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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백발이 되어도 주의 능력을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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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1월호>
시편 71편은 구원받은 이후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진리를 위해 싸운 그리스도인이 가슴 깊이 묵상하며 읽을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두"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도록 주어진 것이기에(딤후 3:16,17), 비록 이 말씀을 읽는 성도가 젊은 나이일지라도 계속적인 섬김을 다짐하면서 읽을 수 있는 시편이기도 하다.『오 주여, 내가 주를 신뢰하나이다. 나로 결코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1절). 이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화자" 자신이 결코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라는 강렬한 호소이다. 치욕이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돌려지기를 기도하는 것인데, 이것은 본 시편 전체에 흐르는 화자의 바람이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에서, 불의한 자와 잔인한 자의 손에서 구하소서』(4절). 『오 하나님이여, 내게서 멀리 계시지 마소서. 오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혼을 대적하는 자들로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시고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비방과 치욕으로 덮이게 하소서』(12,13절). 『내 혀도 온종일 주의 의를 말하리니 이는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낭패를 당하였으며 그들이 수치를 당하였음이니이다』(24절).
주님을 "신뢰"하면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여러 페이지에서 메아리치는 당연한 진리이다(시 22:5; 31:1 등). 성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여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감춰진 수치스러운 일들을 버리고(고후 4:2) 의를 행함으로써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계 3:18). 또한 주님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 기꺼이 고난을 당할 줄도 알아야 한다(히 13:13).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그분 앞에서 두 가지 감정 중 하나를 갖게 될 것인데, 즉 "수치" 아니면 "담대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분 안에 거하라. 이는 그가 나타나실 때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며, 그가 오실 때 그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나는 주님 앞에 섰을 때 담대함을 가질 만한 삶을 현재 살고 있는 것인가?" 진정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면, 이 질문을 날마다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본 시편의 화자는 늙어서 머리가 허옇게 세었을 인물이다. 『늙은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고 내 기력이 쇠할 때에 나를 내버리지 마소서』(9절). 『이제 내가 늙고 백발이 된 후에도 오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18절). 이처럼 인생의 여로 끝에 다다른 화자는 "계속해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비록 늙었어도 "계속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계속해서' 의지할 굳건한 처소가 되어 주소서"(3절). "나의 소망이신 주님께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의지이셨고, 또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붙드시고 내 어머니의 배에서 꺼내신 분도 주님이시니 나는 '계속해서' 주님을 찬양할 것이니이다"(5,6절).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다 해도 나는 '계속해서' 소망을 지니고 더욱더 주님을 찬양할 것이니이다"(13,14절). "주님께서 나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기에 내가 지금까지 주님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으니, 이렇게 늙고 백발이 된 후에도 내가 주님의 능력을 이 세대에 전하고 주님의 권능을 장차 올 모든 사람에게 전할 때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17,18절). 그러면서 화자는 찬양이 가득한 탄성을 올려 드리기를 잊지 않는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심히 높으시니 주께서 위대한 역사들을 이루셨나이다. 오 하나님이여,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19절) "모태에서 백발까지" 전 생애를 훑어보니, 주님의 의는 심히 높고 주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들을 이루신 것이다. 이렇듯 아무도 비교될 자가 없으신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부디 나를 버리지 마시고 계속해서 내 굳건한 처소가 되어 주시라는 것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간절한 바람이다. 『내 입이 주의 의와 구원을 종일 전하리니 내가 그것을 헤아릴 수 없음이니이다. 내가 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리니 내가 주의 의, 곧 주의 의만을 선포하리이다』(15,16절).
성도의 인생에서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고 버림당하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다. 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있었다면 이런 아쉬움이야 그저 그치지 않는 야욕에 불과하겠지만, 그동안의 섬김의 목적이 주님을 향한 올바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점이 가장 슬픈 일이 된다. 바울이 자신을 강하게 억제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열망 때문이었다.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전 9:27). 우리는 바울이 결국 버림받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자기 몸을 쳐서 온전히 복종시킴으로써 믿음의 경주를 완주했던 것이다. 섬김에 대한 아쉬움은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여 드리고자 하는 "거룩한 야망"에 불타올랐던 성도들에게만 합당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음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야망만이 필요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고자 하는 야망! 살든지 죽든지 이 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게 하려는 야망! 오직 그것만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야망을 누가 갖고 있는지 주시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당신은 그분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내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그것을 구하시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요 8:50).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주시하신다. 당신에게는 이 거룩한 야망이 있는가? 지금껏 섬김의 자리에서 무엇을 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했는가, 아니면 남몰래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켰는가?
『내 원수들이 나에 대해 말하며 내 혼을 숨어 기다리는 자들이 함께 의논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으니 그를 쫓아가서 잡으라. 그를 구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하오니』(10,11절). 나이가 들어 백발이 되어도 성도의 영적 전쟁은 그치지 않는다. 칼렙은 백발임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보소서... 오늘에 내가 팔십오 세니이다. 나는 모세가 그 날 나를 보내었을 때처럼 오늘에도 여전히 강건하며 나의 힘이 그때처럼 지금도 강건하여 전쟁을 위하여 나가고 들어올 수 있나이다』(수 14:10,11). 마귀는 나이를 가리면서 공격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다고 한가로이 뒷짐이나 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섬김에 있어서 무자격자이다. 누구든지 정복을 당한 자는 정복한 자의 종이 되는 것이다(벧후 2:19). 영적 전쟁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경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엡 6:10,11).
불완전한 인간이 늙어서 백발이 되기까지 영적 전쟁을 치르다 보면 고난이 많아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고난은 주로 죄에서 기인하는데, 본 시편의 화자는 그 점에 관해서 위로를 구하고 있다. 『나에게 크고 쓰라린 고난을 보여 주신 주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며 땅의 깊은 곳에서 나를 다시 끌어올리시리이다. 주께서 나로 더욱 창대케 하시며 모든 면에서 나를 위로하시리이다』(20,21절). 화자는 다윗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밧세바와 간음한 죄와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죄로 인해 아들들인 암논의 죽음과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을 겪어야 했고, 인생 말년에는 백성을 계수한 죄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쓰러져 죽는 것을 쓰라리게 지켜봐야 했다. 그런 다윗은 죽은 뒤에 그의 혼이 『땅의 깊은 곳』인 지하 세계의 낙원으로 내려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 함께 끌어올려져 지금은 셋째 하늘의 낙원에서 안식하고 있다(마 27:51-53, 엡 4:8). 『주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며 땅의 깊은 곳에서 나를 다시 끌어올리시리이다.』 이제 다윗의 몸은 천년왕국 이전에 문자적으로 일어나서(겔 37:1-10) 왕국에 들어갈 것이며, 그곳에서 분열되지 않고 한 민족이 된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어(겔 37:22,24)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대한 복을 향유할 것이다. 『주께서 나로 더욱 창대케 하시며 모든 면에서 나를 위로하시리이다』(21절).
성도에게 크고 쓰라린 고난을 보여 주신 주님은 위로가 넘치는 분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라...』(고후 1:3,4). 고난과 위로에 관해서라면 단연 "욥"을 꼽을 수 있다. 욥은 가족과 재산, 심지어 건강까지도 모두 잃는 크고 쓰라린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 끝에 자신을 미워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자 주님은 그를 회복시키셨고 그의 후반을 처음보다 더 복 주셨다. 죽은 자녀들도 부활시키셨으며, 이후로 140년을 더 살면서 약 180세까지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사 대까지 보는 위로를 베푸신 것이다(욥 42:12-17).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크고 쓰라린 고난을 겪은 비운의 인물이다(룻 1:1-5). 여자의 바람은 남편에게 있고(창 3:16), 남편이 없으면 자식들의 봉양을 받는 법인데(딤전 5:16),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잃는 쓰디쓴 고난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을 벗어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온 성읍이 술렁이면서 "이 여인이 나오미냐?"라고 하자(룻 1:19), 나오미는 슬픈 얼굴로 이렇게 답변한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심히 모질게 대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주께서 나를 빈손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게 하셨도다. 주께서 나를 반대하여 증언하셨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셨는데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20,21절) "나오미"란 이름은 "즐겁다"라는 뜻이니, 고통스럽게 빈손으로 귀향한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마라"는 "쓰다"라는 뜻이므로, 크고 쓰라린 고난을 겪은 자신에게 "마라"가 어울린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녀를 위로하셨다. 며느리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손자 오벳을 태어나게 하시어 "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며느리"와 "그녀의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가 될 손자"를 얻게 하신 것이다(룻 4:14-17).
단맛을 보기 전에 쓴맛이 선행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이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마라의 쓴 물"을 지나서 "엘림의 열두 샘물"에 이른 것과 마찬가지이다(출 15:23-27). 고난의 물이 쓰다고 이스라엘처럼 불평하지 말라. 주님께서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간파하도록 하라. 성도의 인생에 우연이란 없으므로 당신에게도 "열두 샘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크고 쓰라린 고난 뒤에 더욱 창대케 될 것을 기대하며 기쁨의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 믿음이 있는 성도의 자세이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한 솔터리로 주를 찬양하리니, 곧 주의 진리를 찬양하리이다. 오 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여, 내가 하프로 주께 노래하리이다. 내가 주께 노래할 때에 내 입술이 심히 기뻐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혼도 기뻐하리이다. 내 혀도 온종일 주의 의를 말하리니 이는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낭패를 당하였으며 그들이 수치를 당하였음이니이다』(22-24절). 비록 늙고 백발이 되었어도 당신의 믿음만큼은 늙지 않게 하라!(고후 4:16)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