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카인의 종교와 아벨의 믿음 - 이송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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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7월호>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았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말하기를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그녀가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으나 카인은 땅을 경작하는 자였더라. 시간이 흐른 후에 카인은 땅에서 나는 열매를 가져와서 주께 제물로 드렸고,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더라. 그러므로 카인이 몹시 격노하고 안색이 변하더라. 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격노하느냐? 어찌하여 네 안색이 변하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시니라.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과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이니라.』(창세기 4:1-8)


종교행위와 신앙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죄인의 구원과 관계없는 모든 종교행위는 그 의식과 제도, 율법이나 건물이 아무리 훌륭하고 오래되었을지라도 단지 인간의 발상에서 비롯된 하나의 종교일 따름입니다. 신앙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아무리 오래 숭앙해도 구원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교, 도교 등 구원이 없는 종교는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에 어긋나는 어떤 교단 교리도 구원과 비교해 보면 그 사람들이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여 강력한 주장을 편다고 해서 성경적인 교리인 양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그런 교리들을 수용한다는 것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양심에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교회사 전체를 통해서 피를 불러왔고 죽음과 박해를 불러왔습니다. 가짜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진리를 신봉하고 실행하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것입니다. 이 일은 지금도 직간접적으로 여러 곳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시대와 풍토와 내용과 사람들만 조금씩 다를 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신앙체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종교를 선호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들의 인간적인 기준으로 선호하는 종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소위 교회라는 곳들도 그들의 회중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낳기는 커녕 교단의 종들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배교로 치닫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지 못하면 그는 교회에는 다니지만 진리를 배우지 못한 종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카인의 방식을 따르는 자들은 야고보서 2:24,26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제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이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24절).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26절).
야고보서는 흩어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상으로 쓴 것입니다. 성경이 모두 진리라고 해서 모두 다 믿고 실행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서 2:24,26을 인용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카인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카인의 믿음과 카인의 행위입니다.

카인의 길이 왜 잘못된 것입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의롭게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의롭게 되려는 시도인 반면에 믿음은 자기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의를 얻는 것은 행위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이 구원계획을 만드신 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카인의 종교와 아벨의 믿음은 다릅니다.
이 대결구도는 태초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악의 씨와 약속의 씨는 어떻게 다르며 악의 씨와 약속의 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았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말하기를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그녀가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으나 카인은 땅을 경작하는 자였더라』(1,2절).
사람들은 막연히 생각할 때 카인을 낳고 한참 있다가 아벨을 낳은 것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녀가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쌍둥이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추측하지 않습니다.

이브는 카인을 낳았을 때 창세기 3:15에서 말한 “여자의 씨,” 즉 약속의 씨를 낳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카인같이 되지 말라. 그는 악한 자로부터 나왔으며 자기 아우를 살해하였으니, 무슨 연고로 그를 죽였겠느냐? 이는 그 자신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요일 3:12). 카인은 처음부터 뱀의 씨로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였습니다. 카인은 적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며 저주받은 씨였습니다. 악의 씨와 약속의 씨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영적 분별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영적 분별능력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속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 분별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악의 씨가 행한 일을 약속의 씨가 행한 것으로 착각하여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무섭지요? 무수한 사람들이 가고 있으니까 잘 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 은사주의자들을 따라가는 사람들만을 비평하지 말고 진리를 대적하면서도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하는 그런 사기꾼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을 교회라고 알고 있고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교에도 기독교와 같은 구원의 복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돼지 머리에도 무엇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구별이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카톨릭에 항거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교회 시작부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카톨릭에 항거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카톨릭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항거했습니다. 도덕적 영적 구별이 어려운 경우를 살펴보면 에서와 야곱(둘 다 아브라함의 자손), 사울과 다윗(기름 부음받은 이스라엘의 왕), 아론과 모세(금송아지를 만든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온 사람), 베드로와 바울(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한 사람), 물 뿌리는 자들과 침례 주는 사람, 무천년주의 혹은 후천년주의와 전천년주의 등이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근본주의자들과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사람을 데려다 놓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악의 씨들은 이런 구별을 없애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이런 구별들은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타협과 성별을 한번 보십시오. 교회통합 운동이나 뉴에이지 운동, 인종을 섞는 국제 결혼, 유전자 조작 등은 혼합과 타협의 작태입니다. 혼합 대 구별 이것이 종교 대 신앙을 구별짓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악과 선이 확연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부정과 긍정, 거짓과 참, 비진리와 진리, 음극과 양극이 있습니다. 이런 구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인간이 스스로 할 일입니다. 공자나 노자, 장자 같은 사람들은 중용을 주장합니다. 극단적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영적인 문제에서 극단적이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중용은 정지를 말합니다. 저울추가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과 선의 대결구도에서 중용은 기회주의이며 자기 선택권의 포기를 말합니다. 중립국이 많아지면 전쟁이 줄어듭니까? 중립국만 되면 세계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까? 중립국은 우세한 편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정치에서도 무소속은 비겁한 기회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중립은 불법과 불의가 강자가 될 때 비겁하게도 정의와 진리를 억압하는 편을 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악의 씨가 강하게 되면 약속의 씨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리와 양과의 싸움은 악과 선의 싸움입니다. 기독교계의 이리들은 모두 양의 가죽을 입고 복음과 진리를 흉내낼 뿐입니다.

악의 씨와 약속의 씨는 어떻게 다릅니까?
『시간이 흐른 후에 카인은 땅에서 나는 열매를 가져와서 주께 제물로 드렸고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더라. 그러므로 카인이 몹시 격노하고 안색이 변하더라.』
악의 씨와 약속의 씨는 경배의 방식이 다릅니다. 인간은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합니다. 특히 종교에 연루된 자들이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의 농간에 속아 넘어갔다고 상상을 한번 해 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쯤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을 것이며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들은 헌 신문지처럼 되어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악의 씨와 약속의 씨 사이에는 예물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카인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카인은 자기를 위해서 희생제물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규정한 그 방법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인 카인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할 때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을 좋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목자를 선호하셨다면 사람들은 농사를 버리고 목축으로 전업했을 것입니다. 물론 카인은 저주받은 땅을 경작했습니다. 그러나 땅을 경작해서 먹고 살라고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땅을 경작하는 것이나 산물을 내는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 방식대로 하나님 앞에 다가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점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면서 오해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은 땅의 산물이 하나님께 바칠 제물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사는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구원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카인의 길이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일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바라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은 야고보서 2:24,26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카인은 믿음과 행위에 입각해서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저주해 버렸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이미 카인은 하나님께 거부당했습니다. 제물이 다릅니다. 인간의 방식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종으로 자처하고 선교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첫배 새끼는 모두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태를 여는 모든 수컷은 전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렇습니다. 『너는 태를 여는 모든 것과 네가 소유하고 있는 짐승에게서 나온 첫배 새끼를 주께 따로 떼어놓을지니 그 수컷들은 주의 것이니라. 나귀의 모든 첫배 새끼는 네가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네가 그것을 대속하지 않으려면 너는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또 너의 자손 가운데서 사람의 모든 첫태생을 대속할지니라』(출 13:12,13). 하나님께 합당한 것으로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살진 것을 가져 왔다고 했습니다. 양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말합니다.

경배의 자세가 달랐습니다. 누가복음 18:13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의 자세를 봅니다. 이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드리러 오실 때 어떤 마음으로 오십니까? 적어도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올 수 있으며 나에게 경배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의 죄들을 가리기 위해서 양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은 후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 하시고 그들을 가려주기 위해 양을 죽이시고 가죽옷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양이 우리의 죄들을 덮기 위해서 죽었던 하나님의 어린 양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세리도 “저의 죄로 인해서 죽어야 마땅합니다만 저 대신 이 양을 받아주시고 저의 피 대신 이 양의 피를 받아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벨의 기도입니다. 이것이 아벨의 자세이고 이것이 헌신한 사람의 제사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운 것입니다(판 13:20, 왕상 18:38).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시기까지 아벨은 올바른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도 죄인됨을 알고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어린 양으로 이 땅에 보내어 갈보리에서 피흘려 죽게 만드신 그 사실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였더니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요 1:2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온전한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인의 제사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여, 여기 제가 최선을 다한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 제물을 마련하느라 얼마나 땀흘리고 애썼는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제가 최선을 다한 것을 알아주십시오. 하나님의 제사는 피를 요구하시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온유하시며 자비로우셔서 때로는 인간의 땀도 어린 양의 피처럼 여겨주실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묵묵부답이십니다. 잘못된 인간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방식을 치워버리고 인간의 최선을 높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고 인간의 의를 높이는 그것이 죄입니다.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가져와도 인간이 최선을 다한 것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방식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제물을 가져와야 하고 그 제물의 피를 가져와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행하심이지만 종교는 인간의 행위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치장해도 종교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세운 교회가 아무리 교회같이 보이려 해도 하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회들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카인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의 종교인 자기의 의로운 행위를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의로운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생활을 신뢰하는 그 어떤 인간에게도 구원의 확신을 주신 적도 없고 또 주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종교행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저주의 행위입니다. 차라리 그것은 안 하는 것만 못합니다.

영원의 관점으로 볼 때 그 종교라는 것은 살인, 전쟁, 술취함, 마약보다 더 나쁩니다. 술 마셨다고 해서 지옥에 갑니까? 안 갑니다. 요한계시록 21:8에 보면 믿지 않는 자는 살인을 안 해도 살인자와 똑같습니다. 명목상의 종교행위는 가증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지옥에 가는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제멋대로 드린 제사가 거절된 것을 알고 기분 나빠하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가가 여기 있습니다. 본문 창세기 4:6,7을 보십시오. 『주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격노하느냐? 어찌하여 네 안색이 변하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왜 기분 나빠하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면 왜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단순하고 간단한 것 같지만 의미심장합니다. 인간의 속 마음을 훤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누가 거짓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판별하시며 혼과 영을 가르시는 그분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카인에게는 드러난 행위는 없었지만 숨겨져 있는 자기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카인은 바쳐야 할 제물을 알면서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한 것입니다. 반역한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가 반역이었습니다. 큰 죄입니다. 여러분,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즉시 자백해야 합니다.
어떤 죄가 카인의 장막 문 앞에 엎드려 그를 지배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장막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몸은 장막이요, 성막입니다. 이 장막은 성소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혼과 영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거기에 죄가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카인의 마음은 진리를 향해서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할례받지 않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9:25부터 보십시오. 『보라, 주가 말하노라. 그 날들이 오면 내가 할례받은 모든 자들을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과 더불어 벌하리니 곧 이집트와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멀리 떨어진 변경에 사는 모든 자들과 광야에 사는 자들이니 이는 이 모든 민족들이 할례받지 아니하였으며, 또 이스라엘의 온 집도 마음에 할례받지 아니하였음이라』(렘 9:25,26). 형식적으로 또는 육신적으로는 할례받았을 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할례받지 않았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진리에 열려 있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가 좋고 나쁜지, 어떤 성경이 바르고 틀렸는지 알면서도 진리를 수용할 의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의사가 없고 진리를 받아들일 태세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장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인은 마음의 문제와 죄 문제를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너를 다스렸지만 너는 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너를 다스리게 하지말고 네가 죄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면 죄는 더 이상 문 앞에 엎드리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영생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인에게도 한번의 실수를 영원한 형벌로 처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전에는 죄가 우리를 다스렸지만 이제는 우리가 죄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카인에게 문제점이 무엇이며 해결점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알려 주셨으나 카인은 듣는 둥 마는 둥 해버리고 자기 동생을 죽여버렸습니다. 인간의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카인의 성품을 부인해야만이 참된 경배와 순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카인의 종교는 아벨의 신앙을 본받으려 하지 않고 박해하고 진멸시키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벨의 신앙을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카인의 종교를 가진 자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결코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 비슷한 것, 진리 비슷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이 지상에는 아벨의 흉내를 내는 껍데기들만 무성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두려움을 안다면 그분을 어떻게 기쁘시게 해야 하는가를 실행해야 할 터인데 그들은 그 중요한 부분을 배격해 버리고 그들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너희들의 신은 너희들의 배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카인의 후예들을 아벨의 신앙의 증거들을 없애기 위해 갖가지 박해들을 강구해 내면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벨의 신앙은 빼앗을 수도 없고 태워버릴 수도 없으며 죽여도 없애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다 보석입니다. 말씀의 거울에 여러분의 신앙을 비춰 보십시오. 하나님의 교회를 무시하고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카인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즉시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아벨의 신앙으로 꽉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 어디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어디서나 부인하지 않는 신앙으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송오 목사 설교 86 / 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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