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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심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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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4월호>
타락한 아담의 성품 속에도 종교심은 있다. 지진이 나면 무섭고, 번개가 번뜩이고 천둥소리가 크게 나면 불안하고,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나면 두려움을 느낀다. 전쟁이 곧 터질 것이라고 하면 살길을 찾으려고 궁리한다.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마음은 동물적 본능이다. 이런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려 하는 보호심리에서 종교심이 생겨났다. 다시 말해서 종교심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초자연적인 도움을 구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사람들이 종교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서려고 시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던 것을 우리는 카인의 제사에서 보았다. 카인도 나름대로 땀을 흘려 얻은 수확으로 정성스레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거부되었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더군다나 종교적인 열성이 곧 믿음인 양 착각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종하는 것이 희생제물보다 낫고, 경청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나이다.』(삼상15:22)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의중을 알 수 있다.
니코데모는 바리새인으로서 당시 유대교의 지도층에 있으면서도 이 점을 몰랐다. 그 역시 종교적인 열성만 가지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갖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신․구약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아니라도 율법과 계명을 준수하는 행위의 열성만 있으면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개심까지가 아니었고 단순히 계명에 대한 순종이었다. 죄를 지어 성막에 짐승을 가져온 죄인이 내적으로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는 인간이 구원을 받는 방법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과 전통에 익숙해 온 니코데모로서는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천국이 아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을 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나이까?』(요3:4) 하며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주님께 의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종교심에는 믿음, 열성, 자기 희생, 의무감 같은 것이 적든 많든 포함되어 있다. 우리 주위에는 선행을 하는 사람이 많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도 있고,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 옷을 주는 사람도 있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는 사람, 병든 사람을 간호해 주는 사람, 피를 뽑아 주고 심지어 자기의 신장이나 간을 떼어 주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에서 재직을 맡아 자기 임무에 충실하여 목사의 지시를 120% 실행하는 사람도 있다. 새벽기도에 몇 십 년 간 안 빠지고 다녔다는 사람도 있고, 유명한 부흥회란 부흥회는 다 찾아다닌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목사들을 위해 무료체육관을 개설해서 “하나님의 종”을 섬긴다는 사람도 있다.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선행을 해야 하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행위들이 반드시 믿음의 결과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위는 대부분 종교적인 열성인 것이다.
종교적인 열성과 믿음에는 차이가 있다. 종교적인 열성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권장할 일이지만, 믿음은 없으면서도 종교적인 열성만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기준에는 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어떤 교회의 목사가 자기 교회의 성도들에게 믿음은 세워주지 않으면서 종교적인 열성만 요구하여 그 기준에 얽매이게 한다면 그 목사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종교적인 열성은 사람의 권위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과 종교적인 열성을 가진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믿음이 없이 종교적인 열성만 가졌던 사람은 죽으면 지옥에 간다. 또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때 들림 받지 못하고 지상에 남게 된다.
성도가 거듭난 것은 종교적인 열성의 여부에 따라 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용서해 놓으셨다는 성경적 근거를 믿고 그 분을 자기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인정하는 또 한 사람, 즉 속사람이 들어있는 사람을 말한다(고후4:16, 롬7:22). 겉 사람은 비록 이 세상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접하고 살지만 속사람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계획을 이해하며 곧 오실 영광의 주님을 기다리고 그 분이 통치하실 천년왕국에 참여할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종교적인 열성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에 들지 못한 사람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는 스스로 칭찬하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요 주께서 칭찬하는 사람이 인정을 받기 때문이라.』(고후10:18)고 하셨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종교적인 열성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 없이도 종교적인 열성은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다.
첫째,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 나이 많은 한의사가 한 사람 있는데 그는 어느 장로교회의 장로직을 맡고 있으며, 잡지도 발간하고, 기드온에서도 활동하고, 각종 세미나에도 다니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그에게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지금 노력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내가 구원의 복음을 전해도 그는 자기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의 친구 중 80세 고령인 어느 고등학교 교장은 장로인데 그와 똑같은 말을 했다. 어느 날 나는 교장실에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둘째, 종교적인 열성만을 가진 사람은 헌신의 의미를 모르며 산다. 말로는 늘 “주님을 위하여”라고 하면서도 행동은 다르다. 배교한 자들이 즐겨 쓰는 말들은 “주님을 위하여, 기도 할께요, 사랑합니다, 주님 것인데요.”라는 말들이다. 카톨릭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서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했다고 기도했던 것을 아는가? 심지어 배교한 자들도 성경 구절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높이 존경을 받는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움이니라』(눅16:15).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는 표지에 “문공부선정 최우수잡지”라고 자랑하고 있다. 문공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믿는 곳인가? 그들은 히브리서가 레위기 다음에 있다고 해도 틀린지 맞는지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치르고 사신, 그 분의 몸의 지체들이다(고전6:19,20).
그리스도인이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해 주시지 않는다. 가령 그가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 때, 그 기도의 응답을 자기 목적을 위해 쓸텐데 응답해 주시겠는가? 하나님께서 안 해 주시는데 어떻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현대그룹의 정주영 씨에게 기도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라.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린 사람을 말한다(롬12:1,2).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헌신하지 않은 채 종교 생활을 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의도가 없는 사람이며 계획도 없는 사람이다.
셋째, 종교적인 열성만 가진 사람은 사람을 교회로 데려가는 데는 열성을 가질는지 모르지만, 구령한 적은 없는 사람이다. 사실 종교적인 열성만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구령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 극단적 칼빈주의를 가르치는 목사나 선교사, 신학생은 미끼 없는 낚시를 호수에 드리우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같다. 자기도 거듭나지 않았는데 남을 어떻게 주님께로 인도하겠는가? 이들은 전도와 구령의 구분을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잃어버린 영혼을 암흑의 권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나라로 인도하는 반면 교인들은 사람들을 단지 자기 교회로 데려온다. 전자는 구령이고 후자는 전도이다.
종교적인 열성을 가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찾아 믿으려 한다. 그래서 은사주의 집회, 축복기도원, 신유집회에만 흥미를 갖는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면 좋은 교회가 되고 덜 모이면 덜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음력 4월 8일날 조계사에 가 보라. 크리스마스 저녁에 명동성당에 가서 보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가? 큰 교회로 말하자면 로마의 바티칸에 있는 교회보다 더 큰 교회는 없을 것이다.
종교적인 열성 자체는 믿음이 아니며 신실함과도 관계가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난 후 말씀으로 무장하여 하나님께 어떤 방식으로든지 쓰임 받을 때 요구되는 것이 신실함이다. 이 신실함은 곧 주님께 드리는 충성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한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생의 목적이 된다.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목적이기도 했다(요17:4). 하나님은 그 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행하기를 원하신다.
종교적인 열성은 믿고 거듭난 후에 필요한 것이다.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열성만 있게 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