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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신앙 생활과 지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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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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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모래”에게도 “마음”이 있다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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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모래”의 존재 목적은 “파도”를 막는 데 있다.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주가 말하노라. 모래를 바다의 경계로 두어 영속하는 법령으로 삼아 그것을 넘지 못하게 하였으며 거기에 파도가 출렁거려도 이기지 못하며 파도가 노호해도 그것을 넘지 못하게 하는 내 면전에서 너희가 떨지 아니하느냐?』(렘 5:22) 모래는 파도가 있을 때 그 존재 가치가 드러난다. 그런데 당신은 모래의 다른 쓸모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가? 모래는 단순히 해변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소위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핵심 재료이다. <br/><br/>모래는 “산업 및 건축 분야”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실용적으로 활용된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대부분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물의 뼈대를 세울 때 필수적인 “콘크리트”와 “모르타르,” 모래의 주성분인 이산화규소(SiO2)를 녹여서 만드는 “유리”(창문, 거울, 병), 모래와 점토를 섞어 제조하는 “벽돌”과 “타일,” 도로 포장에 쓰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에 이르기까지 모래는 매우 다양하게 사용된다. <br/>모래는 “첨단 기술 분야”에서 디지털 세상의 근간으로 여겨진다. 모래에서 추출한 고순도 실리콘을 가공하여 만든 반도체 “웨이퍼”(Wafer)는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두뇌가 시작되는 곳이다. 빛을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태양전지의 핵심 소재인 “태양광 패널,” 초고속 인터넷 데이터를 전송하는 얇은 유리 가닥인 “광섬유”도 모두 모래로 만들어진다.<br/>모래의 쓸모는 “예술 및 여가 분야”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모래의 부드럽고 유연한 성질이 창의적 활동에 이용된다. 라이트 박스(light box) 위에서 모래로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전달하는 “샌드 아트”(Sand Art), 해변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성이나 정교한 조각품인 “모래 조각”(Sand Sculpture),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모래시계,” 식물을 키우는 테라리움과 물고기가 서식하는 수족관에서 그 환경을 꾸며 주는 “장식용 바닥재,” 이 모든 것에 모래가 이용된다. <br/><br/>모래는 실생활에서도 그 활용도가 높다. 금속의 녹을 제거하거나 표면을 매끄럽게 깎는 “샌드블라스팅”(Sandblasting)에서 연마제로 사용되고, 정수 필터에서 오염된 물을 걸러내는 “천연 여과 장치” 역할도 한다. 눈이 오면 도로에 뿌려 마찰력을 높여 주는 “제설제”로도 사용된다. <br/>“사람들”도 “모래들”처럼 꽤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 “모래”라는 “하찮음” 속에 섬광 같은 “가능성”이 어려 있으니, 사람은 어딘가에 반드시 쓸모가 있는 법이다. <br/><br/>“모래의 쓸모”는 사람들의 삶에 꽤 깊은 “의미”를 던져 준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모래알 하나는 바람 한 점에도 쉽게 날아가지만, 수억 개의 모래알이 모이면 거대한 해변을 만들고 파도를 막아 내는 방파제가 되는 “작지만 거대한 연대의 힘,” 더 이상 부서질 것이 없기에 자신이 담기는 용기에 따라 모양을 맞추고, 발로 밟으면 밟는 대로 자신을 낮춰 주는 “겸손한 유연함과 강인함,” 쥐려고 할수록 빠져나가는 “욕심과 집착의 무용함,” 멀리서 보면 다 같은 모래 같지만 돋보기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 투명도를 가진 “평범함 속의 특별함” 등 “모래의 쓸모”는 교훈적으로도 다양하다. 혹자는 이런 모래알 하나에서 “세계”를 본다고 했다. <br/><br/>성경에서 “모래”는 주로 그 엄청난 양과 셀 수 없음에 빗대어 하나님의 약속과 지혜, 혹은 인생의 고난 등을 비유할 때 등장한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의 번성(창 22:17), 하나님의 생각이 많으심(시 139:17,18), 대적의 압도적인 수(수 11:4, 삼상 13:5, 계 20:8), 번성할 때의 백성의 많음(왕상 4:20),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넓은 마음”(왕상 4:29), 욥이 당하던 고난의 무게(욥 6:3), 어리석은 자의 진노(잠 27:3),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의 불안정한 기초(마 7:26,27), 장수(욥 29:18) 등을 이야기할 때 “모래”를 예로 든다.<br/>성경에서 “모래”는 “사람”에 빗대질 때가 많은데, 만일 “모래”에게도 사람과 같은 “마음”이 있다면 어떠할까?<br/><br/>서로 무척 가까이 있음에도 붙어 있지 못하고 미미한 틈새들로 인해 늘 떨어져 있어야 하는 모래들. 만일 모래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가까이 있어도 외롭고 그립기만 한 마음일 것이다. 자신을 불태워 녹여야만 맑은 유리가 되어 서로에게 마음이 투명해지는 모래들은, 어쩌면 그렇게 되기까지 “나에게 마음을 주는 ‘모래’를 만나고 싶다.”라고 푸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래의 이 짧은 독백에는 진실한 유대감과 따뜻한 온기를 향한 갈망이 깊게 서려 있다. 모래처럼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알아봐 주고, 자신의 가장 귀한 마음 한 조각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이다. 이럴 때 어울리는 말씀이 있다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하고, 마음과 마음이 맞닿아 날로 성숙해지는 만남을 갖게 한다. 당신은 이미 그 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고전 1:9)를 바탕으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처럼 서로의 마음을 깊게 나눌 친구가 생긴다면, 당신의 신앙생활에 큰 진전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런 “마음 한 조각 같은 친구”를 위해 주님께 기도해 보지 않겠는가?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50:2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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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네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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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나님의 양, 우리 밖에 헤매면서도<br/>왜 거기 더 머물려 하는가<br/>주님 부르시는데 들리지 않나<br/>네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라<br/><br/>살같이 세월은 가건만 <br/>왜 그리 생각 없이 서서<br/>어리석게 인생을 허송하는가<br/>네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라<br/><br/>네 혼이 잘되길 바라는 이들<br/>간절히 청하는데 들리지 않는가<br/>오늘이 다 가기 전<br/>네 하나님 만나게 불려 갈지 모른다<br/><br/>주님의 초청 거절하다 <br/>그 부르시는 소리 그치면<br/>네 참담함 보리니 <br/>준비도 못한 채 하나님 만나야 하리<br/><br/>이 경고 가벼이 여기는 자여<br/>네 귀를 기울이라<br/>인생은 금세 끝나나니<br/>준비도 못한 채 심판 날을 맞지 말라<br/><br/>해가 저물어도 울타리 밖을 서성이는 한 마리의 “양”이 있다. 그의 발걸음은 자유로워 보여도, 실상은 목자 없는 위태로운 방황에 지나지 않는다. “현 세상”의 화려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이리들과 함께 거하는 “데마”는 디모데후서 4:10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양은 울타리 너머로 그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필경 현 세상의 소음에 너무도 거칠게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리라. 시력도 나쁘면서 한눈마저 팔려 버린 양의 귀먹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주의하라. 세월은 살같이 빠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당연히 내일도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안일함 속에서 인생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성도가 세상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서성대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비극적인 일도 없다. 혼의 안녕을 바라는 형제자매들의 간곡한 청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어쩌면 오늘이 다 가기 전에 “휴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자의 초청을 끝내 거절하다가 그 부르심의 소리가 그치고, 당신의 준비되지 못한 혼이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석』(고후 5:10)에서 그리스도와 마주한다면, 그 참담함을 어찌 감당하려는가. <br/><br/><br/>“양”이여, 날이 어둡다. 방황하던 발길을 이제 그만 돌리라. 지금 당장 목자의 따스한 품으로 돌아가라. 그것만이 당신의 혼이 잘되는 길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4: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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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로버트 앤더슨의 &lt;하나님의 침묵&g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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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로버트 앤더슨 경의 &lt;하나님의 침묵&gt;은 제목부터 묵직한 무게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안겨 준다. 저자는 런던 경찰청 부국장을 지낸 유능한 법조인이자 경찰이었으며, 동시에 17권의 영적 서적을 집필한 탁월한 성경 신학자이자 진리의 수호자였다(말씀보존학회에서 펴낸 &lt;잊혀진 진리&gt;역시 동일 저자의 책이다). 그는 런던의 범죄율을 감소시켰고, 당대의 유명한 코난 도일의 추리 소설인 &lt;셜록 홈즈&gt;의 실제 모델이 되었을 만큼 뛰어난 경찰로 활동했으며, 그러한 분주함 속에서도 설교자로서 주님을 신실하게 섬겼다고 한다. 나는 예리하고 냉철한 이성을 가졌던 로버트 앤더슨 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무엇일지 큰 기대감을 안고 &lt;하나님의 침묵&gt;을 펼쳤다.<br/><br/>저자 로버트 앤더슨 경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기록된 성경” 외에 “직접적인 음성”이나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기적”과 같은 물리적 개입으로 말씀하지 않는 상태를 “침묵”이라고 보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고 잠자코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와 달리 초자연적인 발화(發話)나 기적을 보편적으로 나타내지 않으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본질적인 의문을 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왜 침묵하시는가? 과거에도 그러하셨는가?”와 같은 질문들로, 불손한 의심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고 또 정확한 답변을 찾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짜 불순한 동기로 그와 같은 질문이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lt;하나님의 침묵&gt;을 읽으면서, 이번 계기에 답변할 준비를 잘 갖추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br/><br/>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즉 모든 시대에 침묵해 오셨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과거 히브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음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전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히 1:1). 구약 시대에는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기적들이 표적으로서 동반되었다. <br/><br/>그러나 현대 사회는 어떠한가?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재난, 악행이 난무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냉담해 보일 정도로 개입하지 않으신다. 저자는 이를 “갑판 아래에 노예들의 신음이 가득한 노예선”에 비유하며, 인류 역사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죄악의 수위는 높아지는데 하나님의 기적적인 심판이나 구원은 중단된 듯한 현실을 예리하게 짚어 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사태에 분개하다 보면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시겠느냐? 지극히 높으신 분께 지식이 있겠느냐?』(시 73:11)와 같은 말을 내뱉을 수 있다(p.12). 왜냐하면 이럴 때에 “하나님” 같은 전능자가 등장하여 약자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을 쳐부수고 세상을 질서 있게 평정하여 공정하고 의로운 세상이 펼쳐지도록 개입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훌륭한 경찰관으로서 저자가 불의를 보고 느꼈을 분노는 더욱 깊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래서인지 그는 뛰어난 문체로 이에 대해 필설하고 있다. 말하자면 “비극”이 특히 “자신”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될수록 힘없는 사람들은 “슈퍼맨” 같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간절히 소망할 것이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제의 현장에 전면적으로 등장하여 사회악을 적극적으로 제거하시는 하나님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또한 성도들이 박해당하고 순교할 때에도 하늘에서는 어떠한 미동조차 없었던 것이다.<br/><br/>여기서 중요한 점은 “증거(표적)로서의 기적”에 대한 고찰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당시 주님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시기 위해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위대한 능력으로 실로 다양한 기적들을 행하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그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해 기적들을 행하셨으며, 아무도 “저것은 기적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기적들을 보이셨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 눈앞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기인(奇人)을 만난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그 민족의 메시아 왕으로서 받아들였는가?<br/><br/>이 대목에서 앤더슨 경은 “눈에 띄는 많은 기적들을 행했다고 해서 이러한 기적들 때문에 과연 그분이 믿을 만한 분이며, 그분의 모든 메시지가 옳은 것인가?”라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저자는 기적 자체가 믿음의 절대적 근거가 될 수 없음을 경고한 것인데, 만약 “기적”만이 기준이 된다면 거짓 선지자나 하늘에서 온 천사가 기적을 베풀며 “다른 복음”(갈 1:8)을 전할 때 분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br/><br/>앤더슨 경은 기독교계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이 두 가지 명제, 즉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토대를 쌓으셨고,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들의 권위를 보고서 온 세상이 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틀렸다고 말한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펄쩍 뛸는지 모르지만, 앤더슨 경은 두 명제가 모두 잘못됐고, 그러한 착각으로 인해 지금까지 기독교의 입장이 더 심각한 오해와 편견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앞의 두 명제가 지지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불신자들이 기적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나서 그 기적을 행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회심하게 된다.” 과연 이 말이 옳은 것일까?<br/><br/>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목도하고도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주님을 신성모독자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은 기적을 보고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한다.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시는 주님께서는 누군가가 그분의 기적을 보고 믿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그분의 제자로 받아 주시지 않았던 것이다(요 2:23-25). 결국 기적은 믿음의 단초가 될 수는 있으나, 인간의 완악함을 꺾거나 하나님께 온전히 인정받는 믿음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십자가 사건이 이를 증명하는데, 말하자면 주님의 기적을 보았던 당대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했던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사탄의 편에 섰던 그 비극적인 십자가 사건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장구히 침묵하고 계시는” 독특한 경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br/><br/>유대인들이 그들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사탄은 자신이 승리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넘겨지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그분을 왕으로, 메시아로 믿기를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이로 인해 약속된 왕국(천국)의 도래는 연기되었지만, 이 일은 동시에 인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놀라운 은혜의 통로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의 시대”를 활짝 여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 12:13). 이 교회 시대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으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시대이다(엡 2:18).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의와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이자 “위대한 신비”(엡 3:4-6)이다.<br/><br/>앤더슨 경은 사도행전의 과도기적인 변화들을 추적하며 복음의 성격이 “유대인을 위한 왕국 복음”에서 “모든 인류를 위한 은혜의 복음”으로 확장되었음을 강조한다. 과거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서 주어졌던 기적들은 그들의 지속적인 거부로 인해 목적을 다하여 서서히 멈추었고,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하나님의 침묵”은 무력함의 증거가 아니다. 저자는 이를 “대안식의 침묵”이자 “심오한 평강의 침묵”이라고 부른다. 이는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심판을 유예하고 계시는 “자비로운 기다림의 시간”인 것이다.<br/><br/>유대인들의 거부로 인해 천국은 잠시 연기되었지만, 이 점을 역으로 생각하면, 지금 이 시대에는 누구나, 즉 우리 “이방인들”까지도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방인”인 “나”에게 적용되는, “만민에게 부요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라는 진리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니 이는 만민에게 동일한 주께서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심이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2,13).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 비록 과거에는 주님께서 “개”라고 비유하셨던(마 15:26,27) 이방인이었으나, 이제는 은혜의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즉 고린도후서 5:17 말씀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 자신이 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최대의 수혜자들인 것이다. <br/><br/>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계신다면 왜 악인을 즉시 심판하시지 않느냐며, 한번 “침묵을 깨 보시라”고 무모한 도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 앤더슨 경은 그 침묵이 깨지는 순간이 곧 “대사면의 종료”이자 그 죄인들을 향한 “진노의 날”의 시작임을 경고한다. 지금의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멸하시는 대신,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도록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계신 것이다.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요일 2:1)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쉬고 계신(히 1:3) 지금, 가장 연약하고 악한 자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있다.<br/><br/><br/>「이 교회의 경륜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인간에게 씌우지 않으신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깨뜨리고 심판의 번갯불을 일으키셔야 할 것이다. 심판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십자가로 이미 해결되었거나,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날까지 연기돼 있거나 둘 중 하나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들을 형벌에 처할 심판의 날까지 가두실 것을 아시느니라.』(벧후 2:9)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심판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p.131).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속히 다시 오실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찬란한 은혜가 될 것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그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 그 날에 주께서 오시면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받으시리라.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 가운데서 믿어졌기 때문이라.)』(살후 1:7-10). <br/><br/>경찰 출신 저자답게, 앤더슨 경은 탐정처럼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난제를 추적하고 성경적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 추리를 해 나가며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lt;하나님의 침묵&gt;을 펴낸 배경이 된 여러 학자들의 주장들도 폭넓게 언급하며 각각의 진위 여부를 면밀히 검토하고 비판하거나 반박한다. 그리고 본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교회 시대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경륜적 이유를 깨닫게 해 줌으로써 부조리한 세상을 견딜 힘과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복된 소망을 심어 준다. “하나님의 침묵” 뒤에 숨겨진 깊은 지혜와 부요한 은혜를 알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lt;하나님의 침묵&gt;은 논리적이고도 영적인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16: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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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그대 뒤따르려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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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주님 만나니 <br/>기쁨과 평안 넘쳐흐르며<br/>의심 떠나고 슬픔 그치네<br/>나 은혜로 구원받았도다<br/><br/>짙은 어둠 지날 때 주께서 비춰 주시고<br/>찬송의 땅에 있는<br/>아름답고 영원한 처소로 <br/>날 인도하시는도다 <br/><br/>죽음의 거센 물살 앞에 이르면 <br/>물결 검고 차갑겠으나 <br/>주님 나를 집으로 <br/>평화로운 거처로 부르시리라<br/><br/>날 위해 생명 주셨으니<br/>그 귀한 이름에 모든 영광 돌리며<br/>주의 은혜와 선하심<br/>나 영원토록 널리 알리리라<br/><br/>그대 뒤따르려는가<br/>그대 뒤따르려는가<br/>주님 이끄시는 곳으로 <br/>그대 뒤따르려는가<br/><br/>주님께서는 의심과 슬픔의 어둠 속에서 죄의 짐을 지고 방황하던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 인생의 막막함에 기력을 잃고 좌절할 때, 저 영원에 이르는 선명한 빛의 길을 보여 주신 것이다. 비로소 구주를 만난 혼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으로 채워졌으니, 그것은 상황이 좋아질 때만 기지개를 켜는 일시적이고 게으른 감정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사랑을 깨달은 날로부터 용솟음치는 샘물이다. 우리는 그렇게 찬송의 땅에 있는 영원한 처소로 가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이 거센 탁류처럼 차갑고 두렵게 앞을 가로막겠지만, 그 검은 강을 건너야만 주님께서 마련하신 평화로운 거처로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그 모든 두려움을 살라 버린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주님께서 친히 사공이 되어 주시는데, 저 천성의 복된 나루터까지 평안하게 태워 주실 텐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그날까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신 그 귀한 이름에 모든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은혜와 선하심을 전파해야 하리라.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눅 9:59)라고 명하시면 그 준엄한 부르심에 확답해야 하리라. 즉 세상의 모든 유혹을 뒤로하고 오직 주님만을 응시한 채, 저 하늘 본향을 향한 순종의 발걸음을 흔들림 없이 내디딜 것이라고, 주저 없이 결단해야 한다. “그대 뒤따르려는가?”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3 Feb 2026 18:10:2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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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인생의 교훈들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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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일으키는 영향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꼭 자서전으로 기록되지 않아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 곧 그가 했던 말과 행동, 그리고 그가 했던 사역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 자신도 지금껏 무수한 영향들을 받으며 살아왔고, 반대로 우리 역시 타인에게 그러하다. 하지만 정작 내 삶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리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필자는 럭크만의 인생을 돌아보며, 그와 같이 선한 영향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로서 해야 하는 일들은 가능한 한 선한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의 표현으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것,” 혹은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일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열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럭크만은 바로 그러한 순종과 열정의 사람이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두 가지 교훈을 남겨 두고 있는데, 총 일곱 가지의 교훈이 먼저 우리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우리 또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순종과 열정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br/><br/>&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여섯 번째 교훈은, “구령의 열매는 눈물의 기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1980년에 럭크만은 독일을 방문했고, 히틀러가 태어난 곳에 가서 전도지를 나눠 주다가 뉘른베르크의 나치당 전당대회장에 있는 연설가의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히틀러가 섰던 그곳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텅 빈 광장을 바라보았다. 히틀러는 사실 럭크만과 비슷한 면모들이 많았다. 그 역시나 “연설가”였고, “화가”였으며, “보병”이었고, 무엇보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럭크만의 마음을 깊이 뒤흔들었다. 럭크만은 히틀러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사탄이 그를 붙잡았다고 하면서, “내가 방금까지 있었던 브래노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복음 전도지를 줬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럭크만이 방금 전 그 자리에서 집으로 가던 학생들에게 전도지를 주었듯이 말이다. <br/><br/>럭크만은 비엔나의 장미정원을 거닐었는데, 당시 거의 울 것 같았다고 했다. 수많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지옥으로 달려가는 독일인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곳에 복음을 전해 줄 사람이 없었다. 럭크만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30분간 무릎을 꿇고 독일을 위해 울부짖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교회와 학교를 동료에게 넘겨 주고 지금이라도 가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때 나이가 59세였다. 하나님께서는 “안 돼.”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애타게 울부짖었다. “누군가를 보내 주세요! 누군가를 보내 주세요! 누구라도 보내 주세요! 그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 지상에서도 지옥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저 세상에서도 지옥으로 가게 될 겁니다! 뭐라도 해 주세요! 누군가를 보내 주세요!”(p.323) 럭크만은 자기가 직접 갈 수는 없었지만, 그 흘린 눈물에 대한 응답을 분명히 받았다. 간절히 바랐던 “누군가,” 곧 “게토, 길 리, 트로스클레어, 포트, 신드램, 애트웬거, 볼라드, 쉐라우즈, 볼릭” 등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교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성경이 보급되고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가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눈물의 힘”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설교하는 가운데 “누군가”를 키워 내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br/><br/>언젠가 필자는 럭크만이 그랬듯 “거의 울 것 같은” 상태에 놓였던 적이 있다. 부천 지역에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 시간이 되기까지 30분 남짓 시간이 남아 차에 있는 성경과 전도지를 들고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날이 추웠는데, 날씨보다도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냉소”였다. 차에서 내려 가장 먼저 만난 이는 박스를 줍는 할머니였다. 마침 박스를 싣고 가다가 몇 개를 바닥에 떨어뜨려 줍고 계시기에 줍는 것을 도와드렸더니 웃으며 고마워하셨다. 그런데 복음 전도지를 건네며 복음을 전하려고 하자,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내 안에도 하나님 있고, 자네 안에도 하나님 있어! 각자 하나님을 잘 믿으면 돼!” 필자는 차분하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손사래를 치며 같은 말을 반복하기에,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옮겨야 했다. 다음에는 고물상 일을 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전도지를 건네자, 그는 이미 교회를 다니고 있다며 받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라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으라고 드리는 것이라고 하니, 앞선 할머니가 그랬듯이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면서 벌컥 화를 내기 시작했다. “교회 다닌다고 말했잖아! 자네 무슨 이단인가?” 상황이 이래서 자리를 벗어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다음 대상을 찾아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다. 그들의 반응으로 상처를 입거나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완고함으로 인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곳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대로 살다가 지옥에 갈 것이라는 사실에 필자는 거의 울 것 같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이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하나님, 이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모임 장소로 이동하고 있을 때, 필자 쪽으로 3명의 초등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첫 번째 아이에게 전도지를 주고, 두 번째 아이에게도 전도지를 주었는데, 관심을 보여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도착한 세 번째 아이는 필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비웃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예수”라는 단어가 들리면, “예수? 푸하하하하하!!!!” “지옥”이라는 단어가 들리면, “지옥? 크크크크 푸하하하!!!” 그 아이는 있는 힘껏 크게 비웃어댔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아이는 진지하게 필자의 말에 경청했다. 차분하게 복음을 전한 뒤,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구세주로 믿겠다고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데, 너 구원받고 싶니?”라고 물어보니, 구원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한 혼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 <br/><br/>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 일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다.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죄인들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럭크만이 그랬듯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 “그 누군가”가 되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병에 눈물을 담으시는 가운데 적든 많든 구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결국 당신이 흘린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일종의 “양분”이 되어 “누군가”가 구원받는 값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에는, 더 나아가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에는 여전히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분명 지옥에 갈 것이다. 당신은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br/><br/>&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일곱 번째 교훈은, “결국 주님을 위해 사는 삶만이 인생의 종착점에서 봤을 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책 284페이지에는 인상 깊은 사진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사진은 1960년 브렌트침례교회의 첫 성경공부반 교실 사진이고, 두 번째는 럭크만이 42명의 졸업반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은 흑백으로 정지되어 있지만, 그 사진을 보는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무도 없던 텅 빈 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서 계셨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씩을 데려오시는 장면이었다. 먼저는 럭크만을 불러서 그 자리에 세우셨고, 그를 중심으로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세우셨으며, 그렇게 모여서 &lt;킹제임스성경&gt;을 믿고 신뢰하는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워진 것이다. 필자는 몇 분 동안 이 머릿속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한 사람씩 불러내시지 않았다면, 사역은 결코 진전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부르신 한 사람, 곧 “럭크만”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지 않았다면, 그런 값진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br/><br/>알다시피 자서전이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쓰는 “예언사”가 아니라, 이미 시간이 꽤 지난 뒤 과거를 돌아보며 인생의 끝자락에서 쓰는 “과거사”이다. 만일 럭크만이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더라면 그가 쓰는 자서전은 볼 가치가 전혀 없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껏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서전을 썼지만, 그중에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책”을 위해 살아 본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 나름대로 흔적을 남기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미 있는 흔적은 단 하나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럭크만의 자서전 마지막 부분에는 그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고, 그처럼 노인이 된 애드먼드 다난트라는 성도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옛 시절에 조직폭력배였지만 회심한 뒤 30년간 목회를 했다. 럭크만은 미시건으로 차를 몰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그도 함께 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눈이 내려서 여기저기 녹지 않은 눈이 있었고, 두 사람은 회상에 잠긴 채 3km의 밤길을 같이 달렸다. 그러다가 침묵이 차 안을 휘감았고, 1.5km 정도를 더 주행하는 동안 포장도로 위의 녹은 눈을 훑고 지나가는 타이어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형제,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와 난...” 그러다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신호를 주거나 단 한 번의 상의도 하지 않고 동시에, 완전히 똑같이 말하려 하고 있었다. “형제,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와 난 최상의 삶을 살았어”(p.372). 어떤 사람에게 “최상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고급 의류들”을 입어 왔고, “넓은 저택”에서 살아왔으며, 사람들의 “칭송과 명예”를 누리고, “세계 여행”을 다니며, 자녀를 “우수한 대학”에 보낸 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내 있는 힘을 다해 산 것,” 그것만이 삶의 종착점에서 돌아볼 때 최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생인 것이다. 당신은 주님을 위해 살아 본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 또한 언젠가 럭크만이 그랬듯이, 인생의 종착점에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날 돌아봤을 때,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과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과연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br/><br/>글을 마치면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내가 책의 저자와 백퍼센트 동일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럭크만과 우리는 모든 것이 다르다. 태어난 곳과 시대, 살아온 환경 같은 배경은 물론이고, 체격과 지적 능력, 성향처럼 타고난 조건도 다르다. 심지어 사용하는 언어와 재능, 구원받은 시기와 주변 친구들까지도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또한 삶의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 럭크만이 삶에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이 “우리는 최상의 삶을 살았어.”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일은 그가 종착점에 이르기까지 남긴 “일곱 가지 교훈들”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나갈 때 가능하다. 이 교훈을 얻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인생 종착점에 다다랐을 때, “나는 최상의 삶을 살았지.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참으로 “행복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43:2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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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동틀 때려나 한낮이려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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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동틀 때려나 날이 잠에서 깨고 <br/>햇빛이 어둠 다 몰아낼 때 <br/>세상에 머물던 주의 성도들 맞으시려<br/>주님 완전한 영광 중에 오시리 <br/><br/>한낮이려나 노을 물드는 때이려나 <br/>칠흑 같은 한밤에 오신다면 <br/>주의 성도들 맞으실 때<br/>눈부신 주의 영광이 광채 쏟아 내리 <br/><br/>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 죽지 않고 떠난다면<br/>고통 슬픔 두려움 눈물 없는 그곳으로 <br/>주의 성도들 맞으실 때<br/>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주님과 영광으로 들어가리<br/><br/>오 주 예수님 얼마나 더 얼마나 더 기다려야 <br/>이 기쁨의 찬송 소리쳐 부를 수 있으리이까<br/>주님 다시 오시네 할렐루야 아멘 <br/>할렐루야 아멘<br/><br/><br/>『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신부를 데리러 오실 신랑을 향한 뜨거운 갈망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휴거”는 단순한 종말론적 사건이 아니라, 신랑을 향한 사랑으로 세상의 온갖 고초를 견뎌 낸 뒤에, 마침내 그 기다리던 신랑을 맞이하게 될 우주적인 사건이다. 새벽의 고요를 깨는 서광처럼, 한낮의 태양을 무색케 할 환상적인 광채처럼 신랑께서는 “반드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언제일지 모를 그 시간을 두려움이 아닌 설렘으로 채워야 한다. 설렘의 핵심은 “깨어 있음”에 있다. 『우리가 그 때를 아노니 지금은 바로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로다』(롬 13:11). 인생의 소란과 고통 속에서도 신부의 시선은 저 하늘에서 오실 신랑의 찬란한 영광을 향해 있어야 한다. “어쩌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고전 15:53) 신랑을 만나게 될 그 신비로운 순간은, 모든 슬픔의 눈물을 씻어내 주실 영원한 안식의 시작이다. 이 죽을 육신이 초자연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눈 깜짝하는 순간에” 솟구쳐 올라가면(고전 15:52), 세상에서 “잠시 받은 가벼운 환난”은 “영원한 영광”으로 보상받게 될 것이다(고후 4:17). 기다림의 시간을 헛된 공백처럼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자신을 정결하게 빚어 가는 거룩한 연단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결코 낙심하지 말라. “오 주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탄식은 결코 불평이 아닌, 간절한 사랑의 증거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41:1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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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의 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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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시골집에서 자란 이들에게는 “뜰”에 대한 기억이 있다. 집이 작은 경우에는 마루에서 대문까지의 거리가 짧았지만, 여유가 있는 집의 뜰에는 화단과 장독대, 그리고 기다란 장대가 받치고 있는 빨랫줄이 있었다. “뜰”은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이기에, 절대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다. 도둑은 집 안으로 침입하기 전에 뜰을 먼저 밟는다. 누군가의 뜰을 밟는다는 것은, 그 사람 고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 뜰을 밟는 것과 낯선 이가 뜰을 밟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뜰에 낯선 사람이 서 있으면 경계와 의심에 사로잡히는 반면, 가족과 친구, 이웃이 뜰에 있을 때는 마음의 빗장이 풀어진다.<br/><br/>“뜰”은 하나님께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너희가 내 앞에 나타날 때 너희 손에 이것을 가져와 내 뜰들을 밟으라고 누가 요구하였느냐?』(사 1:12) 이 말씀을 읽을 때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뜰을 거룩히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타락하여 주님을 버리고 멀리 간 이스라엘이, 『죄지은 민족이요, 죄악을 짊어진 백성이요, 행악자들의 씨앗이요, 부패한 자손들』(사 1:4)이면서도 숫양들의 번제물들과 살진 짐승들의 기름을 잔뜩 들고 그분의 뜰을 밟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헛된 예물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사 1:13)라고 하시면서 분노하셨다. 백성이 어떤 영적 상태로 『하나님의 뜰들』(시 92:13)을 밟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반응이 달랐던 것이다.<br/><br/>“하나님의 뜰”은 출애굽기에서 그 제작 명령이 처음으로 주어졌다.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그 뜰에 걸 막을 한 면의 길이가 일백 큐빗 되게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어서, 남쪽을 향한 남편에 칠지니라』(출 27:9). 하나님의 뜰은 기둥들에 흰 막을 걸어 만든 직사각형 공간이었으며, 그 안에 성막과 놋제단과 물대야가 있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 사명을 위임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뜰을 강조하셨다.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집과 내 뜰들을 지으리니 이는 내가 그를 내 아들이 되도록 택하였음이요,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임이라』(대상 28:6). 성전의 “뜰”은, 그곳에서 드린 제사를 통해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갔기에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성전 자체인 『내 집』 외에 『내 뜰들』을 따로 언급하셨다면, “하나님의 뜰”은 매우 특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는 『만일 네가 내 길에서 행하고 네가 내 분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심판도 하고, 내 뜰들을 지키기도 하리라.』(슼 3:7)라는 약속이 주어졌으니, “하나님의 뜰”은 하나님의 길에서 그분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 허용되는 공간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에 대환란 때 환란 성전의 뜰이 불결한 이방인들에게 주어진다는(계 11:2) 점은, 성전의 뜰에서 제사를 드려야 할 이스라엘의 죄가 극에 달해 있을 것임을 보여 준다. 대환란 때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계 11:8)라고 불리는데, 그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물은 성전의 뜰이 이방인에게 주어짐으로써 바쳐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br/><br/>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뜰”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을 드리는 “거룩한 장소”였다, 그 특별한 장소에서 바쳐진 무수한 제물들은 한결같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을 가리켰다. 그 피흘리신 십자가를 예표하는 놋제단이 있던 뜰. 그 뒤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계 5:12)을 믿는 우리 마음의 뜰... 이곳은 “믿음으로 어린양께서 거하시는”(엡 3:17) “거룩한 뜰”이어야 한다. 성도의 “마음”은 늘 정결해야만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3 Dec 2025 10:34:1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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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인생의 교훈들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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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우리는 지난 호에서 “럭크만의 인생 역사”를 통해 인생에서 필요한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 “네 가지 교훈”을 더 살펴볼 것인데, 자서전은 수많은 경험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럭크만 목사가 겪은 경험들을 우리 인생에 투영시키는 일은 많은 지혜와 유익을 얻는 지름길이 된다. “럭크만”이 겪었던 일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험을 하게 될 일은 없겠지만, “인생의 속성”은 비슷하므로 우리 인생길에서도 비슷한 “인생의 면모들”을 발견할 수 있다. “럭크만의 경험들”이 우리가 장차 마주할 경험들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본 글을 읽어 나가기 바란다. 그렇게 하면 분명 당신의 남은 인생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br/><br/>&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네 번째 교훈은, “어떤 사람의 인생이든 반드시 낙심할 만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럭크만은 1949년에 회심한 이후로 두 번의 이혼을 했다. 첫 아내는 그가 구원받기 전에 만났는데, 그가 회심한 이후로 끊임없이 그의 “옛 사람”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럭크만이 자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으며, 실제로 손목을 칼로 긋거나 시속 80km로 달리던 차에서 문을 열고 몸을 던지려고 시도하기도 했다(p.249). <br/><br/>1958년에는 텔레비전 사역이 열려서 그림을 그리며 성경 강연회를 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가정불화는 거의 폭력 수준으로 치달았다. 그의 첫 아내는 럭크만을 파멸시키려고 비이성적으로 행동했다. 전화로 럭크만의 부모에게 그가 종교 광신자가 되어서 정신과 의사의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럭크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휴 파일 목사에게 연락을 하여 럭크만이 자신과 아이들을 위협했다고 거짓말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차를 훔쳐서 다섯 아이를 데리고 도망쳐 버렸다(p.254). 럭크만은 이때를 가리켜 “암울한 시기” 또는 “외로운 날들”이라고 말하며 “다섯 아이들이 끊임없이 놀아대던 빈집에 매일 들어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를 것이다.”라고 했다. 그 역시나 낙심했던 날들이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고, 그와 함께 사역했던 친구들은 그에 대한 믿음을 잃었으며, 여러 모임들이 취소되었다(p.256). <br/><br/>결국 럭크만은 16년간의 끔찍한 결혼 생활 끝에 이혼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낙심할 만한 일들”이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 다른 여자를 만나 1972년에 결혼을 했지만, 그녀는 결혼한 지 두 달도 안 되어서 설교자의 아내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했고, 수면제 복용으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악몽에서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악몽을 꾸게 된 것”이었다(p.305). 럭크만은 결혼 생활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꽃들을 사고, 캔디를 사고, 다이아몬드 반지들을 샀다. 외식하러 나가거나, 단둘이 독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노력을 무시하고 교회 신문에 낼 기사를 찢어 버리거나, 그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떨어뜨리고, 유리잔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럭크만은 결국 아내에게 또다시 버림을 받아 다시 혼자가 되었다(p.344). 럭크만은 그렇게 버림받았던 두 번의 기간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 생애에서 절대로 두 번 다시 살고 싶지 않은 2년”이라고 했다. 어쩌면 “인생의 길,” 특히나 “하나님과 함께 걷는 인생길”을 걷는 당신에게도 어떤 낙심할 일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일은 당신과 가장 가까운 누군가에 의해서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 찾아오는 낙심은 인생이 가진 속성 중 하나다. 게다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삶에는 더 많은 어려움과 방해가 뒤따르며(딤후 3:12), 그 일들은 결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럭크만의 “옛 부인들”이 럭크만을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온갖 비난과 모욕을 주는 그때에도 하나님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럭크만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던 것이다(고후 5:14). <br/><br/>하나님께서는 럭크만이 낙심에 빠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셨는데, 특히 그의 친구들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한번은 존 롤링즈라는 친구가 아내 때문에 사역을 포기하려는 그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네를 설교하도록 부르셨나?” 럭크만이 말했다. “맞네.” 롤링즈가 또 물었다. “하나님께서 자네의 아내를 설교하도록 부르셨나?” 럭크만이 말했다. “아닐세.” 롤링즈가 물었다. “그렇다면, 아내가 그만뒀다고 자네가 그만둘 순 없지. 안 그런가?”(p.256) 아내들이 떠나가고, 주변에서 온통 비난이 이어질 때 럭크만에게는 진정한 친구들이 몇 남아 있었다. 럭크만은 그때 가까운 친구들의 기도와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친구들은 기도와 실제적인 도움으로 그가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p.289). <br/><br/>사실 두 번의 “버림받음” 외에도 럭크만 앞에는 낙심할 만한 일들이 무수히 있었다. 1966년에는 어느 주일 오전예배가 끝나자 한 자매가 허공에 성경을 흔들며 “당신은 끝났어! 하나님은 완전히 당신과는 끝을 내셨다구!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가 버리셨고, 당신은 사회 활동을 못할 거야!”라고 했다. 1956년에는 한 시장이 럭크만이 감정을 상하게 했다며 장전된 45구경 총을 꺼내들었다. 1967년에는 밀톤에 사는 마약 복용자 의사가 럭크만의 머리를 잘라서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럭크만을 미워했고, 그는 온갖 비난과 거짓말과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의 인생은 겉으로 보면 “낙심할 거리”투성이였지만, 그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삶을 멈추지 않았다. 텍사스, 샌디에이고, 시애틀, 라스베이거스, 뉴욕 등에서 복음을 전했고, 수백 명의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왔다. 전도지가 중국어, 독일어, 스페인어로도 나왔고, 라디오 방송과 그림을 그리며 하는 텔레비전 강의가 미국 전역으로 퍼져 갔다. 여름에는 격주, 겨울에는 한 달에 한 번 성경 강연회를 열었으며, 주석서를 비롯한 다양한 책들을 썼다. 1988년까지는 요한계시록을 위해 사용할 144편의 아크릴 그림과 유화를 완성하기도 했다(p.312).<br/><br/>“위로의 하나님”께서는 “낙심할 거리들”을 제거하시기보다는, 그것을 이길 “튼튼한 어깨”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럭크만을 더욱 단단한 “금강석”처럼 만드셨고(겔 3:9), 낙심의 가시밭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훌륭한 군사로 만드셨다(딤후 2:3). 럭크만은 자신에게 닥쳤던 낙심되는 일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계속 사역을 했다”(p.249). “나는 계속했다”(p.312). 말하자면 우리 앞에 놓인 “낙심할 만한” 일들은 결코 거기서 주저앉으라고 허락하신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그 낙심의 길을 걸어가게 하실 수 있으며,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는 가운데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와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당신에게도 낙심할 만한 일이 생겼는가? 낙심 앞에서 럭크만을 일으켜 세우셨던 “럭크만의 하나님,” 곧 “위로의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계속” 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무수한 열매들을 내실 것이며, “낙심할 만한 일이 있었지만, 나는 계속했다.”라는 간증을 남기게 해 주실 것이다.<br/><br/>&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다섯 번째 교훈은, “성경 박사 피터 럭크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럭크만 목사는 성경과 교리에 관한 160권이 넘는 책을 썼고, 2천 편 이상의 그림설교와 수백 편이 넘는 월간지 글 등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한 성경 지식들을 남겼다. 럭크만의 책들을 접해 본 사람들은 흔히 그를 “타고난 천재”로 여기며, 그가 천재이기에 성경 지식들을 많이 알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는 천재가 맞다. 그의 IQ(지능지수)는 190인데, 이는 평균 지수인 100을 훨씬 뛰어넘는, 10억 명 중 1명꼴로 나오는 매우 드문 지수이다. 그러나 그가 가진 수많은 성경 지식들은 단순히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피터 럭크만 “박사”는 결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성경 박사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배웠는데, 글렌 슝크를 통해 “전도지 나눠 주는 법”을 배웠고(p.207),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지 못하는 음식”을 성경에서 집어먹는 가운데 성장했다(요 4:32). <br/><br/>럭크만은 또한 성경을 “현장”에서 배웠다. 카톨릭 사제들, 콜럼버스 기사단 평신도들, 왕국회관 책 판매원들, 캠벨파 장로들, 몰몬교 “사도들,” 칼빈의 5대 강령을 주장하는 근본주의 침례교도들과 일대일로 맞붙으며 성경을 배웠다. 그들이 자신을 “깔아뭉갤 때”면 집으로 돌아와 해답을 찾을 때까지 성경을 뒤적였고, 서로 뒷받침해 주는 구절들을 가진 자신만의 “주석성경”을 만듦으로써, 그런 상황에 다시 부딪혔을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했다(p.221). 그는 성경을 공부할수록 더 많이 증거했고, 복음을 증거할수록 더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길거리에서 죄인들을 직접 만나는 가운데 성경 지식을 배웠던 것이다. 또한 그는 하루에 한 권 비율로 독서를 계속했고, 평생에 걸쳐 “25,0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그가 책에서 배운 지식들은 이후 사역을 하는 데 있어 엄청난 “무기”가 되었다. 그는 “성경 그 자체”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으며, “성경을 봐야 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은 시점부터 시작하여 죽기까지 &lt;킹제임스성경&gt;을 160번 이상 정독했다. <br/><br/>(성경 박사 피터 럭크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럭크만의 책을 접해 본 이들은 그를 타고난 천재로 여기며,천재이기에 성경 지식을 많이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천재인 것은 맞지만, 수많은 성경 지식은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얻은것이 아니다. 럭크만은 진정한 성경 박사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배웠다. 특히 카톨릭 사제, 콜럼버스 기사단, 여호와의증인, 캠벨파, 몰몬교도, 칼빈주의자 등과 일대일로 맞붙으면서 배웠다.)<br/><br/>럭크만은 성경을 펼칠 때면 항상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는 어리석고 무능력합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제 머리에는 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주님은 아십니다. 제가 가진 지혜, 재능, 건강, 지식, 이해력은 주님이 주신 것일 뿐이고, 그것들을 주님은 5초 내에 빼앗아 가실 수 있습니다. 주님, 이제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제게 명철을 주십시오. 제게 책망하실 것이 있으시면 서슴지 말고 그렇게 해 주십시오. 기꺼이 받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제게 뭔가를 깨우쳐 주시고, 또 뭔가를 보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제가 취할 것이고, 주님의 은혜로 믿을 것이며, 또 그것을 실행하겠습니다.”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깨닫는 일이 “자신의 두뇌”가 아닌 오직 그의 “선생님”이신 성령님께 달려 있다고 믿은 럭크만에게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성경 지식들을 깨닫게 하셨다(요 16:13). 또한 그는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실행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행하려고 작정한 그에게 성경 지식을 아주 많이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요 7:17). 다시 말해 성경을 배우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했기 때문에 훌륭한 성경 박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br/><br/>당신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가 가진 성경 지식의 “총량”은 우리가 얼마만큼 “그 책”에 시간을 투자했는가에 달려 있다. 성경 그 자체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는지, 믿음의 선진들이 남긴 책들을 얼마나 읽었는지, 또 얼마나 “현장”에 나갔으며,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가 그 총량을 결정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럭크만”뿐만 아니라 “당신”도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당신은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 위해 얼마만큼, 또 무엇을 해 보았는가? 사람마다 가질 수 있는 지식의 총량은 분명 다르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 안에서 “노력”해 나갈 때 그 사람은 “이전의 나”보다도 더 많은 성경 지식을 얻게 될 것이고, 그 지식들로 “인생”이 변화될 것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3 Dec 2025 10:33:3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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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공중에서 주님 만나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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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늘 저택에 나 들이시고자 <br/>복된 주님 언제 오실지 모르나 <br/>사랑하는 자들 그 처소로 데려가시려고 <br/>속히 오시겠다 하셨네<br/><br/>때로 길고 깊은 물속 헤쳐 가게 하시고 <br/>주님 당한 슬픔 맛보게 하시나<br/>공중에서 주님 만날 때까지 <br/>내 곁에 늘 계신다 약속하셨네<br/><br/>영광 가운데 구주와 영원히 살리니<br/>밝고 환한 그 아침 몹시도 기다리네<br/>나그네 시절 다하면 <br/>공중에서 주님 뵙겠네 <br/><br/>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 만나리<br/>끌려 올라가 주께 받은 사랑 들려주리라<br/>저 본향으로 데려가려 곧 오시리니 <br/>나 공중에서 주님 만나리 <br/><br/>본 찬송시의 원제는 「Caught up」으로, 소로우 해리스가 1917년에 작시했다. 소로우는 이 찬송의 제목을 “신약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를 예언하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찾았다.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부활]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caught up, 휴거],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4-17).<br/><br/>“아빠가 얼른 일 끝나고 갈게.”라는 약속만 믿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잠든 아이처럼,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계 22:20)라는 약속만 믿고 주님을 기다리다 잠든 성도들이 있다. 아빠는 산더미 같은 업무로 야근을 해야 했기에 오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벧후 3:9) 교회 시대의 밤이 많이 지났음에도(롬 13:12) 아직 오시지 않았다. 하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잠든 성도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어 부활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살아 있는 성도들은 죽지 않을 몸을 입고서(고전 15:52,53) 그들과 함께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게 된다. 주님께서는 약속대로 “반드시” 오신다. “오시면,” 이 고된 나그네 시절이 끝나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3 Dec 2025 10:31:1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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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인생의 교훈들 (1)</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9/%EC%9D%84-%EC%9D%BD%EA%B3%A0-%EC%96%BB%EC%9D%80-%EC%9D%B8%EC%83%9D%EC%9D%98-%EA%B5%90%ED%9B%88%EB%93%A4-1/</link>
<description><![CDATA[책에는 “장르”(genre)가 있으며, 장르별로 그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다르다.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은 “교훈”이다. “자서전”은 한 사람의 “인생 역사”가 담긴 책이고, 그 안에 기록된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이 독자에게 주는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다. “자서전”은 분명 “남의 인생”이지만, 우리는 자서전을 읽으면서 “자신의 인생”에 필요한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깨달은 교훈들을 “현실”에 적용시켜 나갈 때 자서전이 가진 가치가 발현된다. <br/><br/>피터 럭크만 목사가 남긴 인생의 기록들은 결코 자기 자신의 업적을 돌아보면서 만족하기 위해서나(삼하 24:2), 자랑하고 이름을 내기 위해서,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다. 그의 자서전은 “이 책은 지상의 수십억 죄인 중 한 죄인의 아주 짧은 이야기이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 분명히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한 죄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역사”(his story)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도 마찬가지다. 이 글은 단순히 “피터 럭크만”이라는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한 죄인의 인생에 나타나셔서 그를 통해 놀라운 열매들을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럭크만 목사의 인생이 기록된 이 책을 통해 인생에 관한 중요한 교훈들을 얻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 럭크만 목사처럼, 당신이 가지고 있는 “넘치는 잔”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br/><br/>&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인생의 첫 번째 교훈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누군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출생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럭크만 목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죽음의 기록들이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C.I. 스코필드가 죽었고(p.20), 그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는 프랑스 남부에서 홍수로 200명이 사망했다. 일본의 한 극장에서는 화재로 104명이 불에 타 죽었으며, 루마니아에 있는 어떤 교회와 오하이오에 있는 연방교도소에서도 불로 499명이 죽었다(p.32). 이후로 이 책을 기록한 시점인 77세의 나이가 되기까지(그는 94세까지 살았다) 이어졌던 수많은 죽음의 행렬들, 곧 광산 폭발, 익사, 전쟁, 열차 충돌, 혹서, 폭격, 전염병, 살인, 홍수, 비행기 사고, 탄약선 폭발, 기차의 선로 이탈, 화산 폭발, 차 사고, 폭동, 자살, 화재들이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6천 명을 죽인” 미얀마 지진, “1,200명을 죽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허리케인, 자국인 “300만 명을 죽인” 스탈린, “2만 명을 죽인” 인도의 간디, “2,200만 명을 죽인” 제2차 세계대전, “200만 명을 죽인” 한국전과 베트남전, 둘이 합쳐서 “5천만 명 이상의 러시아인을 죽인” 스탈린과 레닌, “1,000만 명 이상을 죽인” 마오쩌둥 등의 사건을 통해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책에서 자주 반복되는 표현 중 하나는, “나 피터 럭크만은 거기 없었다.”라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필자도 거기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또한 거기 없었다.” 내가 무엇이기에 그 죽음의 자리에 없었던 것인가? 누군가 그 죽음의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일찌감치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고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그리고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있도록 본 학회지를 보게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이다. 현재 “나”라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앞서 언급했던 죽음을 맞이한 죄인들과 우리는 사실상 별반 차이가 없는데, 이는 우리도 그들처럼 죄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 사람들처럼 죽을 수 있었고, 죽어야만 했다(롬 6:23). 럭크만 목사는 비참하게 죽은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을 언급하며 “나는 그들 9,900만 명보다 더 살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라고 고백한다(p.200). 당신도 그런 존재임을 고백하는가? 우리는 얼마든지 더 일찍, 혹은 끔찍한 사고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죄인들이었다(눅 13:5).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비껴가게 해 주신” 죽음들을 기억하며, 그때 그 자리에 있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나,” 곧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br/><br/>&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두 번째 교훈은,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약 70년이 넘는 “럭크만의 시간표”가 재생되는 가운데 두드러진 두 번째 특징은, 그 기간 동안에 세상은 점점 더 많은 죄들로 가득 차올랐다는 것이다. 럭크만 목사가 불과 네 살이었을 때 미국에서는 일명 “원숭이 재판”이라 불리는 스콥스 재판이 열렸다. 이는 존 토머스 스콥스라는 공립 고등학교 교사가 당시 테네시주 법률이었던 “버틀러법”(공립학교에서 성경의 신성한 창조 이야기를 부정하는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혐의로 기소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법률로는 유죄가 선고되어 벌금을 냈지만, 이후로 진화론 교육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진화론 교육의 정당성이 확립되었고, 지금은 오히려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세상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br/><br/>1926년 1월 27일에는 스코틀랜드인이 텔레비전을 발명했다. 발명가 존 버드는 “언젠가 모든 가정이 영화관이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텔레비전이 가정에 들어오면서 그 말이 현실이 됐다. 그러면서 화면 속 “할리우드”의 도덕 기준도 같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럭크만 목사가 열두 살이던 때까지는 주류금지법이 있어서 술을 만들거나, 팔거나, 운송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그 법이 1933년에 폐지되었다. 뉴스 미디어는 온갖 캠페인을 벌여 위스키, 맥주, 와인, 브랜디, 진, 럼 등의 “술”을 미국 가정에 다시 들여놨다고 한다(p.26). 그러니 “술이 들어옴으로써” 망가지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겠는가? “피터 럭크만” 또한 점점 더 악해지는 세상, 곧 “진화론,” “술,” “영화,” “만화,” “바뀌는 법들,” “세상의 풍조” 등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영화 채널과 심야 쇼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영화들을 보았는데, 27세가 되어 구원받기 전까지의 자신을 가리켜 “살아 있는 마귀”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미” 악한 현 세상 그리고 “점점 더” 악해지는 현 세상의 “피해자”요 “공범자”로서 살아갔던 것이다. <br/><br/>럭크만 목사는 “텔레비전을 통해 모든 것이 거실 속으로 침투한다.”라고 했는데(p.39), 그가 죽기 얼마 전인 2010년대 초반에는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시작되었고, 이로써 현재는 누구나 “들고 다니는 텔레비전”을 소유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에게 “침투 당한” 1900년대 미국인들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스마트폰에 침투를 “당했다.” 스마트폰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적인 사상과 죄의 생각들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br/><br/>또한 럭크만 목사가 태어난 이후 변개된 성경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RSV(1952), NASB(1971), LB(1971), NIV(1978), NKJV(1982) 등이 400년간 우뚝 서 왔던 “킹제임스성경”의 권위를 뒤엎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가 주님께로 간 뒤 불과 10년이 지난 지금, “악해짐”의 “가속도”는 훨씬 더 빨리 붙고 있다. 이처럼 세상이 악해지는 것을 막을 순 없지만, “자기 자신”이 악해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요일 5:21). 세상이 더욱 악해지는 것은 재림의 징조 중 하나이다. 우리는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예수님의 재림이 코앞에 이르렀음을 실감하는 가운데, 더욱 간절히 복음과 진리를 전함으로 한 사람의 죄인이라도 더 그리스도께 이겨와야 한다. 진화하는 악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더욱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br/><br/>&lt;썩지 않을 면류관&gt;을 읽고 얻은 세 번째 교훈은, “성경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피터 럭크만”은 원래 “성경”과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것보다는 “흡연, 욕설, 음주, 거짓말, 더러운 농담, 자신감”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군복무 시절에는 “신성 모독”을 담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식탁에 와인 병 몇 개가 서 있고, 유리잔들이 널브러져 있고, 요한과 예수님은 와인 잔을 사시 눈으로 쳐다보며 앉아 있고, 유다는 의식을 잃은 상태로 식탁 위에 쓰러져 있고, 다른 제자들은 서로 “건배! 축배! 위하여!”를 외치고 있는 그림이었다. “럭크만”은 이 그림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병사들과 중대 장교들에게 보여 주었다(p.125). 또 한번은 “럭크만”의 장모가 성경을 보냈을 때, 네다섯 명의 병영 친구들이 그 “성경”을 쳐다보자 “아, 얼간이들, 이런 걸론 총알을 멈추게 할 수 없어.”라고 말하고는 성경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는 여자 친구가 “피터, 너 하나님을 믿니?”라고 하자 이렇게 답변하기도 했다. “내 하나님은 너야.” 그는 “섹스”가 하나님일 만큼 도덕적으로 파괴된 인물이었다(p.89). <br/><br/>솔직히 말해서 “럭크만”이 “저질러 온 일들”과 그가 배워 온 지식들(주술, 흑마술, 백마술, 골상학, 초능력, 초월주의 등), 성경에 대한 태도, 자라 온 환경과 친구들로 봐서, “과연 이 사람이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면 받아들일 사람인가?”라고 생각해 봤을 때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고 한다. “인간적으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피터 럭크만”만큼은 믿을 것 같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마음이 “왕처럼” 높아져 있는 사람들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다(단 4:37, 잠 21:1). 하나님께서는 “성경”으로 “럭크만”의 마음을 돌리셨다. 그는 자신을 변화시킨 성경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죄인인 한 남자의 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으며, 그를 180도 변화시키고, 마약, 병원 치료, 돈, 교육, 친구들, 가족, 상담, 과학의 도움 없이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를 가게 할 수 있었다. 여기 책 한 권이 있고, 그 책은 그에게서 흡연, 욕, 음주, 거짓말, 더러운 농담, 자신감 등을 다 없애 버릴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이 토페카 골목길의 옛 피터 S. 럭크만을, 뉴올리언즈 프렌치 쿼터의 옛 럭크만을, 보병 훈련소의 옛 럭크만 소위를, 댄스 밴드의 술주정뱅이 피터 S. 럭크만을 강연 중에 칠판에 그림을 그리며 어린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고, 그리스도인 오케스트라에서 튜바를 연주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캐나다와 하와이에서 복음을 설교하게 될 종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이 어떠하냐!』(민 23:23)」(p.192,193). <br/><br/>“그 럭크만”을 바꾼 “성경”은, 후에 “성경에 있는 말씀”을 전할 때도 강력히 역사하여 “절대로 구원받지 못했을 것 같은 사람들,” 곧 “38구경 총을 장전해서 전 부인을 죽이러 가던 남자,” “권총으로 럭크만을 쏴 버리겠다던 남자,” “예배 중에 ‘이 얼간이! 너는 미쳤어!’라고 소리지르던 남자” 등 무수한 죄인들을 구원받게 했다. 「나! 뒷골목, 술집, 나이트클럽, 댄스 밴드, 훈련장, 라디오 방송국의 피터 S.가 아니었던가!」(p.339) 혹시 “성경” 말고, 당신을 이 자리까지 데려온 무언가가 있는가? “성경”이 내가 죄인임을 알려 줬고, “성경”이 나를 구원했으며, “성경”이 지금도 나를 움직이고 있다. “나!” 곧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성경”을 만난,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성경”을 만나고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 성경은 사람을 바꾼다! 성경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이다!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5 Nov 2025 01:12:2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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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새로이 살겠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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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부활의 아침, <br/>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 모두 일어나는 날<br/>주 찬양하라! 나 새 몸 입고 새로이 살겠네 <br/>약한 것으로 심겨 능력 있는 것으로 일으켜지리니 <br/>하늘나라에서 살 준비되겠네<br/><br/>완전하게 되며 <br/>생기 넘치고 기쁨에 젖을 날 <br/>주 찬양하라! 나 새 몸 입고 새로이 살겠네 <br/>주님과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리니 <br/>사망이 승리 속에 삼켜지겠네<br/><br/>할렐루야 외칠 그 아침, <br/>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 날 때<br/>주 찬양하라! 나 새 몸 입고 새로이 살겠네 <br/>성도들 환호하며 무덤 박차고 나오리니 <br/>하늘의 아름다움이 두르겠네<br/><br/>사랑 가득하고 영원한 집에서 <br/>구속받은 자들과 하나 되리<br/>슬픔 고통 다툼 더는 없고<br/>구세주의 몸같이 변화받으리니 <br/>영광스러운 땅에서 살 준비되겠네<br/>주 찬양하라! 나 새 몸 입고 새로이 살겠네<br/><br/><br/>성경에는 다양한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 즉 낡은 천조각을 찢어지게 하는 “새 천조각”(아담의 옛 본성과 섞일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 눅 5:36),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리는 “새 포도주”(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몸에 담을 수 없는 성령 하나님, 눅 5:37),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요 13:34), 예수님께서 장사되셨던 “새 무덤”(요 19:41), 주님의 피로 된 “새 언약”(New Testament, 마 26:28), 주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의 행함 속에 배어 있어야 할 “생명의 새로움”(롬 6:4), 성도가 섬길 때 추구해야 할 “영의 새로움”(롬 7:6),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성별해서 추구해야 할 “새로운 마음”(롬 12:2),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어야 할 “새 사람”(엡 4:24), 누룩, 곧 “죄”가 함유되지 않은 “새 반죽”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주의 만찬에서, 고전 5:7), 144,000명의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부를 “새 노래”(계 14:3), 주님을 찬송하기 위해 영원히, 영원히 새롭게 만들어 가면서 불러야 할 “새 노래”(시 149:1), 흰 돌에 기록될 “새로운 이름”(계 2:17), 재림 때 이스라엘 민족과 체결될 “새 언약”(New Covenant, 렘 31:31), 셋째 하늘로 갈 수 있는 “새롭고 살아 있는 길”(히 10:20), 영원 세계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계 21:1,2),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그 영원에서 영원히 입고 살게 될 “새 몸”(롬 8:23, 고전 15:51-54, 빌 3:21, 요일 3:2), 그 몸으로 “새로이 살겠네!” 당신은 그 새로운 삶이 기대되는가?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5 Nov 2025 01:00: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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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F.B. 마이어의 &lt;고난의 선물&gt;</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9/fb-%EB%A7%88%EC%9D%B4%EC%96%B4%EC%9D%98/</link>
<description><![CDATA[겉으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실이나 깊은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 것을 “역설”(paradox)이라고 한다. 이는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지만, 그 모순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드러내어, 청자나 독자에게 그 뜻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 책의 제목인 “고난의 선물” 역시 역설적 표현이다. “고난”과 “선물”이라는 각각 상반된 정서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를 묶어 표현하고 있다. “고난”이 외면하고 싶은 시련과 고통이라면, “선물”은 받고 싶은 희망과 기쁨이지 않는가! 선물은 감사와 존경, 애정과 우정의 마음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선물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물질적 가치를 떠나 나에 대한 감사와 애정의 표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만약 그 선물이 “고난”이라면 어떨까? 고난은 우선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누구라도 고통, 시련, 좌절, 실패의 시간들이 닥쳐온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난을 선물로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일까? “고난”이라고 불리는 그 선물을 “호의적”으로 받고 “애정의 표시”로 받으며 “기쁨”으로 받는 사람이 있을까? <br/><br/>F.B. 마이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그러한 고난 가운데 삶을 살아가며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이어 목사는 왜 고난이 선물이 되는지 성경을 펼쳐 말씀을 보여 주며, 일상생활과 사회적 상황에 맞춘 예시를 통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간결하게 풀어낸다. 고난이라 불리는 여러 상황에 따른 신앙적 해결 방법을 알려 주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방법을 제시한다. <br/><br/>지금 당신은 시련이나 고통 가운데 있는가? 흙으로 빚어진 우리의 성정은 종종 시련과 시험이 지속될 때면 여러 가지 생각들로 번민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잊어버리셨는가? 주님께서 분노하셔서 그분의 자애를 거둬 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자비는 영영 나를 지나가 버리셨는가?” 하고 말이다(책 18쪽). 마이어는 우리가 고난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는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없다며, “우리 모두는 고난으로 옷 입어야 한다.”(13쪽)라고 말한다. 이는 성도의 삶 자체가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에는 십자가의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시련과 고통은 앞서간 성도들이 동일하게 밟고 지나간 길이다. 마이어는 성도들이 달려갈 길을 마치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고난 중에 상기할 수 있다면, 우리도 결국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므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혹 자신의 잘못이나 죄의 결과로 고난이 주어졌다고 그것을 형벌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형벌과 정죄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주어졌으며,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영원히 제거”(19쪽)하셨기 때문이다. <br/><br/>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하지 않으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러한 고백과 별개로 고린도전서 10:13을 어떻게 생활 속에 적용하고 있는지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사람에게 흔히 닥치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시험을 당하면 피할 길도 마련하셔서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 또한 변할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주신다는 것과 피할 길도 마련해 주신다는 것도 진리이다. 이를 전심으로 믿는다면 어떤 고난이나 시험에도 낙담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마이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늘 그렇게 우리를 그분의 뜻 가운데서 다루고 계신 것이다. 고통을 앓는 기간조차도 세심하게 분배해 놓으셨다. 시험이 아무리 극심하고 그 정도가 과하다 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주님은 극심한 아픔을 견딜 은혜와 능력을 부어놓으셨고, 그것은 우리가 아픔으로 부르짖을 때 우리 안에서 나타나, 허락하신 고통의 양과 정확히 비례하여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먹에 바람을 붙잡으시며 물을 그의 손에 쥐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산 소유를 잃어버릴 수 있는 모험 따위는 시도하지 않으신다」(22쪽).<br/><br/>그렇다면 인생의 폭풍 가운데서도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없을까? 마이어는 사도 바울에게서 배우라고 권면한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위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기도로써 하나님을 붙든 사람이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자신을 사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을 잊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또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 배 위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행 27장). 마이어는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정말 그렇다면, 폭풍이 닥쳐온다 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곳으로 인도하신 책임이 있으므로, 당신은 바울이 그러했듯이 폭풍 가운데서도 평안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다.”(64쪽)라고 말한다. 마이어는 우리가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로 “선한 양심”을 꼽는다. 성경은 바울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선한 양심으로 살아왔노라.”라고 말한 것(행 23:1)과,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쓰나이다.』(행 24:16)라는 바울의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양심에 어긋날 경우 그 상대가 누구든지 질책했다(갈 2:11-14). 우리가 바울의 본을 따른다면 “폭풍을 뚫는 믿음의 기도”(69쪽)로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br/><br/>삶 속에 감추어진 죄들을 빠르게 자백하고 회개하는 일은 고난을 덜어 내는 일이 될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렇게 감추어진 죄들을 회개한 후에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이기에 자신이 그 죄에 대해 왜 실패하는가를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이어는 가장 빠른 기도 응답은 용서를 구하는 기도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다른 기도들의 응답에 있어서는 우리를 때때로 기다리게 하기도 하시지만, 그분은 용서를 위한 우리의 기도에는 그 응답을 단 일 초도 기다리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결코 “네 길을 가거라. 내일 오라. 그때 내가 용서할 수 있을지 보리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매우 신속하고도 온전하게 용서할 수 있으신 것이다」(138,139쪽). <br/><br/>회개가 없는 성도의 생활에서 어떻게 믿음의 진전을 찾을 수 있겠는가. 여러 상황마다 자기변명으로 일관하여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마이어는 우리가 세우는 계획이나 간구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슬픔과 실수, 감춰진 죄들을 낱낱이 하나님께 아뢰어야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갖는 화평은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데 있다. 화평 가운데 있고자 한다면 매일 매시간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항상 인식하고, 그 인식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이어는 먼저, 말씀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기도의 영 안에 계속 거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소리 내어 아뢰는 습관을 가지라고 말한다. 또한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열심을 내며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놓치게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br/><br/>이 책 &lt;고난의 선물&gt;을 통해 마이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고통과 슬픔으로 이어지는 삶 또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성도가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더욱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늘릴 때, 우리의 욕구는 시들해진다고 말한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드러내셨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었을 때 구원받지 않았던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그분의 목적들을 이루고 계신다. 성도가 이 고난의 시간을 견뎌 냄으로써 더욱더 아름다운 유업을 받을 것이므로, “고난”은 우리에게 진정한 “선물”이 되는 것이다. 「그분은 지금도 고난당하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주를 따를 것이며 우리를 통해 그분의 목적을 실현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야 한다. 고난을 영접하라! 고난의 잔에 우리의 입술을 대자! 그리고 끝까지 견뎌 내자! 왜냐하면 주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15쪽).<br/><br/>혹시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가? 그렇다면 F.B. 마이어의 &lt;고난의 선물&gt;을 읽으라. 당신은 이 책을 통해 분명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피할 길을 발견할 것이고, 그 안에서 위로와 감동을 받으며, 영적 성장을 위한 도전과 헌신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3 Oct 2025 16:06: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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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예수님과 걷고 싶어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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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오 그 시절 세리들처럼 예수님과 걷고 싶어라<br/>주님 곁에 부르시어 복된 소식 전하셨네<br/>괴로워하는 죄의 종들 구하고자 오셔서<br/>내 짐 다 없애시고 완전한 화평과 쉼 주셨네<br/><br/>오 먼 옛날 그 소경처럼 예수님과 걷고 싶어라<br/>여리코 근처 길가에서 구걸하다가 <br/>자비 베푸소서 외치자 주님 곧바로 보게 하셨고 <br/>바디매오 그길로 주님 따랐네<br/><br/>오 갈보리 오르시는 예수님과 걷고 싶어라<br/>슬퍼 눈물 흘리며 고통스런 광경 바라보겠지<br/>사랑한다 하시며 거기서 내 죄 다 없애셨네 <br/>몹시도 기뻐 주님 따르니 어디든 뜻대로 이끄소서 <br/><br/>오 영원한 그 땅에서 예수님과 곧 걷고 싶어라 <br/>이곳 나그네 여정 끝마치면 본향에 거하겠네<br/>오래도록 주님과 걸으며 찬송하고 찬송하리<br/>갈수록 주님 더 사랑하노라 환희에 차 소리치리<br/><br/>주님 이끄시는 곳으로 가리라 <br/>주님 인도하시는 초장에서 먹으리라<br/>끝까지 따르겠네<br/>매일매일 따르겠네<br/><br/>「예수님과 걷고 싶어라」라는 찬송은 시편 23편의 말씀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그가 내 혼을 소생시키시고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들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정녕, 내가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요,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심이라』(시 23:1-4). 초림 당시 예수님과 함께 걸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복을 알고 있었을까? 그들은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살폈으며, 우리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요일 1:1)과 함께 거니는 영광을 느끼고 있었을까? 당신은 그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 바로 당신 안에 계시며, 당신과 동행하심을 인지하고 있는가?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요, 곧 영광의 소망이라』(골 1:27). 당신을 인도하시는 그분께서 지금 당신 안에서, 당신과 함께 걷고 계신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3 Oct 2025 15:58:1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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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얼마 안 가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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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얼마 안 가면 이 짧은 생 끝나리<br/>얼마 안 가면 예수님 다시 오시리<br/>그때 주 안에 잠든 성도들 흙에서 일으켜져<br/>하늘 저 위에서 왕이신 주님 만나겠네 <br/><br/>얼마 안 가면 나그네 길 마치리<br/>얼마 안 가면 성도들 모두 본향에 이르리<br/>그때 환하게 웃으며 황금길 걷겠네 <br/>늙지 않는 그곳에서 구주를 찬양하겠네<br/><br/>얼마 안 가면 짐 벗으리<br/>얼마 안 가면 면류관 받으리 <br/>그때 보좌 두른 천사들과 소리 높여 노래하겠네<br/>거기서 우리 만나 서로를 온전히 알게 되겠네 <br/><br/>얼마 안 가면 이 땅 사라지리<br/>얼마 안 가면 사람이 이룬 것 무너지리<br/>저 위를 바라보며 다시없는 은혜 의지하는 자에게<br/>기쁘게 거할 곳 예수님께서 마련하셨네 <br/><br/>얼마 안 가면 얼마 안 가면 <br/>예수님 다시 오시리 그날 다가오네<br/>구속받은 수만 성도들 만날 준비되었나<br/>그날을 맞이할 준비하세<br/><br/>지난 9월, “드디어” 가을이 오고 있다면서 설레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텁지근한 여름이 언제쯤 끝날까 하며 숨 막혀 하던 날들이 지나고, 밤이면 열린 창문을 통해 솔솔 찬바람이 오고가니 마음이 들떠 두근거렸던 것 같다. 가을은 달 뜬 밤의 창문에 바람의 손가락으로 노크를 한다. 마음이 달떠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는 아니어도, 어찌 됐든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게 하던 여름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으니, 마치 긴긴 시련이 끝나가기라도 하듯 후련했으리라. 이제 “얼마 안 가면” 완연한 가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불볕더위에 허덕이던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리라. 『그러므로 너희의 확신을 버리지 말라. 그리하면 큰 상이 있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그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조금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5-37). “얼마 안 가면,” 즉 『조금 있으면』 인생의 모든 고통을 끝내 주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다. 시련과 낙담의 한숨을 걷어내고, 오직 행복하고 싶은 소망을 이뤄 주실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는가.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4 Sep 2025 11:41: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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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조지 H. 문델의 &lt;믿음의 좁은 길&gt;</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9/%EC%A1%B0%EC%A7%80-h-%EB%AC%B8%EB%8D%B8%EC%9D%98/</link>
<description><![CDATA[&lt;믿음의 좁은 길&gt;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하는 “바른 양육과 성장”을 위한 시리즈 중 하나로, 아브라함의 생애와 믿음의 여정을 단계별로 추적하면서 우리가 배울 점을 제시해 준다. 아브라함은 후에 “믿음의 조상”과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지만, 그가 처음부터 믿음이 견고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했고, 노령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씨를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았다.<br/><br/>조지 H. 문델의 &lt;믿음의 좁은 길&gt;은 그 전반부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영적 성장과 믿음의 단계와 신앙의 방해물을 점검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 갈수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하시는 것들은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각 개인에 따라,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를 것인데, 그때 우리가 가진 방해물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빠르게 내려놓으면 놓을수록 믿음의 여정은 순탄해진다. 즉 “순종”은 우리의 믿음의 여정을 순탄케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내려놓고, 우리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을 의지하라고 촉구한다. <br/>&lt;믿음의 좁은 길&gt;은 150쪽 정도의 분량으로 그리 두껍지 않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책에서 개인적으로 새기고 싶었던 대목은 “제12장 믿음의 확신,” “제15장 믿음의 기도,” “제16장 믿음의 부족,” “제17장 믿음의 개가”였다. <br/><br/>저자는 “제12장 믿음의 확신”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그의 성공이나 실패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절대적으로 보장된 약속임을 보여 주며, 우리 또한 그 약속을 의심 없이 붙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질 “실물 교육”을 준비하셨다. 당시 두 사람이 중요한 맹세를 할 때는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마주 놓고서 그 사이를 함께 걸으며 서로의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킬 것을 서약했다. 그러나 환상 속에서 아브라함이 본 것은 달랐다. 양편에 늘어선 절단된 짐승 사이로, 사람이 아닌 연기 나는 가마와 불타는 등이 위엄 있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출 19:17-19)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시 119:105, 요 9:5)를 상징하며, 결코 깨어질 수 없는 언약이 하나님의 두 인격 사이에서 맺어지고 있음을 나타냈다.<br/><br/>아브라함은 그 순간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혔다. 이 약속은 더 이상 자신의 흔들리는 믿음이나 불완전한 순종에 달려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성품 안에 완전히 놓여 있었다. 이에 아브라함은 카나안 땅 전역, 사방 30만 마일에 이르는 땅이 영원히 자신과 후손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한 치의 의심 없이 안식에 들어갔다.<br/>오늘날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불완전함과 두려움 속에 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은 여전히 우리보다 크고, 우리 안의 믿음보다 더 단단하다. 약속의 성취는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으심에 달려 있다. 나는 이 장면을 그림처럼 떠올리며 하나님의 강한 실물 교육 때에 깊은 잠에 떨어진 아브라함처럼 달콤한 쉼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그분의 자비와 은혜가 가득 담긴 약속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그분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인데, 나는 얼마나 자주 나 자신을 보면서 실망했던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두 인격 안에서 확실한 약속으로 승리를 보장하고 계신다. 바로 이 점이 연약한 나에게 확실한 만족을 주며, 성경이 계시하는 예언과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보면서, 마음이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평안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결과가 이미 보장된 믿음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br/><br/>“제15장 믿음의 기도”에서는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서 한 중보 기도를 예로 들면서,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br/>「당신은 아브라함이 한 것처럼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 도시를 건질 의인 10명이 소돔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롯과 그의 가족 몇 명을 구하셨다. 아브라함의 입술의 기도는 그 도시를 위한 것이었으나 그의 마음의 기도는 그 도시에 있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하지 않은 마음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사도행전 16:31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당신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만일 당신이 기도한다면 당신은 하늘에서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기도 생활은 성별된 일관성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완전한 드려짐이 있어야만 한다」(p.99).<br/><br/>아브라함이 미처 입으로 아뢰지 못했던 기도 제목, 즉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해 달라는 속마음을 하나님께서는 헤아리셨고 이루어 주셨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니 주님을 찬양하며 기쁘게 섬기도록 하자.<br/>한편 롯과 라합의 이야기는 성도의 믿음과 간증이 사랑하는 이들의 구원에 결정적임을 보여 준다. 롯은 가족 일부만을 구했고, 라합은 온 가족을 구했다. 라합은 좋은 간증을 지녔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을 구원하는 데 쓰임받았다. 그녀가 분명히 아주 철저히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간증은 절대적인 승리를 거두어, 여리코 성 전체가 함락되는 때에 온 가족을 안전한 주홍실 줄 밑으로 데리고 들어감으로써 그들을 구출한 것이다. <br/><br/>라합와 롯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롯은 단지 자기의 아내와 두 딸의 마음만을 움직였다. 사실은 이들마저도 천사들의 충동에 의해서였다. 하늘의 중재가 있었음에도 롯의 아내는 멸망당했고, 그녀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 롯과 두 딸만이 도망친 사람의 전부였으니, 이는 롯의 언행불일치 생활의 결과였다. <br/>우리 중 많은 이들이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을 구령하여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도록 돕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많은 가족과 친지들이 구원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저자의 말에 가슴 아프게 공감하였고 부끄러웠다. 즉 그와 같은 롯의 생애로부터 나온 결과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는데, 우리가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아 하늘나라에 함께 있기를 원할 때 지불해야 할 대가는 “주님께 온전히 드려진 생애”라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롯과 같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주일에 교회에서 보내는 한 시간이 신앙의 전부이며,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 그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도 않고, 주님을 위한 참된 증거도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간증을 지닐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 가족을 주실 것이다.<br/><br/>“제17장 믿음의 개가”에서는 병상에서도 주님과의 교제를 지속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는 삶을 소개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 문제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당하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인해 마음 아픈 기도 제목들이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 요동하지 않는, 언제나 일관성이 있는 믿음을 지녀야 함을 강조한다. <br/><br/>「몸이 아파 병상에 누워 고통받을 때, 어떤 이는 걸을 수가 없고, 어떤 이는 중풍에 걸려 있고, 어떤 이는 갖가지 병과 만성병으로 고생할 때,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완쾌되도록 수없이 간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일을 행치 않으셨다. 당신은 그 일로 주님께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에게는 더 풍성한 입지와 지위를 주시려 했다는 것을 아는가? 하늘에 있는 당신의 부는,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의 빛이 매우 빛남으로 인해, 당신의 방에 와서 당신의 침상을 방문한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함으로써 쌓여질 수 있다. 당신에게 복을 가져오는 대신, 아마도 당신이 그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p.111).<br/><br/>저자는, 우리 자신은 어려운 환경이 속히 변화되기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있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것들 가운데서 떠받치신다고 일깨워 준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도다.』(고후 12:9)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환경을 초월해서 의기양양하게 승리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환경을 딛고 일어서게 하신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려움 속에서도 떠받치신다는 사실로 인해 위로를 받으며 주님과의 교제를 끊임없이 지속해야 한다.<br/><br/>책을 완독한 후 얻게 된 유익은 다음과 같다. 먼저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일생을 다룬 창세기 11장 후반부터 25장까지의 내용을 더욱 흥미롭게 묵상하게 되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등 신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중요 인물인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해 다각도로 이해하며 알아갈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롯과 사라, 라합, 멜키세덱, 이삭, 리브카 등의 삶을 통해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많은 가족과 친지들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음을 돌아보고, 그 원인이 그들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나의 문제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가슴 아프게 공감하고 부끄러웠다. 이 책은 우리가 바로 자기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도구가 되기 위해 사는 법과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한 원리를 일러 준다. 이로써 나는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주님께 완전히 드리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책의 저자가 첫 장인 “제1장 믿음의 역사”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br/><br/>「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의 삶을 주시려고 작정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그것을 은쟁반 위에 놓아 우리에게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우리를 시험하시고 단련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는 것은 당신과 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위해 할 수 없는 것을 우리 안에서 행하실 수 있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인 것이다.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서 그분께서 아브라함 안에서 하셨던 것처럼 당신 안에서 믿음을 온전케 하시도록 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준비가 되셨다. 당신은 준비가 되었는가?」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Aug 2025 17:44: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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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겼도다 할렐루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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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할렐루야 놀라워라 <br/>예수님 완전한 구원을 가져오셨네 <br/>이겼도다 죄의 능력 공격해도 <br/>이겼도다 하늘의 은혜 결코 실패하지 않네 <br/><br/>주님 의지하고 <br/>주님 말씀 위에 서 있네<br/>이겼도다 죄에서 자유 얻은 후<br/>이겼도다 화평과 기쁨 누리네 <br/><br/>자유롭다 어디서나 외치라 <br/>주님의 영원한 화평 선포하라 <br/>이겼도다 적들과 맞서 있어도 <br/>이겼도다 이 땅에서 그 승리 노래하세 <br/><br/>덧없는 생 끝나면 <br/>저 강변에서 그 승리 노래하겠네 <br/>이겼도다 구속받은 무리여 여기서 그 승리 노래하라 <br/>이겼도다 영원토록 부를 노래 시작하라<br/><br/>이겼도다 할렐루야 <br/>자유롭게 되었네 예수님 승리 주시네<br/>영광 영광 할렐루야 주님은 나의 전부시라<br/><br/>패배하고픈 인생은 없다. 모두 경쟁에서 승리하고 싶어 하고, 질병으로부터 승리하고 싶어 하며, 상처로부터 승리하고 싶어 한다. 흔히 자살자를 패배자로 보지만, 자살자 자신은 주변인들에게 복수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 자체를 역설적 승리로 여긴다. 하지만 인간은 경쟁에서 패배하고, 질병에 패배하며, 상처에 패배하고, 자살로 패배한다. 이처럼 승리는 너무나 아득한 일이다. 그 모든 것은 각인의 상황에서 패배하지 않으려는 본성적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승리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마 12:20)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구속을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진정한 승리는 죄에 대한 승리요, 죽음에 대한 승리이다.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뤄 주신 것이다. 『오 주여, 위대하심과 권세와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주의 것이니이다』(대상 29:11). 할렐루야 놀라워라, 이겼도다 할렐루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Aug 2025 17:19: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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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의 변치 않는 손 의지하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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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세월은 급히 변하는 것으로 가득하고<br/>세상엔 달라짐 없이 그대로인 것 없으니 <br/>영원한 것 소망하며<br/>하나님의 변치 않는 손 의지하세<br/><br/>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을 신뢰하라 <br/>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br/>친구 너를 버릴지라도<br/>더 가까이 주님께 매달리라 <br/><br/>참으로 속히 썩으리니 <br/>이 세상 헛된 재물 부러워 말라 <br/>결코 없어지지 않으리니<br/>하늘 보화 얻고자 애를 쓰라<br/><br/>여행 다 마치도록 <br/>주님께 신실했다면 <br/>큰 기쁨에 사로잡혀 <br/>눈부시게 아름답고 영광스런 집 보겠네<br/><br/>하나님의 변치 않는 손 의지하세<br/>하나님의 변치 않는 손 의지하세<br/>영원한 것 소망하며<br/>하나님의 변치 않는 손 의지하세<br/><br/>애초에 형체가 없고 공허했던 땅(창 1:2)에 세워진 세상의 형체는 사라져 가고 있다. 그렇기에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다 이용하지 못할 것처럼 해야 한다(고전 7:31).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은 “주소서, 주소서.”라고 부르짖기만 하는 말거머리의 딸들처럼 세상을 갈망할 것이다(잠 30:15). 결코 만족하지 못하여 “충분하다.”라고 말하지 않는 음부처럼, 아이를 낳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충분하다.”라고 말하지 않는 불처럼(잠 30:15,16) 세상을 욕망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바보”와 같다(시 14:1). 그를 성도라고 부르는 일은 부끄럽다. 세상에 살면서 의지해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망각한 성도를 마주하는 일은 거북하다. ]]></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8 Jul 2025 14:45: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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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M.R. 디한의 &lt;창세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초상화들&gt;</title>
<link>https://biblemaster.co.kr/bb9/mr-%EB%94%94%ED%95%9C%EC%9D%98/</link>
<description><![CDATA[초상화(肖像畵)는 인물을 대상으로 그리는 인물화(人物畵)의 한 갈래로, 주로 사람의 얼굴을 중심으로 묘사한다. 과거 화가들은 인물화 연습을 위해 늘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인 자신을 모델로 삼아 자화상(自畵像)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진으로 간편하게 인물들의 모습을 남기는데, 빠르고 편해진 대신 정성 어린 묘사와 개별적이고 심미적인 표현은 줄어들었다. <br/><br/>이런 흐름 속에서, 한 책이 특별한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게 해 준다. 바로 &lt;창세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초상화들&gt;인데, “초상화”라는 단어가 나의 흥미를 끌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 줄지 궁금했다. 이 책은 단순한 그림책이 아니라, 성경에 조명을 주시는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떠올릴 수 있게 해 준다. 여러 장의 인물화를 담은 화첩(畵帖)처럼, 창세기를 통해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br/><br/>서문에 나타난 저자의 고백에 따르면, 성경의 첫 시작 책인 창세기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가득하여, 그 다루는 범위를 성경 전체에서 구약으로, 다시 모세오경으로 점차적으로 축소하였고, 최종적으로는 창세기만으로 한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성경의 매 페이지마다, 아니 몇 구절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읽는다는 저자 M.R. 디한 그가 고백한 경지가 실로 놀라웠다. 놀라움을 넘어 부럽기까지 했고, “나도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열망이 일었다. <br/><br/>책은 총 2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장 창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부터 “제23장 완전한 원형”까지 모든 장이 소중하다. 책 앞부분의 “제1장 창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제2장 그리스도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서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창조의 주체로서의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성경을 공격하는 사상들, 특히 현대의 과학자들과 무신론자들,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연합적 공격이 모세오경, 특히 “창세기”를 향해 집중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오늘날 세상에는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기사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신화나 우화 정도로 치부하려 드는 풍조가 만연하다. 이에 대해 디한 목사는 창세기의 역사성과 신빙성을 강하게 옹호하며 성경 전체가 진리임을 강조한다. <br/><br/>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가 자신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눅 24:27). 디한 목사는 무척 강력한 어조로 우리에게 그 놀라운 진술을 믿도록 촉구한다. 그의 표현에서 절절이 느껴질 것이므로 그대로 옮겨 본다. 「예수께서는 내가 여러분의 머리와 심장 속에 그것들을 두들겨 넣는 방법을 알기 원하는 그러한 심각하고 중대한 말씀들을 언급하셨다. 제발 성령께서 그것들을 강조하셔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막중한 진술을 당신에게 이해시키시기를 바란다. 여기 그 말씀이 있다.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에 관하여 모든 성경에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설명하시더라』(눅 24:27).」(p.63) 디한 목사는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사실을 머리와 심장 속에 “두들겨” 새겨 넣기를 간절히 권면한다.<br/><br/>나는 저자가 위와 같이 힘주어 강조한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저자의 말마따나 내 속에도 바로 그 생각을 확고히 심고자 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가 주님 자신에 대해 말씀한다고 하셨고(요 5:39), 이는 당시 신약성경이 없었음을 고려할 때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모세의 책들을 믿으셨고 때때로 인용하셨다. 따라서 성경의 일부분을 사실로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분이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 곧 “창세기”가 포함된 모세의 책들을 믿으셨던 주님을 은밀하게 사기꾼이나 거짓말쟁이로 우롱하는 짓이다. “모세오경의 역사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이렇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br/><br/>다음에 이어지는 “제3장 그리스도와 아담의 갈비뼈”에서는 최고로 아름다운 초상화를 만날 수 있다. 창세기 2장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깊이 잠든 후에 그의 갈비뼈로 아내를 얻은 사건은, 예수님의 찢긴 몸과 그분의 피흘림을 통해 교회가 탄생한 것과 연결된다. 이것은 신약에서 바울이 말한 『위대한 신비』(엡 5:32)로서,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찢긴 옆구리 사이로 흘러나온 보혈을 통해 탄생하여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엡 5:30)가 되었다.<br/><br/>『하나님의 아들』(눅 3:38)인 아담은 그와 한 몸이었던 사랑스런 이브가 타락하여 죽을 운명에 처해지자, 타락한 그녀를 위해 자신을 낮추어 아내가 받게 된 저주와 동일한 저주를 감수했다. 아담은 이브 스스로 아담 자신의 거룩한 수준으로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그녀의 수준으로 낮추었고, 그녀에게 내려진 사망의 저주에 동참코자 자신을 사망에 넘겨준 것이다. 우리 역시 사탄에게 속임을 당했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지만,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낮추시어 하늘 영광의 보좌를 떠나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빌 2:5-8).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께서 자신과 우리의 죄를 동일시하시고 우리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br/><br/>책의 “제4장 그리스도 둘째 사람”을 읽을 때는 아담의 깊은 잠, 아담의 가슴이 열렸을 때 그 찢긴 몸 사이로 흘러나온 피, 자신의 갈비뼈로 지음받은 아내 이브를 향한 아담의 목숨을 건 사랑을 다시 한번 음미했는데, 그 아담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연스럽게 마음을 모으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아담께서 셋째 하늘을 떠나 인류의 죄들을 제거하고 구주가 되어 주셨기에 누리게 된 영원한 생명! 주님께서 타락한 죄인을 위해 몸소 낮추고 낮추신 그 측정 불가한 사랑에 감복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이제 책 뒷부분으로 가 보도록 하자. “제17장 삼 일의 여행”과 “제18장 대속물”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야 산 여정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예표적으로 보여 준다. 이삭은 나이 많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저항할 수 있었을 텐데 전혀 저항하지 않았고, 어떤 불평도 없었다(사 53:7). 이것은 겟세마네에서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옵소서.』(마 26:39, 막 14:36)라고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에 순순히 따랐던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이다. 마침내 주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고뇌에 찬 소리로 부르짖으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의 빛을 끄고 그 문을 닫으셨다. 『제육시에서 제구시까지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더니 제구시경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질러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라』(마 27:45,46). 사랑하는 아들께서 희생되셔야 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암막 휘장을 걸어 놓으셨다. 독생자께서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서 십자가에 제물로 드려지셨을 때 아버지의 마음 또한 까맣게 타들어 갔으리라.<br/><br/>여기서 우리는 모형론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 주는 대목을 만난다. 즉 그것은 “이중 모형”인데, 이삭을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여기까지만 보여 주고, “숫양”을 예비하신 여호와이레 하나님을 은혜롭게 계시한다. 실로 아름답고 놀랍게도 초점이 전환된다. 내내 이삭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여 주다가, 이삭은 죄인이며 구속자가 될 수 없기에 “이삭의 대속물”인 “숫양”에게로 모형이 극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잡아와서 이삭 대신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창 22:14)라고 불렀는데, 여호와이레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친히 제물을 마련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창세기에서부터 모형을 통해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의 장대한 인류 구원의 계획에 대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br/>저 모리야 산에서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발견했던 아브라함은 대속제물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드렸을까. 실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였을 것이다. 이 점은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값없이 구원받은 우리가 기쁨과 감사로 찬양하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이 얼마나 마땅한가를 말해 준다.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고자 숫양과 같은 대속제물로 자신을 낮추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곧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께서 친히 자신의 씨를 보기 위해 순종적으로 기꺼이 제물이 되시는 길을 택하여 십자가로 올라가셨던 것이다. 많은 범죄자들 중의 한 명인 나 또한 갈보리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이러한 주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깊이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br/><br/>나는 믿음의 선배인 M.R. 디한의 눈을 통해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책의 “제3장 그리스도와 아담의 갈비뼈”에서는 성경을 보는 새로운 독서법을 알려 주는데, 나 역시 저자처럼 깊은 통찰로 성경의 매 페이지, 매 구절마다 바로 그 구절에서 계시하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를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통독과 병행하는 가운데 그러한 독서법을 적용한다면, 그 말씀 그 자리에 계신 주님과 더 실제적으로 함께 기뻐하고 안타까워하며 기도하고 그분의 영원한 사랑과 행복 속에 함께 잠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br/><br/>저자 M.R. 디한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오가며 여러 인물과 사건, 의식 등을 통해 신약에서 분명하게 입증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들을 풍부하게 제시해 준다. 우리 또한 이것을 본으로 삼아 존귀하신 주님을 더 알아가고, 개인적인 성경 읽기를 통해 차츰 범위를 넓혀가며, 신구약성경 66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들을 더 많이 발견하기를 열망했으면 한다. 이것은 새로운 “초상화” 작업이 될 것이고, 남몰래 보물찾기를 하듯 매우 흥미진진한 여정이 될 것이다. 저 영원에서도 우리가 감동과 찬양으로 섬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을 상고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함이니, 그 성경은 나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음이라』(요 5:39). 이제 우리는 성경의 모든 페이지의 어느 곳에서든 주님을 찾아야만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10:15:1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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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놀라운 구주시로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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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캄캄한 죄의 골짝에서 헤맬 적에 <br/>희망 보이지 않았으나 <br/>사랑의 구주 이 땅에 보내셨네<br/>지옥으로 가던 딱한 날 구하시고자 <br/><br/>아버지도 부요함도 <br/>만족함도 평온함도 떠나<br/>하늘에서 내려오사 생명의 피 주셨네 <br/>추악한 죄인 깨끗게 하시고자<br/><br/>머잖아 차디 찬 죽음의 강 건널 때 <br/>손잡아 무사히 저편으로 이끄시리니 <br/>찬란한 도성에서 큰 노랫소리 따라<br/>나도 영원토록 찬송하리라<br/><br/>오 놀라운 구주시로다 할렐루야<br/>갈보리에서 부서지신 놀라운 구주<br/>손에 못 박히고 옆구리 찢기시며<br/>나 같은 죄인에게 생명의 피 주셨네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시며 『그분[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히 1:3)이시기에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않으셨다. 그러나 자신의 영예를 버린 뒤 종인 사람의 형체를 입고서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시 23:4)에 나타나셨다.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히 2:9)께서는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자신을 낮추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심으로(빌 2:5-8) 죄인들이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면할 길을 마련하셨다.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놀라운 구주를 찬양한다. 십자가의 구주께 대한 소리 높은 찬양은 영원토록 끊이지 않을 것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계 5:12,13).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씻어 주신 구주께 영광을 돌리고, 그 구주의 보혈을 의지하면서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간다. 헛된 세상 욕심 모두 버리고, 악한 현 세상에 사는 동안 기쁘나 슬프나 『어린양』만을 의지한다. 마음 구석까지 흘러내린 보혈의 강물을 다시 세상에 흘려보내며, 언제나 감사와 찬미로 복음을 증거하다가 자신의 놀라운 구주와 함께 하늘나라에 이르는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09:50:3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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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영광으로 가고 싶다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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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수고와 염려 그치는 날 <br/>영광으로 가고 싶다네<br/>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땅으로 <br/><br/>지금은 순례자로 이곳저곳 지나지만<br/>영광으로 가고 싶다네<br/>이 세상은 내 집 아니기에<br/><br/>기진하도록 걸어 온 인생길 떠나는 날 <br/>영광으로 가고 싶다네<br/>마침내 짐 다 내려놓으리<br/><br/>눈물 앞을 가릴 날 없으니<br/>영광으로 가고 싶다네<br/>다시는 친구에게 작별 인사 않으리<br/><br/>저 위에 내 구주 계시니<br/>영광으로 가고 싶다네<br/>머잖아 나도 왕을 찬양하며 높이리라<br/><br/>영광으로 가고 싶다네<br/>복되신 주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대로<br/>저 너머에 더없이 아름다운 집 기다리니<br/>영광으로 가고 싶다네 <br/><br/>세상은 본래 그리스도인이 살 만한 곳이 못 되지만(히 11:38), 요즘 같은 세상이면 이전보다 훨씬 더 살 만한 곳이 못 됨을 절감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는데 왜 여기서 머뭇거려야 하는가? 『그러나 만일 내가 육신으로 산다면 이것은 내 수고의 열매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니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그것이 훨씬 좋으나 육신에 남아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욱 필요하리라』(빌 1:22-24). 루스트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후 살아난 사도 바울이 그 살인자들의 성읍으로 다시 들어가는 “자살 충동”을 보인 까닭은(행 14:19,20), 그가 잠시 죽었던 그 시간에 혼이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끌려올라가(고후 12:2-4) 잠깐 본 이루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처소에 대한 갈망에 있었다. 수고와 염려로 점철된 순례의 인생, 앞을 가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기진하도록 걸어온 인생길을 뒤로한 채, 나의 진정한 집이 아닌 곳을 떠나 저 하늘 너머 주님께서 계신 더없이 아름답고 눈부신 영광으로 이제 그만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바람이다. 세상이 지겨울수록, 이러한 갈망은 더욱 거세게 휘몰아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9 May 2025 09:52:4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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