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조국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임무 - 이송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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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7월호>
본문 / 로마서 13:1-8『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세자에게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를 거역함이니, 거역하는 그들은 스스로 저주를 받게 되리라. 이는 다스리는 자들은 선행에 대해 두려움이 되지 아니하고 악행에 대해서만 됨이니, 네가 권세자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기를 원하느냐? 선을 행하라. 그러면 그에게서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너에게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일꾼이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면 두려워하라. 이는 그가 헛되이 칼을 가지고 다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행하는 보응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반드시 복종해야 하나니, 진노 때문만이 아니라 양심 때문이기도 하니라. 이러한 연유로 너희가 세금을 내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바로 이 일에 전념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다하되, 국세를 낼 자에게 국세를 내고, 관세를 낼 자에게 관세를 내며,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어떤 빚도 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이룬 것이니라』(롬13:1-8).
세상에는 여러 경우의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 부모가 없는 고아, 경작할 농토가 없는 가난한 사람, 자식이 없는 무연고자, 집이 없이 떠도는 유랑자(거지)들... 이들 모두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들은 개인적인 처지와 형편이지만, 단순히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고통과 수모를 겪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가 없는 무국적자들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나라를 잃은 민족들을 보아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경우가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 민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별되어 가장 사랑받던 민족이었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몰랐기에 결국 B.C.721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로 잡혀갔고, 남왕국 유다는 B.C.606년에 바빌론으로 잡혀가 70년 간을 살아야 했다.
그런 환난을 겪으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씀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서도 그 분의 법을 철회함 없이 여전히 엄격히 다루셨다.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도 이들을 버리셨다. A.D.70년 이후 세계 도처에 산재해서 살았던 이들은 체류국에서 갖가지 수모와 약탈을 감수해야만 했을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에 의해 6백만 명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나라없는 설움은 이같이 뼈저린 것이다. 1948년 5월 14일 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의 예언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며 그 분의 자비와 능력으로 가능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자리잡자 이스라엘의 부재시에 땅을 차지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땅을 잃게 되었고, 정착할 땅을 차지하려는 그들과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에는 총성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평화 안에 합의함으로써 PLO도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역과 여리코에 최소한의 정착지를 할애받았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세우신 기구는 세 가지이다.
① 가정(창2:18-25)
② 국가정부(롬13:1)
③ 교회(행 2장)
이중에서도 교회는 특수한 기구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그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리스도인은 가정에도 충실해야 한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간증을 잃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 못하게 된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국가에 대하여 갖는 의무를 말해 주고 있다. 국가는 어머니의 품같은 곳이다. 우리 민족도 일제에게 36년 간이나 나라를 빼앗긴 쓰라린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이 국가를 지키려다 무참히 생명을 빼앗긴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있고, 6. 25같은 국가위기에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산화한 전몰 용사들이 있다. 국가를 지키는 일은 곧 자기 가족과 친척과 이웃을 지키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일반 국민이 갖는 국가법이 명시한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 외에도 자신의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로 인하여 더욱 열심히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종하고 거역해서는 안된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 이유는
① 하나님께서 그 국가를 세워주셨기 때문이다. 통치의 권세가 주어진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어떤 국가도 세워질 수 없다. 바빌론의 느부캇네살은 이점을 깨달은 왕이었다(단4:17,25,32).
② 통치의 권세를 부여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롬13:1-2). 통치권 행사에 있어 독재자의 죄까지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지혜를 받아야 되는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귀와 손잡고 악정을 펼침으로써 운명을 바꾸고 패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본다. 악정은 반드시 패망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역사가 증명해 주었다.
③ 국가의 법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정부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정부의 수립뿐만 아니라 전쟁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승리와 패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패망하면 그 민족은 승자의 노예가 된다. 노예가 되고 싶고 패망하고 싶은가? 그러면 전쟁을 일으켜도 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함으로써 의무를 다해야 한다(13:3,4). 하나님께서는 권세자들에게 칼을 주셨다. 체형은 창세기 9:5-6에서 제정된 후 아직 철회되지 않았다. 권세자에게 주어진 이 칼은 악에 대한 보응이다. 즉 불법, 부정, 죄악, 탈법 등을 다스리는 보응용 칼이다.
그리스도인이 준수해야 할 법은 하나님의 법이요, 세상 법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그것은 사랑의 법이다. 이 사랑의 법의 원칙은 포용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불의한 것은 수용하지 않는 것임을 세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고전13:6).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죄를 죄라고 지적하며, 악을 악이라고 외치고, 불법은 불법이라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이 선한 대상을 악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준법과 불법자를 한데 섞어서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분짓는 분이시지 아무것이나 한데 묶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분리시키는 분인 반면에 사탄은 한데 결합시키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교회통합운동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에 구속영장이 발부된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이 조계사와 명동성당으로 도피하여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노동운동을 했다. 노동운동은 가입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성된 합법기구인데, 왜 이들이 절이나 성당에 숨어들어 노동운동을 하는 것일까? 얼핏 보아도 떳떳하지 못한 행동 같다.
당국이 절과 성당 관계자들에게 여러번 그들을 내어달라고 신사적으로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들과 신부들이 무슨 특권이라도 있는 것처럼 매번 거절한 채 불법자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급기야 당국은 공권력을 투입하여 그들을 연행했다. 그런데 그 조치에 대하여 명동성당은 ‘대통령이 사과하라’, ‘장관을 파면시키라’고 주장하며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성소를 침탈당했다고 한다.
누가 법을 위반했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이것이 준법과 불법의 한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선과 악의 구별을 없애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와 불의 간의 선을 지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항하지 않는다.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도들은 그 정부가 신앙의 자유에 간섭하거나 박해하지 않는 한 반정부시위에 가담하지 않는다. 종교라는 명목하에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에 관여한 종교집단은 그들이 세속화된 세력으로 정치 세력 가운데 어떤 기득권을 얻어보려고 했고 그렇게 조성된 것이 바티칸 제국이 아닌가?
그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국가권력에 힘을 써 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사제평의회 같은 것을 만들어 제사보다는 젯밥에만 마음이 있는 그들의 저의를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콘스탄틴 이래 한번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본 적이 없다. 그 대신 천주(하나님이 아님)와 마리아를 섬기고 성경대로 설교한 적이 없다. 그들의 미사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세속화된) 발언으로 차 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처벌 때문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 의무를 다해야 한다(13:5-7). 사람이 처벌이 두려워서 자기 의무를 수행한다면 그것은 소극적인 자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양심을 거슬르지 않기 위하여 의무를 수행한다. 내가 준수해야 할 법이 나의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한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행24:16, 딤전1: 19; 3:9; 4:2).
우리 나라에서 세금을 가장 잘 내는 사람들은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다. 최근에는 전 산업은행 총재를 지냈던 노동부 장관이 대출의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다. 인천 북구청 세금횡령 공무원들이 있었고, 곳곳에서 세금비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는 데 속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경영에 직접 참여할 기회는 적지만 국민으로서의 의무는 성실히 수행한다는 자세가 우리의 원칙이다.
넷째,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 한다(13:7).
1. 그리스도인은 대통령과 집권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딤전2:1-2).
1) 선정을 베풀도록
2)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도록
3) 선한 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4) 공정한 법을 집행하도록
5) 우상과 돼지머리 앞에서 기우제를 지내지 않도록
2. 차리자들을 저주해서는 안된다(전10:20). 한 나라의 국민 중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신실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나라의 재산이요, 복인 것이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겠는가? 그 나라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보장받는다는 말과 같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많으면 자연히 범죄도 줄어들고, 파렴치한도 줄어들며, 교통사범도 줄어들게 되어 질서가 확립되며 의무와 책임을 이행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성경을 읽는 국민은 노예로 살지 않는다.”고 죠지 워싱톤은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국가에 의무를 다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법에 복정할 줄 아는 사람은 국가의 법을 쉽게 위반하지 않는 국민이다. 거기에다 우리는 사랑의 법을 따르고 있기에 법을 준수하는데 좀처럼 실패하지 않는다. 이는 신앙 따로 현실 따로인 비현실적 삶의 체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신앙의 양심을 따라 생활하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의 기틀 위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향기를 지녔기에 드러내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향기를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이웃에게 먼저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있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인격자임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벧후1:1- 1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