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 속의 사람들 분류

비텐베르크의 샛별, 카타리나 폰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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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4월호>

혹시 "페베"(롬 16:1)라는 자매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신실한 동역자들의 이름을 거명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 어떤 "형제"보다도 가장 먼저 쓴 이름이 바로 이 "자매"의 이름이었다. 바울은 그녀가 했던 역할에 관하여 "후원자"(롬 16:2)라고 소개했다. 여기에는 사역에 있어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들뿐만 아니라 물질적이고 육체적으로 섬기는 일들도 중요하다는 진리가 담겨 있다.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사역의 현장"에는 하늘을 향해 손을 펼쳐 들고 기도하는 모세도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 싸우는 여호수아도 있어야 하고, 기도하는 모세의 두 손이 "물리적으로" 내려오지 않도록 옆에서 두 팔을 붙들어 줄 아론과 훌도 있어야 한다(출 17:8-16). 따라서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대접하는 일이나 교회 내에 설거지와 청소 등의 궂은일들을 하찮거나 귀찮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그런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잊으실 만큼 불의하지』(히 6:10) 않으신 분이시다.

요컨대 진리의 빛으로 돋보이는 사역 배후에는 언제나 묵묵하게 그 수고로움을 감당해 낸 성도들이 있기 마련인데, 본 글에서 소개할 자매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틴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이다.

카타리나는 1499년 1월 29일 독일의 리펜도르프(Lippendorf)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5살이었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어린 카타리나를 "베네딕트 수녀원"에 교육시킬 목적으로 보냈고, 9살이 되었을 때는 "시토 수녀원"으로 옮겼다.

카타리나는 16살이 되던 해인 1515년에 정식으로 수녀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인 1517년에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독일 전역에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수도승들과 수녀들 중에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수도원에서 도망쳐 나갈 방법을 모색했다. 로마카톨릭이 그들로부터 뛰쳐나가지는 않은 "사보나롤라"(1452-1498, 그는 로마카톨릭의 악행을 책망한 경건한 설교자였으나 그들로부터 성별하지는 않았음)조차 화형에 처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탈출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내놓는 행위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카타리나가 머물고 있던 수녀원에서도 12명의 수녀들이 탈출을 도모하기 위해 마틴 루터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그들을 도와줄 계획을 세웠다. 한 용감한 상인과 그의 조카가 이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는데, 그들은 커다란 통들을 실은 짐마차를 수녀원으로 몰고 들어가서 통 하나에 한 사람씩 넣어서 빠져나왔던 것이다. 수녀원 문지기가 의심 어린 눈초리로 "무엇을 싣고 가는 겁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청어"라고 대답했다. 어찌 보면 누가복음 5:10에 따라 정직한 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탈출한 12명의 수녀들 중 3명은 집으로 돌아갔고, 8명은 비텐베르크로 가서 2년도 채 안 되어 각자 자신의 짝을 찾아 결혼했다. 오직 카타리나만 미혼인 채로 남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카타리나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었다거나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 미혼이었던 것은 아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동창생이자 목회자였던 캐스퍼 글라츠(Casper Glatz)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남자들이 카타리나에게 청혼했지만, 정작 그녀가 정말로 사랑했던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던 것이다. 마틴 루터는 카타리나에게 글라츠와 결혼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이런 카타리나와 루터의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게 먼저 호감을 표명한 쪽은 카타리나였다. 그녀는 루터의 친구들과 동역자들에게 "만일 루터가 제게 청혼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사실 루터는 로마카톨릭이 가르치는 "마귀들의 교리"인 "성직자의 독신주의"(딤전 4:1-3)에 반대하여 동역자들의 결혼을 장려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청난 대적들과 싸워야 했던 그의 입장에서 가정을 꾸렸을 때 아내와 자식들이 감내해야 할 위험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서 자신이 훌륭한 남편감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는 수입이 매우 적었을 뿐만 아니라 불안정했고, 게다가 남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기로 유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루터는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내가 결혼 생활을 잘 해낼 수만 있다면, 내가 죽기 전에 카타리나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네. 마귀와 잘 싸우기 위해서 말일세." 그렇게 해서 1525년 6월 13일, 루터와 카타리나는 각각 41세와 26세의 나이에 성도들의 축복 속에서 그리고 대적들의 시기와 음해 속에서 결혼을 했다. 비록 남편의 "스펙"이 재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아주 형편없었지만, 카타리나는 그녀의 『바람』(desire, 창 3:16)의 대상이 될 남편을 선택함에 있어서 "최고의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루터의 부인"이 된 카타리나는 집안일뿐 아니라 가축을 키우고 파는 일, 오래된 수도원과 교회와 대학교 건물을 개수하는 일을 지도하는 일을 도맡아 했고, 심지어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는 병원을 운영하는 일까지 맡았다. 마틴 루터는 잠언 31:10-31의 "현숙한 여인"의 모습을 저절로 연상하게 만드는 이 여인과 때때로 교회 문제에 대해 상의하기도 했다.

루터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이들과 기도하는 훌륭한 습관을 갖고 있었지만, 카타리나는 그보다 두 시간 더 일찍, 이른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일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카타리나를 "비텐베르크의 샛별"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역동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잘하고 부수적인 일들을 스스로 끌어안음으로써 그가 불필요하게 신경 쓰지 않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루터가 육신적으로 표출하는 짜증을 받아 주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종종 루터는 차려 놓은 음식이 다 식어 버릴 정도로 손님들과 함께 신학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거나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곤 했는데, 이것을 모아 출간한 책이 그 유명한 <탁상담화, The Table Talk of Martin Luther>이다. 한번은 저녁 식사 시간이 많이 지난 관계로 카타리나가 "박사님, 잠시 이야기를 멈추시고 식사하시지요?"라고 말하자, 토론에 너무 심취한 루터는 순간 기분이 상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곧바로 대놓고 카타리나가 입을 경솔하게 열었다고 마구 쏘아붙였다. 로마카톨릭의 위협 속에서 독일어로 성경을 펴낸 위대한 용사 마틴 루터도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약 5:17)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타리나는 평생 동안 남편을 "루터 박사님"이라고 부르면서 존경했다. 이에 루터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카타리나를 "나의 갈비뼈 키티," "나의 더 나은 반쪽" 등의 여러 애칭으로 불렀다.

한편 루터가 낙담했을 때는 앞선 경우처럼 "받아 주는 자세"로만 일관하지 않았다. 그가 사역에 대한 많은 부담과 영적 전쟁으로 몹시 지쳐서 미소를 잃은 채 걱정과 우울감에 젖어 여러 날을 보내고 있었을 때, 카타리나는 특단의 조치로 검은 상복을 입고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맞이했다. 이에 마틴 루터가 "누가 죽었소?"라고 묻자, 카타리나는 "하나님께서 죽으셨어요!"라고 대답했다.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이오!" 그러자 카타리나는 "하나님께서 죽으신 게 분명해요. 그게 아니라면 루터 박사님께서 그렇게 슬픔에 잠겨 계실 리가 없잖아요!"라고 응수했다. 이 말을 들은 루터는 즉시 낙담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싸움에 임했다.

마틴 루터가 마귀와 잘 싸우기 위해 카타리나를 아내로 맞이했던 선택은 틀림없이 옳았던 것이다. 『둘이 하나보다 더 나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수고에 대한 좋은 상을 가짐이라. 이는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의 동료를 일으켜 세울 것임이라. 그러나 혼자 있는 자가 넘어지면 그에게 화로다. 이는 그를 도와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음이라』(전 4:9,10). "공격수"가 마음 놓고 공격하기 위해서는 실수로 상대방에게 공을 빼앗겨서 역습을 허용해도 그것을 막아 낼 수 있는 믿음직한 "수비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결혼 적령기에 있는 형제들은 "군인의 아내"가 되겠다고 하는 자매를 얻기보다는 이미 "군인이 된 아내"를 얻는 편이 더 현명하다.

물론 카타리나의 결혼 생활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있었다. 루터와의 관계 속에서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그중 한 명은 1년이 채 안 되어 세상을 떠났고, 또 한 명은 13살의 나이에 죽었으며, 심지어 유산된 아기도 있었다. 또한 카타리나 자신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때때로 루터를 피곤하게 하기도 했다. 그래서 루터는 결혼을 일컬어서 "인격을 길러 주는 학교"라고 했고, 아내의 요구 사항이 많아질 때면(둘의 나이 차이를 생각할 때 어느 쪽이 보채는 쪽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조심스럽게 카타리나를 "사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내들은 대부분 눈물과 탄원으로 남자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기술을 갖고 있다."라는 마틴 루터의 글로 미루어 볼 때, 카타리나 역시 이브처럼 "죄에게 죽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 달라."(창 3:6)라고 하는 눈물 어린 호소를 함으로써 남편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몸"이 된 루터와 카타리나는 서로를 위해 오래 참으면서 같은 길을 걸어갔고, 지금은 서로가 없었다면 결코 쌓지 못했을 어마어마한 "유업의 상"을 저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다.

다른 유명한 종교개혁자들에 비해 카타리나라는 자매의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의 의도들을 나타내실 그날에는(고전 4:5) 유명무실하고 교만한 자들은 낮아지고 뒤에서 묵묵히 섬겼던 카타리나와 같은 지체들이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눅 14:11). 중요한 것은 "신실함"이지 "일의 종류"가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청소하는 일을 맡은 천사와 다스리는 일을 맡은 천사가 있다고 할 때, 그 둘은 결코 서로의 일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존 뉴턴의 명언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 주신 일이 주목받는 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 일에 대해 긍지를 갖도록 하자! 그리고 각자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끝까지 신실하도록 하자!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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