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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대한 오해 [갈라디아서 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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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7월호>
목자로서 성도들에게 때로 실망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은 표류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보았을 때입니다. 믿음이 진리의 지식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표류합니다. 거듭난 성도라고 해서 성경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서 수년간 양육을 받고 신학교에서 정규교육까지 받았다면 적어도 교리의 핵심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특히 십자가에 대한 오해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심을 상기케 합니다. 내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물과 피를 흘리셨던 것을 상기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미신적으로 십자가를 대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십자가를 교회 안으로 가지고 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십자가의 참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았던 형틀이었습니다.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풀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를 씌워서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러서 피와 물을 다 쏟게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수세기 동안 그 십자가를 모독하고 있는데 교황들은 지팡이에다 십자가를 만들고, 목에다 장식용으로 걸고 다니며, 사제들은 나무십자가를 만들어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고 있습니다. 개신교회들은 교회의 상징으로 철탑 위에 십자가를 달고, 플라스틱 십자가로 간판을 만들어 불을 밝혀 놓기도 하고, 장례식장에서는 관의 덮개에도 십자가를 새겨 넣습니다. 교회 강대상에도, 벽에도 십자가를 붙이고 심지어는 반지나 목걸이를 만들어서 교인의 상징물로까지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병원, 적십자사, 녹십자, 군인묘지, 교회묘지, 공동묘지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동차 운전자들이 사고날까봐 두려워서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염주를 걸어놓고, 카톨릭 신자는 묵주를 걸어놓고, 개신교회 교인들은 십자가를 걸어놓는 것입니다. 미신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한 작태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그런 행위들을 한 자들을 멸시하게 했습니다.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교회의 상징은 그분의 피로 된 새 언약인 성경입니다(마 26:28). 피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십자가에서 흘린 피입니다.『감사를 드린 후 떼어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쪼개진 나의 몸이니 받아 먹으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으며 식후에도 이와 같이 잔을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나의 피로 된 새 언약이라. 이것을 행하여 너희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느니라』(고전 11:24,25). 어떤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잘 모르는 성도들까지도 마귀의 종들이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어 모독하는 것을 보고서, 특히 개신교회들이 교회나 사역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십자가를 혐오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가 노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것을 상기해야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모독해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갈 6:14). 십자가 위에서 완성해 놓으신 구원 계획을 믿음으로써 세상이 나에게 못박히고 나도 세상에 못박혔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십자가를 혐오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혐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면 그 십자가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이나 개신교회에서 믿는 그 장식용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박혀 피흘리셨던 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라
I. 십자가가 없었다면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갈 6:14).
모든 거짓말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옵니다(렘 17:9). 사람들은 서로 간에 약속하고 서원하며 맹세를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파기해 버립니다. 우리 나라는 고소사건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2004년에 47만 건, 2005년과 2006년에 각각 42만 건씩 있었는데 이는 일본의 150배나 됩니다. 인구 4천8백만 명인 우리 나라가 1억 2천만 명의 일본과 인구 비례로 보더라도 너무 많은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거짓 교회와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거짓말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간혹 거짓말을 했다 해도 즉시 후회하고 자백을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거짓말이 반으로 줄어들고 반에서 반으로 줄어들고 하여 마침내 거짓말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이 거짓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영위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피로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씻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목사들과 교인들은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의 양심이 깨끗하게 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무슨 수단으로 깨끗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외형적 종교행위로는 더럽혀지고 마비된 양심을 깨끗게 할 수도 없고 소생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은 성경을 대적하며 성경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도 구원받은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지도 않았고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지도 않았다면 나의 믿음의 생활은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십자가를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미신적인 십자가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라
II. 자기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아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롬 6:11,12).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기 몸 안에 또 하나의 자아가 생겨납니다. 이 사람을 속사람이라고 합니다(고후 4:16).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지고 속 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 반대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수가 없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의 몸은 선한 것을 좇지 않습니다. 이 몸을 개선하는 것은 교육이나 인간의 결심, 사랑, 또는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과 구원받았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육신을 따라 살면 모두 다 마귀의 종들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육만 많이 받으면 선한 인물이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제받지 못하면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기대에 못미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만일 그럴 수 있는 다른 방편이 있다면 제가 왜 크리스찬중고등학교를 세웠겠습니까? 밥존스대학을 설립한 밥존스 시니어는 “구원 없는 교육은 저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이기는 방법은 죄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죄에게는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말씀의 규제를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행동을 했다면 그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불명예스러운 말입니다. 그는 어떤 때는 구원을 의심했다가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을 좋아하면서 변덕을 부립니다. 그러나 로마서 6:6에 있는 대로 우리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단 1%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도 나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응답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어부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고 때로는 만선으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현대, 대우, 삼성 등은 기도를 하지 않아도 사업이 잘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했더니 헌금이 많아졌고 교인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거짓말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죄에게는 죽었다고 여기지 않는 한 십자가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고전 1:17,18).
이런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라
III.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갈 2:20).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침례식에서 “형제, 또는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받고 구원받은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어 그것을 재확인하고 재현하는 것입니다. 옛 몸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기쁘게 하고 만족시키려 했으나 부활한 몸은 성경의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수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본문처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진리를 터득한 사람에게만 권면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는 그 사람이 그때부터 사는 삶은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시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가고, 헌신하고, 심지어는 사역자가 되겠다고 주님 앞에 서원을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무수한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목사로 행세합니다. 그런 자들은 십자가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악세사리용 십자가는 혐오해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달리셨던 그 십자가를 혐오해서는 안 됩니다. 갈보리 산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는 반들반들 다듬어진 장식용 십자가가 아니라 거칠고 울퉁불퉁한 나무로 된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라
IV. 육신을 욕정과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입니다(갈 5:24).
교회사에서 A.D. 1200년부터 1500년대까지를 사데 교회 시대라고 합니다. 이 사데 교회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세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존 위클리프이고 그 다음에 존 후스 그리고 사보나롤라입니다. “사데”라는 말은 붉은 자란 뜻인데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준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던 기간입니다. 로마카톨릭은 사도신경을 외우고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무십자가를 무기로 삼았고 사제들은 손에 든 십자가로 마귀를 이긴다고 거짓되이 행했던 때였습니다.
사보나롤라는 이태리 플로렌스에서 거리설교를 했던 사람인데 종교의 자유와 성경을 사랑했다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교황 알렉산더 6세는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보다는 차라리 피로 얼룩진 모자를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존 위클리프, 존 후스(보헤미안), 사보나롤라 이 세 사람 때문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되고 주님께서 지신 그 질고와 고통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라
V.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고후 5:14,15).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 갈보리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유사 이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의 희생도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내주었고, 복음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자라 할지라도 주님이 이루신 인류의 구원에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몸이 다르고, 위치가 다르고, 성취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롬 5:8, 요 3:16).
이 세상은 허물과 죄들로 죽어 있습니다. 잘 살아도 고작 몇십 년 더 살면서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같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2초에 1명씩 죽습니다. 병원 영안실이 붐비고 조화장사가 호황을 누리며 묘지가 부족하고 화장터가 쉴 틈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권하고 있습니다.『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5).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알았으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 이제 곧 얼굴을 대면해야 할 만왕의 왕, 영원하신 하나님 그분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도 각기 구원받은 시기가 다르기에 믿음이나 지식, 섬김 등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사실에서는 동일합니다. 믿음과 교리의 핵심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게 됩니다.『나는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4:6).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온 것입니다.『그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화평을 이루고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그에 의하여 모든 것이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라』(골 1:20).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화해할 수 있는 이 길입니다. 이 점을 알았다면 십자가를 자랑할 것입니다.『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로 인하여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박히고 나도 세상에게 그러하니라』(갈 6:14). 미신적인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못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장난감으로 쓰고 있는 그 십자가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BB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www.kjv1611.or.kr)와 인터넷 신문 바이블 파워(www.biblepower.co.kr)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