><br/>건강 보조 식품이나 화장품 등의 광고에서는 “노화 지연”(저속 노화)을 넘어 “노화 정지”나 “노화 역행”(역노화)과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며, 약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넘어, “유전자 조합 인자”를 주입함으로써 노화된 세포의 기억을 초기화하여 젊은 세포로 되돌리는 의학 기술도 여러 의학 기관에서 연구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세포 재설계”(Cellular Reprogramming)라 불리며, 이 유전자 조합 인자는 이 기술을 확립하여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이름을 따 “야마나카 인자”라 불린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2019년 미국의 위안청 라이언 루 박사가 쥐의 망막 신경 세포에 세포를 젊게 만드는 유전자를 주입하여 새로운 신경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했으며, 올해 2026년에 인체 임상 시험을 시작한다고 밝힌 바 있다.<br/><br/>인류가 이룩한 의학 기술을 이용해 “노화 역행”과 “불사”를 추구하는 대표적임 인물로는 “죽지 않기 프로젝트”(Don’t Die Project)로 유명한 미국의 백만장자 브라이언 존슨(49)이 있다. 그는 매년 30억 원을 투자하여 식단, 운동, 수면, 혈액 검사, 각종 영양제 등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자신의 신체 데이터를 매일 측정·분석하는 이른바 “바이오 해킹”을 계속해 왔다. 그의 목표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신체 나이를 18세로 되돌리고, 160세까지 사는 것이다. 그는 18세인 아들의 혈액에서 분리한 혈장을 자기 몸에 주입하고, 자기 피를 자기 아버지에게 수혈하는 등 3대 혈액 교환 실험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최근 “자가면역성 위염”에 걸렸다. 그는 헤모글로빈 등이 정상 수치라 빈혈이 아닌데도 지난 11년간 철분 수치가 낮았고, 식이요법과 영양제 등을 통해 철분 수치를 높이려 했지만 실패했는데, 이제야 그 원인을 밝혀 낸 것이다. 매년 30억 원을 쓰면서도, 생명과 건강을 주관하시는 분이 따로 계심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를 두려워하면 장수하려니와, 악인의 연수는 짧아지리라』(잠 10:27). 인간의 신체에 직접 영향을 주어 “역노화”를 이룩하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예 인공 신체를 만들어 대체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3D 바이오 프린팅 인공장기 기술”을 통해 팔다리뿐만 아니라, 뼈, 연골, 근육, 심장, 폐, 신장, 간, 위 등의 기능을 하는 인공 장기들을 만들려는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포스텍의 바이오프린팅 인공장기 응용기술센터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줄기세포융합연구센터가 인공장기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br/><br/>약학 및 의학 기술을 통해 “세포”를 젊게 만드는 방식이 아닌, “트랜스휴먼 기술”을 통해 건강과 불사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기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를 기계적인 신체로 전환함으로써 불사에 도달하려고 한다. 뇌신경과 연결하여 움직이는 기계 신체나, 뇌의 신호를 무선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기계 신체를 만들어 기존의 신체를 대체하고, 기능이 더 좋은 기계 장기를 제작하여 자연 신체를 대체함으로써 죽지 않는 몸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br/><br/>“트랜스휴먼 기술”을 개발하는 이들은 더 나아가 뇌에 삽입해서 작동할 수 있는 컴퓨터 칩을 제작하여, 뇌의 기억력과 신체 통제 능력 등을 향상시키고, 이를 인공 신체와 연결시켜 “슈퍼 인류”인 “트랜스휴먼”을 탄생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컴퓨터 칩의 도움을 받아 뇌 기능이 향상되어 더 똑똑한 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무선 자동 기기를 생각만으로도 작동시키고, 자연 신체보다 더 기능이 좋은 인공 신체를 통해 더 무거운 것을 들고, 더 정교한 작업을 하며, 더 많은 일을 하고도 피로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인공 신체로 계속 교체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br/><br/>“트랜스휴먼 기술”의 선두주자인 “뉴럴링크”는, 테슬라, 스페이스X, 보링 컴퍼니, xAI 홀딩스 등 다수의 첨단 기술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첨단 생명공학 기업으로, 초소형 인공지능 칩인 “뉴럴레이스”를 개발하고 인간의 뇌에 이식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신경계의 이상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재활을 도울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불멸하는 인류로서의 “트랜스휴먼”을 탄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br/><br/>세상이 과학 기술의 향상을 통한 “영원한 생명”을 헛되이 추구하고 있는 반면, 성경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비성경적인 “웰다잉”을 추구하고 있다. “기독교 웰다잉 학회”가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각당복지재단 신관에서 창립예배 및 사례발표회를 열었던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 삶을 완성하는 믿음”을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창립예배는 하도균 교수(서울신대 기독교 웰다잉 디렉터)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이명관 목사(진주성결교회)의 기도에 이어 황덕형 총장(서울신대)이 설교했다. 설교에서 황 총장은 “죽음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의 더 큰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소위 신학대학 총장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쓰임받지,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쓰임받을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또한 그는 “웰다잉은 죽음의 순간만을 준비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온 삶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돌아보게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은 “잠드는 것”에 불과하고(살전 4:13,14), “휴거” 이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각 그리스도인의 삶이 평가되고 정리되는 것이며(롬 14:10, 고후 5:10), 그 이후에 천년왕국에서 통치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딤후 2:12, 계 5:10; 20:4-6)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러한 허황된 설교를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노년의 삶은 낭만적으로 “잘 죽기 위해 정리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삶을 살다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가 아닌 황 총장은 이 진리를 모르기에 스스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내용을 설교라고 한 것이다.<br/><br/>한기채 이사장(서울신대)은 “죽음을 멀리하려는 일반 문화와 달리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천국 소망 안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돌봄을 넘어 천국 소망까지 품는 ‘토탈케어 미니스트리’가 바로 제 목회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목회의 본질”은 누군가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게 하는 데 있지 않다. 목사라면 복음을 전파해야 하며, 자기가 구령한 사람을 바른 말씀으로 양육하여 마귀들과 영적 전쟁을 치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재림을 대비하는 성도로서 성장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지 “토탈케어 미니스트리” 같은 것은 성경적인 목회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<br/><br/>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고(롬 3:23),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씀한다. 인류가 “영생”을 위해 노력하고 “웰다잉”을 추구한다 해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러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살후 1:8,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라고 말씀하셨다. “영생”을 얻고, 또 “잘 죽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 하늘 아래에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은 없다(행 4:12). 오직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을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롬 10:9).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7 Jul 2026 08:15: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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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불멸”을 향한 인류의 헛된 노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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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4 Jul 2026 15:37: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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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순교도, 정교분리도 모르는 교회들의 성명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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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일명 “종교법인 해산법”을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논란의 도화선이 된 것은 지난해 일부 종교 단체를 향해 제기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와, 이른바 “극우 목사”로 분류되는 인사들의 정치적 행보였다. 종교인들이 정치권에 불법 자금을 제공하고, 교인들을 동원해 당내 경선이나 공직선거에 개입하며 특정 후보 지지를 종용했다는 의혹은, 그렇지 않아도 종교계에 비판적이던 여론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br/><br/>이에 좌파 계열 최혁진 의원 등 11인은 지난 1월 민법 일부개정법률안, 곧 “종교법인 해산법” 또는 “정교유착 방지법”으로 불리는 이 법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도 신년 기자회견 자리에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선호가 결합해 버리면... 나라가 망합니다. 그래서 이건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돼요. 조직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제재가 엄정하다는 걸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여 줘야 합니다.”라며 정부도 같은 기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br/><br/>발의된 법안의 골자는 정부에서 어떤 (종교 단체가 세운) 법인이 “정교분리의 원칙 또는 공직선거법 등 관계 법령을 위반”했다고 판단하면 영장 없이 그 법인을 수사할 수 있도록 하고, 위법 행위가 발견되면 법인을 해산시켜 그 재산을 국고로 환수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물론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국가가 종교 단체(교회)의 결성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대개 법인에 귀속된 형태로 관리되는 교회 소유의 부동산, 기독교 언론사, 출판사, 선교 단체, 복지 재단 등은 모두 사정권 안에 들어온다. 위정자의 죄에 대한 성경적 비판조차 정부가 “정치적”이라고 판단한다면 얼마든지 불이익을 가할 수 있기에, 이 법안은 “악법”이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br/><br/>자유 세계에 속한 국가들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이 같은 법안이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철회되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 국내 교계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종교법인 해산법 반대대책위원회”(이하 종반위)를 꾸려 지난 4월 성명서를 내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민대회를 열었다. 해외에서도 “160여 개국에 있는 약 6억 명의 복음주의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단체”인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이 지난 6월 대한민국 국회가 해당 법안을 재검토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런데 두 단체의 성명서의 요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곧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국가로부터 종교를 보호하기 위한 원칙이지, 국가가 종교 공동체를 감독하거나 징계하거나 제거할 권한을 부여하는 개념이 아니며”(WEA), 해당 원칙을 “종교 표현 억압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종반위)는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종반위의 성명서가 훨씬 노골적으로 한국 교회를 향해서는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침묵하지 말 것”을, 발의자인 최혁진 의원을 향해서는 “사퇴”를 요구했다는 점 정도였다.<br/><br/>두 단체의 성명서를 찾아보는 데 시간을 낭비할 것을 권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만일 찾아본다면 아마 쓴웃음을 금할 길이 없을 것이다. 두 단체 모두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만을 거론할 뿐, 성경에서는 단 한 구절의 말씀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무엇이 “성경”인지 규정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성경,” 즉 “영감으로 주어지고, 오류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대체 무엇인가? (WEA에서 자주 인용하는) NRSV인가, 아니면 개역개정판인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역본이나 원어 판본인가? 그들 가운데는 대답할 수 있는 자가 없다.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성경”과 동맹 관계에 있는 자들의 “성경”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요, 사실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그 책조차 “성경”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한국 교회” 혹은 “복음주의자”의 이름으로 나온 성명서에 성경이 전혀 인용되지 않은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br/><br/>“성경”을 가진 성도로서 한마디를 하자면,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사퇴하라느니, 법안을 재검토하라느니 요구할 권한이 성도에게 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설령 불의한 법이 제정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사도 바울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롬 13:1)라고 말했을 때, 또 사도 베드로가 『통치권을 무시』(벧후 2:10)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을 때, 로마의 황위를 차지하고 있던 이는 그 악명 높은 네로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두 사도는 네로에게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불의한 권력” 앞에서도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br/><br/>물론 그리스도인은 법정에서, 또는 공무 집행의 현장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요 18:23, 행 22:25; 25:8). 만일 어떤 정치인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가 행하려는 것이 죄라면, 그 죄에 대해 비판할 수도 있다(마 14:4, 행 13:10,11). 그러나 만일 권세 있는 자들이 우리의 법적인 권리와 성경적인 비판을 무시하고 부조리를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선택지는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저항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늘 같은 선택을 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로마가 제국 차원에서 초기 교회의 성도들을 박해했을 때도, 로마카톨릭과 유착한 세속 권력이 유아세례를 비롯한 비성경적 실행들을 법제화하여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을 박해했을 때도 모두 같은 일이 일어났다. 참된 “순교적 신앙”이란 바로 이런 대열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믿음이지, 종반위의 성명서에서처럼 목숨을 걸 각오로 권위에 저항하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br/><br/>교회사를 보면, 개신교단을 중심으로 결성된 국내외 종교 단체들이 미국 수정헌법 1조를 들먹이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방패로 삼으려 하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미국식 정교분리”는 침례교도들, 즉 기성 개신교단에 속하지 않아 개신교도들이 결성한 식민지 정부에 의해 탄압받던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의 피로 얻어진 원칙이기 때문이다. 반면 개신교도들에 의해 생겨난 “유럽식 정교분리”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난 종교 전쟁들과 학살의 반작용으로 “국가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운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 바로 프랑스의 “라이시테”(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철저한 분리)로 대표되는 유럽식 정교분리이기 때문이다. <br/><br/>역사적으로 침례교도들이 “보호적 성격의 정교분리”를, 개신교도들은 “제약적 성격의 정교분리”를 추구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침례교도들은 대개 전천년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세상은 결국 멸망할 것이고, 자신들의 역할은 그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 확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설령 다른 세력이 폭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따를 것을 강요하더라도, 그들은 정치적으로 혹은 군사적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박해와 순교를 감수했다. 미국식 정교분리는 바로 그런 선량한 사람들을 더 이상 건드리지 말자는 데서 출발한 것이었다.<br/><br/>그러나 개신교도들은 대개 무(후)천년주의자들로서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은 그들을 때로는 의회로, 때로는 전쟁터로 나가게 했다. 그런 자들은 입을 좀 다물고 총을 내려놔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바로 유럽식 정교분리다. 그러니 개혁주의자들의 후예들이 국가를 향해 정교분리를 들먹이며 “우리는 너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도, 너희는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야말로 “아전인수” 그 자체인 셈이다.<br/><br/>애당초 스위스와 독일 등지에서 “정교유착”을 통해 교단을 세운 개혁주의자들의 후예들이 이제 와서 “정교분리”를 들먹이는 것도, 정치권을 향해 “우리를 건드린다면 목숨을 걸고 저항하겠다.”라고 하면서 “순교자적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다.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성경에도, 교회사에도 배치되는 성명을 하나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버젓이 내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기독교”를 대표할 자격이 전혀 없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반기독교적” 작태로 인해 사람들이 “기독교”를 미워하게 되고, “종교법인 해산법”을 발의하는 지경에 이른 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눅 11:52). 독자들은 그런 자들과 같이함으로써 함께 화를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4 Jul 2026 15:27:3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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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의 확실한 예언, “이스라엘의 회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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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배교한 기독교계는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시온주의는 유대인의 영토적·국가적 실체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불과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왜곡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그와 같이 해석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성경적 개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성경의 핵심은 땅 자체가 아니라 그 땅에서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 “윤리적 성취”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야말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의 문자적인 성취를 간과한 편향된 해석이다.<br/><br/>세대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무조건적인 언약”에 따른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 날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세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씨에게 주었으니, 켄인들과 크니스인들과 캇몬인들과 힛인들과 프리스인들과 르파인들과 아모리인들과 카나안인들과 기르가스인들과 여부스인들의 땅이니라.” 하시니라』(창 15:18-21). 이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윤리적 기독교 담론”을 『배설물』(빌 3:8)로 만든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왜 성경적인지, 성경이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는지 예언의 성취 관점에서 살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성취”를 피하려다가 “윤리적 성취”라 불리는 “오물구덩이”에 빠져 버린, 비참한 “소경”이 되고 말았다(마 15:14). <br/><br/>하나님께서는 카나안 땅의 소유권과 관련한 “아브라함의 언약”을 “영원한 언약”으로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확증해 주셨다. 『내가 나와 너와 네 뒤에 올 네 씨 사이에 대대로 내 언약을 세우리니,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씨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뒤에 올 네 씨에게 네가 타국인으로 있는 땅, 즉 카나안의 모든 땅을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이 “영원한 언약”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주어졌고(『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창 12:7),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설 때 반복되었다.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진 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부터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이는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네게 줄 것이며, 네 씨에게 영원히 주고 내가 네 씨를 땅의 티끌 같게 할 것임이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다면 네 씨도 셀 수 있으리라. 일어나서 그 땅을 가로와 세로로 걸으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음이라.” 하시더라』(창 13:14-17). “땅의 소유권”과 관련된 “영원한 언약”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도 확증되었다(창 26:2,3; 28:13-15). <br/><br/>아브라함에게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창 12:1,2)이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땅”과 관련된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때 함께 언급하신 것은 그들의 “씨”였다(창 12:7; 15:18; 17:7,8; 26:3; 28:13,14). 말하자면 “땅”과 그 안에 거주할 “씨”와 관련된 언약이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인 것이다. “거주할 사람”이 없는 “약속의 땅”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카나안 땅의 소유자를 “아브라함과 그의 씨”로 정해 놓으셨으며, 아브라함을 칼데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목적도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려고 칼데아 우르에서 너를 불러온 주라.” 하시니』(창 15:7). 따라서 아브라함의 육적 씨인 “이스라엘 민족”이 카나안 땅의 소유주라는 점은 “성경적으로” 재론의 여지가 없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실제적인 땅의 영역”을 다루는 언약이며, 그 땅의 불법 거주자들을 모두 내쫓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로 채우시려는 계획과 함께 체결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이후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되어 카나안 땅의 “영원한 소유주”로서 확정된 것이다.<br/><br/>시편 105편에서 위와 관련하여 동일한 계시가 주어진다. 『그가 자기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곧 천 대에 명령하신 그 말씀이라. 이는 그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그의 맹세요 또 같은 것을 야곱에게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확증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카나안 땅, 곧 너희 유업의 몫을 주리라.” 하셨도다』(시 105:8-11). 피터 럭크만 박사는 이 말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9-11절에서 논의되는 『언약』은 ‘부동산 한 구획’에 대한 ‘토지 거래’와 같은 것이다(출 3:5, 창 15:18).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칼데아 우르 출신 양치기와 그 계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한’ 아들, 곧 이삭에게 양도되었고, 이스마엘은 그 언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삭은 그것을 그의 아들들 중 단 ‘한 명’에게만 물려주었고, 에서에게서 나온 요르단인들은 그 언약에 대한 권리를 내세울 수가 없다. 그러나 야곱은 그 언약을 물려줄 때 그것을 그의 ‘열두’ 아들 모두와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그들의 가족들에게 승인해 준다(민 23:9,10; 21:23; 24:2-9). 그 언약은 어떤 아랍인이나 모슬렘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영적 유대인”(롬 2:29)이나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이삭(갈 3:16), 그리스도인(갈 4:28)과도 관련이 없다.」<br/><br/>“카나안 땅”은 『하늘과 땅의 소유주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9)께서 그분 자신의 권한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영원히” 주신 땅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두 지파와 맺으신 언약은 인간이 시비를 거는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으로 이름이 변경된 “카나안” 땅을 모슬렘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영원한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가 그 땅을 “끝없이” 소유할 것을 보장하고 있다. <br/><br/>현재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충만함이 차기까지 민족적으로 완고한 상태에 갇혀 있다(롬 11:25). 이것은 초림 때 그들의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대가로 주어진 것으로(요 12:37-40), 이방인의 충만함, 곧 이방인의 죄가 가득 찰 때까지만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 완고함의 시기가 지나면 돌올리브 나무인 이방인은 잘려 나가고, 참올리브 나무인 유대인이 본래의 줄기에 다시 접붙여지게 된다(롬 11:24). <br/><br/>이스라엘은 교회가 휴거된 후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대환란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불에 타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가시덤불처럼(출 3:1-3), 대환란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보존되며(말 3:6), 그들의 하나님께 돌아올 준비를 갖출 것이다. 대환란의 끝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로 지상에 나타나실 때, 이스라엘 모든 지파는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되신 메시아시라는 점을 깨닫고서 통곡할 것이다(슼 12:9-14). 이처럼 본토로 회복된 이스라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아 왕으로 영접하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민족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신 30:5,6, 겔 36:24-27). 그리고 그 이스라엘 민족은 두 번 다시 약속의 땅에서 뽑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자를 다시 데려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들을 세워 그곳에 거주할 것이요, 또 그들이 포도원들을 만들어 그 포도주를 마시겠고 그들은 또한 정원들을 만들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다 심으리니 그들이 다시는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그들의 땅에서 뽑히지 아니하리라. 주 너의 하나님이 말하노라』(암 9:14,15). <br/><br/>대환란 기간 동안 흩어졌던 이스라엘이 본토로 다시 모이면,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그 영원한 왕국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질 것이다(삼하 7:10-16, 시 89:3,4,35-37, 대상 17장). 이스라엘이 영원히 차지할 “땅”은 본 논단의 전반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약속된 광대하기 그지없는 지역이다(창 15:18-21). 아직 “유대인 메시아”께서 재림하시지 않은 탓에 그 땅의 소유권이 불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메시아께서 다시 오시면 세상은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계 11:15)이 될 것이고, 그 천년왕국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위대한 백성이자 민족들의 머리로서 우뚝 설 것이다(신 28:13, 사 49:23; 60:11,12). 이처럼 이스라엘이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에서 민족적으로 재건되는 일은 구약성경에서만 약 500구절 이상 다루고 있는 핵심 주제이다. 이 주제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서 각각 100구절 정도 다루고 있고, 에스겔서는 12개 장에서, 다니엘서는 2,7,9,12장에서 그 위대한 회복을 다루고 있다. 특히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의 골짜기 환상”은 마르고 관절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소망이 사라져 버린 뼈들(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집이라.』(겔 37:11)라는 말씀에 주의하라! 하나님께서는 『보라,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어서 너희로 너희의 무덤들로부터 나오게 하여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리라.』(겔 37:12)라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부활”과 “카나안 땅으로의 회복”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된 “기정사실”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4 Jul 2026 15:25:0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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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그리스도인 자신을 측정하는 잣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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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사도 바울은 신약교회사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겨진다. 바울은 제1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 안티옥에 돌아와 있었는데, 그때 함께 선교 여행을 다녀온 바나바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파한 각 성읍의 우리 형제들에게 다시 가서 방문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행 15:36). 말하자면 이것은 자신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세워진 교회와 형제들에게 다시 가서 그들을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시작은 잘했지만 사도들이 떠나온 이후에도 잘하고 있는지, 혹시 가시밭에 떨어진 씨처럼 잘 자라지 못하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었으니, 이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한 제안인가?<br/><br/>마지막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위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았다 해도, 육신은 언제든지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는 약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와 관련하여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라고 하셨다. 재림이 가까운 지금은 제대로 된 믿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때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을 살피고 측정하는 잣대를 항상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br/><br/>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잣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 두려움이 처음 등장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였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창 3:10)라는 말씀처럼, 죄를 지은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두려움에 숨었다. 이때부터 죄인 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셨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두려움은 단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이는 두려움이 있는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순종했다. 그러나 이삭을 제단에 묶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만류하시며 『나는 이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두려움을 인정해 주셨다. <br/><br/>이러한 두려움은 구원의 문을 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 백부장 코넬료에 대해 성경은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행 10:2)라고 기록한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했던 코넬료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보내어 그와 그의 온 가족과 친구들을 구원해 주셨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보류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br/><br/>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 된다. 성경은 『죄악은 자비와 진리로 정결케 되나니, 사람들이 주를 두려워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라고 말씀한다. 아이가 나쁜 짓을 하려다가도 아버지의 엄한 매와 질책을 떠올리며 멈추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죄를 지었을 때 가해질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할 때 악에서 돌이킬 수 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빌 2:12)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는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워 이김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잣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롬 5:8). 이러한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것도 “첫째”로 사랑하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니라.』(막 12:30)라고 말씀하셨다. 이 첫째 자리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는 성도야말로 온전한 믿음을 이룬 그리스도인이다.<br/><br/>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이 순서를 뒤바꾸어 가르치고 실행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 없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뿐, 첫째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위선에 빠져 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타협하고 세상과 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이다. 성경은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 4:4)라고 경고한다. 하나님보다 세상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려는 것은 영적 간음과 다름없다.<br/><br/>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이 진정 하나님만을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증거하며,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사랑을 삶으로 증명해 낼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잣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전 11:26)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마귀를 따르던 진노의 자녀이자 소망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한때 멀리 있었던 너희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중간의 벽을 자신의 죽음으로 허물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그 구속의 은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죽으심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br/><br/>주님께서 그와 같이 피로 사신 교회에게 주신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뿐이며, 모두 주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성경적 의식이다. 먼저 “침례”는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과 함께 죽고, 묻혔으며, 함께 부활했음을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신앙 고백이다(벧전 3:21). 이는 구원의 조건이 아닌 모형일 뿐이기에, “세례”라는 죄를 씻는 의식으로 변개해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이다. 또한 복음을 통해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한 성도들이 참여하는 의식은 “주의 만찬”이다. 이 만찬식의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죽으심, 곧 주님의 찢겨진 살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일 뿐인데, 로마카톨릭은 그 빵과 포도주(발효된 술)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로 왜곡했다. 이와 같은 이교도 종교 집단으로부터 성별하겠다고 일으켰던 종교 개혁이 무색하게, 개신 교회들은 로마카톨릭의 사악한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루터는 물질이 변하지는 않지만 빵과 포도주 “안에, 위에, 아래에” 그리스도의 몸이 물리적으로 함께 존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했고, 칼빈은 물리적 결합은 없으나 성찬식 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임하신다는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가르쳤다. 이처럼 개신 교회들도 빵과 포도주에 거룩한 신비주의를 부여하며 주의 만찬식의 성경적인 본질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인간의 편의대로 “누룩”(죄와 거짓 교리의 상징)을 넣은 카스텔라 빵과 발효된 포도주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주님의 죽으심을 바르게 기억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죽으심을 올바로 선포하고 기념해야 한다.<br/><br/>사도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돌아보고자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성도들이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지금은 참된 믿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잣대로 자신을 엄격히 돌아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죄를 멀리하고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순결하게 기다리는 성숙한 성도로 서 있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7:05: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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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퀴어 축복 목사 파면” 무효 판결한 세상 법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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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이하 남부연회)가 남재영 목사에게 퀴어축제에 참석해 동성애 찬동·동조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출교 징계를 내린 것에 대해, 법원이 “무효” 결정을 내렸다. 대전지법 민사12부는 5월 28일 남재영 목사가 남부연회를 상대로 제기한 “연회재판위원회 판결 무효 확인”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인용한다고 판결했다.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라 결정된 사항에 대해 세상 법정이 판결 무효를 결정한 것이다.<br/><br/>남재영 목사는 2024년 6월 1일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꽃잎을 뿌리고 기도문을 낭독하는 “동성애자 축복식”을 진행했고, 6월 10일에는 출교된 목사 옹호 성명서에 참여했으며, 또다시 7월 6일 제1회 대전퀴어문화축제에서 부스를 설치하고 “동성애자 축복식”을 행함으로써 친동성애 행보를 보였다. 이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장정 재판법 3조 8항(마약법 위반, 도박 및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에 해당한다.<br/><br/>이에 2024년 7월 16일 남부연회 동성애대책위원회는 남부연회 재판위원회에 남 목사를 고발했다. 남부연회 재판위원회가 12월 5일 남 목사에게 교리와장정에 따라 “출교”를 선고하자, 그는 법원에 “징계무효소송 및 효력정지 가처분”을 제기했었다. 법원은 2025년 1월 “효력 정지 가처분”을 인용해 남 목사가 담임목사직에 복귀할 수 있게 했고, 그는 최근 은퇴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세상 법정이 소위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라 결정된 사항에 대해 “효력 정지 가처분”도 시행하고, 급기야 “판결 무효”까지 결정해 버린 것이다. <br/>기독교대한감리회의 “퀴어축제 축복식” 관련 “출교” 결정은 남재영 목사 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지난 2023년에도 친동성애 행보를 보인 이동환 목사라는 이가 출교된 바 있다. <br/><br/>이동환 목사는 지난 2019년 8월 31일 “퀴어축제 축복식”을 인도한 혐의로 2020년 6월 (남재영 목사와 동일하게)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장정 재판법 3조 8항”에 의거해 기소되었으며, 이로써 2020년 10월에 2년 “정직”을 선고받았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정직 기간 중에도 퀴어축제에 수차례 참가하고 성소수자 단체인 “큐앤에이”(Q&A)를 설립하는 등 지속적으로 친동성애 행보를 보였으며, 그러던 중에 2023년 3월 교단 목회자들과 장로들로부터 추가로 고발당하여 결국 “출교”되었던 것이다.<br/><br/>“퀴어축제 축복식” 관련 “출교” 결정은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라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세상 법정이 기독교계의 재판법에 따른 판결을 “무효”로 결정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왜냐하면 그러한 결정에 따라 이제는 “모든 교회들”에서 “동성애”에 동조하는 개인이나 모임을 징계, 파면, 출교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동성애” 관련 활동을 하는 개인이나 모임을 제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교회법”이 무기력하게 되어, 그나마 “동성애”로부터 보호되던 최소한의 신앙 영역마저 잠식당할 위기에 처했다. 목사나 주일학교 교사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에 반하여 “동성애”에 찬성하며 교육하더라도 그를 파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br/><br/>동성애 관련 문제는 파면 목사 복귀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 준정부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이사장 홍원화)이란 곳이 학술지 평가 영역에 “젠더 혁신 정책”에서 추진하는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라고 요구함으로써 기독교계를 비롯한 학문 연구 기관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학술 및 연구개발 활동과 관련 인력의 양성 및 활용을 보다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수행함으로써, 국가의 학술 및 과학기술 진흥과 연구 역량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으로서, 총예산 9조 9,479억 원을 사용하는 기관이다. 그러한 연구재단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젠더 혁신(Gendered Innovations)은 기초·응용 연구개발의 모든 단계에서 성·젠더 특성 분석을 반영하여 연구개발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식 창출과 기술 및 디자인 등 과학기술 전반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라고 규정하고, 「연구 결과가 특정 성이나 젠더 그룹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조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보 전달 과정에서 차별이나 편견을 조장하지 않도록 주의했는지 확인한다.」라는 세부 지침이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젠더 혁신”을 권장하고, 정상적인 성 개념에 기초한 연구는 배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연구 학술지에 대한 “연구 관리 체크리스트”에서 해당 항목에 0점을 받으면 총점과 관계없이 탈락할 수 있고, 평가 위원 1명이라도 학술지 운영에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서 항목에 0점을 주는 경우에도 평가 탈락 조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평가를 받은 학술지는 학술지 실태점검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어 학술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진평연(진정한 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 연합)과 동반연(동성애·동성혼 반대 국민 연합) 등 5백여 시민단체들은 6월 1일 “학술지 평가를 통한 젠더이념 강제 시도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고, 한국교회언론회(대표 임다윗 목사)도 6월 2일 한국연구재단의 “젠더 가이드라인 반영 지침”에 대해 “학문 영역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들려는가?”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퀴어 문화”를 조장하려는 사탄의 세력이 “정부,” “법조계”는 물론, “학계”에도 손을 뻗쳐 세상을 “동성애자들”의 소굴이었던 “소돔”처럼 만들려고 하고 있다. 학계가 “친동성애” 연구 논문을 쏟아내고, 그 논문들을 토대로 “친동성애 교육 과정”이 수립될 날도 멀지 않은 것이다.<br/><br/>동성애와 관련하여 기독교계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 장로교는 이미 2011년에 “성소수자 목사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으며, 2015년에는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교단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직자 일부일처제 의무화” 개정안이 반대에 부딪혔다. <br/><br/>미국 장로교 뉴멕시코주 시에라블랑카 노회는 6월 말 열릴 예정인 총회에 “성직자 일부일처제 의무화” 개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총회에 제출된 “조언 및 권고” 문서에 따르면, 이 안은 장로교 교단 산하 “여성 및 성평등 옹호위원회,” “성소수자 평등 옹호위원회,” “사회증언정책자문위원회” 등 세 위원회로부터 반대 의견을 받았다. 이들 기관들은 “교회의 소명을 넘어 사생활과 관계 구조를 규제하려는 시도이다,” “복합적이거나 소외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수치심과 침묵, 정신적 강압을 강화할 수 있다.” 등의 반대 이유를 밝히며 “조언 및 권고” 문서를 제출한 것이다.<br/>미국 장로교 산하 기관의 명칭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 기독교계는 이미 “친동성애” 세력에 의해 잠식당해 “동성애자 목사”나 “동성결혼”이 허용되어 있을 정도이고, 이번 개정안 반대 사태처럼 교단이나 교회 내에서 “반동성애” 행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br/><br/>성경은 구약에서 『어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그들은 가증한 짓을 행한 것이니 그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며 그들의 피가 그들 위에 있으리라.』(레 20:13)라고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도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욕정에 내버려 두셨으니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까지도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본성을 거역하는 것으로 바꾸었음이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여자들을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벗어나 서로 음욕이 불일 듯하니 남자들이 남자들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자기 자신들에게 받았느니라... 그들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 마땅히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이 같은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좋게 여기느니라.』(롬 1:26,27,32)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동성애”가 “죽음에 처해져야 할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신다. <br/><br/>정부와 학계가 이미 “법”과 “규정”으로 강력한 친동성애 정책을 시행하고 있고, 법조계마저 “교회법”을 무시하고 “반동성애” 규정을 무효로 결정함으로써, 최소한의 안전지대였던 기독교계와 교회들마저 “법”으로는 동성애자들의 활동을 저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여, “성경적 진리” 안에 굳게 서고, “친동성애 세력”을 포함한 “비성경적 세력”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엡 6:18).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55: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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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다니엘서에 예언된 “철과 진흙의 왕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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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구약의 다니엘서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예언의 시간표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남으로써 시작된 “이방인들의 때”가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들의 때”를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기간으로 규정하셨으며(눅 21:24), 그 기간 동안에 등장할 바빌론, 메데-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적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어지는 이방 제국들의 역사가 특히 다니엘 2장의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형상”을 통해 계시되었다. 즉 형상의 “금 머리”(바빌론), “은 가슴과 양팔”(메데-페르시아), “놋 배와 넓적다리”(그리스), “철로 된 두 다리”(로마), “철과 진흙이 섞인 발과 발가락”(적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방인들의 때”에 등장할 이방 제국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형상의 맨 하단에 위치한 “발과 발가락”은 “철과 진흙”이라는 그 특이한 “이질적이고 위태로운 결합”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떤 모습으로 형성될 것인가를 예측하게 한다. 오늘날 초고도로 발달되어 가는 휴머노이드의 기술력을 통해 “이방인들의 때”의 끝부분에 이르면 이방 세계의 인공적 문명이 최절정에 이를 것이고, 그 기이한 세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종말을 고하고 비로소 그 길고 긴 “이방인들의 때”가 마감된다. 이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영원하고 완전한 메시아 왕국이 수립되는 것이다.<br/><br/>다니엘 2장에서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거대한 형상은 머리에서 발로 갈수록 금속의 가치와 밀도(비중)가 하락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 왕국들의 통치 권력과 도덕적 가치, 그리고 정치적 안정성이 끊임없이 하락할 것을 상징한다.<br/><br/>1. “금”의 왕국 : 바빌론(B.C. 606 ~ B.C. 536)<br/>바빌론은 약 70년 동안 세계 권력으로 군림했다. 제국의 왕권 계보는 느부캇넷살, 에윌므로닥, 네리그릿살, 라보로소알코드, 나보니두스, 그리고 마지막 왕 벨사살로 이어진다. 느부캇넷살은 왕의 명령 하나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완전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바빌론의 위세는 고대 유적인 “공중 정원”(Hanging Garden)의 규모로도 증명된다. 이 거대한 정원은 두께 27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높이가 무려 92m, 한 변의 길이가 24km에 달하는 성벽 기초가 발견되었다. 잔해로 남은 18-21m 높이의 기둥 250개는 기둥 사이 간격만 24m에 이르며, 이 정원에 오르기 위해서는 폭 3m, 높이 23m의 계단을 지나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막강한 권세와 영광을 “유다를 70년간 징계하기 위한 일시적 도구”로 주셨기에, 그 포로 기간이 끝나자 바빌론은 즉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br/><br/>2. “은”의 왕국<br/>: 메데-페르시아(B.C. 536 ~ B.C. 330)<br/>바빌론에 이어 나타난 메데-페르시아는 군대 장군들이 권력을 쥐고 세운 군사 독재 체제이자 세습 귀족 기반의 제국이었다. 형상의 두 팔이 상징하듯이 메디아와 페르시아 두 민족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왕의 독재 권력은 바빌론에 비해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br/>성경 속 페르시아의 계보는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갇혔을 때의 다리오왕과 제1차 포로 귀환 및 성전 재건 칙령을 내린 코레스왕으로 시작된다. 이후 아하수에로와 아탁세르세스 시대의 집요한 방해 공작으로 성전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으나, 다리오 왕 때 선지자 학개와 스카랴의 권고 속에서 성전이 완공되었다. 이후 에스더서의 배경이 되는 아하수에로왕을 거쳐, 아탁세르세스왕 때 에스라(2차 귀환, 율법 전수)와 느헤미야(3차 귀환, 성벽 재건)의 역사로 이어진다. 이 제국의 유일한 가치는 “유대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내시는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점이다.<br/><br/>3. “놋”의 왕국 : 그리스(B.C. 330 ~ B.C. 100)<br/>다니엘 8장에서 숫염소의 양 눈 사이에 있는 “큰 뿔”로 예언된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이다. 그리스는 군사적 군주 국가였으며, 알렉산더는 절대적 독재자라기보다는 군부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움직인 군대 장군 출신의 군주였다. 그는 고대 왕국의 군주로서 뛰어난 지혜와 금력을 지녔으나 절대적 독재권으로 세계를 영구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B.C.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오 3세를 격파하고 영토를 정복했으나, 33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그가 죽은 후 제국은 성경의 예언대로 카산드로스, 리시마쿠스, 셀레우쿠스, 프톨레미라는 네 장군의 왕국(단 8:8)으로 분열되었다. 이 제국이 남긴 가장 결정적인 역사적 의의는 전 세계에 “코이네 헬라어”를 보급하여, 장차 기록될 신약성경의 언어적 기반을 완벽하게 마련했다는 점이다.<br/><br/>4. “철”의 왕국 : 로마(B.C. 100 ~ A.D. 200 전성기)<br/>넷째 왕국인 로마는 모든 것을 부수고 산산조각 내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 “철”로 묘사되었다. 역사에서도 로마를 “철권통치 국가”(Iron Rule)라 부른다. 그러나 가치와 지배 권력 면에서는 공화정 군주 국가 체제를 취하여 역사의 퇴행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로마에는 왕권을 견제하는 원로원이 존재했기에 카이사(시저)조차 절대 독재권을 휘두르지 못했고, 원로원과 반목하다가 암살당하는 한계를 보였다. 신약 시대의 로마 황제 계보는 아우구스토(예수님 탄생 시 조세 등록), 티베리우스(십자가 처형 당시), 가이우스, 클라우디스(유대인 추방), 네로(그리스도인 박해)를 거쳐 A.D. 70년 예루살렘을 파괴한 로마 장군 티투스와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A.D. 91-96)의 도미티안 황제로 이어진다. 신상의 “두 다리”가 보여 주듯 로마는 나중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졌다. 로마의 대제국 인프라와 도로망은 “전 세계로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물리적 도구”로 쓰였다.<br/><br/>5. “철과 진흙”의 왕국 : 적그리스도 왕국과 열 왕의 연합(대환란 기간)<br/>형상과 관련된 예언의 마지막 단계는 철과 진흙으로 구성된 “발과 발가락”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니엘의 해석을 들어보도록 하자. 그의 해석에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의 세 가지 특성이 담겨 있다.<br/>1) 『그 일부는 토기장이의 진흙이며 일부는 철인 발과 발가락을 왕께서 보셨으니 그 왕국이 나뉘어질 것이며, 왕께서 철과 차진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으니 그 왕국에는 철의 강함이 있을 것이니이다』(단 2:41). 철과 진흙은 “혼합”은 될 수 있어도 “화합”하여 하나가 될 수 없는 물질들이다.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나누어진”(분열된) 채로 형성된 연합체로, 철의 강함을 지녔지만 매우 불안정한 상태를 띨 것이다.<br/>2) 『또한 그 발가락의 일부는 철이요 일부는 진흙이므로 그 왕국이 부분적으로 튼튼하고 부분적으로 부서질 것이니이다』(단 2:42). “열 발가락” 체제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숫자인 “열”(10)과 연결된다. 성경에서 “10”은 “이방인”의 숫자이다. 이방인의 조상 노아는 아담의 10대 후손이었고, 이방인 계보는 창세기 10장에 나오며, 이방인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기사는 누가복음 10장에, 이방인 복음 전파의 필요성은 로마서 10장에, 이방인에게 천국 문이 열린 것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온다. 형상의 “열 발가락”은 다니엘 7장의 “열 뿔”이자 요한계시록 13장과 17장에 등장하는 “열 왕”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대환란 때 “바다”(계 13:1, 지중해)에서 올라오는 한 “짐승”(적그리스도)과 결탁하여 “한 시간” 동안 권세를 누릴 마귀적인 연합 세력이다(계 17:12). 이 열 개의 연합 세력은, 일부는 철이요 일부는 진흙이므로, 부분적으로는 튼튼하지만 부분적으로 부서지는 경향이 있다. <br/><br/>3) 『왕께서 철과 차진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으니 그들은 사람들의 씨와 섞일 것이나 그들이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이 철이 진흙과 섞이지 못함과 같으리이다』(단 2:43). 지금까지는 “철과 진흙”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왕국의 “특징들”을 이야기했다면, 43절에서는 “그들”(철)과 “사람들의 씨”(차진 진흙)를 언급함으로써 특징 이상의 “존재들”이 그 왕국에서 “섞여” 살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그들”은 “사람들의 씨”와는 구별되는 “어떤 자들”인 것인데, 여기서 “그들”은 “사람들의 씨”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씨”는 “사람들의 씨”와 얼마든지 “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사람들의 씨”와 섞이면서도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의 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은 일차적으로 “외계에서 온 자들”을 뜻하는데, “외계에서 온 자들”은 “사람들의 씨”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과 완전하게 합할 수는 없지만, 과거 창세기 6장에서처럼 어떤 거인족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4). “하나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들)이라 불리는 “외계에서 온 자들”과 “사람들의 씨”의 결합을 엉겨 붙어서 하나가 되는 “합함”(cleaving)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섞이기는 하되 “사람 남자”와 “사람 여자”가 결합하듯 “한 몸”(창 2:24)을 이루는 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br/><br/>여기서 한 가지 더, 다니엘서의 예언은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철)와 사람(진흙)의 기묘한 동거”라는 “물질적 실체”로 확장된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마지막 왕국은 “타락한 천사들”의 지배뿐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초지능 기술 권력”[Superintelligent Techno-Power, 인간의 지능을 아득히 초월한 “초지능 시스템” 자체가 인류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 살리고 죽이며, 주고 빼앗는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군림하는 신종 패권 체제]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고, 이 “기술 권력”은 “짐승의 형상 숭배”와 “짐승의 표”를 통해 매매 행위를 완전히 통제할 것이다(계 13:14-18). 예언에 있어서 “철”은 “유전자”도 없고, “생명력”과 “영과 혼”도 없지만 압도적으로 단단하고 강력한 “휴머노이드”와 “AI 기술 문명”을 완벽하게 대변한다. 태생적으로 “휴머노이드”는 공장에서 제조되고 알고리즘으로 설계된 존재인 것인데, 그 마지막 왕국에서 “사람”(진흙)은 생존과 편리, 혹은 “영생”을 위해 이 “휴머노이드(철) 기술”과 사회적·신체적으로 “결합”하게 될 것이다(생체 공학, 트랜스휴머니즘 등). 이로써 “기계”가 인간의 지위를 대체하여 군림하고, 또 인간의 몸속에 “기계적 요소”가 침투하여 물리적으로 “섞이는” 현상이 일어나지만 서로 “합하지는” 못할 것이다(단 2:43). 결과적으로 적그리스도 왕국은 “초자연적인 외계 존재”(타락한 천사들)의 전면적인 개입과, 영과 혼을 지닌 인간을 모방하려는 “휴머노이드”(기술 권력)의 등장이 중첩되는 기괴한 종말적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인공적이고 이질적인 “철”의 존재들과 한 시대에 동거하며 지배받겠지만, 그 결합은 모래성처럼 위태로우며, 결국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돌”(단 2:3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심판 앞에 산산이 부서지고, 하늘의 하나님에 의해 “결코 멸망하지 않는 한 왕국”이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단 2:44).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9:4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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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적그리스도의 “AI 친화” 전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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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2022년 11월 “오픈AI”(OpenAI)사는 대대적인 홍보 없이 조용히 대화형 생성 AI 서비스인 “챗GPT”를 출시했다. 홍보가 없었던 것은 이 서비스가 사회 전반에 미칠 파급력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챗GPT를 통해 생성형 AI의 혁신적인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전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AI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문화는 물론, 종교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AI를 빼놓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AI와 관련된 다양한 이슈에 주목하게 되었고, 언론 또한 AI 기업 간의 경쟁, AI 인프라 구축, AI 규제 정책, AI에 따른 산업 구조의 변화와 노동 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 AI 관련 소식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언론이 형성하고 있는 AI 관련 담론은 AI 친화적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인간중심인공지능연구소”(Stanford HAI)가 발간한 “2026년도 AI 인덱스 리포트”(The AI Index Report)에 따르면, 전문가 집단은 AI가 향후 노동 환경에 미칠 영향에 대해 73%가 긍정적으로 보았고, 경제적 파급 효과에 대해서는 69%가, 의료 및 보건 혁신에 대해서는 무려 84%가 긍정적일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전문가 집단의 낙관적 전망은 미디어 보도와 정책 담론을 통해 확산되고 있으며, 대중의 AI 인식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례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BIG Kinds)를 통해 최근 수년간의 국내 주요 언론 보도를 분석해 보면, AI 관련 뉴스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기사보다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기사가 더 우세한 경향을 보인다.<br/><br/>그러나 AI에 관한 낙관적 담론의 확산이 대중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은 AI가 제공할 편익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인간 존재의 의미, 일자리 대체,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불안을 동시에 경험하는 양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연구소의 여론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과반인 52%가 AI 기술의 급격한 확산에 대해 심리적 불안감과 신경과민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AI가 가져올 혁신적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따른 사회적, 실존적 변화에 대한 우려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인간은 잘 모르는 새로운 기술을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초 산업 혁명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기계화로 인한 일자리 상실을 우려하며 기계를 부수었던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현재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기술 불안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산업 혁명기의 기계들이 우리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 것처럼, 전문가 집단이 생산하는 압도적인 순기능 담론과 AI 기술이 제공하는 편의성, 그리고 “뒤처지면 도태된다”는 사회적 압박은 대중으로 하여금 AI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점차 우리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올 것이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보고서에서는 대중의 59%는 AI 제품과 서비스가 가져다줄 혜택이 부작용보다 클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이는 불안한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AI에 대한 기술 낙관주의적 경향과 높은 수용성을 보여 준다. 특히 “AI가 의사보다 암 진단을 더 잘한다,” “번거로운 작업을 대신해 준다,” “나만의 맞춤 비서를 둘 수 있다” 등과 같이 AI와 관련된 긍정적이고 유용성을 강조하는 메시지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경우 사람들은 AI를 더 친숙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친숙성은 AI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하고 호감도와 친숙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고 부른다. 이 효과는 특별한 상호작용이나 경험이 없더라도 어떤 대상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그 대상에 대한 친밀감과 긍정적 평가가 증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br/><br/>문제는, 이제 곧 교회가 휴거되고 대환란이 시작되면 지금 형성되고 있는 사람들의 높은 AI 수용력과 급속도로 발전하는 AI 기술을 통해, 성경의 예언대로 이제 곧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인류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AI 기술의 발전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AI 분야는 일반적으로 데이터를 분류하고 예측하는 “분석형 AI,” 이미지나 음성을 인식하는 “인식형 AI,” 새로운 결과물을 생성하는 “생성형 AI,” 그리고 물리적 환경에서 행동하는 “피지컬 AI”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AI 패러다임은 데이터센터에 갇힌 AI를 넘어 “피지컬 AI”로 전환되고 있다. 이는 AI 알고리즘을 탑재할 물리적 하드웨어 제조사로 투자 자금이 몰리고 있는 현상과 AI 알고리즘 자체가 “말만 하는 AI(LLM, 언어)”에서 “몸을 움직이는 AI(VLA, 행동)”로 변화하고 있는 현상, 산업 현장에서 “피지컬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한 현상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br/><br/>그런데 “피지컬 AI”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모방자로서의 마귀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몸이 구속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으니』(엡 1:4,5). 칼빈주의자들은 이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인간의 선택과 유기를 무조건적으로 결정하셨다는 저주받을 비성경적인 교리를 창안해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사람의 구원에 관해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미리 아심”과 “그리스도 안”이라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즉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지, 믿지 않을지를 미리 아셨고, 그 미리 아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사람들을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곧 그분의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빌 3:21, 요일 3:2, 고전 15:49). 따라서 휴거 이후에는 외견상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와 같은 성경적 진리를 모방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오게 되었다. <br/><br/>2026년 6월 12일 미국 나스닥 주식에 상장한 스페이스X의 사업 중 하나는 “스타링크,” 바로 “저궤도 위성 통신망 사업”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25년 12월 4일에 이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이로써 전 세계 오지를 비롯해 기지국이 없는 어느 곳에서도 인터넷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다. 문제는 “피지컬 AI”를 탑재하고 적그리스도와 같은 외모를 한 여러 “휴머노이드”가 스타링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하이브 마인드 동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하이브 마인드”는 여러 AI나 로봇이 동일한 데이터와 명령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마치 하나의 두뇌를 가진 것처럼 협력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형상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처럼, 적그리스도와 그 적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짐승의 형상들이 이 지상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칼에 상처를 입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짐승, 곧 적그리스도를 위하여 형상을 만들어 그 형상에게 경배하는 일이 벌어질 것인데, 이때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의 형상”이다(계 13:14,15).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통치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분신과 같은 형상들과 우상들”이 만들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말씀이 대환란 기간의 문맥(호 13:7,8)인 호세야 13:2에 있다. 『이제 그들이 더욱더 죄를 짓고 자기들을 위하여 그들의 은으로 형상들[images]을 부어 만들고 자기들의 고안대로 우상들[idols]을 만들었으니, 그 모두가 장인들[craftsmen]이 만든 것이라.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은 송아지들에게 입맞출지니라.” 하는도다.』 장인들이(craftsmen)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희생제를 드리는 자들은 송아지들에게입맞출지니라.”』라고 말한다. 이는 그들이 부어 만든 “형상들”과 자기들이 고안한 “우상들”에 경배하라는 의미인데, 특히 입맞추는 대상으로 송아지가 나오는 것은 황소(송아지)로 예표되는 마귀, 곧 그의 화신인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대환란의 모습을 예표하는 것이다.<br/><br/>위와 같은 적그리스도는 “표범”으로 묘사되는데(계 13:2), 표범의 검은 점은 “두 개의 검은 큰 입술,” 곧 “입맞춤”과 흡사하다. 곧 짐승의 표가 적그리스도에게 경배(입맞춤)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표식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3장에서 느부캇넷살이 금 신상을 만들고, 모든 백성과 민족들과 언어들에게 엎드려 경배하라고 명한 것처럼, 적그리스도 역시 자신의 형상에 대한 경배를 강요할 것이다. 더 나아가 “손 기술”(craft)을 써서(단 8:25) “피지컬 AI”를 통한 자신의 “형상들”과 “우상들”을 전 세계에 편재하게 함으로 모든 개인의 삶과 경제 활동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통제하려 들 것이다. 이미 AI와 친화적이 된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은 큰 거부감 없이 다가올 것이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창녀로 등장하는 로마카톨릭은 이미 성당마다 수많은 형상들(images)을 세워 두고 경배하도록 하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형상에게 경배하라는 요구를 한층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사람의 얼굴이나 음성을 인식하는 “인식형 AI”는 적그리스도의 통제와 감시를 한층 더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 사법 및 공안 당국이 반정부 시위나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AI를 통해 미리 색출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중국 톈진시의 경찰이 특정인의 행동과 성향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고발 가능성이나 소요를 일으킬 위험을 평가하는 시위 예측 프로그램을 구매해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대환란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666, 곧 그의 표를 이마나 오른손에 받지 않은 자들을 식별하고 감시하는 도구로 전용될 것이다.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은 사거나 팔 수 없기 때문에 굶주림에 놓이거나, 이러한 감시 체계 아래서 발각되어 목베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계 20:4).<br/><br/>“오픈AI”는 AI 안전을 발전보다 우선시해 온 비영리 법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올해 주식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목표대로 된다면 주주들의 수익 압력을 받는 구조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해 AI의 안정성보다는 수익을 위한 그 어떠한 선택도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이다. “오픈AI”의 영리 법인 전환과 같은 상업화 흐름은 AI 기술이 인류를 억압하는 통제 수단으로 변질될 위험을 가중하고 있다. 이는 마귀가 적그리스도의 통치 기반을 닦는 전략적 행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영원한 불못의 형벌로 귀착된다(계 20:10). 따라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AI가 제공하는 일시적 편리함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우리 각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모시키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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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5 Jun 2026 16:48:4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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