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그 놋뱀을 보면 살리라[민수기 21:4-9]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10월호>

지난 두 주 동안 폭염을 피해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한 사람이 무려 131명이나 됩니다. 그들 중 그 누가 "나는 오늘 죽으러 간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죽음은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고가 아니고, 나이가 차서 늙어 죽은 다윗왕도 죽을 즈음에 말하기를 『내가 세상의 모든 자들의 길로 가노라.』(왕상 2:2)고 말했습니다. 실로 죽음은 세상의 모든 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누가 먼저 가는지 순서도 알 수 없습니다. 나이가 젊다고 해서 꼭 나중에 가는 것도 아니고. 건강하다고 해서 영안실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식들을 의사가 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치료를 받아 조금 더 살고 싶은 열망이 없잖아 있을 것입니다. 아들, 딸 다섯 명을 모두 의사로 키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되었을 때 그의 다섯 자녀가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연장했다면 어떤 상태로 얼마만큼 더 살게 해주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삼성의료원의 그 많은 의사들이 그 병원의 설립자가 병에 걸렸을 때 얼마만큼 오래 살게 해줄 수 있었습니까? 의사들은 병을 치료하지만 어떤 병은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욱이 죽음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길이 자기의 죽을 생명을 다시 살리는 것과 무관하다면 왜 우리가 애써 성경을 공부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려 합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시간의 배를 타면 그 목적지는 무덤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았건, 태어날 때 기쁨으로 시작해서 죽을 때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내가 세상의 모든 자들의 길로 가노라."는 성경 말씀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마치 자기는 죽음에서 예외인 것처럼 죽음을 회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음이 인간과 무관하지 않다면 이 죽음을 대비하고 사는 사람이 현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죄에 감염되어서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을 보게 하셨고, 아직 뱀에게 물리지 않은 사람들도 사람이 왜 죽는지 보고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살릴 수 있는 치유책으로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놓고 그 뱀을 쳐다보면 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놀이를 하다가 죽은 131명 가운데 자신이 죽을 줄 알았다면 물에 들어갔겠습니까? 사람들은 몇 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잠 27:1).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자기는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에서 살려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얼마나 다양한 가짜 종교가 인류를 기만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종교란 창조주 하나님을 숭앙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유대교는 구약만을 믿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종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란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정통주의, 보수주의, 근본주의, 복음주의라고 들고 나오다가 성경대로 믿는 사람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본문은 죄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생명을 살려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불교, 힌두교, 모슬렘 등 잡다한 우상 숭배들도 종교라고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4대 성인 중의 하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써먹고 있는 방법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는가?
I. 불뱀들이 무니 많은 백성이 죽으니라(4-6절).
뱀은 심판받은 죄를 상징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중에 불뱀들을 풀어 놓게 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불평했고, 모세를 거역하여 불평함으로써 영적 권위에 대항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 대우받으면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인 모세는 약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생명과 안녕을 책임지고, 그에 따른 가축들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그 사람이 만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지도자가 아니고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그 200만 명은 광야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막에서 절대로 필요한 것은 물과 음식입니다. 200만 명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 때 그들과 가축들이 마실 물의 양은 얼마큼이나 필요하며 음식은 얼마나 많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아프리카의 난민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불평을 하려면 하나님의 기준과 권위인 성경으로 해야 마땅합니다. 특히 영적인 일에 관해 말하려면 성경으로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해서 적용한다면 그 사람 자신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적인 발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카데스바네아에 있습니다. 카데스바네아에서 카나안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서 열두 지파에서 각각 한 명씩 뽑아 열두 정탐꾼을 보냈으나 칼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은 모두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일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낙담해 버린 그들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칼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20세 이상 된 사람들은 카나안 땅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이 카나안 땅을 탐지했던 40일간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 동안 그들로 광야에서 방황하며 그들의 음란함을(믿음 없음은 영적 간음이다)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민 14:29-38).
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상대로 빈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없는 일들을 하루살이 같은 인간들에게 헛 말씀을 하셔야 할 근거가 무엇입니까? 누가 우상을 만들어 숭앙합니까? 성경의 하나님을 찾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 속에 하나님을 둘 수 없고, 하나님을 규명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성경 밖에서 신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은 빈부, 귀천, 교육의 유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똑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다고 하면서 성경을 믿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붙잡는 것이 종교인데, 성경의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지 못하면 모두가 다 실격자들이요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적하고 불평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으로 인해 하나님의 결심이 내려진 후에 이스라엘의 여정은 에돔 땅을 돌아서 호르 산으로부터 홍해의 길로 다시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의 길을, 그것도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간다는 것은 기가 차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가 아니라 그들이 쌓은 죄에 대한 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평한 그들에게 불뱀들을 풀어 놓아서 물리면 죽게 했던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는가?
II.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불변하십니다(7절).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뱀은 심판받은 죄를 상징합니다. 불뱀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선을 행했는지 악을 행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불평했던 사람들을 모두 같은 사람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롬 3:23).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땅 위에 한 명도 없느니라』(전 7:20).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 즉 아직 뱀에게 물리지 않은 사람들이 모세에게 와서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주와 당신을 거역하여 말함으로 죄를 지었나이다』(민 21:7). 그들은 그때서야 영적 권위에 대적하여 죄를 지은 것을 알았습니다. 영적 권위란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에게 그분의 일을 하게 하시려고 부여하신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남용하거나 비성경적으로 사용하고 죄에 연루되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십니다. 백성들은 그때 아주 진솔하고 순수했습니다. 모세에게 영적 권위가 있는 것을 알았고, 모세가 주님께 기도하면 주님께서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께 기도하여 뱀들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 처지에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치유책이 하나님께 있다는 소식은 희열이요 소망이며 복음입니다.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인간에게 진리를 제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행 4:12). 구원은 액세서리가 아니라 인간이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때 만일 모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 아니었다면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들도 그들의 발상과 고안으로 종교를 만들어 뱀에게 물려 죽게 된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다고 사기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면 죽어서 몸은 무덤에서 썩지만 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됩니다.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몸이 전부인 줄 알고 자기가 죽으면 시체를 화장해서 강에 뿌려 달라고 합니다.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만 혼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혼은 비물질이기 때문에 타지 않고 썩지도 않습니다. 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종교가 있고, 많은 종교들이 구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밝혀 놓으셨습니다.
이 짧고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은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죄 때문에 죽기에 죄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오류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인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흘려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속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는가?
III. 하나님의 처방(8,9절)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불뱀 한 마리를 만들어서 그것을 장대 위에 달아 놓으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 21:8). 당시 광야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불뱀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처방은 단순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3:14,15).
하나님께서 내리신 처방을 믿고 실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심했던 사람은 못 사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뱀 소동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죽어갔습니다. 그 중에서 누군가가 목청을 높여 "불뱀에 물리면 죽게 된다. 그러나 불뱀에게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저 장대에 걸려 있는 놋뱀을 쳐다보라! 그러면 살 수 있다!"고 외친 것입니다. 『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사 45:22). 매 시대마다 성경을 믿는 성도들이 나와서 죽어가는 독사의 자식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십자가에 매달려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라!" 여기서 인간의 의심이 작용하면 죽고, 믿고 실행하는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아주 순수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건방진 사람들은 "그런 것이 어디 있어?"라며 어리석다고 여겨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심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선택하신 것은 없는 것들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만들려 하심이라. 그리하여 아무 육체라도 그분의 면전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되리라』(고전 1:27-29). 정작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놋뱀은 성막과 관련이 없습니다. 헌신이나 예배, 제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종교행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놋뱀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주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그분을 믿고 영접함으로써 구원받았습니다. 세상이 어리석게 여겨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처방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허물과 죄들로 인해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거듭남으로 새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까?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처럼 살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몰랐을 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겪은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분께서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그 뱀이 되셔서 장대에 매달리셨던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하신 후에 실제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유사 기독교는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라고 가르치지 않고 대신에 자기들이 만든 교리나 전통, 은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그후에 이 놋뱀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 느후스탄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그 때에만 유효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히스키야 왕이 그 느후스탄을 산산조각 내어 버렸습니다(왕하 18:4).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이 되었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실행했건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뿐입니다. 인간은 다 죽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려면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소유해야 합니다. 복음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영생을 얻는 것이 너무 쉽기 때문에 믿으려 하지 않지만 이것이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 개개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보십시오. 믿으면 살 수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장난입니다. 인생을 장난하며 보내기에는 너무나 짧습니다. 멍청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BB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www.kjv1611.or.kr)와 인터넷 뉴스 바이블 파워(www.biblepower.co.kr)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송오 목사 설교 86 / 2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