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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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물뿌리는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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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1월호>

[본 글은 월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제10호(1993. 1.)에 게재되었던 기사입니다.]

필자는 지난 학기에 어느 장로교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위해 수학하는 일단의 목사들에게 원문비평학을 강의하였다. 그들이 강의 중에 해오는 질문은 우리가 알아야 할 점들도 많았지만 필자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서 벗어난 것들을 성경과 대등한 권위로 인식하고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에 없는 것을 실행하는 것은 그것이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날조되었든 간에 한갓 전통이나 교단 교리이지 성경의 가르침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들을 지키라.』(요 14:15)고 하셨고, 바울도 고린도전서 14:37에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쓰는 글들이 주의 명령들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 성경은 단지 바울이, 모세가, 베드로가 쓴 글들이 아니라 모두 주님의 명령이다. 남도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의 사역은 참다운 주의 종의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사역으로는 신실한 하나님의 청지기로 인정받지 못한다. 말씀에서 벗어난 줄 알면서도 그리스도의 교리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마태복음 28:19,20을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위대한 위임 사항이라고 자인하며 전도와 선교를 외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에는 "침례를 주며"라고 하였는데 "세례"로 바꾸어 실행함으로써 바로 그 다음 말씀인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해 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신실한 주의 종으로 인정받고자 한다. 남들도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이다. 선교사를 파송하며 당부하는 말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며 등을 두드려 파송하는 교회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교회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성경의 변개는 반드시 삭제, 첨가, 오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역하는 것도 성경을 변개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생각대로 바꾸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라고 하는 가짜 학자들에 의하여 의역 성경들이 나와 강단에서 스스럼없이 성경으로 인용되고 있다. 자기가 성령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성경을 잘못 적용시킨 사람들이다.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은유적으로(allegorize) 해석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푸는 것인데도(Scripture with Scripture)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 인하여 아무에게도 공감 받지 못한 고고한 주석가의 위치를 혼자서만 지켜가는 것이다. 이들에 앞서 역사에서 오명이 지워지지 않는 선배들이 있었다. 필로, 오리겐, 요세푸스, 칼빈, 웨스트코트, 홀트, 틸리히, 바르트, 부르너 등 너무나 많다. 성경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한 단어 한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중 어느 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인가?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그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계시를 주시겠는가? 복음을 접하는 것이 무슨 대학입시를 치르는 것인가?(객관식 문항에서 정답을 찾는 것과 같이).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세례가 처음 실행된 것은 A.D. 251년인데 노바티안(Novatian)이라는 사람에 의해서였다(Novatians가 아님에 유의하라). 그가 몹시 아파서 곧 죽게 되었는데 콘스탄틴처럼 침례가 죄를 씻어 주는 것으로 알았던지 침례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너무 허약해서 물에 잠길 수가 없었으므로 병상에 누운 채 물을 흠뻑 부어서 침례를 대신하려고 했다. 이를 계기로 병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 뿌림으로써 침례를 대신하는 풍조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일명 "Clinic Baptism"(병상 침례)이라 했다. 유세비우스의 역사책을 인용해서 로마의 감독인 코넬리우스(Cornelius)도 이를 두고 사도들이 실행한 침례 의식에서 벗어난 것이라 했고, 네오세사레아(Neocesarea) 종교회의에서도 이를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물 뿌림이 분별력 없는 교회 지도자들에 의하여 분별없이 수용됨으로써 세월을 따라 오면서 성경에까지 침투되어 먼저 성경을 바꾸었고, 그 다음에는 마음 편하게 실행되었으며, 급기야는 밥티조( 밥티조.jpg, "잠긴다")가 란티조( 란티조.jpg, "뿌린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례와 침례 문제는 뿌리고 잠긴다는 의미 외에도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침례를 죄의 용서와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침례는 교회가 주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기념하는 두 가지 의식 중 하나이다. 그 둘은 침례식과 성찬식(눅 22:19, 고전 11:24,25)이다. 침례식은 자신의 영이 거듭나 자신의 혼이 구원을 받았을 때 자신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함께 묻혔으며,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모형으로 행하는 성도의 공개적 신앙고백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이것이 침례의 정의이다. 이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마치 무천년주의자나 후천년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종말론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의 80%를 덮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는 사람들이 마태복음 24장을 설렁설렁 지나쳐 버리는 것과 흡사하다. 성경 말씀에서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데 왜 하필이면 물 뿌리는 것을 지지하며 죄를 정결케 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가?

성경에는 일곱 가지의 침례가 있다. 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홍해를 건넜을 때(고전 10:1-5) ② 침례인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회개의 침례(마 3:11) ③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죽음(롬 6:1-3) ④ 베드로가 이스라엘에게 전한 침례(행 2:38) 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전한 침례(행 10:43-48) ⑥ 성령의 구원의 침례(고전 12:13, 엡 4:4,5) ⑦ 불침례, 즉 정죄의 침례(마 3:11). [한국의 방언하는 교회들에서 이 지옥 불침례를 달라고 손들고 외친다.]

침례는 교회의 두 가지 의식 중 하나이다. 위의 일곱 가지 침례에는 영적 침례의 의미가 더 많다. 침례교인들은 무조건 물에 잠기는 것만을 붙들고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침례는 구원받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오른편에 매달렸던 그 강도는 침례받지 않고서도 낙원에 있게 됨을 보장받았다. 필자는 미국에서 유학하는 중에 캘리포니아 치노(Chino California) 형무소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주님을 영접했던 1,300명의 죄수들에게는 침례를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들이 침례를 받지 않아서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병상에서 임종 직전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구원받고 죽은 것이다. 그에게 하필이면 물을 뿌려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 물을 뿌리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는 것인가? 그런데 왜 성경에도 없는 어설픈 행동을 하는 것일까?

둘째로, 그리스도의 교회처럼 침례를 죄사함의 수단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요한복음 3:3-6의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에서 물을 침례로 잘못 본 사람들이다. 여기서 물은 육체적인 출생을 말한다. 5절에서 "물과 성령"이라는 것을 6절에서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해석해 주기 때문이다. 창세기 1:20에서는 『물들은 생명이 있는 동물들[을]... 풍성히 내라.』고 한다. 즉 사람은 물을 통해서 첫 번째 출생을 하고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도행전 2:38에서 베드로가 말한 바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는 것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많은 성경 교사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했을 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역하고 십자가에 처형했던 유대인들이다. 할례받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지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아니다. 아직 바울 서신도 없고, 요한 서신도 없으며, 신약성경도 없고, 교회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베드로의 말은 다분히 유대인의 정결의식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이제 무엇을 주저하느뇨? 일어나서 침례를 받으라.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너의 죄들을 씻으라』(행 22:16). 이것은 구약 시대에 모든 유대인들이 물로 정켤케 했던 것인데 아나니아는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히 9:19, 요 2:6). 베드로는 이 점을 훗날 사도행전 10:43과 15:11에서 바르게 고쳐서 말했다.

이것은 마치 성령침례를 받으면 방언을 한다고 가르치는 순복음 교회나 마찬가지이다. 오순절 날 구원받은 3천 명 중에 방언을 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유대인 개종자들이 그때까지도 유대인의 법도를 지켰음(행 22:12)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른 교리서는 덮어 놓은 채 사도행전으로 교리를 삼기 때문에 교리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사도행전은 율법에서 은혜 시대로 옮겨 오는 전환기의 역사서이다. 사도행전 2장, 히브리서 6,10장, 마태복음 24,25장은 매우 험난한 교리적 함정이다. 특히 카톨릭식 해석 방법을 추종하는 에비온학파(Ebionites)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나 무천년주의, 후천년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제멋대로 춤을 추는 촌극을 재현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신앙고백을 위해서 침례에 순종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주님을 섬긴다고는 아니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침례를 구원의 수단이라고 해서 실행했다면 그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물을 뿌렸다면 그 세례받은 사람도 영락없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참다운 주님의 일꾼이라고 자처한다면 성경에도 없고 주님의 계명도 아닌 물 뿌리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물 뿌리는 목사, 그는 구원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성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위선자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많아도 세례를 지키려고 목숨을 버린 믿음의 선배는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두고 남도 하니까 나도 한다는 사람들을 두고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그분을 아노라." 하면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니,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2:4).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