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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와 내일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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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신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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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이' 와 '내일'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개역개정)
[마6:34]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한글 KJV)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개역개정)
[마6:34]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한글 KJ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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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킹제임스성경>의 본문이 우리말로 정확한 번역입니다. 대한성서공회가 <개역개정판>을 출간하면서 마태복음 6:34의 본문을 수정하여 변개시켰습니다. 성서공회 관계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영진 - 「예수님의 결론의 말씀은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 할 걱정을 미리 당겨서 오늘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는 이 본문을 내일 걱정은 오늘 하지 말고 내일 하라는 말로 읽어왔다... 이러한 이해는 본문 전체의 문맥에도 맞지 않는 이해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권면의 정신과도 맞지 않고, 그리스어 본문의 뜻과도 맞지 않는다.」(민영진, 『개역개정판 이렇게 달라졌다』, 대한성서공회 성서원문연구소, 2003, p.11.)
나채운 - 「지금까지의 개역으로는, 내일 일을 염려하되 오늘 하지 말고 내일에 하라는 말, 즉 염려하는 시간(날)에 관한 언급으로 이해되는데, 원문의 뜻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 자체가 염려할 것이니, 너는 도무지, 내일에도 염려하지 말라는 뜻, 즉 염려하는 주제(네가 아닌 내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나채운, 『개역성경, 개정판에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나?』, 도서출판 갈리리, 2007, p.24.)
민영진, 나채운 등은 변개된 성경을 번역, 개정한 사람들이지만 성경 말씀을 본문 그대로 읽지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억측으로 이 구절을 개정하면서 변개시킨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내일 일을 "내일이" 걱정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내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헬라어나 영어의 본문을 언어의 차이나 성경 번역의 정확성을 고려하지 않고 번역하면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의미를 우리말로 바르게 옮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실제로 말씀하는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만약 변개된 <개역개정판>의 본문대로 이 구절을 읽는다면 어떤 오류가 발생할까요? 내일이 되면, "내일이" 그날의 일을 염려해 줍니까? 그러면 오늘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일을 "오늘이" 염려해주거나 해결해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은 우리에게 닥치는 일을 염려해주거나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비록 헬라어나 영어 성경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도 우리말로는 이런 표현이 우리말답게 달라져야 합니다. 성경 번역을 할 때에는 원어를 수용언어로 글자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말고 문자적으로 직역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어의 관용어 표현이나, 각 언어의 문법적 차이나, 수용언어의 어법이나 수사법을 고려하지 않으면 정확한 번역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수준 낮은 해석이나 번역이 됩니다. 때로는 원어 성경의 한 단어가 수용언어의 두 세 단어로 번역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성경 번역은 성경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옮기는 데 꼭 필요한 것이며, 이런 성경 번역이 문자적 번역인 동시에 직역입니다.
이와 같이 번역하지 않을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마태복음 4:17의 본문인 『From that time Jesus began to preach, and to say, <u>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u>』를 우리말로 번역한 <한글킹제임스성경>의 본문은 『그 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기 시작하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u>고 하시더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영어의 밑줄 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길 때, "회개하라. 천국이 <u>손에 있다(is at hand).</u>"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회개하라 천국이 <u>가까웠느니라.</u>"고 번역해야 합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성경 번역은 수용언어의 사전적 정의나 문법적 형식과 어법만이 아니라 문화적, 관습적으로도 정착될 수 있는 언어적 탁월성이 있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이 영어라는 언어에 미친 영향과 같이 말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는 표현은 성경적으로도 본래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말로도 바른 번역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염려하는 주체는 오늘이나 내일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하는 의미입니다. 『<u>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u>』라는 말씀도 염려의 주체는 사람이고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일이 내일 일을 염려해 줄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그 이유가 바로 다음 문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는 말씀은 오늘의 재앙이 오늘로 충분한데, 어찌하여 오늘 이런 재앙을 당하고 있으니 내일도 이런 재앙을 당하면 어떻게 할까라고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염려(念慮)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앞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함. 또는 그런 걱정."입니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한 걱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염려하는 주체가 오늘이나 내일이 아니라 사람일지라도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은 내일이 되면 염려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일이 되면, 내일, 즉 그 날은 오늘이 됩니다.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 6:34의 핵심은 염려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염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상식적으로 말할 때,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내일이 어떻게 염려를 하거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 속에 내일에는 염려해도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말을 정상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어떤 사람도 염려해도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의 이런 표현을 염려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행간을 읽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말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 중에서 어떤 것이 전혀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를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부여해 줍니까?
34절의 말씀은 모든 시대의,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하며 귀한 진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u>대부분의 염려는 실제로 다가오지 않는다</u>, 기도할 수 있을 때 왜 걱정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등과 같은 말은 34절과 같은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루의 한 때에 그 날의 일을 감당하는 것으로도 그 날의 일은 그 사람에게 충분합니다. 그 날의 재앙은 그 날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하도록 하기에도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6장의 말씀뿐만 아니라 빌립보서 4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u>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u>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자신들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빌 4:6-7).
민영진 - 「예수님의 결론의 말씀은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 할 걱정을 미리 당겨서 오늘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는 이 본문을 내일 걱정은 오늘 하지 말고 내일 하라는 말로 읽어왔다... 이러한 이해는 본문 전체의 문맥에도 맞지 않는 이해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권면의 정신과도 맞지 않고, 그리스어 본문의 뜻과도 맞지 않는다.」(민영진, 『개역개정판 이렇게 달라졌다』, 대한성서공회 성서원문연구소, 2003, p.11.)
나채운 - 「지금까지의 개역으로는, 내일 일을 염려하되 오늘 하지 말고 내일에 하라는 말, 즉 염려하는 시간(날)에 관한 언급으로 이해되는데, 원문의 뜻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 자체가 염려할 것이니, 너는 도무지, 내일에도 염려하지 말라는 뜻, 즉 염려하는 주제(네가 아닌 내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나채운, 『개역성경, 개정판에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나?』, 도서출판 갈리리, 2007, p.24.)
민영진, 나채운 등은 변개된 성경을 번역, 개정한 사람들이지만 성경 말씀을 본문 그대로 읽지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억측으로 이 구절을 개정하면서 변개시킨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내일 일을 "내일이" 걱정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내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헬라어나 영어의 본문을 언어의 차이나 성경 번역의 정확성을 고려하지 않고 번역하면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의미를 우리말로 바르게 옮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실제로 말씀하는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만약 변개된 <개역개정판>의 본문대로 이 구절을 읽는다면 어떤 오류가 발생할까요? 내일이 되면, "내일이" 그날의 일을 염려해 줍니까? 그러면 오늘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일을 "오늘이" 염려해주거나 해결해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은 우리에게 닥치는 일을 염려해주거나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비록 헬라어나 영어 성경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도 우리말로는 이런 표현이 우리말답게 달라져야 합니다. 성경 번역을 할 때에는 원어를 수용언어로 글자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말고 문자적으로 직역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어의 관용어 표현이나, 각 언어의 문법적 차이나, 수용언어의 어법이나 수사법을 고려하지 않으면 정확한 번역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수준 낮은 해석이나 번역이 됩니다. 때로는 원어 성경의 한 단어가 수용언어의 두 세 단어로 번역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성경 번역은 성경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옮기는 데 꼭 필요한 것이며, 이런 성경 번역이 문자적 번역인 동시에 직역입니다.
이와 같이 번역하지 않을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마태복음 4:17의 본문인 『From that time Jesus began to preach, and to say, <u>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u>』를 우리말로 번역한 <한글킹제임스성경>의 본문은 『그 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기 시작하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u>고 하시더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영어의 밑줄 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길 때, "회개하라. 천국이 <u>손에 있다(is at hand).</u>"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회개하라 천국이 <u>가까웠느니라.</u>"고 번역해야 합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성경 번역은 수용언어의 사전적 정의나 문법적 형식과 어법만이 아니라 문화적, 관습적으로도 정착될 수 있는 언어적 탁월성이 있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이 영어라는 언어에 미친 영향과 같이 말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는 표현은 성경적으로도 본래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말로도 바른 번역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염려하는 주체는 오늘이나 내일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하는 의미입니다. 『<u>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u>』라는 말씀도 염려의 주체는 사람이고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일이 내일 일을 염려해 줄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그 이유가 바로 다음 문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는 말씀은 오늘의 재앙이 오늘로 충분한데, 어찌하여 오늘 이런 재앙을 당하고 있으니 내일도 이런 재앙을 당하면 어떻게 할까라고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염려(念慮)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앞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함. 또는 그런 걱정."입니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한 걱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염려하는 주체가 오늘이나 내일이 아니라 사람일지라도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은 내일이 되면 염려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일이 되면, 내일, 즉 그 날은 오늘이 됩니다.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 6:34의 핵심은 염려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염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상식적으로 말할 때,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내일이 어떻게 염려를 하거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 속에 내일에는 염려해도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말을 정상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어떤 사람도 염려해도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의 이런 표현을 염려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행간을 읽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말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 중에서 어떤 것이 전혀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를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부여해 줍니까?
34절의 말씀은 모든 시대의,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하며 귀한 진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u>대부분의 염려는 실제로 다가오지 않는다</u>, 기도할 수 있을 때 왜 걱정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등과 같은 말은 34절과 같은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루의 한 때에 그 날의 일을 감당하는 것으로도 그 날의 일은 그 사람에게 충분합니다. 그 날의 재앙은 그 날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하도록 하기에도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6장의 말씀뿐만 아니라 빌립보서 4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u>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u>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자신들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빌 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