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시편묵상 분류

선한 목자와 그분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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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6월호>

표제가 “다윗의 시”로 된 시편 23편은 목자를 향해 부르는 양의 노래이다. 왕이 되기 전 양을 치던 목자였던 다윗은, 이제 주님의 양으로서 주님을 자신의 목자로 그리고 있다. 본 시편은 주님의 십자가를 묘사한 시편 22편에 이어, 십자가 이후 현 교회 시대에 자신이 구원한 양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를 노래한다. 시편 23편은 1) 양에게 풍성한 삶을 선물하시는 목자(1-3절), 2)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에서 동행하시는 목자(4절), 3) 원수들 앞에서의 여유와 양의 성별을 이루신 목자(5절), 4) 현재와 미래의 목자와 양의 관계(6절)로 구성되어 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1절). 주님께서 “나의 목자”시므로 주님은 “성도 각인의 목자”이시다. 양은 많아도 목자는 오직 한 분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뒤, 주님께서는 우리 각인의 목자가 되시어 한 사람 한 사람 인도하고 계신다. 우리는 한때 길 잃은 양들 같았으나 이제는 우리 『혼들의 목자와 감독』께로 돌아와 그분을 따르고 있다(벧전 2:25).
주님께서는 오직 양만의 목자이시고, 다른 짐승의 목자가 아니시다. 목자이신 주님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구주”로 믿고 거듭난 양의 목자이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요 10:11). 이 선한 목자의 양은 앞선 시편 22편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태어난 한 씨요 한 세대이다. 『한 씨가 그를 섬길 것이요, 그것이 주께 한 세대로 여겨지리라. 그들이 와서 태어날 한 백성을 위한 그의 의를 선포하리니 이는 그가 이것을 행하셨음이라』(시 22:30,31). 주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신 양은 이 세상에서 한없이 힘없는 존재이나 『태어날 한 백성을 위한 그의 의』를 사자처럼 담대히 선포한다. 그들이 따르는 목자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시자 『유다 지파의 사자』(계 5:5)이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못하고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는 온순하기 그지없는 양이지만(롬 12:21), 자신을 위해 피흘려 죽으신 목자의 의를 선포할 때에는 그 음성에서 사자의 포효가 들린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포효하는 양이다.
주님께서 양의 목자시므로 양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 목자의 양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다(고후 6:10). 모든 것을 가지신 분께서 목자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양에게 송두리째 주셨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목자께서는 그분의 풍요함에 따라 양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고(빌 4:19), 양이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채워 주실 수 있다(엡 3:20).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자. 이는 우리가 자비를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함이라』(히 4:16).
목자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먹이라.』(요 21:16)고 명령하셨다. 베드로는 『목자장』(벧전 5:4)이신 주님을 언급한 유일한 사도이다. 그는 요한복음 21:15-17에서 목자로서의 주님을 계시받았다. 그는 목자장, 곧 “목자들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역 교회의 목자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고 돌보라.”고 말한다(벧전 5:1,2). 『목자장』께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양인 우리는 우리를 돌봐줄 목자가 필요한 것이다. 곧 『양들의 큰 목자』(히 13:20)께 사명을 위임받은 작은 목자가 양에게는 필요하다. 주님의 양은 반드시 자신을 치고 돌봐줄 작은 목자의 지역 교회에 속해야 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2절). 목자께서 양을 인도하여 먹이시는 푸른 초장은 기름진 초장이다(겔 34:14). 결코 메마른 초장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며, 그분만이 알고 있는 푸르고 건강한 초장, 바라보기만 하여도 푸른 풀잎의 아삭함이 느껴지는 초장으로 인도하신다. 살아 있고 능력이 있는 말씀의 초장이 바로 그와 같은 초장이다(히 4:12).
양은 초장이나 잔잔한 물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팔레스타인 땅의 초장은 흔하지가 않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양은 반드시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초장에 이를 수 있다. 양은 초장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구상하거나 계획하지 않는다. 그럴 능력도 없다. 초장과 물을 찾는 것은 목자이지 양이 아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바로 그 초장만이 양이 먹고 쉴 수 있는 초장이다. 양은 그의 생애에서 목자가 인도하는 초장과 물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목자의 인도를 따르는 것만이 양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 15:5).
목자께서는 그분의 인도에 순종하며 따라온 양에게 쉼과 양분을 제공하신다. 양은 푸른 초장의 풀을 뜯어먹을 뿐만 아니라 목자의 보호 아래 그곳에 누워 안식한다. 목자께서 안내하신 잔잔한 물가는 양의 영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생수의 강이며(요 7:38), 그 잔잔한 은빛 물결이 양의 마음에 화평을 준다(롬 14:17). 목자를 따르는 양에게는 염려가 없다(빌 4:6, 벧전 5:7). 다만 목자께서 다시 어딘가에 있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다릴 뿐이다. 『주 안에서 쉬고 인내하며 그를 기다리라』(시 37:7).

『그가 내 혼을 소생시키시고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들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3절). 목자의 양인 “나”에게는 혼이 있다. 나의 혼은 나의 자아이다. 때로 “나”는 자기 앞서 걸어가시는 목자를 바라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곤 한다. 양은 시력이 좋지 않아 먼 곳을 보지 못한다. 그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은 눈 앞의 풀이 아닌 자신의 자아이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내 안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하지만 거기서 애써 희망을 찾으려 한다. 그럴 때 실망과 낙심과 슬픔 등 “나”를 억누르고 짓밟는 모든 것이 엄습한다. 그때 혼은 빛을 잃고 어두움이 된다. 목자의 음성은 들리지만 따라갈 힘이 없다. 그러면 목자께서는 양이 다시 목자를 바랄 수 있도록 다가와 “나”의 혼을 소생시키신다. 그분은 나의 혼의 감독이시기 때문이다(벧전 2:25). 혼의 문제를 다루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목자께서는 자아로 돌아간 혼을 소생시키시어 다시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양은 그러기 전에 먼저 한 음성에 복종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양의 혼을 소생시키시는 이유는 목자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들로 인도하시려 함이다. “그리스도”라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그 이름으로 불리는 “그리스도인”을 의의 길들로 인도하신다. 의의 길들은 양이 보기에 좋은 길이 아니라 목자가 보시기에 좋은 길이다. 목자가 보시기에 좋은 길은 말할 필요도 없이 십자가의 길이다. 양은 십자가의 길이 곧 자신의 본향에 가는 길이라고 노래한다. 이 세상에서 목자를 따라 의의 길들을 걷는다는 것은 본향에 이르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자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서 그분이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따라서 그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너무도 익숙한 길이기에 그분을 따라가면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목자께서는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계신다.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즉 양이 그의 생의 끝에 도달하는 곳은 도살장이다. 목자를 떠나 길을 잃고 들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한, 목자를 잘 따른 양은 결국 도살장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목자께서는 결코 잔인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그러한 결말을 맞으셨다. 그것은 양이 이 세상에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일일 뿐이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의 풍성한 삶으로 인도되는 오랜 여정이 끝나면 양은 피를 흘려야 할 곳에 이르게 된다.
양의 죽음으로, 목자는 그 털과 고기로 유익을 얻는다. 양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유익이 아닌 목자의 유익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의 것이라』(롬 14:8).

『정녕, 내가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요,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심이라』(4절). 양의 목자께서는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이미 통과하셨다. 목자께서는 자신의 양을 위해 그곳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선한 목자이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요 10:11). 선한 목자께서는 자신이 고난받고 죽으셨던 골짜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기에 그곳을 지나는 양을 안전하게 인도하실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히 4:15). 『그가 이 일에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느니라』(히 2:18).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에서 무덤들이 보일지라도 양은 죽음이 아닌 부활의 소망을 떠올린다. 설령 골짜기를 지나다 죽는다 해도 죽음이 주는 악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한 목자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나”는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분의 부활의 능력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
선한 목자의 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께서 함께 계시기에, 몸은 죽여도 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분만을 두려워한다(마 10:28). 『주는 나를 돕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히 13:6).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요,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심이라』(시 23:4). 선한 목자의 양은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목자께서 늘 함께 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막대기와 지팡이는 선한 목자께서 양을 보호하시는 도구이다. 인도하시는 초장에서 풀 뜯기를 거부하며 곁길로 빠지려 하는 위험천만한 양을 징계로 바로잡는 도구이다. 목자는 양을 후려치지 않고 부드럽게 두드려 바른 길로 인도한다. 선한 목자께서는 그분의 양을 자비롭게 다루신다.
『주의 막대기』는 『하나님의 막대기』(출 4:20)이며, 이것은 성경에서 사탄을 묘사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욥 9:34, 사 10:5-15, 애 3:1, 겔 21:13, 미 5:1). 주님께서는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려고 『사탄의 사자』(고후 12:7)를 사용하셨다. 욥의 경우가 보여 주듯, 그분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사탄을 사용하신다. 목적은 한 가지, 『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슬픈 것 같으나 후에 그로 인하여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주께서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 앞에 식탁을 마련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으로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시편은 갑자기 연회의 분위기로 바뀐다. 원수들이 눈 앞에 있는데 주님의 양에게 식탁이 마련되는 여유가 엿보인다. 선한 목자께서는 원수들의 면전에서 양 앞에 식탁을 마련해 주는 분이시다. 광야의 양이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마련하실 수 있겠느냐?』(시 78:19)고 물었지만, 주님은 사과(잠 25:11), 꿀(시 119:103), 고기(히 5:14), 젖(벧전 2:2), 빵(눅 4:4), 물(엡 5:26)로 양의 주린 배를 채워 주신다. 선한 목자의 양은 그 목자의 말씀으로 배를 채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마 4:4).
양이 원수들과 치르는 영적 전쟁은 다급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하나님이신 선한 목자를 온전히 신뢰함에서 오는 평안과 여유가 있다. 『보라, 내가 시온에 한 돌을 기초로 두었나니, 시험받은 돌이요, 귀한 모퉁잇돌이며, 단단한 기초라. 믿는 자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라』(사 28:16).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주께서 오늘 너희에게 보여 주실 주의 구원을 보라』(출 14:13). 선한 목자께서는 양을 원수들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시고 그의 발을 넓은 방에 세우신다(시 31:7,8). 원수들의 면전에 있는 연회실에서 양 앞에 식탁을 마련하는 분이시다. 힘없는 양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내 머리에 기름으로 부으시니』(5절). 목자께서는 제사장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그들을 성별시키듯, 그분의 양 또한 주님의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시켜 놓으신다. 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져(엡 1:6) 주님의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되었다. 기름이 상징하는(요일 2:20)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갔으며(고전 12:13), 그 뒤 성령님에 의해 인도를 받고 있다(롬 8:14). 성령님께서는 그분께서 구별시키신 성도를 위해 친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중보하신다(롬 8:26). 성령님께서는 성도를 충만히 채워 주신다(엡 5:18). 주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으니 은혜 위에 은혜니라』(요 1:16).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선한 목자의 은혜는 베풀고 또 베푸셔도 결코 고갈되지 않는, 넘치고 또 넘치는 은혜이다. 선한 목자의 양은 그분의 은혜를 받고 또 받는, 모든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산다(고후 9:8).

『진실로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6절). 선한 목자께서는 『선하심』과 『자비하심』이라는 두 목양견으로 양의 생애의 모든 날 동안 그를 인도하신다. 그래서 양의 마음은 늘 든든하다. 생활방식에 탐욕도 없다. 그를 인도하시는 목자께서 그를 결코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시기 때문이다(히 13:5). 『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주의 전』은 본 시편 기자인 다윗이 살던 시대에는 성막을 의미했다. 아직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었기에 성막을 『주의 전』이라고 불렀다(삼상 1:9). 『주의 전』은 예언적으로 천년왕국 성전에 대한 언급이다(겔 40-48장).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계 21:2)을 의미한다(요 14:2,3).
선한 목자의 양은 푸른 초장에 누워 꿈을 꾼다. 성경에 약속된 머나먼 저 새 예루살렘이 시력이 형편없는 양의 눈 앞을 지나간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 나오는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계 22:1)과 『그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와 그 강의 양편에』 있는 『생명 나무』도 지나간다(계 22:2). 저주가 다시는 없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그 도성, 『주 하나님』께서 그곳의 빛이시기에, 밤도 없고 촛불도 햇빛도 필요 없는 새 예루살렘이 지나간다. 이것이 선한 목자를 신뢰하며 그분의 음성(말씀)을 듣고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세상)를 통과하는 양이 꾸는 꿈이다. 선한 목자의 양은 원수들의 면전에서 떨지 않고 담대히 싸운 양에게 약속된 『그들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리라.』(계 22:5)는 약속을 날마다 초장에 누워 되새긴다. 그리고 오늘도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