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십자가의 원수들 [빌립보서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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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9월호>

십자가의 원수들이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의 자식들일 뿐이고, 그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시인하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성경을 믿지 않고 성경대로 실행하지 않는 교인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거부하고, 가짜 성경을 펴내서 팔아먹으며 돈을 버는 자들, 세상과 어울리며 정치판에 끼어들어 자기 이름을 내려는 자들, 그들이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누가 거짓 교리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교회로 불러들여, 자기 교단이나 교파의 종이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종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로마카톨릭이나 은사주의자들, 죽은 보수주의자들, 배교한 많은 이단 교회들은 이 점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교회만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처럼 자기 교단의 교리가 틀린 것을 알면서도 세뇌시키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또한 집사나 권사, 장로 등 제직을 주어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왜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을 판단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원수가 아닙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해서 구원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마귀의 자녀들이지만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 우리의 판단을 받을 위치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만일 형제라고 하는 어떤 자가 음행을 하는 자거나 탐욕하는 자거나 우상 숭배하는 자거나 욕설하는 자거나 술 취하는 자거나 약탈하는 자이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이라. 밖에 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겠느냐? 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나니 그러한 악한 사람은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고전 5:11-13).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셨을 때,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했고, 구원받았고, 이적들에 놀랐고, 말씀에 순종하고 따랐으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큰 소리치면서 아는 체했던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율법사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했을 뿐만 아니라 증오했고, 무시했으며, 말씀을 거부함으로써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도 아예 믿지 않았던 식구들은 진리에 대적하지 않지만, 어디에서 쓸데없는 것을 들었거나, 어떤 잘못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람은 진리에 즉시로 대적하며 거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잘 아시기 때문에 한 가정 안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가리켜 “사람의 원수들은 그의 가족 중에 있으리라”고 선을 그으셨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영적인 문제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와 서로 대적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의 원수들은 그의 가족 중에 있으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4-38). 십자가의 원수들로 사는 자들은 이 구절 앞에서 어떻게 행동합니까? 못 본 체하면서 건너뛰어 버리고, 숨기고, 감추고, 거짓말로 가르치고, 오리발 내밀고, 사람 숫자 자랑하고, 교회 건물 자랑하고, 교단을 자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의 원수들을 식별하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않으려면
Ⅰ. 너희는 모두 나를 따르고, 본으로 삼으라(17절).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고, 그가 주님을 위해 살고 행한 것을 본으로 삼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았기에 이처럼 자신있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세상의 학문, 유대교의 교리, 세상의 인정, 가치관을 배설물같이 여겼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빌 3:7,8). 오늘날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친다며 엉뚱한 교리를 내놓고 생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② 그는 그의 믿음, 섬김, 헌신을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기 원했고, 그 인정을 최고의 영예로 알았습니다(9절). ③ 그는 주님을 알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고난의 교제를 알아 주님의 죽으심의 본을 따르려 했습니다(10,11절). 특히 11절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려는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 드러내는 추악함이 무엇입니까? 어차피 늙거나 병으로 소진되어 버릴 육신을, 좀더 살려고 발버둥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 관해 말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부활의 확신 없이 교회에 다니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인지 아닌지 확실히 모르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십자가의 원수들 외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성경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체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려는 것이라』(11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약속하고 보증한 일입니까?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를 위해 애쓴 그의 삶의 목표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이르렀다 함도 아니요, 이미 온전해졌다 함도 아니라. 다만 나는 붙잡으려고 좇아갈 뿐이라. 나 역시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혀 있노라. 형제들아, 나는 내가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만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좇아갈 뿐이라』(12-14절).
사도 바울은 부활의 보증을 받고서도 마치 그 일을 자기가 결정하는 것인 양 자랑하지 않고 “다만 나는 붙잡으려고 좇아갈 뿐이라(12절), 나는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13절),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좇아갈 뿐이라(14절)”고 겸손하게 표명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는 동안에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7:14), 야이로의 딸(눅 8:54), 나사로(요 1:43)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죄인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눅 9:23).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가짜들입니다. 자신의 부활도 믿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부활을 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않으려면
Ⅱ. 십자가의 원수로 살면 그의 종말은 파멸이다(18,19절).
그리스도인들이 익숙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카톨릭 교황이나 사제들도 십자가를 목에 걸거나 손에 들고 다닙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아기 예수를 말합니다. 그들의 입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개신교회들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회 안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걸어 놓거나 그림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능력이심을 잘 알지 못합니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 전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만나 외에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자 모세에게 대적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셔서 대적한 자들을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잘못했다고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놋쇠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놓고,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게 하셨습니다(민 21:5-9). 우리는 다 죽을 죄인들로 태어났습니다. 싫어도 살려면 쳐다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라고 해도, 믿지 않고 자신의 직분만 믿고서 교회만 다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놋으로 만든 것은 모두가 심판을 말합니다. 놋대야, 놋제단, 놋뱀이 그 예입니다. 놋뱀은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므로 십자가는 교회의 장식물이나 상징이 아닙니다. 우리로 올려다보고 그 의미를 깨달아서 살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꼭 광야에서 장대에 매달린 놋뱀과 같습니다. 쳐다보기를 거부하면 그 누구라도 파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간들로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하는 삶의 동기를 제시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5). 이 구절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로 세상에, 세상으로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빗장이 되었습니다(갈 6:14). 십자가는 주님이 단번에 죄를 처리해 주신 것같이 우리로 죄에게는 죽은 것으로 여기라는 표식입니다(롬 6:10,11). 십자가는 우리의 옛 사람이 처형되었음을 알게 해주었습니다(롬 6:6). 이전에 세상에 살 때의 나쁜 습관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고후 5:17). 내 안에 있는 자아와 정욕과 욕정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갈 5:24; 6:14). 십자가는 마귀의 일들을 멸하게 하였습니다(요일 3: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제를 방해했던 모든 죄를 제거시켰습니다(요 1:29, 히 9:26).
사도 바울이 사역하는 동안 다루기 힘든 상대들은 유대교를 믿었던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죄인이 의롭게 되려면 믿음에다 율법에 복종하는 것을 뒤섞었고, 또 구원받았어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온전하게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오늘날 안식교인들만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는 알미니안주의자들도 다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새벽기도, 금요 철야 금식 등은 모두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믿음 없는 행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들의 종말은 파멸입니다. 받을 상이 없을 뿐 아니라 어쩌면 구원도 가짜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입니다. 다른 것은 하지 않고 먹는 것에 치중하며, 먹고살기 위해 주님의 일을 하는 체하는 자들입니다(롬 16:17,18). 그들은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본향을 동경하지 않으며, 땅의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영광은 수치 속에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않으려면
Ⅲ.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알고 살아야 한다(20,21절).
여기서 “시민권”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conversation”입니다. 하늘 시민의 생활 자세는 언어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마음가짐에서 나옵니다. 빌립보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지만 빌립보에서 태어난 사람은 로마 시민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늘 시민권을 갖게 됩니다. 하늘 시민권이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원수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막 8:36) 시민권은 중요합니다. 하늘 시민권이 없으면 부활이 없고 오는 세상에 대한 소망도 없습니다. 이 시민권은 이 땅에서는 알아 주지 않습니다. <나라 없는 사람, The Man Without a Country>이라는 옛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나라를 욕했다는 죄로 자기 나라 땅을 밟지 못한다는 형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살려면 배에서 살아야 했는데 그후 56년간을 배에서 배로 옮겨다니며 생활을 하다가 결국 바다에서 죽어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의 삶도 이와 같이 비참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십자가의 원수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한 사람은 하늘에 계신 주님을 시인한 것입니다.
지상에 살고 있는 “하늘 시민권자”는 주님의 재림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신실하게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의 일들을 기꺼이 수행합니다(눅 12:42-48). 아브라함은 비록 장막에 살면서도 오는 도성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지상의 보화를 버리고 하늘의 상을 바랐습니다. 왜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을 바라며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몸은 천하지만 주님을 뵙는 순간 영광의 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눈깜짝할 순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면 그때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1-54). 우리는 무가치한 세상 것에 너무 열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지식에 따라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교회만 다니는지 보십시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을 공부하고, 진리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 교회는 다녀도 거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살고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알고, 고난의 교제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단 한 가지 동기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제는 나도 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고후 5:15). 이 동기를 저버린 사람들은 모두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않고 있다면 얼마나 복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BB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www.kjv1611.or.kr)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송오 목사 설교 86 / 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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