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역설의 교훈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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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10월호>
고린도후서 4:8-15역설(Paradox)이란 사람이 수용해야 할 의견에 반대되는 제안을 말합니다. 얼핏 듣기에는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같이 들리지만, 그 안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에는 역설들이 많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사 55:8-11). 가뜩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설 앞에 서게 되면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깜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어쓰신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과, 거듭났어도 아직 믿음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깜깜하고 답답한 책입니다. 마치 말라 버린 사탕수수대를 씹고 있는 것과 같이 아무런 흥미도 없고 무익한 일로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도 않고, 성경을 믿을 수도 없는 자들이 설교자가 되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바로 그런 자들에게서 엉뚱하고 어리석은 짓들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자는 거짓 교리를, 어떤 자는 무당짓을, 어떤 자는 지난 주에 보았던 TV 드라마를, 어떤 자는 만담을 하게 됩니다. 그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8백만 명이 넘고, 그런 목사들이 12만 명이 넘으며, 그런 교회들이 6만 개가 넘습니다. 이것은 2008년 문화관광부 통계입니다.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게 보고하라 했다면 20%는 부풀렸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역설들이 담긴 성경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자세와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연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 아는 영적 세계의 실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보이는 것으로만 그 가치를 인정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주장하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의 의견과 같이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는 것들을 아는 체하며 교회를 운영합니다. 하지만 그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세월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깨닫는 것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성경을 통해 주님을 믿고 있으며, 성경 말씀이 기록된 대로 성취되고 실현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늘 낙원을 본 적이 없고, 지상의 천년왕국도 보지 않았지만, 그대로 실현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지녔기에 역설의 교훈을 이해할 수 있고, 믿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믿고 잠든 믿음의 선배들이 휴거 직전에 부활할 것도 확신하며, 우리도 잠들면 부활하리라고 확신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영”입니다. 믿음의 영을 지닌 사람들은 성경을 소중히 여기지만, 영이 없으면 성경을 무가치하게 여깁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현 세상을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그들은 그들의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역설의 교훈을 배우라
I.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8-10절).
우리는 사면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종이었다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바뀌면, 전에 마귀의 편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위치에서 입장이 바뀝니다. 전에 마귀의 진영에서 한패였던 자들이 모두 대적이 되기에, 그들에게서 날아오는 갖가지 불붙은 화살들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야 하는 고난이 있게 됩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박해라 하는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가정 안에서의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고난은 피할 수도 있지만 가족, 특히 부부간, 부자간, 모녀간, 형제간은 피할 수도 없습니다(마 10:34-39). 가장 친한 사람들 간에 믿음이 다르면 그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만든 갈등이 전쟁입니다. 이런 고난이 없으려면 가족 전체가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 함께 성장해야 하는데, 영적인 일에는 늘 마귀의 공격이 상존하게 되어 사람의 뜻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에 우리도 마귀의 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쉬 이해됩니다. 하지만 오래 걸리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한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요일 4: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때문에 십자가가 나오고, 피가 나오고, 죽음이 나옵니다. 모든 종교가 다 같은 종교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공격은 개인이나 가정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왕따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거기다가 모슬렘 국가들과 독재 국가들, 공산주의 국가들, 카톨릭 세계, 힌두교가 교회들을 박해해 오고 있습니다. A.D. 70년 이래 유대인들이 당한 극심한 박해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카톨릭이 그리스도인인 체했기에 모슬렘들이 그들을 대항했고, 오늘날 개신교회들에게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수단, 르완다, 동티모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모두 카톨릭이 그리스도인들로 오해되어 야기된 갈등들입니다. 종교가 전쟁으로, 종교가 국제정치화된 지 오래입니다.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여 개신교회들이 교회 통합 운동을 벌여, 영적인 문제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영적인 문제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런 통합 운동은 인간적 방법으로 마귀의 공격을 피해 보려는 수고일 뿐, 하나님의 계획은 아닙니다. 그런 행위는 오히려 진리를 말살시키려는 마귀의 책략입니다. 8,9절에서는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이 누구에게 해당됩니까? 교회로 돈 버는 자들입니까?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들은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헨리 조윗(Henry Jowett) 박사는 “대가 없는 사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헨리 마틴(Henry Martin)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재였습니다. 그는 인도, 이란, 서남아시아를 돌면서 힌두어, 페르시아어, 아람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당시 영국 대사도 거절한 일을 페르시아 왕에게 사정하여 성경 보급을 허락받았지만, 31세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은 미국 보스톤 출신으로, 버마(미얀마)에 가자마자 1년 6개월 동안 투옥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버마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오늘날 버마 교회들은 그의 후예들입니다. 인도에서 성경을 번역했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35년간 번역했던 성경 원고가 불타 버렸습니다. 그의 친구가 그에게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니, 다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스코필드(C.I. Scofield)는 두 번이나 그런 재앙을 당했습니다. 한 번은 원고가 불에 타고, 한 번은 30년간 작업했던 원고를 분실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순교자들의 피와 박해, 고통, 고독, 아픔, 슬픔으로 자라는 것이지, 거짓말, 탐욕, 개인의 욕망 실현, 진리를 흉내내는 것으로는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박해는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공격이 없는 사역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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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려고(11-13절)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면, 자신을 위한 섬김은 없었습니다(고전 9:4-6; 15:30-34, 고후 11:23-28). 사도 바울은 왜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를 우리들로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외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생명이 그의 육신에 나타나게 하는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전 생애는 예수님을 위해 받은 고난을 통해 그의 죽음, 즉 자아에 대한 죽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고전 15:31, 갈 2:20, 고후 5:15). 지난 1,900년 이상 많은 순교자들과 자아를 부정한 선교사들(허드슨 테일러, 윌리엄 캐리, 헨리 마틴, 저드슨, 고포드, 패이튼 등)과 신실한 설교자들의 신실한 믿음과 헌신들, 섬김들은 거의 사도 바울에게서 배운 것이며, 오늘날까지 이어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섬김도 성경대로 믿었던 사역자들로부터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았던 고난이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죄의 삶이나 호의호식, 죄의 세상으로부터 오는 칭찬은 그가 진리와 무관하게 살았다는 오명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잘 살았다는 것은 세상의 권세자들, 부자들, 유명인사와는 반대의 위치에서 반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은 누구이며, 생명을 내놓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믿음이 자랄 수 있겠으며, 목적을 이끄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면서 예수님을 전하려는 자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엉터리들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일하면서 받았던 고난이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물질의 풍요와 죄의 삶이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겠습니까? 진리와 무관하게 살았는데 고난이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그의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너희가 잠깐 고난을 받은 후에 너희를 온전케 하시고, 견고케 하시며, 힘을 주시고, 확고히 하시느니라. 그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벧전 5:10,11). 로마카톨릭이 무슨 박해를 받았습니까?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무슨 박해 받을 일을 했습니까?
12절에서는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나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우리의 새 생명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담이 에덴에서 지었던 죄에 대한 진노를 받지 않고 혼자 사시겠다고 거절하셨더라면, 그분 혼자만 살았을 것이고, 아무도 새 생명을 받아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모두 다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면서 교회나 다니려 한 사람들은 다 멸망하고 맙니다.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졌기에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 한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믿으므로 말하노라』(고후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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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겉 사람은 썩어져도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11-16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싫어하면 속 사람은 사라지고 겉 사람만 점점 비대해집니다. 주님은 늙어가고 병들고 죽게 될 겉 사람과 교제하거나 함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라 부르십니다(행 20:28). 주님께서 거듭난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성별하셨을 때 교단 교회로 성별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로 성별하십니다. 주님은 인간들이 세운 교회를 자신의 몸 된 교회라 부르지 않으십니다. 교단 교회들은 성별된 교회를 이단이라고 부르면서 교회협의회에 가입하면 정통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보이는 것들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 사역입니까? 이 세상을 잘 살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을 잘 살라는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음악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들이지만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영원히 사는 세상을 노래합니다.
성경의 역설들을 보십시오.
① 온유한 자가 땅을 유업으로 받습니다(마 5:5). 땅은 정복한 자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땅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땅은 그것을 “지으신 분”의 소유입니다.
② 원수에게 잘 대해 줌으로써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롬 12:20,21). 선으로 악을 이기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③ 다스리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막 10:45). 큰 자가 되려면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면 높아집니다(마 23:12).
④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평범한 진리).
⑤ 종이 됨으로써 자유롭게 됩니다(롬 6:17-22; 8:2).
⑥ 어리석게 됨으로써 현명하게 됩니다(고전 1:20,21)
⑦ 『영광과 오욕으로써 또 악평과 호평으로써 그리하였고 속이는 자들 같으나 진실하며,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으며, 매를 맞았으나 죽지 아니하였고,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느니라』(고후 6:8-10).
⑧ 약한 가운데 영광을 얻습니다(고후 12:5).
⑨ 패배함으로써 승리합니다(고후 12:7-9).
⑩ 약할 때 강합니다(고후 12:10).
영적인 면이 육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육체는 보물을 담는 질그릇입니다. 그릇은 튼튼하고 보기 좋은데, 담을 보물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겉은 그럴싸한데 사랑의 향기를 내뿜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의 인격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참다운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질병은 다 죄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사탄은 우리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줄 수 있습니다. 이름 모를 질병, 고난, 시련, 역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몸이 아프다는 것으로 섬김을 중단한다는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상대를 사랑할 수 있고, 부모를 섬길 수 있으면, 하나님도 섬길 수 있습니다. 사지(四肢)가 없는 사람이 교사가 되고(일본), 눈 없는 사람이 8년간의 노력 끝에 학위를 받고, 의족을 한 사람이 육상 400m 선수로 뛰고, 소경이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손이 없어 발로 그림을 그리고, 손발이 없으니 입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양손이 없는 사람이 발로 손목시계를 고칩니다. 수화로 복음을 전합니다.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곧 후회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생명을 전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는가 보십시오! 다만 방법을 신중하게 모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빈둥거리며 살게 되면 전도지도, 구령도 소홀히 합니다. 기도도, 선교 지원도, 교회 출석도 게을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외톨이로 빈둥거리다가 생을 마칩니다.
결론적으로
사도들과 주님의 신실한 일꾼들은 말씀의 능력을 알았기에 그들의 삶을 우리들에게 전수해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친구, 가족, 후대들에게 무엇을 전해 줄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선배들이 카톨릭 성직자들처럼 거드름 피우고 할 일 없이 살았더라면 우리들에게 무슨 교훈을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이 시대의 교단 교회나 은사주의자들처럼 쓸데없는 짓을 하고 살았다면 무슨 교훈을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역설은 깊은 뜻을 지닌 교훈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역설의 교훈을 배워 영적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BB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www.kjv1611.or.kr)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