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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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왕 주 예수 그리스도 (시편2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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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7월호>

“다윗의 시”가 표제인 시편 24편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다루는 22편과 교회 시대를 다루는 23편에 이어 “주님의 재림과 그분의 왕국 통치”를 다루고 있다. 즉 이 세 시편은 세대주의적 배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편 24편에서 주님의 재림은 천년왕국 통치자로서의 대관식으로 표현되며(7-10절), 본 시편은 1) 왕국의 통치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1,2절), 2) 주의 산에 오를 환란성도의 구원(3-6절), 3) 영광의 왕으로서 재림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7-10절)로 구성되어 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은 주의 것이요,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자들도 그러하도다』(1절). 본 시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다루는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게 첫 절부터 주님의 왕국 통치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통치는 주님의 지상 재림이 먼저 있고서 펼쳐질 일이다. 재림 뒤에 있을 통치를 재림보다 앞서 기록한 것에서, 주님의 통치에 대한 다윗의 넘치는 확신을 읽을 수 있다.
다윗만큼이나 주님의 왕국 통치를 간절히 바란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신약의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분께서 『자기 때가 되면』 나타나시어(딤전 6:15) 『모든 원수를 자기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통치하셔야』 한다고 기록했다(고전 15:25). 바울은 본 시편의 1절, 곧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은 주의 것이요』를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서신에서 인용했는데, 그때에는 주님의 통치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담은 것이 아니라 “먹는 것”과 관련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었다.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이라』(고전 10:25,26). 당시 고린도에서는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고기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우상들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아니』하기 때문에(고전 8:4),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에(고전 10:26)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결론이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우상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과시하며 우상의 전에 들어가 우상들에게 바쳐진 것들을 담대하게 먹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약한 양심을 가진 형제가 그런 모습을 보면 그의 양심에 상처를 받아 실족할 수 있으므로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사도 바울은 명령했다(고전 8:10-13).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고전 13:2). 많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나, 사랑은 적은 지식으로도 사람을 능히 세워 줄 수가 있다(고전 8:1).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도 영원히 지속되지만, 지식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끝나게 된다(고전 13:8,10).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지식”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 사랑이다(고전 13:13).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은 주의 것이요,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자들도 그러』할 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땅을 치리하실 왕이 되실 때이다. 그 날에는 『한 분 주』만이 계실 것이며, 그분의 이름 하나만이 있게 될 것이다(슼 14:9). 그 이름 하나는 바로 『예수』이다. 『예수』는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한 이름』이며,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신 그 이름 『예수』이다(빌 2:9,10).

『이는 그가 바다들 위에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큰 물들 위에 그것을 세우셨음이라』(2절). 이것은 노아의 홍수도, 창세기 1:9,10을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창 1:9,10). 하나님께서는 이때 땅의 기초를 놓지 않으셨다. 창세기의 이 구절에서는 물들 속에 잠겨 있던 땅이 물들이 물러가면서 드러났을 뿐이다. 노아의 홍수 때 땅이 물에 잠겼다가 드러난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바다들 “위에” 땅의 기초를 두시고 큰 물들 “위에” 땅을 세우신 때는 창세기 1:1의 원래의 창조 때이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1:1의 때에 이뤄진 일들을 다 알 수가 없다. 다만 땅이 그때 그 기초가 놓이고 지음받았다는 것과, 루시퍼의 반역으로 인해(사 14장, 겔 28장) 우주적인 대홍수의 심판이 있었으며(창 1:2, 벧후 3:6), 세월을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시작된 재창조의 때에 그 심판의 물에서 땅이 나왔다는 것뿐이다(창 1:9,10, 벧후 3:5).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 전에 일어난 일들을 다 알려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주님께서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오셔서 새로운 영원을 영원히 시작하시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분이 아니시다(눅 9:62). 피조물들의 죄로 인해 실패한 것을 회복하시어 앞으로의 영원을 준비하시는 생산적인 분이시다.
과거는 하나의 교훈으로 삼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성도의 생산적인 신앙이다. 실패한 과거에 매달리면 세상의 슬픔이므로 사망을 낳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 존재를 미워하며(욥 42:6) 주님께 투신하고 모든 것을 맡겨 드릴 때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이를 수 있다(고후 7:10). 그러면 주님 안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

『주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니 그는 헛된 것에 자기 혼을 들어올리지 아니하며 거짓되이 맹세하지 아니하였도다』(3,4절). 본문 3절의 『주의 산』은 천년왕국의 통치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세워지실 곳이다.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 왕을 세웠도다』(시 2:6). 3절의 『그의 거룩한 곳』은 시편 15:1에서 언급된 바로 그 『거룩한 산』이다. 『주여, 주의 장막에 누가 거하며 주의 거룩한 산에 누가 거하리이까?』(시 15:1)
본문 4절에는 대환란 때의 믿음과 행위로 받는 구원이 나타난다(계 14:12). 그때 『깨끗한 손』(행위)과 『순결한 마음』(믿음)을 지닌 환란성도들은 『헛된 것』, 곧 『짐승의 형상』(계 13:15)에게 혼의 소망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대다수의 유대인들과 달리 그 짐승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겠다고 맹세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대환란이 끝나고 천년왕국 때 『주의 산』에 올라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바로 이 유대인 환란성도들이다.
시편 24편과 마찬가지로 “주의 거룩한 산에 거할 자”를 노래하는 시편 15편 역시 그 산에 서기 위한 믿음과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노래한다. 『주여, 주의 장막에 누가 거하며 주의 거룩한 산에 누가 거하리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의를 실행하고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며 그 혀로 중상하지 아니하고 자기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는 사람이니이다. 그 눈에 부도덕한 자를 멸시하고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며 자신이 서원한 것은 손해를 입어도 바꾸지 않는 사람이니이다. 고리로 돈을 빌려 주지 아니하고 무죄한 사람을 대적하여 뇌물을 취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오니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는 결코 요동치 아니하리이다』(시 15:1-5). 따라서 시편 24:4과 시편 15:2-5은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는 환란성도들이 어떤 행위로 그들의 구원을 지켜내는가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행위로 구원을 받거나 유지하지 않더라도 그 행위에 있어서 환란성도들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해 주신 그 은혜가 그 어떤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혜보다도 크므로, 반드시 그 은혜에 걸맞는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먼저 성도 자신의 몸을 주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며(롬 12:1,2), 주님의 말씀들을 무겁게 여기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 무거운 것은 성도가 지켜야 할 말씀들이 아니라 그가 불필요하게 지고 가는 “죄들”이다(히 12:1, 요일 5:3). 환란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모두, 그것도 전무후무한 극심한 대재앙이 전 세계를 휩쓰는 대환란 때 끝까지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대환란 때에는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심히 기뻐하지 않는 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자신이 기뻐하지 않는 계명들을, 몹시도 견디기 힘든 가운데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계명들을 기뻐할 때 그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힘과 지구력이 생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지키기를 그들보다 더 기뻐해야 함이 마땅하다. 『주의 말씀들이 발견되었기에 내가 그것들을 먹었더니 주의 말씀이 내게는 내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오 만군의 주 하나님이여,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임이니이다』(렘 15:16).

『그는 주로부터 복을 받고 그의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받으리라. 이는 그를 찾는 자들의 세대니, 오 야곱이여, 네 얼굴을 찾는 자라. 셀라』(5,6절).
이것은 본문 3,4절의 유대인 환란성도가 대환란을 거치며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 이 구절은 대환란을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견뎌 낸 유대인 환란성도가 그들의 민족적인 죄악을 용서받고(사 40:1,2) 그의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받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주께서 우리의 의를 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주 우리의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자』(렘 51:10).
신약 교회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지만(롬 3:22), 대환란 때에는 믿음에 행위가 끝까지 뒤따라야 하나님께 의를 받을 수 있다. 그들에게 의를 주실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주 우리의 의』(렘 23:6)라고 불리신다.
『그를 찾는 자들의 세대』(6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세대인 유대인 환란성도들이다. 6절 끝의 『셀라』는 그것이 “재림” 문맥임을 보여 준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을 찾는 자들의 세대는 당연히 유대인 환란성도들이다.
『이는 그를 찾는 자들의 세대니, 오 야곱이여, 네 얼굴을 찾는 자라. 셀라』(6절). 6절은 『하나님』을 『야곱』으로 대체한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야곱을 언급하는 이중적 표현법이다. 천년왕국이 되면 하나님과 야곱(이스라엘)은 다시는 죄로 분리되지 않는(겔 11:19; 36:26), 남편과 아내로서의(사 54:5) 한 몸 된 영원하고 온전한 관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때에는 야곱(이스라엘)을 찾는 것이 『야곱의 하나님』(사 2:3)을 찾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 날들에 주의 전의 산이 산들의 정상에 세워질 것이요, 작은 산들 위에 높아지리니 모든 민족들이 그곳으로 몰려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자. 그리하면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며, 우리는 그의 길에서 행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임이라.” 하리라』(사 2:2,3).

『오 너희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영원한 문들아, 너희는 들어올려질지라. 그리하면 영광의 왕께서 들어오시리라』(7절). 다윗은 7절에 와서야 재림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왕국 통치를 기정된 사실로 못박은 것은, 왕국 수립에 앞서 있을 주님의 재림을 확실히 성취될 사건으로 못박은 것과 같다.
왕의 대관식을 위해 한 문을 통해 들어오시는 『영광의 왕』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재림하시는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동편 대문으로 들어가실 것이다. 『그의 발이 그 날에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서시리니』(슼 14:4). 『그 전망이 동쪽을 향한 대문 길을 통하여 주의 영광이 그 전으로 들어오더니』(겔 43:4). 『영광의 왕』께서는 초림 때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셨고, 그날 밤 예루살렘 동편 케드론(키드론) 시내를 건너 그곳 동산에 계실 때 횃불과 무기를 든 무리들에게 붙잡히셨다(요 18:1-12). 그날 예루살렘 동편 대문으로 나가셨던 주님께서는 이제 재림 때 그 동편 대문을 통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것이다. 올리브 산을 떠나(슼 14:1-6) 케드론 시내를 다시 건너(요 18:1)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것이다.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가셨던(슼 9:9, 창 49:11) 그 길을, 재림 때에는 “흰 말”(유니콘)을 타고 가실 것이다(계 19:11; 14:19,20). 그때 주님의 옷은 주님을 대적한 죄인들의 피로 흠뻑 젖어 있을 것이다(사 63:1-6, 계 14:19,20).
이분이 바로 창세기 49:10,11에서 “어린 나귀를 타신” 초림과 “피로 흠뻑 젖으실” 재림이 동시에 예언되신 “실로”이시다.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실로가 오실 때까지 입법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의 모임이 있을지어다. 그의 어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고 그의 나귀 새끼를 선별한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옷들을 포도주로 빨고 그의 의복을 포도의 피로 빨았도다』(창 49:10,11).
『이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강하고 능력 있으신 주시며 전쟁에 능력 있으신 주시로다』(8절). 8절은 『전사』(출 15:3)이신 주님께서 『영광의 왕』 곧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로서 재림하실 때 치르실 아마겟돈 전쟁을 보여 준다.

『오 너희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영원한 문들아, 그것들을 들라. 그리하면 영광의 왕께서 들어오시리라』(9절). 『영광의 왕』께서 들어오실 이 영원한 문은 예루살렘 동편 대문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문”이다.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계 4:1). 이 하늘의 문은 『영광의 왕』께서 십자가로 마귀와 그의 권세를 굴복시키신 후 승천하시면서, 승리하신 분답게 지하 세계의 낙원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엡 4:8) 셋째 하늘로 데리고 들어가신 그 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 하늘의 문을 통해 휴거되었다. 교회의 예표인 그가 그 문을 통해 올라갔듯이, 교회는 그 문을 통해 휴거될 것이다(살전 4:16,17).

『이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만군의 주시니 그는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10절). 재림하시는 『영광의 왕』께서는 홀로 오시지 않는다. 그분께 기대어 오는 한 여인이 있다. 『사랑하는 자에게 기대어 광야에서 올라오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솔 8:5) 『영광의 왕』께서는 『어린양의 혼인식』(계 19:7)을 마치고 그분의 아내 된 신부와 함께 내려오신다. 천년의 밀월(蜜月)을 보내기 위해 지상에 내려오는 그들은 천상의 혼인식 향내가 채 가시지도 않았다. 『연기 기둥과도 같이, 몰약과 유향과 상인들의 모든 향료로 향내를 내며, 광야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솔 3:6)
옷에서 『상아 궁전에서 나온 몰약과 알로에와 계피의 향내가 나』는(시 45:8) 분께 기대어 오는 여인은 그분께서 약 2천 년 전 땅에 계실 때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이다(행 20:28). 그녀는 비록 여인이지만 『깃발들을 든 군대처럼 위엄이 있』다(솔 6:4,10).
신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하늘의 군대가 되어 내려올 그분의 신부에게 지금 이 순간 “많은 물로도 끌 수 없고 큰 물로도 잠기게 할 수 없는” “죽음처럼 강한” 사랑을 요구하신다. “신랑”에게 기대어 올 그 “신부”에게 『네 마음에 인장처럼, 네 팔 위에 인장처럼 나를 새기라.』고 말씀하신다(솔 8:6,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주님을 마음에 새긴 인장처럼 마음으로부터 사랑해야 하며, 또 팔에 새긴 인장처럼 그 사랑을 외적으로 힘을 다해 표현해야 한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니라』(막 12:30). 이것이 자신의 칼을 자신의 영광과 위엄과 함께 불타는 놋쇠 기둥 같은 넓적다리에 차고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분의 신부인 교회의 자세이다. 『오 지극히 능하신 분이여, 당신의 칼을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위엄과 더불어 당신의 넓적다리에 차소서. 진리와 온유와 공의로 인하여 당신의 위엄으로 승자와 같이 타고 나가소서. 왕의 오른손이 두려운 일들을 왕께 가르치리이다.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들의 심장을 뚫으니 백성이 왕 아래 엎드러지나이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무궁하며 주의 왕국의 홀은 의로운 홀이니이다』(시 45:3-6). BB