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참다운 회개 [요엘 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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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3월호>
유대인들의 달력은 우리의 음력과 같이 한 달을 30일로 계산하고, 새해가 시작되는 9월 27일을 로쉬 하사나(Rosh Hashanah)라고 부릅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이 우주를 운행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에 이를 알리기 위해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열흘 동안 자신들이 지은 죄들을 살펴보고 회개합니다. 이 일은 대속죄일인 욤 키프르(Yom Kipper)까지 이어집니다(레 23:23-32).그때 대제사장은 먼저 자기 죄를 회개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회개해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죄에 연루되어 있으면 백성의 죄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죄가 있으면 지성소에서 나올 수 없고, 또한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발에 끈을 묶어서 휘장 밖에서 사람들이 기다립니다. 죄사함을 받았으면 살아서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발에 묶은 끈은 죽은 시체를 끌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의복에는 석류와 황금 종들이 달려 있어서 종소리가 나면 백성들이 함성을 지르고 자신들의 죄가 용서된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 자체가 죄의 출처요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롬 3:23).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땅 위에 한 명도 없』다는(전 7:20)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려 하면 누구나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대개는 누구나 죄를 짓게 됩니다. 사람이 마귀의 종이 되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천국(천년왕국)을 수립하시려고 하셨을 때는 십자가 이전이기에 거듭남이 없었습니다. 그 육신적인 유대인들을 천국 백성으로 삼기 위해 가장 선행되는 조건은 회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침례인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시대의 경륜은 매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적인 통치 방법으로서 매 시대마다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노아에게 구원받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고, 노아에게는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이러한 경륜이 주어졌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회개란 마음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죄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하여 마음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 무지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니라』(행 17:30).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분명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요일 1:7-10). 구원받은 사람들은 회개를 통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이룩하신 구원 계획을 믿고 받아들이면 타고난 원죄를 씻게 됩니다. 거듭난 후에 지은 죄들은 자백하면 용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구원받을 때 한 번이면 됩니다. 구원받은 후에 지은 죄들에 대해서는 회개가 아니라 참회나 자백이나 뉘우쳤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죄의 짐을 가지고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회개했을 때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가져가셨고, 동시에 주님의 의를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를 짓고 자백하는 것의 반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질긴 고기를 먹듯이 말씀을 잘 먹고 성장하여서 주님과 교제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게 되면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고,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며 유업과 간증을 잃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믿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슬픔이 회개에 이르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고후 7:8-11).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입발림의 회개와 고백은 아무것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시인하지 않는 회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으로 회개를 대체하려 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개란
I.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는 것입니다(12절).
이 세상에서 가장 덜 떨어진 사람은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서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죄로부터 회개하지 않고 마음으로 덮어 버리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생애는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무조건 믿기만 하라고 들었기에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면서 새벽부터 교회로 밀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사들도 이 점을 모르기에 그들을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덮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친 사람들의 모임은 시체를 파묻은 무덤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교회를 세웠다면 그 교회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우리를 얼마나 싫어하겠습니까?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진리의 지식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형식적인 종교 행위는 형식적인 회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면서도 생활에 변화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진리의 지식을 알지도 못하면서 교회만 다니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 지식은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조금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구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까? 또한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목사님이냐고, 혹은 전도사님이냐고 묻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제대로 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교회 생활만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교회들의 목사들은 성경에 무지하기에 복음과 회개도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교회 성장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기 원하고, 경배하고, 교제하기 원한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나아가 성경적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참다운 회개란 마태복음 21:28,29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더니 큰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갔고, 작은아들은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것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이것을 뒤바꿔 써놓았습니다. 이런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고 먹고사는 자들이 12만 명이 넘습니다. 그들에게서 무슨 진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교회를 유지하는 길은 교인들을 무지하게 만들어서 굴종시키는 방법뿐입니다. 이 방법은 로마카톨릭이 1,600년 동안 성경을 고쳐가면서까지 써먹었던 방법입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개신교도 카톨릭 성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회개를 가르치며 회개의 의미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회개 없는 구원이 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란 마음의 변화를 받고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마음을 다한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참다운 회개란
Ⅱ.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13절).
구약 시대에는 옷을 찢는 것이 죄에 대한 슬픔의 표시였습니다. 옛날에는 옷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길쌈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계절에 따라 옷을 챙기는 일도 쉽지 않았기에 전장에서 적을 죽이면 옷을 벗겨 전리품으로 삼았습니다. 욥기에서는 옷이 없어 비가 오면 바위를 품는 광경이 나옵니다(욥 24:7,8). 그들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들은 감사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 그렇게 귀한 옷을 찢어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일이야말로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참회와 새로운 다짐을 위해 금식을 하기도 하고, 잠을 자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자세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로부터 회개하기 위해 금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너무 정욕적이고, 이기적이고, 육신적일 때,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해 자기의 계획마저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의존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형식적인 일들이 게재될 수 있음을 성경은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마 6:16-18). 마음에서 나온 뉘우침과 행위들, 옷을 찢거나 금식하거나 육신을 억제하기 위한 철야 같은 행위들이 다 회개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권면은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참된 금식은 어떤 규정을 정해 놓고 인간의 의지력을 시험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비통함을 깨닫고 뉘우치고 돌이키는 자신의 결의를 주님께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금식은 참된 회개의 표식이 될 수 있어 주님께 통회하는 마음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경고를 듣고 금식했던 아합왕이 여기에 해당됩니다(왕상 21:27-29). 이것은 그 어떤 죄인도 참다운 회개로 하나님께 자백하면 이를 받아 주신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찢는 그 모습이 참 회개의 모습입니다. 성도가 자신에게 회개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거나, 형식적인 회개만 있거나,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 무지할 것을 자청하거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을 본으로 삼으려 하거나, 그것도 믿음이 진리에 뿌리내리지 않은 사람들을 본으로 삼으려 했다면, 그의 마음의 밭은 잡초가 무성하게 되어 결국 씨를 뿌릴 수 없는 박토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밭은 하나님도 갈아주시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밭을 갈아서 은혜의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욜 1:10,11).
참다운 회개란
Ⅲ. 주님은 참 회개의 진모를 보기 원하십니다(13,14절).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간에게 계시하고 싶어하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경이를 찬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상의 존재들을 만드셨습니다(욥 38:7).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기에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불교, 힌두교, 모슬렘, 유교, 신도교에는 찬양이 없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찬양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곧 나니라.』고 모세를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고(출 3:14),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으며,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도록 계시하셨습니다(갈 1:11,12,15-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엄격한 분만이 아니고,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매우 인자하시며, 재앙에서 스스로 돌이키시는 분임을 회개하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알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출애굽기 34:7에서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신다는 점, 즉 모세가 알았던 그 점을 알았으며, 역대기하 33:19에서 므낫세가 앗시리아에게 사로잡혔는데 회개함으로써 풀려났음을 알게 하셨고, 요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알았으며(욘 2,3장), 역대기하 7:13-15을 통해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밤에 나타나시어 하셨던 말씀으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인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해주십니다. 그 어떤 일이라도 통회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면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모든 일에 유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피를 의지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만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영생을 보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생과 영원한 안녕을 걸고 확신을 주시는 그분이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유대교인이나 그리스도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누구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받아 주십니다(벧후 3:4-9). 자기는 공부를 많이 했다고 여기며,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자랑할는지 모르지만 이 점을 모르면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참 회개로 돌이키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죄는 회개하고 참회함으로써 깨끗하게 됩니다.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에 있느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않더냐?”고 물으신 후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가라.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요 8:1-11). 누가복음 17:3에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교회는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참다운 회개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절간에 다니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참다운 회개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1450년경 인쇄기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그(Johannes Gutenberg)입니다. 그는 인쇄기를 발명하여 성경을 인쇄했습니다. <구텐베르그 성경, Gutenberg Bible>이 나온 것입니다. 만일 그가 성경을 인쇄하지 않고 소설들만 찍어냈다면 그는 결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못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성경이 다량으로 보급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개인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희열이었고, 가보(家寶)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위대한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소설들이 많지만 그 안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구원이 없습니다. 성경은 회개를 제시하기에, 회개하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참다운 회개가 없으면 참다운 구원이 없습니다. 형식적인 회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형식적인 회개는 그 사람을 지옥으로 가게 합니다. 참다운 회개란 자신의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성경대로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개는 순수한 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드려지는 일입니다. BB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www.kjv1611.or.kr)와 인터넷 뉴스 바이블파워(www.biblepower.co.kr)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