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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으로 마음을 사로잡은 필립 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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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5월호>
“생각해 보게. 아이들이 얼마나 준비된 마음으로 찬송가의 의미를 붙잡는지, 그리고 그 영향력이 얼마나 오랜 시간 지속되는지 말일세. 또한 논쟁이나 간청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때에도 찬송이라는 수단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결케 하는 샘물로 인도되었는지 말일세. 자네 자신조차도 어린 시절에 들었던 찬송들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 찬송들을 불렀던 목소리와 태도까지도 회상해 낼 수 있지 않은가? 눈부시게 빛났던 설교의 찬란한 반짝임은 망각이라는 어두운 바닷속에서 유실되어 버렸다네. 적어도 자네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찬송은 아닐세!”이것은 인생의 절반을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아이들을 “찬송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키워 낸 “필립 블리스”(Philip P. Bliss, 1838-1876) 형제가 남긴 말이다. 이러한 유익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찬송을 만들어서 부르라고 명령하셨다(엡 5:19). 이 명령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필립 블리스는 “내 영혼 평안해”(427장)의 작곡자로서, 그리고 “달고 오묘한 그 말씀”(140장)과 “하나님의 진리 등대”(480장)의 작사자이자 작곡자로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기억되고 있다. 그 외에도 찬송가 <영광을 주께>에는 그의 이름으로 실린 곡이 10개 더 나온다(41장, 54장, 91장, 147장, 173장, 219장, 262장, 281장, 348장, 465장).
“필립 블리스”는 1838년 7월 9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한 통나무 오두막에서 매우 가난한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는데, 특히 그의 아버지에 대해 필립 블리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구주이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 속에서 사셨다. 비록 가난하셨지만, 이른 아침에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셨을 때도, 저녁때도 그 조그마한 집 지붕 밑에 앉아 찬송을 부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아버지께서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는 분이셨고, 성경이 가르치시는 바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계셨으며, 성경의 계명들을 깊이 존중하셨다.”
어린 시절 블리스는 열 살 남짓 될 때까지 세 차례나 이사해야 했는데, 인적이 드문 산지들로 이사를 하였기에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어린 블리스는 부모님을 통해서, 또는 성경과 자연의 일상을 통해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특히 아버지가 찬송을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블리스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나타냈는데, 열 살이 채 넘기도 전에 그는 귀담아들은 곡조를 휘파람으로 불거나 자신이 직접 만든 투박한 악기로 연주를 하곤 했다.
필립 블리스는 불과 열한 살의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독립했다. 목재를 벌목하고 가공하는 일 그리고 그 외에 자신의 강인한 체력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치면서 성장했고, 돈도 벌었으며, 학교에도 출석했다. 또한 학교 교사가 되는 과정을 이수하여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한편 19세가 되어서야 그토록 좋아하던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할 수 있었는데, 늦은 나이에 정식 성악 교육에 입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꽃을 피웠다. 음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그의 목소리가 타고났음을 알아보았고, 그에게는 음악적인 경력을 쌓아 나갈 기회가 계속해서 열렸다. 그런 와중에 함께 교제했던 사람 중에는 “내 기도하는 그 시간”(385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16장) 등의 작곡자로 잘 알려진 윌리엄 브래드버리(William B. Bradbury)도 있었는데, 그는 블리스가 음악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항상 블리스 주변에 “꼭 필요한 사람들”을 “필요한 순간”에 붙여 주셔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길로 그를 인도하셨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전환점이나 갈림길에 섰을 때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기도”와 “말씀”이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을 하나 더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과 동행하는 자는 지혜롭게 될 것이나, 어리석은 자들의 친구는 멸망하리라』(잠 13:20).
20세가 되던 해인 1858년, 블리스는 자신보다 두 살가량 어린 자매인 “루시 영”(Lucy Young)을 만났고, 이듬해에 그녀와 결혼했다. 루시 영의 집안은 음악가 집안이었고 그녀 또한 시를 썼기에, 블리스에게 있어 그녀는 더할 나위 없는 복된 존재였으며, 그의 재능을 더욱 북돋워 줄 아주 적합한 배필이었다. 1년쯤 지난 후에 블리스는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멜로디언으로 “순회 음악 교습”을 시작했고, 수년이 지난 후 시카고로 이주하여 “음악 교육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던 때인 26세 무렵에는 음악 교습과 노래 실력 그리고 작사와 작곡으로 이미 유명해진 상태였다.
블리스는 시카고에서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선사해 줄 두 형제를 만났는데 그중 한 명이 “휘틀 소령”(Major Whittle)이었다. 남북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군인이었던 휘틀 소령은 부상을 당하여 회복하던 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시카고에 있는 시계 회사에서 일했다. 두 사람은 이내 친형제처럼 친해졌고 함께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에도 힘을 썼다. 휘틀 소령은 블리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며칠 동안 함께 머물게 했는데, 그의 가족과 블리스는 함께 경배도 드리고, 성경과 사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휘틀 소령의 가족과 나눈 따뜻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블리스 안에 역사하셨고, 그때 나온 찬송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91장)이었다.
블리스의 인생에 전환점을 선사해 준 두 번째 인물은 D.L. 무디였다. 그는 무디와의 만남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1869년에 무디는 시카고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마침 찬양 인도자를 대동하지 못했던 무디는 회중 속에서 블리스를 주목했고(아마도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모임 장소를 쩌렁쩌렁 울리게 했을 것으로 생각됨), 모임이 끝났을 무렵 그에게 다가가서 시간이 가능할 때 모임에 와서 찬송을 불러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블리스는 흔쾌히 승낙했고 두 사람 사이의 친교는 더욱 깊어졌다.
1873년에서 1874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당시 스코틀랜드에 있었던 무디는 블리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현재 종사하고 있는 음악 사업과 모든 일을 내려놓고 “복음 전파”를 위한 전담 사역자로 헌신하라고 권면했다. 블리스 부부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돈이나 명예 때문에 주저한 것은 아니었고, 정작 하나님께서 이 일을 원하시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블리스는 사역과 관련하여 과연 자신이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또한 그저 자신이 전담 사역에 뛰어들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전담 사역에 뛰어들도록 인도하시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무디는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어 이렇게 역설했다. “지금 자네에게는 믿음이 없네. 이 문제에 대해 자네가 스스로 믿음을 갖지 못하겠다면 내 믿음을 바탕으로 시작해 보게. 이제 깊은 바다를 향해 출항해 보게나.”
이 무렵 일리노이주의 한 목사로부터 블리스와 휘틀에게 3,4일 정도 저녁 집회를 개최해 보지 않겠느냐는 초청이 왔다. 마치 하나님께서 “한번 해 보기라도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집회 첫날인 1874년 3월 24일, 그날 모임에는 사람이 많이 참석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그다음 날에는 비도 많이 내렸다. 그런데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이 전날보다 더 적으리라고 생각했던 예상을 깨고 회중의 수는 오히려 두 배로 늘었다. 그날 집회에서 블리스는 회중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결단하게 하려고 그가 작곡한 찬송가 “거의 설득되었으나”(Almost persuaded, 행 26:28)를 불렀는데, 기도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많은 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았다.
휘틀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그다음 날 오후 블리스는 자신의 모든 음악 사업을 포기했고 찬송가가 아닌 곡을 쓰는 것도 포기했으니, 그야말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또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믿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재능이든, 힘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주님의 처분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어떤 용도로라도 써 달라고 자신을 내어 드렸다고 한다. 그날 모임에서도 20명 이상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블리스와 휘틀 소령은 시카고로 돌아오자마자 각자의 생업을 정리했다.
설교와 찬송을 통해 수많은 혼을 주님께 이겨왔던 무디와 생키의 “순회 복음 전도 집회”처럼 휘틀과 블리스도 그들의 “순회 복음 전도 집회”를 시작했고 8개 주를 돌아다니면서 25번의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1876년 말에 블리스는 안타깝게도 38세의 나이에 열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결국 그들의 사역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블리스는 사고 직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지만, 불타는 열차 안에 있던 아내를 구하기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왜 그를 일찍 데려가셨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분명 자신의 지상 생애가 짧았음을 한탄하기보다는 그로부터 1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성도가 그의 찬송가를 통해 도전과 위로와 확신을 얻는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에 관한 인상적인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어느 해인가 마지막 주간에 블리스는 거리를 지나다가 초라한 옷차림의 한 소녀가 장난감 가게의 창문 앞에 서서 안에 진열된 인형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멈춰 서서 그 소녀에게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건넸다. “저 인형들 가운데 네가 원하는 인형 하나를 고르렴. 내가 들어가서 그 인형을 사다 주마.” 그러나 그 아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몸짓과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는 머리에 숄을 감싸고서 급히 떠나 버렸다.
필립 블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이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방식이라네. 내가 그 소녀를 위해 해 주고 싶었던 것을 그 어린 친구가 거절했다는 사실과 나를 불신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진정으로 슬펐다네. 나는 그저 온 마음으로 그 소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 아이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렇게 떠나 버렸지. 주님께서 그분의 귀한 약속에 대한 우리의 불신을 보시고 어떤 마음을 느끼실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