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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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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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1월호>

“어떤 신학교가 좋은 신학교인가?”라고 물으면 성경을 잘 가르치는 신학교라고 대답한다. “어떤 신학교가 성경을 잘 가르치는가?”라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신학교이면 좋은 일꾼들을 배출하게 되고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신학교이면 가짜 일꾼을 배출해 내기 마련이다. 주님은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에게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눌 줄 알아야 한다고 권고하셨다(딤후2:15). 여기에서 오르또토메오(Orthotomeo)란 말은 정확히 짤라내는 것을 말한다. 만일 신학교가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교단 교리에 편향된 교리에 치중해 버리면 그 신학교는 쓸모없는 사람들만 양성해 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마태복음 25:31-46의 양과 염소의 구별은 지금까지 카톨릭 교회와 친카톨릭의 제도 교회들의 교리로 못박혀져 올바로 해석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음정과 가사가 틀린대도 많은 사람이 부르고 있다고 해서 바른 노래가 될 수 있을까? 사도행전 2장, 히브리서 6장, 10장, 마태복음 24장, 25장을 해석함에 있어 카톨릭 교회와 제도 교회의 교리로는 절대로 바른 해석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으며, 무천년주의자들과 후천년주의자들은 (그런 교회들이 주장한 교리지만) 바른 해석에 접근할 수 없음을 밝혀둔다.
하나님의 말씀을 빵이라고만 하지 않았다. 젖도 되고 사과도 되고 꿀도 되며 고기도 된다. 젖을 먹는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설익은 고기 덩이를 주게되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먹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 페이지에 계속 >
마태복음 25장
31 인자가 그의 영광 중에 오고, 또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그와 함께 오면 그 때에 그가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그 앞에 모든 민족을 모아 놓고 마치 목자가 양들을 염소들에서 갈라 놓듯이 그들을 따로 갈라 놓으리라.
33 그리하여 양들은 그의 오른편에, 염소들은 그의 왼편에 세워 두고
34 왕이 그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리니 ‘오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그 나라를 이어받으라.
35 이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으며,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도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대접하였고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혀 주었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문안해 주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도다.’ 하리라.
37 그 때에 의인들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여, 언제 우리가 주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실 때에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38 언제 우리가 주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대접해 드렸으며, 헐벗으셨을 때 입을 것을 드렸나이까?
39 언제 우리가 주께서 병드신 것을 보았으며, 또 감옥에 갇히셨을 때 찾아 뵈었나이까?’라고 하리라.
40 그러나 왕이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하리니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내 형제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하리라.
41 그 때에 왕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며
43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대접하지 아니하였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문안오지도 아니하였느니라.’ 하리라.
44 그 때에 그들도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여, 언제 우리가 주께서 굶주리신 것과 목마르신 것과 나그네 되신 것과 헐벗으신 것과 병드신 것과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돌보아 드리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하리니
45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들 중에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리라.
46 그러므로 이들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것이라. 그러나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리라.”고 하시더라.

첫째, 카톨릭 교회와 친카톨릭 교회들은 여기에서 “양”은 선행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 하고 “염소”는 선행이 없어 구원 못 받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양을 구원받은 사람으로, 염소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 단정하는 그들은 말씀을 올바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의 양은 이 시대의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둘째, 심판석인데, 이들 제도 교회들은 심판석을 마지막 백보좌 심판석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고 있다. 백보좌 심판은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 즉 지옥에서 올라온 구더기 모양을 한 추한 군상들이 공중에서 심판주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공중이기에 발을 딛고 설 곳이 없다. 지탱시켜 주는 분의 능력이 없으면 서 있지도 못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두 번 울게 되어 있다. 첫번째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섰을 때이다. 주님께 헌신하여 공적을 쌓은 사람들은 모두 상을 받는데 자기는 받을 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의 말로이다. 구원받으면 천국에 가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받고도 주님을 위해 어떤 일도 안한 사람과 구령하고 양육시키며 말씀을 보존하고 거짓 교리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은 사람들이 받을 상들이 없다는 것이다(휴거와 재림, 말씀보존학회, 1991. 참조). 이때 이들은 자기들의 믿음 없음과 주님을 위해 일하지 못했던 점을 후회하며 울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백보좌 심판석에서인데,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해 적어도 1000년간 지옥에서 고통받다가 처참한 모습으로 보좌 앞에 서 있을 때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 울지 않을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백보좌 심판석에는 책들이 펼쳐져 있다(계20:11,12). 그러나 여기 마태복음 25장에는 책들이 없다. 백보좌 심판석에 설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죽음에서 일으켜져 심판을 받게 되지만 여기에서는 민족들(nations)이 심판을 받는다. 백보좌 심판에서는 아무도 왕국을 유업으로 받지 않는다. 유업은 재림하시는 왕으로부터 받아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치리하는 것이다. 백보좌 심판에서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는가가 심판의 기준이 되며, 구원받지 못한자들의 죄들이 책 속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나 여기서는 누군가에게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을 죄로 다루고 있다. 여기에 등장한 양은 이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이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 받지(고전3:6-14), 백보좌 심판에서 심판 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의 구원받은 사람들은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기 때문이다(엡2:8-10; 요3:36, 5:24). 여기에서 의인들인 “양”들은 이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르키지 않는다. 이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들은 인자가 그의 영광 중에 올 때, 함께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이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다. 또한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기준이 왕의 형제들에 대한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누군가 이것을 이 시대에 직접적으로 적용을 시킨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갈1:8). 이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나그네를 돌보거나, 대접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이 때가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진 이후라는 것을 살핀다면, 의인들이 대접한 “왕의 형제들”은 환란 기간의 유대인임을 알 수 있다. 왕의 형제들에게 좋게 대우했던 자들과 그렇지 못했던 자들은 민족적으로 구분되게 된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구원과 멸망이 결정된다. 그러나, 현재의 구원은 결코 단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 개인 개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가능하다.
셋째, 염소들인데 카톨릭은 이 염소들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선행이 없었기에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 한다. 이들은 한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 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하신 반면, 이들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처럼 뭔가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평안과 안식을 향유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성령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지 않은 것을 실행하는 사람들 - 그것이 연옥이든 방언이든 세례든 그 무엇이든 그것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악한 영들의 역사이다. 이 점을 성도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마귀가 밤에만 눈에 불을 켜고 혀가 빨간 색으로 변하여 손톱을 길게 기르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가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처럼 가장하고 나오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알 방법이 없게 된다. 다만 한 가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은 한결같이 은혜의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인양 들고 나오며 세계 평화, 교회 연합, 사랑, 구제, 기도 같은 것을 들고 나온다. 마치 진짜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 재정 지원이야 말로 적의 세력들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들의 일차 목적은 성도의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요, 바른 성경 지식을 얻지 못하도록 혼미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싸우는 영적 전쟁은 대단히 치열한 전쟁인 것이다. 우유병을 들고 기저귀를 차고 다니면서 이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 양들은 유대인들을 친절하고 다정하게 보살핀 민족들인 반면 이 염소들은 유대인들을 학대하고 박해했던 민족들을 말한다. 즉, 로욜라(Loyola), 아퀴나스(Aq- uinas), 히틀러(Hitler), 스탈린(Stalin)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넷째, 형제란 단어이다. 카톨릭 교회와 제도 교회들은 이 형제를 아무나 해당된다고 한다. 이들이 복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거듭나게 해 주는 대신 구호사업을 벌인 것은 여기 마태복음 25장을 잘못 해석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봄으로써 구원받게 된단 말인가? 여기서 형제란 말은 양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양이 아무나 다 해당되겠는가? 예수님도 아무나 다 수용하지 않으셨다.(마10:25-27, 23:24-33; 요3:36, 8: 42-47, 16:1-3). 여기서는 살과 피를 나눈 유대인들을 말한다. 히브리서 2:12-17이 이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히브리서는 기본적으로 믿는 히브리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지 로마에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여기서 ”형제“란 단어를 잘못 해석하면 25장 전체의 해석은 엉망이 된다.
다섯째, 영광의 보좌이다(31절). 성경에서 이 영광의 보좌가 언급될 때면 언제나 지상에서의 다윗의 보좌를 말한다(마19:28; 눅1:30-33; 렘14:21; 시102:16). 이 영광의 보좌는 백보좌 심판석과는 다르다.
이 일은 주님의 지상재림 직후 이루어 진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민족들을 모아 놓고 유대인에게 선대했던 민족들과 천대했던 민족들로 나누시어 선대했던 민족들(양)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고전6:9; 갈5:21; 엡5:5; 골3:24) 천대했던 민족에게는 영원한 불로 벌을 주시는 것을 말한다(마 25:41,46).
미국에서는 교회 사역이 축복 속에 이루어지려면 유대인에게 잘해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기도 하다.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사람은 성경 어느 구절이 유대인에게 해당되고 안되는가를 구별할 줄 안다. 창세기 1장부터 출애굽기 19장까지는 양심을 통해 은혜가 적용되었으며, 출애굽기 20장에서 마태복음 26장까지는 율법을 통해 믿음과 행위가 적용되었고 마태복음 26장부터 사도행전 8장까지는 전환기, 즉 율법에서 은혜시대로 옮겨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8장에서 빌레몬서까지는 복음을 통해 믿음에서 믿음으로 은혜가 적용되는 시기이다. 히브리서에서 계시록 20장 까지는 복음과 율법을 통한 믿음과 행위가 적용되는 때이다.
이 나라는 성경을 잘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스스로 닫아버리고 있다. 그것은 곧 세대주의적 해석 방법의 배제(排除)이다. 이 나라에는 바르게 알고 있는 목사들과 학자들도 있으나 자신들의 배 때문에 입을 닫고 있을 뿐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